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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중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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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치즘은 독일 보수주의 전통과 구별되는 개념이므로 적지 않는다.
** 나치의 National socialism이 아니라 비스마르크State socialism이다. 다만 학계에서 일반적인 사회주의로 인정받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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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중앙당
Deutsche Zentrumspart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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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85890> 약칭 Zentrum
영어 명칭 German Centre Party
별칭 가톨릭 중앙당
창당일 1870년 12월 13일[1]
1945년 (재창당)
정치적 스펙트럼 우익 (현재)
중도 ~ 중도우파 (1925년 이전)
이념 기독교 민주주의
보수주의
정치적 가톨릭
상징 색 [[파란색|
파란색 (#185890)
]]
중앙당사
독일 Straberger Weg 12 41542, Dormagen, NRW
유럽 정당 무소속
유럽의회 정당 무소속
대표 크리스티안 오테
(Christian Otte)
연방의회의원
0석 / 709석
연방상원의원[2]
0석 / 69석
주의회 의원
0석 / 1868석
공식 사이트 홈페이지 }}}}}}}}}

1. 개요2. 역사
2.1. 형성
2.1.1. 독일 내부의 반가톨릭 분위기2.1.2. 문화투쟁2.1.3. 역효과: 가톨릭중앙당의 급성장
2.2. 제2제국 시기2.3. 1차 대전바이마르 공화국 시기2.4. 나치 독일 이후 몰락2.5. 65년만의 짧은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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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제국 시기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활발히 활동했던 정당. 흔히들 중앙당이라고도 많이 부른다. 독일, 영미권, 한국 모두에서 처음에만 가톨릭을 앞에 붙여주고 그 다음엔 줄여서 중앙당이라고 하는 편. 독일어 원어 당명에는 '가톨릭'이 없지만 가톨릭 정당이므로 관습적으로 가톨릭이 당명에 붙는다.

1870년 문화투쟁의 와중에 가톨릭을 대변하기 위해 형성됐으며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까지 꾸준히 원내 제 2, 3당 자리를 차지하면서 연정을 구성하는데 캐스팅보트를 쥐곤 했다. 이후 1933년 히틀러에 의해 해산됐다가 종전 후인 1945년 재건됐지만, 다수의 옛 지지자와 당원들은 독일 기독교민주연합으로 소속을 옮기면서 힘을 잃어 소규모 지역 정당으로 전락하고 만다. 당원수가 현재 겨우 600명이다.

2. 역사

2.1. 형성

당시 반동주의자이던 자유주의자이던 상관없이 개신교도들은 가톨릭을 공격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위기감을 느낀 가톨릭 신자들은 굳게 단결했고 그 결과 1870년 가톨릭 중앙당이 탄생한다.

2.1.1. 독일 내부의 반가톨릭 분위기

1850년대에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에 프로이센 대표로 파견된 기간에 비스마르크는 정치적 가톨릭 신앙이 남부 독일에서 가장 큰 '프로이센의 적'이라고 믿게 되었다. 세기 중엽의 가톨릭이 점점 로마 중심으로 전개되는 흐름에서, 가톨릭의 복고적인 경건주의와 보란 듯이 자행되는 성지순례, 공개적인 축제의 광경을 목도하며 그는 극도의 혐오감을 품었다. 실제로 그는 이런 모습이 "지극히 혐오스럽고 교활하며 우상을 숭배하는 위선적인 가톨릭 신앙"으로서 "주제넘은 교리를 하느님의 계시로 왜곡하고 우상숭배를 속세를 지배하기 위한 기반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3] 이런 의혹에는 다양한 시각이 뒤섞여 있었다. 가톨릭 복고 특유의 현상에 대한 (비스마르크의 경건주의적인 영성으로 두드러진) 프로테스탄트적인 경멸, 일종의 어중간한 독일 관념론, 그리고 심리를 조종하고 대중을 동원하는 교회의 능력에 대한 (거의 편집증과 구분이 안 되는) 정치적 불안 등 등.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박병화 옮김 (서울: 도서출판 마티, 2020), 762-763쪽
이런 반감은 독일 통일의 와중에 불거진 갈등 때문에 뿌리가 깊어졌다. 독일 가톨릭은 전통적으로 독일 문제의 주도권이 오스트리아에 있다고 보았으며, 600만 명의 오스트리아 독일인(주로 가톨릭 신도)을 배제하는 프로이센 주도의 '소독일안'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 1871년 이후 가톨릭을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제국의회에서 야당에 포진한 3대 소수 민족(폴란드인, 알자스인, 덴마크인) 중 두 개 민족 대표들 대부분이 가톨릭 신도라는 사실 때문에 더 깊어졌다. 비스마르크는 동프로이센의 폴란드인 가톨릭 신도 250만 명의 정치적 '불충'을 의심하지 않았다. 또한 교회와 교회의 네트워크가 폴란드 민족주의 운동에 깊이 연루되었다고 의심했다.
이 같은 우려는 새로운 국민-국가 내에서 전보다 더 파괴적인 요인으로 잠재해 있었다. 비스마르크가 새롭게 일군 제국은 어떤 의미에서도 '유기적'이거나 역사적으로 진화한 통일 국가가 아니라 4년간 외교 전쟁 끝에 나온 고도로 인위적인 산물이었다.[4] 프로이센의 역사에서 종종 그랬듯, 군주제의 성공은 인상적인 모습 못지않게 취약한 구조를 안고 있었다. 너무 빠른 시간에 합쳐진 신생 제국은 쉽게 흩어질 수 있으며, 내부로부터의 분열을 막아줄 정치적·문화적 응집력을 결코 얻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있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이런 불안이 과장된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실감하는 것이었다. 이런 풍토에서 가톨릭을 국가적 단합을 방해할 가장 무서운 국내 요인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럴듯해 보였다.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박병화 옮김 (서울: 도서출판 마티, 2020), 763-764쪽

가톨릭 중앙당의 사상적인 뿌리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에서 싹트기 시작한 정치적 가톨릭주의였다. 1850년대 무렵부터 독일 전체를 대표하지는 못했지만 바이에른 왕국, 바덴 대공국등 몇몇 왕국에는 가톨릭이 정당으로 세력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 편 1860년대 이후 민족주의가 유럽을 휩쓸면서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필두로 한 독일의 민족주의 개신교 신자들은 가톨릭 신자들이 조국보다는 교황과 종교에 맹목적으로 충성을 한다고 비난을 일삼으면서 독일 내 가톨릭 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문화투쟁(Kulturkampf)을 시작한다.

2.1.2. 문화투쟁

자유주의 노선의 신문과 잡지는 가톨릭 신도들을 (자유로운 양심을 가진 남성 납세자의 가치관에 기반을 둔 사회적 자유주의 세계와 반대되는) 비굴한 꼭두각시 집단으로 묘사했다. 이뿐만 아니라 정형화된 반교권적 이미지로 가득한 동물우화집이 나올 정도였다. 자유주의 잡지에 실린 풍자화 중에는 교활하고 마른 예수회원과 호색하고 살찐 사제들 그림이 많았다.(성직자의 새까만 옷은 만화가들이 기교를 부리기 쉬운 대상이었다). 이런 그림은 교구 사제가 고해 성사를 맡는 걸 비난하거나 수녀들의 성적 예의범절을 의문시함으로써 가부장적 핵가족을 신성시하는 자유주의의 믿음을 표현했다. 새로운 가톨릭 질서의 여러 분야에서 여성이 맡은 중요한 지위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과 사제의 독신(혹은 비독신) 생활에 대한 그들의 호색적인 관심을 통해서, 자유주의자들은 반가톨릭 운동의 형성에 결정적이라고 할 '남성성'에 대한 (늘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뿌리 깊은 집착을 드러냈다.[5]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박병화 옮김 (서울: 도서출판 마티, 2020), 764-765쪽
1878년 말에 프로이센의 가톨릭 주교 중 절반 이상이 망명을 하거나 투옥되었다. 1,800명이 넘는 사제가 감금되거나 망명했으며 1,600만 마르크의 가치가 넘는 교회 재산이 압류되었다. 1875년 들어 첫 4개월 동안에만, 사제 241명과 가톨릭 신문사 편집장 136명, 가톨릭 평신도 210명이 벌금을 물거나 투옥되었으며 신문사 20곳이 몰수되었다. 또 가톨릭 건물 74개 동이 수색당했고 가톨릭 정치 활동가 103명이 추방되거나 억류되었으며 가톨릭 협회와 클럽 55개가 폐쇄되었다. 1881년에 가서는 프로이센의 전체 교구 중에 사제가 없는 곳이 4분의 1이나 되었다. 이것이 수 세대 동안 독일의 정치와 공공생활의 골격을 형성한 '문화투쟁'(Kulturkampf)이 절정에 올랐을 때의 프로이센 모습이었다.[6]
이 시대에 유럽에서 종파 문제로 갈등을 겪은 국가가 프로이센만은 아니었다. 1870년대와 1880년대에 유럽 대륙 전역에 걸쳐서 가톨릭과 세속 자유주의 운동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었다. 그런데 프로이센의 경우는 유별났다. 다른 어디에서도 가톨릭 기관과 구성원들을 그토록 체계적으로 억압한 곳은 없었다.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박병화 옮김 (서울: 도서출판 마티, 2020), 761쪽

2.1.3. 역효과: 가톨릭중앙당의 급성장

1870년대 중반에 가서, 자유주의 좌파는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이 운동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갈수록 급진적인 반교회 운동의 조치는 독일 보수주의에서 '성직자' 분파를 형성한 많은 프로테스탄트에게 불안감을 주었다. 이들은 '문화투쟁'의 진정한 희생자는 가톨릭 교회나 가톨릭 정치가 아니라 종교 자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박병화 옮김 (서울: 도서출판 마티, 2020), 765-766쪽

그러나 문화투쟁은 여러 방향에서 비판을 받게 된다. 자유주의 좌파 입장에서 이는 기본권의 침해였고, 프로테스탄트 입장에서는 도저히 강 건너 불 구경할 처지가 못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스마르크의 운동은 정치사회적 세력으로서 가톨릭을 무력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가톨릭 세력을 키워주었다. (중략) 아마 비스마르크의 실패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프로이센의 (그리고 많은 독일 지역의) 가톨릭 정당이라고 할 가톨릭중앙당(Zentrumspartei)의 눈부신 성장일 것이다. 물론 비스마르크는 적어도 프로이센 의회 내에서 이들을 고립시키는 데는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제국의회 선거에서 독일 유권자의 가톨릭중앙당 지지자가 늘어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1871년에 프로이센 가톨릭 신도들은 23퍼센트만 중앙당을 지지했지만, 1874년에는 이 비율이 45퍼센트로 늘어났다. 비스마르크의 '문화투쟁'이 빚은 참화에 상당 부분 덕을 본 중앙당은 사회 환경에 깊이 뿌리박은 상태에서 이때까지 정치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던 가톨릭 신도들을 동원하고 당과 정치의 전선을 확대하면서 "일찌감치 세력을 떨쳤다."[7] 다른 정당은 비가톨릭 진영에 포진한 그들의 지지자들을 규합하면서 점점 중앙당을 따라 했지만, 1912년에 가서야 이들은 중앙당의 대도약을 따라 잡을 수 있었다. 이때도 중앙당은 사민당 다음으로 제국의회에서 세력이 막강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당과 보수당 소속의 의원 대다수는 여전히 사민당과 손을 잡는 데 신중했기 때문에 중앙당은 가장 강력한 원내 세력이 되었다. 이런 결과는 비스마르크가 1871년에 문화투쟁을 전개했을 때 의도했던 것이 아니었다.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박병화 옮김 (서울: 도서출판 마티, 2020), 770쪽

더군다나 피해 당사자인 가톨릭 신자들이 가톨릭중앙당으로 뭉치는 효과를 낳았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비스마르크는 자기가 전혀 원하지 않은 결과를 스스로 야기한 꼴이었다.

2.2. 제2제국 시기

가톨릭 신도들의 전폭적인 지지[8]를 힘에 업은 가톨릭 중앙당은 1874년 선거에서 91석을 차지하면서 좌파계열 독일 사회민주당과 함께 비스마르크에 반대하는 정당의 대표격이 된다. 여기에 당시 독일 내 주요 소수민족이었던 폴란드인들[9]을 지지세력으로 흡수한 것은 보너스.

하지만 이후 당 내에서 "세속적인 영역은 교황의 의사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대신 당의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자"라는 의견이 다수의 목소리가 되었으며, 1890년대 프로이센 당국과 바티칸사이의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자 가톨릭 중앙당은 비스마르크 정권의 지지 세력으로 정치적 입장을 선회한다. 모든 영역에서 지지를 하는 것은 아니었고 입장 충돌도 꽤나 잦았지만 비스마르크의 독일 내 정책은 대부분 지지를 표명해준다.

2.3. 1차 대전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1차 대전을 독일의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위대한 모험이라고 선언한 중앙당은 전쟁 기간 내내 채권을 비롯한 독일의 전쟁 수행 노력을 아낌없이 지원한다. 가톨릭 교주인 교황이 전쟁을 반대했기에 당내에서 이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긴 했지만 이 시기 당강령에 사회주의 실현을 목표로 내걸고 있던 독일 사회민주당마저 계급투쟁 대신 조국수호라는 슬로건을 외치면서 전쟁을 지지하는 마당에 가톨릭 우파인 중앙당이야 언급할 가치조차... 이후 1918년 독일 혁명으로 제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수립되자 중앙당은 사민당이 주도한 연립 내각에 참여한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도 원내 제2당의 자리를 차지하며 국민의 지지를 재확인한 중앙당은 바이마르 헌법의 수립을 통해 그들이 창당 때부터 꿈꿔왔던 가톨릭 신자와 개신교 신자 사이의 평등을 획득하는데 성공한다. 비록 공교육 내에서 종교를 의무적으로 가르쳐야 하는지와 같은 몇몇 문제를 놓고서는 심한 대립을 빚기도 했지만 1919년부터 1932년까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내내 중앙당은 모든 연립 내각에 참여하면서 수권정당이 되었다.

하지만 대공황이 터지고 사회가 아수라장이 되면서 급격히 쇠퇴했다. 이 시기에 중앙당은 콘스탄틴 페렌바흐, 요제프 비르트, 빌헬름 마르크스, 하인리히 브뤼닝, 프란츠 폰 파펜이라는 5명의 총리를 배출했지만 내외의 어려움 속에 부실한 정치력을 보여주면서 갈팡질팡하였다.

특히 1930년 이후 취임한 하인리히 브뤼닝프란츠 폰 파펜은 여당인 중앙당조차 확실하게 장악하지 못하고 좌충우돌했으며, 정권연장을 위해서 히틀러와 나치당을 끌어들이는 등 온갖 추태를 보여주다가 자멸하면서 사실상 정권을 나치당에 갖다바치게 된다. 이들의 행보는 브뤼닝 내각파펜 내각 항목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2.4. 나치 독일 이후 몰락

당 내에서 많은 논란과 반발이 있었음에도 중앙당 수뇌부는 히틀러와 나치당수권법을 지지하면서 이 법이 제국 의회에서 통과되는데 매우 크게 기여했지만 1933년 7월 5일, 나치정권이 나치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을 해산하고, 정당 신설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면서 거하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망하고 만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다시 창당했지만 대다수의 옛 지지자들과 간부들은 이미 중앙당 출신으로 쾰른 시장을 역임한 콘라트 아데나워가 가톨릭과 개신교를 가리지 않고 비나치 계열 우파를 모아 창당한 기독교민주연합으로 넘어가면서 군소정당으로 전락하였다.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1957년까지는 연방하원에 간신히 의원을 진출시켰지만 이후로는 그것도 실패하면서 주의회 의석도 못 얻는 수준으로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2.5. 65년만의 짧은 주목

2022년독일을 위한 대안 소속이었던 우베 비트(Uwe Witt)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비례대표 의원이 자당 지역당 대표였던 마티아스 헬페리히(Matthias Helferich)의 나치즘 발언 문제로 대안당을 탈당해 중앙당에 입당하면서 1957년 이후 65년만에 원내에 다시 입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7개월만인 그해 8월에 우베 비트가 탈당하면서 다시 원외정당이 되었다.

[1] 1933년 7월 5일 강제해산[2] 주 정부에서 연방 상원의원을 지명하며 임기가 정해져 있지 않기에 각 주 의회의 선거 이후 자유 유권자가 가진 의석 수가 변동 가능성이 있다. 보통은 주 총리를 비롯한 주 정부의 각료들이 연방 상원의원이 되는데, 독일은 주 정부까지 의원내각제이므로 이들은 모두 주 의회 의원이기도 하다. 사실 독일의 연방 상원은 의원들이 소속 정당보다는 소속 주가 더 중요하다.[3] (책 속 주석)Pflanze, Bismarck, vol.1.,p. 368, and vol.2,p.188.[4] (책 속 주석) Lerman, Bismarck, p. 176.[5] (책 속 주석)Michael Gross, The War Against Catholicism. Liberalism and the Anti-Catholic Imagination in Nineteenth-century Germany (Ann Arbor, MI, 2004); Rosín Healy, The Jesuit Spectre in Imperial Germany (Leiden, 2003)[6] (책 속 주석)Margaret Lavinia Anderson, Windthorst. A Political Biography (Oxford, 1981), 특히 pp. 130-200; David Black bourn, Marpingen: Appartitions of the Virgin Mary in Bismarckian Germany, 1871-1887 (Oxford, 1993), pp. 106-20; Ronald J. Ross, The Failure of Bismarck's Kulturkampf. Catholicism and State Power in Imperial Germany, 1871-87 (Washington, 1998), pp. 49,95-157.[7] (책 속 주석)Jonathan Sperber, The Kaiser's Voters. Electors and Elections in Imperial Germany (Cambridge, 1997); Margaret Lavinia Anderson, Practicing Democracy. Elections and Political Culture in Imperial Germany(Princeton, NJ, 2000), pp. 69-151.[8] 당시 선거결과를 분석해보면 선거권이 행사가능한 가톨릭 신도의 80%가 중앙당에게 표를 줬다는 결론이 나온다.[9] 폴란드인들은 지금도 인구의 80%가 가톨릭 신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