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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02:25:25

오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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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사건 발생4. 범행의 동기5. 사죄6. 재판7. 결과8. 매체에서9.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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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ruby(大津事件, ruby=おおつじけん)] / Инцидент в Оцу

파일:오쓰사건1.jpg

1891년 5월 11일 일본 제국을 방문 중이던 러시아 제국 황태자 니콜라이 로마노프(후일 니콜라이 2세)를 시가현 시가군 오쓰정(滋賀県 滋賀郡 大津町, 현 오쓰시)의 경비를 맡고 있던 경찰관 쓰다 산조(津田三蔵, 1855~1891)가 칼을 휘두르면서 습격하여 중상을 입힌 암살 미수 사건. 사건 발발 당시에는 고난 사건(湖南事件)이라고도 알려졌다.

2. 배경

1891년 5월 니콜라이 황태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기공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러시아 제국 해군 함대를 이끌고 바닷길을 통해서 철도 종점으로 계획돼 있었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던 길에 일본에 들렸다. 나가사키, 가고시마를 들른 다음 고베에 상륙했고 사건 당시에는 교토로 향하는 길이었는데 요코하마, 도쿄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당시 근대화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서구 열강에 비해서 국력이 약했던 일본은 열강인 러시아황태자를 극진한 예우로 환영했다. 황족인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有栖川宮威仁親王)이 방일 접대원을 맡아 황태자를 환대하였다. 니콜라이 황태자의 일정은 비교적 느긋하게 일본 관광을 즐기는 것이었는데 교토에서는 시기가 아닌데도 황태자 환영 행사로서 교토의 명물인 큰 대(大)자 태우기를 벌였다.

5월 11일 오후 비와호를 구경하는 당일치기 관광을 마친 니콜라이 황태자는 일본에 와 있던 그리스의 왕자 요르요스(요르요스 1세차남이자 니콜라이 황태자의 외사촌)[1], 다케히토 친왕과 함께 인력거를 타고 오츠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3. 사건 발생

파일:오쓰 사건.jpg
파일:CiIMrjoUkAASeBJ.jpg
파일:4848b17de37096a5e91b071d832abad1.jpg

통과하는 길에서 경비를 담당하고 있던 경찰관 쓰다 산조가 갑자기 경찰도를 뽑아들고 니콜라이에게 중상을 입혔다. 니콜라이 황태자는 인력거에서 뛰어내려 골목으로 숨었는데 쓰다는 니콜라이를 쫓아가 칼로 베려고 했다. 요르요스 왕자는 대나무 지팡이를 휘둘러 그의 등을 때리고 니콜라이의 인력거를 끌던 인력거꾼 무카이하타 지사부로(向畑治三郞, 1854~1928)는 쓰다의 다리를 걸어 넘어트렸다. 요르요스 왕자의 인력거꾼 기타가이치 이치타로(北賀市市太郞, 1859~1914)는 쓰다가 떨어뜨린 경찰도를 주워 휘둘러 그의 목에 상처를 입혔다.
파일:츠다 산조.jpg
쓰다 산조

결국 쓰다는 경비 중이던 다른 순사에게 붙잡혔다. 니콜라이 황태자는 오른쪽 머리에 9cm 정도 상처를 입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다케히토 친왕은 현장에 있었지만 구경꾼들이 몰려들어서 가까이 갈 수 없었고 쓰다가 잡힌 뒤에야 현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장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의 결정적인 원인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의 암살이었듯 외국 황태자가 죽을 뻔한 이 사건은 러시아가 일본에게 선전포고하는 명분으로 삼아도 할 말이 없는 대사건이었다. 다케히토 친왕은 이 사건을 자기 수준에서 해결할 수 없는 중대한 외교 문제라고 파악하여 메이지 덴노에게 전보를 보내 덴노가 직접 교토로 와서 러시아 측에 성의를 보여줄 것을 부탁했다.

메이지 덴노는 이 사건이 중대한 문제라고 판단해 사건 다음날인 5월 12일 아침에 기차를 타고 저녁에 교토에 도착하자마자 니콜라이 황태자를 바로 문병하고자 했으나 니콜라이 황태자 측이 13일에 방문해 달라고 요청하여 일단 교토고쇼에 묵고 13일 니콜라이 황태자가 머물던 도키와 호텔에서 황태자를 문병했다. 메이지 덴노는 친왕 3명과 함께 니콜라이를 고베까지 배웅했으며 고베 항구에 정박하고 있던 러시아 군함 파먀티 아조노바급 장갑순양함까지 문병을 갔다.[2]

피습 소식을 들은 러시아 제국 정부는 니콜라이 황태자의 일본 일정을 중단할 것을 명령했고 이에 니콜라이 황태자는 일정을 중지하여 도쿄 방문은 하지 않고 함대를 이끌고 5월 20일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갔다.

4. 범행의 동기

일본은 사건 이전부터 러시아와 영토 문제로 대립하고 있었으며 시베리아 횡단철도도 러시아의 극동 진출을 상징하는 것이라 반발이 있었다. 암살 미수범 쓰다는 이런 분위기 때문에 이전부터 러시아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이 무렵에 세이난 전쟁에서 전사사이고 다카모리가 러시아에 망명해 있다가 돌아온다는 헛소문이 돌았는데[3] 세이난 전쟁에 군인으로 참전해 훈장을 수여받은 공로로 경찰관에 특채되었던 쓰다는 사이고가 돌아오면 자신의 훈장이 박탈되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사실 쓰다는 이전에 동료 경찰관에게 폭력을 휘둘러 권고사직 처분을 받았다가 다른 지역에서 재임용된 전적이 있으며 정신병 전력도 있었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되는 편집증적인 망상과 근거 없는 헛소문, 개인적 감정 때문에 국빈을 공격한 것으로 정신병 혹은 전쟁으로 인한 PTSD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심각한 망상장애를 앓고 있었다.

오늘날에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복무 부적격 인원으로 분류되거나 정신병원에 갔을 것이고 국빈을 살해하려 든 죄가 중한 가중 사유로 작용하지만 정신병자이므로 자기책임능력이 미약하다고 봐서 치료감호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정신병에 대한 이해가 전세계적으로 부족했던 데다 망상장애는 지금도 감형받기 쉽지 않은데[4] 당시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5. 사죄

외교적인 결례와 문제를 범한 일본은 국가적인 위기를 맞았다. 황태자가 다치는 선에서 끝났다고 해도 당시 국제 정세에서 이러한 사건은 나중에 터지는 사라예보 사건의 예처럼 선전포고의 명분이 될 수 있었다. 미친 경찰관 한 명 때문에 러일전쟁이 훨씬 일찍 터질지도 모르게 될 판이었다. 아직 근대화가 덜 된 1890년대의 일본은 국력에 있어 러시아와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던 데다[5] 갑작스럽게 터진 일이라 당시 러시아와 싸울 준비가 전혀 되지도 않았다.[6] 일본에선 분노한 러시아가 자신들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전국적으로 공러증에 빠졌다.

일본인들은 민·관을 가리지 않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필사적으로 러시아에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다. 외무대신이었던 아오키 슈조와 내무대신이었던 사이고 주도가 사임했고 학교는 휴교하고 신사, , 교회에서는 황태자의 회복을 비는 기도를 했다. 황태자 앞으로 보내진 문안 전보는 1만통을 넘었고 야마가타현 모가미군(最上郡) 가네야마촌(金山村, 현재의 가네야마정)에서는 '쓰다'와 '산조'라는 이름을 금지하기로 결의했다.

파일:220px-Hatakeyama_Yūko.jpg

5월 20일에는 하타케야마 유코(畠山勇子, 1865~1891)라는 26세 여성이 교토시청에 사과문을 던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니콜라이 황태자에게 사죄를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녀는 남의 집 하녀나 바느질일을 하며 살던 서민으로, 정치적 배후가 있던것도 아니고 혼자 저지른 일이었다. 그녀의 주변인들의 평에 따르면 평소 정치에 관심이 많은 별난 사람으로 여겨졌으며 정치 이야기로 혼자 광분할때가 많아 오쓰 사건때도 그녀가 국가 비상사태라며 절망하자 ‘쟤 또 시작이다’라며 신경도 안 썼다고 한다. 당시 일본 언론에서는 이 여성을 열녀라며 추켜세우며 매우 찬양했다.

6. 재판

이 사건의 재판은 또 다른 논쟁거리가 되었다. 당시 일본 형법은 '덴노나 황족에게 살해를 목적으로 고의로 위해를 입힌 범죄'를 대역죄로 규정하고 있었으며 황족이 살해되지 않더라도 대역죄가 적용되었고 살해 행위의 고의성이 입증되면 작량감경이 없는 한 무조건 사형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대역죄는 일본 황족에만 적용되고 외국 황족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즉, 일반 살인죄를 적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법률에서는 일반 살인범에 대해서 피해자가 사망해야만 사형이고 그렇지 않으면 무기징역 이하로 선고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니콜라이 황태자가 사망했다면 사형이 가능하지만 부상만 입었으므로 사형 선고는 절대로 불가능했다.

일본 정부는 러시아에 최대한 잘 보이기 위해 쓰다를 사형에 처하고 싶어했다. 대부분의 내각 각료들은 대체로 쓰다에 사형이 적용될 수 있도록 대역죄를 유추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대역죄가 적용되지 않으므로 사형에 처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각료는 소수였다. 다만 대역죄 적용이 안 될 수도 있다는 건 일본 정부도 인지했기 때문에 대역죄 외에 살인미수죄도 같이 적용하였고 바로 최고법원인 대심원(大審院)[7]에 기소했다. 당시 일본 제국도 3심 체계를 갖추고 있었지만 대역죄는 예외적으로 대심원에 바로 기소해야 하며 사안의 고의성만 인정되면 1심 판결로 끝났다.

하지만 대심원 원장 고지마 고레카타(兒島惟謙, 1837 ~ 1908)는 쓰다에 대한 대역죄 적용, 즉 사형에 처하라는 일본 정부의 압력에 반발하였다. 고지마는 근대적이고 독립된 사법체계를 열망했고 만약 서구 열강이 일본의 사법 제도의 미숙함을 트집잡아 불평등조약을 계속 강요하고 경멸한다면 서양 열강의 경멸을 영원히 떨쳐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고지마의 고집으로 사법부는 외압에 굴하지 않는 판결을 내렸다. 쓰다는 사건 발생 16일 뒤인 5월 27일 대역죄 무죄를 판결받았다. 다만 살인미수(모살미수죄)가 인정되었고 죄질이 극도로 나쁘다고 하여 법정최고형인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파일:a0010670_54fc59b638b7d.jpg

현재까지도 보관되고 있는 사건 관련 증거물

쓰다는 당연히 파면되었고 훈장도 박탈당했으며 홋카이도에 있는 아바시리 형무소에 갇힌 후 9월 29일 급성 폐렴으로 옥사했다. 감옥에 간 지 얼마 안 되어 죽어서 일본 정부가 의도적으로 가혹하게 대하여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음모론도 존재하지만 증거는 없다. 사람이 살기 힘든 아바시리 형무소로 보냈다는 점에서 의도적으로 죽으라고 보냈을 가능성은 있으나 쓰다는 형무소에 오자마자 폐렴이 발병해서 노역에도 동원되지 않았고[8] 당시 형무소의 기록에 따르면 오히려 병자라고 우유갈분탕, 과자, , 고구마 등이 제공되는 등 꽤 잘 먹었기 때문에(?) 형무소에서 의도적으로 가혹하게 대했을 가능성은 낮다.

7. 결과

러시아 당국이 오쓰 사건과 이후의 일본의 움직임에 대해 내부적으로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당시 주일 러시아 공사였던 드미트리 셰비치(Дмитрий Егорович Шевич)는 대일 강경파로써 오쓰 사건에 노발대발해 쓰다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으며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도 쓰다의 사형을 주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셰비치는 사건 당시 일본 외무대신 아오키 슈조로부터 "쓰다에게 '황실죄'를 적용하겠다"는 밀약을 받아낸 탓에 쓰다가 살인미수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자 밀약을 공개해 일본 정부를 당황시킨 바 있다.

그렇지만 러시아는 공식적으로 쓰다에 대한 대심원의 무기징역 판결에 만족했고 따라서 일본이 우려했던 배상금 요구나 무력 보복도 일어나지 않았다. 니콜라이 2세는 일본의 신속한 사건 해결에 비교적 우호적이고 관용적인 태도로 대했으며 니콜라이 2세의 일기에서 이후에도 일본에 혐오감을 품는 일은 없었다고 확인되었다. 누가 봐도 특정 개인이 비상식적인 망상 때문에 저지른 범죄였을 뿐 일본 정부와 연관성이 전혀 없음도 고려했을 것이다. 셰비치 공사의 항의도 아오키의 후임으로 외무대신에 취임한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무마하였다.

니콜라이는 크게 다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을 떠난 후 원래 예정된 일정을 계속 수행해서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시베리아 횡단철도 기공식에 참석했고 당시 방문 기념으로 세운 니콜라이 2세 개선문이 지금도 블라디보스토크의 관광지로 남아 있다.

파일:a0010670_54fc601f02c8e.jpg

쓰다를 제압한 인력거꾼 두 명이 러시아 군함에서 훈장을 수여받은 후 찍은 사진. 오른쪽에 이들을 호위하는 러시아 수병이 보인다. 여담으로 두 명이 국빈으로 초청받게 되자 일본 외무성은 급히 두 사람에게 입힐 정장을 주문했으나 원래 그대로의 모습이 보고 싶다는 니콜라이 황태자의 요청을 따라 이런 차림으로 왔다고 한다.

이때 쓰다를 제압하는 데 도움을 줬던 인력거꾼 무카이하타와 기타가이치는 정박 중이던 러시아 군함 파먀티 아조노바급 장갑순양함에 초대되었고 선상 파티에서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과 상금을 받고 큰 사건을 막은 영웅으로 대우받았지만 13년 뒤 러일전쟁이 벌어지자 상황이 뒤집혀서 '러시아를 도운 비국민'으로 취급받아 주변에서 집단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이중 전과가 있었던 무카이하타는 도박매춘, 강간 혐의로 체포되어 훈장을 박탈당했고 설상가상으로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 정부에서 연금 형식으로 지급하던 보상금이 없어지면서 가난에 시달렸다고 한다. 기타가이치는 보상금으로 고향인 이시카와현의 농토를 사서 지주가 되어 무카이하타보다는 좀 형편이 나았는데 금전적으로 여유로워지자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하여 지방의원이 되었고 러일전쟁 당시 애국심을 증명하기 위해 일본군에 자원입대를 신청했으나 반려당했다. 이렇게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둘 다 큰 사고 없이 여생을 무사히 마쳤다.

한편 일본에서 고지마와 그의 사법권 독립에 관한 신념은 높은 평가를 받는데 오쓰 사건을 통해 일본이 전근대적인 체계에서 벗어나 근대적이고 정부로부터 독립된 사법체계를 가지게 되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더불어 고지마가 바랐던 대로 오쓰 사건으로 일본은 서구 열강으로부터 근대적 사법 체계를 갖췄음을 인정받아 치외법권을 철폐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9] 그러나 당시 고지마는 오쓰 사건의 판사가 아니었음에도 판결에 영향력을 행사해서 결과적으로 판사의 독립성을 무시하였다는 비판과[10] 대역죄 적용이 아닌 살인미수에 대해서는 대심원이 아닌 1심(지방재판소)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이를 무시하고 대심원에서 살인미수죄까지 1심으로 판결해 버렸다는 비판도 있다. 또한 이를 계기로 일본 사법부는 정부와 군부에게 미움을 받아서 대심원장 고지마가 검찰의 사찰과 징계의 대상이 되는 등 후폭풍이 있었다.

8. 매체에서

기동경찰 패트레이버에서 방일한 미국 대통령을 '외압의 마왕'이라고 싫어하면서도 특차 2과가 경호 임무에서 배제되었던 일에 불만을 품던 오오타 이사오가 바빌론 프로젝트를 시찰하는 미국 대통령을 경호하는 임무를 맡던 중 대통령을 로케트탄으로 습격하려던 레이버를 발견하자마자 총을 발사하는데 하필 총을 겨눈 방향이 미국 대통령이 탑승한 차량 바로 측면이었고 이에 시노하라 아스마가 "네가 무슨 쓰다 산조야?!"라며 기겁한다.[11]

야스히코 요시카즈 화백의 하늘의 혈맥에서 니콜라이 2세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일본도의 맛이 매서웠다."는 식으로 잠깐 언급한다.

에가와 타츠야의 러일전쟁 이야기에서도 상세히 언급된다. 니콜라이 황태자와 동행했던 요르요스 1세가 묘사되지 않아서 쓰다 산조의 기습 직후 느닷없이 중절모를 쓴 남자가 쓰다를 지팡이로 후려치는 묘한 장면이 되었다. 이후 메이지 덴노가 납치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황태자의 전함을 방문하여 사과를 해서 잘 해결되었다고 묘사되었다.

웹소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 완화군 이선이 이를 이용해 니콜라이 2세의 반일 감정과 경계를 부추기며 이 사건으로 야마가타 아리토모 내각이 잠시 실각한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에서는 빙콜라이가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에게 불평등 조약을 강요했고 일본의 근대화에 황색불이 들어왔다.

굽시니스트본격 한중일 세계사 만화에는 오츠 사건을 다루면서 만약 이때 쓰다의 칼이 좀더 깊게 들어가 니콜라이 2세가 사망했다면 이후의 역사가 어떻게 변했을지 잠깐 상상하는 대목이 있는데 니콜라이 2세의 동생 유리 대공이 황태자가 되어 후일 제위에 오르지만 원 역사처럼 1899년에 병사하고 아랫동생 미하일 대공이 제위를 승계할 것으로 추정하면서 부인이 평민 출신이고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졌던 미하일이 황제가 되어 피의 일요일 사건을 회피한다면 러시아 혁명을 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추정했다.

9. 여담

파일:오쓰사건.jpg

[1]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남편 필립 공의 둘째 큰아버지이기도 하다. 요르요스 1세의 4남이자 요르요스 왕자의 둘째 남동생인 안드레아스 왕자의 아들이 필립 공.[2] 이 때 일본의 중신들은 조선대원군청나라에 납치된 전례를 들면서 덴노가 러시아에 납치되어 버릴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3] 메이지 덴노가 "사이고가 돌아온다면 메이지 10년 전쟁(세이난 전쟁) 때의 수훈자들의 서훈을 모두 박탈하고 나서 그를 맞이하겠다"고 했다는 소문까지 있었다.[4] 쓰다 같은 망상장애 사례는 오늘날에도 감형받기 쉽지 않은데 말도 안 되는 동기로 범행을 저지르긴 했지만 자기가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와 그 대가가 무엇인지는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5] 일본이 근대화를 좀 더 진행한 13년 뒤에 일어난 러일전쟁에서도 일본은 전장이 일본의 앞마당인 데다 러시아를 견제하던 영국과 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고 러시아 국내적으로도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지는 등 여러 호재가 맞물려서야 배상금도 받아내지 못할 정도의 한끝 차이로 승리했다.[6] 러일전쟁이나 태평양 전쟁은 일본이 오랜 준비를 마치고 선전포고 없는 기습공격으로 벌어졌다. 객관적으로 일본의 전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해서 그나마 격차를 메꾸려고 했다.[7] 현재의 일본 최고재판소의 전신 쯤 되는 최고법원. 참고로 이때 대심원은 지금의 최고재판소와는 다르게, 독립된 사법기관이 아니라 사법성(한국의 법무부에 해당)의 산하기관이었다.[8] 당시 홋카이도는 미개척지였고 사람이 부족해 일본 정부가 소련굴라크마냥 죄수들을 노역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공사에 투입하는 경우가 많았다.[9] 서구 열강이 일본에 적용한 치외법권은 1890년대부터 차례차례 철폐되기 시작해 1899년에 최종적으로 철폐되었다.[10] 당시 판사들 가운데서도 쓰다에 대한 대역죄 적용에 찬성하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11] 이 장면에서 유우키 마사미가 오츠 사건에 대하여 간략한 해설을 곁들였고 '으음, 참 유익한 만화야.'라는 자뻑은 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