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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인도 파키스탄 전쟁 1965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한글) Indo-Pakistani War of 1965 (영문) १९६५ का भारत-पाक युद्ध(힌디어) پاک بھارت جنگ 1965ء(우르두어) | |
인도-파키스탄 전쟁의 일부 | |
1965년 8월 5일 ~ 1965년 9월 23일 | |
장소 | |
인도-파키스탄 국경 아라비아해 | |
원인 | |
카슈미르 지역에 대한 영유권 분쟁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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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전력 | |
육군 보병 700,000명 항공기 700+대 전차 720대[1] 야포 628문[2] 편성: 보병사단 9개 기갑여단 3개 | 육군 보병 260,000명 항공기 280대 전차 756대[3] 야포 552문[4] 편성: 보병사단 8개 기갑여단 2개 |
결과 | |
교착 상태 UN의 개입과 정전 | |
영향 | |
전쟁 발발 이전 상태로 복귀 타슈켄트 선언 체결 | |
피해규모 | |
전사 3000명 기갑차량 150~190대 파괴 항공기 60~75대 손실 카슈미르 지역 영토 540km² 손상 | 전사 3800명 기갑차량 200~300대 파괴 항공기 20대 손실 카슈미르 지역 영토 1840km² 손상 |
1. 개요
- [관련사진들]
파키스탄군의 파괴된 셔먼 전차 앞에서 사진을 찍는 인도군 장성들
파키스탄군의 파괴된 셔먼 전차 앞에서 사진을 찍는 하리 싱 데오라(Hari Singh Deora A.V.S.M / 1922.10.24~2003.03.14) 인도 육군 준장. 상단 사진의 우측과 같은 인물이다.
노획한 인도 육군의 AMX-13 전차를 운용하는 파키스탄군
공격당하면서도 계속 진격하는 파키스탄군과 M4 셔먼 전차
MG1A3 기관총을 겨누는 파키스탄군
인도 공군에 의해 격추당하는 파키스탄 공군의 F-86 세이버 전투기
파키스탄 육군의 M48 패튼 전차
파괴된 인도 육군의 센추리온 전차를 살펴보는 서방 기자들
1965년 8월 5일부터 동년 9월 23일까지 카슈미르 지역에서 일어난 인도과 파키스탄 간의 전쟁.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이후 두번째로 일어난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전쟁이다.
2. 배경
1947년에 일어난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은 유엔이 중재하여 정전으로 끝났지만, 그 뒤로도 카슈미르 지역을 둔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갈등은 끝나지 않았다. 1954년 파키스탄은 미국과 방위협정을 체결해 7억 달러에 대한 군사원조를 받으면서 인도를 향해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그러다가 1962년에 중인전쟁이 발생하였고, 중인전쟁에서 인도군의 졸전을 지켜본 파키스탄은 자신감을 얻고 카슈미르 지역에서 다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결정했다.한편 중인전쟁에서 놀랄만큼 졸전을 벌인 인도군은 현대화를 하려고 했고 이에 파키스탄은 인도군이 현대화되기 이전에 먼저 선수를 치려고 했다. 이는 파키스탄군이 인도군에 비해 수적으로는 열세하지만 질적인 부분은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1965년 1월 부터 파키스탄군은 인도령 카슈미르에 위력 정찰을 하기 시작했고 4월이 되면 양국은 서로의 초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1965년 6월 영국의 총리 해럴드 윌슨은 양국을 설득해 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이 협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1958년 쿠데타로 집권한 아유브 칸은 국민들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려고 했고 전쟁은 이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지브롤터 작전을 발동해 카슈미르 지역에 파키스탄군을 잠입시켰다.
처음에는 카슈미르 지역의 인구와 관련된 종교 갈등을 이용하여 사보타주를 일으키고자 하여, 인도령 지역에 간첩을 파견하여 주민들을 선동하는 식으로 반군을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이러한 파키스탄의 작전은 간첩들이 발각당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결국 1965년 8월에 2~3만명의 파키스탄군이 카슈미르 지역의 휴전선을 넘어 침공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고[5], 이를 제보받은 인도군 역시 8월 15일에 휴전선을 넘었다.
3. 경과
3.1. 전개
1965년 8월 5일, 파키스탄 군인들은 카슈미르 현지인 복장을 한 뒤 국경을 넘었다. 이들은 현지 무슬림들의 도움을 받아 정보를 수집하였지만 현지 주민의 제보로 인도군은 이들을 체포하려고 했다. 8월 6일과 7일, 인도군은 여러 부대의 파키스탄 병사들과 교전을 벌였고 수적으로 열세인 파키스탄군은 현지인들과 섞이려고 했다. 이에 인도군은 파키스탄이 자신들의 주권을 침해했다고 생각을 했고 8월 15일 휴전선을 넘어 파키스탄군의 초소 3개를 점령하였고 이에 파키스탄군은 반격하기 시작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8월 15일부터 인도군은 카슈미르 북부에서 대규모 소탕 작전을 전개하였고 이에 1965년 9월 1일 파키스탄군은 잠무의 중요한 마을인 아크누르를 점령하기 위한 그랜드 슬램 작전을 개시하였다, 아크누르는 잠무로 향하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해 아크누르를 점령하면 잠무로 향하는 육로 보급길이 끊기기 때문이다. 이에 지브롤터 작전으로 침투한 파키스탄군은 현지인들을 선동하였지만 이들은 별로 호응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파키스탄군 단독으로 작전이 개시되었다. 아크누르 지역을 방어하던 인도군은 4개의 보병 대대와 한 개의 전차 편대로 구성되어 있어서 8개의 보병 대대와 6개의 전차 편대로 구성된 파키스탄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인도군은 방어 지역에서 크게 후퇴하자 파키스탄군은 이들을 추격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인도군은 9월 6일 펀자브에 새로운 전선을 열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파키스탄군은 카슈미르로의 진격을 중단하였다. 그래서 파키스탄군은 목표인 아크누르를 점령하는데 실패하였다.
1965년 9월 6일 니란잔 프라사드 소장이 이끄는 제15보병사단이 파키스탄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이들의 목표는 파키스탄 펀자브의 주요 도시인 라호르를 점령하기 위함이다. 이에 아유브 칸 대통령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인도와 전쟁 상태에 있다고 선포하며 비상사태를 선언하였다. 제15보병사단은 이초길 운하 서쪽 강둑에 매복해 있던 파키스탄군의 공격을 받았고 결국 인도군은 후퇴 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하르 키샨 시발 소장이 이끄는 제7보병사단은 암리차르-라호르, 칼라-부르키-라호르, 켐 카란-카수르 도로를 따라 라호르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기갑 사단의 지원을 받아 라호르를 향해 신속하게 진격하였다. 이 신속한 진격은 이 일대에 파키스탄군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파키스탄은 전쟁이 카슈미르 쪽에 국한 될 거라고 판단해 펀자브에 대규모의 군대를 주둔시키지 않았다.
아난트 싱 중령이 이끄는 제18기병연대는 부르키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이에 파키스탄 포병대는 인도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포격을 했지만 인도군의 진격을 늦출 뿐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그러나 대포로 시간을 번 틈에 파키스탄은 부르키에 제1기갑사단을 보내 반격을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파키스탄 공군의 지원 및 엄호를 받아 인도군을 무찌르려고 했지만 폭격기 대신 전투기를 사용하여 지상군을 상대로 폭격을 하는 것은 그닥 효과적이지 않았고 결국 숫적으로 불리해 지자 파키스탄군은 철수하였고 인도군은 9월 11일 부르키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부르키를 성공적으로 점령한 인도군은 라호르에서 불과 49km 떨어진 도그라이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이미 인도군은 9월 6일 도그라이 점령하려고 했지만 파키스탄 공군의 맹렬한 폭격과 보급선의 부족으로 점령하는데 실패하였다. 하지만 부르키가 인도군의 손에 떨어지자 곧장 도그라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9월 20일 데스몬드 헤이드 중령이 지휘하는 제3자트연대는 파키스탄 진지의 측면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인도군의 기습 공격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군은 총과 수류탄, 총검 마지막에는 맨손으로 인도군과 맞서 싸웠지만 무기의 부족으로 결국 도그라이에서 후퇴하고 말았다.
9월 9일 라젠드라 싱(Rajendra Singh) 소장이 이끄는 인도 제1기갑사단은 파키스탄령 펀자브의 주요 도시인 시알코트를 점령하기 위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아브라르 후세인 소장이 이끄는 파키스탄 제6기갑사단과 필로라에서 조우하였다. 이들 사이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4일 간의 전투 끝에 인도군이 파키스탄군 전차 66대를 파괴함으로서 파키스탄군은 퇴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참고로 인도군인 필로라 전투에서 전차를 6대 밖에 잃지 않았다. 이에 인도군은 즉시 전과 확대를 하였고 바흐티아르 라나 중장이 지휘하는 파키스탄 제1군단과 후세인 소장이 지휘하는 제6기갑사단은 새로 임명된 패트릭 던 중장이 지휘하는 인도 제1군단 및 라진더 싱이 지휘하는 제1기갑사단과 차윈다에서 격돌하였다.[6] 인도군은 이들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하였고 파키스탄은 200대의 전차가 파괴되고 36대가 인도군에 노획되었다.
9월 6일 펀자브에서 전선이 열린 것에 이어서 9월 8일에는 라자스탄에서도 전선이 열렸다. 이쪽은 사막 일대로서 파키스탄군과 후르 민병대가 인도군을 방어하였다. 후르 민병대는 이 일대의 지형과 지리에 매우 익숙하였고 파키스탄군은 인도군이 갖지 못한 사막에서 싸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들은 게릴라를 펼치며 인도군을 끊임없이 괴롭혔고 결국 인도군은 라자스탄 전선에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한편 파키스탄이 계속해서 밀리자 파키스탄군은 인도령 펀자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9월 8일 나시르 칸 소장이 이끄는 파키스탄 제1기갑사단과 제11보병사단은 암리차르와 잘란다르 사이에 있는 다리를 점령하기 위해 켐 카란을 향해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토마스 K. 테오가라지 준장이 이끄는 제2독립기갑여단은 늪지대가 있는 사탕수수밭으로 파키스탄군을 유인하였다. 밤이라 시야 확보가 제대로 안 된 파키스탄군은 인도군이 매복한 장소로 진입하였고 늪지대로 인해 파키스탄군의 진격은 느려졌다 그 때 인도군은 맹공을 펼쳤고 100대 이상의 파키스탄군의 전차가 파괴되었다. 이 전투에서 인도군이 승리함으로서 파키스탄군의 펀자브 진격을 막았다.
3.2. UN의 개입과 중재 그리고 정전
한편 전쟁은 점차 교착 상태로 빠지기 시작했다. 인도 군대는 3,712명이 사망하고 7,638명이 부상당했으며, 파키스탄은 1,500명이 사망하고 4,300명이 부상당했다. 인도는 1,920km의 파키스탄 영토를 점령하였으며 파키스탄은 550km의 인도 영토를 점령하고 있었다.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9월 20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양국이 48시간 이내 무조건 휴전하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인도는 이 결의안을 즉각 받아들였지만 파키스탄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파키스탄 대통령 아유브 칸과 외무장관인 줄피카르 알리 부토는 비밀리에 중국에 가서 중국의 총리인 저우언라이와 외무장관 천이를 만나 파키스탄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저우언라이와 천이는 확답을 주지 않았고 결국 파키스탄은 유엔의 중재를 받아들였다. 휴전 기간에도 양국은 서로 소규모의 교전을 이어나갔다. 이에 소련의 총리 알렉세이 코시긴은 인도와 파키스탄을 타슈켄트로 초청해 평화협상을 중재하였다.1966년 1월 10일 인도 총리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와 파키스탄 대통령 아유브 칸은 전쟁 이전으로 국경으로 되돌아 가자는 타슈켄트 협약에 서명을 함으로서 양국 사이의 전쟁은 끝이 났다.
4. 결과
한편 타슈켄트 선언이 발효되자 양국 국민들은 극렬한 반발하였다. 하지만 1966년 1월 11일 타슈켄트 협약 이후 인도 총리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가 심장마비로 사망함으로서 반대 시위는 잦아들었다. 왜냐하면 샤스트리 총리에 대한 추모 감정과 죽은 자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인도인들이 생각했기 때문이다.한편 파키스탄은 자국이 승전하고 있다는 거짓 보도를 그대로 믿어 자신들이 이겼는데 사실상 패전에 가까운 휴전을 하였다고 믿었다. 시위대는 정부가 카슈미르를 힌두교도들에게 팔아넘겼다고 비난하였고 그 와중에 라호르에서 시위하던 학생 2명이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하였다. 이에 유력 야당 당수인 파티마 진나는 아유브 칸 대통령을 비난하면서 "용감한 전사들의 피로 얻은 성과가 회담의 테이블에서 사라졌다."라고 맹공격을 퍼부었다. 들불처럼 이어진 시위에 아유브 칸 대통령은 진실을 이야기 하였지만 회담에 참석한 강경파인 외무장관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대통령의 말은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아유브 칸은 1969년 실각하였고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파키스탄 대통령이 되었다.
부토는 "샤스트리가 죽어서 너무 기뻤다."라는 발언과 함께 타슈켄트 협약을 조국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하고 당시 회담이 국제적 음모에 파키스탄이 희생된 것처럼 묘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1977년 군부 쿠데타로 실각하였고 2년 뒤 교수형에 쳐해졌다.
5. 여담
인도의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 총리는 이길 수 있는 전쟁을 잘못된 정보를 듣고 끝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1965년 9월 7일, 무하마드 마흐무드 알람(muhammad mahmood alam / 1935.07.06 ~ 2013.03.18)이라는 파키스탄군 조종사가 F-86을 조종하여 1분 만에 호커 헌터 5대를 격추했다. 그는 전쟁 동안 7기의 적기를 격추했고 파키스탄 공군 최고의 에이스로 등극했다.[7]
6. 매체에서의 등장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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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 해방 ,1961, | | |
중인전쟁 ,1962, | | |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1965, | | |
1967년 인도-중국 국경 분쟁 ,196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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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길 전쟁 ,1999, | | |
인도-방글라데시 국경 분쟁 ,1999, | | |
2017년 중국-인도 국경 분쟁 ,201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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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루치스탄 분쟁 ,1948 ~ 현재, | 발루치스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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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센추리온 전차 186대, M4 셔먼 346대, AMX-13 90대, PT-76 90대[2] 3.7인치 곡사포 66문, 25파운더 450문, 5.5인치 96문, 7.2인치 16문[3] M47 패튼 및 M48 패튼 352대, M4 셔먼 308대, M24 채피 96대[4] 105mm 곡사포 72문, 25파운더 234문, 155mm 곡사포 126문, 8인치 48문, 3.7인치 곡사포 72문 등[5] 파키스탄의 침략이라는 단어는 인도의 입장이며 중립적이지 않은 용어다.[6] 차윈다 전투는 쿠르스크 전투 이후 최대 규모위 전차전이다.[7] 해당 발표는 의심을 받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