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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00:45:13

카밀로 토레스 레스트레포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카밀로 토레스 레스트레포
Camilo Torres Restrepo
파일:Camilo_Torres.jpg
본명 호르헤 카밀로 토레스 레스트레포
Jorge Camilo Torres Restrepo
출생 1929년 2월 3일
콜롬비아 보고타 라 칸델라리아 인근 지역[1]
사망 1966년 2월 15일 (향년 37세)
콜롬비아 산탄데르 산비센테데추쿠리[2]
국적
[[콜롬비아|
파일:콜롬비아 국기.svg
콜롬비아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가족 칼리스토 토레스 우마냐 (부)
이사벨 레스트레포 가비리아 (모)
페르난도 토레스 레스트레포 (형)
학력 리세오 데 세르반테스 고등학교 (졸업·석사)
로사리오 대학교 (퇴학)
콜롬비아 국립대학교 (중퇴·법학과)
보고타 공의회 신학교(1946~1953년)
루벤대학교(졸업·사회학·박사)
종교 가톨릭 (세례명: 마리아)
직업 신부, 사회학자, 게릴라
소속 민족해방군(ELN)


1. 개요2. 생애
2.1. 사후
3. 평가
3.1. 콜롬비아 내부3.2. 종교계
4. 여담5. 어록6.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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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camilo-torres-restrepo.jpg
Si Jesús viviera, sería guerrillero.
만약 예수께서 살아 계셨다면 그분은 게릴라가 되셨을 것이다.
레스트레포의 발언.
콜롬비아의 신부. 신부이자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자인 기독교 공산주의자였다.

2. 생애

카밀로 토레스 레스트레포는 1929년 2월 3일 명문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부유한 부르주아 가문 출신이었고 1931년부터 1934년까지 가족과 함께 살았다. 1937년 그의 부모의 결혼생활이 파탄나자 그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떠나게 되었다.

법학 공부를 시작하기 위해 콜롬비아 국립 대학교 에 입학했으며 한 학기만 수강했다. 카밀라는 그녀의 구혼자와 사랑에 빠졌고, 그녀의 어머니가 공개적으로 거절하자 그는 보고타 신학교 협의회 에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그곳에서 7년 동안 머물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사회 문제와 현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초기에는 법학에 관심을 가졌으나 점차 콜롬비아의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신학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다. 1954년 그의 스승인 하나단 고메스(Hanathan Gómez)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사목 활동을 통해 콜롬비아 사회의 빈곤층과 밀접하게 접촉하며 그들의 어려움을 깨닫게 된다. 신학교에 있는 동안 그는 같은 반 친구인 구스타보 페레즈와 함께 사회학 동아리를 만들었다. 이 그룹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국가의 사회 현실에 대해 배우고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었다. 수년에 걸쳐 그는 자신을 사회 과학자로 정의 내리게 된다.

1955년 벨기에의 루뱅 가톨릭 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떠났다. 그러다 우연히 옛 동창인 구스타프도 만나게 된다. 그는 이 시기 유럽에서 유행하던 기독교 민주주의, 사회학 이론, 기독교 노동 운동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억압받는 계층을 위한 직접 행동을 시작했고, 콜롬비아로 돌아와서 이러한 사상에 기반한 연구와 교육활동을 시작하게 된다.[3]

1958년 그는 “Una aproximación estadística a la realidad socioeconómica de Bogotá”이라는 저서로 사회학자 학위를 취득하였고, 1959년에 보고타로 돌아와 국립대학교 목사로 임명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올랜도 팔스 보르다(Orlando Fals Borda)와 함께 1960년에 사회학부를 설립하고 교수가 되었다. 학사 논문으로 시작된 사회학 연구를 통해 도시와 농촌의 사회 구조에 모두 익숙해졌고 그는 지역사회 진흥을 위한 대학 운동(MUNIPROC)을 설립하여 툰주엘리토(Tunjuelito) 지역과 같은 보고타의 인기 있는 노동계급 지역에서 연구 및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군목으로서 그는 콜롬비아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많은 개혁을 도입했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유럽에서 강세를 보였던 해방신학 운동 사회진보주의적 가톨릭교에 끌렸고 이로 인해 그의 사상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급진적인 신념은 높으신 분들의 눈에 띄게 되었는데 토레스의 사회적 활동주의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함께 일하려는 의지는 그의 교회 상관들을 불안하게 했고, 1961년에 카밀로의 작업을 호의적으로 보지 않은 Concha Córdoba 추기경과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상황은 날이 갈수록 심각해졌고, 고위 성직자들은 그를 목사직, 학문적 업무, 국립대학교의 행정직에서 해고했다.[4]

그들은 그에게 사제로서의 의무와 세속적 관심사 중에서 선택하라고 명령했고, 결국 1965년 그는 사제직을 내려놓고 새로운 좌파 연합인 연합전선(Frente Unido)를 출범시켰다. 그의 카리스마는 지지자들을 끌어모았지만, 평화적인 방법으로 급진적 개혁을 실현할 수 있는 운동을 조직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좌절감을 느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콜롬비아의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 콜롬비아의 농촌 지역의 불평등과 토지 문제는 매우 심각했으며, 이러한 시궁창스러운 현실을 접하면서 무장투쟁이라는 급진적 결정을 내리게 된다. 10월 18일 게릴라 조직 중 쿠바의 모델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조직인 콜롬비아의 민족해방군(ELN)에 합류하게 되며, 혁명가로써의 삶을 선택한다.[5]

그의 무장투쟁 활동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1966년 첫 전투에 참가한 그는 콜롬비아 산탄데르 파티오세멘토(Patiocemento) 전투에서 군인의 소총을 회수하려다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37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2.1. 사후

카밀로 토레스의 사상은 좌파 정치 운동과 무장 게릴라 단체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민족해방군(ELN)나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 인민혁명군, 4월 19일 운동 같은 단체의 얼굴마담이 되었다. 여러 학교와 동네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6]

3. 평가

3.1. 콜롬비아 내부

"카밀로는 단순한 사제나 사회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시대적 부름에 응답한 혁명가였다.
그의 죽음은 단지 시작이었으며, 그가 남긴 정신은 콜롬비아 혁명운동에 불씨가 되었다."
알레호 바르가스[7]
콜롬비아 내부에서는 그가 '사제 혁명가'로써 기억되지만 무장 투쟁 참여는 논란이 된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이의 대변자로써 평가하며 콜롬비아의 정치적, 사회적 구조를 비판한 것을 높이 평가하고 특히나 좌파 지지자들과 사회운동가들은 혁명적 이상을 실천하다 죽은 인물로 기억한다. 보수적인 인물들은 그의 게릴라 활동을 비판하며, 그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난 이단이라고 주장한다.

3.2. 종교계

"토레즈는 그가 사제로써 가졌던 모든 것을 버리고 가장 낮은 자들의 삶에 동참한 선구자였다.
그는 기독교의 진정한 가르침이 무엇인지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엘리세오 베아르데[8]
가톨릭 교회에서는 그의 선택에 대한 논란이 컸는데, 해방 신학을 지지하는 신부들은 그가 종교적 신념을 사회 정의와 결합하려는 행위를 좋게 평가했지만 대부분은 그의 무장 투쟁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오히려 그가 역설적으로 교회의 가르침을 벗어나 폭력에 의지했기 때문에 사망한 것이라는 주장도 적지 않았다.

4. 여담

5. 어록

“나는 사제로서의 권리와 특권을 버렸다할지라도 한 번도 나 자신이 사제라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자유와 정의라는 이상 없이, 자유와 정의를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배를 포기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다.”

6. 참고 문헌



[1] #[2] San Vicente de Chucurí[3] #[4] #[5] #[6] #[7] #[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