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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3B6C> 국제연맹 League of Nations(LN) 國際聯盟 | |
연맹기 (1939년에 쓰인 준공식기) | |
스위스 제네바의 구 국제연맹 본부 건물[1] | |
<colcolor=#fff> 존속기간 | 1920년 1월 10일 ~ 1946년 4월 18일 |
형태 | 국제기구 |
본부 | [[스위스| ]][[틀:국기| ]][[틀:국기| ]] 제네바 |
사무총장 | 에릭 드러먼드(1920~33) 조세프 아베놀(1933~40) 숀 레스터(1940~46) |
공식 언어 | 영어, 프랑스어 |
주요사건 |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1919년 베르사유 조약 1920년 설립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1946년 해체 |
후신 | 유엔(국제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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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 후 전쟁의 재발을 막기 위해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제안에 의하여 1919년에 기획되어 1920년에 설립되었으며 초기 회원국은 42개국, 최대 60개국이 참여했던 국제기구.유엔의 밑거름이 되었으나 전쟁을 막는다는 원래 목적에는 실패했다. 1946년 해체되고 유엔에 그 자산과 국제법원(국제사법재판소)과 국제 노동 기구 등 대부분의 하위 조직이 이전되었다. 당시 본부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었다. 스위스가 오랫동안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음에도 유엔 산하 기구들의 본부가 대부분 제네바에 설치된 것은 이러한 역사적 이유도 한몫 했다.
2. 회원국
3. 역사
3.1. 창립
우드로 윌슨은 '평화 원칙'을 내세우며 베르사유 조약 1조에 국제연맹을 설립한다는 항목을 넣는 데 성공했고 42개국이 가입했다.UN과 달리 최고기관이 이사회가 아닌 총회였는데 제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성립된 만큼 초기 상임이사국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주요 승전국인 영국, 프랑스 제3공화국, 일본 제국, 이탈리아 왕국이었다. 후술하겠지만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1926년~1933년)과 소련(1934년~1939년)이 잠시 상임이사국을 맡았다. 브라질, 스페인, 폴란드가 상임이사국 자리를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좌절되었다.[36]
3.2. 가입국
1919년에는 영국 본국(연합왕국) 및 당시 영국령 자치령들(뉴펀들랜드 자치령 제외)[37]과 최대 식민지 인도 제국, 프랑스 제3공화국, 일본 제국, 이탈리아 왕국, 그 외 유럽과 중남미의 여러 독립국들 위주로 가입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유고슬라비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등이 독립국으로서 새로 가입했다.뒤이어 1920년에는 최초로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인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과 구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알바니아 제1공화국, 불가리아 왕국, 1921년에는 발트 3국, 1922년에는 헝가리 왕국, 1923년에는 아일랜드 자유국과 에티오피아 제국이 들어가면서 점점 국제연맹은 회원을 확대했다.
3.3. 태생적 한계가 빚은 실패
이런 초기 상황에도 국제연맹은 몇 가지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인 독일 제국, 오스만 제국[38]과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이 가입을 거부당했다.
- 정작 본 제안국인 미국이 먼로 독트린을 이유로 공화당이 다수인 미국 상원에서 부결되어 가입하지 못했다.[39] 윌슨은 결국 이 죽도 밥도 안 되는 상황에서 반신불수로 쓰러져 아내가 사실상 직무를 대행했고 정권도 공화당에 빼앗겼으며 4년 후 사망했다.
- 다수결이 아닌 만장일치제였고 군사적 제재 수단이 전무했다.
- 상임이사국에게 특별히 이권이 없었던 반면 오히려 납부해야 할 자금은 더 많았다. 일본이 상임이사국이 되었을 때도 이 때문에 내부에서 찬반논란이 있었을 정도다.
이건 여러모로 막장이었다. 강대국의 처지에선 자신이 특별하게 대접을 받는 게 아닌 수십 개 나라 가운데 하나로만 취급되었기 때문에 국제연맹에 가입해 있다고 해서 특별히 이득을 볼 거리가 없었고 이권이 없다는 것은 나가도 손해 볼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으므로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다면 그냥 탈퇴하면 그만이었다. 한편 약소국들의 입장에서도 강대국이 설친다고 해도 국제연맹이 항의와 경제봉쇄 외에는 아무것도 하질 못하고 숫자를 빌미로 머릿수 과시에 나서지도 못하니 뭘 써먹을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어느 나라 처지에서도 이익이 될 게 없었다. 결국 강대국도 약소국도 수틀리면 탈퇴하게 되었다.
미국의 불참도 아직은 대영제국과 프랑스 식민제국을 중심으로 세계 질서가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무렵에는 큰 결함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당시 미국의 경제규모는 세계 경제의 30~40%에 달했는데 이는 대영제국과 영연방, 서유럽의 교역과 소비규모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미국의 부재에 따른 폐해는 대공황으로 여실히 드러났다. 열강의 한 축인 미국이 없으니 막나가는 국가를 견제할 만한 외교, 경제, 군사적 옵션도 제한되었다. 결국 미국의 부재는 연맹을 태생부터 절름발이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3.4. 짧은 평화 시기
미국이 LN에 가입하지는 못했지만 LN에 친화적인 정책은 지속하여 LN 이사국들과 함께 1921년 워싱턴 회의를 개최하는 데는 성공하였고 강대국들의 군비축소라는 수확을 거두기는 했다.코스타리카가 가입한 지 5년만인 1925년 탈퇴하고 다음 해인 1926년 6월에는 브라질이 상임이사국 진출에 실패하고 분노하여 탈퇴해 버리면서 국제연맹의 탈퇴행렬이 시작되었다.
그래도 당장은 모든 것이 무너진 게 아니었고 오헝제국 해체와 러시아의 공산화 등으로 들끊었던 유럽 내부의 여러 위기들을 국제연맹이 조정에 성공하면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보였다. 무엇보다 같은 해 9월 바이마르 공화국이 가입해서 상임이사국이 되었으며 군비축소위원회도 그럭저럭 돌아가고 있었고 조금 이르게는 워런 G. 하딩이 태평양 군축회의에서 영일동맹을 끊고 군비경쟁을 완화시켰다. 이런 상황이 되자 국제연맹체제를 진두하던 영국과 프랑스는 이제 전쟁 이전의 상황으로 완벽하게 돌아왔다고 안도하게 되었다.
사실 대공황이 망쳐놓기 전에는 여러가지 공과 과가 모두 존재했다.
1921년엔 스웨덴과 핀란드 사이의 올란드 제도 분쟁을 정리했고, 바이마르 공화국과 폴란드 사이의 북실레시아 영토분쟁을 해결했다. 지금까지도 국제연맹의 커다란 공헌으로 1921년에 알바니아 제1공화국과 유고슬라비아 왕국 사이의 전쟁 위기와 1925년에 그리스 제2공화국과 불가리아 왕국간 페트리치 사건으로 인한 전쟁 위기를 중재하는 등 전쟁을 막기 위한 국제기구로서의 제 역할을 하였다.
허나 동시에 1920년 빌뉴스 위기으로 폴란드 제2공화국이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을 침공해 영토를 강탈해감에도 제제수단의 미비함과 프랑스의 폴란드 지지로 폴란드의 침공 행위는 아무런 제재 없이 용인되었으며 1923년에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그리스-알바니아 국경에서의 이탈리아 장군 객사를 명분으로 그리스의 코르푸 섬을 포격, 점령함에도 침략국 이탈리아를 처벌하려 하기는 커녕 쩔쩔매며 피해국인 그리스에 배상금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국제연맹의 각종 분쟁 중재들은 1925년의 로카르노 협정과 함께 사람들에게 대화와 존중을 통한 전쟁없는 세계로의 도약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과 이로 비롯된 극단주의의 득세로 국제연맹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3.5. 붕괴과정
대공황의 여파로 국제연맹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이 와중에 멕시코(1931년), 터키와 이라크 왕국(1932년)이 가입하긴 했지만 나치와 파시스트가 등장하고 일본 제국은 만몽과 화북 지역의 이권이 일본의 생명선이라 주장하며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수립했고 성동격서를 위해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다. 이어 1933년 열하사변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이에 중화민국의 국제연맹 제소가 있었지만 일본의 탈퇴 협박과 실질적인 제재 수단 부재 때문에 국제연맹의 대응은 지리멸렬했다.게다가 이 와중에도 소련은 계속 거부되었고 미국은 끝까지 가입하지 않았다(...).
그래도 국제연맹을 구성한 기존 열강들은 평화의 가능성을 신뢰하고 있었다. 일본에는 경제 제재를 경고하고 실제로 만주까지 조사단(그들이 쓴 보고서는 Lytton report)[40]을 파견하고 만주국의 승인을 거부하고 일본군 철수를 권고했다. 같은 회원국끼리의 전쟁인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1935년)과 스페인 내전(1936년)에도 훈수를 두고 다른 회원국의 참전을 막았다.[41] 하지만 전술했듯이 일본과 이탈리아는 그런 말을 듣느니 탈퇴가 더 빨랐다. 독일 역시 아돌프 히틀러가 베르사유 체제의 폐기를 선언하면서 1933년에는 일본과 독일이, 뒤이은 1937년에는 이탈리아가 탈퇴했다.
3.6. 폭풍 전야
국제연맹은 그 직후 1934년 소련을 상임이사국으로 가입시키면서 뭔가 기대를 했지만 소련은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국제연맹을 배신하고 1939년 핀란드를 침략함과 동시에 국제연맹에서 축출당했다.[42] 게다가 이 막장의 와중에 명색이 상임이사국이라는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그들의 동맹이자 원년 멤버였던 폴란드는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 체코슬로바키아 합병을 '우리 시대의 평화'라며 허용하는 엄청난 실책을 저질렀다.[43] 국제연맹에서 탈퇴해도 편 들어주고 달래주고 도리어 회원국들을 망하게 내버려두는 상황이 되었다.한편 여전히 국제연맹을 탈퇴한 일본 제국과 이탈리아 왕국은 말 그대로 중일전쟁(1937년)과 알바니아 왕국 합병(1939년)으로 깽판을 치고 있었다. 이렇게 되니 중미의 여러 나라들도 주르르 탈퇴해 버리고 스페인도 독자적 노선을 택한다.
1930년대 말기에 다다르면 국제연맹을 탈퇴한 나라들은 이제 열강들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는 수준에 이르른다. 태평양에서 일본 제국을 그나마 제어할 수 있는 나라는 회원국이 아닌 미국밖에 없었고 결국 미국은 일본에 석유와 철의 수출을 제한해 버린다. 같은 이유로 나치 독일의 야욕은 점차 심해지면서 뒤에 나오는 단치히 자유시를 빌미로 폴란드 합병을 주장하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번만큼은 극구 반대한다. 결국 폴란드 침공과 함께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전쟁을 막겠다던 국제연맹은 전쟁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3.7. 전쟁과 해체과정
결국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추축국들의 전쟁과 기구 탈퇴를 막지 못한 국제연맹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평화와 전쟁 방지의 노력을 이루지 못하고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유럽, 아프리카 침략을 볼 수 밖에 없는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로 전락하였고 일본 제국의 동아시아 및 태평양 침략도 막아내지 못하면서 초반에 평화를 추구하겠다는 의지까지 모두 상실했다.눈 깜짝할 사이에 유럽은 독일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망명정부를 차린 폴란드, 자유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노르웨이, 유고슬라비아 왕국[44]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추축국의 괴뢰 정부는 국제연맹에 탈퇴를 선언한다. 더구나 이 망명정부를 차린 나라들도 국제연맹한테 뒷통수를 맞은 데다가 실권도 전혀 없어 이름뿐인 처지였다.
동맹국인 이탈리아 왕국도 에티오피아, 알바니아, 그리스를 잇따라 침공하거나 식민지화하였고 일본 제국도 버마, 필리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싱가포르, 네덜란드령 동인도 등을 점령하면서 국제연맹은 이를 계기로 이들 추축국 삼총사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하거나 제재를 내리지도 못하고 그들의 침공을 지켜만 봐야하는 진짜 허수아비 신세로 전락한다.
그럼에도 다행히 국제연맹 본부가 있는 스위스는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의 침공 마수에서 벗어나 종전까지 중립을 지키면서 국제연맹 본부는 피해를 입지않고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전술한 대로 스위스라는 중립국선에서 겨우 명목을 유지했을 뿐 그 속내는 점점 비어가고 무력해진 상황이었다. 만약 나치 독일이 스위스까지 중립을 무시하고 침공했을 경우 나치 독일의 표적이 되어서 히틀러로부터 국제연맹의 비밀 문서는 물론 여러 문서들이 그의 손아귀에 넘어갔을 뻔도 했다.[45][46] 이미 독일은 이탈리아, 일본과 함께 국제연맹을 탈퇴했으며 사실상 자신들의 상대도 되지 못하는 허수아비로 보고 있었다.
국제연맹은 졸지에 영국과 망명정부의 모임 수준으로 전락했다. 마지막 가입국인 이집트 왕국(1937년)이나 튀르키예도 비슷했다. 유명무실해진 국제연맹은 2차대전 내내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1945년 UN이 설립된 뒤에도 잠시 별도의 국제기구로 기능하다가 1946년 해체되었다. 회원국이나 업무 같은 것은 모두 UN에 인계되었으므로 사실상 UN 체계로 재창단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4. 국제연맹의 교훈과 유산
국제연맹에서 교훈을 얻은 UN은 철저하게 탈퇴와 배제를 하지 않는다는 데 중점을 둔다.[47] 이러한 생각은 철저하게 열강에 유리하게 짜여지고 탈퇴하면 실이 더 많을 정도로 막강한 권한이 주어지는 상임이사국 제도에서 엿볼 수 있다. 안보리(UNSC)가 불공평한 건 사실이지만 핵무기의 등장과 뒤이은 냉전으로 인류 공멸 가능성은 더더욱 높아진 상황에서 다른 답이 없었다.만장일치제도 폐지하고[48] 다수결과 군사력(유엔군, 평화유지군)을 바탕으로 한 직접적 개입과 여러 단체를 포괄하는 더욱 큰 조직을 만들게 된다. 그 대표적인 첫 개입이 바로 6.25 전쟁이다. 이렇게 실패한 국제연맹에서 교훈을 얻은 UN이었기에 2차대전 종결 후의 국제사회가 대충 전반적으로는 인권의 신장과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해 왔다. 물론 평화는 어디까지나 유럽과 북아메리카를 위시로 한 선진국들과 강대국들에 국한해서 유지됐지만.[49]
하지만 현대의 국제연합이 국제연맹의 실패를 완전히 극복했냐고 한다면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다. 국제연맹에서 추구했던 국제 연대를 통한 평화 유지는 여전히 요원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이유로 6.25 전쟁과 같은 사례의 적극적인 개입은 UN에서도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았고[50] 각 나라의 입장 차이와 현실적 제약 때문에 평화유지군은 그야말로 '제한적인 치안 유지 임무' 정도로만 한정된다. 이를 반영한 호텔 르완다의 명언이 "우리가 여기로 온건 평화유지군으로서지 평화"창조군"으로서가 아니다"라고 한다.[51] 냉전기 이후 평화를 유지하는 국제기구로서 UN에 관심이 늘어났지만 탈냉전기 내내 UN은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고 때맞춰 일어난 르완다 학살과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의 학살은 그 분위기를 가중시켰다. 더 나아가 이라크 전쟁은 강대국들은 명분 없는 전쟁을 마음대로 시작해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부각시켰으며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2차 대전 이래 없었던 유럽 대륙에서 강대국이 동반된 전면전까지 벌어지면서 평화 유지의 기능은 거의 수행하고 있지 못함을 보여줬다.
5. 국제연맹 관할지
국제연맹이 국가는 아니었지만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자유시, 보호령, 위임통치령들 등 명목상 국제연맹 관할 지역들이 존재하였다.5.1. 단치히 자유시
자세한 내용은 단치히 자유시 문서 참고하십시오.지도상에서 폴란드 회랑과 동프로이센 사이 Danzig라고 적혀 있는 부분이 단치히 자유시.
오늘날 그단스크시. 베르사유 조약 체결 당시 폴란드 회랑을 폴란드에 넘길 때 단치히 시는 유독 독일계가 많았던 서프로이센 지역에서도 워낙 독일계가 대다수였기에 국제연맹 관할의 자유시로 분리하게 된다. 국제연맹은 1920년 1월 10일 영구 중립의 도시국가로서 단치히를 독립시켰는데, 독자적 화폐와 깃발도 있었고 25만 명의 인구로 나름대로 번성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단치히 '자유시'는 폴란드에 매우 종속되어 있었는데 폴란드는 자국군을 자유시 내에 주둔시킬 수 있었으며 세관 통제 및 항구의 자유로운 이용이 가능했다. 애초에 이 자유시의 설립 목적이 폴란드에 넘기려고 했는데 주민구성 상 넘기기 뭣해서 세워진 것이니. 1939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단치히 주민들은 적극 협조하였고 폴란드 침공 이후 독일에 편입되면서 폴란드 제2공화국과 함께 멸망했다.
5.2. 자르 분지 지역
자세한 내용은 자르 분지 지역 문서 참고하십시오.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독일에서 분리되었다. 독일계가 대다수였지만 프랑스에 매우 종속되어 있었다. 여러 부분에서 단치히 자유시와 매우 유사하다. 1935년 제1차 자르 국민투표로 나치 독일에 환원되었다. 여담으로 프랑스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도 자르 보호령이라 하여 한번 이 지역을 영향권 하에 뒀으나 1955년 제2차 자르 국민투표로 서독에 환원되었다.
5.3. 클라이페다 지역
자세한 내용은 클라이페다 지역 문서 참고하십시오.위 지도에서 독일 동프로이센과 리투아니아 사이 Memel L.이라고 적힌 곳이 클라이페다 지역[52]이다.
자르 분지 지역처럼 프랑스의 통치를 받던 위임통치령이었다. 다만 자를란트와 다르게 클라이페다는[53] 프랑스 본토와 꽤 거리가 있는 발트해 연안에 위치해 있었다. 독일 제국의 네만 강 북쪽 영토에 세워졌다. 루르 점령 당시 프랑스군이 대부분 철수하면서 리투아니아가 시민 봉기를 일으키게 한 후 프랑스군을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이후 주민투표를 거쳐 리투아니아로 편입되었다. 클라이페다는 이후 나치 독일이 리투아니아에 최후통첩을 보내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에게 돌아왔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다시 리투아니아로 편입되었다.
5.4. 위임통치
자세한 내용은 위임통치 문서 참고하십시오.6. 한국과의 관계
한국 역사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은 후속 기구 UN과는 달리 국제연맹은 한국과 거의 연이 없다. 강대국들이 일본의 조선 식민통치를 인정하는 상황에서 국제기구가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은 매우 제한적이었다.1차 대전 후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에 맡기려는 시도를 한다. 위임통치안의 내용은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일본의 통치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두어달라"는 것이었다. 정한경이 이승만에게 찾아와 이 위임통치안을 제의했고 이승만도 동의했다. 원래는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여 제출하려 했으나 참석을 못하게 된 이승만과 정한경은 대신 미국 대통령에게 이 문서를 파리 강화 회의에서 안건으로 삼아달라 요청하기 위해 위임통치안 문서에 서명하여 1919년 3월 3일에 백악관에 전달했다. 하지만 일본은 1차대전 승전국인데다가 국제연맹 창립 회원국이며, 상임이사국이기까지 했으니 열강 그 누구도 이 통치안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를 좋다고 받아주면 전세계의 식민지가 위임통치를 해달라고 난리가 날 것이 뻔한데 미쳤다고 받아 줄 이유가 없었다. 그저 일본의 한국을 다루는 태도를 비난하는 의도가 강했을 뿐, 일본의 한국 식민통치 자체는 인정되고 있었다.
박용만, 신채호를 비롯한 반이승만 무장독립파들이 이 사건을 물어 이승만을 공격하고 같은 외교 독립론은 주장하지만 이승만과 관계없던 세력들도 이승만을 물어뜯으면서 임시정부는 분란이 일어난다. 그런데 이 연합국에 의한 위임통치라는 것은 안창호와 김규식도 유사한 주장을 했고 정한경이 작성한 것을 이승만이 전달한 것이며 영국, 프랑스의 위임통치를 받았던 이라크나 시리아, 레바논 같은 중동 아랍권 국가들이 훗날 독립한 사례가 있다.
이후 이승만과 임정의 관계는 완전히 끝난 것처럼 보였으나 다시 한 번 손을 잡는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고 뒤이어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 가능성이 높아지자, 국무령이었던 백범 김구가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전달할 특명전권대사로 이승만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승만은 1933년 국제연맹총회가 열리는 스위스 제네바에 가서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 회원국 대표들과 기자들에게 한인 독립 문제를 회의 의제로 채택해 줄 것을 호소했다. 처음엔 직접 상정시키려 했으나 거부당한 뒤 성명서를 작성하고 국제연맹 사무국과 회원국 대표들에게 발송했다. 만주문제와 만주에 있는 한국인 문제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한국이 극동문제의 열쇠이고 국제연맹이 만주국을 승인한다면 그것은 연맹의 기본 정신인 민족자결주의에 위배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각국 대표들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언론들도 우호적이었다. 실제로 이 국제연맹 총회에서 만주국 불승인 결의안이 통과되었고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순전히 이 영향으로 그런 결의안이 통과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일정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무엇보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고 국제사회에 다시한번 한국 문제를 상기시켰다는 점이 중요했다.
7. 대중매체의 국제연맹
복거일의 대체역사소설인 비명을 찾아서에서는 미국과 일본이 1940년에 국제연맹에 가입하고 2차대전 기간에도 유지되어 배경이 되는 1987년까지 국제연맹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고,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일본이 상임이사국이 되어 사실상의 국제연합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는 여전히 독립하지 못하고 있으며, 베트남, 케냐에서 무장독립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마셜 군도 등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지 않으면서 그대로 일본의 위임통치령으로 남아 있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이 국공내전 당시 일본의 개입으로 황허 강을 경계로 휴전하여 단치히 자유시 대신에 중국이 분단되어 영토 분쟁 상태가 된 상해, 즉 상하이 자유시가 존재하며, 이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만약에라는 대체역사소설 에세이집 2권에서는 존 루카치는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1912년 대통령이 되었다는 가정을 한다. 여기서 루즈벨트는 닥치고 내 말 들어라라는 식으로 일단 전쟁을 종결시키고 만국평화회의를 연 뒤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를 강제로 가입시키는 쾌거를 보이지만, 결국 전쟁은 또 일어나고 만다는 암시를 준다.
이것은 1차대전이 온건하게 끝났다고 해도 2차대전의 발발이 어느 정도는 필연이었다는 시각을 반영한다. 심지어 러시아 혁명을 차단했다는 가정 하에서도. 바로 앞의 앨리스테어 혼이 쓴 "엠스 전보 사건과 보불전쟁 발발의 가능성이 나폴레옹 3세의 침착한 태도 덕에 사라지면서 양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는 가정과는 상충되는 점. 바로 뒤의 로버트 L. 오코넬의 가정에서는 독일이 승리하지만 독일 11월 혁명으로 전쟁은 대충 정리되고 윌슨의 계획은 한방에 씹힌다.
TRPG 게임 겁스 무한세계 속의 평행우주 중 하나인 건스백에서는 국제연맹이 '세계과학위원회'의 버프를 받아 원자폭탄을 비밀리에 개발하고 있던 이오시프 스탈린의 소련을 박살내는 등 국제연합 못지않은 믿음직스러운 국제 기구로 거듭나게 된다. 소련과의 세계 대전 이후에는 상비군인 "연맹평화유지군"도 두고 있다.
물론 이 세계의 국제연맹은 서구 열강의 입장에서만 평화의 수호자로 여겨지지, 식민지인한테는 원수나 다름없다. 인도와 아프리카에서 반(反)연맹 반란
땡땡의 모험 푸른 연꽃 말미에 일본이 국제연맹을 탈퇴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편에서 당대 논란이 많았던 부분을 꽤나 건드려서였는지 이후편부터는 가상의 지명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한국에서 연재된 웹소설 내가 히틀러라니!에서는 독일이 재가입하며 존속되어 유엔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상임이사국은 미국, 소련,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중국 7개국.
[1] 유엔으로 조직이 계승된 뒤에는 유엔 유럽본부 사무국(유엔 제네바 사무국)으로 쓰이고 있다.[2] 해당 국가는 현재 존재하는 국가가 아니라 국제연맹 창설 당시의 국가를 기준으로 하였으므로 현재 존재하는 국가의 명칭, 영토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3] 1927년 현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으로 국호 변경. 다만 연합왕국에서 아일랜드 자유국이 1922년에 분리돼 자치령(dominion)이 되었기 때문에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의 실질적인 시작은 1922년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4] 창설 당시 대영제국의 자치령(dominion)이었던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연방과 최대 식민지였던 영국령 인도 제국은 별도의 회원 자격을 지닌 채 출범했다. 하지만 1931년에 웨스트민스터 헌장이 발효되어 자치령들이 영국 본국(연합왕국)과 대등한 지위를 지닐 때까지는 독자적인 외교권이 없었기 때문에 영국은 국제 연맹에서 여러 표를 행사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자치령에 대한 영국의 실질적인 영향력은 웨스트민스터 헌장 발효 이후에도 상당 기간 이어졌다. LON에 나중에 가입한 아일랜드만 반영 감정 때문에 독자적으로 행동했고 LON 소속의 다른 대영제국 자치령들은 영국의 입장에 대체로 동조하였다. 인도 제국은 제2차 세계 대전까지 계속 영국의 자치령이 아닌 식민지였으니 LON이 존재하는 내내 영국의 거수기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5] 당시 대영제국 자치령. 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전신.[6] 당시 대영제국 최대 식민지.[7] LON 출범 당시 북양정부, 1928년 이후 국민정부로 대체. 사실상 속국인 티베트 포함.[8] 1932년부터 해체 직전까지는 타이.[9] 당시 대영제국 자치령.[10] 현 뉴펀들랜드 래브라도 주는 당시 캐나다 소속이 아닌 별도의 뉴펀들랜드 자치령이었으므로 여기서 제외. 뉴펀들랜드 자치령은 크기가 작아서인지 끝내 LON에 가입하지 못했다. 원칙대로라면 웨스트민스터 헌장 발효 후 사실상의 독립국이 되었으나 대공황으로 경제적으로 쪼들리게 되자 스스로 독립국 지위를 포기하고 영국에 통치권을 반납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캐나다에 가입하게 된다.[11] 비시 프랑스에서 탈퇴한 것으로 자유 프랑스는 탈퇴하지 않았다.[12] 대영제국 자치령. 웨스트민스터 헌장 발효 후 사실상 독립국화. 이후 아일랜드로 국호 변경.[13] 1940년부터 해체 직전까지는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14] 1940년부터 해체 직전까지는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15] 가입 이전 1922년까지는 오스만 제국.[16] 국제연맹의 위임 통치국이었다가 후에 가입함.[17] 나치 독일 시기에 탈퇴.[18] 국제 연맹에 의해 독립했다가 나치 독일에 합병되며 멸망 (자세한 내용은 후술)[19] 독일에게 합병되면서 탈퇴[20] 트리아농 조약에 대한 불만으로 탈퇴[21] 핀란드 침공으로 인한 겨울전쟁 발발로 인해 탈퇴[22] 르완다 왕국과 부룬디 왕국의 연합체[23] 영국이 위임 통치하였으나 후에 위임 통치가 끝나고 국제연맹에 가입함.[24] 1944년부터 해체 직전까지는 아이슬란드 공화국.[25] 1925년 네지드-헤자즈 왕국을 거쳐 1932년부터 해체 직전까지는 사우디아라비아.[26] 미국은 국제연맹의 창설을 주장했고, 상임이사국 자리까지 내정되어 있었으나 막상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않았다. 우드로 윌슨은 가입을 추진했으나 미 의회는 먼로 독트린을 내세워 가입안을 부결시켰다.[27] 필리핀은 1935년 이후 도민정부가 폐지되고 자치령으로 승급되어 하나의 독립국처럼 간주되었다.[28] 개별 회원국 지위를 가진 영국의 속령들은 제외.[29] 수단 공화국과 남수단.[30] 국제연맹의 창설 당시 뉴펀들랜드 래브라도는 캐나다 소속이 아니라 별개의 영국 자치령이었다(애초에 캐나다도 브리티시 컬럼비아, 퀘벡 등 많은 영국 식민지들의 연합이었으니). 따라서 뉴펀들랜드는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못했다. 1930년대에는 웨스터민스터 헌장에 따라 잠시 사실상의 독립국이 됐으나 바로 몇 년 뒤 대공황에 의해 뉴펀들랜드 정부가 주권을 영국에 스스로 반납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1949년에 주민투표를 통해 캐나다에 가맹하게 되었다. 따라서 뉴펀들랜드는 국제연맹에 가입할 기회가 사실상 없었고 실질적 후신인 유엔에도 가입하지 못했다.[31] 기니, 니제르, 코트디부아르, 모리타니, 말리, 세네갈, 베냉, 부르키나파소.[32] 가봉, 콩고,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차드, 마다가스카르.[33]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는 현 소말리아로 영국령 소말릴란드가 미승인국인 현 소말릴란드이다.[34] 1943년부터 일본 제국에 편입, 1945년부터 해체 직전까지는 소련에 편입.[35] 이들 두 지역은 아직 미국의 정식 주가 아닌 속령이었다.[36] 이를 이유로 브라질은 격분하여 탈퇴한다.[37] 1922년 탄생한 아일랜드 자유국(이후 아일랜드)는 창설 멤버는 아니나 나중에 LON에 가입했다.[38] 이에 반해 같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이었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불가리아는 국제연맹에 가입했다.[39] 한마디로 전쟁이 끝났으면 국제문제에 신경쓰지 말고 국내문제나 신경을 쓰라는 것이다. 미국의 전간기 고립주의 노선은 제2차 세계 대전 문서에서 나온다. 미국도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끝까지 고립주의로 가려고 했으나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분노해 태평양 전쟁에 참여하였다. 거기에 나치 독일이 미국에 선전포고하자 유럽전선에도 참여하였다.[40] 하지만 이 조사단이라는 것도 만주까지 파견되기까지 회원국간 합의가 이뤄지고 승인이 나기까지 3달, 1931년 12월 파견이 승인되었음에도 배로 만주로 향해서 1932년 봄이 다 되어서야 도착하고 6주간 조사하여 사변이 일어나고 10달이 돼서야 보고서가 올라왔다.[41] 그런데 다르게 생각해 보면 깡패가 약한 애를 패고 있는데 동네 싸움으로 번질 것을 걱정하면서 폭력 사태를 말리는 게 아니라 다른 애들한테 끼어들지 말라고 한 다음 내버려 둔 격이다. 더구나 소련이랑 나치 독일은 회원국이 아니어서 잘만 이탈리아를 후원했다.[42] 독일, 일본, 이탈리아는 자진탈퇴했지만 타국을 침략해서 축출당한건 소련이 유일하다.[43]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뮌헨 협정은 그저 영프가 순진해서 독일을 믿고 체결한 것이 아니라 가까운 시일에 소요사태가 터질 것을 예감하고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희생양 삼아 재무장을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었으며 실제로 양 열강은 독일에게는 표면적으론 유화적인 제스쳐를 보내면서도 물밑으론 다가올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는 군사력은 뛰어났지만 국내의 정치적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었고 대전쟁의 여파로 반전여론이 다수였다. 실제로 폴란드 전역의 개전 후에도 프랑스 내부에선 반전여론이 들끓었고 이로 인해 촉발된 가짜 전쟁을 보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여기엔 독일의 블러핑도 한몫했지만 설령 블러핑임을 안다고 한들 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44] 1941년에 탈퇴했다가 1944년에 재가입.[45] 히틀러는 1940년 프랑스 침공 당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독 베르사유 조약에 관한 원본 문서를 손아귀에 넣으면서 휴전 협정 때 파기해 버렸다.[46] 실제로 히틀러는 프랑스 침공을 위한 목적으로 프랑스와 접한 스위스도 침공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스위스군의 막강한 전력과 중립을 고수하면서도 전쟁에 대비한 스위스의 분위기 때문에 결국 침공을 포기한다. 여기에 스위스가 국제금융을 주도하고 독일 패망시까지 금전적 지원을 한 것도 한몫했다.[47] 물론 팔레스타인, 대만, 세르비아, 남아프리카 공화국처럼 예외적인 케이스가 있고 냉전 시대의 대한민국과 북한도 수십년간 이런 케이스였다.[48] 안보리 상임이사국에 거부권이 있기 때문에 완전한 폐지는 아니다.[49] 당연히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중남미는 전쟁이 일어나는 빈도가 높았다.[50]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다국적군이 그나마 비슷한 예라고 할 수 있다.[51] We are here as peacekeepers, not as peace"makers".[52] 독일어로는 메멜란트[53] 독일어로는 메멜란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