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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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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장기2. 변호사 및 정치 활동3.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4. 제47대 미국 부통령5.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5.1. 민주당 경선5.2. 본선5.3. 인수위원회 활동
5.3.1. 2020년
6. 제46대 미국 대통령7. 퇴임 후

1. 성장기

1942년 11월 20일 오전 8시 30분[1] 펜실베이니아 스크랜턴의 세인트 메리 병원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아일랜드계+영국계[2]+독일계+프랑스계+네덜란드계 혈통이며[3] 종교적으로는 가톨릭 신자이다. 아버지 조셉 바이든 시니어(1915 ~ 2002)[4]와 어머니 캐서린 바이든(1917 ~ 2010)[5]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었다. 도시공학자였던 그의 증조부 조지 T. 바이든이 부를 쌓아 펜실베이니아주 상원의원까지 지냈고, 이후에도 부유한 집안이었지만 바이든이 태어났을 무렵에는 아버지 조셉 바이든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었으며, 한동안 외할머니 집에서 더부살이를 할 정도로 가난한 생활을 이어갔다. 1950년대에 불황이 오자 조 바이든 시니어는 일자리를 찾아 펜실베이니아 주를 떠나 델라웨어 주 월밍턴으로 이주했고, 여기서 보일러 청소부로 일하다 중고차 중개업자로 자리를 잡으면서 형편이 나아졌다고 한다.

그가 태어나기 전인 1941년 할아버지 조셉 해리 바이든이 사망했고, 1세 때인 1943년 할머니 메리 엘리자베스 바이든이 사망했다.[6] 1949년에는 외할머니 제럴딘 피니건, 1957년 외할아버지 앰브로즈 피니건마저 사망했다.

조 바이든은 어렸을 때 말더듬증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고생했는데[7],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여동생 밸러리 바이든은[8] 오랜 시간 동안 조 바이든의 옆에서 조의 연습을 들어주면서 말더듬증을 극복하기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조 바이든이 고등학교 때 처음 학생회장 선거에 나갈 때 그 옆에서 선거 운동을 열심히 돕기도 했다.
파일:바이든 델라웨어 대학교 졸업 당시.jpg
1965년 델라웨어 대학교 졸업 사진
델라웨어 주 클레이몬트에 있는 가톨릭계 사립학교인 아키메어 아카데미(Archmere Academy)로 진학했다. 재학하면서 풋볼을 즐겨했고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농성 운동에도 참여했다. 그의 미식축구 등번호는 30번, 포지션은 하프백이었다. 1961년 델라웨어 대학교에 진학했으며 미식축구팀인 델라웨어 파이팅 블루헨즈(Delaware Fightin' Blue Hens)에서 뛰었다[9]. 이 때 속도가 빨라서 '대시(Dash)'라는 별명이 붙었다. 전공은 역사학정치학복수전공하였으며 부전공으로 영어도 수학했다. 다만 성적은 별로 좋지 않아 평균 C학점, 688명 중 506등으로 졸업했다. 이후 시라큐스 대학교 로스쿨에 진학하였는데 로스쿨 재학 중에 인용을 날림으로 하다가 표절 시비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 때문에 F학점 1개를 안고 가게 되었다.(결국 졸업 당시 로스쿨 졸업생 85명 중 76등으로, 종합하면 학창시절 성적은 그다지 뛰어난 편은 아니었으며 변호사시험도 재수로 합격했다.) 이후 바하마에서 휴가를 보내던 도중 닐리아 헌터(Neilia Hunter)를 만나 1966년 결혼하고 2남 1녀[10]를 두었다. 아내가 장인 장모에게 바이든을 소개했을 때 변호사가 된 후 정치를 하고 대통령에 도전할 것이라고 밝혀서 별 문제 없이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결혼 후 입양한 강아지 이름을 상원의원(Senator) 이라고 지었다고. 대학 및 대학원 재학 사유로 5차례 입영연기를 한 후[11] 1968년 4월 5일, 선병검사에서 천식 때문에 1-Y 등급[12]을 받아 베트남 전쟁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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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화제가 된 조 바이든의 대학생 시절 사진[13]

2. 변호사 및 정치 활동

파일:조 바이든 변호사 시절.jpg
1968년에 로스쿨을 졸업하고 재수로 1969년에 델라웨어주 변호사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힘있는 사람의 편에 서는 것에 자괴감을 느껴 국선변호인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한다.

졸업 당시 85명 중 76등일 정도로 성적은 하위권이었지만, 대학 시절부터 교수들의 신임이 두터웠던 조 바이든은 그들의 추천을 받아 졸업 직후 델라웨어 주에서 가장 큰 로펌인 프리켓, 워드, 버트 & 샌더스에 취업했다. 로펌 취업 초기 그는 산재를 당한 용접공에게 제소당한 회사를 대리하는 주임 변호사를 도왔다. 재판은 그 용접공이 자신의 실수로 재해를 당했다는 쪽으로 흘러갔는데, 법정에서 용접공의 아내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는 모습을 목격한 그는 뭔가 꽉 막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원고는 장애인이 되는 영구 손상을 입었지만, 아무 보상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다. 내가 원고를 대리했어야 했다고 느꼈다.”며 법정을 나오면서 로펌을 그만두기를 결심했다고 한다.#출처 로펌 취업 초기부터 바이든은 공화당 쪽 모임에 대한 참여 권유가 상당히 많았지만, 당시의 공화당은 리처드 닉슨이 이끌고 있었던 만큼 이미지가 상당히 안 좋았기에 대부분의 모임 참여는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 로펌에서 퇴사하고 윌밍턴의 빈곤 지역에서 국선변호인으로 주로 활동한 바이든은 가난한 흑인 의뢰인들을 많이 도왔는데, 이 당시의 선택에 대해 조 바이든은 대학 시절 흑인 전용 수영장에서 일했던 경험 덕분에 흑인들의 어려운 삶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선택한 일이라고 밝히기도 했다.[14]

그러나 국선변호인 활동만으로는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지역 로펌에 재취업하게 되는데, 이곳을 통해 민주당 내 개혁을 다루는 포럼에 참여하게 된 바이든은 이 모임에서 델라웨어 뉴캐슬 카운티 출마 권유를 받게 된다. 당시 뉴캐슬 카운티는 공화당 강세 지역이라 민주당에서는 후보로 나서려 하는 이들이 거의 없었는데, 바이든은 그런 지역에 출마해 2천 표 차이로 1970년 11월 뉴캐슬 카운티의 카운티 의회 의원이 되었다. 당시 민주당은 델라웨어 지역에서 바이든 외에는 대부분의 후보가 참패하면서 그 힘을 크게 잃은 상태였다. 덕분에 바이든은 28세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델라웨어 민주당에서 상당히 저명한 인사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1972년에 민주당으로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한다. 당시 해당 선거구의 상원의원은 재선의 케일럽 보그스 (J. Caleb Boggs)로 델라웨어 지역에서 연방 하원의원 3선, 주지사 재선, 연방 상원의원 재선을 역임하고 바이든이 갓난 아기일 때 처음으로 공직에 선출된 베테랑 중 베테랑이었다. 정계 은퇴를 고려하던 그의 후계를 두고 공화당에 분열이 생기는 바람에 당시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까지 나서서 한 번만 더 출마하라고 보그스를 설득했다. 당시 델라웨어 민주당 내에서는 그 누구도 경쟁 후보인 보그스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보로 나가려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때 바이든은 젊은 나이에 어차피 카운티 의원 재선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는 이유로 떠밀리듯이 출마하게 되었다. 사실 그는 카운티 의원은 한번만 하고 이후에는 자신의 로펌을 꾸리는 일에 집중하려 했었다고 한다. 사실상 패전 처리 투수 역할이었던 갓 서른의 바이든은 기적적으로 3천 표 차로 보그스를 이기는 이변을 일으켰고 미국 역사상 일곱 번째로 어린[15] 상원의원이 되었다. 미국 연방 상원은 30살부터 가능한데 어떻게 29살의 바이든이 승리했었는지 의아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이 연령 제한은 출마나 당선 시점이 아니라 취임 시점이기 때문에 바이든은 아슬아슬하게 출마가 가능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18일, 아내 닐리아와 세 아이들이 크리스마스 트리를 구하러 차를 끌고 나갔다가 교차로에서 트레일러에 추돌하는 교통사고를 당해, 아내 닐리아와 장녀인 나오미가 사망했다. 장남 보 바이든은 뼈가 여러 곳 부러져 전신 깁스를 하게 됐고 차남 헌터는 머리에 부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직원 채용을 위한 면접으로 워싱턴에 있던 바이든은 지미에게 전화를 받은 누이 발레리가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고 인생의 발판이 발밑에서 무너지는 기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때 바이든이 보와 헌터 때문에 워싱턴 D.C.에서 선서할 수 없다고 하자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였던 마이크 맨스필드 의원이 병원으로 상원 서기를 보내 별도로 선서하도록 하여, 결국 그는 상원의원 취임 선서를 윌밍턴 종합병원에 입원한 아들들의 병실에서 하게 되었다.

이런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한 바이든은 힘들게 얻은 상원의원직을 포기하려 했다. 바이든은 당시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였던 마이크 맨스필드 의원에게 상원의원직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존슨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낸 휴버트 험프리 상원의원이 계속 전화해 상태를 확인했고 맨스필드도 "내게 6개월만 줘" 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상원의원 취임식에서도 대놓고 "만약 제가 좋은 아버지이자 좋은 상원의원이 될 수 없으면 주지사 당선자인 트리비트 씨에게 연락을 하겠습니다.[16] 좋은 상원의원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지만, 좋은 아버지는 찾을 수 없거든요."라고 발언을 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몰려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발레리가 조의 두 아들을 돌보기 위해 노스 스타의 집 근처로 이사하는 등 가족들이 상원의원직에 취임할 것을 적극적으로 설득하자 의원직을 이어가게 된다. 이때 바이든은 사고 트라우마를 겪던 아이들에게 반드시 집에 돌아온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윌밍턴 역에서 워싱턴 D.C.의 의사당까지 매일 통근하기로 했다. 아이들이 언제든 연락할 수 있도록 워싱턴을 오가는 차에 전화기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헨리 키신저에게 브리핑하는 중에도 아이들이 전화를 걸어 직원이 전화를 연결한 적도 있었다고.

최연소 상원의원이었던 초선의 바이든은 사고와 상관없이 나이 때문에 생기는 문제[17]에도 직면해야 했다. 상원 외교위원회 위원이던 바이든은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를 처음 만났을 때 키신저에게 "직원들은 출입이 안 되는 줄 알았다"는 말과 함께 '비드-덴'이라고 불리는 수모를 겪었으며,[18] 민주당 국제외교분과장이던 애버럴 해리먼 의원에게는 회의에서 항상 "젊은이들의 생각을 말해봐, 조."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다만 동료 상원의원들이 마냥 무시만한 것은 아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처한 바이든을 친절하게 보살펴주었다. 전직 부통령 휴버트 험프리 의원은 바이든이 굉장한 커리어를 쌓게 될 것이라며 예찬했고, 아이들과 가족들에 대해 물으며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다. 부통령까지 해드신 고인물의 안목 에드워드 케네디는 바이든의 사무실을 정기적으로 찾아와 위로했는데, 케네디가 데려간 상원 체육관에서 벌거벗은 제이콥 재비츠(제이콥 K. 재비츠 컨벤션센터의 그 재비츠가 맞다)와 유력한 대권주자였던 미주리 민주당 의원 스튜어트 사이밍턴을 마주쳐 당황했던 경험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상원 식당에서 바이든이 막 식사를 시작했을 때 꽉 찬 민주당 테이블에서 빈자리를 찾던 상원 군사위원장 존 C. 스테니스를 보고는 식사를 다 하지도 않은 채 자리를 양보한 적이 있었는데, 그 뒤로 스테니스 의원이 초선의 바이든을 많이 챙겨줬다고 한다. 스테니스는 1988년 은퇴하며 러셀 빌딩의 집무실을 바이든에게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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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지미 카터와 조 바이든
1974년에는 휴버트 험프리의 부탁으로 선거운동을 위해 애틀랜타를 방문했는데, 그 때 차기 미국 대통령이 되는 지미 카터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조지아 주지사였던 카터가 바이든을 자기 집에 초대해 1976년 대선에 출마할 생각이라고 털어놓았다. 휴버트 험프리가 1976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바이든은 워싱턴 정계에서 카터 대통령을 지지한 최초의 의원이 되었다. 카터 행정부 시기 바이든은 대통령의 부탁으로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요시프 브로즈 티토와 소련 수상 알렉세이 코시긴 등 공산권 지도자들과 만나며 외교 경험을 쌓았다. 훗날 바이든은 지미 카터가 중산층 노동자의 표심을 잃어가던 민주당에 필요한 전환기적 인물이었지만, 전국적인 이슈를 많이 알지 못했던데다 외교정책 경험이 전혀 없던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이었다고 평가했다.

한편 바이든은 아직 초선 상원의원이던 1977년 영어 교사 질 제이콥스(Jill Tracy Jacobs, 1951-)와 뉴욕의 유엔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 다 재혼이었다. 공인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던데다 두 아이의 새어머니가 될 준비가 되었는지 확신하지 못해 결혼을 망설이던 질을 설득하기 위해 바이든은 상원의원 재선까지 포기하려 했다. 하지만 질이 "당신의 꿈을 부정해야 한다면 나는 내가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해 결혼과 상원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었다. 여담으로, 둘이 처음 만나게 된 계기는 바이든이 퇴근길에 들른 델라웨어주 윌밍턴 공항의 광고판에 등장한 질을 보고 '저런 여자를 만나고 싶다'고 동생 프랭키에게 이야기한 것이었다고.
파일:1988년 바이든.jpg
1988년의 모습
1988년에는 당시 역대 2번째로 젊은 나이로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다. 젊은 이미지로 베이비 붐 세대의 지지를 받으며 유력 후보 중 한 명이었지만 영국 노동당 당수인 닐 키녹의 연설[19]과 시러큐스 대학 로스쿨 첫 학기의 리포트를 표절했다는 의혹이 민주당 경선 경쟁자였던 마이클 두카키스에 의해 불거졌다. 상원 법사위원장을 맡으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지명한 로버트 보크 대법관 후보자[20]의 인준 거부를 추진하고 있던 바이든은 청문회와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 우려해 결국 경선을 포기했다.

경선에서 사퇴한 뒤에도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 청문회를 주관하며 뛰어난 연설 솜씨로 주목을 받던 바이든은 1988년 초 아이오와 코커스가 열리던 날 펜실베이니아주 로체스터의 호텔에서 뇌동맥류로 쓰러졌다. 뇌동맥이 파열된 탓에 월터 리드 군 병원에서 두 차례 큰 수술을 받고 사경을 헤매던 바이든은 뇌동맥류 외에도 폐색전증으로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21] 에드워드 케네디, 대니얼 이노우에 등 상원을 비운 동안 업무를 돌봐 준 동료들의 도움으로 바이든은 7개월 만에 재활을 마치고 복귀했다.[22]

이후 2009년까지 36년 동안 델라웨어의 연방 상원의원으로 지냈다. 주로 외교 분야에서 활동했고 코소보 문제에 특히 많이 관여했다. 보스니아 전쟁 당시 코소보 사태에 미군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는 공화당 의원인 존 매케인과 결의서를 통과시키기도 했다. 빌 클린턴 행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NATO가 보스니아에 개입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고, 밥 돌 의원과 함께 사라예보를 방문해 학살과 강간을 일삼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라도반 카라지치를 대면하기도 했다. 결국 NATO군의 공습(딜리버레이트 포스 작전)이 내전을 종식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클린턴은 휴가 중에도 그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코소보 사태를 방관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떠봤다고 한다. 바이든이 매우 영향력 있는 중진 상원의원이었음을 증명하는 일화.

비슷한 시기에 미국 최초의 여성폭력방지법을 제정하는 데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아버지 부시 행정부 때인 1990년, 여성에 대한 강력 범죄와 증오 범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뒤로부터 거의 홀로 법안을 꾸려나가다가, 점점 늘어나는 여성 상원의원들과 관련 단체들의 도움을 받아 결국 클린턴 행정부에서 바이든-해치 범죄 법안으로 알려진 여성폭력방지법을 통과시켰다.

1991년 아버지 부시가 주도한 걸프전 당시에는 반대표를 던졌지만 2003년 아들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할 때는 용인[23]했고, 대신 사담 후세인의 제거에는 반대했다. 부시와 네오콘들의 무책임한 사후 처리로 이라크가 총체적인 혼란에 빠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2003년 6월 요르단의 이라크 경찰 훈련 센터를 방문한 이후 미군과 영국군의 과중한 부담을 줄이고 이라크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더 많은 병력을 파견하고 오합지졸인 경찰들의 훈련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바이든은 네오콘 세력을 극도로 경계했다. 이라크와 관타나모 만의 수용소에서 무슬림 죄수에 대한 학대를 조장한 도널드 럼스펠드는 두들겨 패주고 싶었다고 말하는 등 네오콘 세력들과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바이든이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을 때 일정상 해병대 수송기의 보조석에 탑승하게 되었는데, 럼스펠드가 이륙 직전에 바이든의 탑승을 막아 전쟁 영웅이었던 콜린 파월에게 위성전화를 걸어 현장의 군인들을 설득해 줄 것을 요청해야 했던 적도 있다. 의외로 부시 본인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똑똑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는 데 시간을 할애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역시 부시의 가장 큰 실수는 전통적 국제주의자였던 콜린 파월 국무부 장관이 아닌 딕 체니도널드 럼스펠드, 존 볼턴무능하고 위험한 신념을 가진 이들을 중용해 미국을 분열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나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존 케리조지 W. 부시에게 패배하자 4년 동안 미국이 더 분열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2008년 대선 출마를 고민하게 되었다. 1987년의 첫 도전 때처럼 경쟁자들에게 공격당하고 가족들까지 사생활 노출과 희생을 감수해야 하기에 출마를 포기하려고도 했지만, 질 바이든을 비롯한 가족들이 오히려 출마를 지원해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게 되었다고 한다.

3.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2008년 민주당 대통령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조기에 탈락할 조짐이 보였고 결국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5위로 참패한 후 경선 중단을 선언했다. 하지만 중도 성향 백인 표를 끌어들이기 위해 버락 오바마는 그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고 바이든은 이를 수락했다.#

부통령 후보로서 사라 페일린과 토론을 했는데... 결과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두 사람 다 실언으로 유명한 사람들이라 그런지 토론회 수준은 아주 형편 없었다.

그래도 셀 수 없는 망언으로 매케인의 지지표를 날려먹은 세라 페일린과 달리 특유의 능글맞은 재간으로 토론회 중 위기를 넘기며 상대적으로 선방한 편이다. 결국 오바마의 대선 승리와 함께 백악관에 함께 입성했다.

4. 제47대 미국 부통령

파일:joseph biden.png
제47대 미국 부통령 공식 사진
파일:Joseph Robinette Biden Jr. Portrait.jpg
제47대 미국 부통령 공식 초상화
제47대 미국 부통령 취임 선서[24]
2009년,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한 뒤 부시 행정부 시절 발생한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탈출을 위해 발의한 미국 경기 회복 및 재투자 법이 상원에서 초당적 협력을 통해 통과할 수 있도록 부통령 겸 상원 의장으로 공화당 의원 3명을 포섭하는 데 성공하면서 중도적 협상가 이미지를 강화시켰다.

2012년 오바마는 다시 조 바이든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웠고 폴 라이언과의 부통령 후보 토론회에서 특유의 넉살과 경험으로 토론회 전 예상과 달리 의외로 매우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본인도 재선에 성공하였다.

2015년 8월, 리비아 관련 국무부 이메일 스캔들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힐러리 클린턴에 대항해서 대통령 후보 선거에 출마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의 측근들은 그가 경선에 출마할 것이라고 보고 있고 아이오와와 뉴햄프셔 경선 대신 3번째 경선인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집중할 것이라고 한다.

2015년 10월, 아직도 결정을 하지 않았지만 대선에 출마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201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2016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만큼 혼란스러워질 수 있다. 약 17%의 확고한 지지자들이 있는데다가 힐러리 클린턴이 이메일 스캔들로 곤욕을 치르는 가운데 공화당 후보들과의 1 대 1 매치업에서 가장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워싱턴 D.C. 현지시각 2015년 10월 22일, 2016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백악관의 로즈가든에서 공식 발표를 했다. 그가 이런 선택을 결정하는 데에는 후술되지만,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 후보였던 장남 보 바이든이 뇌종양으로 사망하면서 그로 인한 충격으로 불출마를 한 것이라는 이유가 지배적이다.


파일:dem2016.png
  
범례 번역
힐러리 클린턴
버니 샌더스
마틴 오말리
조 바이든
  
2015년 1월부터 조사된 주요 후보들의 여론조사 지지율 평균.[25]

5.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5.1. 민주당 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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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본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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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7일(미국 시간),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를 꺾고 제46대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당선이 확정되었다. 공교롭게도, 48년전 같은날에 첫 상원의원 선거를 승리했었다.

조 바이든은 미국 대통령 역사상 정치 입문 이후 대통령이 되는 데 가장 오랜 시간 경력을 쌓은 대통령이다. 1970년 첫 주의회 선거에 도전한 이후 정확히 50년만에 대통령직에 당선된 것이다. 그래서 바이든은 정치 경력 50년(Fifty Years in Politics)이라는 선거 구호를 걸기도 했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박지원 의 구호였던 '정치 9단'[26]을 넘어선 정치 99단과 일맥상통한다. 반면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맞상대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공식적인 첫 본선일 정도로 정치경력이 짧다. 정치경력으로 치면 트럼프 4년 vs 바이든 50년... 그야말로 양당의 후보 간 정치 경력이 가장 많이 차이나는 대선이기도 했다. 다만 조 바이든/논란 문서에서도 알 수 있듯 처음에는 경력있는 노련한 정치가의 모습을 강조했는데, 바이든 특유의 말실수가 끊이지 않아서 정적들에게 자꾸 치매로 공격받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래서 바이든은 경선 중반부인 뉴햄프셔 경선 전후로 캠페인 매니저들을 갈아치운 시점부터는 자신의 정치 경력을 강조하기보다 오히려 옆집 할아버지같은 푸근한 인상을 만드는 데에 애를 썼다.

정치 경력 50년을 강조하는 것 때문에 미국 언론에서는 조 바이든이 민주당 후보로 결정난 순간부터 조 바이든의 정치 50년 돌아보기같은 기획 프로그램을 많이 방송했다.

5.3. 인수위원회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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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DEN-HARRIS TRANSITION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27]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5.3.1. 2020년

현지시각 2020년 11월 4일, 당선이 유력해지자 인수위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웹사이트 주소는 바이든 후보의 경제정책 구호인 '발전적 재건(Build Back Better)'에서 따왔다. # 같은 날, 트위터를 통해 취임 첫날 파리기후협정에 복귀하겠다고 선언했다. #

현지시각 2020년 11월 7일, 자신의 고향인 델라웨어 주 월밍턴에서 대선 승리를 선언했다. 연설에서 미국의 통합과 코로나19 억제를 강조했다. # # 연설 전문 (한국어/영어)

바이든 인수위는 4대 최우선 국정과제로 코로나19 대응, 경제 회복, 인종 평등, 기후 변화를 제시했다.#

현지시각 2020년 11월 8일, FT에 따르면 바이든 인수위는 5명의 공동위원장 체제로 운영된다고 한다. 인수위원장 명단은 다음과 같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명했던 에밀리 머피 연방 조달청장이 바이든의 당선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바이든-해리스 인수위원회 활동 지원을 거부하면서 업무에 차질이 생기게 됐다.# 보통은 주요 언론에서 당선자를 선언하고 난 뒤 하루 정도가 지나면, 연방 조달청장 역시 당선인 지위를 인정하고 대통령직 인수인계법에 따라 인수위 활동을 지원했지만 트럼프가 선거에 불복 중인 상황에 연방 조달청장도 거기에 발을 맞추고 있는 상황. 1963년 인수인계법 제정 이후 이런 상황이 발생했던 건 조지 W. 부시 대통령 때가 유일했다.[29]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불복에 대해 "당황스럽다"면서도 정권 인수 작업은 잘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아직 법적 조치까지 들어갈 단계는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의 정권 인수 작업 방해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의 도움을 받아 영국, 프랑스 등 전통적인 동맹과 정상통화를 진행하면서 "미국이 돌아왔다."고 당당히 선언하기도 했다.##

바이든 인수위원회 명단에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 함께했던 인사들이 다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환경 및 재무, 금융, 무역 분야에 대거 포진했다.

당선 이후 첫 대외 행보로 재항 군인의 날을 맞아 필라델피아에 있는 한국전 참전 기념비를 찾아 헌화했다.# 한편 바이든 행정부의 초대 백악관 비서실장으로 자신의 부통령 재임 시 비서실장을 지낸 론 클레인을 낙점했다.# 2014년 에볼라 유행 당시 백악관에서 에볼라 출혈열 대응 업무를 주관했던 것으로 유명하며 바이든 역시 코로나19 대응에 론 클레인을 적임자로 낙점한 것으로 보인다.

11월 12일, 한국 문재인 대통령과 일본 스가 요시히데 총리와 각각 통화하여 북핵 문제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

Build Back Better에 통화 내용이 올라와있다. 한국 문재인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인도-태평양 지역의 안보와 번영, 한미동맹, 코로나19, 기후 변화북한 문제에서 긴밀히 협력하기를 기대한다고 나와있다.

17일, 백악관 참모진 9명의 인선을 발표했다.# 24일에는 본격적으로 내각 인선을 발표할 예정이다.#

바이든 행정부 초대 국무장관으로 대북 강경파로 분류되는 토니 블링컨 전 국무부 부장관을 지명할 것이라는 설이 나왔다. UN 대사로는 흑인 여성 린다 토마스 그린필드 전 국무부 차관보가 지명될 것이라고 워싱턴포스트와 악시오스 등이 보도했다.# 한편 설왕설래가 많았던 재무장관으로는 재닛 옐런 전 연준의장이 낙점되었다.#

첫 국가안보보좌관에 제이크 설리번이 낙점되었다.# 60년만에 최연소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된다.

알레한드로 마요르카스 전 국토안보부 부장관이 국토안보부 장관, 애브릴 헤인스를 국가정보국(DNI) 국장 지명하였다.

11월 24일 오전 8시 17분, 트럼프의 승복 거부 속 17일만에 드디어 미 연방총무청(GSA)이 바이든 인수위의 정권 인수 개시를 통보하면서 공식적으로 대통령 인수위가 열렸다.#

초대 대변인에 인수위 젠 사키 선임고문을 임명했다고 발표했다. 또, 백악관 공보국장에는 캠프 선대부본부장을 지낸 케이트 베딩필드를 낙점했다.# 한편, 퍼스트캣이 조지 H. W. 부시 이후에 처음으로 백악관에 입성한다.##

추수감사절 연휴 중 별장이 있는 델라웨어주 레호보스 비치에서 반려견 중 한 마리인 '메이저'와 시간을 보내다가 발목이 삐어서 병원을 간 일이 있었다. 다행히 골절은 아니라고 한다.# 별 것 아닌 부상이긴 하나 바이든이 워낙에 노령이라 이슈가 된 셈. 정밀검진을 받은 결과 다친 발 중앙에서 작은 골절이 발견됐다.#

11월 29일, 드디어 바이든 백악관의 경제팀이 발표되었는데 첫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으로 경제학자이자 전직 관리인 브라이언 디스, 예산관리국(OMB) 국장에는 니라 탠든 미국진보센터(CAP) 의장,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으로는 세실리아 라우스 프린스턴대 교수를 각각 임명한다. 공보팀은 7명 전원이 여성으로 구성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

30일. 취임식을 준비할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코로나 19 팬데믹 상황에서 이전 취임식들에 비해 축소해서 치러질 예정이라 기존에 볼 수 있었던 대규모로 운집해 환호하는 관중들은 볼 수 없게 됐다.

취임식 때, 화석연료 회사의 기부를 금지하기로 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취임식과 마찬가지로 등록된 로비스트들의 기부도 금지한다. 위원회는 취임식에서 기업 기부는 최대 100만 달러(약 11억원), 개인 기부는 최대 50만 달러(약 5억5천만원)를 받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 대응을 감독하기 위해 제프 자이언츠를 백악관 코로나 19 조정관으로, 비베크 머시를 보건복지부 의무총감 겸 공중보건서비스단(PHSCC) 공동단장으로 각각 선정했다.#

12월 6일. 보건사회부 장관으로 히스패닉계인 하비에르 베세라 캘리포니아 주 법무장관을 깜짝 지명했다.#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차기 국장에 감염병 전문가인 하버드 의대 교수인 로셸 왈런스키 박사를 낙점했다.#

8일. 국방장관으로 4성 장군 출신의 로이드 오스틴 전 중부사령부 사령관을 공식 지명했다.# 톰 빌색 전 농무장관을 다시 농무장관에 낙점하고, 마르시아 퍼지 하원의원(민주·오하이오)을 주택·도시개발장관으로 내정했다.#

9일. 하원 조세무역위원회의 수석 무역고문이자 대만계 미국인캐서린 타이를 무역대표부(USTR) 대표로 지명한다.#

현지 시간으로 12월 14일에 열린 선거인단 투표에서 배반표 없이 306표를 모두 확보해 승리를 확정지은 후, 대국민 연설을 통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국민의 의지와 법치주의, 헌법을 존중하지 않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며 어느 때보다 강도 높게 대선 승복을 촉구했다.#

15일. 미 연방상원 조지아 주 결선투표 지원 위해 조지아 주를 방문했다.# 같은 날, 운수부 장관 후보자로 피트 부티지지 전 인디애나 사우스밴드 시장, 에너지부 장관 후보자로는 제니퍼 그랜홀름 전 미시간 주지사를 지명했다.#

17일. 내무부 장관은 뉴멕시코 주 연방 하원의원의 뎁 할랜드. 환경보호청(EPA) 청장에는 노스캐롤라이나 주 환경품질부 장관인 마이클 리건을 낙점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할랜드 의원이 상원의 인준을 받을 경우 미국 역사상 첫 원주민 출신 내무부 장관이 된다.

21일. 보도자료를 내고 카민 교수를 브라이언 디스 NEC 위원장을 보좌하는 부위원장에 낙점하고, 인수위 국내 경제정책팀에 소속된 조엘 갬블을 대통령 경제정책 특별보좌관으로 내정했다.# 같은날 오후, 약속대로 화이자가 만든 코로나 19 백신을 공개 접종했다.#

22일, 라틴계 교육 행정가인 미겔 카도나 코네티컷 주 교육위원을 교육장관으로 임명한다.#

30일. 국방부 부장관에 캐슬린 힉스 전 국방부 정책담당 수석부차관을 지명했다.#

6. 제46대 미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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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퇴임 후

2025년 1월 20일, 4년의 임기를 마무리하고 제46대 미국 대통령직에서 퇴임한다.


[1] 한국 시간 1942년 11월 20일 오후 10시 30분.[2] 조 바이든의 고조부가 영국 서식스 출신이다.[3] Joe Biden: Meet the Irish cousins cheering on the president-elect[4] 메릴랜드볼티모어 출신.[5] 결혼 전 성씨는 피니건. 펜실베이니아 주 스크랜턴 출신.[6] 바이든의 할아버지(1893–1941)는 48세, 할머니(1894–1943)는 49세에 사망했다.[7] 그 때문에 학창 시절 그는 말을 더듬는 것과 관련된 별명이 많이 붙었는데 대표적으로 '조 바-바-바-바이든'이라는 별명이 있다.[8] 1945년생. 결혼 후 성은 오언스.[9] 볼티모어 레이븐스 프랜차이즈 쿼터백으로 슈퍼볼 MVP 경력이 있는 조 플라코의 모교이기도 하다.[10] 보, 헌터, 나오미. 현재 헌터 외에는 사망하였는데 나오미는 1972년 교통사고로, 보는 2015년 뇌종양으로 사망하였다.[11] 1960년대 당시 미국은 징병제였는데, 학생에게는 1-S 등급을 주고 병역을 연기해 줬다. 그는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1-S-C 등급을 받고 병역이 연기되었다.[12] 전쟁이나 국가 비상사태 시에만 군복무 가능. 도널드 트럼프도 발뒤꿈치 문제로 이 등급을 받았다. 참고로 1-Y 등급은 1971년 폐지돼 기존에 1-Y 등급을 받은 사람은 다른 등급으로 재분류되었다. 현역은 1-A, 양심적 병역거부는 1-O (비전투분야만 복무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1-A-O), 종교인은 4-D, 완전면제는 4-F.[13] 1968년의 사진으로 당시 나이는 25~26세.[14] 흑인과 가까웠던 그의 인생 역정은 이후 2020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버락 오바마부통령이라는 타이틀과 강한 시너지를 일으켜 흑인들의 열광적 지지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되었고, 흑인이 민주당 유권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미국 남부 주들의 선거인단을 쓸어담으며 민주당 경선에서 주류 단일후보로 우뚝 올라서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15] 영문위키 기준. 상원의원 직선제 도입(1914년) 이후로는 두번째로 어리다.[16] 상원의원직에 공석이 생길 경우, 해당 주의 주지사가 임시로 다른 인물을 상원의원에 임명한다.[17] 초선 임기 내내 당시 현직 상원의원 중 최연소 의원이었다.[18] 바이든의 자서전에 따르면 비드-덴이라고 부른 키신저를 향해 덜레스 장관님이라고 맞받아쳤다고 한다.[19] 문제의 발언은 1987년 8월 23일 아이오와주 디모인에서 열린 민주당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나온 발언으로 청문회를 준비하느라 토론은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던 바이든이 클로징 멘트로 키녹의 연설을 인용하고서 사후에 출처를 밝히지 않아 문제가 되었다.[20] 보크는 미 보수파 법조계의 대표 인물로, 리처드 닉슨 행정부에서 송무차관을 지냈다. 이 당시 닉슨은 워터게이트 특별검사 아치발드 콕스를 해임하라고 법무부에 명령을 내렸는데, 장관-부장관 모두가 항명하고 사퇴하자 보크가 장관 권한대행직을 맡아 닉슨의 명에 따라 콕스 특검을 해임했던 전적이 있다. 민주당은 법 해석을 둘러싼 원전주의와 임신중절 반대, 인종 및 성차별적 발언을 문제 삼아 낙마시켰다. 법사위원장으로 청문회를 진행한 바이든은 '인권이 헌법에 선행한다'는 논리로 '그 권리는 법에서 비롯된다'는 보크의 주장을 반박하며 보크의 낙마를 주도했다.[21] 뇌동맥류를 신경이 눌린 것으로 진단한 돌팔이 의사가 폐색전증까지 단순한 소화불량으로 진단하는 바람에 조금만 늦었어도 생명이 위험할 뻔 했다.[22] 바이든은 수술 전에 보와 헌터 두 아들에게 자신의 묘비명으로 '아들, 형, 남편, 아버지, 스포츠맨'을 새겨달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회복 중에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안부 전화도 가족들이 받게 할 정도로 재활에만 힘썼지만 가장 친한 친구였던 에드워드 케네디는 '친애하는 아일랜드 출신 위원장에게'라고 적은 아일랜드 사슴 동판화를 액자를 가지고 기어이 집에 찾아왔다고 한다.[23] 이라크 전쟁명분 자체는 워낙 확실했다. 사담 후세인9.11 테러 희생자들한테 잘 죽었네, 천벌 받았다 ㅋㅋㅋ라고 대놓고 고인드립을 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지 W. 부시의 이라크 전쟁은 목적이 매우 허술했다. 이는 부시가 9.11 테러에 대한 보복이 아닌 이라크가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침공을 했기 때문이다. 원래 명분이 아닌 다른 명분을 들고 나왔다가 목표를 잃어서 미군이 이라크에서 수렁에 빠졌다.[24] 당시 연방대법원 진보파의 수장 존 폴 스티븐스 대법관이 주관했다.[25] 2015년에 지지율이 한 번이라도 10%를 찍은 후보를 주요 후보라고 정의.[26] 마침 박지원과 조 바이든은 1942년 생으로 동갑이다. 단, 박지원의 정치 경력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미국 캘리포니아 한인회장에 당선된 1981년부터라서 조 바이든에 비해 11년이나 짧다. 물론 2020년 기준으로, 은퇴하지 않고 활동 중인 대한민국 현역 정치인들 중에서는 박지원의 정치 경력(39년)이 가장 길다.[27] 현재는 백악관 홈페이지로 리다이렉트된다.[28] 기사에는 공화당으로 적혀 있지만 실제 당적은 민주당이다. 코프먼은 바이든이 상원의원이던 시절 비서실장으로 일했고 2009년 1월 바이든이 부통령으로 영전하며 연방상원의원직을 내려놓자 루스 앤 미너 델라웨어 주지사의 지명으로 2010년 11월까지 상원의원직을 수행했다.[29] 저때는 플로리다 주가 뒤집어지면 앨 고어가 당선인이 되는 상황이었는데 마침 개표에서 문제가 생겼고 재검표 문제 때문에 2000년 12월 중순이 되어서야 인수위 지위를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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