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감자의 역사 요약 TED-Ed 애니메이션(한국어 자막 가능) |
감자의 재배 역사를 다룬 문서이다.
2. 개괄사
2.1. 대항해시대 이전
남아메리카 안데스산맥이 원산지이다. 기원전 3천여 년 전부터 재배되어 왔고, 이후에 이 일대에서 퀴노아, 옥수수 등과 함께 주식으로 먹어왔고 시간이 지나면서 수백여 가지로 품종을 개량했다. 다만 이때 개량된 감자도 맛이 밍밍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에,[1] 주로 국에다 넣거나 다른것을 곁들여먹는 식으로 먹었던 게 일반적이다. 그리고 감자를 말려서 비상식량이나 전투식량으로도 애용하였다.2.2. 유럽에서 초기 도입 시기의 반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신항로 개척 이후 다른 유명한 작물인 담배, 토마토등 다른 작물들과 함께 유럽에 들어왔고 세계로 퍼져나갔다. 유럽 상륙의 계기는 항해식량이었다.아메리카 대륙 외에 처음으로 감자를 도입받은 유럽 지역은, 독특하게도 상류층이 솔선수범하여 감자 보급에 이바지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당대의 상류층이 보기에도 감자는 분명 서민들에게 필요한 작물이었음을 입증하면서, 동시에 편견이라는 것을 개인이 아닌 집단의 단위에서 깨뜨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당시 감자에는 큰 문제점이 있었다. 감자는 일장(日長)에 매우 민감한 작물인데, 원산지인 중부 안데스 지방은 낮이 짧아서 여기서 자라는 감자를 낮이 긴 유럽에 바로 가져다 심으면 감자가 생기지 않을 뿐더러 꽂도 피지 않는다. 그래서 유럽이 감자를 발견한 뒤 고국 각지에 도입했지만 감자가 자라지 않아 실패했고, 유럽의 조건에 맞는 감자 계통이 나타나기까지 200여년이 걸린 1700년대가 와서야 비로소 유럽에 본격적으로 전파될 수 있었다.
유럽에서는 1540년에 스페인에 의해 도입되었지만 한동안 아일랜드같이 빈곤한 지역을 제외한 유럽 타지역에서는 인기가 없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우선 뿌리의 덩이줄기만 식용하고 나머지는 전부 솔라닌이 잔뜩 들어있는 독초라는 점과 뿌리 작물치고도 기묘한 외형의 생소한 식재료라는 점이었다. 이런 점 때문에 감자에 대해 여러 괴담이 돌았다. 감자가 나병을 일으킨다는 소문도 있었고, 교회가 성경에 없으며 색깔이 관능적[2]이며 마치 시체를 땅에 묻듯 묻어야 나는 작물이라는 이유로 악마의 작물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심지어, 그 당시 서양인들은 하늘과 가까운 곳인 나무에 열리는 과일이 좋은 것이고, 하늘과 먼, 그러니까 땅 속에 나는 감자는 안 좋은 것이라고 천대했다는 설도 있다.[3]
가장 큰 문제는 맛이 없다는 점이었다. 충분히 개량되기 전의 감자는 말 그대로 맛이 없거나(無味) 있다 해도 밍밍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유럽인들은 아무리 찢어지게 가난해도 돌 같이 딱딱하게 굳은 맛대가리 없는 빵일지언정 빵이 있으면 빵을 먹지 절대로 다른 작물로 수프나 죽 같은걸 만들어 먹지 않으려 했다. 감자가 도입되던 초기에는 주로 수프를 끓여먹었는데, 수프에 대한 이런 열악한 인식은 감자의 도입을 더욱 어렵게 했다.
그러나 감자가 맛이 없다고 한들 지력 소모가 거의 없다는 강점은 엄청났기에 사료용으로는 최적의 작물이었다. 덕분에 프랑스나 독일 등지에서 가축 사료로 확산되기 시작하여 이미 17~18세기에 알자스 지역에 감자재배가 활성화되었고 말과 소먹이로 잘 썼다.
결정적으로 18세기 초 영국을 비롯한 각국에서 갑작스러운 흉년이 들기 시작하자 "어? 저 아일랜드 것들은 감자 먹고도 잘 사네? 우리도 한 번 심어보자!"라며 왕과 영주들은 농민들에게 감자 심을 것을 명령했다. 물론 귀족들은 안 먹었다. 19세기 초 세르비아에서는 "감자를 안 심으면 곤장을 때리겠다"고 농민들을 협박하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감자를 심고 수확했는데, 농민들이 감자를 심고서는 일반 채소인 줄 알고 이파리만 먹어서, 혹은 이파리도 뜯어먹어서(...) 병을 앓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일반적인 뿌리 작물과는 다르게 생긴, 평범한 풀떼기 같이 생긴 외형 때문에 이게 땅을 파서 덩이줄기를 캐다 먹는 작물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기는 어려웠기에 생긴 일이다. 게다가 거듭 강조하지만 감자는 먹을 수 있는 덩이줄기 부위를 제외하면 모든 부위가 독성을 띤 독초인데, 높으신 분부터 하층민까지, 감자의 덩이줄기 말고는 아무것도 식용할 수 없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신분에 관계 없이 중독 사고가 꽤 있었다. 결국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어디를 먹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데도 꽤 많은 시간과 돈이 들었다고 전해진다. 감자의 어느 부분이 식용 가능한가를 밝혀낸다고 당시의 의사들을 반강제로 가둬놓고 감자를 부위별로 먹인 인체실험은 꽤 유명하다. 그래도 18세기 무렵부터는 감자는 유럽 전 지역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고, 품종개량을 거쳐 제법 먹을 만한 물건으로 거듭났다. 전인교육으로 유명한 페스탈로치도 그의 저서에서 "수확량도 많고 맛도 좋은 감자를 널리 심자"고 장려할 정도였다. 실제로 그의 학교에서는 순무와 감자를 주식으로 하였다.
3. 각국의 전래 과정
아시아나 그 외 지역들은 이미 유럽을 통해 감자의 안정성이 충분히 입증된 후에 보급되어서 이런 어려운 도입기는 겪기 않았다.3.1. 잉글랜드
잉글랜드인으로서 처음 감자를 먹은 사람은 귀족인 월터 롤리(1552~1618)라고 한다. 이 때문에 당시의 굉장히 용감한 터프가이로 인정받았다. 몇몇 사람들은 죽을 것을 걱정했다고 한다. 이 양반은 담배도 잉글랜드인 중에서 처음 피워본 첫 애연가이기도 하다.처음에 감자를 잉글랜드에 심을 때는, 흔히 겪던 시행착오인 풀만 먹고 맛 없어 하는 이들에게 엄청 욕먹었다고 한다. 단순히 맛없는 것이 아니라 잎에 솔라닌이 있어서 중독 사건이 빈번히 일어났었다. 처음에 감자를 먹어본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풀을 먹고 "이걸 짐 보고 먹으라는 거요?!" 라며 분노하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4] 엘리자베스 1세는 이후 감자를 식용 작물로 퍼뜨리기 위해서 직접 감자 파티를 열었지만, 요리사가 실수로 줄기와 잎을 함께 요리해 반대로 여왕이 중독되는 일이 일어나고 감자의 악명만 늘어났다. 때문에 잉글랜드에서 감자가 널리 받아들여진 건 다른 나라들에 비해 한참 늦은 19세기에 들어서였다.
롤리가 제임스 1세의 노여움을 사 참수형을 당할 때, 정적들은 "불타는 감자가 참수된다!"고 비꼬았을 정도로 담배와 감자로 이미지가 깊었다고 한다.
3.2. 아일랜드
19세기 아일랜드는 영국(연합왕국)의 일원이지만 식민지급 대우를 받았다. 농토 대부분을 영국인 부재지주를 포함한 지주들이 차지했고, 이들이 농민들이 거둔 밀을 수탈해서 거의 전량 영국[5]에 넘겼기 때문에, 소작농들은 상대적으로 저가이고 영국 본토에서는 맛이 없어[6] 사람이 먹는 게 아닌 가축사료로나 썼기에 징세와 판매의 대상이 되지 않는 감자를 대량으로 재배, 거의 전적으로 의존했다. 감자와 버터밀크 외에는 모두 영국으로 넘어가니 남은 게 정말 그것뿐이었기 때문이다.그래도 감자만으로 먹고 사는 생활에 큰 변화가 생기면서 하층민들도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게 되었으며, 아일랜드의 인구는 200만에서 800만으로 4배나 급증하게 된다. 감자의 영양성분이 균형 잡히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 그리고 여기서 그 유명한 맬서스의 인구론이 나왔다. 따라서 높으신 분들의 시각이 좋지 않은 게 당연하다. 그러나 전 유럽을 강타한 감자 역병으로 감자 수확이 장기간에 걸쳐 크게 줄었는데, 식량 수탈이 중단되거나 제대로된 구제책이 작동하기는커녕[7] 식량 수출량 규제조차 이뤄지지 않아 급기야는 아일랜드인 3명 중 1명이 굶어 죽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코난 오브라이언이 직원 평가를 할 때 "불이 나면 나를 업고 갈 수 있냐"고 물어봤는데, 한 직원이 "그럼요, 감자포대 얹어 가듯이…"라고 했다가 코난이 "감자 포대? 내가 아일랜드인이라 그런가?"[8]라며 농담을 한다.
3.3. 프랑스
프랑스는 상당히 일찍부터 감자를 많이 먹었는데, 이는 프랑스 혁명과 관련이 깊다. 당시 왕궁에서는 감자를 관상용으로 재배했는데,[9] 민중들은 왕궁에서 소중히 기르는 감자가 매우 맛있으리라 생각하고 밤에 숨어들어 훔쳐가기까지 했다. 프랑스에 감자를 보급한 중농학파 앙투안 오귀스탱 파르망티에(Antoine-Augustin Parmentier)라는 사람이 바로 이 점을 파악하고 감자의 전파를 촉진시켰다고 한다. 루이 16세로부터 받은 황무지에 텃밭을 만들어 감자를 한가득 심어 놓고는 "이거 엄청 귀한 거니까 훔쳐가면 죽는 줄 알아라!!"라고 써붙여 놓은 것. 낮에는 병사를 두어 엄중하게 지키다가, 밤에는 훔쳐가기 쉬우라고 일부러 밭을 무방비로 내버려두었다. 그 결과 부지기수의 백성들이 서리꾼이 되어 허술한 경비를 따돌리고 감자를 훔치면서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당연히 똑같은 감자였기 때문에 맛이 다를 리가 없었지만 훔쳐먹은 사람들은 "너무 맛있더라"라는 소문까지 퍼뜨렸고, 혁명 전후 프랑스 전역에서 감자가 유행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물론 파르망티에는 이런 방식만 사용한 것은 아니다. 빈민들에게 음식을 나눠줄 때 특별히 감자로 만든 수프를 배급하기도 하고, 왕실 연회 때 감자로 만든 요리들을 대거 올려서 홍보하는 등의 방법도 사용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감자꽃을 머리 장식으로 사용하게 만든 것도 파르망티에의 공이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이후 파르망티에라는 이름은 프랑스의 감자 요리 이름(Hachis Parmentier)에 들어가는 영광을 입었고, 파리의 지하철역 중에는 파르망티에 역이 있다고 한다. 한국사로 치면 문익점역이 있는 셈이다.
덧붙여 파르망티에가 감자의 유용함을 알아챈 곳은 다름아닌 프로이센 왕국의 포로수용소에서였다. 그 당시 프로이센에서도 사실 "감자는 사람이 먹을 물건이 아니다"라는 인식이 퍼져있다보니 결국 짐승 사료를 포로들에게 공급한 것인데, 파르망티에는 7년 전쟁 초반에 포로가 되어 6년간의 수감생활 도중 이러한 사유로 감자만 줄창 먹다보니 '감자도 사람이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된 것이었다. 6년간 질리게 먹고도 풀려난 후 주변인들에게 저렇게 적극적으로 권한 건, 어떻게 보면 놀랍다고 할 정도. 지금도 아무런 양념 없이 그냥 삶은 감자만 먹으면 질릴 수밖에 없는데, 거기다가 이 시절은 감자가 품종 개량이 덜 되어 기본적으로 맛이 없었다. 더구나 포로들에게 주는 밥이니만큼 먹을 수 있는 최소한도로만 조리가 되었을 것이다. 소금 간 같은 기본적인 양념도 없이 말이다.
3.4. 프로이센 왕국(독일)
국왕이 친히 행차하여서 신민들의 감자 재배를 독려하는 모습이다. |
프로이센에서는 이전부터 재배하고 있기는 했으나, 상기한 파르망티에에서의 이야기대로 돼지 사료로나 쓰고 있었다. 그러나 1774년 전국에 대기근이 들자 프리드리히 2세는 감자를 구황작물로 심으라고 전국에 명령했는데, "개조차 맛이 없어 먹으려 하지 않는 것을 먹어야 한단 말입니까?"라는 상소문들이 시도 때도 없이 날아왔으며, 심지어 심으라고 보낸 감자를 농민들이 항의하면서 불에 태워버리거나 강물에 빠트리기도 했다. 이에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수랏상에 매일 감자요리를 적어도 한 가지 이상[10] 올리게 하여 백성들의 감자 재배, 섭취를 장려하고자 했다.
일단 나라의 국왕이 매일 감자를 섭취했기 때문에 이걸로 감자를 개돼지나 먹는 사료라고 떠드는건 막았지만, 그럼에도 감자의 고정관념이 좀처럼 바뀌지 않자 프리드리히 역시 파르망티에와 같은 꾀를 내었다. '이제부터 감자는 귀족의 식사와 왕의 수라에만 올릴 수 있다.'고 선포해 먹지 못하게 하고, 마을 곳곳에 있는 공터에 감자를 심어놓고 최정예 척탄병연대인 '거인 연대'까지 동원하여 일부러 떠들썩하게 감자밭을 꾸미고 지키게 하였다. 물론 감자를 보급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낮에만 보여주기식으로 엄중하게 감시하되, 밤에는 병력을 철수시켜서 농민들이 감자를 훔쳐가도록 유도하였다. 안 그래도 귀족들의 문화를 따라하고 싶어하는 평민들의 성향에 더해, '프리드리히 대왕이 매일 감자를 먹는다'는 인식이 '그 위대한 대왕 폐하의 수라상에 매일 올리려고 키우는 감자니까 분명 깨끗한 감자일 것이다.'라는 입소문으로 발전하면서, 감시병들이 자러 간 사이에 농민들이 밤에 몰래 감자밭으로 들어가 감자를 서리한 뒤 자신들의 밭에 키우기 시작하면서 감자가 프로이센 전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어느새 주식으로 완전히 자리잡을 수 있게 되었다.#(독일어 페이지)
후일 프리드리히 대왕은 감자 보급을 기념하는 뜻으로 '감자 대왕' 이라는 애칭을 얻었고, 요즘도 그의 묘소를 방문할때 석판에 감자나 감자꽃을 두고 오는 독일인들이 많다고 한다. #
3.5. 오스만 제국
감자를 처음 들여온 유럽권에 속해있으면서도 감자의 도입은 19세기로 꽤 늦은 편이다. 유사하게 아메리카에서 들어온 옥수수가 16세기에 보급된 것과도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11] 정확한 유입 시기는 크게 3가지 설이 존재하는데, 1850년설, 1853년설, 1875년설이 존재한다. 공통적으로 이 시기에 당시 러시아 제국령인 카프카스에서 흑해, 동부 아나톨리아 지방으로 유입되었다고 본다.기본적으로 감자는 건조한 스텝 기후 지역인 중부 및 동부 아나톨리아 지방에 재배가 적합했기도 했고, 기근에 대비하기 위한 구황작물로 각광을 받아 도입 초기부터 오스만 제국 정부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감자를 보급했기 때문에 불과 20여 년 만에 감자는 당시 오스만 제국령 전체[12]로 퍼질 수 있었다. 특히 1876년 아나파자르[13]에 당시 휘다벤디갸르(Hüdavendigâr) 태수였던 아흐메트 웨픽 파샤(Ahmet Vefik Paşa)가 감자 시범농장을 세우면서 본격적인 튀르키예 기후에 적합한 감자개량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각종 질병 때문에 어려움을 겪다가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도입한 감자품종을 교배시켜서 오늘날과 같은 튀르키예 감자종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3.6. 중국
명나라대에 옥수수, 고구마와 함께 전래되었다. 청나라대의 폭발적인 인구증가에 기여한 작물로 19세기까지는 단맛을 좋아하는 중국인의 성향상 옥수수와 고구마에 비해 재배가 적었으나, 옥수수와 고구마로도 인구가 감당이 안 되는 19세기에 들어서며 재배가 증가하게 되었다. 특히 안데스산맥 출신인 감자는 옥수수와 함께 청 중기 이후 활발히 개간된, 쓰촨성에서 윈난성까지 계속해서 이어지는 서늘한 고산지대에 재배하기에 매우 적합한 산물이었다.수확하는 족족 세금으로 거둬가는 주곡(쌀, 보리, 밀)에 비해 유통기한도 짧고 보관하기도 어렵다 보니 세금으로 뜯어가는 비율이 적어 농민들의 배를 채워주는 작물이었다. 하지만 감자 세금도 곡식으로 징수한다며 쌀을 모조리 뜯어가는 부작용도 있어. '쌀은 세금 내고 시장에 팔기 위해 재배하고 농민 자신이 먹는 건 감자뿐'이라는 웃지 못할 사례도 있었다.
3.7. 대한민국
조선왕조실록에 정확한 전파 시기가 적혀있는 고구마와 달리, 감자는 정확한 전래 시기가 적혀 있지 않다. 일단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따르면 1824-5년쯤에 청나라를 통해 전래되었다고 한다. 청나라와 교류하며 조선에 전해졌다는 설도 있고, 청나라 사람들이 조선에 인삼을 도둑질하러 넘어왔을 때 먹고 버티려고 감자를 심어 전래되었다는 설도 있다.당시 감자가 조세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금령을 내린 적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함경북도 무산군의 수령 이형재가 감자를 보급하려 할 때도 감자를 심던 사람들이 벌 받을까 봐 시치미를 떼며 씨감자를 주지 않아, 많은 소금과 교환하고 나서야 얻을 수 있었다 한다.[14]
이렇게 도입되어 감자는 한반도 북방 지역과 강원도 산간까지는 빠르게 전파되었다. 하지만 한반도 남부까지 전해지는 데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필요했다.[15] 일례로 1832년에 전북 지방에 머물렀던 영국의 암허스트 호 선원들이 감자 재배법을 알려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서울에서는 1883년 선교사가 처음으로 재배했다.
이는 추정컨데 이미 18세기에 일본에서 들여온 고구마가 남부 지방에서 널리 보급되어서 감자는 수요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반대로 북부 지방에 감자가 빠르게 전파된 이유도 고구마는 추위에 약해서[16] 추운 북부지역에 별로 전파되지 못해서 대신 감자가 빠르게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시기 이전에 한반도 지역에서 감자 먹는 영화나 드라마가 있다면 명백한 재현 오류이다.
3.8. 일본
1603년 네덜란드를 통해 전파받았다고 한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였고, 네덜란드 상인으로부터 인도네시아를 거쳐서 전파받았다고 전해진다. 감자의 일본어인 자가이모(ジャガイモ)의 어원은 자가타라이모(ジャガタラ芋)의 줄임말. 자가타라에서 온 서류(薯類)[17]라는 뜻이다. 자가타라(ジャガタラ)는 네덜란드어 Jacatra에서 유래된 말로 자카르타나 자바섬을 일컫는 구어다. 일본 내에서는 자카르타에서 전래되었다는 설이 정설이다. 자가타라이모(ジャガタラ芋)란 말은 지금도 종종 사용된다.척박하면서 기후에도 알맞았던 홋카이도와 도호쿠 지방에서 널리 재배되었는데, 그 때문에 텐메이 대기근을 잘 넘길 수 있었다고 한다.
[1] 주식으로 사용되는 작물들이 공통적으로 맛이 밍밍하긴 한데, 감자는 그중에서도 특히 맛이 없다.[2] 흔한 연한 노란색의 버뱅크 감자나 흰색 수미감자 외에 보라색, 주황색, 초록색 감자도 있다.[3] 다만 유럽에도 마찬가지로 땅에 묻었다가 캐내는 당근이나 양파, 무 등이 있었고, 게다가 색깔은 당근이나 양파 등도 화려하긴 매한가지인만큼 이건 좀 신빙성이 낮은 설이다.[4] 담배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주인이 앉아 있는 의자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오르자 화재로 알고 기겁한 하인이 물벼락을 끼얹은 일도 있다.[5] 원래 식량수입이 많은데다, 특히 아일랜드가 거리도 가깝고 영국의 식민지라는 특성상 외국에서 수입하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돈을 들이고 밀을 구할 수 있어, 밀 이출의 원인이 되었다.[6] 옛날 감자는 정말 심각할 정도로 맛이 없는데다 식감도 엉망이라 서민층도 피하는 음식이었고, 오늘 내일 굶어죽을까 하는 빈곤층이 살기 위해 먹는 음식이었다. 이후 품종개량이 활발해져 맛이 좋아진 뒤에야 오늘날처럼 대중적으로 먹게 된다.[7] 구제책은 오직 첫 해에만 제한적으로 작동했다.[8] 부모 모두 조상 대대로 아일랜드계인 100% 아일랜드계 미국인 연예인으로 유명하다. 오브라이언(O'Brian), 오닐(O'Neil/O'Neal), 오말리(O'Malley)등 O' 가 들어간 성씨는 전형적인 아일랜드계 성씨다.[9] 마리 앙투아네트는 감자꽃을 머리 장식으로 사용했다고도 한다.[10] 프리드리히 2세의 군인 이미지와 이 감자 이야기가 겹쳐서 맨날 감자만 수랏상에 올랐다고 여길 수도 있는데, 정작 프리드리히 2세 본인은 상당한 미식가이자 대식가여서 매일 거창하게 식사를 했다고.[11] 사실 오스만 제국에서 옥수수의 도입이 빨랐던 데에는 좀 해괴한 이유가 있다는 설이 있는데, 이삭을 감싸고 있는 잎의 모양이 터번 같고, 잎을 벗겨보면 알알이 꽉 들어차 있으며, (이슬람권에서 노인의 경륜과 지혜의 상징인) 허연 수염이 나 있는 식물이라 '마치 심지 굳은 무슬림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 같아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다.[12] 북부 그리스, 이집트, 시리아 등[13] 튀르키예 서부 흑해 지방에 속하는 사카리야 도[14] 당시에는 소금이 매우 귀중했다.[15] 애당초 감자가 한반도 북부지역과 산간지역에 빨리 전파된 이유 자체가, 따뜻한 기후를 요하는 고구마 재배에 실패했기 때문이다.[16] 고구마는 서리가 내리면(기온이 영하가 되면) 바로 부패하는 작물이다.[17] 덩이줄기랑 덩이뿌리를 통틀어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