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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13:22:45

덕수궁 즉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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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전 이전 덕수궁의 정전은 즉조당이었다.
덕수궁에 서양식 정전으로 석조전을 지었으나 완공 전에 국권을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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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colbgcolor=#e3ba62> 덕수궁 즉조당
德壽宮 卽阼堂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5-1)
건축시기 창건연대 미상 / 1904년 (중건)
파일:즉조당.png
<colbgcolor=#e3ba62> 즉조당[1]

1. 개요2. 이름과 현판3. 역사
3.1. 아관파천 이후3.2. 대한제국 수립 이후
4. 구조5. 여담

[clearfix]

1. 개요

덕수궁건물이다.

2. 이름과 현판

'즉조(卽阼)'는 '즉위'와 같은 말로, 인조가 이 곳에서 왕위에 오른 것을 기념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자세한 내용은 역사 단락 참조.
파일:즉조당 현판.png
파일:경운궁 현판.png
<colbgcolor=#e3ba62> 즉조당 현판[2] <colbgcolor=#e3ba62> 경운궁 현판[3]
현판 글씨는 고종의 친필이다. '즉(卽)'자 옆엔 '어필(御筆)', '당(堂)' 자 옆에 '광무구년을사칠월 일(光武九年乙巳七月 日)'이란 작은 글씨가 있다. 즉 1905년(을사년) 7월 어느 날에 임금이 직접 썼다는 의미이다. 즉조당 대청에는 '경운궁(慶運宮)'이란 편액도 걸려있었는데 역시 고종이 직접 쓴 것이며,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존 및 전시 중이다.

3. 역사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전부 불탔다. 1년 뒤인 1593년(선조 26년) 한양 수복 후 환도[4]한 선조는 지낼 곳이 없자 성종 월산대군과 주변 민가들을 행궁으로 삼아 임시로 머물렀다. 처음엔 '정릉동 행궁(貞陵洞 行宮)'으로 불렀고 광해군 때 이름을 '경운궁(慶運宮)'으로 바꾸었다.

광해군 때 창덕궁, 창경궁을 복구한 후 임금들은 그 곳에서 거처했고, 인조 재위 초반에는 건물 대부분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면서 경운궁을 사실상 해체했다. 하지만 이 때 정릉동 행궁 시절을 기억하기 위해 건물 2채를 남겼다.# 이후 왕실 소용의 내탕을 마련하고 관리했던 명례궁으로 사용했다.
파일:영조어진.jpg
<colbgcolor=#e3ba62> 경운궁에 많은 관심을 보인 영조
비록 간신히 흔적만 남았으나, 임진왜란선조고생한 것을 상기하려 조선 후기 임금들이 경운궁을 이따금씩 찾았다. 그 중 가장 많이 관심을 보인 왕은 영조였다. 1769년(영조 45년) 영조는 선조가 거처하고 인조가 즉위한 건물에 '양조개어(兩朝皆御)' 및 '계해즉조당(癸亥卽阼堂)'이란 글씨를 현판으로 만들어 걸었다. '양조개어'는 '두 임금이 거둥했다'는 뜻이고 '계해즉조당'은 '(인조가) 계해년(1623년)에 즉위했다'는 의미이다. 그 때부터 즉조당으로 불렀다.# 1773년(영조 49년)에는 선조의 환어 3주갑[5]을 맞아 왕세손과 함께 즉조당을 찾아 추모했다.# 그리고 즉조당에 '예전(昔)에 임금(御)이 머물렀다'는 뜻의 '석어당(昔御堂)' 현판을 써서 걸었다.[6]

영조 승하 이후에도 왕들은 즉조당을 때때로 찾았다. 1893년(고종 30년) 10월에 고종왕실선조의 환궁 300주년을 맞아 즉조당에서 기념 행사를 했다.#

3.1. 아관파천 이후

파일:2104CF37569DA0F7358A6A.jpg
<colbgcolor=#e3ba62> 경운궁을 중건한 고종황제
1896년(건양 1년) 아관파천으로 고종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렀다. 고종은 장차 돌아갈 곳으로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을 선택했기 때문에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1896년에 경운궁을 수리, 중건하는 대공사를 진행했다. 이 때 경복궁 선원전에 있던 어진을 즉조당으로 옮겨 모셨다.#

1897년(건양 2년) 2월 고종경운궁으로 환궁[7]했다. 그러나 경운궁은 위에 언급했듯 즉조당 포함 2채만 남아있었다. 그래서 중건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상 궁궐을 새로 짓는 것이었기에 제대로 모습을 갖추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정식 침전인 함녕전 역시 아직 완공 전이었고, 신하들은 즉조당에 머물 것을 권했으나 고종은 거절했다.#[8]

정전으로 쓸 전각 역시 없었고 그래서 1897년(광무 원년) 8월 경부터 즉조당을 임시 정전으로 사용했다.#[9] 그 해 10월 7일 대한제국을 선포하기 며칠 전에 이름을 태극전(太極殿)으로 바꾸었다.# 제국의 정전이니 이름 역시 제일 높은 급인 '전(殿)'으로 올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각 앞에 넓은 월대를 설치하여 건물의 격을 높이고 여러 국가의 중요행사를 성대하게 치를 수 있게 만들었다.

3.2. 대한제국 수립 이후

태극전에서 고종국호대한으로 바꾸고 황제로 즉위할 것을 반포했다.# 즉 태극전은 대한제국의 상징적인 탄생 장소였던 것이다. 제국 수립 이후 고종은 이곳에서 백관들의 하례를 받았으며# 황실 가족들에게 옥책과 금보를 내리고 책봉식[10]을 거행하는 등# 정전으로써 태극전을 활발히 사용했다.

고종은 태극전의 이름을 1898년(광무 2년) 2월에 다시 중화전으로 바꾸었다.# 중화전으로 개칭한 후에도 이곳에서 국가와 황실의 주요 행사를 꾸준히 열었다. 태후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식과# 황실 제사와 관련된 행사를 주로 행했으며## 1900년(광무 4년) 8월에는 황자 의화군 이강과 이은을 여기서 각각 의친왕, 영친왕으로 책봉했다.#[11] 같은 해 10월 경운궁 선원전이 불타 그 안에 있던 어진도 사라져 다른 곳에 있던 어진들을 옮겨와 모사할 때 여기에 어진을 보관했다.#
파일:AKR20170424052200005_04_i.jpg
<colbgcolor=#e3ba62> 중화전으로 사용하던 때에 즉조당에 걸려있던 중화전 현판[12]
파일:신축진찬의궤 - 중화전.png
정전으로 쓰이던 당시의 즉조당 그림(가운데 빨간 원 안).
1901년(광무 5년)
명헌태후 홍씨의 71세 생일 축하연 모습을 다룬 책인 《신축진찬의궤》에 실린 그림이다.[13]
그러나 중화전(구 즉조당 - 태극전)은 정전으로 쓰기엔 너무 좁았다. 그래서 1901년(광무 5년)부터 새 정전 공사를 시작하여 1902년(광무 6년)에 비로소 제대로 된 정전 형태를 갖춘 새로운 중화전을 완공했다. 그에 따라 1902년 5월에 기존의 중화전을 원래 이름인 즉조당으로 환원했다.#
파일:즉조당 의궤.png
<colbgcolor=#e3ba62> 《경운궁중건도감의궤》의 즉조당 모습[14]
1904년(광무 8년) 4월 경운궁 대화재로 불탔고, 직후 복구했다. 이 때 옛 모습 그대로 짓되, 칸 수와 규모는 간단하게 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는 고종후궁이자 영친왕의 어머니 순헌황귀비 엄씨가 이 곳에서 서거했다. 1933년 일제덕수궁 공원화 계획으로 많은 건물이 헐렸음에도 살아남아 오늘에 이른다.

4. 구조

파일:즉조당 대청.png}}} ||
<colbgcolor=#e3ba62> 대청[A]
정면 7칸, 측면 3칸의 총 21칸이다. 정면 기준 제일 왼쪽(서쪽)의 1칸은 마루로 되어있고, 그 옆에 2칸이 온돌방, 그 다음 대청 3칸, 마지막 제일 동쪽의 1칸은 온돌방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앞면과 대청 뒷면의 가장자리 칸에 툇마루를 깔았다. 대청의 천장은 우물반자로 마감하고 청룡황룡을 그려넣어 화려하게 꾸몄다.
파일:즉조당 서온돌.png}}} ||<width=188>
파일:즉조당 동온돌.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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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3ba62> 서온돌[A] <colbgcolor=#e3ba62> 동온돌
동쪽 온돌방은 이론 상으로 정면 1칸, 측면 2칸의 총 2칸이나 모든 공간을 1칸으로 트여 넓게 방을 쓸 수 있게 했다. 대청 쪽으로는 샛기둥을 두고 분합문을 설치했다. 서쪽 온돌방은 약간 다르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총 4칸으로 칸 수부터 차이가 나고, 방을 1칸으로 튼 것, 대청 쪽으로 분합문을 둔 것은 동온돌과 같다. 그러나 중간에 기둥을 두고 기둥 남쪽으로 문지방을 둔 것은 다르다.

5. 여담

파일:즉조당 집기1.png}}} ||
<colbgcolor=#e3ba62> 즉조당에 재현해놓은 집기류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에서 2020년 10월 8일부터 11일까지 즉조당 서쪽 온돌방 내부에 병풍, 평상 등 집기류를 재현하여 시범 공개했다. 에르메스 코리아와 전통문화 보존단체인 아름지기와 협업했으며, 집기는 박물관 등에서 소장한 조선 시대 물품들을 바탕으로 각 분야 전문가들이 제작했다. 다만, 코로나 19 사태로 실내입장 대신 즉조당 외부에서 창호를 통해서만 감상이 가능했다. 덕수궁관리소 측은 상황이 좋아지면 실내에서 둘러보며 해설을 듣게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2]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탈.[3] 사진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4] 還都. 임금수도로 돌아오는 것.[5] 임금서울로 돌아온 후 60갑자가 세 번째로 돌아왔다는 뜻. 1653년(효종 4년)이 1주갑, 1713년(숙종 39년)이 2주갑, 1773년(영조 49년)이 3주갑이다.[6] 기록 상으로 석어당 명칭은 이 때 처음 보이며 원래 즉조당을 달리 일컬었던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덕수궁 석어당 문서 참조.[7] 還宮. 궁궐로 돌아감.[8] 이 때 머문 전각은 확실하지 않으나 석어당으로 보인다.#, 이 무렵에 즉조당에 걸린 석어당의 현판을 지금 자리로 옮겨, 즉조당과 석어당을 분리한 듯 하다. 자세한 내용은 덕수궁 석어당 문서 참조.[9] 고종은 즉조당에 있던 어진을 이미 같은 해 4월에 완공된 경운궁 선원전으로 옮겼다.[10] 왕국에서 제국으로 바꾸었으니 그에 맞게 기존 왕족들 역시 황족으로서의 지위를 다시 정해 책봉하는 의례가 필요했다.[11] 단, 이 때 의친왕은 미국에서 유학 중이었다.[12] 사진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13] 사진 출처.[14] 사진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15] 荷葉童子. 연꽃 모양의 짧은 기둥.[A] 사진 출처 - 네이버 지도.[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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