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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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남전헌후(藍田獻侯) 王坦之 | 왕탄지 | |
시호 | 헌(獻) |
작위 | 남전현후(藍田縣侯) |
성 | 왕(王) |
명 | 탄지(坦之) |
자 | 문도(文度) |
생몰 | 330년 ~ 375년 6월 16일 |
출신 | 태원군(太原郡) 진양현(晉陽縣) |
부모 | 부친 - 왕술(王述) |
배우자 | 범개(范蓋)[1] |
자녀 | 왕개(王愷), 왕유(王愉), 왕국보(王國寶), 왕침(王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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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인물로 명사 왕술의 아들. 태원 왕씨 집안의 수장으로서 사안과 함께 환온을 견제하고 그의 야심이 실현되는 것을 막았다.[2]문인으로서는 풍채와 품격이 있어 세속의 방탕함에 물들지 않았고, 유가의 가르침보단 법가의 형명학을 훨씬 선호해 《폐장론》(廢莊論)을 저술했다. 또, 서예가로도 이름을 날려, 송태종 시기 편찬된 법첩(法帖)인 《순화각첩》(淳化閣帖)에는 왕탄지가 행서체로 사행(四行)에 대해 기술한 문집이 수록되어 있다.
2. 생애
약관의 나이로 치초와 함께 높은 명성을 얻었다. 당시 동진의 사람들은"성덕의 절륜함은 치가빈(嘉賓, 치초의 아명)과 왕문도가 강동에서 독보적이다."
라 평했다. 이후 상서복야 강반이 그를 상서령으로 삼으려 하자, 왕탄지가 반발했다."동진이 건국된 이래로 2등의 인재들만 상서령을 맡았는데, 어찌 제가 이 직책을 맡아야 합니까!"
강반은 그의 말을 듣고 상서령 임명을 취소하였다. 무군장군 회계왕 사마욱은 왕탄지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그를 징소해 자신의 속관으로 삼았다. 왕탄지는 무군장군부 소속으로 참군, 종사중랑, 사마를 역임했고 산기상시가 더해졌다.흥녕 원년(363년) 5월, 대사마에 오른 환온이 왕탄지를 불러 자신의 장사(長史)로 삼았다. 그리고 5년 뒤에 아버지 왕술이 사망하자, 부친상을 이유로 사직했다.
함안 원년(371년), 복결하여 아버지의 남전현후(藍田縣侯) 작위를 습작하고, 시중에 임명되었다. 이후 환온이 사마혁을 폐위시키고 간문제 사마욱을 옹립할 때 좌위장군을 겸했다가, 오래지 않아 본주대중정으로 옮겨졌다.
함안 2년(371년) 7월, 간문제 사마욱은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당시 11세에 불과한 아들 사마요를 황태자로 세웠다. 그리고 환온에게 '주공 단이 거섭(居攝)한 고사에 의거해 어린 황제를 보필할 것이나, 만약 황제가 보필 받을만한 그릇조차 되지 못한다면 그대가 황위를 취하라.'는 유조를 내렸다. 왕탄지는 그 조서를 손에 들고 입조하여 간문제 면전에서 그것을 찢어버리니, 간문제가 물었다.
"사마씨는 우연히 횡재하여 천하를 얻은 것일 뿐인데, 경은 어찌하여 이 결정을 싫어하는가!"
왕탄지가 답했다.간문제는 이내 탄복하며 조서를 고쳐, 황위를 취하라는 문구를 삭제하고, 주공 단이 아닌 제갈량과 왕도의 고사에 의거하게 했다. 그 날, 간문제가 붕어하고 효무제 사마요가 즉위했지만, 마땅히 황위를 찬탈한 명분이 없었던 환온은 어쩔 수 없이 야망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로써 간문제를 겁박해 선양받으려던 환온의 계획은 어긋나게 되었다.영강 원년(373년) 2월, 환온이 노송의 황궁 난입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입조하러 오면서 조서를 내려, 이부상서 사안과 시중 왕탄지로 하여금 자신을 마중 나오라 명했다. 환온이 드디어 반란 일으킬 것이라 생각한 도성 건강(建康)의 사람들은 불안에 떨었고, 급기야 '환온이 왕탄지와 사안을 죽이고 황실을 찬탈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왕탄지도 겁을 먹어, 환온을 신정에서 영접할 때 땀으로 옷을 적시고 홀(笏)을 거꾸로 잡았을 정도로 불안에 떨었으나, 모두의 예상과 달리 환온은 사건만 간단히 처리하고, 한 달 가량 도성에 머물다가 다시 고숙(姑孰)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5개월 뒤, 보정대신 환온이 사망하자, 조정은 환충의 건의에 따라 저태후를 모셔와 섭정을 부탁했다. 이때 왕탄지는 중서령, 단양윤을 역임하면서 사안, 왕표지 등의 대신들과 함께 어린 황제를 보좌했다.
영강 2년(374년) 2월, 조정은 사망한 서연2주자사 조이를 대신해, 왕탄지를 도독서연청3주제군사(都督徐兗青三州諸軍事), 북중랑장, 서연2주자사로 삼고 광릉(廣陵)을 진수하게 했다. 왕탄지는 도성을 떠나기 전, 효무제에게 상표하여 섭정 중인 저태후의 예로써 잘 섬기고, 사안, 환충과 같은 충신들을 신임할 것을 당부했다.
영강 3년(375년) 5월 2일[3],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니, 조야로 그의 죽음을 비통해 하였다. 왕탄지는 임종하기 전까지도 사안, 환충과 서신을 주고 받았는데, 모두 나라를 걱정하는 내용 뿐이었고, 사적인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사후 안북장군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헌(獻).
3. 기타
- 사안은 본래 음악을 좋아하여, 친척이 상 중임에도 기악(妓樂)을 감상하면서 풍류를 즐겼다. 왕탄지는 이런 사안의 행동이 동진의 사대부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 여겼다. 그는 사안에게 거듭하여 이에 대해 간했고, 도성을 떠나 광릉에서 지낼 때도 사안과 네 차례나 서신을 주고 받으며 자제하라 당부했으나, 사안은 끝내 따르지 않았다.
- 《세설신어》에 따르면 명승 지도림(支道林)과는 의견 차이로 사이가 나빴으나, 승려 축법잠(竺法潜)[4]과는 사이가 좋아, 그와 더불어 세상 일에 관해 깊이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1] 동진의 명문가 중 하나인 순양 범씨 범녕의 여동생.[2] 다만, 정치적으로 환온과 대립한 것과는 별개로, 사적인 영역에서는 환씨 집안과 끈끈한 친분을 유지했다고 한다. 애초에 환온의 2녀 환백자(桓伯子)가 왕탄지의 차남 왕유와 혼인하여, 환온과 왕탄지는 서로 사돈 관계였다.[3] 양력으로 계산할 시, 6월 16일.[4] 축법도(竺道道), 축법심(竺法深)이라고도 불리운다. 본적은 낭야 왕씨로, 동진의 승상을 지낸 왕도의 아우였지만 권력과 재물에 뜻을 두지 않고 18세에 출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