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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룡/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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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AE1932> 생애 생애 · 제주도정
가족 아버지 원응두 · 어머니 김춘년 · 배우자 강윤형
활동 제주드림타워 · 녹지국제병원 · 원팀캠프
비판 및 논란 비판 및 논란 (부인의 '이재명 소시오패스' 발언 및 옹호 · 이준석 대표 녹취록 유출 · 업무추진비 부정사용 · 서울양평고속도로 건설계획 독단 백지화)
기타 별명 · 대권주자로서의 장단점 · 남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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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출생~학창 시절3. 정계 입문 ~ 18대 국회의원까지4. 민선 6·7기 제주지사
4.1. 직무수행 평가
5. 제20대 대선 출마
5.1. 경선 패배 이후
6. 윤석열 정부 초대 국토교통부 장관7. 장관 퇴임 후

1. 개요

제16~18대 국회의원제주특별자치도지사, 국토교통부장관을 역임한 정치인 원희룡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이다.

2. 출생~학창 시절

1964년 2월 14일, 제주도 남제주군 중문면 중문리(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문동)의 14대째 살고 있는 원주 원씨 토박이 집안에서 아버지 원응두(元應斗, 1934.10.15. ~ )[1]와 어머니 김해 김씨 김춘년(金春年) 슬하에서 2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창시절을 제주도에서 보냈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집안에 전기불이 안 들어왔다고 한다. 1년에 쌀밥이나 고기반찬은 구경조차 못 해봤고, 찢어진 고무신을 신고 다녀야 했을 정도로 가난한 집안 형편이었다. 원희룡의 부친은 과자 가게, 배추 장사, 농약상, 신발 가게, 책방 등 여러 사업을 전전했지만 잘 안 되어서 온 가족이 빚쟁이들한테 시달리기도 했고 같은 동네에서 이사만 10번 넘게 다녀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서점을 하다가 관둔 덕에, 집 한켠에 쌓인 재고서적을 원없이 많이 읽을 수 있게 되었다.[2]

어느 날은 술 취한 빚쟁이가 집에 들이닥쳐서 마루에 칼을 꽂고 부모님을 독촉하고 협박하는 모습을 훔쳐봐야 했다. 그때 가난이란 게 무엇인지 처음 실감하게 되었으며, 이를 극복해 보고자 공부를 시작하였다. 1976년 2월 서귀포 중문초등학교, 1979년 2월 중문중학교를 졸업한 뒤 고등학교는 제주 시내에 있는 제주제일고등학교(25회)에 진학하게 돼서 긴 거리를 통학해야 했다.
파일:Won hee-ryong picture 2.jpg

제주제일고등학교 재학 시절 1등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더불어 전국적으로 치른 12차례의 시험에서 모두 수석을 차지하며 기대를 모으던 중 1982학년도 제1회 대학입학 학력고사까지 수석을 차지한 것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었다.[3] 더욱 대단한 것은 그가 살던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동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낙후된 곳이었단 점이다. 대도시의 내로라하는 명문가의 학생들이 우수한 인프라 속에서 공부하는 상황에서 원희룡은 과외 한번 받아보지 않고 스스로 노력해서 우수한 결과를 얻었다.[4]당시 인터뷰 영상 전국 수석의 단골소감 유행어가 된 "학교 수업에 충실하고, 교과서 중심으로 공부했습니다"라는 말을 최초로 발언한[5] 원조 공부의 신이자 제주도가 낳은 천재라고 불린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82학번)에 수석으로 입학하면서 "장차 대한민국을 위해 막스 베버와 같은 법사회학자가 되고 싶다" 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학력고사 전국 수석까지 가히 개천에서 용났다 라고 할 수 있다.
파일:Won hee-ryong picture 3.jpg

하지만 1982년 대학진학 이후 신군부 독재의 폭압적 정치현실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깨닫게 되었다. 대학 1학년 때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이 중심이 된 지하서클 '사회복지연구회'에 가입해 체계적으로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 사회의식에 더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러다 서울대학교 구내에서 전경들의 여학생 추행사건이 일어나자 이에 분노하여 항의시위에 참가하게 되었고, 호주머니에서 시위 관련 유인물이 발견되어 관악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며칠 구금되었다가 훈방 조치가 되긴 했지만 학교로부터 유기정학을 받게 된다. 당시 서울대학교 수석 입학생의 유기정학 조치는 대학가에서도 매우 충격적인 소식이었다고 한다.[6] 2학년 때는 공법학과로 전공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8년간 본격적인 운동권의 길을 가게 되는데, 1984년에는 대학 동기 4명과 함께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오거리에서 노학연대 데모를 위한 유인물을 배포하다가 경찰에 붙잡혀 남부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구속위기를 맞기도 하였으며, 당국의 주목 대상이 되어 몇 차례 경찰 수배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7] 그 무렵 야학과 노동운동에도 뛰어들었는데, 구로공단의 한 교회에서 여성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했으며, 인천의 금속공장 등지에서 노동자로 위장취업을 하여 하루 일당 2,900원을 받으며 삶을 살아갔다. #

"주체사상이 아닌, 노동자들 입장에서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하며 살겠다"고 결심하고 야학과 노동운동에 투신했지만, 1989년 동유럽 사회주의의 몰락을 보고 사상적으로 전환을 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8] #, #

제적과 복학을 반복하며 졸업할 시기에 이르자 사회인으로 일해보기 위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사법시험을 치르게 되었는데, 1990년 말에 시작해 2년밖에 안 되는 준비기간 동안 사법시험을 수석으로 패스했다.[9] 그리고 사법연수원(24기)에서 최상위권인 5등의 성적으로 수료했다.[10] #
파일:동아일보19921024 원희룡.png

군 복무는 면제를 받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잠시 논란이 되었으나, 자신의 발가락을 인증하며 해명했다. 5살 무렵 부모님이 시장에 내다 팔 물건을 실던 리어카에 올라 타다가 리어카 바퀴에 발가락이 끼어 들어가면서 오른발 2번째 발가락이 거의 절단되었다. 그리고 잘라진 발가락을 봉합하는 과정에서 괴이한 모양이 되었다고 한다. 집안에서는 아들이 다치자 황급히 동네 시골의원으로 옮겨서 치료를 받게 했지만, 당시 제주도 중문 지역의 낙후된 의료시설로는 제대로 된 진료가 어려워서 결국 기형으로 남게 되었다.#, #, # 이 때문에 1985년 9월 3일 5급 전시근로역 판정을 받았다.

과거 학생운동, 민주화운동 경력이 있었지만, 1995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로 임관하여 재개발조합사기사건, 딱지어음사건, 다단계 피라미드 범죄 등 주로 경제사범 소탕에 열중하였으며 부산지검 강력부에 있을 때는 무술합계만 도합 40단이 넘는 검찰 수사관 18명을 데리고 지역 내 조직폭력 및 마약사범과 매일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사투를 벌여야 했다. 또한 아가동산 사건의 수사팀이기도 했다.

그러다 1998년 8월 검사직을 그만두고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이후 소프트웨어재산권보호위원회 고문변호사, 전국 PC방 연합회 고문변호사, KBS 방송자문 변호사 등 당시까지만 해도 미개척 분야였던 지식재산권과 IT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였으며, 사이버 무료 법률사무소인 '오세오 월드'를 운영하면서 국내 인터넷 법률상담 분야의 초석을 열었다. 한편 이 시기에 사법시험용 헌법 수험서도 집필하여 나름대로 인기를 얻기도 했다.

그리고 1999년 당시 젊은 피 수혈에 열을 올리던 한나라당과 민주당 사이에서 "합리적이고 개혁적인 보수를 이루겠다"고 천명하며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보수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가게 되었다.

3. 정계 입문 ~ 18대 국회의원까지

사법시험 합격 이후 검사변호사로 지내오다가 한나라당의 당내 혁신 차원에서 이회창 총재의 이른바 '젊은 피 수혈'로 1999년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정계 활동을 시작하였다.[11]

파일:한나라당 시절1.jpg

참고로 왼쪽에서 2번째는 김부겸

이듬해인 2000년에는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양천구 갑 지역구에 공천되어 새천년민주당 박범진 후보를 꺾고 당선에 성공, 젊은 피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게 개혁적이고 소신있는 언행들로 유명해졌는데, 미래연대[12]의 주축 멤버로서 보수 일색이던 당 내부에 이때부터 젊은 개혁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하였다.

파일:남원정 3.jpg

이후 남경필, 정병국과 함께 소위 '남원정'으로 불리며 한나라당의 개혁을 주도하는 소장개혁파 운동을 이끌었고, 당 지도부와 부딪히면서 정치이력을 이어왔다.[13]

탄핵 역풍 이후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생존한 몇 안 되는 서울권 야당 의원이었을 정도로 당 지도부의 결정에 동요하지 않았고 잘못된 방식을 지속적으로 문제 삼았다. 이 과정에서 당 안팎의 거센 비난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양천구 목동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역구 관리에 소홀히 하지 않고 민심을 살피며 기반을 다져나갔다.

파일: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10.jpg

2004년 17대 총선 직후에 치러진 한나라당 최고위원 경선에서는 박근혜 대표에 이어 2위로 당 최연소 최고위원에 선출되며 당 지도부에 입성하였고,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경선에서는 이명박, 박근혜에 이어 3위를 차지하며 대통령 경선을 완주하게 된다. 이때 대통령 경선에서는 떨어졌지만 페이스메이커로서 보수층의 격려와 함께 40대 대권주자로서 신선한 입지를 구축하게 된다.

이후 18대 총선에서 공천을 받아 원 지역구인 양천구 갑에서 국회의원 내리 3선에 성공하게 되고, 2009년 한나라당 쇄신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당내 쇄신 바람을 주도하였다. #

파일:서울시장 경선 출마 4.jpg

2010년 3월에는 출향 28년, 정치인생 10년을 내걸고 "6.2 지방선거서울특별시장 후보로 출마하겠다"고 선언하였는데, "디자인에 올인하는 겉치레 행정이 아닌 일자리, 교육, 집 문제 해결에 주력하는 행정 하겠다"며 당내 경선 경쟁자였던 오세훈 서울특별시장을 정면 비판하였고. 당시 지방선거 최대 이슈로 부각되던 '초.중교 무상급식'에 대해 야당의 전면 실시 주장과 비슷한 '친환경 의무급식'을 주장하여 오세훈 시장과 견해를 달리 하기도 하였다. 기사1, 기사2

하지만 오세훈 후보에 맞서기 위한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경선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나경원 의원한테 근소한 차이로 패하며 인지도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이후 2010년 7월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위원장[14]을 거쳐 한나라당 사무총장공천심사위원장, 최고위원을 두루 역임하며 대중적 정치 행보를 걸어왔다.

2011년에는 한국 정당정치의 비정상적 공천시스템 개혁과 선진 정치를 위한 선거구 개편 문제를 거론하며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였다. "친서민 정책의 확대"를 주장하면서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는 등 나름 배수의 진을 치고 당 대표에 도전했지만 4위로 낙선하게 되었다.[15] 당시 당 대표인 홍준표와 당 쇄신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었다[16]. 본인이 공언한대로 2012년 5월을 끝으로 여의도 중앙정치무대를 떠났다.

파일:한나라당 시절4.jpg

현실정치를 떠나 1년여간 정치적 휴식을 취하며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독일 아데나워 재단, 중국 베이징대학 등에서 방문학자(visiting scholar) 자격으로 수학하면서 국외 선진 정치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2013년 말에 국내로 돌아오게 된다.
2014년 2월에는 NH농협은행카드, KB국민카드, 롯데 카드 등 '금융 3사 고객정보 유출 사태'가 발생하자 사법연수원을 갓 수료한 젊고 유능한 변호사들과 함께 ‘개인정보유출 국민변호인단’을 꾸려 국내 피해자 5만여 명을 대리하여 무료 공익소송을 사회적으로 주도해 나갔다.[17] 기사

4. 민선 6·7기 제주지사

2014년 6.4 지방선거에 서울시장 출마를 계획하고 있느냐는 세간의 관심이 있었지만, 박근혜 대통령 당선 이후 새누리당 지도부로부터 '당내 중진차출론'이라는 명목으로 제주도지사 출마를 압박 받게 된다.[18]

이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자신의 출신지인 제주지사에 출마하여 새정치민주연합 신구범 후보를 꺾고 득표율 60%를 기록하며 당선되었다.[19]
파일:제주도지사 선거 19.jpg

임기 초반에 "불합리한 도의회의 예산 관행을 타파하겠다"며 제주도의회와 예산안을 두고 갈등을 겪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도의회와 화해하며 서로 소통과 협치를 강조하는 방향을 유지하고 있다.

현직 도지사 신분이지만 제주도가 중앙정치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 국회의원 시절에 비하면 주목을 많이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지역주의가 현존하는 한국 정치의 잘못된 현실상 작은 지역적 기반을 어떻게 뛰어 넘어설 것인지, 대중 정치인으로서 국민들에 어떻게 어필하고 자기 세력을 키워갈 것인지가 과제로 남는다.[20]

본인도 대권에 상당한 의욕을 보이는 중이고, 제19대 대통령 선거의 유력 대선후보로 거론되어 왔지만 비교적 어린 나이와 짧은 경력 때문에 힘들다는 평이 대다수. 하지만 젊은 나이인 만큼 2022년 대선까지 노릴 수 있는 잠룡으로 거론되고 있다.

2016년 11월 15일 새누리당 비박계의 임시 지도부인 비상시국위 12인 공동대표중에 한명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비상시국위 출범으로 분노한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로부터 지지율 합쳐서 10%도 안되는 대선주자들이 당을 먹칠한다면서 남경필, 오세훈, 김문수와 같이 대선주자에서 사퇴하라는 막말을 들었다.

2017년 1월 4일 새누리당을 탈당하고, 개혁보수신당(가칭, 후에 바른정당)에 입당하였다.

2017년 1월 31일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

2018년 2월에는 소속된 당인 바른정당국민의당과 통합을 의결한 뒤 바른미래당이 출범할 예정인데, 같은 남원정의 일원이었던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통합에 반발하여 자유한국당 복당을 선택했으며, 정병국 의원은 바른미래당에 따라가는 것을 선택했는데, 원희룡 지사는 바른미래당에 부정적인 의사를 표출하면서도 자신은 남경필 지사와는 다르다면서 자유한국당으로의 복당은 절대 없다고 선을 그었다. 같은 비주류 출신의 보수계 정치인이라 친분이 있는 정두언 전 의원에 따르면 무소속으로 제주지사 재선에 도전하는 것도 고려 중이라고 한다. 바른미래당으로 따라가느냐, 무소속으로 남느냐를 두고 고민 중이다. 일단은 바른미래당 창당에는 합류했다. 창당이라는 축제에 찬물을 끼얹을 수 없으며, 아직 심사숙고중이라는 이유로 바로 탈당을 선언하지 않은 것이라고 밝혔으며, 설 연휴때까지 잔류냐 탈당이냐를 장고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3월 중순이 되도록 결론을 못 내리고 있다. 거기에 자유한국당에서 제주지역 공천을 완료하면서 선택의 폭이 좁아졌다.

그리고 2018년 4월 10일 바른미래당을 탈당하였다. 이로써 남원정각기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2018년 4월 17일 제주도지사 재선 출마를 공식화한 이후 문재인 정부의 국정운영 지지율과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율이 고공행진하고있고 정당도움을 받지못하는 무소속으로 있음에도 민주당 문대림 후보와 여론 조사에서 오차 범위 내 1~2위를 다투면서 뛰어난 개인 경쟁력을 보여주고 있다.

2018년 5월에는 더불어민주당 입당설이 돌아 썰전에서 언급되기까지 했다. # 원희룡은 5월 16일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도민들이 명령한다면 민주당에도 입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2018년 6월 13일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여론조사상으로 접전으로 보이던 더불어민주당 문대림 후보를 11.71% 포인트 격차로 여유롭게 누르고 당선되면서 지방선거 이후 범보수 진영의 유력 대권주자로 급부상하였다. 이에 따라 향후 야권발 정계 개편과정에서 상당한 러브콜을 받게 될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다. 언제 당적을 가질 것이냐는 질문에 “자신도 모르겠으며 자신이 시기를 정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답변을 하였는데 야권 개편 전까지는 무소속을 유지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섣불리 야당 쪽으로 입당할 경우 제주도의회 의석을 거의 싹쓸이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과 마찰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정할 것으로 예측된다.[21]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요인으로는 매우 혼탁하게 진행된 민주당 당내 경선으로 인해 발생한 문대림 후보의 도덕성과 자질 논란, 원희룡의 '인물론'을 앞세운 홍보 전략 등이 꼽힌다. 자세한 내용은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광역자치단체장의 제주특별자치도 항목 참조.

6월 14일 김어준이 앞으로도 민주당에 입당할 가능성은 제로냐고 묻자 예라고 답했다

2018년 8월 20일 협치도정을 위해 행정시 시장을 친여성향을 띄는 사람들로 임명하였다. 5대 지선에 민주당 제주도지사 후보로 출마한 고희범민주당 제주도당위원장을 제주시 행정시장 내정자로 양윤경 제주4·3희생자유족회장을 서귀포 행정시장 내정자로 추천하였다. 두 후보는 행정경험이 전무하고 투기와 관련된 여러 의혹이 제기되어 힘든 청문회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청문회에서 생각 외로 무난히 적격판정을 받았다.#

원 지사는 6월 지방선거때부터 제주도의 블록체인(Blockchain) 특구지정과 제주코인을 발행, 암호화폐공개(ICO)도 추진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가 있다. 이를 8월 초에는 공식화하였고 2018년 8월 30일 제1차 시도지사 간담회때 제주특별자치도의 블록체인 특구지정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하였다. 원 지사가 구상하는대로 성공한다면 이제껏 대한민국의 규제에 걸려 블록체인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IT계열사들의 제주도행이 줄줄이 이어져 제주도민들의 일자리가 늘어나고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여나가는 광역지자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블록체인에 대한 안전성이 완전히 입증되지 않았기에 지금 당장 특구지정은 힘들 것으로 보인다는 전망이 아직까지는 우세하다. 다만 제주특별자치도가 블록체인 특구에 지정된다면 해외기업 20여곳이 본사 이전을 제주로 검토하고 국내 기업도 투자를 고민하는 등 한국판 실리콘밸리가 되어 4차 산업혁명시대의 미래먹거리 산업이 될 수도 있어 이를 신중하게 검토하여야한다. 또 블록체인기술을 통해 농축수산물의 품질관리를 하고 탄소 저감행동 마일리지제를 추진하는 등 다양한 부문에서도 이점이 될 수 있다. #

2018년 9월 27일 선거법 위반 혐의로 경찰 소환 조사를 받는다고 한다. #

현재 민주당, 한국당은 물론 다른 야당에도 입당하지 않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아 추후에 다른 무소속 정치인들과 함께 신당을 창당할 가능성이 있다.

2018년 10월 26일 제주특별자치도에 대한 국회 행안위 국정감사가 제주도청에서 실시되었다. 원 지사는 안전에 문제가 될 정도로 포화된 제주국제공항의 수요를 해결하기 위해 제2공항 건설이 필요하다고 하였고 제2공항을 추진함에 있어 최소한의 환경 훼손 만을 할 수 있도록 힘쓰고 절차적인 문제, 반대 의견까지 충분히 고려하도록 노력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국회에 계류 중인 4·3특별법 개정법률 발의에 조속한 협조를 요청하였다. 또 강정마을 공동체회복 지원사업도 국회의 관심을 당부하였다. #

2018년 11월 30일, 결국 검찰에 기소되었다. 만일 여기서 당선무효형에 해당하는 형을 선고받는다면 향후 정치인생에 적지 않은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2019년 2월 14일 선거법 위반으로 벌금형 80만원을 선고받았다. 1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이기 때문에 지사직도 그대로 유지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검찰이 항소를 포기하고 원 지사 또한 항소를 포기하면서 1심 판결이 유지되게 되었다. 원 지사는 항소를 포기하면서 도정 전념으로 반드시 보답하겠고 말하였다.

2019년 3월 30일 본인의 유튜브 채널인 원더풀TV에서 첫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본인과 관련된 여러 사건들에 대해서 기존의 방송 매체와 인터넷 언론만 갖고는 자신의 의사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제때에 전달되지 않고 있어서 유튜브 방송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사람들이 다른 목적과 의도를 갖고 왜곡해서 전달하는 경우를 많이 봐서 본인도 그동안 답답했다고. 아직 유튜브가 처음이라 서투른 티가 많이 난다.
2020년 1월 박형준 통추위원장의 제의를 받고 새로운보수당자유한국당이 통합하여 구성할 보수신당(미래통합당) 참여를 결정하였다.

3월 26일 서울 강남에 본가를 둔 20대 여성 미국 유학생이 자가격리 수칙을 위반하고 의심 증상이 있음에도 가족들과 제주도 내를 여행한 뒤 확진 판정을 받자 그들이 이용했던 리조트 및 음식점들이 무더기로 집단 휴업에 들어갔고, 도민 30여명이 자가 격리에 들어가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직접 긴급 브리핑을 열어 이들 가족으로 인한 영업손실 등의 모든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며 강경한 대응을 예고했다. 특히 이 브리핑에서 원 지사는 단단히 화가 난 듯한 강한 어조로 브리핑을 이어나갔다.

5월 말 드디어 대권 도전을 시사했다. 지사직 사퇴는 지난 대선 경선 당시 민주당 안희정, 이재명 경선 후보의 사례를 들며 경선에서 이기면 하겠다는 입장. #

9월 22일 제주지검에게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 당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1월 2일 청년 취·창업 지원기관인 제주시 연북로의 제주더큰내일센터의 교육생들과 직원들에게 피자를 돌린 것이 위법하다는 이유이다. 이에 원희룡은 SNS를 통해 정치적 해석을 달지 않겠다며 검찰도 사정이 있지 않겠냐는 반응을 보였다.

2021년 4월 21일 제주도의회와의 질의에서 제주특별자치도지사 3선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지방선거에 불출마하는만큼 차기 대선행보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5월10일 열린 회의에서 원희룡 지사는 “성평등, 여성, 가족 문제는 어느 한 부서의 문제가 아닌 모든 정책·사업이 성인지 감수성을 바탕으로 이뤄져야 한다”며 “제주도는 평화의 섬, 여성의 섬, 설문대할망의 섬으로 성평등 분야는 어느 지자체보다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2021년 7월 21일 대선 출마를 선언할 예정이었다가 제주도의 코로나 19 확산 문제로 인해 일정을 취소했다. 그리고 7월 25일 마침내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4차 대유행이 지나가면 도지사직을 사퇴하고 대선 레이스에 본격적으로 집중하겠다고 밝혔으며 원 지사가 사퇴하면 구만섭 행정부지사가 도지사 권한대행으로 다음 지방선거까지 직무를 수행하게 된다.

8월 11일 도청에서 치른 퇴임식을 끝으로 7년간의 도정 행보를 마쳤다.

4.1. 직무수행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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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기간 긍정 부정
2014년 하반기(4위)
61%
17%
2015년 상반기(8위)
55%
32%
2015년 하반기(8위)
56%
33%
2016년 상반기(8위)
53%
31%
2016년 하반기(9위)
52%
33%
2017년 상반기(13위)
50%
40%
2017년 하반기[22](12위)
46%
41%
이 자료는 한국갤럽 민선6기 시도지사 직무수행평가를 조사한 것으로 자세한 것은 한국갤럽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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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선7기 ]

2018년 8월 리얼미터 민선7기 시도지사 첫 직무수행 지지도에서 61.1%로 김영록 전남지사에 이어 2위를 기록하였다. 원희룡 제주지사, 직무수행 지지도 전국 광역단체장 중 2위

2018년 9월 리얼미터 시도지사 직무수행 지지도에서 58.7%의 지지도를 기록하며 다시 한번 2위를 차지하였다. 김영록ㆍ원희룡, 광역단체장 1ㆍ2위 유지…권영진, 톱3 진입

2018년 10월 리얼미터 시도지사 직무수행 지지도에서는 56.8%의 지지도를 기록하며 2순위가 떨어진 4위를 차지하였다. 원 지사의 선거법 위반 수사 소식이 나오고 TK권 광역단체장들의 약진으로 인해 순위가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

2018년 11월 리얼미터 시도지사 직무수행 지지도에서 55.8%의 지지도를 기록하며 1순위가 떨어진 5위를 차지하였다.

2018년 12월 리얼미터 시도지사 직무수행 지지도에서 56.5%의 지지도를 기록하며 3순위가 오른 2위를 차지하였다. 다만 여론조사 기간 후인 이번 달 초에 영리병원 문제가 불거졌으므로 다음 달 조사에서는 이 순위보다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2019년 맞이 한국갤럽 지지도 조사에서는, 50%로 긍정평가가 최대 7%정도까지 하락했으며, 7계단이나 떨어진 9위를 기록했다. #

2019년 1월 리얼미터 시도지사 직무수행 지지도에서 53.8%의 지지도를 기록하며 2위를 유지하였다. 영리병원 이슈와 제2공항 이슈 등 부정적 이슈에도 불구하고 2위를 유지하였다.

2019년 2월 리얼미터 시도지사 직무수행 지지도에서 49.7%로 4계단 내려간 6위를 기록하였다.

2019년 3월 리얼미터 시도지사 직무수행 지지도에서 50.3%로 1계단 올라간 5위를 기록하였다.

2019년 4월 리얼미터 시도지사 직무수행 지지도에서 50.5%로 1계단 올라가 최문순 강원지사와 함께 공동 4위를 기록하였다.

2019년 5월 리얼미터 시도지사 직무수행 지지도에서 50.3%로 3계단 내려간 7위를 기록하였다.

2019년 6월 리얼미터 시도지사 직무수행 지지도에서 53.5%로 4계단 올라간 3위를 기록하였다.

2019년 7월 리얼미터 시도지사 직무수행 지지도에서 ?%로 6계단 내려간 9위를 기록하였다.

2019년 8월 리얼미터 시도지사 직무수행 지지도에서 49.6%로 5계단 올라간 4위를 기록했다.

2019년 9월 리얼미터 시도지사 직무수행 지지도에서 48.7%로 1계단 내려간 5위를 기록했다.

2019년 10월 리얼미터 시도지사 직무수행 지지도에서 49.2%로 1계단 내려간 6위를 기록했다.

2019년 11월 리얼미터 시도지사 직무수행 지지도에서 53%로 2계단 올라간 4위를 기록했다.

2019년 12월 리얼미터 시도지사 직무수행 지지도에서 48%로 3계단 내려간 7위를 기록했다.

2020년 1월 리얼미터 시도지사 직무수행 지지도에서 47.8%로 2계단 내려간 9위를 기록했다.

2020년 2월 리얼미터 시도지사 직무수행 지지도에서 51.5%로 2계단 올라간 7위를 기록했다.

2020년 3월 리얼미터 시도지사 직무수행 지지도에서 53.2%7위를 기록했다.

2020년 4월 리얼미터 시도지사 직무수행 지지도에서 55.3%7위를 기록했다.

2020년 11월 리얼미터 시도지사 직무수행 지지도에서 52.7%4위를 기록했다.

2020년 하반기 한국갤럽 지지도에서는 41%에 그치며 뒤에서 2위를 기록했다.

5. 제20대 대선 출마

2021년 8월 9일, 아직 제주도지사인 상태로 제 1호 공약 교육 국가찬스 공약을 발표했다. AI 튜터를 두어서 기초학력을 진단하고 맞춤형 교육을 통해 학생들의 평균 학습능력을 높이고 AI 교육 시장을 집중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또 만18세 청년들에게 2천만원 한도의 카드를 발급하여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사용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8월 15일 조국 전 장관을 안중근에 빗댄 추미애 전 법무장관과 SNS상 설전을 했다. 

8월 16일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서 청년 자영업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원희룡은 점포를 운영하면 고정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현 시점같은 때에는 적자가 커지게 되므로 정부 차원에서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8월 17일 국가 주택찬스 공약을 발표했다. 건축물 재개발, 재건축 연한 30년을 폐지하고 재개발, 재건축을 쉽게 해서 주택 공급을 원활하게 하겠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같은 날인 17일 부동산 공약 발표 후 기자들 앞에서 지난 12일에 이준석 당대표와 통화중 윤석열 후보는 곧 후보로서의 지속성이 정리될 것이다. 라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윤석열 캠프가 반발했고 18일 예정되었던 당내 예비후보 토론회가 취소되었다. 파문이 크게 일자, 이준석 대표는 당내 예비후보들 간의 갈등 양상이 정리될 것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라고 밝히고 8월 17일 오후 11시 20분에 통화 녹취록을 공개했다.

8월 18일 오전 9시에 원희룡이 이 통화 녹취록에 대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에서 원희룡은 "허락없이 대권후보와의 사적 통화를 녹취하고 공개한 도의적 책임은 여기서 따지지 않고 국민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겠다 , 진실을 밝히는 일과 당내 갈등을 증폭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대의 사이에서 많이 고민했다. 이준석이 여의도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윤석열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원희룡의 지지율이 오르고 있다며 축하한다고 덕담을 했다. 행간에 내가 윤석열이 후보로서 정리된다고 알아들은 분위기와 맥락이 있는데 이것은 이준석의 주장처럼 후보들 간의 갈등 양상이 정리된다는 맥락이 아니다. 공개를 하려면 8월 12일 오후 2시에 이루어졌던 18분 7초간의 통화 녹취록 전부를 오늘 오후 6시까지 공개하라"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이준석은 이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18일 JTBC 썰전 라이브, KBS 더라이브 등에 출연해서 "통화 18분 중 15분정도는 당 운영에 대한 조언과 스몰토크였다. 이준석 대표는 윤석열 후보 측에서 자신을 공격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당과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해서 이야기한 조언에는 반응하지 않고 갑자기 여의도연구원 조사를 끌어 얘기를 하다니 공정경선 원칙에 위배되는 것 아닌가 , 18분 7초 녹취록을 공개하면 의혹을 국민들이 직접 판단하실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끝까지 갈 생각은 없다. 지금이라도 정신차려서 공정경선 이룩했으면 좋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8월 19일에는 만일 대통령에 당선되면 윤석열 총장을 법무부장관으로 기용하겠다고 밝혔다. # 전언도 아니고 야권의 압도적 1위 후보인 윤석열을 지칭하며 ' 나중에는 그가 무릎을 꿇고 협조를 해야 하는 위치로 올 것 '라고 발언하였다.

컷오프 전 윤석열, 홍준표, 유승민 까지 3명은 무난히 컷오프를 통과 할 것이라고 예상을 했다. 님은 건 결국 마지막 4위 자리. 4위 한자리를 두고 원희룡, 황교안, 최재형 후보가 경쟁하는 구도로 잡혔다.

컷오프 며칠 전 대장동 게이트와 관련하여 1타 강사처럼 쉽게 설명하는 것이 화제가 되면서 흐름을 탔다.

10월 8일 컷오프를 통과했다. 정식 순위가 발표된 것은 아니나 그동안의 여론조사로 미루어볼 때 그가 4위로 막차를 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어쨌든 컷오프 통과를 했으니 원희룡이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5.1. 경선 패배 이후

2021년 11월 5일 치러진 국민의힘 제20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최종 득표율 4위로 낙선했다. 4위로 낙선하였으나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와의 연대설까지 제기될만큼 끈끈한 사이를 보이며 당원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였고 인지도를 올렸다.

이후 살리는 선대위에서 정책총괄본부장이라는 차기 정권의 밑그림을 그리는 직책을 맡았기에 만약 윤석열 정부가 탄생한다면 국무총리나 주요부처 장관, 대통령비서실장 등 입각 내지 청와대 입성이 유력시 되는 상황이다.[23]

하지만 2022년 1월 3일, 점차 나락으로 치닫는 지지율로 인해 살리는 선대위 정책총괄본부장에서 강판당하였으나 2022년 1월 5일 후신 조직인 국민의힘 선거대책본부의 정책본부장에 다시 임명되었다.

2022년 3월 재보궐선거 종로구 국회의원 출마설이 돌고 있었지만 원희룡 본인은 정책본부장으로서 대선 후 입각을 염두에 두고 있는듯한 뉘앙스를 풍겼고, 이후 종로는 원희룡 못지 않게 이름이 오르내리던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전략공천 되었다. 결국, 윤석열이 당선된다면 윤석열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에 임명될 가능성이 높아다는 평도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윤석열 후보와 안철수 후보간의 단일화가 성사되면서 국무총리가 아닌 경기도지사 출마와 행정안전부장관 입각설 및 당권 도전설도 돌고 있다. 그러나 인수위직에도 참여하고 있는만큼 경기지사 출마 가능성은 적고 당권에 도전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준석 대표의 임기가 2023년 6월까지인만큼 이 대표가 지방선거 이후 직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공백기간 동안 장관 입각을 택할 가능성이 있다.

윤석열 대선후보가 당선되면서 원희룡 본부장의 체급 역시 크게 상승해 다음 대선을 노릴 수 있게 되었다.

2022년 1월 24일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 석방을 촉구하기 위한 전직 국회의원들의 성명서에 이름을 올렸다. #

2022년 3월 13일에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기획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임명 이후에도 앞에서 설명한 경기지사 출마설이 계속해서 진하게 제기되고 있었으나 유승민 전 의원이 경기지사 출마를 택하고 선거 60일 이전까지 주소를 경기도로 옮기지 않아 경기지사 출마는 무산되었다.

대신해서 행정안전부장관법무부장관, 대통령비서실장 입각설이 언론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이전에 윤석열 당선인이 행안/법무장관에 정치인 기용을 제한하겠다 의견을 제시한 것이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 분당구 갑 또는 분당구 을 보궐선거가 생겨 이재명 전 경기지사가 그 지역구에 출마한다면 이 전 지사의 국회 등원을 막기 위해 입각을 포기하고 2022년 6월 보궐선거 출마로 발길을 돌릴 수도 있다. 다만 원희룡이 경기도 지역에는 정말 아무런 연고가 없다는[24] 것이 문제.[25]

6. 윤석열 정부 초대 국토교통부 장관

2022년 4월 10일, 윤석열 당선인이 1차 내각 인선을 발표하면서 세간의 하마평과는 달리 원희룡 전 제주지사를 국토교통부장관으로 지명했다.#[26]

원 후보자는 “정부 역량을 집중해 서민과 중산층의 주거를 안정시키고 꿈을 잃은 젊은 세대의 미래에 꿈을 가질 수 있게 하겠다”며 소감을 밝혔다.# 한편 이에 대해 민주당은 원칙없는 나눠먹기 인사이며 허위사실 유포를 한 원희룡의 임명은 민주당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것[27]이라며 혹평했다. #

청문회 과정에서 사법연수생 시절 폭행 논란과 부인의 이재명 소시오패스 발언 논란, 법인카드 유용 논란, 오등봉 민간인 개발 특혜 의혹 등 거쳐야할 검증이 많아, 험난한 청문회가 예상된다.

5월 13일, 윤석열 대통령이 인사청문보고서를 채택받지 못한 권영세 통일부장관,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임명안과 함께 원희룡 국토교통부장관 임명을 강행했다.#

5월 23일, 취임 후 첫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분양가상한제를 개선하고 1세대 1주택자 종합부동산세를 감면할 것을 밝혔으며, 임대차 3법에 대해서도 그대로 갈 수 없다고 밝혔다. 둔촌주공아파트 공사중단 사태에 대해서는 "분쟁이 시끄러워져야 국토부가 나선다는 선례를 남길 수는 없다"면서도 적극적인 중재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GTX A·B·C노선은 임기 내 착공을, D·E·F 노선은 임기 내 예타 통과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 # # #

5월 24일, '청년과의 만남, 주거정책의 시작' 간담회에서 청년 주거정책에 대해 밝혔다. 이 자리에서 ① 청년·신혼부부 및 생애 최초 대상자에게 청년원가주택과 역세권 첫 집 등 50만 가구 5년 내 공급 ② 생애 최초 구매자에 대한 LTV 80%까지 완화, DSR 미래소득 확대 등 대출규제 완화 ③ 중형과 소형주택 추첨제 비율을 늘리는 등 청약제도 개편으로 청년 청약 기회 확대 ④ 청년임대주택 품질 혁신을 통해 높아진 청년층 눈높이 충족 ⑤ 정책 설계 과정에 청년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청년자문단 구성 등 청년주거 지원을 위한 5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

2022년 9월 이후로는 내각의 권영세 통일장관과 함께 당권 후보군으로도 언급되고 있다. 당내 대권경쟁자인 오세훈, 한동훈[무소속], 홍준표 등에 비해 지역기반과 인지도가 밀리고 국토교통부장관으로 총선 출마 이전에 GTX 개통 및 영남권 신공항 개항 등의 업적을 쌓기 어렵기에 차기 총선 공천권을 가져 안정적으로 당내 기반을 쌓을 수 있는 국민의힘 대표직은 구미가 땡기는 선택지일 수 있다. 다만 2023년 초에 전당대회가 열릴 가능성이 높기에 1년도 되지 않은 장관직을 내려놓고 출마하긴 부담스럽다는 점이 문제이다. 본인이 선을 그으면서 당권 후보군에서는 빠질 듯.#

11월 23일, 강남구민회관에서 열린 GTX-C 관련 간담회에 참석했는데, 이 자리에서 노선 우회를 요구하는 대치 은마아파트 주민들을 향해 "국책사업에 대해 막연한 불안을 확산시키고 선동하는 것을 국가기관으로 용납하거나 굴복할 수 없다""우리 단지 밑을 지나가지 못한다는 요구에 의해 국가사업이 변경되는 선례를 남길 수 없다"고 강력 경고장을 날렸다. 그러면서 "현재 GTX-C는 지하 60미터 이상 대심도 터널로 공사가 진행 중이며 특히 은마아파트 구간의 공법은 기존 GTX-A, 한강 터널 등 도심 한가운데를 이미 지나가며 안전성이 검증된 공법"이라며 "급격한 곡선방향으로 요구하는 은마아파트 측의 방안은 기술적, 법률적 제약이 있다"고 밝혔다. # #

11월 27일, 철도노조가 군인 휴게실에 "군인들에게 경고한다"는 협박성 경고문을 붙인 것과 관련해 무관용 처벌을 공언했다. 원 장관은 "철도시설은 노조의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이며, 군인에 대한 협박은 국민에 대한 협박"이라며, "군인 등 대체 인력에 대한 협박이나 업무방해 행위에 대해서는 1분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법률이 허용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끝까지 처벌하겠다. 관용은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

11월 24일 시작된 화물연대의 안전운임제 일몰제 폐지 요구 파업이 길어지면서 국토교통부에서 업무개시명령을 발동하고 불응하는 파업참여자들에게 강경대응 행보를 이어갔다. 지난 6월에도 파업이 있었지만 국토교통부 차관급 선에서 끝났는데 업무개시명령 발동 이후에는 교통부 장관이 직접 방송사 공식 인터뷰에 응해 정부의 입장을 발표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맹파업에 대처하는 정부의 단호한 태도에 여론조사상의 국정수행 지지도가 반등했다.

2022년 연말부터 2023년 초 개각 가능성이 대두되었고 원희룡의 당권 도전설이 나왔다. 심지어는 당권 차출설도 나왔는데 당권 차출설이 나오자 본인은 당대표에 관심이 없다며 거리를 두었다. 1월 4일 대통령이 당분간 장관들을 바꿀 계획이 없다고 직접 말해서 계속 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2023년 들어, 이른바 건축왕, 빌라왕이라 불리는 연쇄 전세 사기 사건이 터졌다. 이에 원희룡은 피해자의 피해[29]를 국가가 직접 보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원칙을 밝혔다. 저이자 대출 등 다른 방법의 간접 지원만 펴겠다는 입장이다. # #

2023년 5월 17일, 민주노총 건설노조 간부의 분신 사망과 관련해 최훈민 기자의 기사를 인용하며 "혹시나 동료의 죽음을 투쟁의 동력으로 이용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노조는 논평을 통해 "숨진 노조원과 유가족에게는 단 한마디의 사과조차 않던 원 장관이 조선일보의 왜곡·선동 보도에는 즉각적으로 반응했다"며 "인간이길 포기한 것과 다름없다"라고 지적하며 논란이 일었다. #

2023년 6월 수도권 전철 서해선 대곡-소사 구간 확장개통식에 주관부서인 국토교통부가 야당 정치인들에게 초대장을 보냈다가 취소했고 29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항의를 받자 입장을 바꿔 야당 국회의원 4명이 참석할 수 있었다. #이때 심상정 의원이 자신의 22대 총선 고양시 갑 선거구 출마설에 대해 물어봤는데 열린 답변을 하여 나중에 고양시 갑 출마 후보군에도 올라갔다. #

그러나 7월 3일 국토교통부 출입기자단 간담회에서 총선 차출설이 도는데 자신의 예상 선거구가 15군데도 넘는다며 일단 차출설을 부인했다.

2023년 11월 말 또는 12월 초에 원 장관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LH 혁신방안, 층간소음 해소, 철도 지하화, GTX 연장·신설 업무 완수 방침을 보고했다. 특히 층간소음 해소의 경우, 기준 미달일 경우 준공을 불허하는 강한 대책을 추진하겠다고 보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

12월 4일 총선 출마가 유력한 기존 장관을 교체하는 개각 과정에서 후임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로 국토부 주택토지실장을 맡았던 박상우 전 한국토지주택공사 사장이 내정되며 1년 7개월여 간의 장관 직무 수행도 끝을 바라보게 됐다.

총선 직전 국토부장관직을 내려놓는만큼 총선 출마는 확정적이며[30], 김기현 대표가 국민의힘 대표직을 내려놓게 되면서 총선을 지휘할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으로도 거론되고 있다.[31]

12월 21일 한동훈 장관이 사퇴하고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에 임명되면서 총선에서는 선대위원장을 맡을 것으로 보인다.

12월 22일 1년 7개월 간의 국토교통부장관 직에서 이임식을 가지고 퇴임하였다. 국토교통부 직원들에게 손편지를 남겼는데 우리는 영원한 가족이다라는 내용이었다.

7. 장관 퇴임 후

7.1.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2024년 1월 16일, 국민의힘 인천시당 신년인사회에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과 참여하였다. 이 자리에서 "계양구의 돌덩이를 치우겠다"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지역구인 계양구 을 출마를 시사했다.

2024년 2월, 이재명의 사무실에서 100m 떨어진 곳으로 사무실을 구해 입주를 하고 대형 현수막을 걸었는데 원희룡의 원을 동그라미, 희는 그냥 한글로 룡은 상상의 동물 으로 표시해 큰 화제를 모았다.#

2월 15일, 계양구 을 후보로 단수공천되어 이재명 대표와 맞대결하게 되었다. 선거 결과 7천여 표 차로 낙선하여 자신의 정치인생 첫 패배를 당했다.[32]

총선 이후 차기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남은 임기 내내 여소야대 국면에 처한 만큼 현 상황에 잘 대응하려면 관료 출신보다는 정무감각이 있는 정치인 출신이 필요하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33] 3선 국회의원, 장관, 도지사 등을 거치면서 얻은 정무 감각과 행정 경험 그리고 꼼꼼하고 과감한 업무 처리 능력을 바탕으로 야당의 공세에 어느 정도 대처가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꽤나 소장파 이미지를 갖고 있고, 대통령이 굉장한 신임을 하는 인물이기에 대통령에게도 어느 정도 직언이 가능하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나름대로 좋은 카드가 될 수 있어 보인다.

반면, 압도적 다수 의석을 가진 야당에게 국정 동력을 위해 필수적으로 협치를 요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간 대야 강성 발언이나 투쟁력을 보여 왔고 양평 고속도로 논란 등 다양한 논란이 있는 원희룡의 재등용은 야당에서 거부감을 가질 수 있게 할 수 있고, 되려 정국을 더 얼어붙게 만들 가능성도 있다는 단점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2024년 4월 22일, 국회부의장을 지낸 5선 의원 출신의 정진석 의원이 대통령비서실장으로 기용되며 원 전 장관이 비서실장으로 기용되지 않았다. 이대로 다른 임명직을 맡지 않는다면 국민의힘 대표 경선에 출마할 가능성이 있다.

7.2. 국민의힘/제4차 전당대회

2024년 6월 20일 총선 낙선 이후 2달간의 칩거를 끝내고 국민의힘/제4차 전당대회에 당대표 출마를 선언하였다. 다만 원 전 장관의 출마 이전 여론조사상으로는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이 다른 당권주자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지지율 차이를 보이고 있어 한 전 위원장을 상대로 원 전 장관이 얼마나 소구력이 있을지, 또 1차 투표에서 한동훈 전 위원장의 과반 득표를 막아내는 동시에 나경원 의원까지 제치고 2등으로 결선에 진출할 수 있을 지가 포인트가 될 것으로 보인다.[34]

준비 없이 급하게 출마를 결정한 탓인지 전당대회 기간이 지날수록 소위 남원정으로 불리며 소장파이자 개혁보수적 이미지로 대표되던 원희룡의 면모가 사라지고 근거 없는 네거티브나 마타도어에 의지하는 듯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지지자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고 있다. 그렇다보니 2024년 7월 16일 기준 전당대회를 딱 1주일 앞둔 시점에서도 한동훈과의 지지율 격차가 좁혀지지 않은 상태이며, 되려 더 벌어진 상황으로 보인다. 사실상 시간이 거의 없는만큼, 물리적으로 뒤집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이며, 워낙 지지율 격차가 크다 보니 1차 투표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매우 높아보인다. 급기야 나경원에 밀려 3위로 내려가는 여론조사까지 나오면서 원희룡으로서는 빨간불이 켜진 상태이다. 또한, 전당대회 기간 중 여러 네거티브 공방이 지지자들 및 후보자 본인 간에도 감정적 싸움으로까지 번지는 양상이라, 전당대회 이후 한동훈 지도부가 확정되게 되면 상당히 입지가 애매해질 것으로 보인다.

잠재적으로 대권주자급으로까지 여겨지는 원희룡으로서는 이번 전당대회가 본인의 정치 커리어에 있어 꽤 큰 타격으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친윤계의 얼굴격으로 출마를 했으나 한동훈을 저지하는 미션에 실패하게 되면 친윤계에서도 자리 잡기 어려울 것이고, 거의 갈데까지 갔다고 평가되는 한동훈과의 관계 때문에 당연히 한동훈계에는 더더욱 속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7월 23일 발표된 전당대회 투표 결과에서 한동훈 후보가 단독 과반으로 당선되면서, 본인은 낙선을 피하지 못하게 되었다. 어찌어찌해서 2위를 기록했으나 1위와는 약 7만 표 차이의 대패였다. 본인도 결과 발표 직후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결국 원희룡은 22대 총선에 이어 연달아 낙선을 기록하게 되었다. 상술한 대로 한동훈 후보의 당선 저지에 실패했고, 당대표인 한동훈과의 관계도 나쁜 상황이기 때문에 상당히 난처해졌다.[35] 적어도 전대 과정에서 합리적인 소장파로서의 면모를 꾸준히 어필했더라면 타격이 덜했겠지만 이번 전대 네거티브의 핵으로서 여론조사 순위도 나경원에 밀린 3위를 기록하게 되면서 상당히 타격을 입었다. 뿐만 아니라, 김경율이 전당대회 과정에서 상처를 받았다고 언급#하는 등 과도한 네거티브와 마타도어로 감정이 상한 당 인물이 많아서 당내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향후 정치활동도 다른 전대 출마자들에 비해 제약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원내에 있는 나경원이나 윤상현과는 달리 국회의원이 아니기 때문에 원외에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상황인데다, 국무총리나 장관 같은 국무위원 자리로 이동하는 것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우선 장관의 경우 현재 순차적으로 개각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여지가 없다.[36] 국무총리의 경우 총선 직후 한덕수 총리가 사의를 표명한 상황이기 때문에 후임으로 지명될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총리는 장관과는 달리 국회 인준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여야 간 대치가 심한 작금의 상황에서 총리 선임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매우 낮다. 또한 국토교통부 장관 시절 양평 고속도로 건으로 원내1당인 더불어민주당과 크게 충돌하고 총선 때는 아예 “돌덩이를 치우겠다” 며 이재명과 계양 을에서 맞붙었던 사람이 원희룡이기에 과반 이상의 의석을 가지고 있는 민주당에서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37] 한 때 대통령비서실장정무수석비서관 하마평에 오르내린 바 있으나, 각각 정진석홍철호가 임명되며 이마저도 막힌 상황이기에 상당히 애매해진 상황임은 분명하다.[38]

7.3. 국민의힘/제4차 전당대회 이후

2024년 9월, 용산에 방문하여 윤석열 대통령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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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족보명 원용인(元容仁).[2] 현재 부친은 제주 중문교회 장로이자 40년간 유기농 방식으로 감귤을 재배하는 농부이기도 하다. 젊었을 때 죽을 병에 걸렸다가 선교사의 진료를 받고 살아난 경험이 있다.[3] 이 당시 TV 인터뷰 장면이 뒤늦게 화제가 된 바 있다. 영상 참고로 82년도 당시 학력고사 차석이 바로 케임브리지 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장하준이다. 그 외 동년 시험을 친 유명인사들로는 조국, 나경원, 김난도, 조해진, 송기헌, 강석훈, 김영환, 이혜훈, 진중권, 이재명 등이 있다.[4] 그래서 서울대 입학 후에 동기들이 털어놓기를, 원희룡 때문에 집안 어른들로부터 스트레스를 좀 받았다고 한다. 즉슨 "저런 제주도 시골마을에서 수석이 나왔는데, 내가 너한테 못해준 게 뭐냐"면서.[5] 이와 관련, 훗날 밝히기를 "사실 인터뷰 전에 방송국에서 합격소감 쪽지를 미리 적어서 줬다. 다른 얘기도 많이 했는데, 매스컴에서는 '교과서 중심으로 공부했다'는 그 부분만 편집되어서 나가더라. 당시 과외금지 조치가 내려졌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교육당국이 이 말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6] 사실 1학년 1학기 때까지는 어려운 집안 형편에 부모님의 자갈밭을 팔아 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학업에 충실했던 '도서관파'였다고 한다. 하지만 학생운동을 하면서부터 대학 학점도 점차 저공비행을 하게 된다.[7] 이 과정에서 경찰한테 숱하게 얻어 맞기도 하였고, 당시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갖가지 고초를 겪기도 했다고 신문에 보도된 바 있다. #[8] 충격과 함께 찾아온 방황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찾고자 발 닿는 대로 떠난 50일간의 여행에서 나환자, 승려, 농민 등 민초들을 두루 만난 뒤 생각을 정리했다. 사회주의적인 모델을 우리 사회에 적용하려고만 했던 근본 전제가 틀렸고, 더이상 인간을 목적의식으로만 대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운동권의 논리로 치면 ‘전향’한 것이었지만, 그는 “내 생각의 진솔한 흐름을 따라갔다. 고통스런 시기였다.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방황을 끝내고 내면의 자유를 얻었다”라고 말했다.[9] 2년간의 잠적기간 동안 고향에서는 '원희룡이 죽었다', '한라산 백록담에서 자살했다', '지방의 신학대학에 들어갔다', '경찰한테 두들겨 맞고 폐인이 되어 돌아다닌 걸 봤다' 등 소문만 무성했다고. 하지만 수석합격으로 또 한 번 매스컴에 크게 보도되면서 그 소문도 금시에 불식된다. 그의 합격기를 보면 '겸손'이 뭔지 스스로 보여준다.[10] 저서 <사랑의 정치>에 소개된 부인 강윤형 여사의 말을 빌리자면 "연수원 다닐 때 남편이 제대로 법 공부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대학 다닐 때도 그렇게 많은 책을 읽었지만 '법' 자 들어간 책을 사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이하 생략)" 될놈될, 공부는 유전이다의 표본.[11] 당시 새정치국민회의(김대중)에서는 제주 지역 공천을 제시하면서 입당을 권유하였고, 한나라당(이회창)에서는 서울 지역 공천을 보장하였다고 한다. 친분이 있던 김민석은 국민회의 오라고, 김부겸은 한나라당 오라고 꼬셔서 고민이 많았다고. 김부겸이 "한나라당도 힘들지만 맡아서 5년 내지 10년을 하면 답이 나올 것이다"고 해서 오랜 고민 끝에 한나라당을 선택했다고 한다. 정작 김부겸은 5년 후에 민주당으로 갔...[12] 미래를 위한 청년연대. 한나라당 내 소장파 정치인들의 모임이었다.[13] 이들은 '남.원.정'으로 불리며 당이 고비를 겪을 때마다 개혁파 역할을 자처하며 기득권에 안주하는 주류에 경고장을 날리는 등 스타 정치인이자 한나라당 소장파의 원조격이 되었지만, 이를 정치 세력화 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지적이 있다.[14] 하지만 당 사무총장에 임명되자 1달 만에 사퇴하고 남경필이 새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15] 당시 1인 2표였었는데 원희룡이 그나마 친이계에 가까웠던지라 친이계는 원희룡을 밀고 친박계는 그나마 가까웠던 유승민을 미는 형국이었다. 그리고 중간지대에 있던 홍준표가 표를 많이 받아서 1등을 하고 정작 레임덕까지 겹치는 바람에 원희룡은 4위에 그치고 만다.[16] 홍준표 대표는 소장파 최고위원인 원희룡과 남경필에게 상당히 불쾌감을 느꼈는지, 꼴 같잖은게 한 대 패고 싶다고 발언하여 같은 날에 발언한 이대 여자애들 싫다는 발언과 묶여 구설수에 오르고 만다.[17] 2016년 6월 21일 농협카드와 신용정보회사 코리아크레딧뷰로(KCB)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1심에서 승소하여 "피해자 1만여 명에 대해 1인당 10만 원씩 10억 원 배상하라"는 법원 판결을 이끌어낸다. 원희룡 지사가 KB국민카드를 상대로 제기한 또 다른 소송은 현재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기사1, 기사2[18] 원희룡의 도지사 출마 가능성이 서서히 거론되기 시작하자 당시 무소속이었던 우근민 지사는 지지자 1만 7천명을 이끌고 새누리당에 동반 입당한다. 이는 대의원 20%+당원 30%+일반국민 30%+여론조사 20%의 비율로 치르도록 되어 있는 새누리당 경선룰 상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시도였지만, 새누리당 지도부 또한 당내 개혁파 인사였던 원희룡의 원내 진입에 난색을 표하던 입장이라 당헌·당규상 예외규정을 적용하여 여론조사 100% 방식으로 경선룰을 확정짓게 되고. 결국 우근민 지사는 2014년 6.4 지방선거에 불출마하게 된다.[19] 이 날은 23년간 서로 도지사를 번갈아 하며 지역정가를 주름잡았던 우근민, 신구범, 김태환 '제주판 3김 시대'(42년생 라인이다.)에 종말을 선언하는 날이 되었다.[20] 한편, 이런 해묵은 지역구도를 청산하고, 한국정치의 새로운 미래를 만들고자 15년 전부터 남경필, 김부겸, 이광재, 안희정 등의 여.야 인사들과 교류하며 협치와 연정, 개헌, 공천 시스템과 선거구 개편을 비롯한 문제에 대하여 비젼을 공유해왔고. 오랫동안 상호토론하며 함께 스터디해오기도 했다. #[21] 이후 문대림은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도지사 선거에서 오영훈 당시 제주시 을 국회의원에게 밀려 탈락해 재기를 못하다가 2024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주시 갑 지역에 출마해 당선되어 2012년 도의원 사직 후 무려 12년만에 재기에 성공하였다.[22] 14개 광역단체장 시도지사만 조사, 박근혜 대통령 최순실 게이트 보도, 새누리당 탈당 바른정당 창당[23] 국무총리직은 윤석열 후보와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에 따라 유동적이다.[24] 그가 태어나서 여태껏 길게 살았던 곳은 고향 제주와 서울 뿐이다. 검사 시절 경기도 여주에서 근무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근무 기간이 1년 남짓이고 뒤이어 부산지방검찰청으로 발령을 받아 10개월 정도 근무한 뒤 검찰을 떠났다. 이 시기를 제외하고는 제주에서 태어나 고교까지 졸업했고 2014년 제주특별자치도지사에 당선되면서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서울에서는 서울대 입학을 계기로 올라온 것이 처음이며 검찰을 떠난 후 양천구에서 줄곧 살면서 3번이나 국회의원에 당선됐다.[25] 이후 윤석열 정부의 첫 국토교통부장관으로 내정되면서 낙마하지 않는 이상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은 0이 되었다.[26] 법무부장관행정안전부장관에 정치인 출신을 지양하겠다는 당선인의 의지와 '대장동 1타 강사'로 활동하며 이재명 저격수로 활동한 것이 영향을 미친듯 하다.[27] 제20대 대선 과정에서 이재명 전 경기도지사의 대장동 개발 사업 논란 저격수로 나섰던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무소속] 현재 무소속이나 여권 유력 대권주자로 언론에서 언급되고 있다.[29]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것[30] 지역구는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경쟁했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지역구인 인천 계양구 을심상정 정의당 의원의 지역구인 고양시 갑 등이 거론되는 중이다.[31] 다만 한동훈 법무부장관 또한 비대위원장으로 유력하게 거론되고있다.[32] 원희룡이 그동안 선거에서 전승을 기록한 건 상대 후보의 체급이나 경쟁력이 그리 높지 않던 운도 많이 따라준 결과다. 하지만 김성근의 저주마냥 원희룡이 그 지역을 떠난 이후 소속 정당의 성적이 좋지 않게 되던 와중에(양천구 갑 황희 3선, 제주도 민주당 텃밭화) 사실상 처음으로 이재명이라는 대권주자급 제대로 된 적수가 나타나서 원희룡의 전승 신화를 마감했다.[33] 그래서 원희룡 외에 장제원 의원, 김한길 국민통합위원장 등 비서실장 후보군으로 주로 거론되고 있는 건 정치인들이다.[34] 다만, 본래 출마할 계획이 없었다가 갑작스럽게 결정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 측근조차도 출마 여부를 몰랐다는 후문이다. 아무래도 한동훈을 저지하기 위한 후보로 나경원이 뭔가 못 미덥다고 느낀 친윤계대통령실이 급하게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모양새이다.[35] 일단 한동훈의 당선이 확정되자 밝은 표정으로 악수를 나누고 포옹하는 장면이 잡히긴 했다. 패배를 확실히 승복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36] 현재 정무장관 신설이 추진되고 있으나 이를 위해서는 정부조직법이 개정되어야 한다.[37] 이미 국토교통부 장관 청문회 때도 국회에서 청문 보고서가 “부적격”으로 채택되지 못하여 윤석열 대통령이 임명 강행을 한 바 있다.[38] 이제 가능성 있는 건 대통령 특별보좌관 정도인데, 장관급 대우를 받지만 무보수 명예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