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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나다 침공 / 긴급 분노 작전 United States invasion of Grenada La invasión de Grenada (Operation Urgent Fury) | ||
기간 | ||
1983년 10월 25일~29일 | ||
장소 | ||
그레나다 전역 | ||
원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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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 ||
미국의 승리 쿠바군의 그레나다 철군 그레나다 인민 정부의 붕괴 | ||
병력 | ||
미군 7300명 동카리브 연합군 353명 | 그레나다군 1200명 쿠바인/군 784명 소련, 동독, 불가리아, 리비아 군사고문단 83명 | |
피해규모 | ||
미군 19명 전사 116명 부상 | 그레나다군 45명 전사 358명 부상 쿠바군 24명 전사 59명 부상 638명 포로 소련군 2명 포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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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United States invasion of Grenada (영어)La invasión de Grenada (스페인어)
1983년 10월 25일부터 12월 15일까지 벌어진 쿠바, 그레나다와 미국, CPF(Caribbean Peace Force, 카리브해 평화 유지군) 동맹군간의 전쟁.
2. 침공의 배경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던 카리브 해의 소국가인 그레나다는 1974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이후 그레나다의 수상이 된 에릭 게리 경(Sir Eric Matthew Gairy, 1922~1997)은 갱과 비밀경찰을 동원하여 잔혹한 독재 정치를 펼쳤다. 이 과정에서 외국 자본과의 유착이 있었기에 실업율과 빈곤율이 상승하면서 대중의 불만은 높아져만 갔다.이런 불만이 가중되던 와중에 1979년 자유와 복지, 교육 등을 외치며 일어난 신보석운동(New Jewel Movement)을 중심으로 한 무력 쿠데타가 일어나 게리의 독재정권은 비밀경찰과 군, 갱단과 함께 무너졌고 신보석운동을 이끌었던 모리스 비숍이 새 수상으로 취임하여 그레나다 인민 혁명정부를 수립했다. 그레나다 인민 혁명정부는 헌법을 정지시키고 의회를 해산하며 영국식 민주주의를 비난하고 상공회의소 건립과 복지, 교육, 관광산업 등을 추진하면서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근대화 사업에 착수했다.
주변 지역의 서인도 제도 연합주(WIAS)는 혁명을 위법이라고 보고 그레나다 인민 혁명정부를 승인하지 않기로 결의했으나 실질적으로 승인하지 않은 국가들은 독립국이었던 도미니카와 세인트 루시아 두 국가뿐이었다. 그러나 1980년 그레나다 인민 혁명정부가 가이아나의 포브스 버넘 정부를 비난하는 등 가이아나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자메이카에서도 좌파 정권이 전복되는 등 그레나다는 점점 고립되어 갔다.
이렇게 고립되던 와중에 그레나다는 공산권에 접근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UN의 비난 결의안에 쿠바와 함께 반대하고 혁명정부 성립 직후부터 쿠바를 비롯한 공산권 국가에게 군사원조도 받는 등 적극적인 친소, 친공산권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는 제2의 쿠바화를 걱정하던 미국과 공산주의와의 대립 노선을 명확히 하던 로널드 레이건 정부의 정책과 맞물려 그레나다에 대한 강경책의 원인이 되었고 1980년 11월 미국은 카리브 개발은행에 원조하지만 그레나다에 대해서만은 원조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조치는 그레나다와 카리브 해 각국의 반발을 초래했고 카리브 해 국가들은 그레나다와 공존하겠다는 의지로 결속했다.
1981년 서인도 제도 연합주가 동카리브해 국가기구(OECS)로 발전하면서 그레나다도 그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그레나다의 인접국들은 그레나다 인민 혁명정부에 대한 불신감을 버리지 못했고 따로 동카리브 안전 보장기구(ECSS)를 만들었다. 이 동카리브 안전 보장기구는 기존의 동카리브 국가기구에서 그레나다, 세인트 키츠 네비스, 영국령 몬트세랫이 빠지고 바베이도스를 더한 지역 안전 보장 시스템으로 그레나다의 인민 혁명정부를 경계하기 위해 새로이 창립된 기구였다. 그레나다는 이를 의식하여 소련과 쿠바를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과 군사 협정을 체결하고 군사고문을 들여오는 등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그레나다의 행동과 3000여명의 그레나다 인민군은 동카리브에서는 충분한 위협이었다.
1983년 3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그레나다의 군사기지화를 비난했다. 3월 23일에는 그레나다에 대규모의 공항이 건설되는 것을 파악하고 이를 소련의 군사기지라고 주장하며 비난했다. 또 같은 시기 OECS와 미 해군의 군함이 바베이도스 군항에서 출항하여 그레나다 해역에서 무력시위를 벌이고 그레나다 침공을 가정한 군사훈련을 푸에르토 리코에서 진행하는 등 군사적 압박을 강화했다.
1983년 10월 13일 모리스 비숍 그레나다 인민 혁명정부 수상이 급진적 레닌주의자였던 버나드 코드 부수상을 지지하던 허드슨 오스틴 혁명정부 인민군 사령관에 의해 감금당했다. 미국은 10월 15일 비숍 수상의 구출을 바베이도스 정부에 의뢰했지만, 19일 비숍 수상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내전이 발생하여 그 와중에 도주하던 비숍 수상과 각료들이 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버나드 코드 부수상과 허드슨 오스틴 사령관은 혁명군사 평의회 정부를 수립하고 폴 스쿤 그레나다 총독을 투옥하며 계엄령을 선포했다. 20일에는 미국 정부의 조지 H. W. 부시 부통령을 필두로 한 특별상황팀이 편성되어 그레나다 침공계획을 수립해 레이건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레이건 대통령도 이를 승인하면서 미군은 그레나다에 대한 본격적인 침공 준비에 돌입했다.
10월 21일, 바베이도스에서 그레나다를 제외한 OECS 회원국과 바베이도스 정부간의 긴급 회동이 이루어져 자메이카와 미국을 초청해 그레나다를 침공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회의에서 <OECS 조약 8조에 기인한 적절한 조치>를 이유로 폴 스쿤 그레나다 총독의 석방과 총독의 지휘, 감독 아래 민주적인 선거 개최를 그레나다 군사정부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는 거의 '우리 말 안들으면 침공할 거니까 알아서 잘 기어라.' 수준의 협박이었고 국제사회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날 그레나다에서는 계엄령이 해제되었고 24일에는 대다수의 상점과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다.
한편 22일부터 23일에 걸쳐 열린 카리브 공동체의 긴급회의도 폴 스쿤 그레나다 총독의 감독과 지회 하에서 민주적인 총선거와 그레나다 군사정부를 비난하는 것에 대한 건에는 의견들이 일치했지만 각국의 평화유지군 파견에는 의견이 분분했다. 평화유지군의 파견을 주장한 OECS 국가들에 대하여 트리니다드 토바고, 가이아나, 벨리즈, 바하마는 강하게 반대했고, 결국 회의는 결렬됐다.
결국 10월 25일 오전 5시 미국은 사전 선전포고 없이 쿠바와 소련이 그레나다에 직접적인 개입을 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그레나다를 침공하였다.
3. 작전명 '긴급 분노'
사진의 상징은 제82공수사단의 부대마크다.[1]
긴급 분노 작전(Operation Urgent Fury)이라고 명명된 이 작전은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이 참여한 최초의 대규모 군사작전이었다.
조셉 맥클리프와 노먼 슈워츠코프를 지휘관으로 한 7,300여명의 미군 병력을 필두로 OECS 회원국들의 353명의 병력이 그레나다에 투입되었다. 미 해병대, 제82공수사단, 육군 레인저와 델타포스, 네이비 씰, 그린베레 등이 선두로 그레나다에 공수, 상륙, 침투했고 이 뒤를 따라 보병연대와 공병대대가 상륙했다. 미 해군과 미 공군도 이를 지원했다. 당시 그레나다측은 정규군 1500여명과 722명의 쿠바군과 군사고문단, 소련, 북한, 동독, 불가리아, 리비아 등에서 지원하러 온 60여명의 군사고문단이 있었다. 이외에도 인도에서 온 200명, 중국에서 온 82명 정도가 더 있었다는 카더라 소문이 있다.
10월 24일 자정 제75레인저연대 1대대의 A중대와 B중대는 포인트 세리네스 공항을 점령하려고 C-130 수송기로 강습했다. 해당 공항은 소련군의 An-12 등의 수송기들이 착륙할 수 있어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본래 수송기로 착륙하려 했으나 활주로가 폐쇄되었다는 것을 알고 급히 낙하산 강습으로 선회해야 했다. 이게 올바른 선택이었던 것이 해당 공항에는 그레나다군의 대공포들과 BTR-60 장갑차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만일 착륙해서 강습작전을 펼쳤다면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강습에 성공한 레인저 대원들은 AC-130의 지원을 받아 M67 무반동포로 그레나다군의 대공포와 장갑차들을 제압하고 오전 10시 경 비행장을 완전히 접수하는 데 성공했다. 해당 비행장으로 카리브 연합군과 제82공수사단 병력, 미군 325보병 연대 병력들이 추가로 증원되었다. 오후 3시 30분 경 그레나다군 BTR-60 장갑차 세 대가 공항을 탈환하기 위해 반격을 가했지만 미군의 무반동포와 AC-130에 의해 전부 격파되어 버렸다.
레인저 병력들이 세리네스 공항을 강습하던 동시간에 SEAL 4팀은 그레나다군 순찰선 몰래 펄스 공항 인근 해변에 상륙했고 해당 해변이 강습에 부적합하다는 정보를 습득했다. 10월 25일 새벽 5시 30분 경 미 해병대 8연대 2대대 병력들은 CH-46과 CH-53 헬기들에 탑승한 채로 펄스 공항에 강습해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레나다군은 DShK 중기관총으로 저항했지만 AH-1 공격헬기의 공격에 격파되어 버렸다.
한편, 10월 25일 새벽 '그레나다 자유라디오' 방송국(으로 알고 있었으나 사실은 원격송신탑이었다) 확보 임무를 맡은 SEAL 6팀 대원들이 미 육군의 UH-60 블랙 호크 헬리콥터로 침투하여 방송국을 점령했다. 본래는 구출한 폴 스쿤 총독을 방송국으로 데리고 와서 그레나다 군에 대한 선전 방송을 할 의도였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스쿤 총독 구출 작전 자체도 굉장히 힘들어진 판에다, 방송국 점령 팀은 겨우 1개 소대(SEAL 팀 1개 소대의 정원은 14명)에 불과해서 BTR-60 장갑차를 동원한 그레나다군의 반격을 받고 결국 방송 장비를 파괴한 후 황급히 정글로 퇴출했다. 그 와중에도 전사자는 1명도 없었다.
델타 포스 병력들과 제75레인저연대 C중대 병력들은 UH-60 헬리콥터와 AH-6 헬리콥터를 동원해 힐 교도소에 수감된 그레나다 정치범들을 구출하는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그레나다군 대공포에 MH-60 헬리콥터 한 대가 격추되어 조종사 한 명이 전사했다.
그리고 SEAL은 폴 스쿤 그레나다 총독 구출과 통신기지 파괴 등의 특수작전을 실행했다. 임무 자체는 모두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상당한 삽질들이 있었다. 작전이 개시되기 전인 23일 'SEAL 6팀' 중 1개 팀과 공군 공정관제사(CCT)는 1차 침투 당시 그냥 구축함에서 보트로 옮겨타고 상륙해도 되는데 굳이 해상 공수강하를 하다가 폭풍우 속 높은 파도에 SEAL 6팀 대원 4명이 익사했고 생존한 대원들이 작전을 지속하려 했으나 침투용 보트가 파도에 휩쓸려 버려서 결국 임무 자체가 취소되었다. 다른 팀도 어려움이 많았는데 작전 첫 날인 25일 총독 관저에 헬리콥터로 침투하던 SEAL 팀은 그레나다군의 대공포 사격으로 혼란이 생겨 위성통신 장비인 SATCOM을 헬리콥터에 두고 내렸다. 장갑차를 동원한 그레나다군에 포위되어 교전하던 SEAL 팀은 구조대가 올 때까지 근접항공지원에 의지하며 24시간 동안 고립되어 있었는데 일반 무전기도 금세 배터리가 다 떨어져서 SEAL 팀을 지원하던 미 공군의 AC-130 건쉽과 교신을 할 방법이 없었다. 이때 한 대원이 혹시나 하고 관저의 일반 전화로 통신을 시도해 봤는데 대원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일반 전화망은 살아 있었다. 그레나다군이 깜빡하고 총독 관저의 전화선을 끊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국제전화는 유료인지라 교환원이 그 와중에 "결제는 뭘로 하실래요?"라고 물었고 대원의 개인 신용카드를 이용해서 미국 포트 브래그에 있는 합동특수전사령부(JSOC)와의 통화에 성공하여 통화 중계를 통해 관저 상공의 AC-130 항공기와 교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2] 이 와중에 지원나온 미 해병대의 AH-1T 시 코브라 공격 헬리콥터 2대와 미 육군의 UH-60 블랙 호크 헬리콥터 1대가 그레나다군의 ZU-23-2 대공포에 격추되어 탑승자 중 5명이 전사했다. 이외에도 미 해병대의 LVTP-7 상륙장갑차들과 M60 패튼 전차 4대가 상륙해서 해당 작전을 지원했는데 전차가 한 대도 없던 그레나다군은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으며 BTR-60 장갑차 한 대가 미군의 전차에 의해 격파당하고 프레드릭 항구도 점령당했다.[3]
이외에도 미군의 삽질이 계속되었는데 국가안전보장국(NSA)에조차 정보요구를 하지 않아서 때때로 1895년에 작성된 지도나 상업용 관광지도로 작업하는 등 내부적 정보교환이 원활하지 않은 그야말로 비밀 작전이었기 때문에 해군 A-7 전폭기는 애꿎은 정신병원을 박살내 환자 18명이 사망했다.
침공 둘쨋 날인 10월 26일 아침 쿠바군은 미군 325보병 연대 2대대의 순찰대를 매복공격했고 미군에서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러자 미군은 박격포와 105mm 곡사포로 쿠바군의 주요 주둔지를 포격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미군의 화력을 당해낼 수 없었던 쿠바군은 사상자가 발생한 채 결국 오전 8시 30분에 항복하게 되었다. 쿠바군의 항복 이후 미군은 쿠바군의 막대한 무기가 저장된 무기고를 접수할 수 있게 되었다.
오후에는 제75레인저연대 2대대 병력들이 CH-46, CH-53 헬리콥터에 탑승한 채로 미국인 학생들이 구금된 그랜드 안네스 대학 캠퍼스에 강습했다. 그레나다 경찰들이 저항하는 바람에 레인저 대원 한 명이 부상을 입었고 CH-46 한 대는 야자수에 부딪혀 추락해 비전투 손실이 발생되었다. 결국 성공적으로 대학을 접수한 뒤 미국인 대학생 233명을 구출하는데 성공했다.
10월 27일, 침공 3일째가 되자 그레나다군의 저항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그레나다군 BTR 한 대가 추가적으로 해병대의 M72 LAW 사수에 의해 격파되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미국인 대학생 200명에 대한 구출작전이 이루어졌다. 여기서도 미군의 실수가 이어졌는데 미군 해병대는 인근 미군 육군 지휘소를 A-7 전폭기의 공습 표적으로 지목하여 병사 17명 부상, 1명 사망이라는 피해가 발생하였다. 이외에도 UH-60이 강습하던 도중 충돌이 발생해 추락해 3명의 사망자와 4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심지어 SEAL 대원 16명은 비바람 속에 바다로 낙하하여 4명이 사망하였다. 이렇듯 우여곡절의 연속이었지만 결국 그레나다군은 미군에 항복했고 그렇게 미군은 그레나다 전역에 대한 통제권을 찾았다.
계속된 전투에서 미군은 19명이 전사[4], 120명이 부상당했고 그레나다 측은 병사 45명이 전사, 민간인 24명이 사망하고 358여명의 병사가 부상당했다. 파견된 쿠바군도 24명이 전사하고 59명이 부상당했으며 638명은 미국의 포로가 되었다. 양측이 동원한 병력을 모두 합쳐도 9천명도 채 되지 않고 원래 군 특성상 전체 병력에서 전투병의 비중은 아무리 많아도 3분의 1 가량인 데다 대규모 포격 및 폭격도 없었으며 미군 한정으로 의무후송이 발전한 시기의 전쟁에 이 정도 피해라면 양측 모두 실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는 의미이다. 실제 한 레인저 참전군인은 '진흙탕 싸움'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래도 미군의 사상자는 실질적으로 오발 및 사고사를 제외하고 전사 2명이었는데 어찌됐건 보병 전투라고 해도 조직력이건 화력이건 압도적인 건 미군이고 방탄 장구류도 갖추고 있었으며 부상자 구호가 신속하게 이뤄졌기 때문에 총탄을 맞아도 머리나 심장 등 급소에 직격으로 맞는 게 아니면 생존하는 사례가 많았다. 게다가 미군은 든든한 화력지원도 받고 있었지만 그레나다와 쿠바 측은 그냥 맨몸으로 싸우는 처지였다. 심하게 말하면 후일 미군과 맞서는 이라크 반군이나 탈레반보다도 무장이 부실한 상태였으니 피해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UN에서는 침공 개시 직후인 10월 25일부터 28일에 걸쳐 긴급하게 안전보장이사회를 개최하여 가이아나, 니카라과의 공동안을 채택했지만 미국은 거부권을 발동하고 전쟁을 계속했다. 결국 공동안은 부결되어 11월 2일 UN 총회 심의에 부쳐졌다.
안건은 찬성 108표, 반대 9표, 기권 27표로 가이아나와 니카라과의 공동 결의안에 벨기에의 수정안이 더해져 가결되었다. 이 수정안은 군사간섭의 국제법 위반 우려, 그레나다의 주권 보호, 외국군의 즉시 철수 등이 주요 안건이었는데 미국과 카리브 동맹군은 이 결의안에 응하지 않고 평화유지군이라고 이름만 바꿔 치안 유지, 계속된 전쟁에 나서면서 결과적으로는 UN 결의안을 따르지 않았다. 미주기구에서는 침공 다음날인 10월 26일에 이사회 특별 회담이 소집되어 31개 가맹국 중 쿠바, 수리남이 불참한 가운데 15개국이 침공을 비난했고 11개국이 침공을 지지하며 의견이 나누어졌기에 표결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회담이 종료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머나먼 카리브 해의 섬나라인 그레나다와는 외교적인 접점도 딱히 없었고 UN 가입국도 아니었으므로 명목상으로도 그레나다 침공과는 무관했으나 미국과의 관계 때문에 당연히 미국을 지지하는 성명을 외무부(외교부) 대변인 명의로 10월 26일 발표했다. '外務部(외무부) 성명 그레나다 安保(안보)조치 平和(평화)·질서에 不可避(불가피)' 경향신문 1983년10월 26일 기사
12월 15일, 그레나다 전역이 미군과 카리브 동맹군에 의해 제압되었고 쿠바군 포로들과 각국의 군사고문단은 연금되었다가 모두 추방되었다. 그레나다로 온 쿠바 노동자들 역시 추방되었다. 이후 미군의 주력 전투병력은 철수했지만 미군과 OECS 동맹군에 의하여 평화유지군이 새로이 설립되어 그레나다의 평화유지를 맡았다.
4. 침공 이후
1984년 3월 그레나다와 세인트키츠 네비스가 카리브 평화유지군에 참가하여 12월에는 평화유지군의 감시 하에 민주적인 선거가 이루어졌다. 이에 하버트 브레이즈가 당선되었고 브레이즈가 이끄는 신국민당 정권이 들어섰다. 이 침공은 베트남 전쟁에서 온갖 굴욕과 뼈저린 경험을 겪은 미국에 있어서 오랜만에 '완전한 승리'를 거둔 전쟁이었다. 같은 해 레이건은 그레나다를 방문하여 1만여명의 청중[5]을 모으기도 했다. 미국은 침공 후에도 그레나다에 1985년 6월까지 미군을 주둔시켰고 이후 전부 철수시켰다.5. 기타
해당 작전 이후 미국은 자군의 합동성 강화의 중요성을 깨닫고, Goldwater-Nichols 법을 제정하였고[6] 이를 통해 합참과 통합군사령부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현재 미군 장교의 장성 진급 요구조건 중 하나가 연합/합동부대에서 근무한 경험이다.미 육군의 그린베레, 레인저, 델타포스, 미 해군의 SEAL 4팀(남아메리카 담당)와 SEAL 6팀(훗날의 DEVGRU), 그리고 미 공군의 CCT와 미 해병대의 해병수색대 '샤크맨' 등 지금과 같은 편제를 갖춘 미군 육해공해병 특수부대들이 대거 참가한 전쟁 중 하나다. 그래서 밀리터리 관련 서적에서 특수부대사를 이야기할 때는 그레나다 침공의 일화나 전훈 등이 초반부에 자주 언급된다.
이후 침공에 참가한 OECS 국가와 다른 카리브 해 국가들간의 대립은 격화되었고 카리브 국가들의 공동체 관계는 갈수록 험악해져 갔다. 1984년 5월 카리브 해역 내 카리브 해 국가들의 무역량은 전년도에 비해 13% 감소했다. 하지만 그레나다 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회담을 가지며 관계는 차츰 회복되고 개선됐다.
당시 미군은 냉전 말기 군비경쟁 와중에 보병 장구류에도 대대적인 투자를 실시해 전투복은 민무늬 OG-507과 BDU의 전신인 RDF에서 BDU로, 보호장구로는 M1 헬멧과 M69 방탄복이 PASGT로 바뀌고 M16A1에서 M16A2로 교체 중이었는데 이 때문에 당시 사진에서는 미군이 이 둘을 혼용해서 사용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또 걸프 전쟁과 함께 특수부대가 재평가받는 전쟁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하며 해군 UDT가 네이비 씰에 1983년 초에 통합되어 최초로 작전을 치렀다.[7] 현대 미군의 전투식량인 MRE가 1981년에 제식 채용된 이후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1984 LA 올림픽에서는 그레나다 침공을 이유로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들이 보이콧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서구권 국가들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비난하여 보이콧한 일에 대한 보복에 가까웠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그레나다 침공에 대한 연설에서 더티 해리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기한 해리 캘러핸이 내뱉은 대사인 'Go ahead. Make my day'[8]라는 말을 인용하는 바람에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스트우드가 감독을 맡고 주연으로 나온 1986년작 'Heartbreak Ridge'[9]의 후반부 주요 내용이 바로 이 그레나다 침공이다.
콜린 파월이 주목을 받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콜린 파월은 이때부터 레이건과 아버지 부시 정권을 거치면서 거의 모든 미국의 군사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어 미국 최고의 명장으로 불렸고 대권 주자로도 거론되었다. 다만 일부 진보주의자들은 이때의 행보를 두고 파월도 똑같은 제국주의자면서 이라크전때 혼자만 깨끗한 척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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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석: 미국과 자유의 영웅인 캐리비언 동맹국들에게 감사함을 느낍니다.[2] 이는 영화 트랜스포머 1편에서 패러디되었다. 물론 배경은 다르지만 상황이 거의 일치한다.[3] 이때 미군 전차들은 105mm탄을 보급받지 못하고 오직 훈련용 탄과 기관총에 의지한 채로 상륙하였다. Marines Under Armour의 저자이자 미해병 대령 예비역인 Kenneth W. Estes에 의하면 훈련용 탄이라고 할지어도 APC 장갑 정도는 충분히 관통시킬 수 있었다고.[4] 그 중 17명은 정보 부족으로 인한 아군의 오발 및 사고로 사망했다.[5] 당시 그레나다 인구의 10% 이상에 해당한다.[6] 각각 발의자인 상원의원, 하원의원의 이름을 딴 것이다.[7] 남은 UDT의 대원들은 SEAL에 편입되거나 SDV(Seal Delivery Viehicle)의 운용을 맡았다.[8] '어디 한번 해봐, 넌 오늘 죽었다'는 뜻의 말. 정치인이 공식 석상에서 남길 점잖은 말은 아니다.[9] 한국에서는 '승리의 전쟁'이란 이름으로 비디오 출시되었고. MBC에서는 '외곬의 길'이란 제목으로 방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