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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20:12:10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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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스페인의 방송국 안테나3가 스페인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스페인인 100명'을 선정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후안 카를로스 1세 미겔 데 세르반테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 아돌포 수아레스
6위 7위 8위 9위 10위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 펠리페 6세 파블로 피카소 예수의 테레사 펠리페 곤살레스
11위~100위
11위12위13위14위15위
이사벨 1세 세베로 오초아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호세 사파테로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16위17위18위19위20위
살바도르 달리 안토니오 가우디 엘 시드 알폰소 10세 페르난도 알론소
21위22위23위24위25위
프란시스코 데 고야 프란시스코 프랑코 안토니오 마차도 미겔 인두리안 미카엘 세르베투스
26위27위28위29위30위
로라 플로레스 펠리페 2세 카를로스 1세 로시오 주라도 그레고리오 마라뇬
31위32위33위34위35위
디에고 벨라스케스 이사벨 판토하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미겔 데 우나무노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36위37위38위39위40위
비센테 페레르 카밀로 호세 셀라 페드로 두케 다니 페드로사 파우 가솔
41위42위43위44위45위
다비드 비스발 라파엘 나달 카마롱 데 라 이슬라 아스투리아스의 펠라기우스 후안 라몬 히메네스
46위47위48위49위50위
산티아고 카리요 안토니오 반데라스 이냐시오 데 로욜라 페드로 알모도바르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
51위52위53위54위55위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미겔 에르난데스 후안 마누엘 세라 로페 데 베가 엘 그레코
56위57위58위59위60위
아구스티나 데 아라곤 호아킨 사비나 로살리아 데 카스트로 앙헬 니에토 마누엘 아사냐
61위62위63위64위65위
조르디 푸졸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 알레한드로 산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에르난 코르테스
66위67위68위69위70위
카를로스 사인츠 파퀴리 텔모 사라 몽세라 카바예 마누엘 데 파야
71위72위73위74위75위
이삭 페랄 플라시도 도밍고 미겔 길라 루이스 부뉴엘 엘 코르도베스
76위77위78위79위80위
프란시스코 피사로 마리아노 바울바시드 라울 곤살레스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프란시스코 페르난데스 오초아
81위82위83위84위85위
아만시오 오르테가 마놀레테 에두아르도 칠리다 페란 아드리아 아란차 산체스 비카리오
86위87위88위89위90위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호아킨 로드리고 에밀리오 보틴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프란시스코 헨토
91위92위93위94위95위
세바 바예스테레스 이삭 알베니스 페데리코 바하몬테스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카르멘 아마야
96위97위98위99위100위
빈센트 블라스코 이바네스 마누엘 산타나 알리시아 코플로비츠 안토니오 루이스 솔러 자코네로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colbgcolor=#999><colcolor=#fff> The Most Illustrious
푸볼의 달리 후작
Salvador Dalí, Marquess of Dalí of Púbol
파일:external/p3.storage.canalblog.com/104191582_o.jpg
본명 살바도르 도밍고 펠리페 하신토 달리 이 도메네크
(Salvador Domingo Felipe Jacinto Dalí i Domènech)
출생 1904년 5월 11일
스페인 왕국 카탈루냐 피게레스
사망 1989년 1월 23일 (향년 84세)
스페인 카탈루냐 피게레스
국적 파일:스페인 국기(1785–1873, 1875–1931).svg 스페인 왕국(1904~1931)

[[스페인 제2공화국|]][[틀:국기|]][[틀:국기|]](1931~1939)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스페인국(1939~1975)

[[스페인|]][[틀:국기|]][[틀:국기|]](1975~1989)
가족 아버지 살바도르 달리 이 쿠시 (1872~1950)
어머니 펠리파 도메네크 페레스 (?~1921)
여동생 안나 마리아 달리 (1908~1989)
배우자 갈라 달리[1] (1894~1982 / 1934년 결혼)
학력 마드리드의 산 페르난도 미술학교
종교 무종교 (무신론) → 가톨릭[2]
작위
(문장)
초대 푸볼의 달리 후작 (1982~1989)
파일:Coat_of_Arms_of_the_Marquess_of_Dalí_de_Púbol.png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와 성장기2.2. 학창 시절
2.2.1. 달리와 로르카
2.3. 전성기
2.3.1. 달리와 갈라
2.4. 말년
3. 작품
3.1. 그림3.2. 영화
4. 기타5.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세상은 나를 우러러볼 것이다. 어쩌면 나는 경멸당하고 오해받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위대한 천재가 될 것이고, 그것만은 확실하다.
Seré un genio, y el mundo me admirará. Quizá seré despreciado e incomprendido, pero seré un genio, un gran genio, porque estoy seguro de ello.
스페인초현실주의 화가이자 영화 제작자이다.

스페인 카탈루냐의 피게레스에서 태어난 달리는 마드리드에서 미술 정규 교육을 받았다. 어릴 때부터 인상주의르네상스 거장들의 영향을 받은 그는 입체파아방가르드 운동에 점점 더 매료되었다. 1920년대 후반 초현실주의에 가까워진 그는 1929년 초현실주의 그룹에 합류하여 곧 초현실주의의 대표적 작가 중 한 명이 되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기억의 지속성'은 1931년 8월에 완성되었으며, 초현실주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다. 달리는 스페인 내전 기간(1936~1939년) 동안 프랑스에서 살다가 1940년 미국으로 건너가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1948년 스페인으로 돌아와 가톨릭 신앙으로의 복귀를 선언하고 고전주의, 신비주의, 최근의 과학적 발전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핵 신비주의'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달리의 예술적 레퍼토리에는 회화, 그래픽 아트, 영화, 조각, 디자인, 사진 등이 포함되었으며, 때로는 다른 예술가들과 협업하기도 했다. 또한 소설, 시, 자서전, 에세이, 비평문도 썼다. 그의 작품의 주요 주제는 꿈, 무의식, 성, 종교, 과학, 그리고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 등이었다.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비평가들을 짜증나게 하는[3] 그의 괴상하고 과시적인 공개 행동은 종종 그의 작품보다 더 많은 관심을 끌었다. 프랑코 정권에 대한 그의 대중적 지지, 그의 상업 활동 및 그의 후기 작품 중 일부의 품질과 진위 여부도 논란이 되었다. 그의 삶과 작품은 다른 초현실주의자, 팝 아트제프 쿤스데미안 허스트와 같은 현대 예술가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초현실주의, 입체주의, 근대 미술, 다다이즘을 추구한 사람이다.

살바도르 달리는 그의 작품뿐만 아니라 독특한 개성과 행동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예술가로서 뿐만 아니라 예술적인 이미지와 공적 활동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그의 영감과 독특한 시각은 현대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2.1. 유년기와 성장기

파일:살바도르 달리와 안나마리아_1927.jpg
1927년, 카다케스에서 여동생 안나 마리아와 함께

그는 1904년 5월 11일 오전 8시 45분 스페인카탈루냐의 프랑스 국경에 가까운 엠포르다 지역의 피게레스 마을 20번지 카레 몬투리올 1층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살바도르 달리 이 쿠시(Salvador Dalí i Cusí, 1872–1950)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카탈루냐변호사이자 공증인이었다. 달리의 형은 그의 탄생 이전인 1903년 8월 1일 뇌수막염으로 사망했고, 달리의 부모는 달리가 형의 환생이라고 믿으며 같은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4] 이외로 3살 어린 여동생 안나 마리아는 달리에 대한 책을 집필한 작가이다.[5] 달리는 1923 년에서 1926 년 사이에 12 번 여동생의 그림을 그렸다.

달리의 아버지는 달리가 공립 학교의 교육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그가 16살이 되던 해에 그를 프랑스어 학교에 보냈다. 그는 가족의 여름 별장이 있는 카탈루냐 지로나 주의 카다케스(Cadaqués)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이후 달리의 부모는 그에게 첫 전시 스튜디오를 카다케스에 제공해주었다.

1916년 달리는 가족과 함께한 여름 휴가에서 처음 현대미술을 접한다. 그리고 다음해 달리의 아버지는 자신의 집에 자신이 그린 목탄화 전시회를 개최한다. 1918년에는 피게 레스 시립 극장에서 첫 번째 공개 전시회를 가졌다. 1921년 달리가 갓 17살이 되었을 때 달리의 어머니는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달리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여동생과 재혼했다. 달리는 이에 대해서 '이모를 존경하고 존중하기 때문에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와는 반대로 평소에 아버지와의 마찰이 매우 잦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바람을 너무 많이 피워 그의 아내와 이혼을 할 뻔 한적도 있다. 나중에 달리는 어머니의 죽음은 "내 인생에서 경험 한 가장 큰 타격이었다. 나는 그녀를 숭배했습니다 ... 내 영혼의 피할 수 없는 흠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의지했던 존재를 잃은 것을 체념할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2.2. 학창 시절

파일:QI7g4Zw.jpg
왼쪽부터 달리, 호세 모레노 빌라, 루이스 부뉴엘[6],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7], 안토니오

학창시절 마드리드의 대학을 다니며 그는 멋쟁이로 상당히 유명했다고 한다. 172cm의 키에 길게 기른 구레나룻, 코트, 스타킹 등이 미국에서 유행하던 유미주의와 일치했다. 학창 초반 그는 입체파의 성향을 띄었지만 다다이즘을 실험적으로 접한 후 입체파보다 다다이즘이 그의 작품 전반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또한 그는 반정부 운동에 참가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잠시 감옥에 투옥되기도 한다. 달리는 분명 천재였지만 범생이는 아니었던 셈이다.

1926년 그는 기말고사의 부정행위로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단 달리의 퇴학 사유가 '선생을 비판하고 교내에서 학생을 선동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지기도 하며, 퇴학이 아니라 자퇴라는 의견도 있다. 달리 박물관의 달리 연대기에 의하면 그는 '학교 체제 속 작품의 평가에 대해 염증을 느꼈고 교수들이 자신의 그림을 평가할 자질이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자퇴했다고 한다.

2.2.1. 달리와 로르카

파일:external/blog.joins.com/re_550421bd494fe.jpg
파일:amor_fg_1.jpg
질문: 로르카 얘기로 되돌아가 보자. 그가 살바도르 달리에 부치는 노래를 썼을 무렵 당신들 두 사람은 어떻게 같이 지냈는가?

달리: 모두들 아는 것처럼 그는 동성애자였고, 나를 미친 듯이 사랑했다. 그는 나에게 두 번 달려들어 하려고 했는데…. 나로서는 그게 매우 싫었던 까닭은, 내가 동성애자가 아니었기 때문이고 또 그가 내 항문에다 그것을 하는 데 대해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건 아프다. 그러니 아무 재미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나에게 매료되었다는 사실에) 꽤나 우쭐했었다. 마음 속 깊이 나는 그를 위대한 시인이라고 생각했고 '성 달리'의 항문에 관한 한 그의 신세를 좀 졌다고 느꼈다. 그는 때때로 한 아가씨에게 그걸 요구했는데, 그녀가 자기 대신 나를 희생물이 되게 했다. 그가 하라는 대로 내가 항문을 제공하지 않자 그는 그녀를 정복했는데, 그녀와 자기가 궁합이 아주 잘 맞았다고 그는 단언했다. 그가 여자와 잠잔 건 그게 처음이었다.
"알라인 보스케와의 대담 중에서, 1969"[8]
그것은 아름답고 비극적인 사랑이었다.
살바도르 달리
스페인에서 칭송받는 국민적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동문이었던 달리는 인터뷰에서 그를 아웃팅시키며 동성애적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9]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가 '리틀 애쉬'. 로르카는 스페인의 국민 시인이자 민족 운동가[10]였기 때문에 한때 스페인 정부는 로르카와 달리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해 인정하지 않았다. 이 인터뷰와는 별개로 달리는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에야 자서전 집필작가에게 “그것은 아름답고(관능적이고) 비극적인 사랑이었다”고 두 사람의 연인관계를 암시했다.[11]

여담으로 로르카가 1925년 낙서처럼 그린 달리의 초상화가 남아있다. 로르카는 생전에 이런 낙서 같은 그림들을 몇 장 남겼는데 하나 같이 글자가 쓰이지 말아야 할 곳에 글자가 쓰여 있다. 말풍선 안의 'bleu azul verde negro girl'은 의미가 불분명하지만[12] 팔레트를 그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으며 아래의 Retrato De Dali는 스페인어로 "달리의 초상화"라는 뜻이다.

갈라, 로르카 등과의 일화들 때문에 달리의 성 정체성에 대해서는 지금도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되며 계속해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가 무성애자였다는 주장과 양성애자였다는 주장이 가장 큰 편인데, 확실한 것은 달리가 이성애자동성애자는 아니라는 것을 본인이 확인시켰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달리가 관음증과 같은 성도착증 경향도 있었다는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이 모든 것들은 그가 생전에 보여주었던 기이한 행동이나 기록 등을 통해서 추측만 할 뿐 사실로 확인된 것은 없다.

2.3. 전성기

학교에서 퇴학 당한 1926년, 달리는 자신이 존경하던 파블로 피카소파리에서 만나게 된다. 피카소는 후안 미로를 비롯한 자신의 친구들에게 달리를 소개했고 그 영향으로 향후 몇년간 피카소의 화풍과 큐비즘이 달리의 작품에 노골적으로 드러난다.바르셀로나의 인형, 1927년作 달빛 아래의 정물화, 1927년作 이 시기에 달리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을 탐독하며 그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열렬한 임을 자처하였고 이는 달리가 정신의 세계에 대해 표현하게 되는 중대한 계기가 된다. 달리가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인데, 이것은 스페인의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모방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가 처음 고소를 한 사람은 앞집 사람 이었다. 그가 고소를 한 이유는 앞집 사람이 고기를 구워 먹었는데 냄새가 너무 좋아서 그림을 그리는데 집중을 할 수 없어 고소한 것이라고 한다. 결국 앞집 사람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초현실주의의 시초라고 알려진 앙드레 브르통과의 불화로 인해 초현실주의 화가 그룹에서 제명당하기도 했다. 그의 기이한 언행은 브르통이 평생을 걸쳐 지키려고 했던 초현실주의의 순수함과 엄격함에 자꾸 균열을 냈고, 특히 달리는 자주 정치적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였는데 초현실주의가 그렇게 싸우고자 했던 자본주의, 파시즘의 망령을 찬양하는 발언을 자주 하여 브르통을 비롯한 수많은 초현실주의자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하지만 달리의 발언은 도통 진지한 것인지 찬양을 빙자한 빈정거림인지 종잡을 수 없는 빈정거림이 많았으니 참고. 어쨌거나 이제와서 역설적인 것은 초현실주의 추구의 끝은 결국 스스로를 부정하고 파괴하고 뛰어넘게 되는 것이니 달리의 수많은 빈정거림과 악성 조크들은 한편으론 초현실주의와 통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하나 확실한 것은 달리와 그의 평생의 반려자 갈라는 물질적 풍요를 매우 즐겼으며 자신의 활동이 돈과 직결되는 것을 애써 싸우지 않았다. 이는 그가 "아비다 돌라스(Avida Dollars)"라는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 가지고 논 것에서도 드러난다.[13]

전술한 보스케와의 대담에서는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지칭한 것과는 반대로 스페인의 독재자이자 파시스트프란시스코 프랑코를 공개적으로 지지하여 종래에는 피카소도 그를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14] 참고로 피카소는 게르니카한국 전쟁에서의 미군을 비난한 것으로도 유명한 공산주의자였다.

1949년 조국 스페인으로 돌아와 잉태한 성모, 십자가의 성 요한의 그리스도, 최후의 만찬 등 종교적 색채를 드러낸 작품들을 제작한다.

2.3.1. 달리와 갈라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89ba7af1fde2be5e19f83df71440181c.jpg
1936년, Cecil Beaton이 촬영한 갈라와 달리
"내 어머니보다, 내 아버지보다, 피카소보다도... 그리고 심지어, 돈보다, 갈라를 더욱 사랑한다. 그녀가 나를 치유했다."
1929년 카다케스[15]의 집에서 많은 이들을 초대한 가운데 달리는 자신의 운명적인 뮤즈, 갈라(본명은 옐레나 이바노바 디야코노바(Елена Ивановна Дьяконова)를 만나게 된다.[16]그녀는 당시 프랑스의 시인 폴 엘뤼아르의 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17] 갈라는 달리의 열성적인 구애에 흔들려 연정을 품게 되었다. 결국 두 사람은 파리에서 달리의 개인전이 열리던 도중 동반 도주하여 홀연히 잠적했으며, 이후 갈라는 1934년 폴 엘뤼아르와 이혼[18]하고 1월 30일 달리와 결혼하게 된다.[19] 이때 갈라가 40세, 달리는 30세 였다.

이후 갈라는 달리의 작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다. 또한 그녀는 달리의 매니저로서 그의 작품 전시와 일정 조정에 매우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모든 전시 장소 계약과 작품 판매는 모두 그녀의 손을 거쳐 성사되었다. 때때로 그녀는 달리의 그림에까지 직접적으로 관여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달리는 갈라를 매우 사랑했다. 주변인들은 '달리는 갈라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을 정도. 그는 오직 갈라만을 위해 발레 공연을 기획하고 무대를 제작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갈라는 젊음에 대해 매우 집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자신의 나이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성형수술까지 감행했다.[20] 또한 피부를 위해 고가의 화장품들을 사용하고 병원의 시술을 받기도 했다.

달리의 아버지는 불륜 관계에서 시작되었던 갈라와 달리의 결혼에 대해 매우 반대했다. 그 와중에 그의 아버지는 달리가 프랑스 전시에서 '나는 그저 재미로 어머니의 초상화에 침을 뱉곤 한다'[21] 라고 인터뷰 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달리의 아버지는 당연히 매우 화를 냈으며 그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했지만 달리는 거절했다. 결국 달리는 1929년 상속권을 박탈당했으며 또한 카다케스에 다시는 발을 들이지 말 것을 요구받았다. 하지만 다음해 여름, 달리와 갈라는 포르트리가트(Port-lligat) 해변에 작은 오두막을 사들이는 것을 시작으로 몇 년에 걸쳐 주변의 땅과 오두막들을 매입해 빌라를 건축했다.[22] Port-lligat과 카다퀘스는 매우 가까운 거리이고, 이후 아버지는 달리와 그의 아내 갈라를 차츰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2.4. 말년

파일:external/thimg.todayhumor.co.kr/1445854873119.jpg
1986년, 헬무트 뉴튼이 촬영한 살바도르 달리
"내 시계가 어디 있지?"
─ 달리의 유언.
1968년 달리는 갈라에게 지로나의 성을 사 주었다. 그리고 달리는 갈라의 요청에 따라 그녀의 허락 없이는 그 성에 접근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였다. 자신의 오랜 뮤즈가 멀어지자 달리는 신경쇠약우울, 그리고 건강악화를 겪는다. 이 와중에 갈라는 젊은 남자들과 바람을 폈다고 전해진다.[23] 하지만 사생활과 다르게, 1970년대 달리는 작품활동을 활발히 이어나갔다. 1969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의 무대연출과 프로그램 컨셉 아트를 만들기도 했으며, 피게라스에 달리 미술관을 세우기 위한 재단을 창설했으며 미술관의 천장화 제작에 참가하였다. 또한 뉴욕에서 최초의 입체 작품을 전시하는 등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76세가 되던 1980년, 중풍의 영향으로 달리는 붓을 잡기가 힘들 만큼 수전증에 시달리게 된다. 갈라의 불륜이 지속되면서 달리는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고 그녀를 폭행하여 갈비뼈 두개를 부러트리고[24] 갈라는 흥분한 달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바리움을 투여했는데, 적정량을 넘어선 투약으로 달리는 혼수상태가 되어버리고 또 이것을 처치하기 위해 암페타민이라는 중추신경 자극제를 투여하게 된다. 이러한 약물 칵테일이 달리의 신경계에 나쁜 영향을 끼쳤고 그의 정신병은 더욱 심해지며 몸을 떨기까지 했다. 이 무렵 갈라는 노인성 치매의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1982년 달리는 스페인 국왕으로부터 후작 작위(Marqués de Dalí de Púbol)를 받게 되었지만 갈라가 같은 해 6월 10일 87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고, 이후 달리는 삶에 대한 의지를 잃게 된다. 1984년 그의 집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친구들이 그를 구조하였다. 이 과정에서 달리는 화상을 입었으며, 일부 시각에서는 이 화재가 달리의 자살시도라고 보기도 한다. 달리는 심부전으로 1988년 11월 입원했고, 1989년 1월 23일 아침 그는 84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가 죽음을 맞이한 곳은 자신이 태어난 집과 불과 세 블록 떨어진 거리였다. 그의 장례는 Sant Pere 교회에서 치러졌으며 카를로스 국왕이 그의 장례식에 참가했다. 그의 시신은 자신의 미술관인 피게라스 극장 미술관에 안치되었다.

자식은 없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다가 2017년 7월 난데없이 61세인 빌라 아벨 마르티네즈라는 여성이 딸이라고 주장하며 3700억이 넘는 달리 재산(사회단체에 속해져있다고)의 상당수 상속을 요구하고 나섰다. 결국 논란 끝에 28년만에 묘지가 파헤쳐졌고 피부와 손톱, 뼈에서 DNA 샘플이 채취됐다. 스페인 국립 독성학 법의학 연구소에서 이 샘플을 통해 DNA 조사를 하게 되었으나 분석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마드리드 법원은 그대로 친자 소송을 기각하고 묘지 발굴 비용을 지불하라고 명령하였다.[25] 달리 재단은 이에 대해 고인을 모독한 사기극이 끝났다라고 자평하였다. 판결 직후 빌라 아벨은 샘플의 관리 연속성(chain of custody)에 의문을 표한다면서 항소하였으나, 3년 정도 지난 2020년 5월 마드리드 법원에서 이를 기각하고 발굴 비용을 지불하라고 판결하였다.#

3. 작품

3.1.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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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지속, 1931년

그의 대표작들 중 하나로 살바도르 달리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작품이다.[26] 1934년 이후로 현재까지 뉴욕 현대미술관(MoMA)이 소장하고 있다.

그는 동시대에 가장 활발히 창작활동을 벌였던 미술가 중 한 명이고, 그렇기 때문에 유명한 작품 목록은 영문 위키의 주요 작품 일람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가 남긴 작품들의 예술적 가치는 현대에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에픽하이가 2009년 발표한 6집에 수록된 'Slow Motion'이라는 곡은 '기억의 지속'에서 영감을 받은 곡이라고 한다.

3.2. 영화

연도 제목 참여 비고
1928년 안달루시아의 개[27] 각본, 출연 유튜브
1930년 황금시대( L'Age d'Or)[28] 각본 유튜브
1945년 스펠바운드(Spellbound)[29] 연출[30] 유튜브
1974년 듄(Dune) 출연 제작취소[31]
2003년[32] 데스티노(Destino)[33] 각본, 연출 유튜브, 디즈니플러스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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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같이 보기


[1] 본명은 '옐레나 이바노브나 디야코노바(Елена Ивановна Дьяконова)'이다. 러시아인이며 달리보다 10살 연상의 여인이다.[2] "나는 내가 아직 무신론자라는 사실에 대해 신에게 감사한다.(Thank God I am still an atheist.)"라고 발언한 바 있다. 그러나 1950년 자신을 '믿음을 가지지 않은 가톨릭 신자'라고 표현하며 스스로를 가톨릭 신자로 밝혔다. 가톨릭적 색채가 담긴 그림을 그리거나, 성당에서 가톨릭 의식으로 결혼하기도 했다. 꽤 복잡한 종교관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3]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은 많은 이들의 토론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의 작품이 과연 현대 예술이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토론이 제일 격렬하다.[4] 이에 대해 달리는 "나는 결코 죽은 형은 아니며 살아있는 동생이라는 것을 항시 증명하고 싶었다."라고 인터뷰 한 바 있다. 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달리는 만성적인 애정 결핍에 시달렸다.[5] 안나 마리아는 달리의 초기 그림에 때때로 등장하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1925년창가에 서 있는 소녀다. 이 작품으로 달리는 전시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그 전시회에는 피카소도 방문했다.[6] 달리와 절친한 관계였으며 안달루시아의 개를 함께 제작했다.[7] 달리를 사랑해서 이 시기에 매우 친밀하게 지냈으나 달리가 파리로 떠난 후 멀어졌다.[8] 대담의 전문은 해당 사이트에서 PDF파일로 제공되고 있다.[9] 이 인터뷰를 할 당시 로르카는 스페인 내전에 휘말려 사살된 후였다.[10] 스페인민요설화들을 주제로 많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는 작품에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의 친구들 중 공산주의자들이 있었고 로르카는 스페인 내전이 일어났던 1936년 사살당했다. 로르카의 부고를 들은 달리는 "한 때 그의 절친한 지기였던 나는 이제 신과 역사 앞에서 이렇게 선언하는 바이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그는 100% 순수한 시인이었으며 내가 만났던 사람 중 가장 완벽하게 비정치적인 사람이었음을 맹세한다’ 라고 말이다."라며 매우 애통해했다.[11] 이것에 대해서는 이안 깁슨이 집필한 Lorca-Dalí: el amor que no pudo ser 와 The Shameful Life of Salvador Dalí를 참조할 것.[12] bleu: (F) 파란 / azul: (E) 파란 / verde: (E) 초록의 / negro: (E) 검은. (F): 프랑스어, (E): 스페인어[13] 스페인어로 "달러에 게걸들렸다"라는 의미의 가명 Avida Dollars는(엄밀히 말해 문법적으로는 "Ávido/a de dólares"가 맞다) 자신의 이름 Salvador Dali의 글자를 섞어 만든 새로운 가명으로, 이는 훗날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수많은 자아들 중 하나라며 가명을 짓고 활동하는 행위의 시초가 되었다.[14] 피카소는 '프랑코의 꿈과 거짓 Dream and Lie of Franco'라는 그림으로 프랑코를 비판한 바 있다.[15] Cadaques. 스페인의 해안 도시다.[16] 참고로 이 자리에는 초현실주의의 거장 르네 마그리트와 그의 아내, 루이스 부뉴엘, 그리고 폴 엘뤼아르와 갈라 사이의 딸 세실도 함께였다.[17] 갈라는 폴 엘뤼아르와 결혼한 사이였지만 막스 에른스트와도 함께 동거했다. 게다가 엘뤼아르와 에른스트는 동성애적 관계였다는 것을 볼 때 갈라는 그들과 상당히 복잡한 관계였던 셈이다.[18] 엘뤼아르는 1934년에 Nusch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모델이자 초현실주의 예술가인 마리아 벤츠(Maria Benz)와 재혼했다. 그녀는 만 레이(Man Ray), 파블로 피카소와도 가까운 사이였다.[19] 단 달리와 갈라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것은 1958년의 일이다. 두 사람은 스페인 지로나Girona 근처의 Àngels 성당에서 식을 올렸다.[20] 당시 성형수술은 거의 실험에 가까웠고 갈라는 초기 성형수술을 시도한 맹목적인 여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21] 원문은 "Sometimes, I spit for fun on my mother's portrait."[22] 현재 포르트리가트에 위치한 달리와 갈라의 집은 박물관이 되어 공개되고 있다. 공식 사이트 제공 정보. 9월 16일부터 12월 1일까지,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개장한다. 월요일은 휴무. 주변에 달리의 조각상도 찾아볼 수 있는 모양이다.[23] 흔히 알려진 갈라의 젊은 연인 중 한명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예수 역을 맡은 '제프 팬홀트'이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43년. 1973년부터 두 사람은 연인이었다.[24] 갈라의 갈비뼈가 아니라 골반을 두 조각 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갈라는 이러한 달리에게 보복성으로 쌍방 폭행을 했다고 한다.[25] 정확한 수치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당시 아벨의 변호사였던 Enrique Blánquez에 따르면 약 7,000 유로 정도로 추산된다.[26] 제 6차 교육과정 미술 교과서에는 '기억의 습작'으로 번역되었다. 원제는 La persistencia de la memoria인데 어째서 습작으로 번역했는지는 불명.[27] 이 영화는 첫 장면부터 눈을 면도칼로 후비는 장면이 나오는 고어물이므로 비위가 약하다면 보지 말자.[28] 발음은[lɑʒ dɔʁ][29]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이다.[30] 영화의 꿈 장면을 연출하고 배경을 그렸으나 너무 복잡하다는 이유로 대부분이 삭제되었고 20분짜리 영상이 통편집되어 2분으로 줄어들었다.[31] 감독인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는 달리를 황제 역으로 캐스팅 하고 싶어 했지만 달리가 천문학적인 캐스팅 비용을 요구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최고의 섭외비를 받은 배우로 기록되고 싶다는 것 하나 때문이었다. 조도로프스키 감독은 쿨하게 받아들였지만 결국 비용문제 때문에 촬영 중 하차했다.[32] 1945년부터 제작을 시작하였으나 2003년 완성되어 Annecy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최초 공개되었다. 물론 58년동안 계속 만든건 아니고, 1946년에 중단되었다 2000년 다시 발견되어 2003년에 완성된 것이다.[33] 월트 디즈니와 협력하여 만들어진 6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이다. 달리의 작품이 애니메이션 전반에 걸쳐 등장한다.[34] 이것에서 비롯된 묘사가 안달루시아의 개에서 등장한다. 구멍난 손바닥에서 기어나오는 개미가 그것인데, 이것과 유사한 묘사가 그가 연출했던 애니메이션 '데스티노'에도 짧게 나온다.[35] 이것을 선뜻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달리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기도 했다.[36] 작품의 제목은 "관능적 죽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