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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4-25 21:45:45

치마(의류)

1. 개요2. 역사
2.1. 고대 한·중·일
2.1.1. 한국2.1.2. 중국2.1.3. 일본
3. 장단점4. 종류
4.1. 길이별4.2. 형태별
5. 이야깃거리6. 치마 관련 작품7. 관련 문서

1. 개요

한국어: 치마
영어: Skirt
프랑스어: jupe
러시아어: юбка
포르투갈어: saia
스페인어: falda
독일어: Rock[1]
중국어: 裙子
일본어: スカート

하의 중 다리와 다리 사이에 가랑이가 없는 의복을 통틀어 이르는 말.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 허리에 걸쳐 엉덩이와 발 전체 또는 일부를 덮는 원뿔 또는 원통형의 옷의 종류라고 정의하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허리부터 다리 부분까지 하나로 이어져 가랑이가 없는 아래옷이라고도 정의하고 있다. 한국 고서들에서는 ''라는 이두식 표기로 기록되어 있는데 붉을 적()을 '치'라고 읽는 것은 몽골의 영향이었던 걸로 보인다. 참고 영상 원래는 바지와 함께 한복의 한 종류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현대에는 서양복의 비슷한 옷들도 현지화 번역식으로 치마, 바지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여 부른다.

사람에 따라 제각각이지만, 현대에서 남성은 거의 입지 않는 옷이 되었기 때문에 치마는 여성성을 어필하는 요소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생겼다. 킬트를 입은 스코틀랜드 남학생들이 단체로 한국 관광을 왔을 때 킬트에 대해 모르는 한국인들은 그 모습을 보고 기겁하기도 한다. 물론 성 정체성과 상관없이 의생활을 거의 치마와 함께하는 사람도 있고 쳐다도 안 보는 사람도 있다.

또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의를 갖춰야 할 자리에서는 엄정한 드레스 코드로 정해져 있기도 하다. 여성 군인, 경찰 등의 정복, 여학생의 교복이나 예복은 치마와 바지를 선택할 수 있거나 치마만 있는 것이 대부분이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근무복전투복도 여군용은 치마인 경우가 많았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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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는 바지보다 성별 불문하고 훨씬 오래된 옷이다. 생긴 구조부터가 간단하다보니 옛날부터 세계 각지에서 각기 다르게 발전해 온 하의다. 훨씬 만들기 간단하니까 당연하겠지만, 바지 계통보다 치마 계통의 옷이 대체로 먼저 만들어졌다. 당장 중학교 기술·가정에 나온 바느질 파트만 봐도 바지는 만들려면 꽤 어렵다는 걸 알 수 있는데, 특히 다리와 다리를 잇는 가랑이 부분이 과정이 복잡하고 어려운 편이다. 이에 비하면 치마는 간단하며, 치마를 입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천을 휘휘 두르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남자들도 치마를 입었다. 아예 갑옷이었던 로리카 마저도 하의는 무릎이 드러날 만큼 짧았던 걸 생각하면 될듯.

그래도 고대 로마의 남자들은 후대로 들어서자 결국 바지를 입었다. 갈리아, 브리타니아 등을 정복한 뒤에 거기서 살아보니 이탈리아랑은 달리 겨울이 무척이나 추웠는데 긴 치마를 입자니 활동이 불편하니까 결국 바지를 입을 수 밖에 없었던 것. 라틴어로 바지를 Femoralia라고 하며 3세기 이후에는 일부 로마군에서도 도입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게 있는데 20세기 초 전간기까지는 남자아이들도 치마를 흔히 입었다. 대개 각 지방마다 아니면 나라마다 다르지만, 대략 만 6세에서 만 12세까지 치마를 입고 다니고 심지어 청소년기 때까지도 치마를 입어도 아무도 이상하다고 하지 않았다. 치마만 입은 게 아니고 지금으로 보면 레깅스나 스타킹 같은걸 받쳐 입었지만. 치마를 입고 학교에 가는 경우도 많았고, 심지어 그때 남아 수영복도 여아들하고 같은 모양의 원피스(치마) 수영복(다는 아니고 모양이 조금 달랐지만)이였다.

2.1. 고대 한·중·일

한중일 삼국의 치마 복식은 전문가가 아닌 이상 단번에 알아보기 힘들다. 하도 비슷하게 생기다보니 웹상에서는 "어디가 먼저냐"는 주제로 삼국 네티즌들 사이에서 키배가 벌어지기도 하는데, 애초에 세 나라 모두 북방계 복식(호복)의 영향을 짙게 받고 서로 영향이 오간 만큼 그런 논쟁은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동북공정의 일환인지 중국어 위키백과 당나라 복식 항목에서는 한복 치마가 한푸 치마에서 유래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2.1.1.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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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왕조[2] 한복 고려 왕조 한복 조선 왕조 말기~대한민국 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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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한복은 북방계 기마민족이 입던 옷인 호복에서 비롯했기 때문에 원래부터 바지가 있었고, 사람들은 삼국시대 특유의 주름잡힌 풍성한 치마[3]를 입고 속에 바지를 같이 입었다. 그리고 이러한 주름치마는 주로 귀족층의 복식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길이는 발목을 넘어 길게 내려왔다. 신분이 낮은 여성도 치마를 입었으나 길이가 비교적 짧아서 속에 입은 바지가 살짝 보이는 형태였다. 이러한 복식은 주로 고구려 벽화 등 옛 시각자료를 통해 해당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 흔히 알고 있는 한복 치마 형태가 된다.

조선 후기에서 흔히 보이는 치마 말기가 드러나는 양식을 기생복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기는 치마를 구성하는 한 부분일 뿐이고 옛날에는 말기의 노출을 크게 터부시 하지 않았으며 기생복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기생이 입는 것이 곧 유행이었다.

조끼허리식 풀치마는 가슴 부근을 압박하듯이 매어 입던 기존 치마를 개화기 때 성장기 여학생들의 건강을 고려한 서양 선교사의 조언으로 개량한 형태이며, 원래는 어깨끈이 없는 치마를 허리에 두르고 치마 말기에 달린 넓고 긴 치마끈으로 묶어 고정시켰다. 조끼허리 풀치마가 나오기 이전의 치마는 치마끈을 묶고 남은 것을 숨기지 않고 길게 늘어뜨렸는데, 간단하게 매듭지어도 치마가 흘러내리지 않게 고정이 가능한 조끼허리 말기 방식이 도입되면서 넓고 긴 치마끈이 사라졌다. 현대에는 치마끈이 좁고 짧아졌으므로, 장식의 효과를 위해 눈물고름(향대)이라는 것을 치마끈을 늘어뜨린 것처럼 달기도 한다.[4]

한복 치마의 여밈법은, 현대에 남은 방식이지만 오른자락이 위로 가게 하여 몸 왼쪽으로 여민다. 신분이 낮은 여인은 그 반대로 여몄다. 물론 지역과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으며 상술한 여밈법은 주로 서울, 경기도, 경상도 지역 풍습이 표준이 된 것이다.[5]

한복 치마는 최소 삼국시대부터 속치마, 속바지 등 속옷을 겹겹이 입어 이웃 나라들의 복식에 비해 풍성한 치마폭을 자랑했다.
2.1.2.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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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왕조[10] 한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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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왕조 한푸와 청나라 왕조[11] 치파오

중국 한족한푸는 원래 남녀 가리지 않고 상의만 원피스 형태로 입거나 상의와 함께 치마를 둘렀지만 북방계 복식인 호복으로부터 바지를 수입하면서 한국의 한복과 비슷한 양상을 띄게 되었다.
2.1.3.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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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요이 시대 관두의(貫頭衣) 헤이안 시대 쥬니히토에 에도 시대~현대 기모노

일본은 상고시절 넓은 천에 머리가 들어갈 구멍을 뚫어서 원피스처럼 입었는데 이를 관두의라고 한다. 526~536년 무렵 중국 양나라를 방문한 외국 사신들의 모습을 그린 양직공도(梁職貢圖)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사신들은 모두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있는데 반해 왜국(고대 일본) 사신의 모습을 보면 옷감으로 보이는 천을 몸에 걸치고 맨발 차림인 관두의 복장을 하고 있어서 한 눈으로 봐도 삼한왜국은 서로 다른 문화를 가졌음이 금방 드러난다. #

사실 관두의는 고대 캄보디아 같은 동남아시아 지역의 옷차림이다. 즉, 원래 일본열도의 원주민들은 동남아에서 배를 타고 온 사람들의 후손이며 이후 한반도계 도래인들이 대규모로 이주하기 전까지 고대 일본은 동남아 문화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나중에 한반도를 통해 북방계 복식이 전해진 아스카 시대~헤이안 시대 초기까지 귀족들은 삼국시대 한국에서 유행하던 것과 같이 상의와 하의가 나누어진 복식을 입었고[12] 세월이 흐르며 중국 한푸, 특히 진나라한나라 복식같은 직거포(直裾袍) 영향을 받아 상의가 길어지고 소매가 넓어지는 등 현재의 기모노 처럼 변형되었다.

3. 장단점

일단 통풍이 잘 되고 바지보다 갈아입기도 편하다.

여름옷은 팬티속바지가 따로 분리된 형태이기 때문에 시원하고 엉덩이가 잘 쪼이지 않는다.

기온을 덜 탄다. 똑같은 치마를 여름에 입어도 대충 시원하고 겨울에 입어도 대충 따뜻하다. 특히 더운 여름에는 바지보다 훨씬 시원해서[13] 구조상 다리를 둘러싸지 않으므로 허벅지가 굵은 사람들은 통이 다리에 끼는 바지보다 치마를 상대적으로 더 선호하기도 한다. 또한 안 쪽에 다른 옷을 빨리 껴 입고 치마는 벗어버리는 식의 빠른 환복이 가능하다는 점[14]과 바지와 달리 안에 뭘 껴입은 채로 돌아다녀도 문제 없다는 점 등이 장점이다.

그러나 특정한 상황에서 속옷 노출을 신경써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특히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에는 입고 나가기가 힘들다. 그리고 넋놓고 있다가 예기치 않은 아이스께끼라도 당하면... 그래서 속바지와 함께 입거나 치마바지를 입는 경우도 많다. 아이스께끼는 하지 말자.

4. 종류

4.1. 길이별

너무 뻔한 것 같지만, 간단히 롱스커트미니스커트로 나뉠 수 있다. 롱 중에서도 극단적으로 길어서 치맛자락이 바닥에 질질 끌리면 맥시 스커트로 부르고, 미니 중에서 극단적으로 짧은 것은 마이크로 스커트라고 별도 분류하기도 한다. 대체로 무릎 기준으로 길고 짧은 것을 구분하는 게 일반적이다. 딱 중간쯤 되면 미디 스커트라고 부르는데 그리 흔한 분류는 아니다.
파일:maxiskirt3.jpg 파일:201309121825198631-2289457.jpg
맥시 스커트의 예 마이크로 스커트의 예

4.2. 형태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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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코디언 나이프 박스

5. 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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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블 스커트

6. 치마 관련 작품

치마를 입는 캐릭터가 안 나오는 작품은 거의 없으므로 치마 자체가 내용과 관련이 깊은 작품만 기재했다.

7. 관련 문서


[1] 남성명사. 반대로 바지는 Hose로 여성명사이기 때문에 종종 두 명사를 엮은 언어유희가 있다.[2] 백제, 신라, 가야도 동일한 구조이다.[3] 크게 상(裳)과 군(裙)으로 나누었는데, 상은 길이가 더 길고 더욱 풍성하였고 군은 길이도 땅에 질질 끌리지 않고 옷감 역시 상보다 적게 사용했다. 전체에 주름잡힌 주름치마도 많이 등장했다.[4] 옛날에 시집갈 때 눈물고름으로 눈물을 훔쳤다는 설은 허구이다. 하지만 옛 치마끈은 면이나 마 재질로 만든 것이 많았던 데다 상의의 옷고름 만큼 넓고 길었으므로 충분히 눈물이든 땀이든 닦는 데 사용할 수 있었다. 옛 영화, 문학작품, 그림에서도 나오는 사용법이다. 치마끈에 수를 놓았다는 것도 조선시대까지의 방식이 아니며, 전해 내려오는 유물이나 그림 등 기록에도 없고 현대의 고 이영희 디자이너가 처음으로 수 놓아 장식한 치마 말기와 끈을 창시했다. 조선시대의 치마는 치마끈이나 속바지의 끈, 그리고 하의의 말기를 염색하지 않은 면이나 마 소재 처럼 마찰력이 좋은 소재로 만들어 어깨끈이 없어 쉽게 벗겨지는 단점을 보완했다.[5] 조선시대 붕당 정치기에는 치마만 보고도 당파를 가늠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북에서는 치마를 오른쪽으로 여며야 양반이라 여겼다.[6] 모양이 포대자루 같다고 대차게 까이기도 한다...[7] 왕과 왕세자의 혼례[8] 세자 이외의 왕자(대군, 군)나 왕녀(공주, 옹주)의 혼례[9] 백비나 창호지만 붙이거나 대나무에 창호지를 여러 겹 감싼 것도 있다.[10] 북방계 이민족인 선비족 왕조이다.[11] 북방계 이민족인 만주족 왕조이다.[12] 백제옷을 입었다는 기록이 남아있기도 하다.[13] 특히 교복 치마의 경우 교복 바지보다 여름에 더 시원하다. 교복은 바지가 여름용이어도 발목까지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14] 대표적으로 학교에서 여학생들이 체육복 바지를 갈아입을 때.[15] Pinafore Dress.[16] 파주동패고등학교 여학생 동복이 이런 형태.[17] 과거 소녀나라 모델이었다.[18] 이건 실제로 연구 결과가 있다. 이 연구 결과에는 반대로 여성의 자궁은 저온에 치명적이므로 바지가 더 낫다고 한다.[19] 심지어 치마 속에 속옷 말고는 아무 것도 입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