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군인 시절
어머니가 소실인 서자로 태어났는데 이로 인해 정실 소생인 형제들에게 설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 차수찬은 거의 보지 못했다고 한다. 용산고등학교[1] 졸업 후 육군사관학교 제12기로 들어가려고 시험을 쳤으나 낙방했다.[2][3] 차지철은 비록 육군사관학교 입학은 실패했지만 동창들의 증언에 의하면 지금 널리 알려진 무식한 이미지와 달리 출신 때문에 독기를 품었는지 공부를 잘 했다고 한다. 무술도 출중하여 태권도와 합기도 각각 5단, 검도 3단의 실력을 가졌다고 하는데 학창 시절에는 의외로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었다고 한다.이후 대한민국 육군 포병 간부 시험에 합격하여 포병 장교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육군사관학교 출신에 대한 컴플렉스[4]가 상당했고 경호실장 시절 육군사관학교 출신 현역 중장 또는 소장을 경호실 차장으로 임명하는 제도를 만들기도 했으며[5] 항상 경호실 훈련 때 마치 총사령관인양 군복을 입고 아예 수경사령관 등의 장군들을 지휘하기도 했다.
1959년 공수특전단에 배치받았고 1960년 선진국의 특수 훈련과 리더십을 배우기 위해 미국에 유학을 가서 미합중국 육군 기지인 조지아 주의 포트 베닝의 레인저 스쿨에 입교했다. 차지철 본인의 술회에 따르면 웬 미군 중위와 짝이 됐는데 첫날에 무거운 배낭을 다 떠맡기길래 원래 그런가 했는데, 삼일 내내 그러자 동양인이라고 깔봐서 그렇구나! 하고 빡이 돌아버렸다. 그런데 늪지 횡단훈련 도중에 차지철이 규정상 15분마다 교대해야 하는 공용화기를 짊어지고 이동하면서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음에도 미군들이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방관하다가 늪지를 다 건넌후에야 교대해주려고 하자 빡돈 차지철이 미군 교육생을 두들겨 팼는데[6] 이 때 맨손으로 본인보다 덩치가 훨씬 컸던 상대 교육생을 떡실신시킨 무술 실력을 높이 산 미 육군 측에서 교육생들한테 태권도를 시연해보이는 것으로 무마시켜줬다고 한다. 어차피 동맹국 육군 장교를 인종차별로 시비걸어 폭행을 가했던 가해자 잘못이 크기에 미 육군도 뭐라고 할 입장이 아니었다.
왼쪽부터 박정희 소장, 박종규 소령, 이낙선 소령, 차지철 대위.[7] 박정희 소장 기준으로, 왼쪽에 차지철, 오른쪽에 박종규가 서 있었기 때문에, 좌지철, 우종규라는 말도 있다. |
외모가 주는 거칠고 우락부락한 느낌과는 달리 깔끔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8] 전역 이후에도 이 성격은 변하지 않아서 입고 다니는 양복이나 신고 다니는 구두, 깔끔한 머리 모양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1961년 5.16 군사정변 때는 대위 계급으로 공수특전단에 근무[9]하고 있었으며 쿠데타에 적극 가담했다.
2. 국회의원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육군 소장 박정희가 의장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경호차장이 되었고, 박정희가 집권하자 1962년 3월 20일에 소령으로 진급하고, 2달 뒤인 5월 31일에 중령으로 특진하게 되고, 3달 뒤인 8월 21일에 예편하였다.[10]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30살의 나이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1964년에는 국학대학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고, 이후 한양대에서 2년 만에 법학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도 땄는데 이건 당시 엉망이었던 대학원 과정 + 정계인사에 학위를 남발하는 학계관행 덕이었다.이만섭은 KBS 1TV 인물현대사 차지철 편에서 권오석 등과 현역 정치인들을 폭행하는 등, 주먹으로 정치활동을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차지철도 못 건드린 인물이 있었는데 그 인물은 바로 김두한이었다. 막말로, 차지철이 김두한과 진짜로 붙었다면 처참하게 맞고 죽었을지도 모른다.
4.19 혁명 학생운동에 참여했으며 6대 국회에서 김두한의 비서로 지냈던 서용화는 국회 본회의장 안에서 갑자기 "당신 힘이 장사라며? 나하고 한번 붙어볼까?”라며 웃통을 벗어던지는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김두한은 40대 후반, 차지철은 30대 초반이었다. 게다가 김용채에게 손찌검을 당하기도 하였다.
베트남 전쟁 파병 때 여당 내에서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던 인물 중의 한 명이다. 그런데 그 이유는 미국이 참전의 대가로 들어주기로 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여당 내에서 파병을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이른바 쇼를 위해 박정희가 지시한 것이다. 쇼로 시작했으나 자기 역할에 몰입한 나머지 진짜로(...) 반대론자가 되었다고 한다.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는 박정희의 지시로 월남파병을 반대하기 위해 월남 전쟁을 연구하다가 심취해 필요 이상의 반대를 하다 박정희에게 찍힌다. 사실 참전의 정당성 문제를 떠나서 남베트남의 상황이 상당히 막장이기는 했다. 다만 한국전쟁에 구원을 한 미국이 직접 주도적으로 한 전쟁인만큼 한국으로선 필요하였다고 할 수 있다. 어찌되었든 차지철 덕에 한국의 대미협상력은 높아졌고 결국 미국은 약속대로 한국군의 현대화를 지원한다. 차지철은 그 공로로 박정희의 총애를 더욱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후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기도 광주군-이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신민당 신하균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7대 의원 임기 중에 국회 외무위원장직을 지냈는데 당시 나이가 36살에 재선의원으로 상당히 젊었다. 당연히 이건 청와대 쪽의 입김 덕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 후보로 해당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유기준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8대 의원 임기 중에 국회 내무위원장직을 지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기도 광주군-이천군-여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오세응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3. 대통령경호실장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29주년 기념식 날, 1년 1주일 전인 1973년 8월 8일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주범이 되어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 사건에 격분하여 박정희를 겨냥한 재일교포 2세 문세광의 저격으로 영부인 육영수가 사망하자 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피스톨 박 박종규 대신 경호실장이 되었다. 그리고 경호실장 임명에 따라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자 지역구는 정동성이 물려받았다.사실 박종규나 당시 국무총리 김종필은 전 국세청장 오정근[11]을 경호실장으로 추천하였지만, 박정희의 의지로 결국 마흔살의 차지철이 내정되었다. 당시 신문기사는 차지철을 박정희의 친위 중의 친위라고 소개하고 있다.
차지철을 강력하게 추천한 것은 다름 아닌 생전의 육영수였다고 한다. 여자 관계가 깨끗한 데다 술담배도 하지 않으며, 기독교 신앙심이 깊은데다, 우직하게 박정희한테만 충성하니까 경호실장으로 걸맞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물론 육영수가 말한 부분은 모두 사실일지라도, 그는 다른 의미로 절대 등용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3.1. 월권
대통령경호실장 재직 당시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 육군 준장 전두환, 행정차장보 육군 준장 노태우와 함께.[12][13] |
1974년에 경호실장이 된 뒤 박정희는 차지철의 위상을 높인다고 경호실장을 차관급에서 장관급으로 격상했다.[14] 심지어 차관급인 현역 중장을 경호차장으로 두었으며 현역 육군 준장을 차장보에 임명하였다. 비상시에는 수도경비사령부도 지휘할 수 있게 법까지 개정하였다.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11·12대, 13대 대통령이었던 전두환과 노태우 둘 다 대통령경호실 차장보 출신이다. 차지철보다 기수와 나이도 위인 장군들이 일개 예비역 포병 중령인 민간인 차지철에게 매일 군인 상관 대하듯이 거수경례를 해야 했다.
특히 차지철은 기본적인 경호 자세나 위치부터가 이게 경호실장인지 아니면 부통령이나 군 최고 사령관인지 모를 정도로 거만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각종 행사는 지금도 영상과 사진으로 많이 남아있는데,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이 같이 찍힌 장면들을 보면 하나같이 경호실장이 아니라 정부의 최고 수뇌부 혹은 군 지휘부 같은 인상을 준다. 물론 차지철이 이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가 차지철을 편애하고 그의 이런 행동을 용인했기 때문이다.
1975년 건군 27주년 국군의 날 행사 단상의 박정희와 차지철. 차지철은 경호실장임에도 지휘봉(!)을 들고 대통령 바로 뒤에서 느긋한 자세로 의자에 기대어 앉아있다.[15] |
그는 1978년 이후 점점 더 엉뚱한 짓을 자주 벌였다.
경호실장 전용식당을 마련한 것이 첫째였다. 자신의 위세 과시를 위한 것이다. 음식은 특급호텔의 요리사가 출장 서비스를 하는 방식인데 처음에 대통령을 모신 데 이어 여야 유력 정치인, 언론인 등을 차례로 불러들였다. 군대 내 위화감을 부르기 딱 좋은 일인데, 이것도 모자라 그는 대통령에 대한 충성을 보여주는 '경호원가'를 만들어 임무교대 때 부르도록 했다.
"이 나라 이 겨레 구원자 되신 /님의 뜻 받들고자 여기 모였네......."
차지철의 진면목은 그 다음에 더 잘 드러난다. 1975년 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박근혜는 비서관을 통해 "아버님께서 가사를 거북해하시니 부르지 말라"는 말을 전했다. 차지철은 그 다음 날 득달같이 달려와 대통령의 재고를 요청했다. 묻지마 충성의 뚝심에 밀린 박정희도 "꼭 부르겠다면 향토예비군의 노래와 섞어 불러라"라며 타협안을 제시해야 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1978년부터 시작된 경호실과 수경사의 합동국기하강식은 기행의 정점이었다. 차지철은 매주 월요일 아침 경복궁 연병장에서 국기하강식과 함께 분열식을 진행했다. 당시 로열박스에 앉은 차지철 주위로는 민주공화당 중진과 장관들 같은 거물들이 함께한 진풍경이었다.
1978년에는 법령이 개정[16] 되어 수도경비사령부의 지휘체계에 대통령 경호실장이 간섭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 일개 민간인이 군의 수도 방어 부대를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김신조 사건과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으로 청와대 경비가 강화될 명분은 있었지만 경호실이 군부대까지 자기 수하에 두는 일을 정당화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군 내부에서도 차지철의 심각한 월권 행위에 불만은 품고 있었지만 박정희의 절대권력의 비호를 받는 차지철 앞에 대항하는 순간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비서실장이 김계원으로 교체된 1979년부터는 경호실에서 비서실 업무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차지철은 종이에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한 독극물이 묻었을지 모른다는 핑계를 내세우며 박정희에게 올라가는 모든 보고서와 결제서류들을 중간에서 감독했다. 이때 김계원은 육군 대장 출신으로 중앙정보부장직에서 해임되고 주 대만 대사를 거쳐 비서실장에 임명됐는데, 이것은 김계원이 부총리급인 중앙정보부장에서 장관급인 비서실장으로 좌천되어서 차지철이 김계원을 물로 보고 얕봤다는 말이 있다.[17] 세간에는 차지철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간의 갈등이 잘 알려져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김계원 비서실장에 대한 무시와 월권도 정말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대통령비서실에서 여러차례 근무한 경험이 있던 이건개 검사의 증언에 따르면, 차지철이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김계원 비서실장에게는 "다른 엘리베이터에 타라"고 대놓고 면박을 줄 정도였다고 한다.# 김계원 비서실장 본인도 "대통령은 차지철 경호실장과만 하루종일 방에 들어가 있고, 자신은 대통령 얼굴 보기도 힘들다"는 한탄을 김재규에게 한 적이 있다.
차지철의 월권의 정점은 중앙정보부와의 갈등으로, 차지철은 경호실의 공금으로 대규모의 사설 정보팀을 운영했다. 또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에게 보고할 때도, 경호실장이 동석해야 한다라고 억지를 부렸다고 한다.[18] 당시에는 당연시 되던 독대를 차단 당한 김재규는 이런 월권 행위를 상당히 불쾌하게 생각했고, "내가 중장 출신인데 어찌 저런 예비역 중령이랑 옥신각신하겠나"라며 분을 삭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차지철은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무언가 말을 하면 중간에 잘라먹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들을 지껄이는 통에 김재규가 머리 끝까지 화가 나게 만들었다.
또한 박정희를 지키겠다며 상식 밖의 일들을 벌여댔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한밤 중의 전차 시위였다. 경복궁에 주둔하던 육군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에 전차 1개 중대를 갖다 놓고, 밤마다 출동시킨 것이다. 서울 시민들이 자고 있을 시간인 새벽 1시부터 3시까지 전차 여러 대가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청와대 부근을 빙빙 돌았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동네에 난리가 났다. 인근 주민들이 처음엔 전쟁이 난 줄로 알고 불안해했을 정도였다.
이런 일을 한 이유가 궁금했던 기자가 차지철에게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누군가 묻자 차지철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누구든지 대통령을 방해하는 자는 걸리면 큰일이 난다는 것을 공공연히 알리기 위해서다.” 한마디로 위압감을 심어줘 박정희는 불가침의 성역이라는 점을 알리기 위한 시위였다는 이야기다.[19] 박정희의 부관을 지낸 이광형은 이 위력시위에 대해서 박정희가 매우 언짢아하면서 "차 실장, 저런 거 하지 마. 시가행진하면서 소리 지르는 거 하지 마"라고 말했지만 차지철은 경호실 본관에 돌아오자마자 전두환에게 "그대로 해. 각하는 그러시지만, 경호를 위해 그대로 해"라고 지시하면서 박정희의 지시를 무시했다는 일화를 소개한 바가 있다.
게다가 경호실 산하 부대들을 창설한 뒤 장성 제복 수준의 질감을 지닌 특제 제복을 입혀 완벽하게 박정희의 친위대로 만들려고도 하였다.[20][21] 이들 경찰·군부대들의 101, 22, 33, 55, 88 등 같은 숫자가 두 번 쓰인 독특한 이름들을 지은 것도 차지철이다.
참고로 민주화 이후에도 이들 부대는 여전히 있다. 대통령경호처/지원부대 문서 참고. 특유의 화려한 복장 또한 다소 변화하긴 했지만 여전하다. 다만 현재는 복장이 보안사항이라 공식적인 루트로는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 없다.[22] 운이 좋다면 경호실 인근에서 종종 볼 수 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박정희의 국군의 날 사열식을 본떠 '국기 하강식'이라고 해서, 장·차관 등을 초청해 대규모의 행사를 치르게 했다. 이 행사가 매우 유명해져, 장관이든 대장이든 초청을 받고 오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일화가 있다. 각하의 친위 중의 친위가 초청한다는데, 가지 않을 배짱이 있나? 유일하게 초청을 받고도 가지 않은 것으로 밝혀진 사람은 김정렴 비서실장이었다.[23] 자신이라도 줏대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가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당시 육사 출신이 장성으로 진급하면 작전차장보 전두환 준장에게 인사를 왔는데, 전두환은 꼭 이들을 차지철에게 데려가 인사를 시켰다.[24] 차지철은 이를 매번 흡족하게 여기며, 아예 자기 이름이 새겨진 지휘봉을 하사했다.[25] 이건 일개 경호실장이 할 짓들이 아니다. 오죽했으면 당시 차지철을 두고 소통령(小統領) 또는 부통령 or 부각하 이라고 비꼬는 말도 나왔다.
3.2. 정치 개입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 등에 개입하였다. 그리하여 이철승의 온건 노선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1979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이철승 체제의 유지를 목적으로 신도환에게 접근하였다. 또한 이택돈 등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밀월관계를 유지하였다.민주공화당 내에서는 박찬종 등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26]
같은 해 3월, 제10대 국회가 개원하였을 때 민주공화당 이만섭 의원이 여당, 정부의 각성을 촉구하는 발언을 하자 이를 자신의 계열인 민주공화당 모 의원으로부터 보고받고는 박정희에게 과장 보고하여 박정희가 이만섭을 제명하려고 하였다.[27] 다만 김계원 대통령비서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28], 류혁인 정무수석비서관의 만류로 없던 일이 되었다.
3.3. 최태민 옹호
박정희는 당시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수행하던 박근혜가 최태민과 유착하여 잡음을 일으키자, 민정수석실에 조사를 의뢰했고, 이어 김재규가 수장이던 중앙정보부에도 조사를 시켰다. 김재규는 사안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최태민의 비리를 담은 보고서를 박정희에게 올렸다. 박정희는 이런 보고서를 보고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자신의 집무실로 김재규와 최태민을 불러 친국을 했다고 한다.하지만 박정희는 결과적으로 최태민을 박근혜로부터 떼어놓지 못했고[29], 김재규는 10.26 이후 항소이유서에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기재해놓았다.# 10.26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김계원은 김재규로 부터 차지철이 최태민을 옹호했다고 들었다고 한다.# 다만 차지철의 성향과 행보를 보건데 차지철은 최태민 개인에게 좋은 감정이 있어서 옹호했다기보다는 박정희에 대한 과한 충성심이 영애인 박근혜에게까지 미쳤고 박근혜가 싸고도니 그도 따라서 옹호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3.4. 최후
김재규는 부마 항쟁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라며 사태가 심각해지면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고 말했고, 차지철은 여기에 덧붙여 캄보디아[30]를 언급하며 "부산·마산 시민 100만~200만 명쯤 희생시켜도 괜찮지 않겠느냐?'는 말로 동조하였으며, 이 발언이 자신이 거사를 거행하게 된 이유 중 하나라고 항소이유보충서에 밝혔다.[31][32]아무튼 실제로 입증된 대화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통령: 오늘 가보니 삽교천 공기는 좋고 공해도 없는데 신민당은 왜 그 모양이오. 오늘 삽교천 준공식 광경을 왜 KBS TV에 보도하지 않지? 정보부장, 신민당 상황은 어떻소?
김재규: 공화당 발표 때문에 다 틀렸습니다. 사표 내겠다고 한 친구들이 다 강경으로 돌아섰습니다. 아무래도 당분간 정 대행체제의 출범은 어렵겠습니다. 그리고 주류가 강해져서 다소 시끄럽겠습니다.
여기에서 정 대행체제라는 것은 9월 7일, 서울민사지방법원이 ‘김영삼이 불법으로 총재가 되었다’며 신민당 조일환 등 3명의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들이 낸 “총재단집무집행정지가처분신청”을 정당한 사유로 받아들인 결과 김영삼의 총재직을 박탈하고 정운갑을 총재로 하는 대행체제를 출범시키라고 법원이 판결한 것을 의미했다.
차지철: 그까짓 새끼들 까불면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전차로 싹 깔아뭉개 버리겠습니다.
어느 쪽이든, 일단 차지철이 막나가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실제로 그는 박정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윗사람이 없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비단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뿐만 아니라, 비서실장이나 국무총리조차 자기 아랫사람인양 마구 대했다. 특히나 중령 출신 차지철의 월권 행위는 김재규[33]는 물론이고 전두환[34]에 이르기까지 장성급 장교 출신들에게 상당히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고름은 결국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차지철을 쏘고 박정희까지 쏘는 10.26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터진다.
이때 김재규 외에도 정-관-군 전반에서 차지철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심했는지, 사건 직후 박정희의 죽음이 알려졌을 때 처음엔 '차지철이 박정희를 살해했구나'라고 지레짐작한 인사들이 많았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차지철이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고 오판해서 수경사 병력을 동원해 청와대를 원거리에서 포위하게 했고, 육군본부에서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했을 당시 김치열 법무부 장관은 "그 놈의 새끼가 기고만장하며 까불더니 결국 일을 저질렀구나!"라며 분통을 터뜨렸는데 여기서 '그놈의 새끼'는 당연히 차지철을 가리켰다. 훗날 쿠데타를 일으키는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도 10.26 사건 직후 친구인 노태우에게 사적으로 암살 소식을 알려주면서 차지철이 범인인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정도로 차지철의 전횡은 심각했다.
전직 중앙정보부장이자 미국으로 망명해서 박정희를 디스하던 김형욱의 납치 살해에도 차지철이 관여했다는 설도 있고, 다른 설에는 차지철이 아니라 김재규가 관여했다고 한다. 어쨌든 둘 중 한 명이 연루된 것은 확실하며, 10.26 직전인 그해 10월 8일 파리에서 행방불명된 김형욱은 살해되었고, 이것을 본 김재규가 자신도 권력을 잃은 후 이렇게 될 것을 우려하여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설도 있다.
어찌됐든 10월 26일 차지철은 박정희를 따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후 그날 저녁 궁정동 안전가옥에서 열린 만찬에 참석했고, 그대로 김재규의 손에 최후를 맞는다. 좀 더 자세한 사건내용은 10.26 사건 항목 참조.
암살 직전 김재규는 "차지철, 이 새끼 너 건방져!"[35]라는 말을 던지고는 품속에 숨겨둔 PPK로 차지철의 팔을 쏘았다.
당시 차지철은 박정희의 경호실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총을 차고 있지 않았는데, 박정희가 술자리에 총이 보이는 것을 매우 싫어해서 일부러 차지철에게 총을 차고 오지 말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36] 그리고 이것이 차지철과 박정희의 운명을 결정해 버렸다.
경호실장이라는 작자가 총기를 소지하지 않은 게 어이없긴 해도, 그나마 이건 박정희의 지시 때문이라고 이해해 줄 여지가 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경호실장이라는 인간이 총격이 시작되자 대통령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것이다. 차지철은 김재규의 첫 총격으로 오른쪽 팔에 총상을 입었는데, 총 맞은 직후 바로 화장실로 도주해버렸다. 경호실장이 자기 목숨 위험하다고 최우선 경호대상인 대통령 앞에서 총 뽑은 자를 내버려두고 도망쳐버린 것이다. 물론 차지철은 전문 경호원도 아니었고 김재규가 그런 짓을 할 것인지는 상상조차도 못 했기에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도망간 것이겠지만, 경호라는 임무를 맡은 직책을 부여받았으면 자신이 보호해야할 대상에 병기를 뽑아드는 대상에는 맨몸으로라도 제압하거나 저지해야 한다는 건 상식인데, 그것도 무려 대통령경호실장이 이런 짓을 한 것이다. 게다가 총을 쏜 직후 김재규의 총이 격발불량을 일으켰고, 현장에는 경호원들이 있었던 만큼, 또 차지철은 위에서도 나오듯이 무술 유단자로 힘이 장사라 작정하고 덤비면 아무리 총을 들었다한들 그 당시에 건강이 상당히 안 좋았던[37] 김재규가 버티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38]
한편 차지철이 화장실로 도망간 사이 김재규는 박정희도 총으로 쏘았고, 그 직후 안전가옥 전체의 불이 꺼졌다.[39] 김재규도 PPK가 송탄불량이 나는 바람에 당황한 채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화장실에서 슬그머니 나온 차지철은 그제서야 총에 맞은 팔을 움켜쥐며 이미 김재규의 부하들이 다 죽이거나 무력화시킨 경호원들을 연신 불렀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고, 그러자 차지철은 경호원들을 연신 부르짖으며 문 쪽으로 달려나갔다. 이때 차지철이 흘리는 피가 오른쪽 벽 아래를 따라서 선을 그렸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김재규가 다른 총을 가지고 다시 돌아왔다.
차지철은 문으로 뛰어나가려는 찰나에 권총을 들고 들어오는 김재규와 마주쳤다. 김재규가 박선호로부터 받아든 38구경 리볼버 5연발 권총에는 세 발이 장전되어 있었다. 원래 다섯 발이 장전되어 있었는데 박선호가 두 발을 쏘았던 것이다.[40]
차지철은 안쪽 병풍 옆에 있던 장식용 문갑을 방패처럼 치켜들고, "김 부장, 김 부장."하며 애원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문갑을 앞세우고 달려들었고, 김재규는 이에 가슴을 향해서 한 발을 발사했다고 한다.[41]
오른쪽 가슴 상부에서 들어간 총탄은 허파 부위를 지나 왼쪽 등 아래로 진행하다가 몸속에 멈추었다. 차 실장은 잡고 있던 문갑과 함께 뒤로 넘어졌다.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문갑 속에 있던 물건들이 쏟아졌다.
차지철의 최후. 10.26. 직후 아직 시신 수습도 되지 않은 사건현장 사진이다. 사진 위쪽 구석에 쓰러져 있는 사람이 차지철 경호실장이다.[42] 아래 사진은 식당에서 총격을 받고 쓰러진 청와대 경호관들이다. |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그때 숨이 끊어지진 않았고 상황이 끝난 후에 중앙정보부 경비원이었던 김태원이 M16 소총으로 사망자들을 하나씩 확인사살할 때까지 살아있었다고도 한다.[43] 어쨌건 그렇게 차지철은 궁정동에서 총상으로 사망한다. 45세 생일이 불과 열흘 앞이었다.
이후 김재규가 체포된 뒤 생전에 대통령 경호를 들먹이며 여기저기 들쑤셔 주변의 원성을 듣던 주제에 정작 대통령을 경호할 생각은커녕 화장실로 도주한 것과 이유야 어찌됐든 총을 차고 있지 않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차지철은 사후 엄청나게 비판을 받았다. 이 때문에 정부는 원래 차지철의 시신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려 했으나 취소했고, 결국 차지철의 시신은 그의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차지철의 평소 행실이 죽어서까지 영향을 준 것이다.
신재순은 1979.11.18. 육군본부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대통령의 머리에 총을 갖다대었을 때는 다음에는 나를 쏘겠구나 생각하고 후다닥 일어나 실내 화장실로 뛰었습니다. 저의 등 뒤로 총성이 들렸습니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도 문 손잡이를 꼭 쥐고 있었습니다.' 바깥이 좀 조용해지자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는데 하늘을 보고 쓰러져 신음하고 있어서 일으키려고 손을 당기며 몇 번 힘을 써보다가 포기하는 눈빛을 하면서. "난 못 일어날 것 같애'. 그러고는 다시 쓰러져 신음하는데 그 눈빛도 잊을 수가 없어요. 차 실장이 고마운 것은, 그날 제가 대기실에서 면접을 볼 때 술을 못 마신다고 했더니 그 분은 '옆에 깡통을 갖다놓을 터이니 거기에 부어버려라'고 말하더군요.'
[1] 평준화 이전 서울특별시에서 커트라인으로 5위 안에 들던 고교였다. 경기고등학교, 경복고등학교, 서울고등학교 바로 다음이었다. 현재로 비유하자면 상위권 외고 정도이다.[2]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을 비롯한 하나회 창설 멤버들이 제11기, 박희도, 박준병, 박세직, 장기오가 제12기이다.[3] 차지철이 군 기수에 비해 상당히 이르게 전횡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말한 쓰리박들은 1980년대에 장관 등 요직을 받았는데 차지철 본인은 이미 장관 이상의 권력을 1970년대 중반부터 획득했기 때문이다. 당장 1년 앞서 임관한 전두환도 작전차장보로 휘하에 두고 있었다.[4] 뒤에 나올 김재규와의 악연은 이 컴플렉스에서 비롯되었을 거라는 추측이 많다. 김재규는 육군사관학교 출신 중장으로 전역한 군인 출신이었고 그래서인지 차지철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경호실과 중앙정보부라는 육영수 사후 유신 정권의 가장 큰 무력 집단의 수장들이었으니 더욱 그랬던 것도 있다.[5] 이재전 중장이 10.26 사건 당시 경호실 차장이었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준장 시절에 차장보를 거쳤다.[6] 둔기를 쓴 거 아닌지 의심을 받을 정도로 엄청나게 패놨다고 한다. 이 때 퇴교당할 뻔했는데 같이 교육받던 전두환이 짧은 영어를 동원해가며 변호해서 퇴교를 막았다고. 이 일로 차지철은 전두환에게 상당히 고마워했으며 전두환에 대해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전두환이 박정희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하자 이 호감이 경계심으로 변했는지 전두환의 경호실 근무 시절에 그를 매우 못살게 굴어서 사이가 크게 나빠졌다.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작전차장보를 이임하면서 차지철을 조심하라고 잔뜩 경고를 했는데, 정작 차지철이 노태우에겐 잘해줘서 의아해했다고 한다.[7] 흔히 박통에 관련된 유머가 없는 이유로, 박통 옆에 수류탄을 찬 차지철이 무서워 엄두도 안 나서라는 웃픈 유머가 있다.[8] 장교로 복무할 때 항상 반질반질 광이 나는 전투화를 신고 다녔고 입고 다니던 전투복이 주름지지 않도록 항상 신경쓰고 다녔으며 방바닥에 먼지 하나 안 떨어지게 청소를 했다고 한다.[9] 오늘날과 달리 1980년대까지 육군 특전사에는 보병 병과 외 포병이나 기갑 등 다른 전투병과 장교도 특전 교육을 받고 특전사 전투원으로 근무할 수 있었다. 진급 점수 확보 기회 등의 일환이었으나 비보병 장교들은 병과 특성상 효율이 떨어져 현재는 지원 자체가 안 된다. 전투 병과 중 특전사 전투원이 되려면 보병 외에는 정보병 병과나 일부 극소수 공병(시설단), 통신 등만 가능하고 포병이나 기갑 같은 병과는 불가능하다.[10] 경호대장은 피스톨 박 박종규였다. 훗날 이 둘이 대통령 경호실장 전후임자 관계라는 것을 생각하면 예고편인 셈.[11] 오정근 역시 군인 출신으로 5.16에 동참한 예비역 해병대 준장이었다.[12] 뒷줄 우측에 차규헌 당시 수도경비사령관도 있다.[13] 이들이 입고 있는 제복이 당시 대통령경호실 전용의 특별 제복이다. 회색의 톤으로 일반적인 육군 정복의 녹색과도 다르고, 옷깃에도 칼라장이 붙어있는 등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14] 이때 대통령비서실장과 동일한 장관급으로 격상된 경호실은 김영삼 정부 초기 잠시 차관급으로 내려간 뒤 임기 후반기에 다시 장관급으로 복귀되었으며, 2008년 이명박 정부에서 비서실에 흡수되어 대통령실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차관급(대통령경호처)으로 격하되었다가, 박근혜 정부에서 경호실을 독립시키면서 다시 장관급으로 격상되었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문재인 정부가 다시 차관급으로 돌려놓았다.[15] 참고로 이날 국군의 날 행사를 촬영한 대한뉴스 영상을 보면, 단상에 당시 국무총리 김종필과 국방부장관 서종철도 임석해 있었는데 차지철의 좌석이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 좌석보다 대통령과 더 가깝게, 바로 뒤에 배치되어 있다.[16] 대통령령 제9218호 수도경비사령부설치령 4조 4항에는 "사령관은 특정경비구역관 관련된 작전활동에 대하여는 대통령경호실장의 통제를 받는다"라고 되어 있다. 이 엄청난 조항은 정권이 교체되고 1980년 5월에 "사령관은 특정경비구역과 관련된 작전활동을 할 때에는 대통령 경호실장과 협의한다"로 바로 바뀌었다. 이 조항은 수도경비사령부령의 후신인 수도방위사령부령 5조 4항으로 지금도 내려오고 있다.[17] 오히려 전임 비서실장인 김정렴에게는 깍듯이 대했다고 한다. 김정렴은 박정희가 총애하던 관료인 데다가 성격이 강직하여 경호실 국기 하기식에도 불참하는 등 차지철에게 꼿꼿한 자세로 일관했는 고로 차지철이 부담스러워 했던 반면, 김계원은 중앙정보부장 시절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인 신민당에 대한 공작 실패로 박정희의 눈 밖에 나면서 한동안 주 대만 대사로 나가 있었던 점 등으로 인해 얕보았던 듯.[18] 노무현 정권 당시 최초로 정보기관장 독대가 폐지되었다가 정권 성향별로 다시 복구되곤 하는데 폐쇄적 정보 보고와 지시 관계가 자칫 민간인 사찰을 비롯한 권력형 범죄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19] 중앙일보 2015. 08.12자 기사 김종필의 '소이부답'.[20] 이 특제 제복이라는 것도 어이가 없는 것이, 바로 나치 독일의 슈츠슈타펠의 제복 디자인을 일부 차용한 것이다.[21] 참고로 10.26 사건을 다룬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서 복장을 고증했는데 퀄리티가 좋은 편이다. 해당 의상소품 제작 블로그의 사진들[22] 참고로 사진 주소를 보면 알겠지만 해당 사진이 올라온 곳은 유용원의 군사세계다.[23]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사실 차지철이 박정희 이외에 감히 개기지 못한 인물 중 한 명이 김정렴이기도 했다.[24] 물론 전두환도 겉으로는 이렇게 차지철에게 숙였지만, 속으로는 '나야말로 각하(박정희)의 친위 중의 친위인데 차지철 따위를 통해서 각하와 이어져야 하나'라며 그를 싫어했고 불만이 많았다.[25]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자기 이름이 새겨진 만년필을 하사하는 것으로 재현되었다.[26] 박찬종이 90년대 한때 "무균질 정치인"이라는 닉네임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기도 했지만, 결국 당내 (여당 야당 모두) 에서 안착하지 못했던 건 바로 70년대의 이런 행보를 대부분의 중진 정치인들이 기억했기 때문이었다.[27] 정작 박정희는 개인적으로도 강직한 성격의 이만섭을 높이 평가했었고, 과거 3선 개헌을 반대하던 이만섭을 죽이려고까지 한 김형욱을 으름장을 내며 막아선 적도 있었다.[28] 이만섭이 5년제 대륜중학교 학생일 때 체육교사였다.[29] 최태민은 박정희의 명령으로 청와대 출입이 금지 되었으나 박근혜가 제 발로 외부로 나가서 최태민을 만나는걸 경호실이든 어디든 막을수가 없었다.[30]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대학살극 킬링필드를 언급한 것은 민주 캄푸치아 정권이 붕괴하며 킬링필드의 참상이 알려진 지 고작 1년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31] 그러나 김재규는 정작 어느 장소에서 언제 이 말을 들었는지 추가 증언을 하지 않았다. 즉 감형을 받기 위해 또는 동조세력이 없어 금방 체포당한 자신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거짓 증언일 가능성이 많다.[32] 실제로 2011년 한겨레에서 공개된 최초 진술 녹취록에 따르면 박정희의 발포 명령 발언은 분명히 존재했지만 킬링필드 발언은 커녕 그 자리에 차지철도 없었다고 한다. #[33] 예비역 중장으로, 무려 박정희와 육사 동기였고, 그 자신도 3군단장, 보안사령관 등 요직을 두루두루 거쳐 군 경력으로나 관료적 경력으로나 차지철보다 까마득한 선배였다.[34] 당시 보안사령관(소장)이었다. 상술했듯 차지철이 육사에 합격했어도 전두환보다 기수가 한 계단 낮았다.[35] 본래 이 발언은 소수설이고 목격자 신재순의 증언에 따른 "각하, 차지철 저 버러지같은 놈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라는 발언이 다수설이었지만, 2011년 신재순 씨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 버러지 발언이 합동수사본부의 강압에 의하여 진술하였다고 털어놓았다. 한편 신재순과 같이 있던 심수봉은 소수설이었던 이 새끼 너 건방져를 계속 주장했고 이로 인해 의형제까지 맺을 정도였던 두 사람의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다.[36] 아마도 부인이었던 육영수 여사가 총격에 암살된 사건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추정된다.[37] 간이 나빠서 얼굴이 검게 변한 상태였고, 박정희 암살 사건으로 재판을 받을 때에도 수시로 낮잠을 자거나 졸 만큼 체력도 쇠약해져 있었다.[38] 하다못해 피스톨 박이라 불리던 전임 경호실장 박종규는 문세광 저격 사건 때 권총을 뽑아들고 박정희 옆을 지키며 대적자세를 취하기라도 했다. 물론 평소에 수틀리면 권총 뽑아 겨누던 그답지 않게 총을 떨구고 공황에 빠졌긴 했지만 최소한 차지철처럼 경호 대상을 버리고 도망가지는 않았다.[39] 이는 당시 안가 직원이 총소리를 듣고는 전류가 터진 것으로 착각해 임시조치로 전원을 내려버렸기 때문이다.[40] 친우인 경호처장 정인형과 해병대 후배였던 경호부처장 안재송을 쏘면서 두 발을 사용했다.[41] 검사 결과에 따르면 피격 당시 차지철은 문갑을 들고 자세를 낮추고 있었음이 밝혀졌다고 한다. 이를 어느정도 반영하여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는 차지철이 문갑을 들고 김재규를 저지하며 경호원을 부르짓다가 복부에 총을 맞아 죽는 것으로 묘사된다.[42] 사망 직전에 김재규에 저항하기 위해 들고 있던 문갑이 놓여져있는 것이 보인다.[43] 육군과학수사연구소 법의과장 정상우 소령의 사체검안서에 따르면 앞서 김재규가 문갑을 든 그에게 쏜 제2탄이 치명상으로서, 혈흉에 의한 호흡부전과 심장부전을 일으켜 죽음에 이르게 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한 20여 분 뒤에 일어난 김태원의 사격은 이미 죽은 사람에게 쏜 확인사살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