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황태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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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0> 독일 제국의 황태자 빌헬름 폰 프로이센 Wilhelm, Kronprinz des Deutschen Reiches | |||
이름 | 프리드리히 빌헬름 빅토어 아우구스트 에른스트 폰 프로이센 (Friedrich Wilhelm Victor August Ernst von Preußen) | ||
출생 | 1882년 5월 6일 | ||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포츠담 대리석 궁전 | |||
사망 | 1951년 7월 20일 (향년 69세) | ||
서독 뷔르템베르크호엔촐레른 헤힝엔 | |||
배우자 |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체칠리에 여공작 (1905년 결혼) | ||
자녀 | 빌헬름, 루이 페르디난트, 후베르투스, 프리드리히, 알렉산드리네, 체칠리에 | ||
아버지 | 빌헬름 2세 | ||
어머니 |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 ||
형제 | 아이텔 프리드리히, 아달베르트, 아우구스트 빌헬름, 오스카, 요아힘, 빅토리아 루이제 | ||
종교 | 루터교회 (프로이센 교회 연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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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계급 | 보병 대장 |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
주요 서훈 | 왕관 붉은 독수리 대십자 훈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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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제국의 마지막 황제 빌헬름 2세의 장남이자, 독일 역사상 마지막 황태자이다. 독일 제국군의 보병대장이었다.2. 생애
2.1. 어린 시절
빌헬름 2세와 아우구스테 빅토리아의 맏이이자 장남으로, 1882년 5월 6일 포츠담에서 태어났다. 빌헬름 출생 당시에는 친증조할아버지 빌헬름 1세가 살아있었고, 친할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는 여전히 황태자였다.4대가 한자리에 모인 모습[1] |
빌헬름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 빌헬름 2세와 할머니 빅토리아 황태자비 사이에서 충돌이 있었다. 빅토리아 황태자비는 며느리의 출산에 간호사가 입회하기를 원했으나, 빌헬름 2세는 이에 대해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빌헬름의 출산에는 딱히 큰 문제가 일어나진 않았고, 6살 때 증조할아버지 빌헬름 1세가 사망하고 할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빌헬름도 황태손으로 격상되었으며, 99일 뒤에 할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가 후두암으로 사망하고 아버지 빌헬름 2세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황태자가 되었다.
빌헬름은 BFC 프로이센이라는 축구팀을 창단하기도 했다. 현재도 존재하는 팀이다.
청년시절의 빌헬름 황태자.
2.2. 결혼
결혼 포스터 | 1905년 체칠리에 황태자비와 함께 |
1905년에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3세의 차녀이자 팔촌인[2] 체칠리에 여공작과 혼인하였다.[3]
가족 사진[4] |
1914년에는 아내인 체칠리에의 이름에서 따와 체칠리엔 호프의 건설을 명령했다. 궁전이 완공되고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체칠리에 황태자비와 자녀들이 머물다가 제2차 세계 대전 때 소련군이 진격해오자 피신했고, 체칠리엔 호프는 연합국 3대 정상들의 포츠담 회담의 회담장이 되었다. 이후로도 현재까지 박물관, 호텔로서 각국의 정상들이 종종 모여서 회담을 가지는 장소가 되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2.3. 제1차 세계 대전
▲ 검은 군복을 입고 있는 빌헬름 폰 프로이센. 흰 군복을 입고 있는 빌헬름 2세와 하늘색 군복의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의 빌헬름 에른스트.
▲ 1차대전 발발 직전, 7월 위기가 한창 진행되던 1914년 7월 9일에 빌헬름 황태자와 고틀리프 폰 헤슬러 육군 원수 앞에서 퍼레이드를 하는 뷔르템베르크 왕국군.
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빌헬름은 육군 장군이 되어, 제5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보통 야전군은 병과대장 또는 상급대장이 지휘하는데, 빌헬름은 이때 소장계급을 달고 있었다. 5군의 사령관으로 국경 전투에 참여하였지만 그의 계급 및 직책은 그저 황태자의 권위 보장을 위한 명예직에 가까웠고, 실질적 사령관은 5군의 참모장인 콘스탄틴 폰 크노벨스도르프 장군이었다.
1915년 이후에는 그의 집단군도 있었는데, 5군, A분견군, B분견군, C분견군, 그리고 3군이 포함되어 있었다. 해당 집단군은 아르곤 공세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빌헬름 황태자는 외교 문제에 대한 군사적 해결책 추진을 부인했으며, 외국 특파원과의 인터뷰에서 영어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것은 현대의 가장 어리석고 무의미하며 불필요한 전쟁이다. 그것은 독일이 원하지 않는 전쟁이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강요된 전쟁이며, 우리가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준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이제 우리가 전쟁을 원한다는 것을 세계에 확신시키는 주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빌헬름 폰 프로이센 황태자. 1914년 10월 외국 특파원과의 인터뷰에서.
빌헬름 폰 프로이센 황태자. 1914년 10월 외국 특파원과의 인터뷰에서.
2.4. 전간기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의 수탈로 지친 독일 국민들이 독일 11월 혁명을 일으키며 독일 제국은 멸망했고 카이저 빌헬름 2세는 퇴위하였다. 이에 따라 빌헬름도 독일 황태자와 프로이센의 왕세자 직위를 모두 잃었고, 그의 형제자매들과 친척들도 프로이센의 왕족이라는 칭호와 직위를 잃었다. 빌헬름은 아버지와 함께 네덜란드로 망명했다.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가 되자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조건으로 구 왕족들의 독일 귀환을 허락했고 빌헬름은 독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이 조건은 지켜지지 않았고 독일로 입국한 빌헬름은 극우파를 지원하는 등 왕정복고 여론을 부채질하게 된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와 악수하는 빌헬름 황태자[5][6][7] |
1925년에는 대선에 출마해 대통령이 되어 통령 출신으로 황제가 된 나폴레옹을 모델 삼아 대통령이 된 후에 왕정을 부활시키려고 했지만, 아버지 빌헬름 2세[8]가 반대하면서 출마가 무산되었다.[9] 대신 이후부터 철모단에 가입해 나치를 지지했다.[10] 하지만 이 나치를 지지한 전적이 후대에까지 두고두고 발목을 잡혀 왕정 복고는 꿈도 못 꾸게 되고, 훗날 증손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가 현 독일 정부를 상대로 낸 구 황가 재산 반환 소송에서 계속 기각되는 원인이 된다.[11]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빌헬름도 떡고물을 기대했지만 장검의 밤으로 빌헬름의 친구 쿠르트 폰 슐라이허가 사살당하며 김칫국만 먹게 된다. 장검의 밤 이후로 군주정 복고주의는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되었고 빌헬름은 모든 정치 활동을 접었다.
1934년 장남 빌헬름과 도로테아의 사이에서 장녀 펠리시타스가 태어나면서 할아버지가 되었다. 빌헬름이 귀천상혼하면서 계승권은 차남 루이 페르디난트에게로 갔다.[12]
1938년 차남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왕자가 러시아의 키라 키릴로브나 여대공과 결혼했다. 장남과 달리 동등한 결혼이였으며, 1939년 장손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태어나는것을 보게 된다.
2.5. 제2차 세계 대전과 말년
1940년 빌헬름의 장남 빌헬름이 프랑스 침공 도중 벨기에 니벨레스에서 전사했다. 장례식장에는 5만명이 모여 애도하며 독일 군주제 복귀 여론의 세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확인시켰다. 이에 나치 지도부는 법을 제정해 모든 구 왕족의 군대 예편을 명령했다.1941년에 아버지 빌헬름 2세가 사망하자 빌헬름이 호엔촐레른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이후 체칠리엔 호프라는 궁전에서 머물렀고,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터지자 게슈타포의 감시를 받았다.
1945년 본인의 건강이 악화되자 포츠담을 떠나 알프스 지역으로 요양을 가게 된다. 붉은 군대가 서진해 오자 체칠리엔 호프는 버려졌고 영국/미국/소련의 전후처리 회의의 회의장로 사용된다.
전쟁이 끝날 무렵 연합군 소속의 자유 프랑스 모로코군에게 체포되었는데, 죄목은 다름아닌 1차 대전의 전범(...)이라는 이유였다. 정작 1차대전 패전 직후 부황 빌헬름 2세를 포함한 당대 패전국 군주들은 폐위 외에는 그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13][14] 사실 2차대전의 경우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의 전쟁범죄 및 학살이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1차대전의 경우에는 그렇게 눈에 띌 만한 전쟁범죄는 없었으며 있었다고 해도 유럽 7년전쟁이나 미국 남북전쟁 같은 수준으로나 있었을 뿐이다. 거기다 독일 제국의 제정 폐지 및 공화정 수립은 독일 정부의 정식 결정이 아니라 필리프 샤이데만이 회의도 없이 독단적으로 저지른 실수 같은 것이었다. 당연히 체포 이후 얼마 안 가서 풀려났지만 헤힝겐으로 이사하기 전에 머물렀던 호엔촐레른 성에서 반경 25km를 벗어날 수 없는 가택연금 처분을 받았다. 거기다 이 가택연금조차도 얼마 안 가서 해제되었다. 이후 헤힝겐에 있는 방 5개 자리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2.6. 사망
사망 당시 모습. |
이후 헤힝겐에서 살다가 1951년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유해는 호엔촐레른 성의 묘지에 묻혔다.
그의 사후 호엔촐레른 가문의 수장 자리는 차남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왕자가 승계했다.
3. 가족관계
자세한 내용은 호엔촐레른 가문 문서 참고하십시오.4. 대중매체
전세계적으로 구제국(독일 제국, 오헝제국, 러시아 제국)의 몰락에 대한 아쉬움의 여론이 제법 많이 있는지라 대체역사물에서는 거의 대부분 제정이 폐지되지 않거나 제정이 복고되어 빌헬름 3세로 즉위하는 것으로 나온다.[15] 애초에 독일 제국에 대한 평가와 빌헬름 2세 개인에 대한 평가를 떠나서 이렇게 대가 끊기지 않고 직계로 이어지는 경우가 정말 보기 드물기 때문에 그만큼 대체역사 팬덤에서 매력적인 요소로 쓰일 수밖에 없다. 다만 히틀러가 주인공이 되는 창작물에서는 히틀러와 나치당의 인기 때문에 얄짤없이 원 역사로 돌아간다. 어떤 작품에서는 아예 원 역사보다 처참한 결말을 맞는 경우도 있다.[16]- Hearts of Iron IV에서는 독일로 나치를 축출하고 제국을 재건한 뒤 빌헬름 2세의 사망 이벤트가 뜨면 뒤를 이어 황제 빌헬름 3세가 되며, 네덜란드가 빌헬름 2세의 귀환을 막아도 아버지 대신 황제로 즉위한다. 민주주의 루트에서는 그가 진짜 입헌군주국의 황제가 되며 안정도를 올려주는 국민정신으로 표현된다.
-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서는 동맹국의 승전으로 제국이 계속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계속 황태자 자리에 앉아 있으며 빌헬름 2세 사망 소식이 뜨고 나면 뒤를 이어 빌헬름 3세로 즉위한다. 별명은 빌삼이. 2차 벨트크리크에서 져서 라이히스팍트가 붕괴되면 미텔아프리카로 망명을 가지만, 국민정신의 안정도 디버프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붕괴하여 그대로 증발한다. 그리고 원래는 처음부터 독일 원수로 등장했지만 패치 후 전쟁 중 이벤트가 뜨며 원수로 등장하게 되었다.
- 대체역사 소설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는 나치가 몰락하고 제정복고가 이루어지면서 빌헬름 3세로 즉위한다. 본래는 주인공 디트리히 샤흐트를 자신의 비스마르크로 삼아 재상으로 임명해 전제군주제를 부활시키려고 하지만, 주인공의 반대와 설득, 왕당파의 쿠데타 실패로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이고 이후에는 철저히 입헌군주정에 어울리는 황제의 모습으로 활동하며 이득을 챙기는 노련한 모습을 보인다.
[1] 왼쪽부터 할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 증조할아버지 빌헬름 1세, 아버지 빌헬름 2세[2] 둘 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현손이다. 한편, 동서인 크리스티안 10세도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고손이다.[3] 체칠리에 황태자비는 키가 177cm로 180cm인 빌헬름 황태자와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아들들도 다 장신에 미남이다.[4] 왼쪽부터 장남 빌헬름 왕자, 삼남 후베르투스 왕자, 체칠리에 황태자비, 차녀 체칠리에 공주, 장녀 알렉산드리네 공주, 빌헬름 황태자 본인, 사남 프리드리히 왕자, 차남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왕자.[5] 히틀러 집권 이후 구세대(제국)와 신세대(나치)의 화합을 보여주기 위해 괴벨스의 기획으로 열린 행사 포츠담의 날에 찍힌 사진이다.[6] 참고로 히틀러의 키는 175cm로 당시 독일 남성의 평균키(173cm)보다 컸는데, 빌헬름 황태자는 그보다도 훨씬 더 큰 것을 볼 수 있다.[7] 재밌는 건 빌헬름 황태자의 아들들인 루이 페르디난트와 프리드리히는 바로 작년인 1932년에 미국 대선 민주당 후보이자 제32대 미국 대통령이 되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만났다.[8] 빌헬름 2세는 본인에게 충실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지지했다.[9] 거기다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이 되면 공화국 충성 서약을 해야 되는데 그 서약을 해놓고 국민투표든 법 개정이든 해서 왕정을 부활시키는 건 그 서약을 엎어버리는 것이기에 반대여론도 만만치 않을 것이고, 빌헬름 2세가 보기에도 아들이 황태자로서의 자존심도 포기하고 대통령이 되려고 공화국 충성 서약을 하겠다는게 못마땅해 보였을 것이다. 훗날 1968년 아들인 루이 페르디난트도 독일 대통령 후보에 추천되기도 했다. 이쪽은 반대로 본인이 거절했다.[10] 빌헬름 황태자 본인뿐만 아니라 동생 아우구스트 빌헬름은 돌격대에까지 자진 가입할 정도로 열렬한 히틀러의 추종자였고, 매제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도 후원금을 보내며 나치 인사들과 친하게 지냈고 외조카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4세는 슈츠슈타펠에까지 가담한 극렬 나치 지지자였다. 그나마 아버지인 빌헬름 2세가 나치를 불신하긴 했지만 이렇게 대대적으로 나치를 지지한 구 독일 황실에 대한 이미지가 얼마나 안좋았는지 그리스의 왕비이자, 빌헬름 황태자의 외조카인 하노버의 프리데리케는 두고두고 친가와 외가 할 것 없이 일가 친척들이 죄다 나치를 지지했다고 비판받아야만 했다.[11] 독일 정부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의 소송을 기각한 이유가 전범이거나 전범의 후손이라면 동독 정부에게 빼앗긴 재산을 돌려받지 못하고 정부에 귀속된다는 법률을 근거로 내건 증조부 빌헬름 황태자가 나치와 친하게 지낸 전적 때문이었다.[12] 애초에 빌헬름은 귀천상혼이 아니었어도 딸만 2명을 낳고 아들이 없었고, 근본적으로 1940년 아버지 빌헬름 황태자는 물론 할아버지 빌헬름 2세보다도 먼저 죽었기 때문에 계승권을 가질 수 없었다.[13] 다만 빌헬름 2세나 불가리아 왕국의 페르디난트 1세와는 달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카를 1세와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6세의 경우에는 책임을 묻기가 힘든데, 두 사람은 세계대전이 치러지는 도중에 즉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를 1세는 오히려 조기 종전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었고, 협상국 내에서도 그를 우호적으로 평가하는 여론이 상당수 있었다. 메흐메트 6세는 전임 황제 메흐메트 5세처럼 허수아비였다.[14] 여동생 빅토리아 루이제는 오빠와 정반대로 6촌 동생인 조지 6세의 지시를 받은 영국군의 도움을 받아 소련군의 진주를 피해 영국군 점령지로 피신했다.[15] 현 수장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은 대체역사 팬덤에서 게오르크 1세와 프리드리히 4세로 왕호가 첨예하게 나뉘지만 빌헬름 황태자는 증조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왕호인 만큼 명확하게 빌헬름 3세로 통일되어 있다.[16] 아마 2차대전 전후에 뜬금없이 1차대전 전범 혐의로 체포된 에피소드를 모티브로 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