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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04:21:37

1996 대종상 시상식 논란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사건 전개 과정3.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4. 왜 하필이면 《애니깽》인가?5. 후폭풍6. 여담7. 참고 자료

1. 개요

"이것이 정말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제입니까?"
일본 영화배우 사토 마사오(미쿠니 렌타로)[1]가 대종상 시상식을 지켜본 뒤에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1996년 4월 27일에 열린 제34회 대종상 시상식에서 단 한 번도 관객들에게 선보인 적 없었던 영화애니깽》이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여우조연상 등 주요 부문을 수상하면서 영화계는 물론이고 국내 영화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대형 사건. 한국 원로 영화인들의 아집으로 한국 영화계의 발전에다 찬물을 끼얹은 대표적인 사건이며, 대종상 영화제의 최대의 흑역사이자, 한국 영화사 최악의 스캔들로 꼽힌다.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애니깽》을 본떠서, 일명 애니깽 사태라고 부르기도 한다.

워낙 대형 사건이다 보니 20년을 넘어 3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많은 영화팬들의 뇌리에 기억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심지어 영화 및 문화계의 큰 사건이 당해년도의 주요 사회 이슈가 된, 몇 안되는 사건이다. 그 만큼 대종상 영화제가 얼마나 최악의 추태를 보여줬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1990년대 한국 영화 역사상 최악의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1세기인 지금도 충무로의 큰 사건 사고 내역을 언급하면 반드시 먼저 등장할 정도로 파급력이 넘사벽급이다. 여기에 그 해 연말, 합동영화(서울극장) 곽정환 대표와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대표가 탈세 혐의로 구속되고, 영화계 전반의 비리에 대한 검찰 수사로 인해 충무로의 분위기가 매우 흉흉해지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 영화계의 구세대들과 신세대들이 강하게 충돌한 사건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한국 영화계의 구세대는 완전히 몰락했고, 비로소 신세대들이 자리를 잡게 되어, 결과적으로 질적 양적 성장과 함께 1999년~2000년대의 한국 영화 르네상스로 이어지게 된다.

2. 사건 전개 과정

시작은 1996년 3월 예심 심사부터였다. 먼저 한국 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던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예선에서 탈락했다. 이어 1995년에 개봉하여 비록 큰 흥행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여성의 억압과 욕망을 사실적으로 연출했다는 평단의 찬사를 얻었던 박철수 감독의 《301, 302》가 예심에서 불이익을 받아 박철수 감독이 차기작으로 내놓은 《학생부군신위》의 심사를 거부하며 수거했다는 소식이 충무로에 퍼지기 시작했다.

예심 심사득표 결과 《꽃잎》이 1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근소하게 2위, 《은행나무 침대》가 3위를 차지했고, 《애니깽》은 단 한 표도 얻지 못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301, 302》이 좋지 않은 평을 받은 이유는 바로 집행위원들 때문이었는데, 그들의 사고방식이 갈수록 변화하는 한국영화 제작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꼰대 기질이 심했기 때문이다. 예심 심사 결과 상위 3편의 영화도 집행위원들은 그다지 좋지 않은 반응을 보였지만, 일반관객들이 워낙에 호평을 하였기에 예심을 통과했다.

본격적인 문제는 영화 애니깽이 예선심사를 통과한것이다. 애니깽은 아직 개봉은 커녕 편집조차 안 끝난 미완성작으로[2] 개봉도 안 된 영화 《애니깽》이 주요 부문에 후보로 올랐고, 결국 본선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것이다.

원칙상으로 대종상 후보작으로 출품할 수 있는 자격은 단 하루라도 유료 상영을 해야 하며, 몇 명이라도 관객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있어야 출품이 가능하나 《애니깽》은 이를 가볍게 무시하고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후보작으로 출품했다. 촬영 도중 간경화로 사망한 배우 임성민을 대체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붐 마이크를 치우지 않은 날것 그대로 예선 심사에 출품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선에 진출했으며 본선에서는 어느 정도 작업을 하여 심사를 했으나 완성도는 최악이었다.

당시 영화계와 언론에서 주요 부문 수상이 유력하다고 예측했던 작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하지만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기획상, 《꽃잎》은 여자 신인상만을 수상했으며, 무려 14개 부문에 올라서 주요 부문 수상이 예측됐던 《은행나무 침대》는 신인감독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데에 그쳤다. 같이 최우수작품상에 오른 《본 투 킬》은 단 한 개의 상도 타지 못했다. 특히 남우조연상은 모두가 기정사실로 생각하고 있던 《은행나무 침대》의 신현준 대신 《학생부군신위》에 출연한 배우 김일우에게 돌아갔다. 이것은 무관에 그친 박철수 감독을 의식해서 보상의 의미로 준 것이라는 해석이 팽배하다.[3][4]

시상식 이후 《애니깽》은 '당장 개봉하라'는 여론의 압박에 못 이겨 시상식이 끝난지 1년은 지난 1997년 12월에 개봉은 했으나 관객수는 서울 기준 130명이 되지도 않았으며, 그나마 나온 결과물마저 돈이 없었는지 중간에 다른 흑백 영상 필름을 집어넣기까지 했다.

3.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대종상 영화제의 총책임을 맡은 한국영화인협회, 한국영화배우협회가 급격히 발전하는 한국 영화판에서 본인들이 설 자리가 좁아지자 저지른 일이라는 해석이 많다. 정부 후원으로 스크린 쿼터 땜빵용 날림 영화나 제작하던 1950년대~1990년대 초반까지의 꼰대 영화인들이 한국 영화계의 새로운 발전과 함께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되면서 갈 곳을 잃어가게 되고 병크를 저지르다가 34회 대종상 시상식을 계기로 제대로 사달이 크게 난 것이다.

당시의 한국 영화계는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다. 1950년대 이래로 한국 영화계의 가장 큰 먹거리는 정부로부터 외화수입권을 받아서 상영하는 것었고, 국산영화는 단지 외화수입권 배정 기준을 맞추기 위한 편수 채우기용으로 10여 개의 군소 영화사들이 만드는 것에 불과했다. 이 폐쇄적인 영화판에서 감독으로 인정받으려면 말단 조수부터 몇 년간 도제식 수업을 받아야만 했다. 모든 영화는 무조건 한 극장에서만 단관개봉[5]을 해야 했으며, 전국적인 개봉관 집계, 관람객 집계 같은 것도 입장수익을 삥땅치는 극장주들과 그들과 야합한 영화사들 때문에 전부 엉터리였기 때문에 실제 관객이 몇명인지, 영화수익이 얼마인지는 그 누구도 몰랐다.[6] 한 마디로 산업으로서의 영화도, 예술로서의 영화도 아닌 엉성한 구조였다.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 민주화 운동 바람이 불면서 문화계의 저변으로부터 신진 세력들이 등장하여 조금씩 세대교체와 물갈이가 되고 있는 중이었고, 결정적으로 1987년 민주화 및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창작의 자유가 대폭 완화되면서 기존 세대들과는 완전히 다른 감수성과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들이 무섭게 등장하고 있었다. 장선우[7], 박철수, 홍상수 감독들이 대표적으로 이들은 전통적 충무로 환경에서 성장한 것이 아니라 외국에서 영화를 공부했거나, 외부에서 불쑥 등장한 인물들로 순식간에 젊은 세대의 시선을 사로잡아서 한국 영화의 미래로 주목받는다. 또한 장산곶매 같은 소위 운동권 출신의 영화인들이 이때부터 영화판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한국 영화계의 핵심적 창작 집단을 이루어 주목받기 시작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참고로 이 장산곶매 멤버들이 영화계의 주류에 진출한 후 제작 또는 각본에 참여하거나 연출한 영화들이 바로 지금까지도 명작으로 회자되는 접속, 공동경비구역 JSA, 조용한 가족, 해피 엔드, 알 포인트 등이다.

그 외에도 각 대학의 영화학과 전공생들이 본격적으로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업계로 점점 진출하기 지작했으며, 시네필 문화와 시네마테크 분위기를 타고 다양한 전공과 분야에서 영화계로 인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영화 비전공자인 시네필 출신으로서 한국영화아카데미를 통해 1990년대 중반부터 영화계로 진출한 인물들이 바로 현재까지도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들인 허진호, 봉준호, 장준환, 민규동, 김태용 등이다. 그리고 강우석, 강제규 같은 충무로 출신들[8]도 선배 세대들과는 완연히 다른 성향을 보이면서 철저하게 사전기획에 입각한 영화제작 시스템에 빠르게 녹아들었다.

그 이전에는 감독하고 제작자들이 대충 술 먹다가 '야 대충 이런 거면 먹힐 거 같은데?'하면 감독이 시나리오, 캐스팅, 마케팅을 모두 겸업하면서 주먹구구식으로 움직였다면, 1990년대 초·중반 부터는 할리우드처럼 전문 프로듀서가 주 수요층의 성향을 분석해서 시나리오의 전개를 결정하고 제작하는, 이른바 '기획 영화'가 등장하는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한국 영화판에서 최초의 기획 영화는 1992년 김의석 감독의 《결혼 이야기》로 이 작품을 제작한 오정완은 1996년 《은행나무 침대》에서는 최초로 금융권과 대기업의 투자를 받으면서 현재까지도 통용되는 영화 제작 시스템을 확립했다. 대기업들이 문화 산업의 가능성을 보고 투자에 나선 것이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계기가 바로 1996년에 있었던 '영상물 검열 철폐' 사건이었다. 위에 언급된 '장산곶매'라는 조직은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1989년작 《오! 꿈의 나라》, 전교조 교사 해직사태를 다룬 1991년작 《닫힌 교문을 열며》 등과 같이 사회성 짙은 영화를 만들던 언더그라운드 영화 창작 집단이었는데, 이 영화들이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 검열을 받지 않고 영화를 상영을 하였다는 죄목으로 대표가 기소가 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장산곶매'는 영화법에 대한 헌법 소원을 냈고, 결국 헌법재판소는 1996년에 '사전 검열이 표현의 자유를 해친다'는 결론을 내고, 사전 검열을 규정하던 기존의 영화법에 대해 위헌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 사전 검열은 철폐되었고, 영화 분야에서 표현의 자유는 그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폭 확충되었다. 이렇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기 시작하다 보니, 왕성한 창작력과 새로운 시각을 가진 젊은 작가와 연출자들이 영화판에서 날개를 달고 활동의 폭을 급격히 늘리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그간 안성기, 박중훈, 강수연으로만 인식되던 한국 배우층 역시 1990년에 개봉한 《장군의 아들》 오디션에서 합격한 신인들을 시작으로 TV 드라마에서 활약한 탤런트들이 1990년대 중반 대거 충무로로 몰려들어 조금씩 두터워지기 시작했고, 1990년대 중후반부터 그동안 연극 무대에서만 활동하던 배우들까지 폭넓게 영화계에 진출하면서 조금씩 세대 교체가 되기 시작했다.

1996년 대종상 최우수 작품상 후보에 《애니깽》과 함께 올랐던 《은행나무 침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꽃잎》, 《본 투 킬》이 어떤 배경에서 만들어진 영화인지 분석해 보자. 《은행나무 침대》는 철저한 사전 기획속에 국내 최초로 금융권의 투자를 받아서 제작했으며 소재 또한 기존의 한국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판타지였다. 《전태일》과 《꽃잎》은 오랜기간동안 어용적 분위기가 판치던 영화계에서 철저하게 금기시된 5.18 민주화운동노동운동이라는 소재에 과감하게 도전해서 성공하였다. 이렇듯 애니깽을 제외한 세 편의 영화는 기존 한국 영화계의 질서를 흔드는 요소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으며, 제작진 및 출연배우도 대부분이 젊은 신진급이었다.[9]

반면에《애니깽》은 제작진과 주연배우 대부분 원로 영화인들[10]로, 전형적인 구시대적 방식으로 만든 여태까지의 한국 영화였으며, 특히나 감독인 김호선은 《서울무지개》, 《사의 찬미》등의 영화로 유독 대종상에서만 작품상, 감독상을 수상하는 등, 대종상의 입맛에 맞는 영화를 공급하는 구세대적 영화감독 그 자체였다.[11]

즉, 앞의 세 편의 영화들이 평단과 관객들의 지지를 한 몸에 얻으면서 충무로에 커다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면서 충무로의 기존 질서가 해체되려 하자 위기감을 느낀 기성 영화인들이 구시대적 영화인 애니깽에 몰표를 주면서 신진 영화인들을 찍어누르고자 한 것이다.

대종상 시상식이 신구 영화계의 알력다툼의 장이었음을 암시하는 장면은 상당히 많다. 일단 김호선 감독은 편파적인 몰표로 상을 수상했음에도 부끄러워하기는 커녕 아주 당당한 모습으로 시상대에 서서 '내가 받아야 할 상을 받았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수상 소감을 남겼다. 반면에 감독상 수상부터 객석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고 당시 사회를 맡은 아나운서 손범수와 배우 지수원은 굳은 표정으로 진행을 했다. 최우수 작품상으로 호명되자 객석의 박수 소리는 거의 나지 않고 참석한 영화인들의 거센 항의 소리까지 들렸으나 다행히(?) 방송에 잡히지 않았다.

최우수 작품상을 시상하러 나온 원로배우 장동휘"평소 설날이 되면 많은 후배 영화인들이 나에게 찾아와 세배를 합니다. 앞으로도 그래주시길 바랍니다."라며 대종상이 여태까지 폐쇄적인 영화계에서 위계질서를 확인하기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12] 사건 당시에 대종상을 취재했던 연예, 영화부 기자들이 이 발언을 듣고 혀를 내둘렀다는 후문이 자자하다. 그 외에도 시상에 나온 원로배우 및 영화계 인사들이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젊은 감독 및 배우들을 향해 '우리가 있었기에 너네가 있는 거다'는 꼰대 발언을 계속하여 던졌다.

당시 협회 이사를 맡은 원로배우 김지미 역시 개판이 된 대종상 시상식에 대해 지금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외려 자신의 잘못을 비판하는 젊은 영화인들을 비하하는 내용의 인터뷰까지 했다.

4. 왜 하필이면 《애니깽》인가?

다만 한 가지 의문은 남는다. 신진 영화인을 비토하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어째서 굳이 개봉은 커녕 아직 편집조차 안 끝난 미완성 작품에다가 몰표를 줘서 대중들의 반발을 자초했냐는 것이다.

사실 《애니깽》은 영화 제작 단계부터 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닿은 영화로서, 친정부적 성향이 강한 대종상은 애초부터 《애니깽》에게 상을 몰아주려고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34회 대종상 시상식은 어차피《애니깽》의 한판승으로 끝날 것이다는 예측이 예선심사때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1995년 9월 27일 국회문공위원회 영화진흥공사 국정감사장에서 《애니깽》은 이어령이 장관을 맡던 시절부터 기획된 영화이며 영화진흥공사는 1992년부터 김호선 감독에게 '좋은 영화제작 지원사업'이란 명목하에 10억원이라는 거액의 지원금을 줬다는 것이 월간 키노의 취재로 드러났다.

흥행 수입의 절반을 받는다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영진공이 그 전까지는 보통 편당 3000만 원씩만 지원해왔기 때문에 10억이라는 차원이 다른 숫자가 투입된 것에 대해서는 안기부가 관여했다는 설이 흘러나왔다. 북한이 1969년 제작한 《피바다》에 맞서서 통일 이후에 남북한 주민이 거부감 없이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를 제작한다는 명목으로 김호선 감독에게 제작을 의뢰한 다음에 영화진흥공사를 통해서 10억 원을 지원했다는 것이 안기부 후원설의 요지로, 1995년 영화진흥공사에 대한 국정감사 과정에서 실제로 언급되기도 했다. 10억이란 거액을 지원받은 애니깽이 촬영을 시작한지 3년이 지나도록 완성되지 않자 국회 국정감사에까지 올라온 것이다.[13]

그 결과 "대종상 영화제는 어용 영화제다"라는 비아냥까지 들리면서 대종상의 권위는 점점 바닥으로 추락하게 된다.

나중에 《애니깽》을 제작한 합동영화사의 곽정환 사장은 안기부로부터 제작비를 지원받은 것이 맞다고 직접 밝히면서 안기부 후원설이 사실이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애니깽》이 대종상에서 작품상을 포함한 주요부문에서 수상을 했을 정도면 작품성이 뛰어난데, 왜 예선에서 홀대받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발언으로 빈축을 산 것은 덤이다.

5. 후폭풍

어이없는 수상 결과에 영화평론가들과 영화인들이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그동안 영화계 내부에서만 쉬쉬하던 이야기들이 씨네21 1996년 5월 14일자 제 52호에 특집 기사로 실렸고, 웬만하면 수상내역만 보도했던 지상파 뉴스에서도 특집으로 다루기도 했다. 대종상 영화제 심사 불공정 의혹 - MBC뉴스데스크 1996년 5월 5일.

이로 인해 후원을 하던 삼성문화재단이 1996년 말에 철수해버렸고, 결국 후원사를 구하지 못하다가 쌍방울이 극적으로 나서면서 다음해인 1997년 35회 시상식은 쌍방울 계열사인 '무주리조트'[14]에서 열렸다. 그러나 1997년 외환 위기가 터지고 쌍방울마저 부도나는 바람에 다른 후원자를 급하게 찾았지만, 경제위기 와중에 아무도 나서지 않으면서 1998년 시상식은 열리지 못했다. 그래서 1999년 36회 시상식은 출품작이 1998년부터 제작된 영화들까지 범위가 넓어졌다.

파급력이 일반 대중들까지 퍼지다 보니 월간지 '스크린'에서 전문가와 영화 및 방송 관계자 50여 명을 대상으로 가상으로 수상 내역을 설문조사했다. 결과는 이렇다(월간 스크린 1996년 6월 참조).[15]

위 설문에 대한 답변으로 '애니깽'을 언급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후문이다.

결국 기존의 영화인들은 대종상 시상식으로 신진 영화인을 견제하기는 커녕 오히려 여론의 역풍을 맞고 완벽하게 몰락하고 말았고, 한국 영화계의 세대교체가 완성되었다. 이후 신진영화인들과 막강한 자본력을 갖춘 재벌[16][17]의 결합으로 《쉬리》, 《JSA》, 《친구》 등의 초대형흥행작들이 폭발하면서 한국 영화계는 새로운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반면에 1990년대 이전 영화인들은 임권택, 안성기, 박중훈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도태[18]되었다.

그러나 대종상 자체는 여전히 영화판에서 뒷전으로 밀려난 자칭 원로 영화인들이 감투질이나 하면서 이전투구를 벌이는 그들만의 리그로 남아있는 중이다. 이들은 2015년 대종상 시상식에서 다시 한 번 추태를 부리면서 대종상의 권위를 한없이 밑바닥으로 쳐박고 있는 중이다.

6. 여담

7. 참고 자료


[1] 2013년 4월 14일 향년 90세로 작고.[2] 심지어 본선(수상작 선정) 심사 때 심사위원들에게 보여진 《애니깽》은 예심(후보작 선정) 심사 때 버젼에 추가 편집을 해서 올린 것이다. 《애니깽》 제작사 대표 곽정환은 예심 출품 때 시간에 쫓겨 편집을 하다보니 퀄리티가 좋지 않게 나와 본심 때 수정해서 냈다며 뭐가 문제냐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 "다른 영화들도 예심 땐 영어 자막이 없었는데 본심 땐 영어 자막이 있는 버젼으로 바꾸어 내기도 했다"는 식으로 물타기를 시도했는데, 당연히 자막을 추가하는 것과 영화 내용을 편집하는 건 다른 문제다. 다만 곽정환이 인정한 건 색 보정과 오디오 보정 뿐이며, 장면을 추가하거나 삭제했는지에 대해서는 "세세한 건 김호선 감독이 한 일이라 나는 모른다"고 회피하긴 했다.[3] 그렇다고《학생부군신위》에서 배우 김일우의 연기가 좋지 않았던 건 당연히 아니다. 충분히 훌륭한 연기력을 선보였으나, 당시 대중의 여론과 영화계의 반응은 신현준이 상을 받을 것이라는 의견이 대세였고 일부 언론에선 사실상 확정으로 보도할 정도였다는 것.[4] 김일우는 그해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남우조연상까지 수상하며 이 영화로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으며 각종 영화와 드라마에서 활약하다가 2004년에 세상을 떠났다.[5] 1990년대까지는 아날로그 영화필름(일명 프린트)을 영사기에 걸어서 상영하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여러 극장에서 걸려면 일단 필름프린트를 여러개를 만들었어야 했다. 근데 이 프린트 한벌 제작하는게 과정도 복잡하고 무엇보다 비용이 당시 대한민국의 경제 수준, 영화산업 수준에선 상당한 부담이었다. 그래서 개봉영화 한편당 기껏해야 10개를 만드는게 고작이었다. 이러니 주요 대도시 중심지역의 시설좋은 극장들 일명 개봉관에 우선 필름이 공급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며칠에서 몇달간 상영하다가 끝나면 필름이 변두리의 오래된 극장 일명 재개봉관(2차상영)으로, 거기서 다시 촌동네, 시골의 허름한 동시개봉관(3차상영)으로 옮겨지는 구조였다. 이쯤 되면 필름 노후화로 인해서 화면을 알아보기 힘든 수준이었고, 그래서 동시개봉관에선 티켓 가격을 싸게 받거나, 아예 1+1으로 한편 가격에 두편을 보여주곤 했다. 반면 미국은 이런 오리지날 필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부터 멀티플렉스 시스템이었는데, 돈이 많으니까 그냥 필름 프린트를 어마어마하게 많이 만드는 방식으로 해결했다.[6] 이런 극장주와 영화사들이 대부분 조폭세력과 얽혀있었다. 앞에 나오는 서울극장 곽정환 대표와 태흥영화사 이태흥 대표 구속은 기존 영화판, 연예계의 배후에 있는 조폭세력들을 정리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이들이 위축되면서 생긴 공백지대에 대기업 자본이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하면서 전문적인 영화산업으로 질적도약을 하게 된다.[7] 하지만 장선우는 감독으로서의 커리어를 이어가던 중 2002년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으로 한 방에 몰락하면서 영화계에서 은퇴했다.[8] 이 두 명은 1980년대 합동영화사에서 제작한 정인엽 감독의 《애마부인》(!)에 제작스탭으로 참여하면서 영화계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9] 부연 설명을 하자면, '은행나무 침대'는 심혜진을 제외한 나머지 주연진들은 신진급이었는데, 신현준은 '장군의 아들'로 데뷔한 충무로 라이징 스타였고, 진희경은 모델활동을 하다가 1994년 충무로로 진출했으며, 한석규는 톱 탤런트로 명성을 얻고 1995년 충무로로 진출하였다. '꽃잎'은 이정현이 오디션으로 선발된, 더군다나 당시 고등학생에 불과한 초짜 배우였다. '전태일'은 홍경인의 나이가 갓 스무살이었고.[10] 김호선 감독과 주연배우 임성민, 장미희는 전작 '사의 찬미'를 같이 작업했다.[11] 물론 상술된 영화에서는 대종상만 수상한 거는 아니다. 서울무지개일 경우에는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대상, 작품상, 감독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작품상, 감독상을 수상했고, 사의 찬미는 청룡영화상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였다.[12] 시상식장에서 꼰대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던 장동휘는 당시 칠순을 넘긴 고령이었으며, 대종상을 통해 여러 차례 상을 받은 인물이다. 그는 2005년에 사망했다.[13] "두손필름이 제작중인 영화 「애니깽」에 대한 영화진흥공사의 제작비 10억원 지원은 안기부의 조정에 의해 이루어졌다" - 1995년 9월 27일 국회 문화공보상임위원회 문화체육부 산하 4개단체 국정감사장에서 조세형(새정치국민회의) 의원 질의.[14] 이후 대한전선을 거쳐 현재는 부영그룹 계열에 속한다.[15] 일부는 후환이 두려워 답변을 거부하기도 했지만, 대중들을 대신하여 답변을 낸 것이므로 당시의 대중성향이 어떤지 파악 할 수 있다.[16] 이 시기에는 영화사업에 손을 안댄 재벌이 없을 정도다. 삼성도 1995년 헐리웃 방식의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표방하면서 삼성영상사업단을 출범시켜서, 영화와 음반 제작에 상당한 통 큰 투자를 했었다. 비록 4년만인 1999년 사업단을 해체하면서 엔터사업에서 철수했지만, 당시 삼성이 키웠던 인력들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대우도 케이블 채널 DCN(現 OCN)을 설립하고, 최초의 멀티플렉스 씨네하우스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었다. 이렇게 1990년대 초중반에 엔터사업에 진출했던 재벌들은 대부분 1997년 외환 위기를 거치면서 일제히 철수했지만, 곧바로 동양그룹, CJ 등 다른 재벌들과 김대중 정부의 벤처육성 정책에 따라서 우후죽순 성장한 벤처캐피탈들이 이들이 만들어 놓은 인적, 물적 기반을 이어받아서 엔터사업에 대대적인 투자를 진행하면서 지금의 K-Culture의 밑거름이 되었다.[17] 멀티플렉스 갖춘 대기업이 충무로와 손잡은 이유.[18]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안성기를 제외한 임권택과 박중훈도 메인스트림에서 밀려났다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으며, 2020년이 넘어서면서 안성기도 나이가 70줄에 접어든데다 혈액암으로 인해 연기 활동이 줄었다. 물론 이들은 불명예스럽게 밀려난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세대교체된 케이스이므로 상술된 원로 영화인들의 지저분한 몰락과는 결이 전혀 다르다.[19] 다만 영화감독협회도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은 단체이며, 김호선이 영화감독협회에서 제명된 건 보수 성향의 원로 영화인들끼리의 추악한 이권다툼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자세한 내용은 정진우 항목에 링크된 기사들을 보면 알 수 있다.[20] 당시 인터뷰에선 '원래 본인은 '꽃잎','전태일' 중 한편이 최우수 작품상을 받을것 같았고 함께 시상식에 온 배우들도 같은 생각을 했었는데 다른 영화가 느닷없이 수상해서 당황했었다. 그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것 같다'고 말했다. 시상식에 참석한 배우들 및 일부 영화인들은 애시당초 '애니깽'이라는 영화를 몰랐거나 알고 있었어도 이렇게까지 주요부문을 수상하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는 후일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