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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11:23:16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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Санкт-Петербургский договор 1875 года
(Петербургский договор)
樺太・千島交換条約 (からふと・ちしまこうかんじょうやく)

1. 개요2. 배경
2.1. 러일화친조약과 영토협상2.2. 일본 내부의 논쟁
3. 결과4. 이후

1. 개요

1875년 사할린 섬쿠릴 열도와 관련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제국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으로 일본에서는 가라후토-치시마 교환조약으로 부른다.

2. 배경

원래 쿠릴 열도 남부는 홋카이도 아이누, 중북부는 쿠릴 아이누의 땅이었으며 사할린의 경우 남부는 사할린 아이누, 북부는 니브흐, 윌타 등 퉁구스 계통의 영역이었다. 과거 몽골 제국여진족들이 사할린을 복속한 적은 있으나 지배력이 매우 약했고 청나라도 사할린 섬을 점유하기 위해 관리를 보내기도 했으나 형식적인 수준에 그쳤다. 쿠릴 열도의 경우 일본인들과 러시아인들이 찾기 전까지는 동아시아 문명 사회에 아예 알려지지 않은 고립 지역이었다.

그러다 17세기 후반 일본의 마츠마에 번은 소야, 네무로 등 홋카이도 최북단까지 영향권을 확장했으며 18세기 무렵부터 쿠릴 열도 남부의 쿠나시르(구나시리), 이투루프(에토로후), 우루프(우룻푸)까지 진출하였다. 또한 사할린 역시 마츠마에 번이 1679년 오도마리(현 코르사코프)에 어장을 설치한 이래 18세기를 거치며 사할린 남부 해안에 일본인 정착촌이 형성되었다.

한편 우랄 산맥을 넘어 시베리아에서 동진하던 러시아 역시 18세기 초반 극동 탐험대가 쿠릴 열도와 사할린을 발견하여 쿠릴 열도 중북부와 사할린 서북부를 중심으로 빠르게 영향권을 확장했다. 결국 러일 양국은 18세기 내내 이 지역을 두고 대치했으며 19세기 초에 각각 쿠릴 열도와 사할린을 일방적으로 자국의 영토로 선언했다. 오호츠크 해 내 패권을 둘러싸고 양국 사이에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2.1. 러일화친조약과 영토협상

1855년 러시아와 에도 막부는 러일화친조약을 맺으면서 국경선 문제도 함께 다루었고 이에 따라 쿠릴 열도 남부 4개 섬은 에도 막부에, 나머지 섬들은 러시아에 속하게 되었으나 사할린에 대해서는 좀처럼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일본은 북위 50도선을 기준으로 사할린을 반분할 것을 주장했고 러시아는 일본인 근거지인 아니바만 일대만을 일본령으로, 나머지는 러시아령으로 귀속할 것을 주장했으나 전자는 부동항을 원하는 러시아에, 후자는 면적상 일본에 불리한 조건이었기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국경선을 획정하는 대신 양국민의 잡거지로서 공동관리한다는 애매모호한 결론이 났고 사할린은 양국의 잡거지가 되었으며 암묵적으로 북위 50도선 이남에선 일본, 이북에선 러시아의 영향력이 더욱 강했다.

조약 체결 당시에는 러시아와 일본 둘 다 사할린 섬의 개척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에 별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개척이 진행됨에 따라 일본인과 러시아인 개척민들 간의 분쟁이 빈번해지자 양국은 사할린 섬에 명확한 국경선을 설정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막부 측은 1867년 러시아에 사절단을 보내어 영토 협상을 하였는데 사할린 섬 내 양국 개척민들의 지위와 재산권, 아이누인들의 고용에 대한 내용까지 합의하였으나 국경선 설정 문제는 양국 간의 입장차로 인해 합의하지 못했다. 당시 국력이 약한 막부 측은 1855년의 안에서 조금 양보해 북위 48도선 국경안을 제시하였으나 러시아는 사할린 전역을 러시아가 차지하는 대신 러일화친조약에 의해 러시아령이 된 쿠릴 열도 중부 4개 섬을 일본에 양도하는 안을 제시하였다.

2.2. 일본 내부의 논쟁

한편 보신전쟁 이후 새롭게 새워진 일본 신정부 내부에서는 사할린과 쿠릴 열도 개척에 대해 여러가지 방안을 두고 논쟁이 오갔다. 외무경이었던 소에지마 다네오미는 사할린을 남북으로 나누어 사할린 남부를 개척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홋카이도 개척사 차관이었던 구로다 기요타카는 거리가 먼 사할린은 포기하고 혼슈와 가까운 홋카이도 개척에 집중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구로다 기요타카의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일본은 사할린 섬을 포기하는 쪽으로 기울었고 결국 사할린의 일체 권리를 러시아에 넘기는 대신 쿠릴 열도 전역을 양도받았다.

3. 결과

파일: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png
ㆍ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 전과 후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의 원문은 당시 외교언어였던 프랑스어로 작성되었으며 다음은 주요 조항에 대한 내용이다.

4. 이후

1905년 러일전쟁 승전을 빌미로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여 북위 50도선 이남의 사할린을 편입하였다. 뒤이어 1907년 가라후토청을 설치하여 외지(外地)로서 다스렸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였던 1943년에는 본토 4개 섬과 같은 지위인 내지에 편입했다.

그러나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무렵 만주와 사할린, 쿠릴 열도 방면에서 소련군이 몰려와 일본 세력을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에서 축출하였다. 새로 소련에 점령된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는 곧 사할린 주에 편입되었고 현재까지 러시아령으로 남게 되었다. 한편 일본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 이전부터 일본이 관리하던 쿠릴 열도 남부 4개 섬을 일본 고유의 영토인 북방영토라고 부르며 영유권을 주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쿠릴 열도 분쟁 참조[1].


[1]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은 아니지만, 일본공산당이 이 조약을 근거로 쿠릴 열도 전체를 러시아로부터 반환받아야한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