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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혁/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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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시절 · LG 시절 (2000년 ·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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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아마추어 시절3. 프로 시절
3.1. 삼성 라이온즈 1기 시절
3.1.1. 1993 시즌3.1.2. 1994 시즌3.1.3. 1995 시즌3.1.4. 1996 시즌3.1.5. 1997 시즌3.1.6. 1998 시즌
3.2. 해태 타이거즈 시절
3.2.1. 1999 시즌
3.3. LG 트윈스 시절
3.3.1. 2000 시즌3.3.2. 2001 시즌
3.4. 삼성 라이온즈 2기 시절
3.4.1. 2002 시즌3.4.2. 2003 시즌3.4.3. 2004 시즌3.4.4. 2005 시즌3.4.5. 2006 시즌3.4.6. 2007 시즌3.4.7. 2008 시즌3.4.8. 2009 시즌3.4.9. 2010 시즌3.4.10. 은퇴
3.4.10.1. 2010년 9월 19일 은퇴전 (對 SK전)
4. 국가대표 경력5. 수상 내역6. 연도별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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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준혁의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아마추어 시절

파일:76F2gnU.jpg파일:WCtDCYa.jpg
양준혁은 남도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경운중 시절엔 주로 투수로 뛰었다. 그러나 팔꿈치 부상으로 야수로 전향했다. 경운중 3학년이던 1984년엔 체육부장관기에서 1루수로 타격상 0.714 을 받으며 미래의 강타자로 이름을 날렸다. 대구상고 시절엔 1학년 때부터 4번 타자로 활약했다. 고교 3학년이던 1987년엔 삼성 입단을 희망했지만 박영길 당시 감독의 만류로 대학 진학을 택했다. [1][2]

당시에는 연고지 선수 세명을 1차 지명으로 뽑을 수 있었으며 2차지명은 무제한이었다. 그리고 고졸선수가 드물었다. 당시 삼성은 1,2차 지명에서 모두 6명을 뽑았고 이들은 모두 대학생 선수였다. 삼성은 쟁쟁한 야수가 즐비한 팀이었으며 유망주가 뛸 2군 리그도 없었다. 영남대에 진학한 양준혁은 1학년때부터 두각을 드러냈다. 1988년 제43회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에서 11타수 6안타로 타격상을 따냈다. 이듬해엔 제1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로 발탁됐고 봄철리그에선 12타석 연속 출루를 기록하기도 했다. 4학년이던 1991년에는 대학야구 최강타자로 입지를 굳혔다.

데뷔하기 전 쌍방울 레이더스의 2차 2라운드 지명을 받았으나, 지명을 피하면서 상무에 방위병으로 입대해 논란이 되었다. 제대 후 쌍방울이 아닌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여 다시 한번 파문이 일었다. 훗날 양준혁의 군복무 기간 동안 삼성은 양준혁에게 용돈 명목으로 매월 100만원이라는 거액을 지급한 사실도 밝혀졌다.

논란거리 정도가 아니라 이는 KBO 신인 드래프트 제도의 근간을 뿌리째 뒤흔들었던 사건으로, 오늘날이면 프로 선수로 활동이 불가능했을 정도의 역대 최악의 입단 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프로야구 규정/단속이 미비했던데다가 신생 구단 쌍방울의 발언권이 취약했고, 삼성그룹의 파워 등으로 유야무야 넘어가게 되었다. 특히 당시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었던 것은 천운이었다. 당시 논란의 여파로 신인선수 지명권 보유기간이 1년에서 3년으로 연장되어 규정이 보완되었다.[3]

데뷔 시즌에 신인왕[4]과 타격왕을 동시에 석권하였으며 아직도 양준혁 이후로 이 두 타이틀을 동시에 가져간 선수는 없다. 아예 고참 취급을 받아 신인왕을 놓쳐버린 장효조 정도를 제외하면 신인 자격으로 타격왕에 오른 선수 자체가 없다. [5][6][7] 그러다 1998년 시즌이 끝나고 임창용 - 곽채진, 황두성, 양준혁의 3대1 트레이드로 해태 타이거즈트레이드 되고, 2000년 LG 트윈스로 다시 넘겨졌다가 2001 시즌 종료 뒤에 FA 자격을 얻은 후 삼성 라이온즈로 돌아와 2010년 시즌까지 계속 삼성 라이온즈에서 활약했다. 그야말로 꾸준함을 대표하는 선수로 남았으며 아직까지도 전설로 남아있다.

묘한 기록으로, 홈런 2위만 3번 기록했는데(1993, 1996, 1997)[8] 그 해 전부 해태 타이거즈가 우승했다.

3. 프로 시절

3.1. 삼성 라이온즈 1기 시절

3.1.1. 1993 시즌

파일:l_2015011601000850200055861.jpg
프로 입단 첫해인 1993년 사직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김기태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9]

데뷔하자마자 말 그대로 리그를 초토화시키며 그 해 가장 강력한 타자로 군림했다. 양준혁의 데뷔 시즌은 KBO 리그 역사를 통틀어서도 가장 인상적인 데뷔 시즌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KBO 신인상과 타격왕을 차지했는데 이는 삼성 구단 역사상 최초의 신인왕 수상이었다. 그 전까지 삼성은 당시 KBO 리그에 소속된 8개 구단들 가운데 유일하게 신인왕을 배출하지 못했는데, 양준혁이 1993시즌 신인왕을 수상하면서 비로소 삼성도 신인왕 배출 구단으로 기록되었다.[10]

1993년 타율/출루율/장타율 0.341/0.436/0.598에 23홈런 90타점과 OPS 1.035를 기록하며 타율, 출루율, 장타율 부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고 홈런 2위, 타점에서는 단 1개 차이로 2위를 기록했다. 이는 역시 삼성 출신이었던 장효조가 프로에 데뷔했던 1983년 이후 10년만에 신인 선수가 타율 1위를 기록한 것이었다. 심지어 93년 양준혁의 sWAR*은 6.85에 wRC+ 는 무려 212.0으로 212의 wRC+는 2023년 현재 역대 단일 시즌 4위에 해당하는 대기록이다.[11] 이걸 나이 24살의 1년차 신인이 해냈으니, 그야말로 괴물 신인이란 평가가 전혀 아깝지 않았던 셈. 1993년에는 이종범, 박충식, 이대진, 구대성, 이상훈 등등 뛰어난 선수들이 유달리 많이 데뷔했는데, 양준혁은 압도적인 성적으로 이들을 모두 제치고 당당히 신인왕을 차지했다. 사실 신인왕은 당연하고 리그 MVP도 선동열과 경쟁해야 했으나 정작 MVP는 선동열도 양준혁도 아닌 김성래가 MVP를 차지했다. 선동열의 경우 시즌 내내 구원으로만 등판했으나 막판 방어율왕과 삼진왕을 차지하기 위해 해태가 1위가 확정된 상황에서 선발등판을 하여 타이틀을 따내 이종범의 한경기 최다도루와 함께 인위적 기록 만들기로 비난 받으며 기자단에게 외면을 받았다. 양준혁의 경우 당시만 해도 신인에게 MVP까지 둘 다 안겨주는 것은 지나치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며, 실제로 훗날 양준혁이 본인의 유튜브에서 우용득 감독이 당시에는 신인에게 둘 다 안겨주는건 그렇다는 인식으로 인해 MVP는 김성래가 받고, 신인왕은 너가 받아라 너는 앞으로 MVP 받을 날이 많지 않느냐라고 언급을 하면서 사실상 양보식으로 넘겨주게 되었다고 설명을 했다. [12] 그러나 정작 양준혁은 이후 훨씬 더 괴물같은 단일시즌 기록들을 여러번 만들어내고도 현역생활동안 단 한번도 MVP를 받지 못했다. 여기에 하필 포지션도 둘다 1루수로 분류되던 탓에 그 해 1루수 골든글러브도 수상하지 못했다(...).

심지어 93 양준혁의 기록이 더 충격적인 건, 1993년은 KBO에서 가장 투고타저가 심했던 시즌 중 하나로 손꼽힌다. 리그 평균자책점이 3.27로 1986년의 3.08(...)을 제외하고 가장 낮은 시즌이며, 리그 평균 OPS는 0.668로, KBO 역사상 가장 낮은 기록이다. 타고투저인 2014~2018년에 나와도[13] 93 양준혁의 기록은 MVP급인데 그걸 투고타저인 1993년에 해냈으니... 게다가 방위병 복무로 일부 경기에 결장했는데도 7에 가까운 타격 WAR을 찍어내고 70타석이나 더 소화한 김성래를 객관적 기록에서 압도하는건, 양준혁의 93년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

3.1.2. 1994 시즌

이어 1994년에는 소포모어 징크스에 시달렸는지 겨우 3할 턱걸이에[14] 홈런이 1개 부족해서 20홈런 달성에도 실패, 그나마 첫 한 시즌 두 자릿수 도루를 기록하고 타점왕도 차지했다.

그러나 비록 소포모어 징크스라곤 했지만 여전히 어느 팀에서나 클린업 트리오감으로 탐낼 만한 성적이었다. 어디까지나 양준혁이라는 이름값을 생각했을 때 아쉬웠을 뿐이다. 실제로 클래식 스탯만 보면 뭔가 살짝 부족한 느낌이겠지만 세이버로 보면 wRC+ 151에 sWAR*이 4.22로, wRC+가 리그 6위에 해당할 만큼 타격에서는 여전히 리그 최상위 타자 중 한 명이었다. 문제는 그의 입단 동기이자 라이벌인 이종범93 양준혁을 뛰어넘는 KBO 역사상 세 손가락에 꼽히는 어마어마한 활약을 펼쳤다는 것.

양준혁이 은퇴 후 밝힌 바에 따르면, 1년차 때 성적이 잘 나오니 조금 자만하긴 했었고 그렇게 방심했다가 성적 하락으로 이어진 것 같다고 한다.

3.1.3. 1995 시즌

1995년에는 신인왕 이동수와 함께 삼성의 타선을 이끌었다. 1루수에서 우익수로 포지션을 이동하였으며,[15][16] 타율, 출루율, 장타율 슬래시라인 0.313/0.418/0.532에 137안타, 20홈런, 84타점으로 리그 4위에 해당하는 sWAR* 6.68과 wRC+ 174.5를 기록하며 94년보다 크게 발전된 타격을 선보였다. 뛰어나면서도 꾸준하게 성적을 올렸지만, 이 때의 삼성이 포스트시즌에 계속 나가지 못하는 부진을 겪고 있었고, 하필 그 이종범이 방위병 복무로 인해 홈경기만 출전하고도 sWAR* 5.03에 wRC+ 181.9를 찍는 경이적인 맹활약을 펼치는 바람에 양준혁은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다.

3.1.4. 1996 시즌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 (1996)

1996년에는 각성하여 다시 한번 리그 최고의 타자로 발돋움했다. 0.346의 타율과 151안타, 장타율 0.624를 기록하며 1위에 올랐고 28홈런 87타점으로 홈런과 타점 득점에선 모두 2위에 올랐다. 23도루를 기록하며 생애 첫 20-20 클럽에도 가입했으며, 당연히 외야부문 골든글러브 수상에도 성공했다. 특히 이 해가 일시적으로 백인천 감독이 대구구장의 펜스를 현재처럼 99-120-99로 늘렸음에도 [17] 홈런을 28개나 때려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하필 데뷔시즌부터 30홈런을 때려낸 괴물신인 박재홍에 밀려 홈런왕을 아쉽게 놓쳤을 뿐 타자로서는 이종범을 능가하는 최고의 활약을 펼쳤고 이 해 싸이클링 히트까지 쳐내는 데 성공한다. 96년 양준혁의 wRC+는 217.5, sWAR*은 8.56으로 144G으로 환산하면 9.78이라는 수치가 나오는데 양준혁의 커리어에서 가장 높은 WAR을 기록한 시즌이다. 특히 wRC+는 2위 홍현우의 186.1과 무려 21.4나 차이가 나는 압도적인 수치이며, sWAR*은 이종범과 홍현우에 이은 리그 3위의 기록이다. 그와중에 이종범은 13경기 덜 뛰고 sWAR* 9.52를 찍었다

3.1.5. 1997 시즌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 (1997)
지난해의 괴물같은 활약을 쭉 이어간 덕에 1997년에는 개인 첫 30홈런을 달성함과 동시에 2년 연속 20-20 클럽 가입과 외야부문 골든글러브 수상에도 성공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혜성처럼 성장한 팀 후배 이승엽이 32홈런을 치며 타점을 다 쓸어가는 바람에 양준혁은 30홈런을 치고도 타점을 100타점에서 단 2타점 부족한 98타점을 기록했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이승엽에 밀려 2인자 이미지가 되었다. 다만 그럼에도 wRC+ 189.3에 sWAR*이 8.17로, 각각 리그 3위와 리그 2위에 해당하는 엄청난 시즌이었다. sWAR* 1위는 또 이종범이다. 이번에는 무려 9.70이다 볼넷도 무려 103개에 사구 7개로 사사구만 110개를 얻어낸 부분도 특기할만한 부분.

3.1.6. 1998 시즌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수상자 (1998)

다시 지명타자로 포지션을 옮겨 .342의 타율과 .450의 출루율 156안타 27홈런 89타점으로 여전히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타율, 최다안타, 출루율 부문에서 1위을 기록하며 3관왕에 올랐고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 수상에도 성공했다.
98년에도 여전히 wRC+ 181.7로 리그를 꾸준히 폭격하며, 여전히 리그 최고의 타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 프로 입단 동기생이자 프로시절 내내 라이벌로 회자되는 이종범이 맹활약한 93년~97년에 유일하게 이종범보다 많은 홈런을 친 선수[18]가 바로 양준혁이며, 93년 데뷔 후 부터 97년까지 OPS 1.004 wRC+ 186.6, wOBA .443를 기록하면서 같은 기간동안 이종범과 비교했을 때, 홈런과 타점, 타격부분 세이버 스탯에서 우위를 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19] 즉 같은 기간 타석에서 이종범을 능가하는 유일한 선수였다.

3.2. 해태 타이거즈 시절

3.2.1. 1999 시즌

파일:tigers05.jpg

그러나 1998년 시즌 후 강력한 마무리 투수 임창용[20]을 원하던 구단에 의해 곽채진, 황두성[21], 현금 20억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되었다. 당시 해태는 IMF 외환위기로 인해 모기업이 부도나 버려서 야구단을 운영할 여유조차 없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그나마 일본 주니치에 이적시킨 선동열과 이종범의 임대료를 운영비로 보태쓸 정도로 재정난이 심각했다. 반면 당시 투수진이 부족했던 삼성은 우승을 위해서는 마무리 투수가 필요하다고 판단, 마침 해태 김응용 감독이 원하는 좌타자 보강도 할 겸 트레이드를 논의하여 카드를 맞췄고, 결국 엄청난 현금에 간판타자 양준혁까지 얹어 임창용을 영입하는 데 성공한다.

처음에는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메이저리그 진출 의사를 밝혔고 그 다음에는 재트레이드 요청을 했으나, 이것들이 다 실패하고 해태로 트레이드되자 아예 은퇴할 생각까지 했다 한다.[22] 그러나 좌타에 피지컬이 좋은 선수를 굉장히 선호했던 김응용 감독의 간곡한 설득과 1년 뒤 다른 팀으로 이적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승낙했다고 한다.[23]

초반에는 급작스러운 트레이드와 유독 타팀보다 특이한 성격[24]을 지녔던 해태였던만큼 시즌 개막 직후에는 팀 적응의 문제로 그 이름값에 어울리지 않게 부진했으나, 자리를 잡은 5월부터 본격적으로 몰아치기 시작해 결국 3할 타율에 30홈런과 100타점, 20도루를 찍으며 건재함을 과시해 유난히 타고투저였던 1999년의 KBO에서도 강력했던 해태 타이거즈의 타선의 한 축을 담당했다. 이때의 활약으로, 9월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한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시드니올림픽 본선진출에도 공헌하고,[25] 11월 한일 슈퍼게임에도 출전하는 등,[26] 급작스러운 이적임에도 훌륭한 시즌을 보냈다. 다만 그해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에서 한화의 로마이어에 밀려 수상하지 못한 점은 아쉬운 대목이었다. 그리고 이 시즌 이후에 선수협의 창단 멤버로도 활동하였다.[27]

이 시기의 자신의 첫 3할-30홈런-100타점의 기록이 굉장히 흡족했는지, 이후의 양준혁 개인 유튜브나 스톡킹에서 밝히길, 자신은 이 해태 시기를 자신의 커리어하이이자 전환점으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28]

성적과는 별개로 이 시즌에 양준혁은 여타 이적생들이 느꼈던 해태 특유의 엄격한 군기문화에 굉장한 인상을 받은 모양이었다.양준혁이 말하는 해태 시절 스톡킹전설의 타이거즈에서 밝혔던 일화로, 해태로 이적 후 마련한 광주 동림동의 아파트에 이삿짐 트럭을 타고 도착했을 당시, 팀 후배이자 영남대 후배인 오철민곽현희가 빗자루를 들고 대기하고 있었으며 이삿짐 정리까지 다 했다고 한다.[29] 강태원 딸의 돌잔치 때 일부러 양준혁이 늦게 갔으나 해태 선수들 모두 기다리고 있었고[30], 경기장에서 후배들이 선배들의 간식거리를 준비해 놓지 않으면 혼났다고 한다. 다만 당시 양준혁은 어느정도 고참급 연배였으며, 그보다 고참인 성골 해태선수는 김정수, 이강철, 살인범 정도에 나머지 고참은 친정인 삼성에서 이적해왔고 양준혁과 같은 시기에 뛰어봤던 오봉옥, 김태룡 정도였기에 야구 외적으로 크게 시달림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양준혁이 스톡킹에서 밝힌 바로는 그 군기문화가 단순히 강압적인 기강잡기가 아니라 선후배간의 진심어린 끈끈한 가족과 같은 관계라고 밝혔으며, 계속 해태에 있었어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고, 개인적으로는 성적이 더 좋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스톡킹에서의 해태시절 회고영상 그 뿐만 아니라 과거 해태 타이거즈의 레전드들이 출연하여 인터뷰를 하는 전설의 타이거즈에도 당시 팀메이트였던 최해식과 함께 출연하여 당시의 이야기를 푸는 등, 잡음이 섞여 트레이드 됐음에도 실제로 지내면서 굉장히 긍정적인 인상을 가지게 된 듯 하다.풀버전

1999년도의 양준혁은 97년도의 이종범과 너무나도 성적이 비슷하다.[31] 3할2푼의 타격 30홈런까지 샌더스 장성호 홍현우가 터진데에는 양준혁의 핵우산도 있었것이다. 물론 직전이었던 96~98보다는 약간 아쉬웠을 수 있다.[32] 해태 팬들은 물론 "임창용이 아쉽다 하지만 준혁이도 어느정도 하니깐 계속 있어줘라.." 였지만[33][34]

결론적으로 해태는 1억 4,000만원이라는 금액으로 1년동안 양준혁을 잘 빨아먹었다.[35]

3.3. LG 트윈스 시절

3.3.1. 2000 시즌

파일:141DAC0F4C0774A63CB2CF.jpg

2000년 3월 약속대로 LG 트윈스로 이적했다. 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 이적 가능성도 있었지만 막판에 LG가 손혁을 제시하면서 트레이드가 성사된다.[36] 선수협 활동으로 인해 연봉 협상과 시즌 준비가 늦어서 개막 후 3주만에 팀에 합류했다. 초반에는 2할대 초반 타율에 그치며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였으나 시즌 중반부터 맹타를 휘두르며 3할대 타율과 4할대 출루율로 자신의 모습을 되찾았다. 초반에는 지명타자로 뛰다가 후반기에는 외국인 타자 스미스, 서용빈과의 포지션 중복 문제로 우익수, 1루수를 왔다갔다했다. 두산과의 플레이오프에서 스미스와 함께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탈락에 일조했다.

여담이지만 이 시즌 등번호가 프로생활 중 유일하게 10번을 달지 않았던 시즌이었다.[37]

3.3.2. 2001 시즌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수상자 (2001)

2001년 타격왕과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괜찮은 활약을 하긴 했으나 2001년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었을 때 선수협 사태등의 문제로 FA 미아설, 해외진출설, 은퇴설 등으로 말이 많았다. 당시 기준으로 2002년 시즌을 마치고 나서 FA가 되어야 했지만 연차가 9년으로 줄면서 2001년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획득하고, LG 트윈스에서 FA로 재계약 하려고 했으나 본인이 4년 36억을 불렀고 선수협 활동을 열심히 한 전력 덕에 구단 입장에서는 조금 껄끄러운 존재였기 때문에 LG는 양준혁과 협상 포기를 선언해버린다. 양준혁 본인의 말로는 처음부터 36억을 불렀더니 협상 테이블에도 못 앉았다고. 그리고 LG는 선수 대신 현금으로 보상을 받고 직전 삼성에서 뛰던 매니 마르티네스를 양준혁의 대체자로 데려온다.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양준혁에 대한 LG 팬들의 인식과, 양준혁 본인의 LG에 대한 인식은 매우 좋은 편이다. 엘지에서 주장을 맡은 해에 커리어하이급 성적을 찍은데다가[38] 선수단에 좋은 영향을 줬기에 좋아할 수 밖에 없고, 본인 역시 서울이었다는 점과 해태와 비교해서 구단 대우 등이 마음에 들었는지 상당히 호의적인데 주장까지 맡게 되었고 좋은 성적을 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해설할 때도 엘지에 대해서 상당히 우호적인 편이다[39]. 게다가 양준혁은 선수로서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은퇴후 10년이 지나도록 현장에 복귀에 대한 의욕을 보이지는 않았는데, 2019년 서경석 TV에서 대놓고 LG 트윈스를 사랑했고 LG에 남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코치직 제안 오면 수락할거냐는 서경석의 질문에 "불러만 주면 좋지ㅎㅎ"라며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다. 실제로 단장 차명석과 양준혁은 사적으로도 친한 사이고, 선수단에서도 류중일, 이병규 등 양준혁과 인연이 깊은 사람들이 많다. 이러다보니 양준혁은 타팀 출신에 비교적 짧은 시기만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LG 팬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3.4. 삼성 라이온즈 2기 시절

FA시장에 나서 강력한 좌타자를 원하던 당시 삼성 감독 김응용이 양준혁을 거둬주면서 4년 총 23억 2,000만원에 계약에 성공했다. 여기에는 매년 100경기 이상 출장, 타율 0.305 이상, 80타점 이상을 모두 충족할 경우 매년 1억씩 추가로 받는 플러스 옵션이, 반대로 규정타석 미달, 90경기 아래로 출장, 타율 0.270 미만, 60타점 미만 중 하나라도 충족될 경우 연봉 중 1억을 반납하는 마이너스 옵션이 있었다고 한다.

스톡킹에서 밝히길 선수협 주동자로 찍혀서 8개 구단 사장단이 모두 양준혁 영입을 안하기로 합의를 했던 상황이었고 그 당시 급하게 해외 진출을 알아보던 중 뉴욕 메츠와 합의 직전까지 갔었으나 당시 삼성의 영입의사와 더불어 그 당시 메이저리그에서 실패할 경우 국내 복귀가 힘들 것을 우려했고 김응용 감독이 사장단 합의를 했음에도 강력하게 원해 삼성 라이온즈로 귀환하게 되었다고 한다.[40]

2002년과 2005년은 조건 미달로 인한 마이너스 옵션 발동으로 1억을 반납해야 할 상황에 놓였으나[41] 이 두 해 모두 삼성이 우승하는 바람에 프런트에서 마이너스 옵션을 실행하지 않았다고 한다.[42] 당시 FA 최고액 기록을 세우며[43]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고,[44] 2002년 이승엽, 마해영 등과 공포의 이마양 트리오를 이루며 우승 멤버가 되었다. 이후에도 삼성 타선과 선수들의 중심축을 이루며 꾸준히 팀을 이끌어주었다.[45] 첫 우승 시즌인 2002년과 2번째 우승 시즌인 2005년에 상당한 부진을 겪었지만[46], 그 이외의 시즌에는 A급의 활약을 해 주었다.

3.4.1. 2002 시즌

4년만에 고향팀에 돌아왔지만 정규시즌에선 상당히 부진을 겪었다. 타율 .276에 BB/K가 0.70으로 커리어에서 유일하게 1을 넘지 못한 시즌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시리즈에선 최고의 활약을 펼쳤는데 무려 0.500의 고타율을 기록하며 이승엽의 부진을 메꾸었다. 삼성도 KBO 역사에 길이남을 이승엽-마해영의 끝내기 백투백 홈런으로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였고 양준혁도 첫 KS 우승 반지를 손에 넣게 되었다.

이후에 이 시즌에 부진했던 이유가 밝혀졌다. 양준혁은 평소에도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 시즌에 와서는 어깨 상태가 많이 악화된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수술을 하면 1년 이상의 공백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단순히 어깨의 물을 빼는 시술만 하고 다음 시즌에 임하게 되었다.

3.4.2. 200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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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 (2003)

시즌을 앞두고 우익수에서 좌익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이는 어깨 문제 때문인 듯.

2003년에는 이승엽, 마해영과 함께 역대 최고의 클린업으로 꼽히는 이마양 트리오를 이루며 127홈런 359타점을 합작해냈다. 33홈런을 때려내며 개인 최다 홈런을 경신했고 타자들이 무려 267타점을 쓸어갔음에도 92타점을 기록했다. 2003년 4월 15일 수원 현대전에서는 지난 1996년에 이어 개인 통산 두 번째로 싸이클링 히트를 기록했으며, 이는 역대 최고령 기록이기도 하였다.[47]

다만 한 가지 흠이라면 2003년 4월 24일 대구 KIA전 더블헤더 1차전에서 좌익수 수비 도중 플라이 볼을 놓치는 히 드랍 더 볼을 기록한 적이 있는게 흠.[48]
시즌 후 이종범, 심정수와 함께 골든글러브도 수상하였다. 이해에는 좌익수로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직접 본인이 인증했다.

3.4.3. 200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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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골든글러브 1루수 부문 수상자 (2004)

이승엽과 마해영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1루수로 전향하여[49] 28홈런 103타점 WAR 6.37으로 배영수와 함께 맹활약하며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끌었다. 1루수 골든글러브는 덤. 이 골든글러브로 양준혁은 KBO의 유일한 외야수-내야수-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같이 가진 선수가 되었다.

3.4.4. 2005 시즌

타율 0.261에 홈런은 고작 13개를 때려내며 2002년에 이어 다시 부진을 겪으면서 양준혁도 이제는 한물 갔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으나 2005년 한국시리즈에서는 활약했다. 특히 3차전에는 시리즈를 결정짓는 쓰리런 홈런을 때려냈는데 이 홈런 이후 삼성팬들을 향한 화려한 세리머니를 선보이기도 했다.

시즌 종료 후 두 번째 FA 자격을 얻었고, 우선협상 기간 내에 삼성과 2년간 최대 15억원(계약금 5억, 연봉 4억×2, 옵션 2억)에 재계약했다.

3.4.5. 200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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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수상자 (2006)

2006년 재계약 이후 극악의 투고타저 속에서 지명타자로 나와 타/출/장 .303/.446/.447 OPS .923 13홈런 81타점 12도루로 3할에 두자릿수 홈런-도루를 기록하며 부활에 성공했다. 주목할 부분은 역시 선구안인데 103볼넷 43삼진에 볼삼비가 무려 2.40이다.[50] 이는 양준혁의 커리어에서 가장 뛰어난 기록이다. 덕분에 출루율은 .446으로 1위를 기록했고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 수상에도 성공했다.

3.4.6. 200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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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수상자 (2007)

히스토리 19 '안타 역사의 구름다리' 양준혁과 박용택
시즌 대부분을 지명타자로 출장하여 타/출/장 .337/.456/.563에 OPS는 무려 1.019를 기록했는데 이는 역대 최고령 OPS 1.0 이상이다. 역사상 최초로 2000안타를 달성했으며, 22홈런 20도루를 기록하며 당시 최고령 20-20을 달성하기도 했는데[51] 아마 후반에 페이스가 꺾이지 않았다면 30홈런도 가능했을 2007년이었다.[52] 게다가 그 뛰어난 선구안으로 91볼넷 44삼진에 볼삼비는 무려 2.07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치를 기록했다. wRC+는 194.0에 WAR는 6.87로 지명타자로만 시즌을 뛰었음에도 이 정도를 쌓아올렸다. 참고로 이게 모두 한국 나이로 39세에 기록한 성적이다.[53] 시즌 후 골든글러브를 받으며 2년 연속으로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 수상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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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9일, 두산 베어스와의 잠실야구장 원정 경기에서 KBO 역사 최초로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2000안타 기록을 달성한 날은 잠실 원정 경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상대팀 두산 베어스 측에서 전광판에 축하 메시지를 띄웠다.

특히 2007년 7월 13일 수원에서 열린 현대 유니콘스와 원정경기서 선제 솔로 홈런, 동점 투런 홈런, 결승 투런 홈런까지 7타수 6안타 트리플 홈런을 기록했다.[54]

이 해 이현곤과 타격왕과 안타왕 경쟁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현곤이 .338에 153안타, 양준혁이 .337에 149안타를 기록했다. 이현곤이 1리 차이로 타격왕과 안타왕을 차지하게 되며 양준혁은 모두 2위에 그쳤다.

2007년 시즌 후, FA는 아니지만 2년 총 24억(계약금 6억, 연봉 7억×2, 옵션 4억)에 삼성과 다년 계약을 맺었고, 이 계약을 통해 7억대 연봉을 돌파하며 리그 연봉킹 2위에 올랐다.

3.4.7. 200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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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3일, 시즌 개막 후 5번째 출장 경기였던 잠실 LG전에서 개인 통산 2100안타를 기록하는 기쁨을 맞보았다.#[55]

그러나 4월 월간타율 0.193이라는 도무지 양준혁의 이름값에 전혀 걸맞지 않는 모습을 보이면서 삼성팬들은 에이징 커브를 늦게나마 실감하기 시작했고, 5월에 다소 살아나는가 했지만 5월 16일 부로 시즌 타율이 0.199까지 내려앉는 충격적인 부진 속 5월 17일부터는 2군으로 잠시 내려가 조정기를 가졌고, 5월 30일 SK전에 전격 콜업되어 4타수 3안타 1볼넷 2득점의 예의 우리가 아는 모습으로 컴백했다. 복귀 후에는 '역시 양신'이란 소리가 나올 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어 시즌 초 1할대로 떨어진 타율에서 최종 0.278로 마무리되었다. 통산 안타 역시 9월 27일 잠실 두산전에서 2200안타를 넘었다.[56]

16년 연속 세자리수 안타는 성공했지만 16년 연속 두자리수 홈런은 이루지 못하여 홈런은 15년 연속 두자리로 끝나게 되었다.

준플레이오프에서는 비밀번호를 끊고 로이스터 매직으로 정규시즌 3위를 기록했던 롯데를 상대로 12타수 6안타 1홈런 4타점 4볼넷 3득점 타율 0.500의 미친 활약에 힘입어 팀을 플레이오프로 진출시키는데 큰 역할을 해냈고, 플레이오프에서는 20타수 4안타 5타점 5볼넷 1득점으로 베테랑으로써의 역할은 최소한으로 해냈으나 시리즈 전적 2:4로 아쉽게 한국시리즈에는 진출하는데 실패했다. 그리고 이것이 양준혁 프로 통산 마지막 가을야구 무대였다.

3.4.8. 2009 시즌

시즌 전, 2009년 1월에 결성된 성구회(星球會)에 2000안타로 가입하여 두 번째 멤버가 되었다.[57]

4월 초중반 잠시 타격 슬럼프를 겪었지만 4월 말부터 부활. 이후 한국나이 41살이라는게 전혀 무색할 정도로 삼성의 든든한 4번타자 역할을 담당했다. 심지어 불의의 부상을 입었던 7월 30일 경기가 끝난 직후 그의 정규시즌 스탯은 78경기 동안 320타수 82안타 타율 0.332에 11홈런을 치는 동안 사사구도 무려 65개를 누적하면서 BB/K 비율 또한 2.54에 wRC+도 160에 가까운 수치를 기록함에 따라 삼성 타선에서 양준혁의 존재감은 나이가 불혹을 넘어가도 무시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4월 16일 드디어 홈런성 타구를 때려 KBO 통산 홈런의 새로운 기록이 탄생하는 듯 했으나 비디오 판독후 홈런은 무효처리되고, 2루타가 되었다. 한국 프로 야구 역사상 첫번째 비디오 판독의 희생자였다.

한편 4월 18일 부터 약 일주일간 중계권료 싸움 때문에 중계가 끊겼던 2009년 4월 중순~말경, 박석민에게 "TV중계가 안되니까 홈런은 가급적 치지 말라"고 충고를 받기도 했다.


이런 설왕설래 속에서 그래도 기어코 5월 9일 LG전 홈경기에서 결국 341호 홈런을 때려 장종훈의 기록을 깨고 KBO 통산 홈런 신기록을 수립했다.# 그리고 정말로 문워크[58][59]를 했다. 그 기록의 영향 때문인지 한정판 모자가 출시되기도 했다.

7월 2일 KBO 최초 통산 450 2루타 기록한데 이어, 7월 14일에는 KBO 최초 350홈런의 대기록을 썼다.

그러나 7월 30일 잠실 LG전에서도 역시 4번 지명타자로 선발 출장한 양준혁은 1회초 1사 1,2루의 기회에서 1,2루간 깊숙한 타구를 날리자 1루로 전력질주 중 부상을 입고 아예 트레이너에게 업혀서 벤치로 갈 정도로 심상치 않은 부상을 입었다.#[60] 이후 검진 결과 왼쪽 종아리 내측 근육 손상 판정을 받으며 복귀까지는 한 달 이상이 걸릴 것이라고 하자 시즌아웃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왔었다.[61][62]

이 부상으로 17년 연속 100안타가 좌절되었다. 게다가 데뷔때부터 이어온 연속 규정타석 출전도 16시즌으로 마무리 되었다. 규정타석 16시즌 소화는 역대 최초이자 2020년 기준으로 유일한 기록이며, 그나마 가능성 있던 김태균박용택이 은퇴하면서 당분간 기록 경신은 힘들듯 보인다.[63]

양준혁이 4번타자 자리에서 빠지자 타선이 급격히 약화되고 최형우가 급한대로 4번타자를 담당하여 8월은 겨우 버텼으나 9월들어 우리가 아는 잉여의 모습이 거하게 발동되면서 팀의 하락세를 막지 못했다. 양준혁 또한 워낙 급박한 팀 사정상 9월 2일 전격 1군 복귀를 했으나 부상이 완벽히 낫지 않은 상황에서의 복귀였기에 주루를 거의 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팀 또한 9월 더 이상 가을야구의 희망을 갖기 힘들 정도로 내려앉아버리면서 양준혁도 9월 23일 SK전 대타를 끝으로 시즌을 조기 마감 짓고 말았다.

3.4.9. 2010 시즌

시즌 전 연봉이 기존 7억원에서 무려 2억 5,000만원이나 삭감된 4억 5,000만원에 재계약,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연봉 삭감이라는 칼날을 맞았다. 일단 개막 라인업에 포함되었으나 점차 성적이 떨어지면서 주전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4월 30일 최초로 2300안타를 기록했다.

5월 21일 롯데전 이후부터는 주로 우투수 상대 플래툰이나 대타로 출장하는 중. 나이와 부상이 겹치면서 파워, 스윙스피드 등의 신체능력 자체가 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출루율이 .387에 이를 정도로 선구안은 여전하지만 타율은 .252, 장타율은 무려 .319까지 급락했다. 이 장타율은 이종범(7월 29일 현재 장타율 .336)보다도 낮다.

6월부터 주전에서 물러난 뒤 불규칙적인 출장이 이어지면서 타격감까지 흐트러지고 있다. 꾸준히 출장하면 감을 되찾을 수도 있었겠지만 젊은 선수들이 양준혁의 부진 즈음에 맹활약하고 삼성이 연승행진을 거듭하면서 별다른 기회를 잡지 못했다. 실제로 삼성이 쾌조의 12연승을 달리는 와중에도 선동열과 삼성 골수팬들의 사이는 좋지 못했다. 양준혁이 그다지 기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64]

6월 1일 2112경기를 출장하면서 최다 출장 기록 경신.

6월에는 드문드문 출장했지만 7월에는 5타석 대타 출장에 그쳤다. (5타석 4타수 1볼넷 1안타 2타점.) 7월 29일 현재 7월 21일 기아전에서 범타로 물러난 것이 가장 최근의 기록이다.

2010년 7월 24일 올스타전에서 동군 김성근 감독은 발목에 골절상을 입은 박정권 대신 양준혁을 현역 마지막 올스타전에 초대하게 된다. 김성근 감독의 팀인 SK에도 이미 은퇴를 선언하며 맹활약을 펼치던 김재현이 있었으나 양준혁이 발탁된 배경에는 올스타전 장소가 대구라는 점을 감안한듯 하다. 그리고 애초에 1루수 포지션에 지명타자 후보였던 김재현을 넣는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65]

그리고 벌어진 홈런레이스에선 무홈런으로 체면을 구겼으나 본 경기에서는 8-3으로 뒤지고 있던 7회말 1사 1, 2루 상황에서 김현수의 대타로 들어와 금민철의 공을 잡아당겨 우익수 뒤 스리런 홈런을 작렬하며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다. 이 홈런은 올스타전 최고령 홈런기록이다.[66] 뒤이어 홍성흔가르시아까지 연속 홈런을 작렬하면서 거짓말같이 동점을 만들어냈다. 뒤이은 8회초 수비에서는 좌익수로 들어와 녹슬지 않은 수비실력까지 보여주었다. 그리고 양준혁은 김성근 감독에게 고맙다고 하며, 김성근도 양준혁에 대한 대인배적인 태도로 은혜를 얻었다고 한다. 실제로 김성근은 2008 올스타전에서도 마해영에 대한 배려로 출전 시킨 적이 있었다. 이 일화로 김성근은 삼성팬들에게 찬사를 받았다.[67]

결국 9회 말 황재균의 끝내기 안타로 2010 올스타전은 9:8 동군의 역전승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양준혁은 그 날 인터뷰에서 그답지 않게 목이 메인 듯 "대구팬들 앞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줘서 뜻깊은 하루였다. 감사라고 해야할까 이렇게 응원해주셔서 선수로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알 수 있었다" 라고 소감을 밝혔다.

양준혁의 2010시즌 월별 기록은 다음과 같다.
3월: 3경기 14타석 타율 .000 출루율 .214 장타율 .000
4월: 18경기 54타석 타율 .419 출루율 .519 장타율 .581 (1홈런)
5월: 18경기 58타석 타율 .217 출루율 .379 장타율 .239
6월: 16경기 37타석 타율 .161 출루율 .297 장타율 .161 (주전 탈락)
7월: 5경기 5타석 타율 .250 출루율 .200 장타율 .500
8월: 출전 없음.
9월: 4경기 7타석 타율 .000 출루율 .000 장타율 .000

하지만 그가 이미 7월 18일에 구단에 은퇴 의사를 통보한 상태였다는 걸 안 사람은 별로 없었다.

3.4.10. 은퇴

한국프로야구 레전드 10人 양준혁 편은 이렇게 마무리 된다(내레이션 by 안지환)[68]

그가 남긴 기록들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도,
야구 천재여서도 아니다. 그 수많은 기록들은 100% 그의 피나는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18년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전력질주했던 양준혁. 그는 한국프로야구 30년 역사에 전무후무한 경이로운 기록들을 세운 기록의 사나이. 파란 피의 사나이로 영원히 우리들의 가슴에 기억될 것이다. 비록 선수생활은 끝이 났지만 야구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양준혁.

그는 뼛속까지 야구인이다.

마지막 올스타전 홈런을 친 바로 이틀 뒤인 2010년 7월 26일, 삼성 라이온즈 구단에서는 보도자료를 통해 양준혁의 올시즌 종료 후 은퇴를 공식 발표하였다. 체력적인 문제는 없지만 팀의 리빌딩을 위해 후배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함이라는 것이 본인이 밝힌 사유[69]. 채태인, 최형우, 박석민의 "3인방"이 주축으로 자리잡고 조영훈, 조동찬 등이 급성장하면서 심각한 포지션 적체가 발생한 상태였다. 삼성에선 향후 본인이 정할 진로에 대해 협조하기로 하고, 9월 홈경기 중 한경기를 은퇴경기로 정하기로 하였다. 또한 26일자로 엔트리 말소되었다.

송진우에 이어, 프로야구의 전설은 이제 더 이상 그라운드가 아닌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스포츠채널이었던 MBC ESPN (現 MBC SPORTS+)의 프로야구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인 '베이스볼 투나잇 야' 에서 역대 양준혁 선수생활 시절 중 최고의 순간 또는 재미있는 순간 TOP 10을 7월 26일 방송 마지막에 내보냈었다. #

한편, 일부 사람들은 삼성이 양준혁의 은퇴식을 대충 치를지도 모른다고 불안해 하기도 했다. 무노조경영으로 유명한 삼성은 노조에 대응될 수 있는 선수협을 싫어하는데, 양준혁은 바로 그 선수협 창립멤버 중 하나다. 삼성의 프랜차이즈이건만 그 선수협 하나 때문에 양준혁은 삼성, 아니 고향인 대구에 있는 팀에 다시 돌아오지 못할 뻔한 적도 있었다.(김응용 사장이 양준혁은 꼭 데려올 기세로 협상에 임해서 망정이었다.) 하지만 그건 쓸데없는 걱정. 위 항목에 서술한대로 2002년 이후의 양준혁은 구단 쪽 인사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삼성은 "가장 오래 된 연인의 품에서 은퇴하고 싶었다"라고 한 양준혁의 정에 부응하듯 한국 프로야구 사상 가장 성대한 은퇴식을 약속했다. 그 말대로 삼성 라이온즈는 9회 끝나고 치러진 양준혁의 은퇴식을 성심을 다해 치렀다. 사용한 폭죽 양만 해도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은퇴경기는 9월 19일 일요일 대구 홈경기로 치러졌다. 1주일 전인 12일 오전 11시부터 예매가 시작되었는데 프로야구 예매 대행사이트인 티켓링크 서버가 1분만에 터졌다. 이 사이 홈 방향인 3루 지정석 및 테이블석은 전부 매진되었고, 일반석마저 20분 경 모두 매진. 암표는 2만원에서 출발하여 10만원이 넘어갈 정도로 가격이 폭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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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예매분 3,000장 역시 그것을 구하기 위해 토요일 오전부터 텐트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경기 시작은 오후 5시였으니 장장 하루를 넘도록 기다린 것이다.

그런데 정작 2시가 되어 입장을 시작했을 때, 3루측, 즉 홈 응원석쪽을 먼저 열었는데 새치기 때문에 주먹다짐이 일어났고, 스탭은 결국 3루 입장을 봉쇄하고 1루를 먼저 열어버렸다. 하지만 이날 경기엔 SK팬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1루로 입장한 사람들이 전력질주로 3루로 가는 바람에 3시에나 다시 3루가 열린 후에는 이미 3루 내야는 거의 차 있었다. 결국 텐트치고 이틀 기다린 사람들이 외야에 앉았다.

은퇴식을 치른 후에 등번호 10번을 KBO 영구결번 처리하였다. 같은 10번에 장효조라는 엄청난 타자가 있었기 때문에 조금 힘들수도 있다는 예측도 있었으나, 뉴욕 양키스에서 등번호 8번을 달았던 요기 베라와 빌 디키라는 두 명의 선수를 영구결번으로 처리하는 사례가 있어서 가능할 수도 있다는 반박도 있었다. 이날은 결국 양준혁의 10번만 결번으로 지정이 되었다.[70]

이 날의 은퇴식은 KBO 역사상 최고의 규모였다고 평가된다. 1위 싸움 중이었던 SK와 삼성의 사정 때문에 후배 투수가 치기 좋은 공을 던져주는 등의 모습은 볼 수 없었으나, 최고의 타자이므로 최선을 다해 던져서 3삼진을 잡겠다는 경기전 인터뷰대로 3삼진을 잡은 김광현의 투구는 매우 인상적이었으며, 마지막 타석에서 9회 송은범을 상대로 2루수 땅볼을 친 후 1루까지 전력질주하는 모습은 그의 삶의 궤적과 맞물려 팬들에게 영원히 회자될 모습이었다. 양준혁에게 존경받는 인물로 꼽힌 바 있는 SK 당시 김성근 감독은 "홈런 하나 치게 해 주고 싶었는데 중요한 경기라서 그럴 수 없어 미안하다"고 경기 후 인터뷰.
3.4.10.1. 2010년 9월 19일 은퇴전 (對 SK전)
은퇴경기 상대 팀이 SK이기 때문에 1위자리 수성/공략을 위한 양팀의 공방전 또한 엄청나게 치열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경기 전날 SK의 정규시즌 우승까지 매직넘버가 4이고 양팀의 게임차가 3인 상황에서, 양 팀간 올 시즌 전적은 9승 9패 동률이었다. 시즌 후반 SK의 총체적 부진과 삼성의 괜찮은 대진운이 엇갈리고 있는 상황에서 SK가 승리할 경우 매직넘버는 1로 줄어들게 되고 게임차는 5로 벌어지며 사실상 우승을 확정짓게 된다. 반대로 삼성이 승리하면 게임차는 1로 줄어들고 만에 하나 삼성이 SK를 따라잡아 시즌 최종성적에서 동률을 이루었을 경우 상대전적 우선으로 순위가 정해지는데, 이에 따라 일요일 경기 승리 팀은 한국시리즈 직행에 어느 정도 유리한 고지에 오르게 된다. 선 감독이 순위 싸움에 욕심은 없다고 하지만 선발투수를 올시즌 SK전 평균자책이 0점대인 차우찬으로 결정한 것을 보면 사실상 양준혁 은퇴경기 축하와는 별개로 절대 경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나 1:0으로 뒤진 상황에서 현재 구위가 시망이라는 평이 많은 윤성환을 올리자 야갤, 엠팍 등이 전부 뒤집어졌다. 결국 이호준에게 홈런을 얻어맞고 3:0으로 팀은 패배했다.

당일 선발 투수로 내정된 김광현은 은퇴 경기 며칠 전부터 "신인 시절 첫 홈런을 양준혁 선배님께 맞았다. 선배님의 은퇴 경기라도 최선을 다해 던지는 모습을 보여주겠다. 그것이 은퇴하시는 선배에 대한 예의인 것 같다. 삼진 3개를 잡는 것을 목표로 하겠다" 는 취지의 발언을 했고, 이에 양준혁도 "고맙다." 라는 취지의 발언으로 은퇴경기에 대한 기대감을 고조시켰다.김광현의 회고

KBS SPORTS에서 중계를 하면서 이닝이 끝날 때마다 양준혁에 대한 화면을 조금씩 보여주는 방식을 썼다. 현장에 가지 못한 팬들에게는 아쉬운 대로 만족할 수밖에.

경기에 앞서 양준혁의 아버지인 양철식 옹이 시구를, 양준혁이 시타를 했다. 연세가 일흔 다섯인 어르신이 던진 공이 홈플레이트까지 제대로 꺾여 들어가자 관중이나 해설자들이나 모두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양준혁은 1루수로 선발출장해 5회초에는 우익수로 이동했고, 마지막 9회초에 좌익수 포지션을 지켰다. 경기 전까지 김광현과의 통산 전적은 14타수 2안타 1홈런. 이 1홈런은 김광현의 데뷔전에서 쳐낸 것이다. 은퇴 경기까지 김광현과 함께라니 참 묘한 인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회말 첫번째 타석에서 헛스윙 삼진, 4회말 두번째 타석도 헛스윙 삼진. 7회말 세번째 타석도 헛스윙 삼진. 하일성 曰 : 김광현이 약속을 지켰네요. 허허허였다.[71]


9회말 네번째 타석에서는 마무리로 등판한 송은범[72] 을 상대로 2루 땅볼을 기록한다. 타석에 들어서는 순간, 아마도 홈런을 쳤을 때 터트렸어야 할 폭죽이 갑자기 터져버렸다. 그때 야갤에선 선동열 감독이 불을 붙였을 거란 개드립이 흥했다.

양준혁이 폭풍안타를 치며 건재함을 과시하길 바랬던 팬들이 벙쪄버릴 정도의 결과. 하지만 2루 땅볼을 치고 있는 힘껏 1루를 향해 뛰어간 그의 모습, "항상 1루로 열심히 뛰었던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 난 한번도 1루까지 걸어간 적이 없다"는 말을 마지막 경기까지 지켰던 그의 모습은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도 남을 순간이었다. #

5회가 종료되고 거행된 은퇴식 1부에선 상패나 기념액자 등을 전달받았다. 상대 감독이자 자신이 은사로 꼽는 김성근 감독과 포옹, 자신과 마찬가지로 올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한 SK 주장 김재현에게서 꽃다발도 받았다. 이 때 3루 관중들은 이만수를 외쳤지만 이만수는 은퇴식 내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구 팬들의 아쉬움이 담겨있는 장면. 하지만 경기 시작 전에 양준혁이 1루로 찾아가서 이만수에게 인사했고, 이만수와 양준혁이 포옹하는 훈훈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대구 지역 인사들이 꽃다발과 금일봉 등을 줄을 서서 건넸다. 하일성 해설은 해설하다 말고 나가서 전 KBO 사무총장 자격으로 꽃다발을 건네기도 했다.

파일:양준혁은퇴식.jpg
경기가 끝나고 은퇴식 2부가 이루어졌는데, 비가 오고 있음에도 관객들은 양준혁을 연호하며 1시간이 넘는 은퇴식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은퇴식 마지막에 양준혁 한 사람에게만 핀조명이 비춰지는 채로 걸어서 구장을 한바퀴 도는 순서때에는 거의 모든 관중들이 휴대폰을 비춰서 흔들어 휴대폰 은하수가 펼쳐지기도 했다. 양준혁 선수는 끝내 눈물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제 저에게 주신 사랑을 후배 선수들에게, 아니 대한민국 모든 프로야구 선수들에게 전해주기 바란다"고 밝힌 양준혁 선수가 마지막으로 관중들에게 큰 절을 올리고 유니폼을 반납하고, 양준혁의 백넘버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은 삼성 선수들이 헹가래를 치면서 은퇴식은 막을 내렸다.

당일 경기중 비가 조금 오다가 말았는데, 경기가 끝남과 동시에 비가 다시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여 은퇴식 내내 잔잔한 이슬비를 뿌리다가, 은퇴식을 마침과 동시에 거센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모든 사람들이 경기장을 빠져나가자 거짓말처럼 다시 비가 잦아들었다.

파일:YJHSLNO10.jpg
이 사진으로 2010 골든글러브 골든포토상을 받는다. 은퇴 마지막까지 상을 받았다.

최훈이 양준혁의 은퇴시기에 맞춰 그의 일대기를 그린 만화를 올렸다.

당시 양준혁을 진심으로 좋아했던 팬들이 많았는지 선동열을 두고두고 까거나[73], 2~3년이 지난 후에도 은퇴를 철회하고 현역 복귀를 원한다는 의견이 심심찮게 보였다.

4. 국가대표 경력

KBO를 상징하는 레전드 선수지만 유독 국가대표와는 인연이 없었다.

4.1. 1999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2000 시드니 올림픽을 앞두고 지역예선을 겸하는 서울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멤버로 발탁되었다.

이후로도 국가대표로 발탁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 대회는 양준혁의 프로 생활 유일한 A대표팀 경력이 되었다.

5. 수상 내역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양준혁의 KBO 수상 경력
1993 KBO 신인왕 / 타율 1위 / 장타율 1위 / 출루율 1위
1994 타점 1위
1996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 타율 1위 / 안타 1위 / 장타율 1위
1997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1998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 타율 1위 / 안타 1위 / 출루율 1위
2001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 타율 1위
2002 한국시리즈 우승
2003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2004 골든글러브 (1루수 부문)
2005 한국시리즈 우승
2006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 출루율 1위 / 한국시리즈 우승
2007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6. 연도별 성적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양준혁의 역대 KBO 기록
<rowcolor=#ffffff> 연도 나이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RC+ sWAR[74]
1993 24 삼성 106 456 130
(5위)
27
(3위)
1 23
(2위)
90
(2위)
82
(2위)
4 61
(4위)
40 .341
(1위)
.436
(1위)
.598
(1위)
1.035
(1위)
216.7
(1위)
7.11
(1위)
1994 25 123 496 128 21 1 19
(4위)
87
(1위)
62 15 63
(3위)
42 .300 .386
(5위)
.487 .873
(5위)
154.5 4.91
(5위)
1995 26 125 527 137
(5위)
34
(1위)
1 20 84
(3위)
81
(2위)
8 77
(1위)
50 .313
(4위)
.417
(3위)
.532
(2위)
.949
(2위)
179
(2위)
7.06
(2위)
1996 27 126
(1위)
530
(4위)
151
(1위)
33
(1위)
2 28
(2위)
87
(2위)
89
(2위)
23 82
(2위)
76 .346
(1위)
.452
(2위)
.624
(1위)
1.076
(1위)
217.5
(1위)
8.91
(2위)
1997 28 126
(1위)
561
(5위)
145
(5위)
32
(3위)
5
(5위)
30
(2위)
98
(2위)
94
(5위)
25 103
(1위)
75 .328
(3위)
.455
(2위)
.627
(2위)
1.082
(2위)
190.8
(3위)
7.53
(2위)
1998 29 126
(1위)
552
(3위)
156
(1위)
30 1 27
(5위)
89
(5위)
80 15 87
(2위)
69 .342
(1위)
.450
(1위)
.590
(4위)
1.040
(2위)
184
(2위)
5.88
<rowcolor=#ffffff> 연도 나이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RC+ sWAR
1999 30 해태 131 588
(4위)
160 23 1 32 105 96 21 82
(4위)
68 .323 .421
(4위)
.567 .987 152.9 4.47
<rowcolor=#ffffff> 연도 나이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RC+ sWAR
2000 31 LG 117 514 135 30 2 15 92 79 15 73 65 .313 .415
(4위)
.495 .911 151 4.95
2001 32 124 531 156
(3위)
20 3 14 92 79 12 80 55 .355
(1위)
.449
(3위)
.510 .959 168.6
(3위)
5.49
(5위)
<rowcolor=#ffffff> 연도 나이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RC+ sWAR
2002 33 삼성 132 437 108 23 2 14 50 60 2 39 56 .276 .349 .453 .801 117.9 2.37
2003 34 133
(1위)
551 161
(3위)
37
(2위)
2 33
(5위)
92 90 2 49 49 .329
(4위)
.395 .614
(3위)
1.009
(4위)
169
(4위)
6.14
(5위)
2004 35 133
(1위)
584
(4위)
152 30
(3위)
0 28
(4위)
103
(4위)
95
(2위)
5 89
(3위)
53 .315 .434
(4위)
.553
(3위)
.987
(3위)
169.4
(4위)
7.03
(3위)
2005 36 124 463 103 15 1 13 50 61 10 62 44 .261 .367 .404 .771 114.8 1.27
2006 37 126
(1위)
533
(5위)
125 31
(1위)
1 13 81
(2위)
63 12 103
(1위)
43 .303
(5위)
.445
(1위)
.477
(5위)
.923
(2위)
182.3
(2위)
6.05
(3위)
2007 38 123 544
(3위)
149
(2위)
34
(1위)
0 22
(4위)
72 78
(4위)
20 91
(2위)
44 .337
(2위)
.456
(2위)
.563
(2위)
1.019
(2위)
194
(2위)
6.87
(1위)
2008 39 114 443 107 16 2 8 49 49 1 46 37 .278 .364 .392 .756 111.2 1.63
2009 40 82 322 82 16 0 11 48 51 3 63 24 .329 .464 .526 .990 163.7 3.14
2010 41 64 175 34 6 0 1 20 10 0 28 20 .239 .371 .303 .674 90.2 0.25
<rowcolor=#373a3c> KBO 통산
(18시즌)
2135 8807 2318
(5위)
458
(3위)
25 351 1389 1299
(4위)
193 1278
(1위)
910 .316 .421
(2위)
.529 .950
(2위)
165
(1위)
91.06
(1위)[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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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중에 스톡킹에서 밝히길 당시 분위기 상 야수는 대부분 대학교를 진학하고 나서 프로로 오는게 트렌드였다. 고등학교 시절 워낙 잘나갔던 양준혁은 진작 영남대로의 진학이 유력한 상황이었고 삼성 감독의 진학 권유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한다.[2] 당시 대구상고 감독이 영남대로 부임예정이었고 그 상태에서 양준혁에게 영남대로의 진학을 권유했다고 한다. 대졸신인이 덜 뽑는 지금도 최채흥과 같은 사례가 있듯이 당시 대구 권역 출신 야구선수는 대학진학을 하면 한양대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 경우가 특이 케이스라고 한다.[3] 자세한 내용은 양준혁/논란 및 사건사고 문서를 참조[4] 당시에 입단 동기로 신인왕 경쟁자가 이종범, 박충식, 구대성, 이상훈이었다.[5] 단, 신인왕+홈런왕이라면 1996년의 박재홍이 있다. 이 둘은 프로야구가 생긴지 40년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누가 최강의 신인타자였나 다툼을 할만하다.[6] 그나마 신인왕으로서 최다 타격 기록을 죄 다 갈아치우고 최소 경기 최다 안타 기록까지 갈아치웠던 이정후가 타격왕까지 노렸으나 9번에서 1번타자로 나갔던 초기에 까먹은 스탯들 때문에 타격왕은 놓치고 만다. 타격천재라 불리는 이정후 조차도 못 한 기록이라는 것이다.[7] 여담으로 류현진은 KBO 역사상 유일무이한 신인왕+트리플 크라운+MVP를 가져갔다.[8] 1993 시즌은 김성래, 1996 시즌은 박재홍, 1997 시즌은 이승엽이 홈런왕에 올랐다. 1997 시즌에는 이종범과 홈런 공동 2위였다.[9] 만약 양준혁이 1992년에 정상적으로 쌍방울에 입단했다면 이 둘이 같은 유니폼을 입고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둘다 1969년생 동갑이지만, 프로 입단은 김기태가 2년 일찍 했다.[10] 물론 과거에도 삼성 소속으로 신인왕을 노릴만한 선수들은 많았다. 첫 사례인 1983년 장효조는 타격 1위를 차지했지만 이미 유명해서 신인으로 간주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OB 박종훈에 밀렸고, 1987년 류중일은 같은해 22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여 주목받은 빙그레 이정훈에게 신인왕을 내주었다. 1989년에는 강기웅이 타율 2위를 기록하며 맹활약했지만, 신인 최다승인 19승을 올린 태평양 박정현에게 졌다. 이듬해인 1990년에는 이태일이 노히트노런을 포함하여 10승 이상을 기록했지만, 팀을 정규리그 1위로 이끈 LG 포수 김동수에 밀렸다.[11] 이 위에는 차례로 '82 백인천, '15 테임즈, '83 장효조가 있으며 '93 양준혁 아래에는 '03 심정수가 있다.[12] 이같은 인식 때문에 1996년 박재홍 역시 데뷔 첫해부터 30-30 클럽을 기록하는 등의 독보적인 활약을 펼치고도 투수 4관왕을 기록한 구대성에게 MVP를 내주었다. 이후 신인왕과 MVP 동시 석권은 2006년에야 류현진이 처음 달성했다.[13] 이 절대적 타격성적은 대충 야마이코 나바로와 엇비슷한 수준이며 이쪽은 반대로 리그 평균자책점이 4점대 후반~5점대 초반에 OPS가 거의 8할대에 육박한다. 즉 2014년 나바로급 성적을 1986년과 함께 KBO 리그에서 가장 압도적인 투고타저 시즌에 낸 것이다.[14] 사실 1994년의 타율은 2할9푼9리7모로 삼할에 미치지 못하지만 사사오입으로 인해 기록상 3할로 간주하며, 실제로 2004, 2005 시즌의 장성호도 사사오입으로 3할에 턱걸이했다.[15] 좌익수가 아닌 우익수로의 변경이다. 1990년대 중후반 삼성 주전좌익수는 신동주 차지였다(1995년 개막전 당시도 좌익수로는 신동주가 출전했었다). 그리고 1995년 11월 한일 슈퍼게임에서도 양준혁은 한국대표팀의 우익수를 맡았다(1차전 기준 한국대표팀의 외야진은 좌익수 김상호-중견수 전준호-우익수 양준혁으로 구성되었다).[16] 이후 양준혁은 줄곧 외야 우익수 또는 지명타자를 맡았다. 좌익수로의 전환은 2003년이다.[17] 다음 해에 95-117-95로 다시 줄인다.[18] 물론 이종범의 경우는 1995 시즌에 방위복무로 인해 홈에서 열린 63경기에만 출전할 수 있었고 1996 시즌 들어서도 4월 말에야 경기에 나설 수 있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양준혁은 1993년 방위복무중인 상태에서 데뷔시즌을 맞았고, 그 해 시즌 중반에 전역했다.[19] 타율, 안타, 득점, sWAR* 에서는 아쉽게 2위를 기록했는데 이건 WAR에서 이종범이 유격수라 포지션보정치를 크게 받은 것이다.[20] 임창용은 당시만 해도 선동열에 이어 해태의 마무리를 맡아 최연소 구원왕을 차지했으며 잠수함 투수로 보기 드문 150km/h 강속구를 던지고 있었다. 당시 용병이 최초로 도입되어 좋은 타자 용병은 구하기 쉽지만 좋은 불펜 투수 용병은 구하기 힘들다는 인식이 팽배해 가치가 급상승 했다. 그리고 아시안게임에서 야구가 정식종목으로 채택이 되 병역면제를 노릴수도 있었다.[21] 황두성의 경우는 해태 실무자의 실수로 트레이드된 사례다. 원래 해태가 원했던 선수는 정현욱이었는데 '덩치 크고 밥 잘먹는 투수'라고 전달해서 고의적이였는지 실수였는지 황두성을 보낸 것. 물론 해태는 황급히 정정하려 했으나 이미 짐싸고 입단식까지 한 상황. 무른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인지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황두성은 해태 이적 후 성적 부진으로 3년만에 퇴출을 당한다.[22] 이후 본인의 유튜브를 통해 이 부분에 대해서 언급을 했는데 혈기왕성할 때라 많이 좀 대들었다고 한다. 부드럽게 해야되는데 너무 과하게 하다 보니 밉보였지 않았나라며 그때를 회상 했다.[23] 본인 자서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처음 약속한 팀은 수도권 연고에 모기업의 지원이 받쳐주는 현대 유니콘스였다고 한다. 그래서 99시즌 중에 이숭용과 트레이드가 되나 싶었지만 현대와의 트레이드가 여의치 않자 김응용은 최대한 비슷한 조건을 맞춰주기 위해 서울 연고에 역시 모기업이 지원해주는 LG 트윈스로 보내줬다. 이 때의 일화와 FA 미아 위기의 양준혁을 삼성이 재영입하도록 힘쓴 일로 아직도 양준혁은 김응용을 최고의 은사로 꼽고 있다.[24] 유난히 지독했던 군기와 서열, 리그에서도 손꼽히는 부실한 모기업과 지원과 돈도 없는 구단이 양준혁의 연봉 1억 4,000만원을 줬다.[25] 특히 가장 중요했던 대만전에서 6회 볼넷출루 후 득점까지 하게 되는데, 이 경기가 연장승부까지 간 끝에 승리했다는 점에서 6회 양준혁의 득점은 말 그대로 귀한 득점이었다. 대만전 최종스코어는 5대4로 한국 승리.[26] 도쿄돔에서 펼쳐진 4차전에서는 세이부 라이온즈의 원투펀치 중 한명인 니시구치 후미야를 상대로 홈런도 1개를 기록했다.[27] 삼성의 해태 트레이드 건에서 억울함을 느껴 활동하게 됐다고 밝혔다.[28] 사실 성적으로 엄밀히 따지면 커리어 하이는 1996년, WAR 8.56. 본인이 단 한번 3할-30홈런-100타점을 기록한 이때가 유일하기 때문에 이때를 꼽은듯 하다.[29] 오철민과 최상덕이 첨언하기를 대구에서 가져온 이삿짐이 많지 않았으며 오철민, 곽현희 뿐만 아니라 최상덕 등 몇 명의 후배 선수들까지 합세해서 이삿짐 운반과 정리는 수월했다고 한다. 양준혁은 이때 후배들에게 짜장면을 사줬다고 밝혔다.[30] 김정수는 '아따 준혁아 어째 인자 오냐? 기다리다 혼났다.'라고 말했으며 양준혁 본인이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식사를 시작하지 않았던 모습에 놀랐다고 한다.[31] 고로 초창기 마구마구에서는 파72/컨80의 똑같은 능력치를 부여받았었다. 양준혁이 홈런 2개 더 쳤지만 99년도는 132경기 체제고 97은 126 경기 체제였기 때문.[32] 96, 98 타격 3관왕이었으니[33] 98년도 연봉이 1억 4천이었고 3관왕을 했는데 이적 후 그 팀 형편 때문에 연봉이 동결되었다.[34] 이것은 누차에 걸쳐서 강조하지만 해태 프런트의 잘못이다. 팀의 가치보다는 근시안적인 운영을 했다. 팀을 팔기 전 김진우한테 7억을 안겨줬다.[35] 트레이드 머니 20억 원은 보너스.[36] 손혁도 위 문단에 쓰인 해태의 분위기때문에 트레이드를 거부하다가 임의탈퇴까지 갔다.[37] 이 시즌 양준혁의 등번호는 57번이다. 그 당시 10번은 안상준이 달고 있었다.[38] 여기서 홈런과 타점은 제외. 홈런은 15개가 최다였고 타점은 2년 연속으로 92타점을 기록했다. 다만 홈런이 줄어든 건 해태 시절 홈구장은 광주구장, LG 시절엔 잠실구장임을 감안해야 한다. 최고의 타자친화적 구장에서 투수친화적 구장으로 갔으니 홈런 개수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만일 LG에서도 해태 시절처럼 30홈런을 쳤다면 LG는 양준혁이 얼마를 제시하더라도 무조건 양준혁을 잡았을 것이다.[39] 농담이 섞였지만 대놓고 잠실의 주인은 LG라고 말할정도다.[40] 현재까지도 MLB 보스턴 레드삭스밤비노의 저주에 버금가는 LG 구단 최대 뻘짓으로 회자된다. 양준혁은 중장거리형 타자로 넓은 잠실 야구장 적응이 쉽지 않았고, 초반엔 성적부진으로 2군행을 통보받는 굴욕까지 겪었다. 본인은 절망하지 않고 끊어 치는 타격으로 바꾸며 활약해 2001년에 타격왕을 기록했고, 그해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했다. FA가 되자 LG에 30억을 불렀으나 구단은 협상조차 안하고 깔끔하게 포기 선언을 해버린다. 선수협 주동자로 찍혀있는 바람에 8개 구단 모두 양준혁과 계약을 안하기로 합의했고, 삼성 김응용감독이 구단에 요청한 덕택에 저렴한 금액에 계약했다. LG는 양준혁이 떠난 직후 2002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으나 삼성 라이온즈에 2승 4패로 탈락했으며, 그 이후 롯데 자이언츠의 8년 8888577 비밀번호를 넘어서는 6668587667를 기록하며 역대 최장기간 플레이 오프 진출 실패를 기록했다.[41] 50타점으로 60타점 미만[42] 삼성은 선수가 마이너스 옵션 실행 요건에 충족한 성적을 찍어도 팀이 우승하면 실행하지 않았는데, 심정수에게도 그랬다.[43] 종전 기록은 2000년 홍현우(LG)와 김기태(삼성)의 4년 총 18억. 이후 2003년 시즌을 마치고 마해영이 28억, 진필중이 30억, 정수근이 40억 6,000만원을 받으며 기록이 다시 경신된다.[44] 다만 이 당시에도 삼성 구단은 양준혁이 선수협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영입을 껄끄러워 했는데 해태 시절에 같이 한 바 있던 김응용 감독이 우승을 위해선 좌타자를 보강해야 한다는 이유로 강력히 요청하는 바람에 위에 상기한 대로 옵션을 여러가지 걸어서 계약했다고 한다.[45] 그와중에 이승엽이 뒷담으로 김응용 감독을 비난하다가 양준혁의 레이더에 걸려서 많이 얻어 맞았다고 한다.[46] 그래도 그 부진했던 02, 05시즌 모두 한국시리즈에선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02시리즈에서는 고타율로 이승엽의 부진을 메꿨으며, 05년에는 3차전에서 시리즈를 결정짓는 쓰리런 홈런을 작렬했다. 큰경기에 약한 타자라고 트레이트됐던 그의 이력을 생각해보면 정말 결정적인 활약. 특히 05년 3차전 쐐기 쓰리런에선 삼성팬을 향한 화려한 세리머니를 선보였는데, 그의 울분을 알만하다.[47] 이 최고령 타이틀은 10년 후에 라뱅이 경신한다.[48] 다만 이 날 경기는 비가 온 것도 감안해야 된다. 실제로 더블헤더 2차전은 우천취소가 되어 열리지 못했다.[49] 신인 시절과 LG 시절에도 잠깐 1루수를 보았다.[50] 심지어 사구를 9개나 얻어내며 본인 커리어 중 단일시즌 최다 사사구를 얻어내는 기록을 만 37세에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후 추신수가 KBO 첫 시즌인 2021시즌에 무려 만 39세의 나이로 103볼넷과 12사구를 얻어내는 진기록을 보였다.[51] 이는 14년이 흘러 추신수가 2021년 39세 2개월 22일로 20-20을 달성하며 최고령 기록을 갈아치우게 된다. 다만 타율이 낮아 3할 20-20 기록은 아직까지 양준혁이 최고령으로 남아있다.[52] 더군다나 홈런 페이스만 꺾였을 뿐, 전체적인 타격 페이스는 오히려 9~10월 상승곡선을 그리면서 시즌 타율도 최종 0.337로 마무리 지었다.[53] 나이를 생각하지 않고 보더라도, 말도 안되는 역대급 비율 스탯인 건 분명하다. 07양준혁의 wRC+ 194.0이 얼마나 말이 안되는 스탯이냐 하면, 54홈런과 56홈런을 쏘아올린 99이승엽(190.5)과 03이승엽(186.5)을 뛰어넘고, 박병호, 이대호, 이정후의 그 어떤 커리어하이 시즌보다도 위에 있는 스탯이다.[54] 이날 연장 12회까지 갔는데 12회 한 이닝에만 삼성은 10점을 뽑아 16-6으로 승리했다.[55] 상대 투수는 불과 작년까지도 같은 팀 동료였었던 제이미 브라운이었고, 초구를 강타하여 우익선상 2타점 적시 2루타로 달성한 기록.[56] 이 시리즈에서 삼성은 두산한테 1승 2패로 루징 시리즈를 당했으나 한화가 롯데에게 패배하는 바람에 삼성이 사실상 4위권을 확정지으며 어렵게 포스트시즌을 진출했다.[57] 첫 번째 멤버는 2008시즌 직후 통산 209승, 103세이브를 올렸던 회장님 송진우, 세 번째 멤버는 역시 2010안타를 때리고 547도루를 누적시켰던 대도 전준호이다.[58] 무릎팍도사에서 내걸었던 공약이다.[59] 실제로는 잔디에 스파이크가 걸려서 그냥 뒷걸음질을 쳤다.[60] 하필 그때가 양준혁의 출루율 1위 달성일이었기에 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61] 양준혁 본인조차도 프로경력 중에 이런 부상은 처음이라면서 굉장히 안타까움을 토로하기도 했다.#[62] 이로 인해 4위권 순위 싸움에 박차를 가해야 할 삼성은 7월 11일 진갑용의 사구로 인한 손목 골절로 인한 시즌 아웃을 시작으로 양준혁의 부상, 배영수의 역대급 부진 속 8월 중순 이른 시즌 아웃 판정, 그리고 백업 요원으로 쏠쏠하게 활약해주던 현재윤, 조동찬의 연이은 부상으로 인한 시즌 아웃 판정이 계속 겹치면서 전력이 약해졌고, 잇몸야구로 인한 한계를 드러나며 8~9월 더 이상 상승세를 타지 못하고 5위로 내려앉아버렸다.[63] 해외까지 합한다면 일본프로야구 규정타석 2시즌을 소화한 이승엽과 4시즌을 소화한 이대호가 총 16시즌으로 타이다. 물론 타국리그까지 합한거라 비공식이긴 하지만 이대호가 2021년 시즌 규정타석을 소화한다면 17시즌으로 갱신이 된다.[64] 4월에 4할이 넘는 절정의 타율을 기록함에도 불구하고 플레튠으로 기용되어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삼성이 4월 한달간 총 23경기에 주전들은 80타석 이상 소화했으나, 양준혁은 중간 대타로 출전포함 18경기 54타석 출전에 그쳤다. 팬들은 선동열이 고의로 좋은 타격감을 떨어뜨린다는 소문까지 나올정도였다.[65] 김재현의 수비는 말을 안 해도 유명하다. 지명타자 전환 이후에 1루수 전향도 시도했지만 얼마 안 가서 팀에서 수비 훈련에 끼워주지 않는다며 본인이 한탄을 했을 정도다.[66] 은퇴 후에 인터뷰 등에서 이 홈런을 언급하며 사실 선수생활을 마무리하는 순간은 바로 이 올스타전 경기라는 식으로 이야기 하였다. 안그래도 상징성있는 올스타전인데다 삼성의 홈인 대구구장에서 경기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후술할 올스타전 인터뷰에서도 어딘가 작별인사와도 같은 말을 했던 듯 하다.[67] 과거 김성근이 삼성 감독을 맡았을 때 삼성 팬들은 김성근식 야구를 싫어하였고, 김성근이 물러난 후 3년 연속 포스트시즌 탈락 등 암흑기가 오는 등 김성근과 삼성 팬들 관계는 그다지 좋지 못하다.[68] 이때 브금은 You Raise Me Up[69] 2021년 본인의 유튜브를 통해 밝힌 바에 의하면 2010년 시즌 중반, 구단에서 호출을 하였고 감독이 어린 선수 위주로 가려고 한다. 계속 가면 앞으로는 2군에 가야 한다.라는 말 이후에 그러면 은퇴하겠다라고 선언을 했다. 이후에 구단에서는 고맙다라고 함과 동시에 은퇴식을 성대하게 해주었고, 네가 원하면 다른 팀에 조건 없이 보내주겠다(실제 당시 SK 감독이었던 김성근 전 감독이 제의를 했다고 밝혔다. 양준혁 본인도 SK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대구와 삼성에서 야구를 시작했고, 대구에서 끝내는 게 맞다고 판단했습니다라고 한 인터뷰에서 SK에 가지 않은 이유를 밝혔다.)라고도 언급했다고 밝혔다.[70] 훗날 양준혁은 다큐멘터리 한국프로야구 레전드 10人 장효조 편 말미에서 "제가 10번을 달고 영구결번의 영광을 누렸지만 이 번호는 원래 장효조 선배님 겁니다."라며 공동 영구결번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71] 양준혁 본인도 김광현과의 이 세 승부가 굉장히 기억에 남았는지 은퇴 후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도 김광현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 절대 빼먹지 않는다.[72] 재밌는 사실은 양준혁과 마지막으로 상대했던 송은범은 긴 시간이 지나 양준혁의 팀인 삼성으로 이적했다는 것이다.[73] 특히 이승엽 와도 자리 없다 이 말 한 마디 때문에 이승엽의 국내 복귀를 막아버렸다는 의견도 있었다. 선동열이 2009 시즌 종료 후 깔끔하게 물러갔거나, 선동열이 양준혁을 박대하지 않았다면 이승엽과 양준혁이 1997년 이후 14시즌만인 2011년에(이승엽과 요미우리의 계약은 2010 시즌까지이므로) 재회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74] 투수 제외, 야수 기준[75] 투수 포함 전체 1위[76] 정확히는 .294[77] 물론 이조차도 대단히 겸손한 말인데, 한국프로야구에서 베테랑 선수의 기준이라 할 수 있는 3천타석 이상 타자 중 상위 47명밖에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통산타율 .294도 대단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은퇴까지 단 한시즌도 .294를 못치는 선수도 즐비하다. 은퇴선수 중 .294의 통산타율을 가진 선수는 김기태(1969), 김재현(1975), 박한이, 마해영이 있으며 현역 선수로는 김하성이 있다. 나열된 선수들이 전부 한국야구 역사에 남을만한 타자라는 점을 감안해보자.[78] 최다 2루타·홈런·타점·득점·루타[79] 박용택은 고교 시절에 턱관절 부상으로 WBC와 별개로 면제되었다.[80] 큰 의미는 없지만 이승엽이 일본성적까지 합한다면 통산 WAR는 87.68이다. 아울러 이대호의 KBO,NPB,MLB 합한 성적은 75.2다.[81] 에릭 테임즈(188.8), 펠릭스 호세(17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