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d64ff><tablebgcolor=#0d64ff> | 르망 24시 종합 우승 기록 |
| 프랑스의 前 레이싱 드라이버 | |||
| | |||
|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앙드레 로시뇰 André Rossignol | ||
| 본명 | 앙드레 에밀 앙리 로시뇰 André Émile Henri Rossignol | ||
| 출생 | 1890년 8월 9일 프랑스 파리 17e 아롱디스망 | ||
| 사망 | 1960년 12월 5일 (향년 70세) 프랑스 파리 16e 아롱디스망 | ||
| 국적 | | ||
| 상훈 | 전쟁십자훈장 1914-1918(Croix de guerre 1914-1918)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 (1952) | ||
| 정보 더 보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colbgcolor=#eeeeee,#191919> 르망 24시 | ||
| 출전 횟수 | 5회 | ||
| 종합 우승 | 2회 (1925, 1926) | ||
| 클래스 우승 | 3회 (1923, 1925, 1926) | ||
| 소속 | 로렌 디트리히 (1923, 1924, 1925, 1926) 그랑 가르지 생디디에 파리 (1928) | }}} | |
1. 개요
프랑스 출생의 前 레이싱 드라이버이다. 최초로 르망 24시 연속 종합 우승을 달성한 업적을 가지고 있다.2. 생애
아버지 장 로시뇰과 어머니 에밀리 우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장은 아르 에 메티에(Arts et Métiers) 출신의 엔지니어였으며, 1885년 동기인 에밀 로제와 함께 '로시뇰 사블리에(Sablières Rossignol)'라는 채석장을 설립해 운영하였다. 이 사업 덕분에 로시뇰의 가족은 빠르게 번창할 수 있었다. 앙드레에게는 마르셀이라는 형제가 있었는데, 그는 피에르 퀴리의 팀에서 실험 조교로 일하게 된다.1888년, 앙드레의 대부가 될 에밀 로제는 독일 벤츠 자동차와 엔진을 프랑스에 처음으로 수입한 인물이 되었으며, 사블리에 사업으로 얻은 자금을 신생 자동차 산업에 대한 열정에 투자했다. 로시뇰은 1894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일부 주장에 의해 세계 최초의 자동차 경주로 간주되는 파리-루앙 대회와 이듬해 열린 파리-보르도-파리 경주에 자신의 '로제(Roger)' 자동차를 타고 참가하였다. 1898년 에밀 로제가 세상을 떠났고,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부모와 함께 다양한 모터스포츠를 경험했다.
로시뇰은 사업으로 번 돈과 가족의 유산으로 부족함 없는 청춘을 보냈다. 당시 그는 신흥 비행술과 항공우주학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파리의 향락적인 삶을 만끽했다. 군 복무는 자원입대 형식으로 보급병으로서 후방에서 안전하게 마쳤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로시뇰의 삶에 극적인 전환점을 가져왔다. 로시뇰은 전쟁 발발 후 고위험 임무였던 항공병에 자원입대하게 된다. 당시에는 항공기의 신뢰성이 매우 낮아 생명을 담보로 한 일이었다.
그는 갓 창설된 아보르(Avord) 항공학교에서 훈련을 받았고, 이곳에서 미래의 에이스 조종사인 조르주 기느메르와 눈게세르와도 함께 수학했다. 전시 중 로시뇰은 프랑스 공군 조종사로 자격을 취득한 초기 인물 중 한 명이 되었으며, 1915년 4월 29일 부아쟁 항공기로 조종사 자격증 866번을 받았다.[1]
1915년 5월 4일 상병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8월 3일에는 하사로 승진하여 파리 요새지구(Camp Retranché de Paris)의 V97 비행대에 배속되었다. 이 부대는 파리 방공을 담당했지만, 독일군 항공기의 위협은 드물어 대부분의 임무는 무난한 정찰 순찰이었다. 다만 당시 항공기의 극단적인 불신뢰성으로 인해 비행 중 엔진이 예고 없이 꺼지는 등 수많은 소동을 겪었다.
1916년 6월 18일, 그는 같은 요새지구 소속의 N395 전투비행대(제461 전투비행대)로 전출되어 뉘포르(Nieuport)기를 운용하게 되었고, 7월 18일에는 소위로 임관되었다. 1917년 4월 1일에는 다시 제350 비행대(제462 전투비행대)로 전출되었다.
1917년 10월 6일, 그는 항공 기술 지원부로 발령받았고, 1918년 7월 23일에는 군에 납품되는 신형 항공기의 검수 장교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시험 비행 조종사로 활동하며, 1918년 독일 폭격기와의 전투에 투입되던 CRP 부대의 전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곧바로 제대되지 않았으며, 1919년 2월 15일부터 9월 18일까지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이는 당시 유행했던 스페인 독감에 의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1919년 10월 6일에 공식적으로 제대하였다.
로시뇰은 전쟁 내내 비교적 조용한 임무에 머물렀지만, 두 차례의 공군 훈장을 받았다. 또한 파리에 배치되어 있던 덕분에 제1차 세계대전의 전설적인 비행 에이스들과 어울리며 사교와 친목을 다지기도 했다.
3. 활동
| |
| 1926 르망 24시의 로시뇰 |
로렌-디트리히가 1927년 르망 24시에 참가하지 않기로 결정한 후, 로시뇰은 크라이슬러에 고용되어 앙리 스토펠과 함께 레이싱 활동을 전개한다. 그해 스토펠과 로시뇰은 3위로 경기를 마쳤다.
로시뇰은 스파 24시에도 참가하여 1925년에 2위, 1928년과 1929년에 6위를 차지했다.
4. 참고 문헌
- Complete Archive of André Rossignol, Racing Sports Cars
- André Rossignol, ACO
- André Rossignol, The Golden Era of Grand Prix Racing
[1] 기느메르는 853번으로 3일 앞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