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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배가 침몰한 해난사고에 대한 내용은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문서, 이 배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에 대한 내용은 타이타닉(영화) 문서
참고하십시오. 화이트 스타 라인의 올림픽급 여객선 | ||
RMS 올림픽 | RMS 타이타닉 | HMHS 브리타닉 |
RMS Titani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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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12년에 흑백으로 찍은 영상을 컬러화한 것[1] |
RMS[2] 혹은 SS[3] Titanic[4]
건조 당시 세계 최대의 여객선이었지만[5] 1912년 최초이자 최후의 항해 때 빙산과 충돌해 침몰한 비운의 여객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객선이자 침몰선일 것이다. 거대해서 별명이 불침선(The Unsinkable)이라는 말도 있었으나 리버풀에 있는 타이타닉 박물관의 타이타닉의 진실이라는 코너에 불침선이라는 명칭은 당시 언론들이 신문에 근거 없이 써내려간 내용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불침선이라는 명칭은 후에 언론에서 만든 용어이며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이전에 이 거대한 배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선장이 그렇게 불렀다는 건[6] 더더욱 아니다.[7]
침몰한 지 100년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사실상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침몰선이다. 사망자 수가 1위는 아니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의 영향도 있고 후술하겠지만 당시 최첨단 기술에 대해 기대감이 컸던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한 데다 근대 사회에 들어서자마자 얼마 안 된, 그리고 유명인사들이 여럿 희생된 대참사이기 때문에 가장 유명한 침몰선이 됐다. "현대의 안전수칙은 과거의 피로 쓰여졌다"라는 말을 뒷받침하듯 이 사건을 기점으로 여러 가지 안전조약들[8]이 생겨났으니 더더욱 그렇다.
2.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침몰선
영화 타이타닉에서의 모습 |
One of the most famous tragedies in modern history, it inspired numerous stories, several films, and a musical and has been the subject of much scholarship and scientific speculation.
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비극 중 하나로 수많은 이야기, 몇 편의 영화, 뮤지컬에 영감을 주었고 많은 학문과 과학적 추측의 주제가 되어왔다.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타이타닉은 단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침몰선이라 할 수 있으며 사고로부터 100년이 넘게 지난 오늘날까지도 모르는 사람이 없고 관련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며 대중매체 등에서 많이 다뤄진다. 사실 타이타닉보다 많은 사망자를 낸 사고는 무려 40건이 넘어서 최다 사망자를 낸 해상사고는 아니지만 많은 경우가 전쟁 중 침몰이었다. 특히 대부분이 2차대전과 관련한 침몰인데 이 역시 비극이지만 전쟁피해라 해상사고와는 다르다.[9] 수천만이 죽어가는 전쟁 중이 아니라 평시에 갑자기 1,500명 이상이 죽었으니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10]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비극 중 하나로 수많은 이야기, 몇 편의 영화, 뮤지컬에 영감을 주었고 많은 학문과 과학적 추측의 주제가 되어왔다.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사망자 수로 봤을 땐 전쟁 중 침몰을 제외한 평상시에 일어난 사고 중에서는 7위[11]에 머무르지만, 아래와 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 기록이 너무나 상세히 남아 있었다. 2차 대전 당시 침몰한 '레닌'은 민간 화물선이었고 4,000명 이상 사망자가 났을 거라 추정되지만 기록이 부실해 그 추정치가 1,000명 미만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반면 타이타닉의 기록은 시대를 감안하더라도 굉장히 상세하다. 특히 이 사고는 당시 세계 최강 국력을 자랑하던 대영제국과 미합중국 양국 의회가 즉시 특별조사단을 꾸려 감사에 착수했기 때문에 물샐틈없는 초동 진상조사가 이루어졌다.
- 유명인들이 다수 타고 있었다. 후술하듯이 세계적인 부자와 명사 및 귀족들이 탑승해 있었으며 이들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다. 특히 탑승객 중 존 제이콥 애스터 4세는 애스터 가문의 일원이자 세계적인 부호로 이 사람만 죽었어도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릴 만한 사람이었고[12] 메이시즈백화점의 소유주 부부, 구겐하임 가문의 일원 중 하나인 철강왕 벤저민 구겐하임이나 귀족도 있고 심지어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도 유명했다.[13]
- 당시 세계 패권국인 대영제국의 배였고 피해자들도 열강국민인 영국인들과 미국인들이 대부분이었다. 1912년 당시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 중 하나였고, 미국은 한창 떠오르는 부유한 나라였다. (전근대와 근대, 현대를 모두 통틀어서) 평화시기 최대 사망자수를 낸 해양사고는 1987년에 유조선과 충돌하며 4,386명의 사망자를 낸(생존자 24명) 필리핀의 여객선 "도냐 파즈호 침몰 사고"였지만 이름조차 아는 이도 별로 없다. 안타깝지만 언론에서 필리핀 사고에 주목하는 정도와 미국/영국의 사고에 주목하는 정도는 차원이 다르다. 당장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이 전부 서방세계에 위치하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 배 그 자체도 유명했다. 당시 타이타닉은 세계 최대 규모, 최첨단 기술, 초호화 등 온갖 수식어를 달고 언론의 주목을 받던 배였다. 대륙간 이동이 현재와 비교할 수도 없이 드물던 시기에, 2등석 티켓 가격이 다른 웬만한 배의 1등석 가격일 정도로 호화롭고 고급스러운 데다 거대하기까지 한 배니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이런 엄청난 배가 첫 항해 때 빙산에 충돌해 수많은 사망자를 냈으니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14]
- 첫 항해에 침몰했다. 선술했듯 타이타닉은 첫 항해 때 북대서양에서 빙산에 충돌해 침몰했는데 20세기쯤 오면 웬만큼 허접한 배라도 첫 항해에 침몰하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타이타닉은 웬만한 배가 아니라 당시 서구권에 그 정도 규모의 배에선 매우 드문 침몰 방지 격벽 시스템까지 적용된 배였다. 이 배의 안정성을 믿고 위에 언급된 부자들이 타고, 구명보트의 수까지 줄일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거대한 배가 첫 항해에 침몰했으니 충격적인 것이다.
- 사고 속 이야기가 많다. 다른 대형사고를 보면 알겠지만 저 정도 규모의 배가 저 정도 많은 피해자를 낸 경우 대부분 폭발이나 어뢰 격침이다. 즉, 뭔가 할 시간도 없이 바로 죽는 경우가 많아 사고 외에 다른 이야기거리가 별로 없다. 그런데 타이타닉은 두 시간에 걸쳐 침몰하면서 탑승객들이 온갖 행동을 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기 때문에[15] 침몰 직전까지 연주한 악단, 끝까지 최선을 다한 상선사관을 비롯한 선원들, 승객들을 위로하며 기도해 준 성직자,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한 여러 1등실 승객들, 탈출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죽음을 택한 스트라우스 부부 등 지금까지 이어지는 일화들이 남아 있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이런 유명세가 갖는 부수효과로 대중매체가 엄청나게 많이 다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1997년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영화 타이타닉 관련 논픽션 책[16], 다큐멘터리, 라디오 드라마, 영화 등 타이타닉을 주제로 한 많은 작품이 나왔고 1997년 이전에도 서구권에서는 가장 유명한 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제로 같은 영국 배란 것 외엔 딱히 연관점이 없고 퇴역 후 캘리포니아 롱비치에서 박물관 및 호텔로 활용되는 퀸 메리 호에서도 1996년 당시 한 구석에서 타이타닉에 대한 정보와 다큐멘터리 영화가 상영될 정도다. 유명하니까 드라마, 영화 등에 계속 나오고, 이것 때문에 더 유명해지고, 관련 연구가 더 이루어지고, 이에 입각해 또 다른 매체에 나오는 순환이 수십 년간 계속되면서 불멸의 유명세를 얻은 것이다. 한국에서도 1997년 영화 이전에 교과서에 승객탈출 과정에 신사도를 발휘한 부분이 실리기도 했다.
3. 제원
선적: 영국 모항: 리버풀(Liverpool) 선급: 올림픽급 여객선(Olympic class) 소유주: 화이트 스타 해운(White Star Line) |
선박 제원# |
|
4. 건조
1911년 진수 중인 타이타닉의 모습 | |
개수 중인 타이타닉호[22] |
화이트 스타 라인사는 블루리본[24]으로 불렸던 북대서양 여객선들의 속도 경쟁에는 별로 관심을 나타내지 않고 느긋하고 쾌적한 여행에 중점을 두는 회사였지만 타이타닉은 속도부터 설비의 호화로움까지 모든 것에 중점을 두어 설계되고 있었다.[25] 안전에도 신경을 써 설계에 방수구획을 도입하였다. 선체는 방수 격벽에 의해 16개의 구획으로 구분되었고 그 중의 2구획(선수의 경우 4구획)이 침수해도 침몰에 이르지 않는 구조였다. 게다가 격벽은 제어실의 원격 조작으로 즉시 폐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방수격벽은 처음부터 엉터리였는데 격벽을 상부갑판까지 올리지 않았다. 아시아의 범선들은 안전과 침몰 방지를 이유로 격벽을 최상부 갑판까지 올렸다. 아랍 상인들이 타고 다니던 다우선 같은 배들은 아시아 지역의 많은 암초 지대 때문에 웬만하면 격벽이 상부갑판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의 판옥선만 봐도 격벽이 갑판까지 충분히 올라와 있다. 반면 서양은 갤리선 시절부터 방수격벽은커녕 노잡이 공간 확보를 이유로 격벽이 없었으며 격벽이 있으면 통행이 불편했다. 그게 그대로 20세기까지 이어졌으니... 당시 서양에는 제대로 된 방수격벽이라는 것이 없는 상태였다. 만약 이 방수격벽을 상부갑판까지 끝까지 올렸으면 어찌저찌 뉴욕에 도착했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물론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방수대책의 도입으로 타이타닉호는 실제로 지금 기준으로도 안전한 설계상의 구조를 갖추고 있었지만 특정 구역이 완전히 밀폐되는 구조가 아니라 E 갑판의 긴 복도(스코틀랜드 로드)를 통해 구획 모두가 연결되어 있어서 3구획(선수의 경우 5구획) 이상의 구획이 침수되어 배가 선수 쪽으로 기울 경우 해수면 아래에 잠긴 선체를 넘어 들어온 해수가 이 복도를 통해 도미노처럼 다른 구획까지 유입되어 차례 차례 침수될 수도 있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26] 하지만 안전불감증으로 격벽의 구조를 개선하지 않고 만들어졌는데... 실제로 첫 항해 때 우려했던 상황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27] 만약 토마스 앤드류스가 말한 대로 격벽을 B갑판까지 올렸다면 침몰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타이타닉호 침몰 후에 올림픽호와 브리타닉호의 격벽이 보완되었다.
타이타닉호는 자매선 올림픽호와 거의 동시에 건조가 개시되어 대계단이나 식당의 장식, 식사의 메뉴나 객실의 서비스 등이 거의 동일했다고 한다. 영화 타이타닉에서는 마치 타이타닉호가 전무후무한 초대형 선박인 양 연출했지만[28] 실제로는 올림픽호(1910년 진수)가 이 함급의 네임쉽으로서 타이타닉호(1911년 진수)와 브리타닉호(1914년 진수)라는 2척의 자매선과 함께 올림픽급 여객선이라고 불렸다.
타이타닉호와 그 자매선들이 최초로 배 안에 수영장을 설치해 놓은 여객선들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최초로 배 안에 수영장을 설치해 놓은 여객선은 1906년에 건조된 아드리아틱 호[29]이다.
4.1. 설계의 변경
수리중인 올림픽(좌)과 진수 후 건조 중인 타이타닉(우)[30] |
완공 이후의 올림픽(좌)과 타이타닉(우)의 산책로 갑판 비교 |
자매선인 만큼 애초에 중량은 거의 비슷하게 설계되었지만 선술했던 설계 변경 등으로 타이타닉의 객실 수가 증가, 최종적으로 타이타닉호의 등록톤수는 올림픽호의 45,324톤보다 1,004톤 커진 46,328톤으로 늘어났다.[32] 타이타닉호가 올림픽호를 넘어 당시 세계 최대의 여객선이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지만 타이타닉호가 지금까지도 유명세를 타고 있는 것은 그 크기 때문이 아니라 어두운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탓이다. 일례로 타이타닉의 침몰로부터 불과 1년 뒤에 진수된 독일의 대형 여객선 임페라토어[33]는 총톤수 53,000톤에 길이 276m라는 규모를 자랑하며 세계 최대 여객선 랭킹을 갈아치웠으나[34] 둘 중 어느 쪽이 더 유명한지는 자세히 알아볼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35]
수에즈 운하에 이 배가 너무 커서 안 들어가 확장 공사를 해야 했다는 말도 있지만 이 말은 확실한 과장이다. 수에즈 운하의 확장은 당시 선박의 대형화 추세 때문이지 타이타닉호 한 척의 통행 때문은 아니었다. 애초에 타이타닉의 노선은 영국-프랑스-미국으로 통하는 대서양 지대라 수에즈 운하로 갈 일이 전혀 없었다.
1912년 4월 2일 벨파스트에서 해상 시험을 위해 출항하는 타이타닉호 |
4.2. 층별 구조
총 11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설계도는 여기 참조- 보트 갑판 - 최상층으로 구명보트들은 모두 여기에 나열되어 있었다. 맨 앞쪽에는 선교와 조타실이 있었으며 상선사관 숙소와 바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 뒤에는 중앙계단의 최상층과 체육관이 연결되어 있었다. 넓은 산책로를 가지고 있었으며 1등실, 2등실, 상선사관 등 저마다 산책로의 영역이 정해져 있었다. 1등실 산책로는 외관을 잘 볼 수 있게 하기 위해 구명정이 비치되어 있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참사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다만 외관상이란 이유는 말이 많았다. 애초에 당시 해양법 기준에서 권장하는 구명정보다 더 많은 구명정을 싣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설치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고, 화이트 스타 해운은 이 때문에 법적 책임을 지진 않았다.
- A갑판 - 산책 갑판이라고도 불렸다. 거의 모든 영역이 1등실 전용이었고 1등실 객실들과 라운지, 흡연실, 독서실, 그리고 야자수 코트가 놓여 있었다. 산책 갑판이라는 이름답게 A갑판에는 기나긴 산책로가 놓여져 있었는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앞쪽의 산책로에는 유리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 B갑판 - 선교루 갑판이라고도 불렸다. 객실은 모두 1등실이였으며 2개의 특별 객실들은 전용 테라스 및 산책로를 보유하고 있었다.[36] 1등실 전용 레스토랑과 카페도 있었다. 이 갑판에는 선수와 선미 위쪽도 포함되어 있는데 선미는 3등실 산책로로 쓰였지만 선수는 지금도 그렇지만 안전문제상 선원 외 출입금지였다.[37] 그러니까 1997년판 영화에서 그 유명한 "나는 세상의 왕이다!" 하는 장면과 "날고 있어!" 장면은 실제대로라면 민폐 취급받으며 선원들에게 끌려나왔을 것이다.
아니면 몰래 들어갔다 나왔다거나다만 항해 전에는 들어갈 수 있었던 모양이다. - C갑판 - 배에서 선수, 선미와 분리되는 지점이자 하얗게 칠한 곳이 시작하는 지점으로 3등실의 산책로로 쓰이고 선두와 선미로 각각 이어지는 요갑판과 이어져 있었다. 선두는 주로 선원들의 숙소로 쓰였고 선미는 3등실 전용 휴게실과 흡연실이 있었다. 그 사이에는 1등실 객실들과 2등실 도서관이 있었으며, B갑판 내용에서 설명한 특별실이 2곳 있었다.
- D갑판 - 3개의 넓은 공공시설이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1등실 대합실, 1등실 식당과 2등실 식당이 있었다. 3등실을 위한 트인 공간도 있어 밤만 되면 신나는 연회가 열렸다. 1등실, 2등실, 3등실 객실들과 화부들의 숙소가 있던 곳이기도 했다.
- E갑판 - 1등실, 2등실, 3등실 모두의 객실들과 선원들의 숙소가 차지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로드'라고 불리던 아주 긴 복도가 있었는데 주로 선원들의 숙소와 편의시설들이 위치해 있었으며 선원들과 3등실 승객들이 오고 갈 수 있었다. 방수 격벽이 있는 가장 높은 층이었는데 이 복도 때문에 물이 선체 안으로 골고루 퍼져 침몰을 가속화시켰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잭과 로즈가 두 번이나 죽을 뻔한 곳이다.
- F갑판 - 객실은 3등실이 대부분이었지만 2등실 객실과 선원들의 숙소도 있었다. 3등실 식당은 여기에 있었으며 1등실 승객들을 위한 수영장과 터키탕도 있었다.
- G갑판 - 수면 위에서 가장 낮은 층으로 선원들과 3등실 승객들의 객실이 있는 가장 낮은 갑판이었다. 1등실 승객들을 위한 스쿼시 코트도 있었으며 부식 창고, 우편물 창고도 여기에 있었다. 대다수의 영역이 보일러실이 있는 최하 갑판과 겹쳐 있어 선수와 선미가 각각 따로 떨어져 막혀 있었다.
- 최하 갑판 - 주로 창고가 대부분이었다.
- 탱크 톱 - 보일러실과 기관실이 위치해 있었다.
5. 출항과 항해
1912년 4월 10일 12시, 사우샘프턴 출항 중 찍힌 사진[38] |
SS 시티 오브 뉴욕호와 충돌할 뻔 했을 당시의 사진 |
5.1. 탑승인원들
5.1.1. 승객
재현한 타이타닉호의 승선권. 모 박물관에서 기념품으로 재현한 티켓이다. 실제 타이타닉호의 티켓은 링크 참고. |
승객들은 총 1,317명이 탑승했다.
- 1등실 - 총 329명. 부유한 승객들이 주로 타고 있었으며 급한 사정보다는 즐기려고 승선한 승객들이 많았다.[42] 티켓 가격은 일반 1등석은 30파운드/150달러[43], 단 4개만 있는 스위트 1등석은 870파운드/4350달러[44][45]
객실은 최상층인 보트 갑판부터 갑판 E(상갑판)까지 설치되어 있었으며 호화 호텔 수준이었고 개인 목욕탕이 있었다. 체육관(보트 갑판), 흡연실(A 갑판), 독서실(A 갑판), 선내 식당(D 갑판)과 별개의 고급 레스토랑(B 갑판), 스쿼시 코트(F 갑판), 수영장(F 갑판), 터키탕(F 갑판)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 특별실 - 총 4개의 객실이 있었으며 50피트 규모의 전용 테라스 및 산책로의 존재로 1등실과는 별개의 추가 요금을 징수했다.
- 2등실 - 총 285명. 중산층 승객들이 주로 타고 있었다. 일부 파견직 선원도 2등실에 탔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1등실만은 못해도 다른 배들의 1등실에 견줄 만한 많은 편리한 시설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티켓 가격은 12파운드/60달러[46].
객실은 갑판 D부터 갑판 F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흡연실(B 갑판), 식당(D 갑판), 도서관(C 갑판), 상점(E 갑판)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 3등실 - 총 710명. 가난한 승객들이 주로 타고 있었으며 영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아메리칸 드림 꿈꾸고 미국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얻기 위해 이주 목적으로 승선한 승객들이 많았다. 승객은 영국인 다음으로는 아일랜드인이 많았고 유럽 각지는 물론 중동인(주로 오스만 제국 레반트), 중국인(영국령 홍콩)도 있었다. 시설은 1등실과 2등실만 못하고 엔진이 가동되는 소리가 울려퍼졌으나 다른 배들에 비해서 비교적 상당히 좋은 대우를 해 주었다. 물론 그만큼 가격이 비쌌지만... 다른 배들은 아예 식당이 없거나 수십 명이 다 같이 방을 써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생존자 중 이 배의 거주 환경이 자신들이 살던 집보다 훨씬 나았다는 증언을 한 3등실 승객도 있었는데[47] 타이타닉은 3등석도 4인 혹은 6인실로 나뉘어 있었고 제대로 된 식당에서 매번 메뉴가 바뀌는 식사와 하루 3끼에 티타임엔 차와 간식까지 제공받았으며, 그 외에 카페와 바, 도서관 등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선원들도 타 객실 3등실 승객들 대비 꽤 친절한 편이었다. 한편 하층민들이 주로 사용해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으며 이민자들이 많았던 만큼 3등실 승객들은 승선 전 검역 절차를 통과해야 했고, 선의들이 가죽 장갑을 낀 채 참빗을 들고 전염병이나 이/벼룩 여부를 확인했다.[48] 또한 윗 객실 승객들보다 자주 씻지 못해 위생상태가 좋지 않은 승객이 많아 쿠션 등의 오염을 염려하여, 3등석의 의자는 쿠션 없이 나무 몸체만 있었다. 그래도 타이타닉의 3등실은 비싼 만큼 재산 사정이 좀 괜찮은 편인 서민들도 많이 탔기에, 타 여객선 대비 승객들의 위생 수준은 높았다.
여자와 남자는 배의 앞머리와 뒷머리에 각각 따로 떨어져 승선했으나 가족 단위일 경우 같이 승선할 수 있었고, 식당이나 휴게 공간 대부분은 공유했다. 티켓 가격은 7파운드/35달러[49]였다.
객실은 2등실과 마찬가지로 갑판 D부터 갑판 G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흡연실(C 갑판), 대합실(D 갑판), 식당(F 갑판)
객실별 상황은 다음 링크를 참고하면 된다. 참고자료 1 참고자료 2
5.1.2. 선원
타이타닉호에 승선했던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 및 상선사관들(기관장 및 기관사들은 제외) |
선원들은 총 885명이 타고 있었다. 요즘 여객선도 마찬가지지만 크게 갑판부(Deck department), 기관부(Engineering department), 사주부(Victualling department)[50] 세 부서로 나뉘어져 있었다. 물론 월급과 대우도 직종에 따라 달랐다.
배의 총 책임자는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
- 갑판부 - 총 66명. 배의 운항을 책임지는 부서. 총 책임자는 수석항해사 헨리 와일드. 상선사관들 중 항해사(선장 이하 7명)들이 여기에 속했다. 그 밖의 직책으로는 갑판장 및 조수, 조타수, 갑판원, 보안관, 창문 청소부, 램프 관리인, 견시, 목수, 선의, 보급계원, 선원 식당 조리수가 있었다. 조타수 위주로 구명정을 몰도록 정당 1~2명씩은 태웠기 때문에 제일 생존률이 높았다.[51] 외부 갑판과 선교를 오가야 하는 이들이라 승객들에게 상시 노출되었으므로, 항해사나 직별장 외 말단 선원들도 세일러복과 스웨터, 피코트 등의 근무복이 지급됐다.
- 기관부 - 총 325명. 배의 동력을 책임지는 부서. 총 책임자는 기관장 조셉 G. 벨. 상선사관들 중 기관사(25명)들이 여기에 속했다. 가장 숫자가 많은 직책은 배에 끊임없이 석탄을 집어넣는 176명의 화부들로, 이들 중 13명이 화부장으로 화부들을 인솔했다. 그 밖의 직책으로는 전기공, 보일러공, 배관공, 보급계원, 조기수, 석탄 운반수, 선원 식당 조리수가 있었다. 침몰 당시 그야말로 배의 가장 밑바닥에서 물과 맞서며 최전선에서 물을 빼고 동력을 유지하는 사투를 벌였는데 그 결과 사망자들은 세 부서중 가장 많았으며 기관사는 항해사들과 달리 전부 사망했다. 승객들과 마주칠 일이 없다시피해, 기관사 외엔 근무복 없이 허름한 사복을 작업복으로 입고 일했으며 화상 등 부상자도 자주 나왔다. 부원들 중 가장 근무 여건이 열악한 부서였으므로, 동급 타 부서 선원들에 비해 평균적으로 훨씬 많은 임금을 받았다.
- 사주부 - 총 431명. 배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부서로 숫자가 제일 많았다. 총 책임자는 사무장 토머스 매카울리. 제일 많은 직책은 객실 승무원, 즉 스튜어드(322명)였다. 마르코니사에서 온 통신사(2명)도 갑판부가 아니라 여기에 포함되었는데 주고받는 통신 대부분은 운항 관련이 아니라 승객들의 것들 대신 주고보내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밖의 직책으로는 사무원, 간호사, 조리실 및 식당 직원, 구두닦이, 보급계원, 이발사가 있었다. 승객들을 직접 대면해야 하므로, 전원 담당 업무에 맞춘 단정한 드레스코트나 연미복, 일부는 기관 및 갑판부 상선사관들과 동일한 형태의 정복 등의 근무복을 착용했으며, 승객들이 호출하거나 팁을 주거나 클레임을 걸기 쉽도록 고유 번호가 들어간 배지를 패용했다. 부원들의 급여가 평균적으로 가장 낮은 부서였는데, 이는 당시 접객이 주 업무인 서비스직은 기본급이 낮은 대신 팁을 각자 받아 벌충하는 급여 체계가 대세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주부 부원들은 특히 1~2등실 승객들이 진상짓을 해도 군말없이 받아줘야 했다. 1~2등실 담당 사주부원들은 1인당 할당된 객실 및 승객 수도 적고 승객들이 비교적 교양있고 돈 많은 이들이라 진상이 적고 팁도 많이 받을 수 있어 주로 고참들이 맡았고, 신입들은 수수한 흰색 근무복을 입고 1인당 25실의 객실 인원들을 담당하며 고생하고 가난한 3등실 승객들이 거의 못 혹은 안 주는 팁 때문에 수입도 제일 적었다. 하루에 16시간에 달하는 긴 근무 시간에 시달려, 주어진 8시간의 휴식 시간은 대부분 잠으로 보냈고 피로로 인해 교대차 온 선원들이 깨워 주지 않으면 못 일어날 정도였으며 별도 식당도 없어 손님이 안 들어오는 아무 공간에 짱박혀 틈나는 대로 휴식하고 식사해야 하는 등 제일 있어 보이는 옷차림에 비해 근무 여건이 열악했다. 대신 사주부원들은 개인 식사로 1등실 승객용 고급 음식들을 아무 때나 적당히 가져다 먹을 수 있는 권리가 보장돼 있었는데, 많은 해운사들이 말단 선원들을 위한 식당은커녕 식사도 제대로 챙겨주지 않아 항해중 자비로 사먹거나 먹거리를 알아서 챙겨 승선해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당시 기준으론 최상급 대기업에 걸맞는 고급 복지 혜택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 이 세 부서에 속하지 않은 나머지 선원들은 타 회사에서 온 파견직으로, 레스토랑/카페 점원(69명)[52], 우편원(5명)[53], 악단(8명)[54], 그리고 조선업체에서 보증으로 탑승한 관계자들(9명).[55] 파견직 선원들은 침몰 당시 생존율이 제일 낮아서 레스토랑 점원 3명을 빼고 전부 죽었다.
여성 승무원은 23명이 타고 있었다.[56] 이 중 20명은 스튜어디스였고 3명은 카페 점원이었으며 총원 중 스튜어디스 3명이 사망했다.
5.2. 화물
나중에 영화 등에서 소재로 써먹은 도시전설과는 달리 타이타닉의 화물은 평범했고 엄청나게 값나가는 보물이나 초고가의 보석 등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엄청난 초갑부나 귀족, 유명인사들이 탔기 때문에 이런 소문을 부추겼지만 이런 귀족들이 타이타닉을 탄 것은 단순 이동이나 유람의 목적이었기 때문에[57] 굳이 불필요하게 비싼 물건을 가지고 타지는 않았다. 보험회사에서 집계한 바에 따르면 타이타닉에 실려있던 화물 중 가장 값나가는 물건은 프랑스 화가 조셉 블론델의 그림 한 점이었는데 소유자는 당시 화폐로 10만 달러, 오늘날 가치로 2백만 달러의 보상금을 청구했다고 한다. 그 외의 고가 물품으로는 페르시아 시인인 오마르 하이염의 시집 <루바이야트> 보석 세공판본이 있었는데 오늘날 추정가치로 잘해야 1억 원 미만이라고 한다.타이타닉의 대표적 화물 중 하나인 자동차 |
1등실 승객 윌리엄 카터 소유의 자동차(르노 타입 CB 쿠페 드 빌)도 한 대 실려 있었는데, 사우샘프턴 항에서 기중기를 이용해 실어 화물실에 탑재했다.[58] 워낙 상징성이 높기에 몇몆 탐사팀이 이 자동차를 찾기 위해 애썼으나 배의 잔해들이 자동차가 실린 격실로의 접근을 막아버려서 결국 찾지 못했다.
물론 배에 보석이나 귀금속과 같은 통상적인 보물은 없었어도 침몰 사고로 대중들에게 유명세를 타면서 관련 유물들이 배에 실렸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실상 보물보다 더한 가치가 매겨지고 있다. 타이타닉에 실린 비스킷은 한화 약 2,600만원에, 메뉴판[59]은 1억원에 거래되었고 악단장이 실제로 연주한 바이올린은 무려 15억원에 거래되었다. 이처럼 타이타닉이 붙었다 하면 기본이 수백, 수천만원이며 억대도 호가하는데 어느 타이타닉 유물을 다수 보유한 업체가 파산하면서 경매장에 내놓은 유물만 한화로 2,000억원 규모로 거의 타이타닉을 한 척 더 만들 수 있는 돈이 된다.# 타이타닉 영화에 나온 브룩 라벳의 탐사팀도 결국 다이아몬드는 못 찾았지만, 작중 나온 건져낸 유물들만 팔아도 일단 탐사비는 충당할 수 있을 정도다.
2023년 11월 11일 1등석 만찬 메뉴판[60]과 타이타닉 생존자가 구명보트에서 사용한 담요가 경매에 나왔다. 결국 1억 3천만원에 낙찰됐다. # 전체 메뉴판은 여기서 나온다.
5.3. 불길한 징조?
우연인지 운명인지 많은 사람들이 출항하기 전 불길함을 느꼈다고 한다. 어떤 선원은 자기 아내가 화이트 스타 해운의 로고가 새겨진 뜨개질을 하다가 엉켜 버렸는데 이에 아내가 불행한 징조라면서 말려 근무를 취소해 살았다고 한다. 수석 항해사 헨리 와일드는 출항 전 가족에게 뭔가 불길하다는 편지를 남겼는데 이게 그의 생애 마지막 출항이 되었다.침몰 전 배와 한참 떨어진 스코틀랜드에서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제시라는 여자아이가 꿈에서 큰 배가 침몰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월리라는 사람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을 봤다고 한다. 소녀가 꿈에서 보았던 일은 실제로 일어났고 윌리스 하틀리가 이끄는 악단은 가라앉는 배에서 생애 마지막 연주를 했다.
출항하던 날 갈매기가 단체로 배를 쫓아왔다고 하는데 이는 뱃사람들에게 안 좋은 징조로 여겨지기도 했다. 앞서 말했듯이 다른 배와 아슬아슬하게 충돌할 뻔한 일도 있었다. 승객 중 한 사람이었던 르네 해리스가 이 상황을 보면서 타이타닉호에 오르려고 할 때 웬 낯선 사람이 다가와서는 "당신은 삶을 사랑합니까?"라고 물었다. 해리스가 그렇다고 하자 낯선 사람은 가면서 "나쁜 징조군. 셰르부르에서 내리시오. 나는 그렇게 할 거니까"라고 했다고 한다. 위 '출항과 항해' 문단에서 보듯 타이타닉호는 프랑스의 셰르부르와 아일랜드의 퀸즈타운에 기항하고 뉴욕으로 향했지만 해리스는 내리지 않았다. 타이타닉이 침몰하자 마지막 구명선에 올라 살아남았지만 남편을 잃었다.[61]
항해 와중에 석탄 저장고에 원인불명의 화재가 나기도 했다.[62] 문제는 불이 붙은 석탄을 처리하기 위해선 기왕 붙은 거 아까우니[63] 끊임없이 보일러에 집어넣는 방법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타이타닉호는 전속력으로 항해하게 되었고[64][65] 결국 그 속도 그대로 빙산에 들이받고 말았다. 이 화재로 약화된 격벽들이 빙산과의 충돌 때 버티지 못했다는 점도 컸다. 물론 석탄으로 추진하는 기선들은 항해 중 수시로 기관을 멈추고 화로의 석탄재를 긁어 퍼내 버리는 작업을 해야 해서 항해 내내 전속 전진하진 않았다.
또 특기할 만한 것은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1912년)가 일어나기 14년 전인 1898년 모건 로버트슨(Morgan Robertson)이란 작가가 쓴 단편소설 <무용지물(Futility)>이 이 배의 침몰을 예언했다는 사실이다. 로버트슨의 그 소설 내용이 "'타이탄'이란 초호화 여객선이 대서양으로 첫 항해에 나섰다가 빙하와 충돌하여 대형 인명사고를 낸다"는 것이었는데 이 소설에 나오는 탑승객 숫자와 구명 보트 수, 출발 항구, 사고 원인과 사고 지점, 배의 규모와 사고 시기가 14년 뒤에 실제로 일어난 타이타닉호 사건 당시와 매우 유사했다.[66] 그런데 작가인 로버트슨은 자신이 예측한 것이 아니라 자신은 그저 선박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소설을 꼼꼼하게 썼을 뿐이라고 했다고 한다. 사실 타이타닉은 비약적으로 거대화된 배와 이를 따라가지 못한 엉터리 규정이 근본적인 문제인 인재였기 때문에 이에 대해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면 '언젠간 이런 사고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게 가능하긴 했을 것이다. 당시 규정으론 800피트대[67]의 초거대유람선에 실을 구명보트 수가 대충 짐작이 될 것이고 그 정도 규모의 배라면 승선인원도 대략 짐작이 가는 데다 이런 초대형 여객선을 만들 만한 국가도 몇 없었으며 당시 가장 주된 코스는 영국-미국 사이 대서양 횡단 항해인게 당연하고 출항 항구도 뻔했다. 사고 시기나 지점은 과거 사례를 조사하여 대충 갖다 맞추면 되는 것이었다. 즉, 선박에 대해 굉장히 잘 알고 명석한 작가가 현실적으로 적은 소설이 공교롭게 실제 사건과 맞아 떨어진 것이다.
6. 침몰
자세한 내용은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문서 참고하십시오.7. 난파선 발견
발견 당시 영상 |
수심 약 3800m에서 발견된 두 동강난 선체는 각각 약 600m 떨어져 있었으며 약 20% 정도[70]가 침몰 과정과 그 후의 과정에서 유실되었다. 선수는 침몰 뒤 15에서 30도 정도의 각도를 유지하며 해저 바닥을 향했고 앞부분부터 진흙 바닥에 처박혔다. 이 때 선수의 약 20m가 진흙 속에 파묻히게 됐다. #1 #2 발견 당시에도 선수는 비교적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잔해의 선수부분 |
잔해의 선미부분[71] |
배의 모든 굴뚝은 침몰 과정에서 유실되었고[72] 마스트가 선교루를 향해 쓰러지며 선교 지붕을 박살내 조타실이 노출돼 있었다. 유해나 옷은 한 구도 발견되지 않았는데 7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심해의 고압과 유기물에 분해되어 없어졌기 때문이다.[73] 그래서 실제로 잔해를 탐사했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직물인 옷이나 유기물인 시신보다 비교적 잘 버티는 신발이 유독 많이 보였다고 한다.
잔해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는 모두 다 기뻐했지만 누군가 시계를 보고 "그러고 보니까 침몰했던 시각 20분 전인데"라고 하자 분위기가 숙연하게 바뀌어 하나같이 침묵했다고 한다. 발라드는 배를 발견하고 한동안은 그 사실을 언론에 알리지 않았으며 참사에서 죽은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추모비를 세웠으며 잔해에서 단 한 개의 유물도 건지지 않았다.
1993년 9월에는 미국 조선 전문가 윌리엄 가츠키(William Gartzke)가 당시 기록을 근거로 타이타닉호 침몰 참사를 미리 막을 수 있었던 인재(人災)로 해석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생존자들은 배가 빙하와 충돌하는 순간 엄청나게 크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고 순식간에 가라앉았다고 증언했는데 그 소리는 저급 강철판이 만들어낸 대재앙의 신호였다는 것이다. 윌리엄은 건져올린 선체 파편을 연구한 결과 충돌시 휘지 않고 부서지는 질이 낮은 강철판을 사용한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고급 강철판을 사용했다면 침몰을 막았거나 침몰시간이 지연되어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 타이타닉은 당시 기준으로는 최고급 수준의 강철판으로 지어졌다. 단지 당대 제강기술의 수준 자체가 현대보다 너무 낮았을 뿐이다.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한계인데 당시로서는 아무리 날고 기어도 기술의 한계로 그 이상 좋은 강철판을 만들 수 없었다.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황의 함유량이 많아 저질 취급받을 물건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술이 발달한 (약 한세기 뒤의) 미래의 시선에서 볼 때 이야기고 건조 당시에는 그것이 곧 최고급 강철판이었다. 어쨌거나 강철판은 황이 많이 섞인 것 때문에 낮은 온도에서 휘어지기보다 부서져 버린 것이다. 당시 한국어판 뉴턴에 이와 관련된 기사가 실렸다.
침몰로부터 100년이 지난 2012년 기준으로 가라앉은 배의 대부분이 부드러운 뻘 바닥에 파묻히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2019년엔 한 해저 탐사팀이 다시 한 번 타이타닉호 침몰 장소를 방문했는데(기사)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형체를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됐다고 한다. 바닷속에 107년이나 있었으니 금속을 먹는 박테리아와 염분에 의한 부식+심해 해류의 영향으로 이렇게 되었다고. 침몰 당시 손상이 심했던 배 뒷부분은 지금은 거의 다 파괴되어 흔적만 유지하고 있고 카메론 영화판이 나오던 시기에도 존재했던 망루는 떨어져나갔으며 발견 초기엔 형태가 그나마 남아있던 선장실은 완전히 사라진 채 한쪽 갑판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전문가들의 추정으론 지금도 하루에 3kg씩 부식되어 바닷속에 흩어지고 있으며 금속을 먹는 박테리아로 인해 2030년도 무렵엔 현재 남아 있는 부분들마저도 파괴되면서 잔해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는 지극히 당연한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한 마지막 과정이다.
그나마 남아있는 잔해를 전체를 스캔하여 3D 그래픽 형식으로 연구를 위해 보존할 예정이다.#
2020년에는 배의 일부분을 해체해서 유물들을 인양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유족들이 반대했다.#
2024년에도 다시 탐사하면서 1986년 이후로 발견되지 않아 영원히 사라진 것으로 추정됐던 다이애나 동상을 40여년만에 발견하였다.#
타이타닉을 통째로 인양하면 어떻겠냐는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데 대서양의 가혹한 해류+날씨+빙산이라는 위험요소가 너무 많고 수심 약 4,000m라는 심해에 있어 현대 과학 기술력으론 매우 힘들다.[74] 만약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치더라도 위에 언급된 부식이 매우 심각해 살짝 건드려도 바스러질 수준이기 때문에 올리는 도중 작살나 다시 바다에 빠질 가능성이 높으며 인양작업에 들어갈 천문학적인 비용을 부담할 개인 혹은 기업이 있을지도 미지수다. 특히 사고로 희생된 이들을 기리는 의미에서 위에 언급된 탐사대들도 최소한의 조사에 필요한 샘플 이외에는 건드리지 않았을 만큼 본격적인 인양은 금기시되는 모양새라 타이타닉은 완전히 파괴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2030년도 무렵까지는 대서양 바닷속에 잠들어 있을 예정이다.[75] 참고로 1980년에 타이타닉 인양을 소재로 삼은 영화 타이타닉을 인양하라!가 나왔는데 이때만 해도 타이타닉이 침몰 중 반으로 갈라졌다는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아 무사히 인양하는 결말로 나온다.
8. 자매선들의 운명
타이타닉의 동생이라고 할 수 있는 HMHS 브리타닉은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의 여파로 선체 보강 작업과 구명보트 수 증설 등 안전 관련 작업을 추가로 해서 타이타닉 보다 늦은 1914년에 진수가 이루어졌지만 진수하자마자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1915년에 곧바로 병원선으로 개조되어 에게해에서 병원선으로 활동하다가 1916년 11월 21일 아침 독일군의 기뢰를 건드려 약 1시간만에 침몰했다. 다행히 타이타닉 참사 이후 구명정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설치한 덕에 북대서양에 비해 수온이 따뜻한 지중해였기 때문에 사망자 수는 30명으로 끝났다.[76] 생존자는 1030명이었다. 브리타닉은 타이타닉이 침몰한 곳[77]보다는 얕은 수심 146m에서 침몰했기 때문에 잔해가 타이타닉보다 온전하게 남아 있다.타이타닉과 브리타닉의 언니라고 할 수 있는 RMS 올림픽은 다행히 침몰하지 않고 1935년에 마지막 항해 후 37년에 퇴역하여 스크랩으로 처리되었지만 2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크고 작은 사건들을 많이 겪었는데 대표적으로 3가지 사건들이 있다.
5번의 항해에서 올림픽은 HMS 호크와 충돌했다. 조사 결과 올림픽의 막대한 배수량이 수압차를 만들어서 올림픽보다 크기가 작은 순양함인 호크가 끌려갔기 때문이다.[78] 당시 올림픽의 선장은 공교롭게도 타이타닉과 함께 순직한 에드워드 스미스였다. 사고가 선원들이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 원인으로 결론나서 딱히 커리어에 흠집이 나거나 배상 책임을 지진 않았으며 여전히 그가 선장을 맡은 배만 타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명성을 유지했다. 이후 HMS 호크는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 U보트에 격침됐다.
이후 올림픽은 제1차 세계 대전에 병력·물자 수송선으로 징발되어 참전했는데 독일 제국 해군의 유보트(SM U-103)를 선체로 들이받는 충각 전술로 격침시키는 희한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상선이 군함을 침몰시켜버린 유일한 기록이며 현재까지 여객선이 유보트를 격침시킨 유일한 사례로 남아 있다.
올림픽이 퇴역하기 직전이었던 1934년 올림픽은 미국의 LV-117을 들이받는 사고를 냈지만 이 사건도 전술했던 호크 사건과 마찬가지로 어마어마한 체급차이로 인한 수압차 때문에 LV-117이 빨려들어가 침몰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LV-117에 타고 있던 11명 중 7명이 사망했다.[79]
타이타닉 자매선들의 선사 화이트 스타 해운도 잦은 사고와 대공황으로 인한 경영악화로 1934년 경쟁사였던 큐나드 라인(Cunard Line)으로 인수되었다. 이게 와전되어서 화이트 스타 해운이 타이타닉 침몰이란 사건 하나로 순식간에 망했다는 속설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화이트 스타 선사는 보험이 있었기 때문에 금전적 손해는 그리 많이 보지 않았다.
올림픽호가 귀부인의 저택이 되었다가 2000년에 크루즈 선사로 유명한 로얄 캐리비안 크루즈 사가 구매하여 자사의 크루즈선인 밀레니엄호의 부속 레스토랑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배 자체로서의 올림픽이 아니라 1934년에 배가 폐함 처분될 때 철거된 올림픽호의 인테리어 파트, 특히 부설 레스토랑의 목재 내벽을 가리키는 것[80]이 아니면 1969년에 퇴역해서 장기간 수상 레스토랑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아일랜드에서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타이타닉과 올림픽호의 1, 2등실 승객용 셔틀 선박인 SS 노매딕[81]의 이야기가 복합된 착오이다.
9. 재건?
9.1. 타이타닉 2의 건조
CNN 보도2013년 2월 27일자 이후로 언론에 보도된 내용에 따르면 타이타닉 2가 만들어져서 항해할 예정이라고 한다. 호주의 억만장자인 클라이브 파머가 소유한 블루 스타 해운에서 중국 국영조선회사인 창장조선항운그룹에게 타이타닉2의 건조를 맡겨 중국의 진링조선소에서 건조할 예정이며 배는 2016년까지 완성되어 예전에 타이타닉이 항해했던 사우스햄프턴-뉴욕 노선을 운항할 예정이라고 한다. 혹시나 이게 블루 스타 해운에서 타이타닉하고 외관만 같은 배를 만들 뿐인데 괜히 언론에서 타이타닉2라고 설레발치는 거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위에 링크된 기사에 포함된 동영상의 54초 부분의 뒤를 잘 보면 정중앙에 블루스타 라인이라는 회사 이름과 함께 좌우 양쪽 사이드에 TITANIC II라고 선명히 적힌 글씨를 볼 수 있다.
만약 실제로 만들어진다면 현대 기술력으로 건조하기 때문에 외관만 동일하고 선박 구조는 리벳 공법이 아닌 용접 공법을 사용해 해당 선박을 훨씬 견고하게 건조할 것이다.
사실 현대에는 타이타닉보다 더 큰 호화 여객선이 많이 존재하고 속도 면에서도 당시와 달리 항공기에 상대가 되지 않으므로 타이타닉 2가 만들어진다면 옛날 타이타닉과 똑같게 생겼다는 점에서 호기심에 타 보는 승객을 위한 크루즈선 형태로 운영하게 될 것이다.
일단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재현 가능한 일이긴 한데 이 일을 벌인 클라이브 파머가 정치 및 경제적으로 깽판을 쳐 놓은 게 수습이 안 되고 있어 예정대로 인계받아 진수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의문이 존재한다. 일단 영어 위키백과의 해당 문서에 따르면 2019년 5월에 발표된 2027년까지의 건조 목록 중에 타이타닉II와 동일한 스펙의 배는 없다고 한다.
10. 타이타닉과 관한 도시전설
거의 모든 대형 사건들이 그렇듯 타이타닉도 몇 가지 괴담과 음모론이 존재한다. 예를 들자면...- 불행하게 생을 마감한 이집트 공주의 미라가 발견되었는데 이상하게도 그걸 소유하거나 관련된 사람들이 차례로 죽어나가다가 어느 고고학자에 의해서 어느 여객선에 실려갔는데 그 여객선이 바로 타이타닉이라는 것. 물론 실제로는 미라는커녕 고대 이집트와 관련된 그 어떤 유물도 실은 적이 없었다.
- 보험사기 음모론, 즉 타이타닉호가 모양이 비슷한 올림픽호랑 바꿔치기했다는 음모론도 있다.
- 선박 번호 390904를 거울로 뒤집어 보면 'NOPOPE' 가 되며 이는 아일랜드 선박 노동자들이 가톨릭에 대한 반감으로 꾸민 짓이라는 음모론도 전해지는데 웃긴 건 정작 아일랜드인들은 가톨릭 신자가 대다수라는 점이다. 굳이 'NOPOPE'라고 쓸 리가 없다.
- 배에 탄 사제 넷 중 프랜시스 브라운(Francis Browne, 1880-1960)이라는 예수회원(당시엔 신학생)이 있었다. 그는 퀸즈타운에서 내렸기에 살아남았는데 이 때문에 예수회가 꾸민 짓이라는 헛소리를 하는 음모론자들이 있다.[82]
브라운 신부는 사진작가였기도 해서 타이타닉 항해 당시 여러 사진을 찍은 것이 남아있다.
물론 괴담과 음모론이 다 그렇듯이 근거는 별로 없다.
11. 각종 문화/매체에서
사실 이러한 선박 사고는 예나 지금이나 알음알음 터지고 있지만 타이타닉 침몰 사건이 유독 많은 주목을 받는 이유는 그 선박과 사고 자체의 특수성에서 기인한다.선박 자체도 당시의 기준으로는 최첨단+최고급+최대급에 디자인도 뛰어난 함선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던 선박이었는데 그 관심이 식기도 전인 첫 항해에 침몰해 버린 데다가 배의 규모가 큰 만큼 피해의 규모도 큰지라 세간에 널리 알려지면서 많은 인지도를 확보한 까닭이 크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이 문화/기술적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당시 20세기 초의 서구 사회(특히 대영제국)에 큰 충격을 준 것도 있고[83] 여러 선원과 승객과 영웅담 등 항해와 침몰 과정에서 생긴 일들이 상당히 극적이기 때문에 역사상 가장 유명한 침몰선이 되었고 각종 문화와 매체에 등장하거나 오마주되어 왔다.
RMS 타이타닉/매체 문서 참조.
11.1. 모형화
여러모로 유명한 배다 보니 다수의 프라모델 회사에서 킷을 발매했거나 현재까지도 판매 중에 있다. 한국의 대형 할인매장 완구코너나 문구점에서 타이타닉 프라모델은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다.아래는 그 목록 중 일부다.
- 아카데미과학: 전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타이타닉 키트 제조사로, 관련 제품을 꾸준히 내놓으면서 퀼리티도 준수하게 뽑아내는 곳이다. 1/350, 1/400, 1/600, 1/720, 1/700, 1/1000 스케일로 발매했으며 1/700 스케일은 LED와 에칭 & 목갑판이 추가된 한정판이 발매되기도 했다.[84] 현재 1/350 스케일은 절판되었으며, 1/600 스케일과 1/720 스케일은 극히 소량만 생산하는지 찾기 어렵다. 현재는 1/400 스케일이 주력이며 출시한 한정판들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85]
아카데미 입장에서 타이타닉 키트는 대단히 의미가 깊은 효자상품이기도 한데 1990년대 후반 영화 타이타닉의 전세계적인 대히트 덕분에 해외에 많은 양을 수출했고 덕분에 수많은 기업이 줄도산한 1997년 외환 위기를 흑자로 버텨낼 수 있었다고 한다. 다른 회사들이 공장 문을 닫고 있을 때 아카데미 직원들은 잘리긴커녕 야근을 했다.
1/700 타이타닉은 조립과정에서 선저에 구멍을 뚫는 작업이 있다. 해당 부위가 꽤 얇으므로 핀바이스로 지나치게 큰 힘을 가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아카데미의 다른 키트 중에는 구멍을 뚫는 부위가 두꺼워서 매우 강하게 힘을 주어야 하는 경우가 몇몇 있는데 1/700 타이타닉 선저 구멍 뚫기에 그만한 힘을 들이면 다칠 위험이 있다. 다만 이 서술은 2010년대부터 나오는 MCP 키트들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따로 구멍을 뚫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 강남모형: 1/600 스케일로 발매했다.
- 합동과학: 강남모형 제품과 동일하다.
- G마크: 1/350 스케일로 발매하였다.
- 레벨: 1/350, 1/400, 1/570, 1/600, 1/700, 1/1200 스케일로 발매하였다.
- 멩: 논 스케일, 1/700 스케일로 발매하였다. 1/700 스케일의 경우 주황색 LED가 포함된다.
- 군제: 1/350 스케일로 발매하였다.
- 트럼페터: 1/200, 1/550 스케일로 발매하였다.
- 미니크래프트: 1/350 스케일로 발매하였다. 아카데미과학과 똑같은 금형이다.
- 즈베즈다: 1/700 스케일로 발매하였다.
- 에어픽스: 1/400, 1/700, 1/1000 스케일로 발매하였다.
- 옥스포드: 브릭 포 매니아 시리즈 BM3522번으로 레고보다 7년 앞선 2014년에 발매되었다.[86] 부품 수 907개에 길이는 68cm로 하술할 레고보다 상당히 작으며 내부 재현도 되어 있지 않다.[87] 정가는 8만 2천원이었으나 현재까지도 인터넷에서는 반값 수준인 4만원 초~중반대에 쉽게 구할 수 있다.
- 레고: 레고 크리에이터 엑스퍼트 제품군으로 '10294 타이타닉'이 2021년에 발매되었다. 1/200 스케일로 길이가 135cm에 육박하며 부품 수는 9090개로 출시 당시 레고 역사상 부품 수가 가장 많은 제품이었다.[88] 선체를 세 토막으로 분리해 객실, 수영장, 복도, 연회장, 중앙 계단, 보일러실과 엔진 등 일부 재현된 내부도 들여다볼 수 있다. 정가는 89만원.
이 외에도 중국의 한 완구회사에서는 타이타닉 영화에 편승하기 위해서 타이타닉 모형을 변신 로보트 장난감으로 만들어 팔아먹은 적이 있다. 구글 이미지 검색에서 Titanic-bot이라고 검색하면 해당 사진들이 쫙 나오며 양덕들 사이에서 최악의 짝퉁 장난감을 언급할 때 한 번씩은 언급되기도 한다. 심지어 개량판까지 있다.
12. 기타
- 이 사건은 세계의 보험역사에도 의미가 있는데 선박사건 최초로 보험에 가입한 생존자와 사망자에게 금액을 보상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당시 보상금액만 해도 엄청났을 것이며 이걸 근거로 타이타닉 침몰사고에 대해 보험사기설을 주장하는 음모론자들도 있다.
- 타이타닉의 침몰일인 1912년 4월 15일은 공교롭게도 북한의 김일성의 생일이기도 한데 북한에서는 이를 자본주의가 침몰하고 위대한 령도자가 탄생한 날로 엮기도 했다. 물론 북한인들은 이제 알 건 다 알기 때문에 타이타닉 사고를 "한날한시에 태어난 '수령님'이 몰고 온 재앙"이라고 평가한다고 한다.
SS 노매딕호 |
- 러시아의 순양함 모스크바함도 타이타닉이 침몰한 날짜와 거의 비슷한 시간대인 2022년 4월 14일 ~ 4월 15일에 침몰해 우연의 일치가 되었다.
-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시에는 타이타닉과 초도선 올림픽이 건조되고 진수된 조선소 위치에 Titanic Slipway라는 광장을 만들어 두 배를 기념하고 있으며 영국방송공사의 여름 연주회인 BBC Proms의 벨파스트 지역 행사가 여기서 열리기도 한다.
- 침몰한 타이타닉 잔해를 구경하는 잠수정 코스가 최근까지 있었는데 잠수정을 타고 해저 3,800m 아래로 내려가 8일간 타이타닉호의 잔해를 보고 난파선 현장에 서식하는 동식물을 관찰하는 코스라고 한다. 인당 금액은 약 25만 달러(약 3억 2,000만원). 금액이 금액인 만큼 어지간한 부자들 아니면 엄두도 내기 힘들다. 해당 잠수정 투어 코스는 2023년 6월 20일, 3,800m 심해로 내려가기엔 너무 허술하게 만들어진 탓에 심해로 내려가던 중 내파되어 회사의 CEO를 포함한 5명이 모두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폐지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타이타닉호 관광 잠수정 사고 문서 참조.
- 술자리 게임으로 타이타닉이란 벌칙게임이 있다. 냄비에 맥주를 채워 바다를 만든 후 접시를 띄워 그 안에 소주를 돌아가며 붓는데 마지막으로 접시에 소주를 부어 가라앉힌 사람이 냄비 안의 소맥을 전부 마시는 것이다. 당연히 큰일날 짓이므로 함부로 먹이지는 말자.
- 발음 기호가 [taɪˈtænɪk]이고 국립국어원이 운영하는 한국어 어문 규범 사이트로 검색할 시 Titanic은 '타이타닉', Titanic호는 '타이태닉호'라고 뜨는 앞뒤가 좀 안 맞는 검색 결과가 뜬다. 한국어 어문규범 검색결과 일반적으로 Titanic호도 '타이타닉호'라는 표기로 알려져 있는 편인데 외래어 표기법을 지키는 제도권 언론의 보도 중 상당수가 '타이태닉호'라는 표기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를 어색하게 여기는 네티즌들의 부정적인 댓글이 이어지고 있다. 일단 사전에 의하면 미국식 뿐 아니라 영국식으로도 2음절 부분의 a의 발음을 [æ]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영국식 발음을 원칙으로 하는 외래어 표기법 상으로는 '타이태닉'이라는 표기가 되어야 하지만 '타이타닉'이라는 표기가 워낙 널리 퍼져 있어서 그런지 '타이태닉'이라는 표기에 거부감이 큰 것으로 보인다.
[1] 맨 처음 나오는 배가 타이타닉이며 그 뒤엔 자매선인 RMS 올림픽과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당시 승객들을 구조했던 RMS 카르파티아, 올림픽과 타이타닉의 1, 2등실 승객들이 항구로 갈 때 타던 소형 연락선 SS 노매딕의 모습이 나온다.[2] Royal Mail Steamer(왕립 우편 기선)/Royal Mail Ship(왕립 우편선). 당시에는 여객선의 우편 배송이 상당히 흔했고 여객선이나 화물선이라도 우편선 업무를 겸한다면 RMS로 분류되는 것이 가능했다.[3] SteamShip의 약자. 타이타닉호의 구명보트에는 S.S. Titanic이라고 적혀 있는 걸 볼 수 있다. 간혹 TrSS라고 서술하는 경우도 있는데, Tr은 Triple-screw Steamship의 약자이다.[4] 자매선 올림픽의 이름을 올림푸스에서 따온 것과 같이, 타이타닉은 그리스 신화의 거신족 티탄에서 따 온 호칭이다. 영어 단어로써 '거대하다'를 뜻하기도 한다.[5] 바닷물을 다 걷어낸다면 침몰 지점 해수면 높이에서도 육안으로 크게 보일 정도이다. 물론 세월이 지난 현대에는 타이타닉보다 훨씬 큰 크루즈선이 많이 존재한다. 큐나드 라인의 RMS 퀸 메리 2나 로얄 캐리비안 인터내셔널의 원더 오브 더 시즈 등. 사실 로얄 캐리비안 인터내셔널의 오아시스 클래스 정도의 크루즈선 들은 모두 타이타닉 배수량의 약 5배나 된다.[6] 게다가 선장인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은 아예 본 타이타닉이 속한 올림픽급의 초도선 올림픽의 선장을 맡은 적이 있었으며, 이때도 불침이라는 별명을 언급하진 않았다.[7] 언싱커블이라는 별명은 타이타닉에 타고 있던 승객인 마거릿 토빈 브라운(일명 몰리 여사)에게로 승계된다.[8] 대표적으로 '솔라스 조약(SOLAS)'이 있다.[9] 예를 들어 군함은 아니지만 1941년에 독일 어뢰에 격침된 병원선 아르메니아호는 5,000~7,000여 명으로 추정되는 사망자를 냈지만 이는 전쟁의 참혹함을 알려주는 케이스로 여겨진다. 위에 언급된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역사상 가장 많은 9,000명 이상 사망자를 냈지만 이는 소련 측의 공격에 따른 것이었다.[10] 9.11 테러의 희생자는 다른 전쟁에 비하면 적은 숫자지만 평화로운 대도시 한복판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더욱 큰 충격을 준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11] 역사상 기록된 평화시기에 일어난 선박 침몰사고 중 사망자 1위는 도냐 파즈호 침몰 사고(1987년 필리핀, 4,386명 사망), 2위 대서양 허리케인 참(1782년 영국, 약 3,500명 사망), 3위 SS 캉야(1948년 중화민국, 2,750~3,920명), 4위 르 줄라호 침몰사고(2002년 세네갈, 1,864명), 5위 텍싱호(1822년 청나라, 약 1,600명 사망), 6위 스파이스 아일랜더 1호 (2011년 탄자니아, 1,573명 사망) 다음으로 7위이다.[12] 실제로 1966년에 폐간된 New York Journal-American이란 신문은 사고 당시 소식을 전하며 피해 규모로 애스터가 죽었고 1,800여 명의 사망자(실제 규모랑 다르게 잘못 전달됨)도 나왔다고 전할 정도다. 애스터가 죽은 후 그의 유산을 나누기 위해 공식적으로 평가된 그의 자산은 약 8천 7백만 달러였는데 이는 현대로 치면 23억 4천만 달러 규모이며 당시 미국에서 공식평가된 자산 규모 중 가장 큰 규모였다고 한다. # 물론 동시대에 자산이 무려 9억 달러로 추정되는 존 록펠러, 3억 달러로 추정되는 앤드류 카네기 같은 존재도 있지만 이는 후대 언론의 추정이며 공식평가된 수치는 아니었다. 게다가 록펠러와 카네기가 역사상 가장 부자라고도 불리면서 애스터보다 확실히 더 부유했다고 해도 이들은 강도 귀족이라고 불리면서 애스터 가문의 격에게 밀렸다. 강도 귀족라고 불릴 만큼 이들이 축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자들이지만 그런 이들도 애스터 가문을 상대로는 양보해야 할 정도였다. 즉, 애스터 가문은 재산과 품위로 세계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었고 그런 가문의 당주가 존 제이콥 애스터였다.[13] 스미스 선장은 화이트 스타 해운의 에이스급 선원으로, 타이타닉 이전 세계 최대의 선박이자 올림픽급의 선박들의 네임쉽인 올림픽호의 초대선장이었고 화이트 스타 고객 중엔 스미스의 배만 타는 사람도 많을 정도로 당시 기준으로도 업계의 스타였다. 스미스에게는 무려 50년간의 길고 화려한 상선사관 경력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항해였다. 게다가 수석항해사인 와일드는 올림픽호의 수석항해사이자 당시 선장 진급 직전이었으며 1등항해사 머독과 2등항해사 찰스 라이톨러는 원래 타이타닉의 수석/1등 항해사였으나 출항 직전 이뤄진 인사변경으로 1계급씩 내려간 것이었다. 즉 경력만렙의 스타 선장, 선장급 수석 항해사, 수석 항해사급 1등 항해사, 1등 항해사급 2등 항해사란 초호화라인업이었다. 당시 화이트 스타 해운이 타이타닉의 처녀 항해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14] 타이타닉이 실제와 달리 '불침선(unsinkable)'이란 수식어를 얻은 것도 언론의 오버 속에 나온 것이었다.[15] 같은 원리로 항공기계에서 단일 항공기 최악의 참사로 유명한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는 문제 발생 이후 조종사들이 필사적으로 버텨 30분간 비행을 계속했고 그 시간 동안 수많은 승객들이 마지막 말을 남기거나 기내를 촬영해 둘 수 있었으며 그 덕에 일부 사망자들의 유서가 공개되면서 일본을 슬픔에 빠뜨리기도 했다.[16] 특히 난파된 타이타닉을 최초로 발견한 로버트 발라드 박사의 탐사기를 다룬 책이 유명하다.[17] 선박의 등록톤수. 1GRT = 100ft³ = 2.83168466m³[18] 참고로 이 속력은 부산에서 LA까지 약 7일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길이와 폭, 속도의 미터 단위 표기는 피트 단위 및 마일 단위의 환산이기 때문에 인용 매체에 따라 소수점 단위의 차이가 존재한다.[19] 사실상 장식용이다. 그래서 영화나 일러스트에서는 마지막 굴뚝에 연기가 안 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증기선 시절에는 굴뚝이 많으면 더 힘세고 있어 보이기 때문에 이런 디자인을 주로 사용했다. 요즘도 이러는 선박이 많은데 대표적으로 디즈니 크루즈의 앞 굴뚝은 가짜다.[20] 선체의 재질이 약해 빙산에 충돌한것 만으로 침몰한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는데 후술하겠지만 1912년 당시로서는 최고급의 강철 재질이었다. 물론 철강 기술이 발달한 지금에 와서는 저질로 취급받을 만한 재질인것은 맞으나 타이타닉이 선체 재질 문제로 침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21] 현대의 비슷한 배수량의 선박들이 보통 메인엔진 1기, 보조엔진 1기로도 타이타닉과 비슷한 속도를 낸다는 점을 떠올리며 20세기 내연기관의 발달에 감탄하도록 하자. 사실 타이타닉호가 처녀 항해를 떠난 지 24년 후(1936년)에 경쟁회사인 큐나드 라인에서 발주해서 처녀 항해를 한 RMS 퀸 메리(RMS Queen Mary)호만 해도 160,000shp 마력이다.[22] A갑판 산책로 창문이 막히기 전 모습이다.[23] 안타깝게도 이후 이 배의 침몰 사고에 휘말려 사망했다.[24] Blue Riband. 대서양 정기 여객선들의 속도경쟁 정점으로 최단시간에 대서양을 횡단하는 여객선에게 부여하는 상이었다.[25] 사실 당시 선박들은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큰 배들이 속도도 빨랐다. 19세기 말에 만들어진 독일의 SS 카이저 빌헬름 데어 그로세나 올림픽급이 진수되기 전까지 세계 최대 선박이었던 모리타니아 호는 둘 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배임과 동시에 가장 빠른 배였다. 당시에는 큰 배는 더 큰 엔진과 많은 보일러를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출력도 더 커서 스피드도 빨랐다. 그러나 올림픽급 여객선들은 모리타니아와 비교해 갑자기 톤수가 1만톤 이상 늘어나면서 출력이 커진 것 이상으로 덩치가 커졌기 때문에 모리타니아에 비해선 느렸다. 타이타닉은 순항속도가 21노트, 최고속도가 23노트인데 반해 모리타니아가 블루리본을 탈 때는 대서양 횡단 평균 속도가 23.69노트에 달했다. 물론 타이타닉도 모리타니아에 비해 느린 것이지 참사 당시 구조하러 온 카르파시아이 배의 성능을 한계를 넘어 쥐어짜서 겨우 17노트를 낸 것을 생각하면 매우 빠른 배였다.[26] 토마스 앤드류스는 방수격벽을 B갑판까지 올리는 설계를 제안하였으나 이중선저와 같은 발전된 기술, 그리고 그 기준으로는 법규를 지킨 구명보트를 올렸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고 한다.[27] 사실 당시 기준으로는 안전불감증이라고 하기엔 애매하긴 하다. 타이타닉호의 방수설계가 현대 기준으로는 문제가 있지만 당시 안전 기준에선 저 정도도 기준 이상이었다.[28] 크기가 거의 비슷한 올림픽호를 없는 것 취급했기 때문에 여주인공 로즈가 칼에게 "왜들 난리인지 모르겠네요. 모리타니아호와 별 차이도 없어 보이는데요"라고 심드렁한 반응을 보인다. 실제로 모리타니아는 올림픽급들이 만들어지기 세계 최대의 선박으로, 3만 5천 톤대라 4만 6천 톤대였던 올림픽/타이타닉과는 제법 덩치 차이가 난다. 올림픽호는 1910년 진수되면서 세계 최대 타이틀을 뺏어오고 1년 후에 타이타닉에게 뺏겼다. 문제는 저 때 로즈가 대사로 실제 기존의 세계 최대 선박이었던 올림픽을 언급할 경우 실제로 타이타닉과 거의 차이가 나지 않으므로 확연히 더 작은 모리타니아로 대체하고 올림픽에 대한 건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29]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타이타닉과 같은 회사인 화이트 스타의 선박이다. 화이트 스타는 이름 끝에 ~ic을 붙이는 전통이 있다. (타이타닉, 마제스틱, 발틱 등) 비슷하게 경쟁사였던 큐나드 라인에는 배의 이름 끝에 ~ia를 붙인다. (RMS 모리타니아, RMS 루시타니아, RMS 카르파티아 등.)[30] 이 사진은 타이타닉 진수 후 올림픽과 타이타닉이 같이 찍힌 유일한 사진이다. 다른 사진들은 모두 진수전 함께 건조되고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들이다.[31] 쉽게 설명하자면 올림픽은 산책로가 ㅡ 모양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길쭉하게 있지만 타이타닉은 3분의 1 정도 막혀 - ㅡ 모양이다.(참고로 왼쪽이 앞이다.) 브리타닉도 똑같이 - ㅡ 모양으로 산책로가 나 있기는 하지만 이쪽은 병원선 도색 덕분에 둘과는 구분하기 더 쉽다.[32] 다만 이후 올림픽이 구명정을 48개 더 추가하고 몇몇 구조 변경으로 최종적으로는 올림픽이 타이타닉보다 31톤 더 무거워졌다.[33] SS Imperator.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전쟁 중 침몰한 큐나드 라인의 RMS 루시타니아에 대한 배상으로 큐나드 라인으로 가서 '베랭가리아'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34] 이후에도 독일은 1차 대전 발발 직전까지 타이타닉보다 거대한 여객선들을 연달아 취역시키며 세계 최대 여객선 보유국의 자리를 굳혔다.[35] 당시는 위에 언급된 루시타니아가 3개월만에 자매선인 모리타니아에게 세계 최대의 여객선 타이틀을 뺏기고 모리타니아는 6년만에 세계최대 여객선의 타이틀을 올림픽에게, 올림픽은 또 자매선 타이타닉에게 1년 만에 타이틀이 넘어가는 등 계속 기록이 바뀌고 있었다. 단거리 달리기 기록은 경신되어 왔지만 우사인 볼트나 칼 루이스 같은 레전드를 제외하면 거의 매 대회마다 조금씩 경신되던 기록과 선수들은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진다. 타이타닉도 저 사고가 아니었다면 당대에나 유명했지 지금까지 이름이 남을 이유도 없을 것이다.[36] 이러한 특별실은 C갑판에도 2곳 더 있어 타이타닉호 전체에 4곳이 있었다. 1등실에 전용 테라스가 달려 추가요금을 징수했으며 21세기로 치면 에티하드 항공 A380 항공기의 일등실 ‘더 레지던스’에 버금가는 위치였다. 1997년 영화 타이타닉에서 로즈 일행이 탑승한 객실이 단순한 1등실로 알려져 있는데 잭과 춤춘 걸 들킨 다음날 전용 테라스에서 부부싸움을 하는 장면을 통해 특별실임을 알 수 있다.[37] 닻이나 윈드라스 같은 계류장치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서 위험하다.[38] 타이타닉의 마지막 사진은 아니며, 1912년 4월 12일 아일랜드에서 뉴욕으로 떠나는 진정한 마지막 모습이 담긴 사진이 존재한다.[39] 두번째 사진에서 오른쪽의 배가 SS 시티 오브 뉴욕호인데 이 배도[40] 노르망디에 있는 항구도시로, 영화 쉘부르의 우산의 촬영지로 유명하다.[41] 1921년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얻으면서 이름이 "코브(Cobh)"로 바뀌었다.[42] 속도 자체는 경쟁관계에 있던 큐나드사의 RMS 모리타니아나 RMS 루시타니아가 훨씬 빨랐다.[43] 2024년 가치로 4294파운드/4799달러[44] 2024년 가치로 124536파운드/139162달러. 지금 가치로 환산해도 에티하드 항공 A380 더 레지던스보다도 훨씬 비싼 가격인데 하물며 그때 경제력으로는 진짜 최고의 부자 아니면 탈 수 없는 수준이었다.[45] 참고로 1912년에 평균 집 가격은 2750달러였다. 당시 집값이 현대보다 소득수준을 감안해도 더 낮은 편이긴 하지만, 웬만한 집값보다도 더 비싼 티켓 값이었던 셈.[46] 2024년 가치로 1718파운드/1920달러[47] 당시 다른 여객선들의 3등실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확연하다. #[48] 영화 타이타닉에서도 칼과 로즈가 승선할 때 1등실 승객용 현문 밑에서 3등실 승객들이 선의에게 일일이 이나 벼룩이 있는지 검사를 받고 있는 장면이 나오고 잭과 파브리지오가 가까스로 타려고 할 때 6등항해사 무디가 '검역은 통과했나요(Have you been through the inspections)?' 라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에 잭은 받았다고 뻥을 치고 "어쨌거나 우린 이 없어요. 둘 다 미국인이거든요."라고 추가로 뻥을 친다. (파브리지오는 미국인이 아니다) 미심쩍은 상황이지만 바로 출발해야 하는 지라 무디는 둘을 태워준다.[49] 현재 가치로는 1002파운드/1120달러다.[50] 지금은 영업부라고 불린다[51] 다만 이는 3등 항해사 이하 선원들의 이야기고 선장 스미스부터 고위급에 해당하는 수석항해사 와일드, 1등 항해사 머독과 2등 항해사 라이톨러는 모두 구명보트 승선을 포기했다. 3등 항해사 허버트 피트먼부터 선배들의 명령에 따라 구명보트 지휘를 맡았는데 피트먼은 보트 승선 당시엔 배가 침몰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 승선을 명령한 머독이 그와 악수하며 "잘 가게. 행운을 빌게"라고 한 걸 보면 머독이나 다른 고참들은 배의 운명을 직감한 듯 하다. 어쨌거나 저 넷은 배가 침몰하기 직전까지 지시를 내리는 영웅적인 행보를 보였으며 스미스, 와일드, 머독이 순직하는 가운데 라이톨러도 배와 함께 가라앉을 뻔했다가 기관실 폭발에서 방출된 수증기 때문에 선체 밖으로 튕겨져 날아가 운 좋게 뒤집어진 구명정을 타 살아남았다. 라이톨러도 뒤집어진 구명정이 수장되지 않도록 적절한 지시를 내렸는데 덕분에 그가 메달렸던 접이식 구명정 B호는 뒤집어진 상태였음에도 마찬가지로 제대로 내려지지 않은 접이식 구명정 A호(뒤집히진 않았으나 물이 들어왔다)에 비해 생존율이 월등히 높았다.[52] 선내 식당과는 별개의 체인점으로 주인장을 포함해서 이탈리아인과 프랑스인이 대부분이었다. 단 3명밖에 살아남지 못했다.[53] 침몰 당시 침수되는 우편실에서 애써서 편지들을 옮기려고 하는 것이 목격되었고 전원 사망.[54] 전부 끝까지 연주하다가 사망했다. 이 중 단장인 월리스 하틀리만 그의 바이올린과 함께 시신이 발견되었다.[55] 첫 항해에서 배에 이상이나 추가사항이 있는지 점검 목적으로 파견되었다. 배의 설계자인 토머스 앤드루스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승객이면서도 선원으로 취급받았다. 전원 사망.[56] 서양에는 꽤 최근까지 "여자를 배에 태우면 재수가 없다"는 미신이 있어서 여성들이 배에 근무한 역사 자체가 짧다. 현실적으로도 범선시대의 뱃일은 굉장히 힘든 일이라 자연히 체력요건이 되는 남성만 하다 보니 여성이 범선에 타는 것이 굉장히 상례를 벗어난 특이한 상황이었고, 그런 상황에서 생긴 미신이 기선 시설 초창기까지 이어진 것이다. 사실 기선시대가 된 이후로도 석탄 삽질이나 기관부 조작 등 고된 일이 이어졌다. 물론 자동화가 상당수 진행된 현재에도 복잡하고 위험한 작업이 많기 때문에 해군 및 상선사관을 모두 통틀어서도 여성 선원들의 비중은 낮은 편이다.[57] 집으로 돌아가는 미국인들이 많았다.[58] 1997년작 영화에서 해당 장면이 등장하며, 이 장면 이외에도 주인공 로즈 드윗 뷰케이터와 잭 도슨이 차 유리창에 김이 날 정도로 뜨거운 밤을 보낸 그 차로 등장한다.[59] 타이타닉이 침몰한 4월 14일 미국의 투자은행가 워싱턴 도지의 아내가 점심을 먹고 핸드백에 넣어 둔 뒤 타이타닉이 침몰하기 직전 탈출하고 나서 보관해 온 것이다. 메뉴판에는 닭 튀김과 그레이비 소스를 곁들인 메릴랜드식 닭고기 요리, 아스파라거스와 반숙 계란으로 이루어진 아르장퇴유 계란 요리 등 40가지의 선택사항이 적혀 있다.[60] 타이타닉호가 침몰하기 사흘 전인 4월 11일날 제공한 1등석 만찬 메뉴판으로 고추냉이 크림을 곁들인 쇠고기 등심, 굴, 빅토리아 푸딩 등이 적혀 있다. 캐나다 역사학자 렌 스티븐슨의 딸이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사진첩에서 발견했다고 한다.[61] 그녀는 타이타닉호의 생존자들 중에서도 정말 기구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녀는 미국, 그것도 브로드웨이 최초의 여성 연극 프로듀서인 유명인사였다. 해외에서 일을 마친 후 미국으로 돌아가려고 탄 배가 바로 타이타닉이었다. 사업 동료였던 남편을 잃고 거액의 사례비를 내걸었지만 끝내 시신은 찾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의 빚이 상당하단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에 그의 시아버지는 상속을 포기하고 극장을 넘길 것을 권했지만 그녀는 남편을 위해 사업을 계속하기로 하여 뛰어난 사업 수완을 발휘해 모두 갚았다. 이후 좀 살 만해지자 재산을 주식에 투자했고 모든 것을 잃었다. 결국 과거 필사적으로 지켜냈던 극장마저 잃고 젊을 때 후원하거나 도와줬던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단칸방에서 생활했다. 93세로 당시 기준으로 엄청나게 장수했지만 이는 중년부터 힘들게 살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남편과 사별한 후 3번 더 결혼했지만 모두 이혼했고 죽기 전 자신의 삶과 남편은 다시 돌아가더라도 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62] 석탄은 원래 자연 발화가 쉬운 물질이다. 보일러실 내부는 가열된 석탄과 함께 일하던 환경이었으므로 발화하기도 쉬웠던 것이다.[63] 지금은 라이터 같이 불을 붙이기 아주 쉬운 도구가 지천에 널려 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부싯돌로 불을 붙이는 방식인지라 불 붙이기가 생각보다 까다로웠다.[64] 1997년 영화판에서는 유럽 대륙을 완전히 벗어나 대서양에 들어선 뒤 스미스 선장이 배의 성능을 한 번 보자며 전속력 항해 지시를 내리는 것으로 나왔다.[65] 스미스 선장 문서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만 당시 대서양 횡단 선박은 전속력 항해가 당연한 관례였다. 현대에는 대부분 이동을 여객기로 하기 때문에 저렇게 호화로운 대형 여객선은 크루즈선으로 이용되지만 당시에는 사실상 유일한 장거리이동수단이 배뿐이였다.(세계 최초의 여객기 운항이 1913년이고 당시 기술론 대서양을 안전하게 횡단할 만한 여객기를 만들 수 없었다. 비행기로 대서양을 최초로 횡단한 사람이 나온 것이 1919년이다.) 그런 만큼 타이타닉도 운항 스케줄을 지켜야했기 때문에 제아무리 스미스 선장이 블루리본 갱신에 관심이 없어도 규정 내에서 최대한 빨리 운항해야 했다.[66] 다만 일부 내용이 소설 출간 이후 개정되기는 했다.[67] 타이탄과 타이타닉의 규모. 타이탄이 조금 더 작았다.[68] 타이타닉호 발견 뒤 2년 후 비스마르크 호를 발견하였고 요크타운과 루시테니아 등 20척 가까운 2차대전 중 침몰한 선박들을 발견하였다. 지금도 각종 프로젝트를 통해 심해 탐사와 관련된 후진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69] NGC에서 관련 다큐를 방영해준 적도 있다.[70] 굴뚝, 두동강 난 부위, 선미의 대부분의 선체, 가구 등[71] 선수부분이랑 확실히 잔해가 다르다.[72] 1번과 2번 굴뚝은 침몰 도중 옆으로 넘어졌고 3번은 선체가 반으로 쪼개진 직후 앞으로 넘어졌으며 4번은 선미가 수직으로 기울었을 때 즈음 떨어져나갔다. 물속에서 떨어져 나간 4번 굴뚝(가짜 굴뚝)을 제외한 굴뚝들은 넘어지며 많은 사상자들을 내기도 했다.[73] 애초에 100m만 내려가도 수압 때문에 온몸이 으깨지는데 타이타닉이 침몰한 곳은 해저 3800m이며 당연히 뼈도 추릴 수 없을 정도로 유해들이 훼손되었음은 물론,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기에 뼈들도 전부 유기물에 분해되거나 가루가 되고 해류에 휩쓸려 없어졌을 것이다.[74] 부식되지 않았다면 불가능은 아니다.[75] 참고로 유럽의 뱃사람들은 배가 탄생한 곳만큼이나 그 배가 침몰한 곳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마 타이타닉호의 침몰 장소가 수심이 3800m가 아니라 38m 수준으로 얕아 인양이 충분히 가능했다고 해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76] 사망자 30명도 구명보트 탑승은 성공했으나 선장이 배를 최대한 살려보려고 침몰 대신 좌초로 끝내기 위해 엔진을 제때 정지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프로펠러가 계속 돌아가고 있었고, 구명보트가 프로펠러로 빨려들어가는 바람에 사망했다.[77] 수심 약 3800m.[78] 호크함은 함수가 크게 파손되어 거의 침몰할 뻔했고 올림픽도 2개 구역이 침수되는 피해를 입었지만 침몰되지 않고 자력으로 사우스햄프턴으로 회항했다. 첫 4개 구역이 침수되어도 침몰하지 않는다는 토마스 앤드류스의 말은 사실이었던 셈이다. 문제는 이 정도의 피해를 입고도 짧은 구간이나마 멀쩡히 자력으로 항해하는 모습이 올림픽급 배들이 "불침선"이란 신화를 더욱 부추긴 것이다. 실제로 에드워드 스미스 문서에 서술되어 있다시피 저 정도 초대형 최첨단 배라면 빙산으로는 침몰하지 않는다는 게 당시로선 상식이었다.[79] 게다가 이 사건이 일어나기 약 4개월 전에도 올림픽과 LV-117이 충돌할 뻔한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그때는 사고를 피했지만 4개월 뒤 다시 만나 충돌했다.[80] 현재 영어 위키백과에 해당 내용이 기재돼 있으나 선사가 다르며 귀부인의 저택 관련은 출처 필요라는 조건이 부기돼 있다.[81] 선술했듯 이 노매딕이라는 배는 현존하는 유일한 화이트 스타 라인의 배다. 현재 영국의 벨파스트에서 복원되어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82] 진실은 간단하다. 애당초 브라운의 티켓 자체가 퀸즈타운항 티켓이었기에 내린 것이다. 참고로 여기 황당한 뒷이야기가 있는데 당시 타이타닉 승객 중 한 백만장자 커플이 브라운에게 매료된 나머지 돈 대줄 테니 뉴욕까지 같이 가자는 제안을 했지만 브라운은 신학생이기 때문에 수업 몇 주 빼먹으려면 학교의 허락을 구해야 했고, 수업 째고 싶다는 전보를 들은 교수 신부는 당장 내리라는 답장을 보냈다. 그렇게 브라운은 목숨을 건졌다.참고[83]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는 실제로 인터뷰에서 "이제 빙하 침몰의 시대는 끝났다"고 한 적이 있는데 이는 망언이 아니라 당시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실제로 자매함인 올림픽호 역시 충돌을 여러 차례 버티고 생존했고 진짜로 "우리가 배를 너무 잘 만들어서 빙하에 부딫히는 정도론 이제 침몰 안한다"고 여겼다. 부자들과 세계적인 유명인들이 타는 배에 구명정을 승선인원의 절반만 구비해 놓는 요즘 기준으로는 말도 안되는 상황의 원인이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보란 듯이 그런 자신감이 처녀항해에 박살이 났으니 충격이 클 수 밖에 없다.[84] 다만 1/700 스케일 상품의 경우 흰색빛 LED가 포함된 제품이 나왔다.[85] 2011년에는 타이타닉 100주년 기념으로, 2019년에는 회사창립 50주년 기념 등. 이런 한정판 기념 키트들은 하나에 수십만원을 호가한다.[86] 원래는 해외 수출용으로만 만들어졌으나 한국 팬들의 폭발적 반응 덕에 한국에도 정식으로 발매되었다.[87] 다만 이 덕에 135cm에 달하는 초거체인 레고 타이타닉보다 진열하기 훨씬 용이하다는 장점도 있다.[88] 이후 부품 수 1만 개가 넘어가는 '10307 에펠탑'과 '31203 세계지도'가 출시되며 3위로 밀려났다.[89] 신기하게도 현재까지 남아 있는 화이트 스타 라인의 구명보트가 단 두척 있는데 이 중 하나가 노매딕호의 구명정이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1899년에 건조되어 1914년 침몰한 RMS 오시애닉호의 구명정으로, 2016년에 발견되어 복원 후 스코틀랜드의 한 박물관에 전시됐다고 한다. 이 오시애닉호의 프로펠러 블레이드 한쪽도 스코틀랜드에서 보조 중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