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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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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아프리카로 보는 경우도 적지 않다.[2] 시나이 반도는 예외적으로 서아시아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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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 인민 민주 공화국
الجمهورية الجزائرية الديمقراطية الشعبية
République algérienne démocratique et populaire[4]
국기
면적(㎢) 2,381,741
인구 41,063,753명 (2017년)
수도 알제 (Alger, [5]الجزائر)
시차 UTC+1
화폐 알제리 디나르 (DZD)
GDP 명목 1683억 1800만$(2016)
1인당 GDP 명목 4,129$(2016), PPP 7,333$(2011)
정치체제 이원집정부제
대통령 압둘아지즈 부트플리카 (عبد العزيز بوتفليقة‎)
임기 1999년 4월 27일 ~ 2004년 4월 8일
2004년 4월 8일 ~ 2009년 4월 9일
2009년 4월 9일 ~ 2014년 4월 17일
2014년 4월 17일 ~ 2019년 4월 27일 (예정)
총리 압둘말리크 살랄 (عبد المالك سلال)
임기 2014년 4월 29일 ~
국가 맹세 (아랍어: نشيد وطني جزائري)
공용어 아랍어
국민어 프랑스어 (사무직 & 교육용), 베르베르어 (헌법상)
종교 이슬람
대한수교현황 남북한 동시수교 (남한 1990, 북한 1963)
بالشعب و للشعب
국민에 의해, 국민을 위해

1. 개요2. 역사3. 군사4. 경제와 자원5. 스포츠6. 종교7. 국제 관계
7.1. 프랑스7.2. 아프리카 국가들7.3. 한국7.4. 관련 문서

1. 개요

아프리카 북부 마그레브 지역에 위치한 아랍 국가. 프랑스어 발음인 알제리(Algérie)로 알려져있다. 수도는 알제.

서쪽으로 모로코, 서사하라,[6] 모리타니, 남쪽으로 말리, 니제르, 동쪽으로 리비아, 튀니지와 국경을 접한다. 그리고 직접 국경을 접하진 않았지만 북쪽의 지중해만 건너면 바로 있는 주변국가들로는 스페인, 프랑스가 있으며 지브롤터와도 멀지 않은 편이다. 마르세유에서 알제까지의 거리가 마르세유에서 파리의 거리와 비슷하다!

파일:attachment/알제리/Algeria-color.jpg

아프리카 대륙 내에서 가장 땅이 넓은 나라이다. 동시에 세계에서 10번째로 큰 나라다. 아랍연맹 회원국가들 중에서 가장 영토가 넓으며, 북아프리카를 중동에 포함시킬 경우 중동에서 가장 넓은 나라가 된다. 국가별 국토 면적 순위 참조. 더불어 이슬람 다수 나라에서 가장 넓은 나라이다.(2번째가 사우디아라비아, 3번째가 인도네시아).
2011년 7월 9일부로 남수단이 독립하기 전에는 수단이 아프리카에서 가장 크고 세계에서 10번째로 큰, 그리고 아랍연맹에서 가장 넓은 나라였고 알제리는 아프리카에서 수단 다음으로 2번째로 크고 세계에서 11번째로 크며 아랍연맹에서 2번째로 땅이 넓은 나라였다.

석유(세계 4위)와 천연가스(세계 5위), 망간(세계 3위), 수은(세계 3위), (세계 5위), 코발트(세계 2위)같은 자원 매장량 및 세계 점유율이 엄청나며 아직도 개발되지 않은 광석 및 석탄 및 온갖 자원이 수두룩하다. 땅이 넓다 보니 따스한 온대 지중해성 기후에서부터 더운 사막성 기후와 온대 기후 또는 스텝 기후지만 겨울이 내리기도 하고 추운 기후까지 골고루 존재한다.

바트나(Batna)는 알제리에서 가장 낮은 온도를 기록한 곳이다. 이곳의 최저기온 기록은 1945년 1월 4일의 영하 20℃. 아프리카 대륙에서 손꼽히는 기록이다. 위도상으로는 전북 정읍, 임실이나 대구광역시,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등과 거의 같은 위도(북위 35도에서 36도 사이)에 위치해 있다.

북부의 지중해 연안과 아틀라스 산맥이 지나가는 고원이나 산지가 있다. 바트나가 바로 그 아틀라스 산맥이 지나는 고원, 산지 쪽에 위치해 있다. 바트나의 해발고도는 1048m이다. 이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사하라 사막에 속한다.

2. 역사

알제리의 역사
{{{#!folding [ 펼치기 · 접기 ] 고대 중세 근현대




























아바스
왕조

무할라브
왕조









지리 왕조 무와히드
왕조

가니야족
하프스 왕조 오스만
제국

아이트
압바스
왕국
,
쿠쿠 왕국















함마드 왕조
힐랄족
자이얀
왕조

오랑
누미디아
왕국
알타바
왕국
루스탐 왕조 이프란 왕조,
마그라와족
무라비트 왕조 마린 왕조
베르베르
녹색은 칼리프 국가 또는 아랍계 왕조, 노란색은 베르베르계 왕조, 분홍색은 페르시아계 왕조
}}}

2.1. 고대 ~ 근대

고대에는 페니키아가 튀니지 지방에 설치한 카르타고가 성장하면서 알제리 지방까지 차지. 카르타고 항목 참조.

이후 로마 제국에 의해 카르타고가 멸망하고 알제리 지역도 로마가 가져간다. 로마 제국 참조.

로마 제국이 쇠퇴하고 알제리 지방은 구 카르타고 지역과 함께 반달족의 영토가 되고 여길 근거로 서로마 제국을 끊임없이 공격한다. 반달왕국은 6세기경 비잔틴 제국벨리사리우스 장군에 의해 다시 로마의 영토가 되나 7세기 말 아랍인들의 침략에는 견디지 못하고 축출, 카르타고 지역과 함께 우마이야 왕조의 영토가 된다.

알제리 지역과 튀니지 지역의 운명이 갈린 것은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한 후인데, 압바스 왕조가 튀니지 지방까지는 권역을 넓혔지만 알제리 지방은 후우마이야 왕조가 지배하면서 세력권이 갈리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의 레콘키스타가 시작되면서 후우마미야 왕조도 멸망하고 튀니지 지방에서 발흥한 파티마 왕조가 잠시 북아프리카 전역을 통일했다가 베르베르인들의 무와히드 왕조가 다시 알제리를 먹게 되었고, 무와히드 왕조가 멸망한 후에는 모로코에는 마린 왕조, 알제리에는 자얀왕조, 튀니지에는 하프스 왕조가 각각 세워진다. 그런데 자얀왕조가 멸망하면서 하프스 왕조의 권역에 잠깐 포함되었다가, 하프스 왕조가 쇠퇴하면서 알제리는 아랍 대제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렇게 알제리 지역은 바르바리 해적의 근거지가 되었다가 1516년에 드디어... 오스만 제국의 일부가 된다. 오스만 치하에서는 명목상의 총독이 있었지만 상당부분 자치적인 형태를 띄었다. 오스만 제국이 강성했을 때는 바르바리 해적들도 열심히 지중해를 장악하고 노략질을 일삼았지만,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면서 안 좋은 기운이 끼기 시작한다.

결국 해적 토벌을 명분으로한 프랑스의 침공으로 그 끝을 장식한다.

2.2. 근대 ~ 현대

1830년대부터 프랑스가 지중해 해안 일대의 바르바리 해적 토벌을 명분으로 알제리를 공격, 점령하면서 프랑스 식민제국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지중해 해안 일대만 차지했었으나 프랑스의 알제리 정복은 식민 지배 기간 내내 계속되어 내륙의 사하라 사막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모로코 왕국이나, 베르베르인, 투아레그인 등의 유목민들과 싸워가면서 1936년에 이르러서야 현재의 국경으로 확정된다.

식민 통치를 하면서 알제리가 프랑스와 유사한 자연환경을 가졌음을 안 프랑스는 알제리를 제 2의 프랑스로 만들어 영구 지배하겠다는 계획으로 강력한 프랑스화 정책을 추진했다. 이 당시 프랑스 정부의 프랑스화에 발맞춰 수많은 유럽인들이 알제리에서의 새로운 기회를 찾아 대거 알제리로 이주했는데 식민 통치가 끝날 무렵인 1950년대 말 이들 유럽계 이주민들의 수는 알제리 인구 1000만 명중 100만 명 넘게 차지했을 정도였다. 알제나 오랑 등의 알제리의 주요 도시들은 유럽쪽 도시 분위기가 짙게 나타나는데 이 당시 이주해온 유럽인들이 이 도시들에 정착하면서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이들은 검은 발이라는 뜻의 피에-누아르(Pied-Noir)라 불리며 식민 지배 시기 알제리 사회에서의 기득권을 독차지했다.

그러나 100년 넘게 지배를 받으면서 피지배층인 아랍계의 불만이 커지고 프랑스 식민제국이 쇠락해가면서 1954년부터 민족해방전선(FLN)을 중심으로 8년간 프랑스와 격렬한 알제리 전쟁을 벌인 끝에 1962년 독립을 이루었다. 독립 후에는 인구 대다수인 아랍계와 오랫동안 여기 살아오던 이마지겐들 사이의 갈등이 고민거리로 남았다. 이들은 보통 베르베르인이라고 불리는 북아프리카 유목민들로 스스로를 이마지겐으로 부른다.

게다가 군부 독재같은 내부 문제와 같이 이슬람 과격파들이 세력을 늘리는 것도 또 다른 고민.

1962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후 알제리에는 민족해방전선(FLN)에 의한 일당제 정권이 들어섰고, 아흐메드 벤 벨라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나 1965년 국방장관이었던 후아리 부메디엔의 쿠데타로 쫓겨나게 된다. 부메디엔은 독재자로 집권하면서 석유 등을 국유화하고 사회주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국제적으로는 비동맹 정책을 폈고 오일쇼크를 맞아 막대한 외화가 알제리로 들어오게 되자 알제리는 경제적 황금기를 누리게 된다. 1978년 부메디엔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샤들리 벤제디드가 대통령이 되었으며, 유가가 30달러대는 넘었기에 그런대로 경제는 굴러갔고 지지를 유지했지만 1985년부터 유가가 하락하자 기초체력이 탄탄하지 않았다는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났으며 또한 부채의 급증과 보조금의 대대적인 축소로 인해 물가와 실업률은 급속하게 올라갔으며 알제리는 경제적으로 엄청난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이렇게 경제가 악화되면서 실업자가 된 계층들 사이에서 정권에 대한 반감이 늘어나서 1988년에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결국 1989년 헌법 개정으로 사회주의는 폐지되고 다당제가 인정되었다.

1990년 처음 열린 다당제 총선거에서 이슬람주의 정당(살라피즘 계열)인 이슬람해방전선(FIS)이 231석 중 188석을 가져가는 압승을 거두었으며, 여당 FNL은 15석에 그쳐 참패했다. 그러나 이슬람주의 정권이 집권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던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을 축출하고 FIS를 불법화시키면서 이슬람 세력들을 강경하게 탄압하면서 이슬람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알제리 내전(1991~2002)이 발발했다. 처음에 이슬람 반군은 그냥 군부에 반대하는 수준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무장이슬람그룹(GIA) 등 강경 반군들은 민간인들과 외국인을 무차별 살해하는 행태를 보였다. 이렇게 되면서 반군 내부에서도 내분이 일어나 FIS의 이슬람해방군(AIS)은 1997년 정부와 휴전하게 되었다.

1999년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 현 대통령이 새로 알제리의 대통령이 되었고, 이슬람주의 세력을 사면하는 조건으로 2000년 AIS는 해산되었다. 그러나 GIA와 GIA에서 갈라져나온 살라피스트 설교전투그룹(GSPC)은 항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GIA는 이후 정부군의 소탕작전에 의해 쇠퇴하였고, GSPC만이 "이슬람 마그레브 알카에다"로 이름을 바꿔 살아남았지만 역시 세력이 크게 줄면서 알제리 내전은 2003년경 일단락되게 된다. 다만 이제 반군까진 아니어도 아직도 남아있는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단체들 때문에 치안이 불안한 편.

2009년에는 이전의 주말제에서 금• 주말제로 변경하였다.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이웃나라인 튀니지와 리비아에서 독재정권이 붕괴된 것에 반해 알제리에서는 별 성과가 없었던 것을 90년대에 알제리가 독재정권이 물러나고 나서 바로 내전으로 이어졌던 것에 대한 공포를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7] 실제로 90년대 알제리의 상황이 2010년대 들어 리비아 등 여러 아랍 국가에서 비슷하게 펼쳐지는 모양새.

2013년 1월 16일, 이슬람 과격세력이 알제리 동부 리비아 국경 인근에 있는 인아메나스 천연가스 시설에 난입하여 외국인 및 자국인 인질 180여명을 잡아두고 수감중인 동료 석방을 요구했으나 알제리 정부는 무시하고 헬리콥터 및 전차를 보내 강경진압에 나섰다. 결국 외국인 인질 23명과 무장 인질범 32명, 확인된 숫자만 55명이 목숨을 잃고 나머지 인질은 구출에 성공했다고 알려졌으나 나중에 추가로 인질 25명이 시체로 발견되면서 알제리군이 헬기에서 묻지마 사격을 가했다는 주장이 나와 논란이 거세졌다. 인질 가운데 가장 많이 죽은 나라가 바로 일본인데 일본인 12명 및 네덜란드, 프랑스, 미국, 영국같은 나라에서도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 영국, 프랑스는 테러범과 협상하지 않고 나선 알제리 정부를 두둔했다. 한편 과격 세력 리더는 진압 후 며칠 뒤 방송사로 보낸 비디오로 이번 강제진압으로 인한 보복을 반드시 하겠다고 찍은 동영상을 공개했다.

2014년 4월 17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 현 대통령이 4선(...)에 성공했다. 득표율은 81.5%로, 2009년 3선 때의 90.2%에 비하면 떨어지긴 했지만... 실질적 독재정권 치하에서 제대로 된 선거가 치러졌는지는 미지수.# 아무튼 4선에 성공함에 따라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2019년까지 임기를 법적으로 보장받아, 1999년 이래 최소 19년 동안 알제리를 다스리게 됐다.카다피, 무바라크, 보고 있나?

3. 군사

4. 경제와 자원

경제적으로 자원수출이 전체 수출량 97~8%를 차지할 정도로 자원 수출량 의존이 너무 많은 게 문제. 때문에 자국 공업 생산 및 경제적 토대가 거의 없고, 알제리의 경제적인 위상도 천연자원의 가격에 의해 오르락 내리락 하고있을 정도로 불안정하다. 뭐, 알제리 내에서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을려고 했던건 아니었지만 1980년대 유가 급락과 부채급증으로 중공업 투자정책이 실패로 끝나면서 망했다.(이것이 알제리 내전이 터진 이유중 하나다.)

그래도 사막이 많다지만 위낙에 땅이 넓다보니 풍요롭고 따뜻한 기후를 가진 농경지를 많이 가지고 있어서 밀이나 여러 자국 소비되는 오렌지포도같은 과일과 채소와 올리브대추야자가 많이 재배되고 있어서인지 여기도 먹을게 꽤 싸기에 굶주리는 건 그리 없다.

프랑스는 학살까지 저지르면서 그리도 여길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2차대전 당시 연합군 장군들 및 정치가에게 프랑스 측은 알제리는 프랑스 본토나 마찬가지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유는 알제리에 막대한 자원과 같이 풍요로운 농경지와 경치좋은 피서지에서부터 온갖 발전가능성이 큰 지리적 요소(수력 및 풍력같은 자연 자원의 개발 여건)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고대 유적지에서부터 온갖 관광자원이 될 것들도 꽤 많기에, 세계적인 관광 대국이 될 가능성이 크다.

또 그런 장점들 덕에 외세의 억압 속에서 빚어진 갈등과 여러 문제도 있고 무엇보다도 자원수출에 너무 의존하는 천수답 경제의 전형적인 문제점을 겪고 있다. 아랍의 봄은 고유가 시기다보니 일단 지원금을 내주는것으로 어떻게든 때웠지만 산업다각화에 실패해서 2010년대 중반 들면서 유가가 급속히 하락하여 정부 재정이 급속히 줄어드는 바람에 심각한 경제위기에 처했다. 이런 내부적 문제도 있는데다가 청년실업률도 20%를 넘는 수준이다보니 많은 청년들이 프랑스 및 유럽으로 가서 일하고 있는 처지이다.

5. 스포츠

축구가 가장 인기가 많다. 국가대표팀에 대한 것은 알제리 축구 국가대표팀 항목 참조. 한국에서는 2014 브라질 월드컵 당시 이 알제리를 그래도 가장 만만한 로얄젤리나라로 봤다가 제대로 털렸다. 사실 한국 말고도 세계적으로 알제리가 한국보다 밑이라고 평가(해외 스포츠 토토 관련사이트 예상 및 ESPN 방송 예상으로도 한국이 조 3위, 알제리가 조 4위로 예상했다)했었지만. 그래봐야 각각 조 3,4위로 평가.

그러나 축구 리그 열기도 너무 뜨거워서 또 문제. 2014년 7월 24일 알제리 리그에서 JS 카빌레USM 알제와의 경기 후 팀 패배에 흥분한 관중이 경기장으로 돌을 던졌고 JS카빌레 소속인 알베르토 에보세(24)가 돌에 맞아 사망했다. 알제리 프로축구협회는 이 사고로 리그를 무기한 중단했다.

그래도 2014년 CAF 챔피언스 리그에서 ES 셰티프AS 비타(콩고)를 상대로 2무를 거두고(2-2,1-1 원정 다득점 우위) 26년만에 우승(물론 다른 알제리 구단인 JS 카빌레가 이 대회를 우승한 적도 있지만 그것조차도 1990년 일이다)하면서 알제리 구단으로서 첫 클럽 월드컵에 진출했다.

6. 종교




(알제리 사람들)

종교론 이슬람이 대다수이지만 이웃 모로코튀니지처럼 세속주의가 강하다.[8] 알제리 노래나 여러가지 뮤직비디오를보면 여성들이 히잡도 쓰지않는것을 볼수있다. 참고로 이 나라 주말은 토요일과 일요일 대신 금요일토요일이다.[9] 이런 탓에 알제리에서 일요일은 그냥 평일이다(...). 독립 이후에도 대대로 살아온 기독교도들과 공존하며 지내고있다.

대 프랑스 독립투쟁때는 남성과 여성 차별없이 싸웠고 여성들도 많이 희생했다. 현재도 여성 대학진학률이 높으며, 법조계및 의료계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도 반절을 훌쩍 넘어갈 정도로 사회참여도 또한 높다.

2011년 튀니지에서 혁명이 일어나면서 알제리에도 불길이 번지고 있다. 혁명 전 튀니지 상황이 알제리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알제리가 내전이나 여러 모로 튀니지보다 더 나쁘긴 했다. 그러나 튀니지가 안정적이니 뭐니 그렇게 볼 수도 없다. 결국 알제리나 튀니지나 독재와 온갖 어려운 상황이 같다고 봐야한다. 특히 경제정책과 유통정책의 실패로 물가가 폭등하면서 실업자가 늘어나는 모습은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 상세 진행 상황은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에서.

7. 국제 관계

7.1. 프랑스

불알관계 알제리 항목이니 알불관계라고 해야 된다. 굳이 줄여서 말하자면 프알관계, 알프관계라고 하는 게 맞겠지만...

지중해를 사이에 둔 프랑스와의 관계는 식민지배도 있고 동시에 전쟁을 거쳐서 독립했기에 서로 불편한 관계이면서도 밀접한 관계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여배우 이자벨 아자니의 아버지는 카빌리족 계통 알제리인이다. 전엔 그녀의 아버지가 터키계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녀의 어머니가 자신의 남편이 알제리계라는 혈통이 부끄러워서 그렇게 알렸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고 한다. 또 어머니는 독일인이다. 아이러니한 건,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배우이면서 동시에 프랑스와 역사적으로 불편한 관계에 있는 나라의 피를 물려받아, 이 때문에 종종 프랑스의 극우파 정치인들과 긴장관계에 있기도 하다. 알제리계지만 가톨릭이 다수이던 카빌리족 후손이다보니 반이슬람주의자인데 이슬람이라면 아주 치를 떠는 수준으로 특히 히잡 반대 시위를 주동하기까지 했다. 관련기사. 그래서 알제리에서도 듣보잡으로 무시한다.

지네딘 지단도 이 알제리계다. 알제리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고 마르세유 태생. 그래서 지단이 남아공 월드컵 때 이 나라 경기를 관전했던 것. 그런데 알제리에서도 영웅으로 알아주는 지단은 사실 한국으로 치자면 친일파의 후손과 마찬가지이다. 지단의 아버지는 무슬림이지만 하르키(Harki)라는 조직에 속했었다. 덕분에 알제리 극우단체인 알제리 민족전선에선 이 점으로 지네딘 지단 찬양을 다시 생각해보자고 주장한다.

하르키는 알제리 독립전쟁 와중에 프랑스군을 편들어 싸웠기에, 알제리 독립이 이뤄지자 전국적으로 하르키들은 길거리에 끌려나가 맞아죽거나, 아니면 알제리군에게 교수형을 당해야 했다. 이 때 20만명의 하르키(가족까지 160만명) 중에서 살아서 프랑스로 도주한 자는 3만명에 불과했다고한다. 그런데 2012년 기준으로 프랑스에 사는 하르키의 추정치가 50만에서 80만이다. 프랑스 법이 민족별 데이터를 내는 걸 불법으로 치기에 정확히 계수가 되지는 않지만 숫자가 꽤 되는데 단 3만 명의 후손이 이 정도로 불지는 않을 것이다.

하르키들은 프랑스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프랑스를 위해 싸웠지만, 이미 알제리를 잃은 프랑스에게 있어서 하르키란 귀찮은 불청객일 뿐이었다. 당연히 이들에게 돌아오는 것이라곤 차별 뿐이었다. 직장을 다니다가도 하르키 출신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동료들의 눈치에 그만둬야 했다. 지금도 실직자의 35%가 하르키 및 알제리 출신의 후손이라고한다.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3D업종 뿐이었다. 지단의 아버지도 항만에서 짐꾼으로 일했다. 그래서 많은 하르키의 자식들은 사회적 냉대에 결국 나쁜 길로 빠진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현재 알제리에선 감정이 희석된건지, 다시 알제리로 돌아가서 사는 하르키들도 늘고 있다고 한다. 알제리 대통령도 하르키 문제를 "우리가 할일은 심판하는게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라며 지단을 위로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견부호자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프랑스에 대한 감정이 풀렸냐 하면 그런것도 아니다. 식민지배를 132년이나 받기도 하였고 처절한 전쟁 끝에 독립했으니 프랑스에 대한 증오가 장난 아니다. 마찬가지로 프랑스 극우들의 헛소리라든지 1998년 프랑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보여준 행동은 알제리에서 프랑스를 용서할 수가 없었던 계기이기도 하다. 게다가 1960년 프랑스는 바로 알제리 땅에서 핵실험을 해버렸다...게다가 후술하듯이 1966년까지도 핵실험을 알제리에서 계속 했으니... 더불어 1961년 모리스 파퐁(훗날 친나치파인게 발각되어서 전범 재판을 받게되었는데 받기전에 사망) 당시 파리 경찰청장은 치안 문제로 야간 통행을 금지했는데 죄다 알제리계 이민자들에게만 요구하여 이를 비난하는 시위가 벌어졌는데, 경찰이 시위자들에게 발포하여 40여명이 죽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당시 프랑스는 무슬림끼리 싸워서 3명이 죽었다는 투로 발표했다. 그리고 1998년에서야 시라크는 진실을 발표했으나 파퐁은 나치 부역죄로 처벌받아 수감 중(2002년에 교도소에서 사망.)이었기에 처벌받을 이가 없다고 후다닥 덮어버렸다. 그래서 2005년 알제리로 방문한 시라크에게 알제리 극우들이 돌을 던지고 비난했다.

게다가 2010년 2월, 프랑스 일간 르 파리지앵 보도에 의하면, 프랑스 정부는 알제리가 독립한 뒤인 1966년까지도 알제리의 사막 핵실험장에서 알제리인 150명을 대상으로 핵무기가 인간에게 미치는 생리적, 심리적 효과를 연구하는 생체실험을 했다는 게 알려지면서 알제리에서 반발이 더욱 거세졌다. 이에 대하여 프랑스 정부는 오리발 내밀기로 어그로를 곱배기로 만드셨다(…)

프랑스 국대 축구팀이 2001년에 생드니 경기장에서 알제리와 축구 A매치를 한 적이 있는데, 경기장에 대거 입장한 알제리 팬들이 마치 홈경기를 방불케 하듯 자국의 국가를 부른 다음에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에 야유를 퍼붓고, 프랑스가 압도적으로(4:1) 이기고 있자 거의 폭동 수준의 난동을 일으켰었다. 결국 경기가 중단되고, 경찰의 호위 속에 경기장을 나가는 선수들에 대한 오물투척은 계속됐다. 이 때 유독 지단만은 무사했을 뿐만 아니라 알제리 선수들은 지단과 친근하게 어울리고 알제리 팬들은 지단에게 사인까지 받았는데, 여기서 알제리에서의 그의 인기를 알 수 있다.

반면 알제리 출신 프랑스인들을 프랑스에서는 피에 누아르(검은발)라고 부른다. 이들은 대부분이 원래 그쪽 태생이 아니라 식민지배가 시작되면서 알제리로 건너온 프랑스인들의 후손이다. 철학자 알튀세르, 디자이너 입생 로랑 등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계 지식인, 유명인사도 제법 있었으나 이들은 대개 식민통치를 긍정하고 알제리 사회의 특권층으로 군림했다.

그 덕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알제리 출신 소설가 알베르 카뮈(아버진 프랑스인, 어머니는 스페인계)도 반대로 알제리에선 철저하게 잊혀졌다. 자세한 건 알베르 카뮈 항목 참고할 것.

까뮈는 위에 언급한대로 카빌리족이 프랑스에 충성을 다함에도 프랑스가 외면하여 비참하게 산악지대에서 어렵게 산다고 기자 시절 신문으로 보도하였다가 기자에서 잘린 적이 있다. 이 덕분에 프랑스에서 카빌리족을 좀 신경쓰기도 한 계기가 된 바 있다. 어찌보면 까뮈가 카빌리족에겐 은인이 될지도 모르지만, 현재 알제리 카빌리족들도 까뮈를 모른다. 하긴 프랑스도 하르키로 들어온 카빌리족에 대한 냉대와 알제리에서 벌인 학살을 생각하면 알제리도 프랑스도 다 이가 갈릴 정도로 싫어할 만하다.

프랑스에 대한 반감은 단순히 축구 경기말고도 많다. 프랑스어가 공용어인데도 프랑스어 사용국 모임인 프랑코포니에도 가입하지 않고 있으며, 극우파들이 프랑스어를 배제하고 제2언어로 차라리 영어 (영국식 영어)를 배우자고 주장할 정도이다(당연히 제1언어는 아랍어이다.). 알제리 노인들은 아랍어를 잘 모르고 프랑스어를 아는 이들이 아직도 많을 정도로 프랑스의 프랑스어 강요 및 아랍어 탄압은 똑같았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 알제리 젊은이들은 아랍어와 같이 프랑스어나 스페인어러시아어같이 가까운 유럽 나라 언어들을 하는 경우도 늘어나서 알제리 정부는 자원개발이나 여러 문제를 프랑스 말고도 스페인이나 벨기에,러시아와도 협력하자고 하면서 프랑스를 최대한 약올리려고까지 한다. 게다가 친러국가라서 러시아와 가까운 관계이기도 한다.

프랑스로서도 워낙에 자원이 많은 알제리를 놓칠 수도 없기에, 2000년대 와서 일부 프랑스군이 저지른 학살도 인정하며 달래는 분위기다. 하지만 2005년 5월 프랑스는 이런 와중에 자신들이 북아프리카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홀로 자축하는 헛소리 발언을 정부요인들이 했다. 그러자 알제리 사르 알 부지드 광장에서 알제리 국가를 부르고 프랑스 국기를 불태우는 시위가 일어났고 프랑스계 천주교 신부와 신도들이 살해당하기도 했다. 이 곳은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는 잔 다르크 광장이라고 불렀던 곳인데 1945년 6월에 알제리 국기를 들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총에 맞아 살해된 12살 아이 사르 알 부지드의 이름을 따서 독립한 뒤에 이름이 바뀌었다. 이 아이의 죽음이 알제리 독립운동이 시작된 계기가 되었으므로, 알제리가 독립하자 그의 이름을 딴 광장을 만들고 동상을 세워 기리고 있다. 이렇듯 지금도 반프랑스 감정이 매우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는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하긴 그럴만한 게 프랑스는 식민지배 시절 알제리인이 이슬람을 포기하지 않으면 시민권도 주지 않았고, 무슬림이라면 평생에 한번은 꼭 해봐야 한다는 메카 순례도 금지했고, 투표권에도 제한을 두었다. 또 얼마 안되는 프랑스 본토인이 알제리의 알짜배기 땅들을 싹쓸이 하고 그러면서도 대중교육이나 일반 알제리인들을 위한 경제정책에 신경조차 안써서 소수 기득권계층을 제외한 나머지 무슬림들은 문맹으로 살아야했던데다가 제대로 된 일자리도 구하기 힘들었고, 그래서 절대 다수가 빈민층들으로 살아야했다. 이 정도로 차별을 했으니 사과 몇마디로 넘어갈리가 없다.

장 마리 르 펜같은 프랑스 극우 백인우월주의자들은 알제리인을 그리 욕하고 허구헌날 비하하면서 알제리는 프랑스 땅이라능~~이란 망언을 한다. 이러니 알제리에서 프랑스를 도저히 좋게 봐 줄리가 있나.

거기에 현 프랑스 대통령인 프랑수아 올랑드도 똑같다. 알제리를 방문하고 무사히 살아돌아와 다행이라고 말을 하지 않나, 식민지배가 악랄한 건 사실이지만 사과할 마음은 없다라고 당당하게 망언을 하며 알제리 여론과 정계를 격분하게 하고 있다. 오죽하면 프랑스 내 기업인들이 "좀 닥쳐, 왜 겉으로 내색하지 못해 발광하냐?"라고 으르렁거릴 정도.

7.2. 아프리카 국가들

주변국과의 관계는 튀니지와는 우호적이다. 일단 이웃나라이긴 하지만 영토나 국경등을 두고 분쟁 갈등 거리도 없고 오일머니를 통해 경제적으로 비교적 잘 사는 알제리에 튀니지인들이 석유 노동자,편의점 직원등으로 일하러 오기도 한다.심지어 양국간 비자 면제 협정이 체결되어 있어서 알제리와 튀니지 국민들은 상대방 나라를 무비자로 갈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알제리가 프랑스와 식민지 독립 전쟁을 치룰 당시 튀니지는 프랑스를 비판하며 알제리를 지지한적도 있었다. 거기다가 튀니지는 알제리와 프랑스가 프랑스 식민지 시절 과거사 문제로 두 나라가 대립할때면 알제리 전쟁에서 프랑스군이 알제리인에게 자행한 학살등 전쟁 범죄 만행을 인정하며 알제리를 지지할 정도이다.

반대로 모로코와는 영토 문제와 같이 서사하라 문제로 갈등도 있고 국경에서 총격전도 치룬 바 있다. 더불어 지금도 서사하라 독립군들을 지원하며 서사하라 망명정부를 받아주었다. 같은 이유로 모리타니와도 갈등이 남아있다. 물론 모리타니는 1984년 서사하라를 인정했다.

이슬람 과격파 지원 문제로 카다피를 추궁하면서 역시 리비아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적도 있다. 하지만 2011년 리비아 내전 당시에 카다피의 딸 등의 망명을 받아주기도 했던 걸로 보면 과거에 안 좋았던 건 일시적인 듯 하고 리비아와의 관계도 우호적인 편이다. 서사하라를 국가로 인정하는 것도 같고 냉전시기에 반미, 반서방 외교노선도 같이 했던 사이이기도 하고.

이집트와는 국경이 없는 먼 나라인데다 알제리가 프랑스에서 독립하는 걸 지지하여서 공식적으로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편이지만 2010 남아공 월드컵 예선에서 수단에서의 중립경기까지 갈때 과정에서 사이가 엄청 나빠졌다. 이집트 원정에서 이집트 광팬들이 알제리 선수단에 폭력을 행사해(벽돌 따위를 던졌다고 한다) 선수들이 부상을 당했고(이집트의 쐐기골 영상을 보면 벤치에서 머리와 팔에 붕대를 한 채 허탈해하는 알제리 선수들을 볼 수 있다) 이 영향인지 이집트에 골득실 동률이 되는 패배까지 당하며 수단에서의 중립경기를 벌였는데, 쌓이고 쌓인 감정 때문에 양측 관중들이 충돌하며 양국간 외교문제로까지 번졌을 정도..그렇지만 6년전 이야기인데다 먼 나라의 관계여서 지금은 과거보다 꽤 좋아진 편이다.

7.3. 한국

1963년 북한과 단독 수교한 이래 북한과 우호적인 관계로 발전하였으며 대한민국1962년 알제리를 독립국으로 공식 인정하였지만 사회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대한민국에 국제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었던 반한(反韓) 성향의 국가로 대한민국 외에도 미국서방국가와도 적대관계를 맺었으며(반서방) 국제사회에서도 북한, 소련, 쿠바공산국가들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는 등 친(親) 공산 성향 및 친북(親北) 외교를 고수하며 한국을 적대시해 왔다. 현재도 친러 국가다. 하지만 당연할 수 밖에 없는 게 알제리 전쟁 당시 소련 시절 막대한 지원을 받아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미국은 프랑스 편을 들었다가 알제리인 학살로 국제적 비난을 듣자 부랴부랴 프랑스에게 독립을 촉구했으나 이미 알제리에선 반미 감정이 극심해진 다음이었다. 알제리군 항목만 봐도 무기 및 장비들이 러시아제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1988 서울 올림픽에서는 의외로 자국 선수단을 서울특별시에 공식 파견한 데 이어서 2년 후인 1990년에는 대한민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여 오랫동안의 적대 관계를 해소하였고 이후 아프리카 경제 교역 상대국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1993 대전 엑스포에서는 '중동공동관' 국가로 모리타니, 수단, 요르단과 공동참가하였다. 알제리에 살고 있는 한국인은 1,183명이고 대부분 현지에 진출한 건설 인력들이다. 재외 한국 학교도 없을 뿐더러 현지에서 한국어 수업을 개설하지 않았다. 이 탓에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은 알제리 노선을 못 만들어 한국인이 알제리에 가려면 제3국에(파리, 이스탄불, 도하, 두바이 등) 가서 비행기를 최소 한 번 갈아타야 한다.

2009년 매일경제신문에서 나온 알제리 외교부 인사 인터뷰를 보면 한국은 알제리를 너무 모르며 프랑스어나 아랍어를 모르고 그저 영어만 알고 알제리에서 구사하며 자원 계약이나 무역을 하러 와서 빈손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고 은근히 비아냥거린 바 있다.

북아프리카의 옛 프랑스 식민지령 국가들 중 한국과 비자 면제 협정이 체결되어 있지 않은 국가이다. 한국과의 비자 면제 협정이 체결되어 무비자로 방문할 수 있는 주변의 튀니지, 모로코 등과 달리 사전에 대사관에서 비자를 발급받아야만 갈수 있는데다가, 발급이 워낙 번거로워서[10] 여행 이야기가 많은 모로코와 튀니지와 달리 알제리는 여행을 갔다오거나 이들 국경을 접한 3개국 전체를 여행 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별로 없다고 한다.체결되면 네이버 등 국내 블로그에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3개국 여행담이 올라올지도

7.4. 관련 문서




[1] 철수권고 발령지역을 제외한 전지역[2] 카빌리 지역 6개주(부메르데스, 부아라, 티지 우주, 베자이아, 보르즈부아레리즈, 지젤) 산악지역, 튀니지ㆍ리비아ㆍ니제르ㆍ말리ㆍ모리타니 국경 지역(테베사, 엘웨드 동부, 오아글라 동부, 일리지 동부, 타만라셋 남부, 아드라르 남서부, 틴두프 남서부)[3] https://www.0404.go.kr/dev/country_view.mofa?idx=150&hash=&chkvalue=no2&stext=&group_idx=6&alert_level=0[4] 프랑스어[5] 영어로는 앨지어스(Algiers), 아랍어로는 원래 알-자자이르(الجزائر, al-Jazā’ir)로 쓰며, '들'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수도 이름이 나라 이름이다.[6] 서사하라는 알제리에서 공식 승인하고 적극 지지하지만 국제사회에서 승인하는 나라가 많지 않은 미승인국이다.[7] 10년간 알제리인이 십만 단위로 죽어나갔다.[8] 프랑스 식민 영향도 있지만, 원래 다수를 차지하는 베르베르족의 여권은 이슬람 도래이전에도 열악하지 않았다. 아랍인의 침략에 저항한 베르베르족 족장도 여성이었다. (심지어 알제리에는 동상도 세워져 있다.)[9] 그나마도 2009년 이전에는 목요일과 금요일이 주말이었다. 목금 주말제가 서방과의 교류의 지장을 준다고 목요일 대신 토요일을 주말에 넣은 것.[10] 비자 신청, 발급 과정이 2,3 주 정도 걸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