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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옥

오봉옥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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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92 KBO 리그 승률왕

{{{#ffffff [[삼성 라이온즈|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52번}}}
정태영
(1990)
오봉옥
(1992~1994)
황두성
(1998)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8번
김민우
(1994)
오봉옥
(1995)
변대수
(1997~1999)
{{{#000000 [[쌍방울 레이더스|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67번}}}
결번 오봉옥
(1996~1998)
결번
{{{#000000 [[쌍방울 레이더스|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27번}}}
정수찬
(1997~1998)
오봉옥
(1999~1999.4.15.)
박재용
(1999.4.16.~1999)
해태/KIA 타이거즈 등번호 67번
박기택
(1994~1995)
오봉옥
(1999.4.16.~2001)
정현택
(2002~2003)
{{{#ffffff [[KIA 타이거즈|KIA 타이거즈]] 등번호 20번}}}
강태원
(1991~2001)
오봉옥
(2002~2003)
윤석민
(2005~2009)
한화 이글스 등번호 67번
김민규
(2002)
오봉옥
(2004~2006)
조성우
(2008~2010)
}}} ||
파일:오봉옥.jpg
오봉옥
吳奉玉 | Oh Bongok
출생 1968년 7월 8일 ([age(1968-07-08)]세)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태흥리[1]
학력 태흥초 - 남원중 - 포철공고[2] - 영남대 (중퇴)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92년 2차 6라운드 (전체 45번, 삼성)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 (1992~1995)
쌍방울 레이더스 (1996~1999)
해태-KIA 타이거즈 (1999~2003)
한화 이글스 (2004~2006)
지도자 제주제일중학교 야구부 감독 (2010~2018)
본관 군위 오씨[3]
가족 아내, 딸 2명[4]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4. 여담5. 연도별 주요 성적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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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성, 쌍방울, 해태/KIA, 한화를 거친 전 야구선수. 역대 KBO 리그에 입문했던 선수 중 최초의 제주특별자치도 출신 선수다. 박경완이 현역 시절 받아본 직구 중 순위권으로 꼽을 만큼 묵직한 돌직구와 고향인 제주도의 이미지를 결합한 돌하르방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임팩트 있던 데뷔 시즌- 2년차 이후 극도로 형편이 어려웠던 쌍방울, 해태, 한화에서 뛰어서 누적 스탯도 화려하지 않고, 인기도, 유명세도 없지만 실제로 보여준 실력은 꽤 인상적이었던 투수이다. 15년간이나 계속해서 투수로 뛰면서 막판에 엄청나게 방어율이 올라갔음에도 통산 방어율 3점대(3.99)를 기록했다. 그리고 잦은 등판과 연투를 피하지 않아서 488경기나 등판하고 1000이닝 이상을 막아냈다. K/BB 비율 스탯, 투구이닝 등도 준수한 편.

2. 선수 경력

1968년 7월 8일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태흥리에서 아버지 오정식과 어머니 김원만 사이의 3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는 야구선수가 아니었다. 태흥초등학교와 남원중학교를 다닐 때 취미로 야구 동아리 활동을 한 정도가 전부.

제주 함덕고등학교 1학년 재학 시절 포항으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에서 선수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감독이 여행간 학생들 근처로 떨어진 공 좀 던져달라고 했다가 오봉옥이 던진 공이 상당히 멀리까지 날아가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야구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로 전학하여 본격적으로 야구를 배우기 시작했다.

고교 졸업 후 영남대학교에 진학했으나 1학년 때 중퇴하고 프로 진출을 위해 롯데와 MBC에 테스트를 받았다. 배성서 당시 MBC 감독의 배려로 이듬해인 1989년 초 동계훈련을 받았다. 그런데 바로 다음 달 징집 통지서를 받아 결국 입대하여 현역으로 복무했다. 제대한 후 1992 신인지명 때 삼성 라이온즈에 2차 6라운드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프로 입단 첫해 중간계투로 등판해 신인 데뷔전이후 최다 연승인 13연승을 기록하였다. 시즌 기록은 13승 무패 2세이브(승률 100%)로 승률 1위에 올랐다. 참고로 이 시즌에 정말 인생의 모든 운을 다 끌어모은 듯이 운좋게 승리를 따냈다. 지는 경기의 9회 1사 만루 상황에서 나와 공 하나로 병살, 팀은 9회 역전승, 또는 앞서던 경기 불질러서 뒤집혔지만 타선이 역전승을 한다던가 하는 엄청난 운을 경험했다.[5] 당시 삼성에서도 이런 오봉옥의 징크스를 강하게 의식해서, 접전인 경기, 또는 근소하게 뒤지고 있는 경기에 오봉옥을 승리의 마스코트 격으로 자주 투입했다. 현대 야구의 추격조 에이스 격.

물론 이런 행운도 실력이 뒷받침되었으니 따라왔다. 묵직한 구위로 장타를 잘 맞지 않는데다, 몸이 빨리 풀리고 필요시 3이닝 이상 연투하면서도 구위를 유지한다는 특성 때문에 여러모로 많은 경기, 점수 차가 적어서 팽팽한 승부에 자주 등장했다. 이는 현대 야구에서도 각광받는 '터프 셋업맨'의 개념과 가깝다.

그럼에도 신인왕은 타지 못했다. 염종석이 200이닝을 던졌고 2점대 방어율에 17승(다승 3위)이라는 훌륭한 성적을 거두면서 소속팀인 롯데의 우승에 일등공신 역할을 했기 때문.[6]

1995년에는 135⅓이닝을 소화하고 2.90의 평균자책을 기록하는 등 수준급의 성적을 기록하였다. 그런데 그해 12월 만취 상태에서 교통사고를 일으켜 동승자가 사망하면서 그의 야구인생은 틀어지기 시작했다. 2달 간의 구치소 생활 끝에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 삼성 구단은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본보기로 오봉옥을 방출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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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

프로 데뷔 당시 삼성 감독이었던 김성근 쌍방울 감독의 부름을 받고, 쌍방울에 입단했다. 당시 김성근 감독은 마무리 조규제를 제외하곤 모든 투수를 선발, 불펜 보직 구분없이 매일 투입하는 극단적인 투수 기용을 보였는데, 오봉옥은 김성근 감독의 취향에 딱 맞는 선수였다. 그런 쌍방울의 투수 체제에서 성영재에 이어 많은 이닝을 책임졌고, 많은 승수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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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해태 타이거즈 시절.

쌍방울의 해체를 앞둔 1999년 4월, 박계원과 함께 송구홍, 박재용의 트레이드 상대로 해태로 이적했다. 이강철이 떠난 해태 투수진의 맏형으로서 카리스마를 발휘하여 팀에 금방 융합할 수 있었고, 당시 투수진이 박살난 해태에서 믿을맨 역할을 착실히 해냈다. 당시 100이닝+10승투수인 곽현희가 6점대 방어율을 찍은 것을 생각해보면, 100이닝을 던지고 3점대 방어율을 찍은 오봉옥의 성적은 정말로 대단한 것이다.

1999년 당시 해태의 상황을 보자면 해태는 모기업인 해태제과1997년 한국시리즈 우승 직후 부도난 이후로 선동열이종범의 임대료로 구단을 운영하던 상황이었고 1998년에 15승을 거둔 이강철과 12승을 거둔 이대진이 동시에 부상으로 이탈했고 유망주 김상진이 위암으로 쓰러졌다. 게다가 당시 중무리 역할을 맡아주었던 임창용까지 구단의 운영비 마련을 위해서 삼성에 30억원+양준혁+곽채진+황두성을 상대로 팔아버린 상황이라 믿을 수 있는 투수가 없었다. 그 상황에서 100이닝을 던지며 3점대 방어율을 찍었으니 정말이지 대단한 성적.

게다가 1999년은 역대 최고의 타고투저였다.[7][8] 이 해 우승팀인 한화 이글스정민철구대성을 빼면 3점대 방어율의 투수는 없었다. 이런 리그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오봉옥은 상당히 좋은 투수였다.

해태 역사상 마지막 원정경기였던 2001년 7월 26일 사직 롯데전에서 선발 등판, 4회까지 6대 2로 앞섰다. 해태 역사상 마지막 승리투수가 될 뻔했으나 5회에 조경환에게 만루홈런을 맞았고 결국 그경기는 7:7 무승부로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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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KIA 타이거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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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한화 이글스 시절.

그 후에도 KIA에서 중간계투로 활약하다 2004년 한화로 이적했으나, 계속 하락세를 탄 끝에 2006년 시즌 후 방출되어 은퇴했다.

어째서인지 마구마구 같은 게임에서는 상당히 평가가 짜다. 아무래도 선수 본인이 두각을 드러낸 시기가 길지 않은데다가 여러팀을 떠돌았던 탓에 인지도도 낮은 편인 것이 저평가에 한 몫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신 프로야구 매니저에서는 낮은 코스트에도 쏠쏠하게 써먹을 수 있게 나왔었다. 컴프매에서도 96시즌 쌍방울 카드는 쌍올에서 쓰이며, 00시즌 해태 카드도 상당히 좋은 스탯을 받았다.

3. 지도자 경력

은퇴 후 고향인 제주도로 돌아가 2010년부터 2018년까지 제주제일중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재직했다. #

4. 여담

앞서 언급했듯 KBO 리그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제주도 출신 야구선수였기에 훗날 강민호, 김문호, 고원준 등 제주도 출신 야구선수가 등장할 때마다 오봉옥의 이름도 언급되는 경우가 있다. 다만 제주도의 야구 인프라가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9] 강민호, 김문호, 고원준 등도 초등학교 때까지만 제주에서 자랐고 중학교 때부터는 육지에서 야구 유학을 하는 경우가 많다.

비시즌 기간동안 고향 제주도에서 몸을 만들어 다른 선수들의 부러움을 샀다고 한다. 한 번은 감귤을 수확하던 아내가 자꾸 본인에게 뭐가 날아오자 쳐다봤더니 오봉옥이 자신의 머리쪽을 향해 감귤을 던지며 제구력을 가다듬고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투수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2 삼성 38 126⅔ 13 0 2 - 1.000[10]
(1위)
3.55 114 7 78 64 58 50 1.48
1993 38 74⅓ 2 7 7 - 0.222 3.39 72 5 38 43 31 28 1.45
1994 19 33 0 4 3 - 0.000 6.82 46 4 17 13 27 25 1.85
1995 39 133⅓ 6 9 5 - 0.400 2.90 117 4 54 99 56 43 1.25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6 쌍방울 33 135⅓ 9 7 4 - 0.563 3.06 114 7 62 86 55 46 1.23
1997 22 55⅓ 7 7 2 - 0.500 5.20 68 4 29 43 36 32 1.66
1998 27 88⅔ 2 6 0 - 0.250 5.68 108 12 46 44 60 56 1.70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9 쌍방울 / 해태 48 116⅓ 6 9 8 - 0.400 3.40 118 12 65 80 51 44 1.51
2000 해태 48 113⅓ 4 7 8 8 0.364 2.86 100 9 55 110 46 36 1.32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1 KIA 50 106⅓ 5 5 14
(5위)
0 0.500 4.74 104 10 40 80 59 56 1.35
2002 40 54⅓ 1 3 0 3 0.250 3.31 62 10 26 33 22 20 1.58
2003 4 4⅔ 0 0 0 0 - 5.79 7 0 4 2 3 3 2.14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4 한화 40 60⅓ 5 2 0 2 0.714 5.97 70 7 27 31 40 40 1.53
2005 40 43 3 2 3 2 0.600 5.65 54 8 22 24 28 27 1.70
2006 2 1⅔ 0 0 0 0 - 10.80 4 1 1 2 2 2 3.00
KBO 통산
(15시즌)
488 1146⅔ 63 68 56 15 0.451 3.99 1158 100 564 754 574 508 1.46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92년 2완투 1완봉
1995년 3완투 1완봉
1996년 4완투 2완봉
KBO 통산 9완투 4완봉
역대 타자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6 쌍방울 레이더스 2 1 .000 0 0 0 0 0 0 0 0 .000 .000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0 해태 타이거즈 1 1 .000 0 0 0 0 0 0 0 0 .000 .000
KBO 통산
(2시즌)
3 2 .000 0 0 0 0 0 0 0 0 .000 .000

6. 관련 문서


[1] #[2] 2학년 때 함덕고에서 전학.[3] 중말파 18세 옥(玉) 항렬.[4] 차녀 오은수는 사이클 선수로 활동 중이다.[5] 1992년 4월 30일 쌍방울전에서는 공 5개밖에 던지지 않고도 승리투수가 되었다![6] 게다가 그해에는 염종석 외에도 빙그레의 고졸 에이스 정민철, 팀 동료인 2번 타자 동봉철 등이 신인 선수로 맹활약했다. 이에 비하면 오봉옥은 중간계투라서 이들 세 선수에 비해 덜 주목을 받았고, 100% 승률도 실력보다는 운이 뒷받침된 특이한 기록 정도로 취급되었다.[7] IMF 경제위기 당시 야구공 납품업체들이 도산하면서, KBO는 다른 업체의 공인구로 쓰게 되었는데.. 문제는 이 공의 실밥 마감이 엉망이라서 반발력이 지나치게 좋았다, 선수들도 다들 이 공을 '뻥볼'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문제있는 공인구는 1년간 유지되었고, 결국 이승엽의 시즌 최다 홈런 경신을 포함한 타자들의 관련 기록 경신이 대거 이루어졌다. 시즌 후 공인구 규정이 강화되면서야 이 타고투저가 끝난다.[8] 이를 두고 KBO가 IMF로 인한 경기침체를 극복하고, 국민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의도적으로 타고투저를 유도하기 위해 저질공인구를 묵인했다는 의혹이 있는 부분이다.[9] 2002년 제주관광산업고등학교 야구부가 창단되기 전까지 제주도 내 고등학교 중 야구부를 갖춘 학교는 없었다. 이 때문에 제주제일중학교에서 야구를 배웠던 선수들이 어쩔 수 없이 육지로 나가서 야구를 배워야 했다. 현재도 제주도 내에 야구부가 있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제주제일중과 제주고등학교 뿐이다.[10] 최초의 100% 승률왕. 02년 김현욱, 23년 쿠에바스가 이 기록을 다시 한 번 작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