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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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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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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ddie Merc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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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년기 ~ 대학 시절2. 3. 솔로 활동4. 말년, 그리고

1. 유년기 ~ 대학 시절

파일:프레디 머큐리 1947.jpg
1947년, 어머니의 품에 안긴 어린 시절의 프레디

파일:external/i102.photobucket.com/littlefreddie.jpg
동아프리카 인도양 해안에 위치한 섬인 잔지바르에서 총독부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반적인 록스타들과는 달리[1] 유럽계 백인이 아닌 파르시[2]이며, 본명은 파로크 불사라[3]이다. 본명은 파로크 불사라이지만, 아시아 계통의 이름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1번의 개명으론 프레디 불사라 2번째 개명으론 프레디 머큐리로 개명하였다. Freddie로 불린 이유

참고로 파르시는 이란 고원에 기원을 두고 고대 페르시아와 관계가 있지만 이미 이란을 떠난 지 너무 오래되어 사실상 인도인으로 인식된 지 오래다.[4] 언어만 고대 페르시아어인 파르시어를 고수할 뿐인데 이마저도 타 종족들과의 통혼 등으로 점차 줄고 있어 파르시는 이대로 가면 소멸된다고 우려까지 나온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프레디 머큐리를 인도인이나 탄자니아 사람이 아닌 이란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 대한민국 내에서도 1980년대~1990년대 퀸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퀸을 영국 밴드지만, 프레디 머큐리는 이란인라고 표시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건 종교가 조로아스터교면서 XX계 영국인 등을 두며, 그 뿌리를 중시한 케이스다. 물론 세계적으로는 파르시는 이미 이란을 떠난지 천 년이 넘었으며 이란은 호메이니에 의해 시아파 신정국가로 인식되어서 그냥 인도계 영국인이라고 표시한다.

한국에서도 대부분 일반인들은 프레디 머큐리를 인도인 이민자로 알고들 있다. 다만 프레디 머큐리 본인은 그런 혈통에 대해 전혀 신경쓰지 않아서 탄자니아 출신이면서도 그쪽 사람들을 외면했고, 이슬람 압제에 떠난 파르시 집안이지만, 무스타파(Mustapha)[5] 같은 '알라가 너를 위해 기도할 거야.' 같은 가사도 만드는 등 혈통에 대해 초탈한 모습을 보였다.

프레디 머큐리의 아버지 보미 불사라(Bomi Bulsara)는 18형제 중 하나로 태어났는데 그의 고향은 인도 구자라트 주의 불사르(Bulsar)라고 한다.[6] 불사라라는 성은 프레디의 아버지가 잔지바르로 건너오면서 고향 마을의 이름을 따서 그대로 붙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실제로 프레디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삼촌, 백부들도 모두 하나둘씩 잔지바르로 건너와서 자리를 잡았다. 부모님과 친척들이 인도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그들은 파르시로 정통 인도 혈통이 아니고 독실한 파르시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페르시아계 혈통이었다. 프레디의 부모님들도 생전 자신들을 인도라는 출신 배경보다 파르시라는 것을 훨씬 강조하며 살았다.

어린 머큐리는 잔지바르의 영국의 개신교 교파인 성공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수녀들에게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머큐리의 부모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8세 때 그를 인도에 있는 학교에 보내기로 결심한다.[7]

그리하여 머큐리는 인도 뭄바이 동남쪽에 위치한 판치가니(Panchgani)의 성 베드로 성공회 성당(Saint Peter church of England)에서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이 학교는 모든 종교의 학생들을 아무런 차별 없이 받아들였으며, 기본적인 성경공부와 채플 외에는 학생들의 종교생활에 크게 간섭하지 않아서 당시 머큐리가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를 충실히 따르며 학생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가족과 떨어져서 공부하는 것을 무척 괴로워했다고 하며, 그 때문에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으로 자란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음악에는 일찍이 두각을 보여서, 학창 시절 합창부에서 활동을 하기도 하고 교내 밴드에서 건반을 치기도 했다. 음악 외에도 미술과 스포츠를 잘했고, 특히 탁구복싱은 교내 챔피언이었다.

하지만 레슬리앤 존스의 프레디 머큐리 바이오그래피에 따르면 프레디의 인도 유학은 끝이 좋지 못했다. 처음에는 인도의 기숙학교에서 적응하며 잘 다니는 듯했지만 학교에서 공부하던 막바지 즈음에는 성적도 확 떨어지고 프레디 본인도 방황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파일:external/2.bp.blogspot.com/Freddie-Mercury-2.jpg
뭄바이, 학창 시절의 프레디[8]

어쨌든 인도에서 학교를 다닐 때는 딱히 큰 사고를 치거나 말썽을 부리지는 않았다고 한다. 인도에서 같이 학교를 다녔던 프레디의 동창들은 그를 밝고 좋은 아이였다고 회고했다. 여성들에게 대화를 걸지 못하는 쑥맥도 아니었고, 남녀 가리지 않고 고루 친구를 사귀었다고 한다. 지인들에게 달링 하며 친근하게 말을 거는 습관은 그때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훗날 그의 컴플렉스가 되는 뻐드렁니도 그때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던 것 같다. 프레디의 동창들은 프레디를 버키(bucky, 뻐드렁니)[9]라는 별명으로 부르고는 했는데 훗날 프레디에 대해 기억하는 동창들은 파로크나 프레더릭이라는 이름보다 버키라는 별명으로 그를 자주 칭할 정도였다.

인도에 유학까지 갈 정도로 집안 사정이 좋은 편이었지만, 잔지바르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직후인 1964년에 술탄정이 전복되고 공화정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기존의 지배층인 아랍인들과 페르시아인, 인도인 수천 명 가량이 흑인에게 학살되고 살아남은 자들도 재산의 절반 가량을 압수당하는 조건으로 해외로 추방되었다.[10] 이로 인해 부유하던 프레디 머큐리의 가족들도 상당수의 재산을 빼앗기고, 프레디와 함께 잔지바르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영국으로 이민을 간 후 집안 사정이 많이 안 좋아졌다. 그래서 부잣집 도련님이었던 프레디 머큐리도 아르바이트를 했어야만 했는데, 비행기 화물칸에서 짐을 옮기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동료들에게 자기는 알아주는 뮤지션이라고 뻥을 쳤다. 단순한 허세였지만, 프레디 머큐리 스스로가 뮤지션이 될 것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한 첫 번째 발언이었다.
파일:external/queenphotos.files.wordpress.com/a-young-freddie-miming-jimi-hendrix-on-a-t-square-at-ealing-college-of-art-1969.jpg
대학 시절 프레디

그 후 영국에서 일링 예술 대학(Ealing Art College) 그래픽 디자이너 학사로 대학을 마쳤다.[11] 아무래도 1970년대 초에 그럴듯한 대학에 다니고 있던 학사 학위를 가진 엘리트였고, 그래픽 디자이너는 어딜 가도 먹고 살 길이 충분했기 때문에 음악을 취미가 아닌 직업으로 삼을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퀸에 가입한 이후 직업 뮤지션으로 살아가기로 결단을 내렸고, 친한 친구에게 '아무래도 나는 음악을 해야 될까 봐.'라고 말했었다. 후에 이는 신의 한 수가 된다.

프레디가 워낙 노는 것을 좋아했고, 당시 영국 대학생들도 술파티 같은 것을 빈번하게 했기 때문에 친구들과 모여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숙취에 쩔어 새벽에 집단으로 널브러져 있던 일도 자주 있었다. 그리고 그런 파티에서 프레디가 기타를 연주하며 존 레논의 노래를 부르고는 했는데, 그 목소리가 아주 끝내주었다고 한다.

참고로 프레디는 인터뷰에서 존 레논에 대해 레논은 가장 위대한 뮤지션이고(he was just the greatest) 유일무이한 독특한 존재이며(unique and the one-off)그를 무척 존경한다(I admire John Lennon very much)고 밝혔을 정도로 그의 팬이었다. 퀸의 정규 10집 앨범 Hot Space에서는 레논에 대한 헌정곡인 <Life Is Real (Song For Lennon)>을 써서 수록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프레디는 지미 헨드릭스의 광팬이었다. 그의 공연을 14일 연속으로 관람하기도 했고, 직접 그린 헨드릭스 드로잉이나 그에 대한 논문도 팔았다고 한다.
파일:external/oddstuffmagazine.com/416.jpg
대학 시절 기타를 연주하는 프레디
위에 비틀즈 멤버 조지 해리슨의 포스터가 보인다. 프레디 머큐리의 대학 동창들은 이 때부터 프레디가 뭔가 크게 될 법한 떡잎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

2.

파일:Freddie mercury history.png
연도별 프레디 머큐리의 모습[12]

대학 재학 중에 아마추어 밴드 활동[13][14]을 하다가 로저 테일러브라이언 메이가 이끌던 스마일을 유심히 지켜보던 프레디는 보컬 팀 스타펠의 소개로 두사람과 만나게 된다.

이후 팀 스타펠이 'Humpy Bong'이라는 밴드에 가입하기 위해 스마일을 탈퇴하자[15] 바로 그 빈 자리를 꿰찼다.[16] 그리고 팀의 베이스 오디션을 보았고, 3번의 오디션 끝에 베이시스트 존 디콘을 영입하여 이 탄생하게 되었다. 후일 로저는 스마일 시절에 웬 이상한 녀석이 공연마다 와서 공연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잔소리를 했는데 그게 프레디였고, 그 잔소리가 밉지 않은 녀석이었다고 밝혔다.

팀 스타펠은 프레디와 여러모로 죽이 맞는 친구였다고 한다. 대학 강의실에서 프레디와 스타펠이 책상을 두들기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동기들은 "쟤네 또 노래 부르면서 논다" 식으로 웃어 넘겼다는 듯.

평전에 따르면 프레디는 내성적이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쾌활한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낯선 사람들이나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는 내성적으로 입을 다물고 침묵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친한 사람들 앞에서는 그렇게 노래도 부르고 장난도 치고 크게 떠들기도 했다.

퀸이나 프레디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 자주 나오는 증언 중 하나가 무대 위의 프레디와 일상 생활 속에서의 프레디는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는 것이다. 무대 위에서는 다이나믹한, 굉장히 쾌활하면서 에너지 넘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면 일상 속에서의 프레디는 내성적이고 감성적인 면을 자주 보였다고 한다.

프레디가 죽은 이후 애인이었던 짐 허튼이 방송에 나와 증언하기로 일상 생활 속의 프레디는 '내성적인 보통 사람'이었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보아도 일상에서의 프레디는 내성적이며 복잡한 사연을 가진, 알 수 없는 부문이 있는 그런 외로운 인물이었다는 식의 말이 종종 나온다.

로저와 브라이언은 프레디와 처음 만났을 때 서로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브라이언 메이는 이미 스마일 이전에도 <1984>라는 밴드를 만들어 근방에서 이름을 날렸던 적이 있었고, 로저 테일러는 대학에 오기 전 고향에서 아마추어 밴드 활동[17]을 하면서 역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좋은 멤버를 구하지 못해 이리저리 아마추어 밴드를 옮겨다녔던 프레디에게는 실력 좋은 기타리스트와 드러머가 더더욱 눈에 들어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프레디는 스마일의 공연에 매니저처럼 따라다니면서 팬을 자처하고 잔소리도 늘어놓았다.[18] 팀 스타펠이 탈퇴하고 스마일이 기획사에서도 버림받는 밴드가 되자, 로저와 브라이언은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프레디가 생각나서 그에게 연락을 취해 가입을 문의했다. 이런저런 아마추어 밴드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던 프레디는 고민도 없이 바로 OK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Queen_A_Night_At_The_Opera.png
앨범 A Night at the Opera의 디자인

퀸의 로고는 프레디가 디자인하였으며, 위의 자켓도 프레디의 작품이며, 이 로고는 4, 5집 이외의 앨범에도 자주 사용되었다. 로고에 들어가는 동물들은 멤버들의 생일 별자리를 나타낸다고 한다.[19]

밴드 이름을 '(Queen)'으로 제안한 것도 프레디였다. 처음에 다른 멤버들은 퀸이란 밴드명에 반대했다고 한다. 퀸이라는 단어에는 속어로서 'gay'와 같은 의미도 있기 때문이었다.[20] 그러나 프레디는 퀸이라는 이름을 고집했고, 다른 멤버들은 그 고집을 이기지 못해 결국 밴드 이름을 퀸으로 결정하게 된다.

퀸 초기에는 글램 록의 영향을 받아[21] 긴 머리, 검은 매니큐어, 검은 눈화장, 나비 날개같은 옷, 몸에 딱 붙는 타이즈(발레복)를 주로 입었는데, 이는 성악, 오페라, 클래식, 발레 등을 즐겨보는 것이 취미였던 프레디의 영향이 컸다. 손발이 오글거리는 의상이지만 강한 인상과 큰 얼굴을 가진 것치고는 몸매, 특히 하체가 길고 가는 편이라 의외로 또 소화를 잘 했다. 이 중에서 날개 의상은 곧 자취를 감추지만 타이즈는 퀸 중반기(1977~1979)에도 종종 보이기도 한다.[22]

퀸 초기의 프레디는 무대조명과 의상에 유난히 집착했다고 한다. 공연 준비 금액의 절반 가까이를 의상과 조명에 쏟아부을 정도였다. 게다가 도저히 남들이 이해를 하지 못하는 기괴한 의상을 멤버들에게 입으라고 강요해서 퀸이 공연 준비를 하는 대기실에서는 '으악! 도저히 이런 거 못 입겠어!' 라는 소리가 자주 튀어나왔었다. 특히 퀸에서 나이가 제일 어리고 성격이 수줍었던 멤버 존 디콘이 이상한 의상을 자주 강요받아서 난감했던 적이 많았었다고 한다.

파일:external/img.pinknet.cz/f26.jpg

라이브에서 이런 옷 입고 무대를 뛰어다니는데 좀 민망하긴 하다. 덕분에 수년 동안 세상에서 가장 옷을 못 입는 팝 아티스트 1등을 차지했다.[23]
" I Can Hear Music"[24] "Goin' Back"[25]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프레디는 1집을 녹음하면서 장난 삼아 "로네츠"의 "I Can Hear Music"[26]을 녹음했던 적이 있다. 의외로 녹음 퀄리티가 좋아서 음반으로 발매했는데, 이때 본명을 쓰지 않고 'Larry Lurex'[27] 라는 이름으로 발매했다. 물론 당시에 프레디는 무명의 가수였기 때문에 본 이름으로 발매한 음반도 사실상 묻혔었는데, 나중에 이것이 프레디가 무명 시절에 녹음했던 앨범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지금은 수집가들 사이에서 꽤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고 한다. 젊은 시절 프레디의 미성을 느낄 수 있는 곡이며, 이 중 Goin' Back은 1995년 15집 앨범의 수록곡 Mother Love의 끝부분에서 등장한다.

3집 발매 전까지 퀸은 여타 무명 밴드가 그렇듯이 금전 사정이 좋지 않았다. 이는 프레디도 마찬가지라 퀸이 처음으로 방송 출연을 했을 때 길거리 가전제품매장에 진열된 TV로 방송에 나온 자신의 모습을 봐야 했다.[28]

데뷔 앨범인 <Queen>을 시작으로 점점 이름을 알리면서 명곡 <Bohemian Rhapsody>가 수록된 <A Night at the Opera>가 대박을 치면서 인기를 얻었으나 이상하게 평론가들한테는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듣기 좋은 육자배기도 한두 번인데 자기 까는 소리를 줄창 들으니 좋은 감정이 생길 리가 만무. 인터뷰도 잘 안 하고 평론가들에 대한 감정도 무척 좋지 않았다. 특히 성 지향성 때문에 더 그랬는데 프레디의 게이 의혹과 개인 사생활을 파헤치려는 찌라시를 생산해내는 언론의 행태로 그는 언론을 더욱 불신하게 되었다.[29]

무엇보다 프레디는 여러모로 언론에서 가십거리가 되기 쉬웠다. 일단 인종 측면에서 보자면 프레디 본인이 유럽인이 아니었다. 프레디는 인도계 파시족, 즉 영국에서도 차별받기 쉬운 아시안 인종이었고, 뿐만 아니라 어릴 적에 영국으로 이민을 온 사람이었다.[30] 어릴 적에 멀리 있는 잔지바르에서 영국으로 이민 온 파시족 혈통은 그 시절 온갖 차별과 혐오를 받기에 충분했다. 지금도 유럽 각지에서 인종차별, 혐오 범죄가 심심찮게 터지고 있는데 세계 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 시절에는 오죽했을까.

게다가 이런 태생적 정체성이 있었던 마당에 양성애 성향도 있었으니 언론에서는 더없이 공격하기 쉬운 대상이었던 셈. 프레디가 언론과 평론가들을 불신했던 이유는 자신의 이러한 특징을 이유로 공격을 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나중에 프레디도 평론가들의 계속된 악평에 짜증이 폭발했는지 "그 새끼들이 뭐라고 지껄이든 상관 안해요." 라는 식으로 소리를 질렀다는 후문도 있다.

무대를 휘젓고 다니는 거친 록 뮤지션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게 클래식 음악이나 오페라, 발레 같은 장르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다. 그의 이런 음악 성향은 어릴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었다. 게다가 판타지 전설 같은 것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관심사 덕분에 퀸 초기 가사에는 '요정'이나 '괴물', '정의의 기사' 같은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동시대 영국 밴드들에 비해 유럽적인 감성이 짙은 퀸의 음악과 맞물려 엄청난 시너지를 일으켰다.[31]

프레디의 1970년대와 1980년대 보컬이 차이가 크다.[32] 1970년대에는 타고난 음색을 토대로 비강 공명과 구강 공명을 적절히 활용하며, 필요에 따라 부드럽게 가성을 넘나드는 방식을 주로 썼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는 구강 포먼트를 최대로 하고[33], 후두와 비강 등의 발성 기관을 협착시키며 댐핑을 엄청나게 줘서 드라마틱한 탁성을 유도했다. 이는 한국의 판소리 명창들이 주로 쓰는 방식이다. 또한, 뒤로 먹는 소리나 목을 조인 가성도 많이 썼다. 이러한 창법의 변화로 1970년대 공연에는 창법이 목에 무리가 가는 수준은 아니어서 컨디션 분배도 잘 되었는데, 1980년대부터는 성대에 엄청 무리를 주는 창법으로 인해 (먹는 소리, 턱으로 누르는 소리 등) 목에 피로가 빨리 축적되어서 투어는 물론이고 한 공연에서도 후반으로 갈수록 힘이 달린다. 이런 경향은 마지막 투어인 매직 투어에서 두드러진다.

참고로 콧수염을 처음 기른 것도 1980년부터다. 즉, 이 때부터 아예 노래 스타일이나 패션 스타일까지 바꿔버린 것. 때문에 콘서트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프레디 다큐멘터리인 Who Want To Live Forever에서 지인들의 인터뷰를 보면 미국 뉴욕 여행에서 게이 클럽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이 때 프레디가 미국의 게이문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더 이상 발레복을 입지 않고 가죽자켓에 짧은 머리에 콧수염을 기르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80년 이후 갑자기 목소리가 바뀌어 버린 이유에 여러 추측이 있지만, 추구하는 음악이 달라진 것도 큰 영향을 줬을 것이고, 성대 폴립이 생기고 줄담배피우면서 피치를 맞추기가 어려워진 것도 이유가 될것이다.[34]

3. 솔로 활동

파일:mrbadguy.png
Mr. Bad Guy (1985)
파일:Barcelona_Album_Cover.jpg
Barcelona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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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의 골수팬이 아니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프레디는 퀸과 별개로 솔로 앨범도 두 장이나 냈었다. 퀸 활동의 휴식기였던 1985년에 Mr. Bad Guy란 앨범[35]과 1987년경 유명 소프라노인 스페인의 몽셰라 카바예바르셀로나 올림픽을 기념해서 만든 'Barcelona' 활동을 했었다.[36] 그리고 1987년에는 솔로 싱글 <The Great Pretender>을 커버하기도 했다.[37]

Mr.Bad Guy 앨범에서는 기존 퀸에서 보여주었던 다양한 실험적인 록 음악보다는 철저히 프레디 본인의 취향이 담긴 음악들을 수록했다. 당시 유행했던 디스코,오페라, 팝, 모던락 등 퀸의 음악과는 확연히 다른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바르셀로나' 앨범은 그가 좋아했던 성악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앨범으로 하나의 클래식 앨범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풍부하고 다양한 프레디의 고음역대의 발성을 마음껏 들을 수 있다. 거기다 이 시기부터 80년대의 탁성에서 조금씩 본래의 미성으로 돌아오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다만 후에 그가 에이즈로 사망했다는 이유로 바르셀로나 올림픽 공식 응원가에서 탈락된 점은 안타까운 점이라 할 수 있겠다.

본래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공식 주제가는 프레디와 몽셰라 카바예가 듀엣으로 부른 'Barcelona'였으나 당시 에이즈는 동성애자만 걸리는 질병이라는 인식이 팽배했기에 IOC가 부정적인 영향을 줄수있다고 주제가를 바꿔버렸다. BBC는 이에 대해 항의의 차원이었는지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중계 내내 오프닝/엔딩송을 올림픽 공식 음원인 'Amigos para siempre' 대신 프레디의 'Barcelona'를 계속 사용했다.#영상 심지어는 올림픽 개막식 공식 중계 오프닝 시퀀스에도 삽입되어 있다.#[38]

'The Great Pretender'에선 70년대로 돌아간 느낌이 난다. 퀸의 예전 뮤직비디오에서의 장면을 가져와 콧수염이 있던 뮤비에서도 밀은 채 다시 찍었다.[39] 또한 여장을 했는데 자신은 물론이고 친구인 로저 테일러와 피터 스트라커[40]도 함께했다.[41]

아이러니하게도 프레디의 솔로 활동이 다시 알려진 건 이 시기 활동을 사실과 다르게 각색한 전기영화 때문이다. 전기영화에선 프레디의 솔로 활동을 일종의 타락, 방황 정도로만 나쁘게 묘사했다.

프레디 머큐리/솔로 활동 문서 참조.

4. 말년, 그리고

Inside my heart is breaking,
내 마음은 부서지고,

My makeup may be flaking,
내 화장은 흩날리지만,

But my smile still stays on.
내 미소는 여전히 남아있지.

- 'The Show Must Go On' 中
프레디는 제 생일에 늘 우리와 함께 했는데, 그 해에는 몽트뢰에서 꽃을 보냈어요. 그리고 이런 메시지를 남겼어요.

'미안해, 엄마. 이번 생일은 함께 있지 못할 거 같아.'
1991년, 제르 불사라[42]
파일:external/266d88a1e18c54b8f4e603e78fce7a195ce7c668a9ebc2aa27f18da01397339d.jpg
사망 6개월 전인 1991년 5월 30일[43][44]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

말년에 에이즈로 고생하다 죽었는데, 1991년 11월 23일 에이즈 감염을 공식 인정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그 다음 날인 11월 24일에 숨을 거뒀다. (당시 조선일보 기사)

죽을 무렵엔 앞도 잘 안 보이는 지경이었다고 한다.[45] 프레디는 1987년, 멤버들은 1988년에 이미 그의 에이즈 감염을 알았다고 한다. 그 즈음부터 프레디는 급속도로 초췌해지며 에이즈 감염설이 퍼지고 있었는데[46], 이때 프레디는 멤버들에게 '너희들도 내 문제가 뭔지 알고 있겠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얘기하고 싶지 않아. 난 그냥 죽을 때까지 음악을 했으면 좋겠어'라는 식으로 고백을 했다. 나머지 멤버들도 그의 뜻에 따라 더 이상 그 문제를 논하지 않고 음악 작업에만 몰두했다. 멤버들과 주변 사람들은 프레디를 보호해 주기 위해서 누군가가 물어보면 에이즈에 걸리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정확히 언제쯤에 에이즈에 걸렸는지는 모르지만 에이즈 전문가들과 주변 인물들은 1985년 라이브 에이드보단 이전일 것이라고 추정한다.[47] 이때부터 프레디의 몸에 카포시 육종이 나타나는 등[48] 이상이 조금씩 보였고, 공연 후에는 엄청 지쳐버리는 등 많이 힘들어했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프레디의 에이즈 감염 시기는 팬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인데, 에이즈라는 질병 자체가 잠복기가 일정하지 않고, 사람마다 면역 결핍 증상이 나타나는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팬들이 추정하는 에이즈 감염 시기는 프레디가 1982년 미국에 놀러갔을 때, 혹은 Hot Space 앨범 이후 프레디가 잠시 음악에 열정을 잃고 밤놀이에 빠졌을 때, 아니면 더 올라가서 1970년대 말 미국에서 클럽에 드나들 때까지도 감염 시기를 넓게 잡는 의견이 있다. 프레디에게서 면역 결핍 증상이 나타난 시기로 계산을 해 보면 감염 시기는 1982년이나 1983년 사이가 유력하다고 한다. 그때는 많은 사람들이 당대의 사회적 시선 때문에 HIV 보균자 검사를 받는 것을 꺼렸는데 프레디 역시 그랬다. 하지만 동성애인인 짐 허튼과 일본 여행을 가기 전에 비밀리에 검사를 받았는데, 병원 측의 누군가가 정보를 흘렸는지 언론사 쪽에 프레디가 HIV 검사를 받았다는 소문이 바로 나버렸다.

물론 프레디 역시 인간인지라 에이즈 감염을 처음 선고받았을 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의사가 처음으로 프레디에게 에이즈의 감염을 알려줬을 때 프레디는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눈물까지 보였다고 한다. 프레디의 마지막 순간의 이야기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Who Wants to Live Forever'에서 당시 상황을 재연했는데, 무척이나 싱크로율이 높은 재연 배우가 에이즈 감염을 선고받았을 당시 프레디의 혼란스럽고 절망스러운 모습을 아주 잘 표현했다.

프레디는 파파라치들 때문에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기 때문에 파파라치들을 따돌리기 위해 자신의 차량에 마네킹을 분장시켜서 시선을 따돌린 후 자신은 나중에 다른 차량으로 나가는 등 많은 고생을 했다. 그래서 결국 런던의 집을 떠나 다른 곳에서 지내기 시작한다.[49]

프레디가 병에 걸림으로써 1986년을 기점으로 퀸은 라이브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프레디는 매직 투어 이후로 병색이 짙어졌으나, 1988년경까지 솔로곡으로 라이브를 계속했다. Barcelona를 몽셰라 카바예와 함께 라이브를 했었으며, 클리프 리처드와 함께 한 1988년 4월 14일 공연은 프레디의 마지막 라이브로 알려져 있다.[50] 즉, 1989년 The Miracle 앨범이 발매될 당시에 프레디가 라이브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안 됐었던 것은 맞으나, 1986년 이후 프레디가 어떤 라이브도 일체 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51]

병색이 짙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프레디는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로 약을 먹어가며 악착같이 버텨내고 몸이 잠깐 좋아지면 그때 다시 작곡하고 노래하기를 반복했다. 프레디의 생전 마지막 퀸 정규 앨범인 Innuendo는 프레디가 언제쯤 스튜디오에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멤버들에게 연락하면 나머지 세 멤버들이 데모 버전을 미리 만들어 놓고, 프레디는 컨디션이 좋을 때 스튜디오에 와서 보컬을 녹음하는 방식으로 앨범을 만들었다. 생전 마지막 싱글인 The Show Must Go On은 음이 높아서 브라이언 메이는 프레디가 이 곡을 부를 수 있을지 걱정했다고 하는데, 프레디는 "I'll fuckin' do it, darling"[52]이라고 내뱉은 후, 투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독한 보드카를 쭉 들이켜더니 삑사리 없이 한 큐에 녹음을 마쳤다고 한다.[53]

얼마나 마르고 초췌해졌는지 1991년 2월에 촬영한 <I'm Going Slightly Mad> 뮤직 비디오를 보면 두꺼운 화장으로도 병색을 감추기 힘들 정도. 콧수염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움푹 패인 두 볼이 팬들을 안쓰럽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유쾌한 분위기와 멤버들의 코믹한 표정 연기가 인상적인 뮤비.

프레디는 건강이 허락할 수 있을 때까지 음악 작업을 했고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했다. 죽기 직전에 찍은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의 뮤직비디오도 원래 애니메이션으로 대체하려고 했는데, 프레디가 고집을 부려서 멤버들과 함께 출연하는 평범한 내용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퀸의 1980년대 후반 뮤직비디오들을 보면 시간이 지날 때마다 프레디가 점점 병색이 완연해지고 초췌해지는 것이 보인다. 프레디는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죽기 전날까지 부인했지만, 되려 뮤직비디오가 에이즈 감염설이 널리 퍼지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프레디는 죽기 전 근 1년 간 언론에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더 이상 치료가 의미 없음을 알게 되자 스스로 치료를 거부했다.[54] 그리고 실제로 당시에는 에이즈라는 병이 발견된 지 10여 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생명을 연장해줄 수 있는 방법이 전무했다.[55]

프레디가 면역 결핍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 그의 곁에는 그의 애인이자 이발사였던 짐 허튼이 함께 있었고, 그는 프레디의 임종까지 곁에서 지켰다. 당시 짐도 1990년에 받았던 에이즈 검사에서 양성 판정을 받았지만 프레디에게 1년 간 그 사실을 숨겨왔다고.[56] 프레디가 죽어가고 있을 때 그의 절친이었던 가수 엘튼 존이 자주 병문안을 왔었다고 한다. 프레디의 병문안은 허락을 받은 몇 사람만 할 수 있었고, 엘튼은 그 중 1명이었다. 프레디와 엘튼 사이의 우정을 알 수 있는 부분.

프레디는 죽기 직전 그나마 몸이 괜찮을 때 그림을 상당수 그렸다고 한다. 저택에 틀어박혀 에이즈로 고통받고 있을 때 텔레비전에서 무슨무슨 그림이 비싼 가격에 팔렸다는 뉴스가 나오자 프레디는 내가 해도 저 정도 보단 잘하겠네.라면서 그 자리에서 그림을 몇 점 그렸다. 그 이후에도 디자인을 공부했던 대학 시절 경험을 살려 그림을 몇 점 더 그렸고, 프레디는 자조 섞인 목소리로 애인인 짐 허튼에게 '이거 내가 죽고 나면 무지 비싸게 팔릴 거야.'라고 농담처럼 말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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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의 생전 마지막 사진[57]

이렇게 긍정적으로 밝게 여생을 보내려 노력했지만 슬프게도 결국 1991년 11월 24일 프레디는 스스로 일어날 힘조차 잃어버린 채 그의 비서에게 에이즈에 걸렸음을 인정하는 공식 성명을 발표하게 하고 채 24시간이 안 돼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고는 전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처음에 세계 언론은 앞다투어 에이즈를 부각하며 프레디가 이 병에 걸렸다고 기사를 썼지만, 곧[58] 그 내용은 다시 프레디가 죽었다는 기사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의 사망 기사는 전 세계 언론에서 톱기사로 다루어졌다. 그러나 한국에선 몇몇 언론에서 짧게 보도되거나 늦게 언급되었다. #,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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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un의 당시 신문

세계를 흔들었던 가수가 세상을 떠나자 멤버들은 에이즈 모금행사 겸 프레디 머큐리 추모 콘서트를 개최하는데 이 콘서트에는 엘튼 존, 메탈리카, 데프 레파드, 액슬 로즈, 로버트 플랜트, 조지 마이클, 데이비드 보위, 애니 레녹스등 당대 슈퍼스타들이 총출동했다. 그리고 멤버들은 그의 유작을 모아 발매하고 죽음을 애도하며 'No One but You'를 작곡한다. 그리고 이 곡을 끝으로 그의 친구이자 멤버였던 존 디콘은 1997년, 은퇴를 선언한다.[60]

독실한 조로아스터교 신자였던 프레디의 부모님은 프레디를 조장(鳥葬)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현대 문명에 조장이라는 풍습은 거부감이 많이 들 수밖에 없었고, 또한 프레디 또한 종교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세속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디콘, 메이 등 퀸 멤버들과 지인들이 강력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심지어 영국 언론과 여론조차도 프레디를 조장하겠다는 프레디 부모의 행동을 비난했을 정도였다. 결국 프레디는 화장[61]되었고 재는 대중이 알지 못하는 곳에 뿌려졌기 때문에 그의 무덤은 없다고 알려졌었다.

하지만 지난 2013년 영국 언론들에 의해 프레디의 묘지로 추정되는 묘비가 런던 켄살 그린 묘지에서 발견되었다. 이 묘비에는 프레디 머큐리가 아닌 프레디의 본명인 '파로크 불사라'라고 기재되어 있으며 프레디의 출생년도와 사망연도가 똑같이 기재되어 있다.

프레디의 최후에 대해 알고 있는 연인 메리 오스틴과 퀸 멤버들은 이 묘지가 발견된 뒤 진위여부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고 있지만 대다수 팬들은 유년기를 제외하고 프레디가 평생 살았던 런던이 프레디의 마지막 안식처가 맞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며[62] 추모 발걸음을 이어가고 있었다. 당시 해당 묘비에는 팬들의 헌화가 가득했다.#

이 묘비가 밝혀지며 팬들과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자 묘비 안의 유골이 사라졌다는 등의 말이 나왔고, MBC 서프라이즈를 통해서도 다뤄진 바 있다. 해당 소식이 다루어진 1주일 뒤에 프레디의 묘를 보기 위해 해당 묘지를 방문했던 블로거의 후기가 있는데, 묘지 관리인이 해당 블로거가 프레디를 만나러 왔다고 말하자 설명해 주길 그 묘비는 프레디의 묘가 맞으며 근 20여 년간 안치되어 있었다. 프레디의 가족들이 무덤이 알려지길 원치 않았고 숨겨지길 원해 묘비의 글도 프랑스어로 새겼다고 한다.[63]

그러나 묘비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고, 언론과 팬들에 의해 묘지에서 소동도 빚어졌으며, 프레디의 가족들이 유골의 도난을 두려워하여 무덤을 옮겼다고 한다. 관리인의 말에 의하면 프레디의 개인의 유골만이 아니라 가족들의 유골도 함께 안치된 가족 무덤에 가까워서 더더욱 민감했던 모양. 덧붙여 묘지 관리인의 말을 영상으로 촬영하려하니 영상은커녕 사진도 찍지말고 들어가지도 않아줬으면 했다고 한다. 서프라이즈에서는 메리 오스틴이 프레디를 독차지하기 위해 유골을 옮겼다는 등의 주장이 나왔지만[64] 관리인의 말대로라면 쏠리는 관심을 원치 않았던 프레디의 가족들이 이장한 듯하다.

2019년 중반 켄잘 그린 묘지의 묘비에서 프레디의 명판이 가족에 의해 제거되었다고 한다. 이로써 프레디의 마지막 안식처는 그의 가족 그리고 그와 아주 가까웠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르게 되었다. 대신 아직까지도 메리에게 상속한 저택 가든 로지(Garden Lodge)에 팬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1] 마찬가지로 전설적인 록스타인 로버트 플랜트 또한 집시계 영국인이지만 금발벽안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가 집시 혈통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2] 8세기에 칼리프 우마르사산 왕조 정복 후 인도의 구자라트로 피신해 정착한 조로아스터교도의 후손인을 일컫는다. 즉, 국적은 인도이긴 하지만 혈통은 이란계이다.[3] 구자라트어: ફારોખ બલસારા, Farrokh Bulsara[4] 물론 북부 인도인들의 상당수가 조상이 페르시아계이기는 하지만, 이들은 기원전에 왔기 때문에, 파르시는 별개 민족취급이다.[5] 무스타파는 무슬림들의 이름 중 아주 흔해서 서쪽 끝 세네갈, 모로코 등 아프리카에서부터 동쪽 끝 인도네시아까지 무슬림들이면 보편적으로 갖는 이름 중 하나다.[6] 현재 이름은 발사드(Valsad).[7] 가족이 독실한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이어서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었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어차피 옮긴 학교도 성공회 소속 학교여서 잘 맞지 않는다. 성공회 학교를 계속 다니게 한 것으로 봐서는 인도 출신인 부모님 입장에서 당시 상류계층이었던 영국인들의 문화를 접하도록 해주고 싶어했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단지 잔지바르보다는 훨씬 큰 도시인 뭄바이에서 아들을 교육시키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레디 머큐리 본인도 이런 배경 덕인지 기독교인들과 친분이 많이 있었다.[8] 거의 만화에서 나올 법한 수준의 뻐드렁니가 돋보인다. 프레디는 학창시절 프레디의 별명은 뻐드렁이 였다. 저 뻐드렁니는 후에 프레디의 콤플렉스가 된다. 그의 상징이 된 콧수염을 길렀던 이유도, 바로 저 뻐드렁니와 튀어나온 입을 가리려는 것이었다.[9] 뻐드렁니를 가리키는 실제 영단어인 bucktooth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10] 이들 인도/아랍계는 영국의 아라비아 반도 최대 식민지인 아랍에미리트로 대거 이주했다.[11] 여담이지만 이 대학은 더 후피트 타운젠드롤링 스톤즈의 로니 우드도 재학했다.[12] 흔히 기억되는 콧수염 기른 모습은 1980년부터 1986년까지로, 이후로는 투병 때문에 수염을 밀었다가 다시 턱수염을 길렀다가 말년에 수염이 빠졌다. 이전에는 장발의 모습이 더 유행했다.[13] 음원이 공개된 이 시절의 공연은 딱 한 개 있는데, 1969년 9월 9일 리버풀에서의 공연이다. 들어보면 정말로 프레디 머큐리가 몸담았던 밴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음악이 아마추어틱하다. 아무래도 아마추어 밴드의 멤버들이 퀸의 멤버들과 갭이 있는데다가 프레디 머큐리도 어릴 적이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을 듯. 프레디는 이 시절에 서너 개의 밴드를 거치지만 모두 1~2년을 넘기지 못하고 밴드가 해체했다. 음악 수준도 모두 고만고만했다.[14] 참고로 이 공연은 역사적인 공연이기도 한데, 앙코르에서 브라이언 메이로저 테일러가 무대에 올라와 함께 공연했다. 즉, 프레디와 브라이언, 로저가 함께 공연을 한 최초의 공연인 것. 그러나 안타깝게도 앙코르의 음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음원에서 들을 수 있는 'Vagabond Outcast'이라는 곡은 프레디가 최초로 작곡한 곡 중 하나이다.[15]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2018년 작)에서는 크게 될 밴드라며 이런 생활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고 말했다.[16] 스타펠은 옮겨간 'Humpy Bong'이란 밴드의 결과가 좋지 못했고, 결국 음악을 그만두고 토마스와 친구들의 모형과 디오라마를 만든 사람이다. 자신은 퀸이 잘될 것을 알고 있었고 음악을 그만둔 것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17] 이를 테면 The Reactions나 그 이전의 Beat Unlimited 등[18] 공연이 맘에 들지 않는 날이면 "내가 너희들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좀 더 너희들의 가능성을 끌어올려봐" 식으로 애정 어린 격려도 자주 했었다고 한다.[19] 프레디 머큐리의 처녀자리를 상징하는 요정,브라이언 메이를 상징하는 게자리, 존 디콘과 로저 테일러의 사자자리. 참고로 별자리가 2명이라서 사자도 2마리이다.[20]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Queen은 단순히 동성애자를 의미하는 정도가 아니라 남자 역할을 하는 게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성 역할로 매력있는) 게이라는 뜻이다. 이는 드랙퀸(drag queen) 등에 쓰인다. 이성애자들의 세계에서 여러 남자들의 사랑을 받고 그 남자들을 거느리는 매력있는 여성을 빗대어 ‘여왕벌’이라고 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이 여왕벌의 게이 버전을 Queen이라고 하는 것이다. 퀸이 데뷔 초에 ‘멤버 전체가 동성애자들’이라는 오해를 받았던 것도 다 이유가 있다.[21] 이 때문에 글램 록의 잔재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22] 1985년 자신의 솔로 앨범 "Mr.Bad Guy"의 수록곡인 "Living On My Own"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할 때도 타이즈를 입었는데, 촬영장소는 다름아닌 본인의 생일파티.[23] 이 사실이 의문스럽다면 퀸의 대표곡 We Are the Champions의 뮤직비디오에서의 프레디 머큐리를 보면 된다. 뮤직비디오를 보면 라이브 무대에서 별로 어울리지 않는 의상으로 공연을 하고 있다.[24] 원곡은 비치 보이스의 곡이다.[25] 캐럴 킹과 제리 고핀이 부른 곡이 원곡이다.[26] 필 스펙터가 다른 두 명의 작곡가와 공동작곡해서 로네츠에게 준 곡이다. 스펙터의 열렬한 팬이었던 비치 보이스도 커버한 바 있다.[27] 정확히 말하면 Larry Lurex는 프로듀서의 이름이고 자신과 친분이 있는 여러 뮤지션들을 불러 옴니버스 음반을 녹음해서 내놓았는데 좀 뻔뻔하게도 프로듀서인 자신의 이름으로 앨범을 발매했다. 여기서 프레디 머큐리는 'I Can Hear Music'과 'Goin' Back' 두 곡을 불렀다.[28] 이 때문에 전자공학도였던 존 디콘을 멤버로 영입해 전자악기를 관리시켰다.[29] 보수적인 마인드가 강한 영국에서는 양성애자인 그의 퀴어적인 행동이 언론의 가십거리였다. 컴퓨터 공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동성애자앨런 튜링이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만 보아도...[30] 알다시피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인도 인종은 영국 백인의 피지배 민족이었으므로 아직 제국주의 향수가 덜 빠진 보수적인 영국인들에겐 쉽게 먹잇감이 되었다.[31] 이런 작사 스타일은 유럽의 파워메탈 후배들이 물려받게 된다.[32] 물론 같은 1970년대라고 해서 보컬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퀸 1집퀸 7집을 들어보면 보컬이 같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1980년대 역시 초반인 퀸 8집과 후반인 퀸 12집의 보컬을 비교해보면 의외로 상당히 차이가 있다.[33] https://m.blog.naver.com/200613241/221160659433 해당 블로그 문서 참고. 아주 쉽게 말해, 각각의 모음을 발음함에 있어 구강 형태를 변화시키며 발성의 EQ를 조절해 공명을 최대화 하는 것이다. 마치 '우' 소리의 어둡고 잠잠한 느낌과 '아' 소리의 밝고 명확한 느낌이 다르고, 같은 '아' 소리라고 해도 입을 크게 벌린 소리와 입을 작게 벌린 소리의 느낌이 다른 것처럼. 블로그 문서 본문을 참고해 설명하자면 1970년대 후반부터 프레디 머큐리는 이전처럼 입을 조심스럽게 벌리면서 노래 부르지 않고, 입 모양과 혀 위치를 다양하게 변화시키며 음색의 변화와 공명의 최대화를 적극적으로 꾀했다. 프레디 머큐리하면 흔히 떠올리는 입을 크게 벌리고 온갖 인상 다 쓰는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이에 비롯된 것이다.[34] 실제로 프레디가 흡연을 시작한 것도 정확히 1980년부터다.[35] 세계 최대 음악 사이트인 allmusic.com에서 별4.5를 받았다.(5개 만점)[36] 프레디 머큐리는 카바예의 열렬한 팬이어서 그녀를 만나기 위해 바르셀로나로 간 적도 있었다.[37] The Great Pretender 원곡은 플래터스가 1955년에 부른 노래다. 이 때 프레디가 콧수염을 밀었다.[38] 스페인 tve/미국 NBC 등 국제공동제작단이 제작 송출한 국제신호. 당시는 OBS가 있기 전이었다.[39] 다만 몇몇 장면은 콧수염이 그대로 있다. 없어졌다가 있었다하는 1초 단위로 바뀌는 장면.[40] 음악가로 프레디와 같이 음악작업할 정도로 굉장히 친했다고 한다. 프레디와 재밌는 레파토리도 있는데 퀸의 두 번째 매니저 '짐 비치'가 피터에게 '퀸' 녹음실 근처에 있는 집을 구해다줬는데 화장실이 고장난 집이었다. 때문에 프레디가 화장실 고치라고 돈을 다섯 번 정도 챙겨줬는데 계속해서 유흥비로 쓰고 돈 달라고 요구하니까 프레디가 빡쳐서 그 집에서 쫓아내버렸다.[41] 이때는 퀸 멤버들이 공식적으로 활동을 잠시 쉬기로 다들 약속했던 때이다. 그럼에도 로저는 달려와 주었다. 또한, Barcelona 작업 때도 퀸은 휴식기간이었는데, 이 때는 프레디가 수록곡 〈How Can I Go On〉의 베이스 연주가 필요해 퀸의 베이시스트 존 디콘에게 연락을 했고, 존 또한 바로 달려와 작업을 해주었다.[42] 프레디 머큐리의 어머니이다. 90대까지 장수 후 2016년에 사망했다.[43] 화장을 엄청 심하게 했는데 에이즈로 망가진 부분을 최대한 가리기 위해서였다. 자세히 보면 피부에 에이즈의 합병증인 카포시 육종의 흔적이 보인다.[44] 또 하나의 여담으로 뮤직비디오 촬영감독들이 에이즈 흔적을 최대한 안 보이게 하기 위해 흑백으로 촬영했다.[45] 실제로 뮤직비디오 촬영장 영상을 보면 왼쪽 눈이 누렇게 변해버린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만큼 병세가 심각했단 뜻이다.[46] 당시 본인은 강력히 부인[47] 1985년 당시 애인 바바라 발렌틴과 동거했을 때 어느 날 프레디가 면도를 하다가 손에 상처가 나 피가 났었는데 바바라가 붕대를 가져와 프레디에게 가자 프레디가 제발 다가오지 말라며 소리쳤었다고 한다. 그때 프레디의 친구 2명이 에이즈로 죽었을 때였고, 프레디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에이즈 검사를 받았다 한다.[48] 라이브 에이드 당시에도 오른팔 뒤쪽에 육종이 나타났다. 일각에서는 매직 투어 당시 코트를 입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으로 추측하고 있다. 다만 매직 투어 당시에도 상황에 따라서 민소매 셔츠만 입고 공연할 때가 있었다는 것도 참고해야 할 듯 하다.[49] 이 때 스위스 몽트뢰에서 체류한 기간이 늘어난 것 같다.[50] Born To Rock and roll과 In My Defence는 음질이 개판인 관객 녹음본만이 존재하나, It's in everyone of us는 음질이 꽤나 괜찮은 사운드보드 녹음이 존재한다. 목소리에 힘이 살짝 없어진 것이 조금씩 느껴지지만 A4를 찍는 등 오히려 탁성이 싫다면 이쪽 라이브가 더 좋을수도 있을만큼 미성을 조금 회복한 The Miracle 앨범에서 듣던 목소리기에 한 번 들어보자.[51] 다만 카바예와의 라이브는 퍼포먼스만 하였고 노래는 립싱크였다.[52] '씨발, 하고 말지 뭐' 정도의 뉘앙스.[53] 시한부 인생의 막바지에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듯한 가사의 이 곡을 프레디 역대 최고의 보컬 퍼포먼스로 뽑는 팬들도 많다.[54] 그 당시 치료가 완전 의미 없던 것은 아니었고, 아주 조금 진행을 늦출 수 있을 정도의 치료였다. 프레디가 음악을 위해 몸을 혹사시키지 않았다면 아주 조금은 더 살았을 것이다. 프레디의 애인이었던 짐 허튼도 에이즈에 걸렸지만, 꾸준하게 발전하는 치료법과 요양으로 2010년까지 살았고, 에이즈가 아닌 암으로 죽었다.[55] 현재는 HIV가 프레디 사망 당시처럼 전혀 치료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1996년 데이비드 호 박사가 다양한 항바이러스제와 각종 칵테일 요법으로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을 정도까지 도달했다. 같은 HIV 감염자인 전 NBA 선수였던 매직 존슨이 아직 어떠한 병색이 나타나지 않는 모습처럼 말이다. 그러니 혹여 주변에 HIV 감염자가 있다면 치료를 받도록 용기를 복돋아주어야 한다. 기술의 발전으로 하루 한정으로 효과적으로 바이러스를 억제할 수 있고, 더 나아가 현재는 3개월에 1번으로도 면역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치료법 항목 참조.[56] 짐 허튼은 2010년에 죽었다.[57] 1991년 8월 28일에 촬영된 사진이다. 즉 사망 3달 전에 찍힌 사진. 병색이 짙은 게 눈에 띈다.[58] 정확히는 하루 뒤, 그것도 더 정확히는 24시간도 채 안 되어서.[59] 그도 그럴 것이 1980년대 후반까지 퀸의 대표곡들은 금지곡으로 지정된 것들이 많았다. 가장 유명한 대표곡이자 프레디의 인생곡인 보헤미안 랩소디마저도 1989년까지 한국에서 금지곡이었고 방송금지에서도 해금된 것은 프레디가 죽고 나서 3년이 지난 1994년이었다. 그러니 퀸의 골수팬이 아닌 이상 프레디의 부고를 접하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 이 당시 한국 팝계의 현실이었다. 게다가 프레디의 사망 원인이었던 에이즈에 대한 당시 국내의 보수적 인식 수준을 감안한다면 프레디의 죽음을 알리기가 더더욱 소극적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퀸을 좋아하는 국내 뮤지션들은 프레디 머큐리의 사망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문세는 당시 진행하던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프레디 머큐리의 사망 소식을 전하며 침통한 감정 때문에 말을 잇지 못했고 ‘이치현과 벗님들’ 의 리더였던 이치현은 운전 도중 라디오를 통해 사망 소식을 전해듣고 너무 놀라서 사고를 낼 뻔했었다고 한다. 배철수는 사망 소식이 전해진 직후, 당시 본인이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인 MBC-FM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프레디 머큐리 추모 특별 방송을 진행하였다.[60] 사실 존 디콘이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 록 스타 생활도 프레디가 있어서 즐길 만 했는데, 이젠 그런 이유가 되어줄 사람도 없으니...[61] 조로아스터교에서는 화장과 매장을 금기시하며 특히 화장은 불(정확히는 조로아스터교에서 하루에 5번 이루어지는 예식에 쓰이는 성스러운 불)을 소중히 하는 해당 종교의 특성상 극도로 금기시된다. 그런 상황에서 화장을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프레디 머큐리의 세속적이었던 생전 모습을 존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62] 팬들 사이에서 확실시 되는 이유가 프레디와 프레디의 부모님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 때문인데, 앞에서 서술된 바와 같이 조로아스터교에서는 불을 매우 신성시여겨 화장을 금기시하기 때문에 차라리 매장을 했을 것이라는 점과, 애초에 정말로 프레디의 묘비가 아닌 동명이인의 묘비였다면 퀸 측에서 프레디의 무덤이 아니므로 추모 방문을 그만두라고 (반달의 우려와 진짜 유족에게 가는 피해 때문에) 확실히 못을 박았겠지만 이에 관해 아무런 반응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점 역시 진짜 프레디 머큐리의 묘비라는 추측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63] 묘비에 쓰여진 프랑스어는 'pour etre toujours pres de toi avec tout mon amour' 이며 '내 모든 사랑과 함께 당신과 항상 가까이 있을수 있도록'이라는 뜻이다. 해당 글귀의 아래에는 M.이라고만 적혀있으며 이 M은 메리 오스틴일 것이라고 팬들은 추측했다.[64] 이는 일부 옛날팬들이 주장하는 의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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