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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양)/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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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송(宋) 시기
1.1. 집안 내력1.2. 어린 시절
2. 제(齊) 시기3. 양(梁) 시기
3.1. 천감(天監) 시기
3.1.1. 선양이란 이름으로3.1.2. 남강후(南康侯)
3.2. 종리 전투와 북벌3.3. 빛나는 치세3.4. 빛 좋은 개살구3.5. 연이은 실정3.6. 비참한 최후3.7. 황제 거사의 업적

1. 송(宋) 시기

1.1. 집안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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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요사렴(姚思廉)의 《양서》(梁書)[1]에 명시된 바에 따르면 양무제 소연은 전한의 개국공신이자 한 3걸 중의 한 명이었던 상국(相國) 소하(蕭何)[2]의 후예로 남난릉(南蘭陵) 중도리(中都里) 사람이었다.

전한 초기의 상국이었던 소하는 차정후(酇定侯) 소연(蕭延)[3]을 낳았고, 소연은 시중(侍中) 소표(蕭彪)[4]를 낳았으며 소표는 공부연(公府緣) 소장(蕭章)을 낳았다. 다만 이것은 오직 《남제서》와 《양서》에만 명시된 가계로 《신당서》 <재상세계표>에는 소표의 부친을 소칙(蕭則)이라 기록하고 있으며, 《남사》에는 양무제 소연이 상국 소하의 후손이라는 언급도 없이 황조회음부군(皇祖淮陰府君) 소정(蕭整)에서부터 내려온다.

소장은 소호(蕭皓)[5]를 낳았으며 소호는 소앙(蕭仰)을 낳았다. 《신당서》 <재상세계표>에 의하면 소앙의 자는 혜고(惠高)로, 아들은 소호인데 본래 《남제서》와 《양서》가 《신당서》보다 일찍이 편찬되었기 때문에 《신당서》의 저자가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6] 소앙은 태자태부(太子太傅) 소망지(蕭望之)를 낳았는데 소망지는 자가 장천(長倩)으로 이 인물은 앞서 상국 소하의 아들 차정후(?) 소연 이후의 인물들과 다르게 실존인물이었으며, 《한서》<소망지전>에 그의 생애가 실려 있다. 그러나 '''소망지가 상국 소하의 6세손이라는 기록은 후대의 창작으로 오직 성씨가 같다는 이유로 소하의 후손이 된 것이었다.

소망지는 광록대부(光祿大夫) 소육(蕭育)을 낳았는데, 《한서》<소망지전>에 따르면 소육의 자(字)가 차군(次君)으로 장수교위(長水校尉)를 지냈는데 아들 어사중승(御史中丞) 소소(蕭紹)는 《한서》에는 보이지 않는다.[7] 소소는 광록훈(光祿勳) 소굉(蕭閎)을 낳았으며 소굉은 제음태수(濟陰太守) 소천(蕭闡)을 낳았다.

소천은 오군태수(吳郡太守) 소빙(蕭氷)을 낳았으며, 소빙은 중산상(中山相) 소포(蕭苞)[8]를 낳았고, 다시 소포는 박사(博士) 소주(蕭周)를 낳았다. 소주는 사구장(蛇丘長) 소교(蕭矯)를 낳았고, 소교는 주종사(州從事) 소규(蕭逵)를 낳았다. 소규는 효렴(孝廉) 소휴(蕭休)를 낳았으며, 소휴는 광릉군승(廣陵郡丞) 소표(蕭豹, 광릉부군)를 낳았고, 소표는 태중대부(太中大夫) 소예(蕭裔)를 낳았다.

소예는 남조 양나라의 초대 황제인 무제 소연의 6대조로 칠묘(七廟)에 위패(位牌)가 안치되어 '황조태중부군'(皇祖太中府君)으로 격상되었으며 소예는 회음령(淮陰令) 소정(蕭整, 회음부군)을 낳았다. 《신당서》에 따르면 소정은 자가 공제(公齊)로 《남사》에서 처음으로 언급되는 남제의 고제 소도성과 양무제 소연의 선조였다. 《남제서》에 따르면 서진 말기 남흉노가 세운 호한(胡漢)의 대침공으로 영가의 대란(永嘉之亂)이 일어나자 강을 건너 진릉군(晉陵郡) 무진현(武進縣)에 정착했으며 북방의 사람들은 왼쪽에 살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남'(南)이라는 명칭을 붙인 남난릉(南蘭陵)에 살았다.

회음부군(淮陰府君) 소정
자: 즉구부군(即丘府君) 소준
손: 태상부군(太常府君) 소악자
증손: 선제(宣帝) 소승지
현손: 고제(高帝) 소도성 - 남조 남제의 초대 황제
자: 제음부군(濟陰府君) 소할
손: 중종사사부군(中從事史府君) 소부자
증손: 특진부군(特進府君) 소도사
현손: 태조 문제(文帝) 소순지
내손: 무제(武帝) 소연 - 남조 소량의 초대 황제
소정은 즉구령(卽丘令) 소준(蕭雋, 즉구부군)과 제음태수(濟陰太守) 소할(蕭轄, 제음부군)을 낳았는데, 여기서 소준은 남제의 시조인 고제 소도성의 선조였고, 소할은 양나라의 시조인 무제 소연의 선조였다.

소할은 주치중종사(州治中從事) 소부자(蕭副子, 중종사사부군)를 낳았고, 소부자는 태치서시어사(台治書侍御史) 소도사(蕭道賜, 특진부군)를 낳았으며, 소도사는 진북장군(鎭北將軍) 소순지(蕭順之, 소량 태조 문황제로 추숭됨)를 낳았다.

1.2. 어린 시절

464년에 소연은 소순지와 그의 아내 장상유(張尙柔) 슬하에서 삼남으로 태어났으며 소연은 태어날 때 부터 기이함이 있어서 양쪽 허벅지사이에는 굳은살이 있었고 정수리는 위로 솟아있었으며 그의 오른손에는 「무(武)」라는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소연은 어려서부터 박학했고 총명했으며 모략과 계책을 좋아했고 문무 모든 것에 소질이 있으니 당시에 사람들이 당시 그를 신동이라 불렸다. 어머니 장상유는 범양(范陽) 방성(方城) 사람으로 장상유는 소연이 겨우 8살 때 말릉현(秣陵縣) 동하리(同夏里)의 저택에서 병으로 숨을 거두었으며 무진현(武進縣) 동성이산(東城里山)에서 제사를 지냈다. 어머니를 잃은 소연은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고 슬피 울다가 거의 숨이 끊어질 뻔했다.

당시 소연의 가문은 아직 소도성(蕭道成)이 두각을 나타내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유한 가문은 아니었다. 그래도 앞서 송을 건국한 유유나 삼촌뻘인 소도성, 후에 양을 무너뜨리는 진패선에 비하면 나은 편이었다. 이때 당시만 해도 소연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두각을 보이지 못했으며 그가 어느정도 기록에 나타나게 된 것이 제나라가 건국된 이후 경릉왕(竟陵王) 소자량(蕭子良)의 휘하의 7명과 함께 있을 때부터 였다. 아버지 소순지는 송에서 황문랑(黃門郞), 안서장사(安西長史)와 오군내사(吳郡内史)를 지냈으며 소도성과 친하게 지냈는데 덕분에 소연은 제가 건국된 이후로 수혜를 받게 되었다. 소도성은 수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운 명장이었다. 당시 송나라는 유욱이 재위하고 있었는데 유욱은 수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우는 소도성을 좋게 보지 않았다. 한번은 유욱이 행차하고 있었는데 그 날이 너무 더운 여름이었기 때문에 소도성은 웃통을 벗고 자고 있었다. 이 때 유욱은 소도성의 배에 과녁을 그려 활을 쏘려 했는데 유욱의 주변에서 소도성의 배를 화살로 쏜다면 다시는 소도성을 쏠 수 없다 간언하여 유욱은 화살촉을 빼낸 뒤 소도성의 배를 쐈다. 이 사건 이후로 소도성은 이를 갈게 되었으며 그의 측근들과 함께 거사에 관하여 논의했다.

소도성은 유욱에게 당한 모욕감,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품고 유욱의 심복 양옥부(楊玉夫) 등과 비밀리에 손을 잡았고 다음날 유욱은 소도성이 매수한 양옥부에 의해 찔려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당시에 소연의 아버지 소순지는 큰 공을 세웠고 소도성의 총애를 받았다. 소도성은 얼마 안가 순제(順帝)에게 선양을 받아 제나라를 건국했다. 그리고 아버지 소순지는 건국의 공으로 임상현후(臨湘縣侯)로 봉해진다.

2. 제(齊) 시기

2.1. 명제(明帝) 시기

남제 융창 원년(494), 중서시랑에 있던 소연은 당시 황제였던 명제 소란에 의해서 다음해(495)에 황문시랑이 되었다. 또 다음해(496) 북위군이 의양을 공격해오자, 소연은 선봉을 자청하면서, 북위군을 격파하고 사주별가에 임명되었다. 또 영태 원년(498) 3월, 북위군이 이번에는 수만 기병을 이끌고 등성을 공격해오자 통수 최혜경은 대경실색하여 도주하고 그의 군대도 전멸했다. 하지만 소연은 완강하게 싸우고 돌아왔으며 옹주자사, 보국장군이 되었다. 하지만 명제 소란이 죽고, 그의 아들 동혼후 소보권이 즉위하자 양주 자사, 시안왕 소요광 등 여섯 사람이 보좌했는데 이들을 여섯 귀인(육귀)이라고 불렀다. 소연은 권력이 여러 사람에게 분산됐으니 반드시 변란이 생길 거라고 예상하고 은밀히 병기를 만들며 참대나무와 참나무를 베어 강밑에 가라앉힌 다음 배를 건조할 목재로 삼아 전쟁에 대비했다.

2.2. 동혼후(東昏侯) 시기

영원 2년(500) 겨울, 소보권이 소연의 큰 형이었던 상서령 소의(蕭懿)[9]를 살해하자 소연은 형을 무고하게 죽인 일로 소보권에게 불만이 생겼다. 거기에 소보권은 군대를 보내 소연도 죽이게 했는데 소연은 이해득실을 따져 토벌군을 막아내고 이듬해(501) 3월, 강릉에서 남강왕 소보융을 황제에 즉위시키고 10월에 건강을 포위했다. 12월, 건강을 수비하던 장직과 왕진국이 소보권을 시해하고, 그의 머리를 기름칠한 누런 명주에 싸서 바쳤다. 소연은 군사들에게 국고를 봉하게 하고, 궁녀 2천 명을 풀어 장병들에게 시집보냈으며, 스스로 중서감, 대사마, 녹상서사, 표기대장군, 양주자사, 건안공이 되어 남제 조정의 대권을 장악했다.

2.3. 화제(和帝) 시기

2.3.1. 선덕태후(宣德太后)

502년 정월(正月)화제(和帝) 소보융(蕭寶融)겸시중(兼侍中) 석천문(席闡文)을 파견하여 당시 소연이 주둔하고 있었던 건강(建康)에 전쟁을 겪어 피로해진 군사들을 위로하였다.[10]

이후 소연은 안정이 되자 조서를 내려 명령하였다.
「무릇 동혼(東昏)의 시대에는 들떠서 소비했으니,예악의 의식을 익히는 일이나、갑옷과 무기를 수선하는 것이 아니면,나머지는 모두 금지하여 끊도록 해라。」
「凡東昏時浮費,自非可以習禮樂之容、繕甲兵之務者,餘皆禁絶。」
2월 1일에 소연은 선덕태후(宣德太后) 왕보명(王寶明)[11]을 맞이하여 궁궐로 들어오게 하니 지금까지 소연이 조정에 나아가 신하가 황제를 대신하여 일을 맞는 것이 해제되었다.

소연은 소란(蕭鸞) 건무(建武) 초에 관직을 떠난 오흥태수(吳興太守) 사비(謝朏)국자좨주(國子祭酒) 하윤(何胤)의 재주를 눈에 여기고 있었는데 마침내 정권을 잡자 소연을 상주하여 군자좨주(軍諮祭酒)로 삼았지만 사비와 하윤은 모두 이에 응하지 않았다.

2.3.2. 건국(建國)의 기틀

소연은 내심 황제에게 선양(禪讓)을 받을 뜻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눈치챈 표기사마(驃騎司馬) 심약(沈約)은 그 실마리를 조금이라도 당겨보고자 하였으나 결단을 내리지 못한 소연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심약은 소연의 뜻을 알고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다시 소연을 찾아가 조언하였다.
「지금은 옛날과는 다르기 때문에,순박한 풍속으로 일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사대부(士大夫)용(龍)을 타고 봉(鳳)에 붙어서,모두가 조그만 공적이라도 세우기를 바랍니다。지금 아이들과 목동도 제(齊)의 운명이 이미 무너진 것을 알고 있으니,명공(明公)께서는 그 운세를 이어야만 하고;천문(天文)과 참기(讖記) 또한 다시 확연합니다。천심(天心)을 어길 수도 없고,인정(人情)을 저버릴 수도 없습니다。진실로 운수를 가지고 있으면,비록 겸광(謙光)한다 하여도,역시 중지시킬 수 없습니다。공은 초기에 번(樊)、면(沔)에서 이때를 생각했어야 했는데;지금 왕의 대업이 이미 이루졌으니,무엇을 다시 생각하십니까!만약 조속히 대업(大業)을 결정하지 않아,어떤 이가 이의를 세운다면,곧 위덕(威德)을 해칩니다。또 사람은 쇠와 돌이 아니기 때문에,그때의 일을 보장하기 어려우니,어찌하여 건안(建安)의 봉작을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습니까!만약 천자(天子)가 도읍으로 돌아오고,공경(公卿)이 자리를 찾게 된다면,군신(君臣) 몫이 정해질 것이므로,다시 다른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군주는 윗자리에서 밝히고,신하는 아래에서 충성할 것이니,어찌 다른 사람들 가운데 다시금 공과 함께 반역을 일으키려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今與古異,不可以淳風期物。士大夫攀龍附鳳者,皆望有尺寸之功。今童兒牧竪皆知齊祚已終,明公當承其運;天文讖記又復炳然。天心不可違,人情不可失。苟歷數所在,雖欲謙光,亦不可得已。公初建牙樊、沔,此時應思;今王業已成,何所復思!若不早定大業,脫有一人立異,卽損威德。且人非金玉,時事難保,豈可以建安之封遺之子孫!若天子還都,公卿在位,則君臣分定,無復異心。君明於上,臣忠於下,豈復有人方更同公作賊!」
드디어 소연은 뜻을 열고 마침내 심약이 나가자 최측근 자의참군(諮議參軍) 범운(范雲)을 불러 이 사실을 알렸다. 범운은 앞서 심약이 간언한 것과 뜻이 같으니 소연은 말했다.
「지혜로운 이는 마침내 암암리에 같은 것이오。경(卿)은 아침 휴문(休文, 심약)을 데리고 다시 오시오!」
「智者乃爾暗同。卿明早將休文更來!」
범운이 나가서 심약에게 말하니 심약은 범운과 먼저 들어갈 것을 기약했다. 소연은 마침내 심약에게 선양에 관한 일에 초안을 갖추도록 하였는데 심약은 기다렸다는 듯이 품속에 있는 조서를 꺼내고 선발과 배치도를 함께 꺼냈으며 이는 심약이 옛 부터 생각한 일이기 때문에 소연이 감히 손을 볼 곳이 없었다. 범운이 밖으로 와서 궁전의 문 앞에 도착하였으나 들어갈 수 없자 수광합(壽光閤) 밖을 배회하고 심약을 불렀고 심약은 손을 들어 왼쪽을 향하였다. 소연은 다시 범운을 불렀는데 심약의 재주와 지혜가 종횡무진을 감탄하고 말하였다.
「내가 군사를 일으킨지 어느덧 3년이 지났는데,공신(功臣)과 제장(諸將)의 실로 노고가 있으나,제왕의 대업을 이루는 이는,경(卿) 둘뿐이오!」
「我起兵於今三年矣,功臣諸將實有其勞,然成帝業者,卿二人也!」
502년 2월 2일에 사촌동생 영삭장군(寧朔將軍) 소병(蕭昺)을 연주(兗州)의 모든 일을 감독하는 감남연주제군사(監南兗州諸軍事)로 삼고[12]2월 5일에는 지위를 올려 모든 군사업무를 관장하는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로 하고 칼과 신발을 착용하고 전각(殿閣)에 오를 때 보고하고 알현할 때 이름을 대지 않도록 하였다. 2월 12일에는 대사마(大司馬)의 장사(長史) 왕량(王亮)을 중서감(中書監)과 상서령(尙書令)으로 삼았다. 2월 17일에 황제는 조서를 내려 상국(相國) 겸 총백규(總百揆) 겸 양주목(揚州牧)으로 삼고 십군(十郡, 역양군(歷陽郡), 남서주(南徐州)의 의흥군(義興郡), 양주(揚州)의 회남군(淮南郡), 선성군(宣城郡), 오군(吳郡), 오흥군(吳興郡), 회계군(會稽郡), 신안군(新安郡), 동양군(東陽郡)으로 총 십군이다.)을 내리고 양공(梁公)의 지위에 책봉했다.

양공에 책봉된 소연은 구석(九錫)의 예를 갖추고 봉국 양에 문무백관을 설치하고 녹상서사(錄尙書事)의 호칭을 버리도록 했으며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의 지위는 예전과 같게 했다.

2.3.3. 소연의 됨됨이

2월에는 양왕(梁王)으로 책봉되었으며 마침내 3월에는 화제 소보융이 강압에 의해 제위를 양위했다. 결국 4월, 건강 남교에서 황제에 즉위하고는 선양이란 이름으로 소보융을 폐하고, 제나라를 멸망시켰다.

소연은 국호를 양(梁)으로 정하고, 소보융을 비롯한 제나라 황족을 남조의 전통적인 풍습에 따라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모두 죽였다. 제나라 황족은 서로 죽이고 죽고를 반복했으며, 소연이 나머지 황족도 몰살시키는 바람에 명제 소란의 장남 사술공 소보의와 소란의 6남 파양왕 소보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절멸했다. 소보의는 폐질 때문에 말을 못하는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화를 면했지만, 천감 8년(509)에 죽어서 그다지 천수를 누리지는 못했다. 소보인은 북위로 망명하여 목숨을 건지고 효문제 원굉의 부마가 되었으나, 역모죄로 처단되었다. 거기에 아들 셋은 아버지의 역모에 휘말려서 죽거나 요절했거나 아내와 짜고 친어머니(원굉의 딸 남양장공주)를 죽였다가 처단되어 대가 끊겼다. 그리고 소보권의 차남 소종도 살아남았는데 자세한 것은 소종 항목을 참조하길 바란다.

3. 양(梁) 시기

3.1. 천감(天監) 시기

3.1.1. 선양이란 이름으로

3.1.2. 남강후(南康侯)

3.2. 종리 전투와 북벌

천감 6년(507), 북위의 중산왕 원영과 맹장 양대안호왈백만 대군으로 남하했으나 양군이 막아냈다.[13] 이것이 비수대전과 함께 위진남북조시대 최대의 전투로 평가되는 종리 전투인데, 종리성의 창의지가 불과 병력 3천 명으로 절망적인 농성을 할 때, 명장 위예(위호韋虎라고도 불림)의 지원군 20만 명이 가세해 전세를 뒤엎어버렸다. 위예전차로 기세가 오른 북위군의 요격을 막아낸 후 한번에 북위군을 포위, 전멸시켰다.

위예는 가마에 탄 채 지팡이를 두드리며 지휘를 했고, 북위군이 회하에 놓은 다리를 화공으로 날려 버리며 퇴로가 사라진 적에게 무참한 패배를 안겼다. 북위군은 일찍이 합비 때부터 양대안 휘하 장수들의 무능함으로 탈영병이 속출하는 전력이 있었던 만큼 다시 무참히 무너졌고, 참수당한 북위군이 10만, 익사한 북위군이 10만이었다. 종리성에서 이 모습을 지켜본 창의지는 "승리다! 승리다!"라고 외치며 환호하였다나.

양나라는 이후에 종리 전투에서 기병대 300명으로 활약한 지장 진경지 등을 통해 여러 차례 북벌을 시도했으나 양대안의 선방으로 실패했다. 그나마 낙양을 일시적으로 회복하는 등 공수가 바뀌었다는 측면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3.3. 빛나는 치세

앞서 언급한 대로 무제 소연은 촌수는 꽤 멀었지만[14] 멸망한 제나라 황족이었으므로, 국호[15]가 바뀌었으나, 황족의 성과 혈통은 그대로인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실제로 오행의 덕도 바뀌지 않았다. 시작은 피바람이 몰아치는 등 상서롭지 못했지만 그 피바람은 황족에게만 국한된 것이었으며, 백성들에게는 선정을 베풀었다. 게다가 무제의 치세는 48년이란 긴 세월이었다.[16] 그동안 내정을 정비하여 구품관인법을 개선하고, 불교를 장려하여 문화를 번영시켰다. 대외관계도 비교적 평온하여 약 50년간 태평성대를 유지하여 남조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또한 31살의 젊은 나이에 죽은 무제의 장남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蕭統)이 편찬한 '문선(文選)'은 후세에까지 전해지는 훌륭한 문헌이었다.

3.4. 빛 좋은 개살구

뱃놀이를 하다가 물에 빠진 후 생긴 병으로 죽은 소통의 요절은 그렇잖아도 암울한 양나라의 미래를 더욱 암울하게 만들었다. 훗날인 555년, 소통의 3남 소찰서위의 괴뢰 정권 후량의 황제가 되자, 소통은 고종(高宗) 소명황제(昭明皇帝)로 추존되지만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확실한 후계자가 없는 상황이라 후경의 대란이 발발하자 즉시 양나라에서는 분열이 발생하였고, 이는 결국 양나라를 멸망으로 가게 만들었다.

게다가 소연의 50년에 걸친 치세 후반에는 불교에 너무 심취하여 스스로 동태사(同太寺)에 여러 번 투신하는 무모한 행동, 한마디로 자기 자신을 절의 노예로 바치는 행동을 일삼았으며, 그럴 때마다 신하들은 막대한 돈을 들여 무제를 다시 사서 되찾아 왔기에 국고가 크게 궁핍해졌다. 퇴위 후 법황의 신분이라면 모를까 재임 중에 황제를 잃어버리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비슷한 예로는 백제 법왕이 있겠다. 하지만 소연이 괜히 정신착란을 일으켜서 불교에 심취한 것이 아니었다.[17] 당연히 단순히 종교에 미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소연은 종교와 속세 모두 지배하고자 한 황제였다. 재위 초반 소연은 강대한 불교세력에게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법사들에 꿇리지 않는 실력을 가진 불교인으로 거듭났고, 고승들이 죽자 자신이 불교계를 장악하고 주도하는 데 성공했다. 자기자신을 노예로 바치는 '사신'과 같은 행동, 사찰 건립은 이런 일환에서 시행된 것이다.

남조의 각 국가는 황제와 국가는 바뀌지만 귀족들은 그대로인 사실상의 귀족정에 가까운 체제로 돌아갔다. 이 때문에 황제의 권위와 능력, 그리고 자금력은 상당히 실추된 상황이었다. 이런 점을 개선하고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상업을 장려한 것은 좋았으나, 경제가 번영할수록 인플레이션은 심화되었고, 국가에서 동전을 만들 구리가 부족했기 때문에 로 만든 철전은 사람들에게 외면받아 거스름돈 목적에나 쓸 정도로 가치가 하락하였다. 덕분에 경제는 좋아졌지만 빈부격차가 미친듯이 늘어났으며, 수도 건강의 귀족들과 거상들은 신선 같은 복장을 하고 화장을 하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으나 옷도 안 입혀주면 못 입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는 반무능력자의 상태에 돌입하여 청담사상에 따른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고 있게 되었다. 따라서 치세 후반기에는 무제에게 더이상의 경제 대책은 없었으므로 그 자신도 자포자기하고 불교에 빠져버린 것이다.

3.5. 연이은 실정

무제 소연은 불교를 지나치게 신봉했고, 함부로 관직을 설치했다. 거기에 종친을 지나치게 감쌌으며 친분 관계에 따라 사람을 등용했다. 유송과 남제가 골육상잔으로 멸망해서인지 소연은 종친들의 잘못을 바로잡지 않았다. 그의 여섯째 동생 임천왕 소굉(蕭宏, 473-526)은 사치를 좋아하고, 백성의 재물을 수탈하여 집에는 창고 100여 칸이 있고, 엄청난 재물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소연은 오히려 살림이 엄청 괜찮다고 칭찬하며 밤늦도록 그와 술을 마셨다. 이에 소굉은 더욱 제멋대로 남의 재물을 빼앗았고 다른 종친들도 소굉을 본받았다. 대낮에 사람을 죽이고 밤에는 약탈했으며 어느 죄인은 종친의 집으로 도망가는 바람에 관리가 감히 들어가지 못해 잡지 못했다. 소연은 이걸 알면서도 방치했다.

소연은 원래 자식이 없어서 임천왕 소굉의 아들 소정덕을 양자로 키웠지만 태자 소통이 태어나자 소정덕을 자기 집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소정덕은 황제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보통 3년(522), 북위로 달아났다. 하지만 북위에서는 그의 어이없는 망명에 의아해하며 의심을 품어 야박하게 대했다. 결국 다시 양나라로 돌아왔지만 소연은 그를 다시 후작으로 봉했고 살인, 약탈, 강간 등 나쁜 짓을 일삼아도 감싸주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 쓰레기 소정덕은 후경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를 끌여들여 숙부 소연을 죽이고 자기가 황제가 되려고 했다. 그 외에도 소연은 날이 갈수록 충언을 듣지 않고 탁상공론을 중시했다. 후경이 난을 일으키자 당시 반란 진압 회의를 하던 문무백관 중에 을 탈 줄 아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몇몇은 말이 히히힝거리는 소리를 듣고 놀라서 호랑이에 비유할 정도였다. 한마디로 말해 그의 신하들이 아가리 파이터들이었다는 것이다.

중대통 5년(534), 부패로 시들어가던 북위가 내부 혼란으로 서위동위로 분열되었다. 소연이 이 틈을 타 국력을 증강시켜 북벌을 강행했다면 성공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앞서 말했듯이 국력이 겉으로는 강화되었지만 내실은 좋지 못했다. 덤으로 앞서 말했듯이 말을 타기는커녕 말보고 놀라는 작자들이 군대를 이끈다면 잘해봐야 침공군 전체가 반격당하는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3.6. 비참한 최후

태청 원년(547) 정월, 동위의 장수 후경이 동위의 권력자 고징과의 알력으로 하남을 점령하고 서위에 투항했다. 또 동시에 하남을 양나라에 바치고 투항하겠다는 서한을 건강에 보내왔다. 조정에서는 신중론이 일었지만 무제 소연은 후경의 속마음도 파악하지 않고 공짜로 엄청난 영토를 얻는다는 욕심과 총신 주이의 부추김에 후경을 받아들여 하남왕, 대장군에 봉했다.

그런데 이듬해(548) 정월, 후경이 동위군에게 패배하자 구원을 요청해왔다. 이에 소연은 후경을 도와주고 오히려 남예주목에 임명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후경은 자신이 가졌던 영토를 거의 잃어버렸고, 고작 수백 명의 병사만 이끌고 간신히 도망쳤으며, 소연이 보낸 구원군은 일격에 동위군에게 개발살나서 지휘관인 소연명이 사로잡히는 참사를 기록했다.

설상가상으로 동위의 고징은 양나라와 후경을 이간질하기 위해 2월에 다시 사이좋게 지내자며 서한을 보내왔는데, 후경은 고징의 음모를 간파하고 소연에게 이를 알렸으나 무시당했다. 사실상 이 시점에서 후경의 존재 가치는 양나라에서 평가절하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동위에서, 이전에 동위와의 싸움에 패배하여 사로잡혔던 소연의 조카 정양후 소연명과 후경을 바꾸자는 서한을 보내오자 소연은 동의하고 '정양후를 아침에 보내주면 후경을 저녁에 보내주겠소'라고 답변을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후경이 고징의 명으로 위조하여 보낸 가짜 편지였다. 소연이 자기를 버릴 것이라는 확신을 얻은 후경은 정예병을 이끌고 건강으로 진격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양나라가 후경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후경은 자기 땅 다 날려먹고, 돈도 물자도 별로 없어서 정예병이라고 해봤자 이름뿐이었으며, 그 숫자도 1천여 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양나라는 오랜 세월 태평세월이 지속되고 내부는 썩어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소정덕이 몰래 수십 척의 큰 배들을 보내 후경의 군대가 강을 건너는 것을 도와주었고 그를 건강으로 안내했다. 11월, 후경은 승상이 되고 소정덕은 허수아비 황제가 되어 자신의 한을 풀었다. 태청 3년(549), 소정덕은 후경에 의해 폐위되고 살해당해서 자신이 저지른 대가를 그대로 돌려받았지만...

일단 앞서 언급한 양나라의 문제점 덕분에 수도인 건강성 남문을 지키는 총책임자가 갑옷을 입고 얼굴 방어용 철면을 장착한 기병 단 1기에 놀라서 성문을 버리고 도망치는 막장 상황이 발생했고, 적은 병력에도 불구하고 후경은 건강성을 완전히 장악하고 군대를 보내 건강성 안에 있는 궁성을 포위하고 물자와 수로를 차단했다.

궁성 안은 시체들이 즐비했고, 숨이 곧 끊길 사람들도 태반이었다. 이 상황에도 대도독 유중례(柳仲禮)는 기생과 첩을 끼고서 술판을 벌였으며 휘하 장수들이 후경을 토벌하려해도 오히려 막았다. 이는 무제의 6째 아들 소윤(蕭綸)과 같이 짜고 한 짓이었기에 가능했는데 양무제를 죽이고서 황제에 오르려던 소윤이 부귀영화를 약속했기에 벌인 짓이었다. 그러나 제위에 오르지 못한 소윤은 후경에 저항했고, 2년 가까이 맞섰지만, 이 와중에도 황제 자리를 차지하려고 형제인 소각이나 여러 형제들이랑 내전이나 벌였다. 이러니 다같이 힘을 합쳐 싸워도 될까 말까인데 스스로 자멸한 셈이라, 결국 패해 551년 잡혀서 끔살당했다. 그리고 유중례는 항복하여 목숨을 구제받았으나 모든 권력을 잃고 재산이나 챙기며 달아나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양나라 내부의 빈부격차의 확대로 인해 많은 빈민들이 있었는데, 후경이 약탈을 허용하자 빈민들이 반란군에 입대하면서 후경의 세력은 날로 증가해 정예병만 10만이 넘게 되었다. 거기에 소연의 다른 아들들은 대부분 힘이 약하거나, 그렇지 않아도 오히려 아버지를 도와주지 않았는데, 이유는 아버지가 죽으면 그들 자신이 황제가 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마침내 후경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자 소연은 정거전에 유폐되었고, 음식도 후경에 의해 통제되었다. 최후에는 꿀물을 달라고 요구했다가 거절당하고, 울분이 터져 후경을 '괘씸한 놈'이라고 두 번 목멘 소리로 욕을 하고 죽었다.

그의 뒤는 셋째 아들 소강이 뒤를 이었는데 그가 간문제다. 5월, 86세의 나이로 정거전에서 양무제 소연은 굶어 죽었고, 후경이 평정된 후 11월, 수릉(修陵)에 안장되었다. 그가 죽고 나서 양나라는 고작 8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참고로 양무제 소연의 황후 무덕황후(武德皇后) 치씨(郗氏)[18]는 유송 문제 유의륭[19]의 외손녀였다. 치씨는 소연이 죽기 무려 50년 전에 죽었으며 31살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당시에는 소연이 제나라의 실권자로서 양공(梁公)이었기에 양공비(梁公妃)로 사망했다. 훗날 소연이 즉위하자 치씨를 무덕황후로 추증했다. 치씨는 소연과의 사이에서 장녀 영흥공주(永興公主)[20], 영세공주(永世公主)[21], 영강공주(永康公主)[22]을 뒀는데 그 중 장녀 영흥 공주는 천하의 개쌍년이었다. 남편 은균이 있었으나, 숙부였던 임천왕 소굉과 간통했고, 소굉과 통모해 아버지를 죽이고 소굉이 황제가 되면 자기는 황후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진작에 발각되어 영흥 공주는 숙부와 사통하고, 그를 꼬셨다는 이유로 주살되었다. 그러나 양무제가 사랑하는 소굉은 죄를 받지 않았는데, 상술했듯이 소굉의 악행을 보면 친족에 대해 너무나 관대한 소연이 왜 패망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고려 성종대의 문신 최승로는 그 유명한 시무 28조에서 지나친 불교 숭상을 삼갈 것을 주장하며 소연의 예를 들었다.

3.7. 황제 거사의 업적

동북아시아 불교승려들이 고기를 못 먹게 한 주범이자 콩고기 탄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 이전에는 동북아시아 불교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고기를 먹었고, 초기 불교는 물론이고[23], 남방 불교에서는 어지간한 육식은 허용했다.

그런데 양무제는 502년 제위에 오를 때부터 개인적으로 채식을 해왔는데, 517년에는 종묘제사에조차 고기와 술을 쓰지 않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 술과 육식을 금하는 포고령 <단주육문(斷酒肉文)>을 공포하면서 본격적으로 금육이 시작되었다. # 황제를 포함하여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가 위아래로 모두 독실한 불교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작정한 것. <단주육문>을 공포한 정확한 시기는 모르지만, 대체로 517년(또는 518년, 519년)으로부터 523년 사이로 본다.

승려들은 율장에 불식육(고기를 먹지 않음) 조항이 없음을 들어 황제의 뜻에 반대하였으나, 양무제는 열반경과 능가경 등 대승경전에 불식육을 강력하게 요구한 구절이 있음을 근거로 이를 관철시켰다. 황제의 뜻에 거스르지 않으려고 채소류만으로 만들면서 고기와 비슷한 맛이 나는 정진요리를 개발했고, 이 과정에서 콩고기를 발명했다. 이러면서 중국 불교에서는 승려는 불식육한다는 규정이 다른 동아시아권으로 전래되는 과정에서도 죽 유지되었고, 결국 동북아시아 불교에서 육식은 사라졌다.[24]


[1] 본래 남조 진(陳)나라의 이부상서(吏部尙書) 요찰(姚察)이 썼으나 도중에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본문 중 27권의 <열전>(列傳)에는 요찰의 평이 붙어있으며 《신당서》(新唐書)에는 요찰의 《양서》(梁書)가 모두 34권이라 했으므로 정황상 <본기>(本紀) 6권과 <황후기>(皇后紀)나 <후경전>(侯景傳)으로 추정된다.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라는 직책은 당태종 정관(貞觀) 3년에 황제의 조서를 받아 완성하지 못한 《양서》를 편찬할 때 역임하고 있었던 관직이었다.[2]남사》(南史)에서는 한(漢) 상국(相國) 소하(何)의 후예이다.라는 문장이 빠져 있으며, 《남제서》(南齊書)에 따르면 남제의 고제 소도성(蕭道成)이 소하의 24세손(二十四世孫)이므로 족보상으로 소도성의 조카뻘이 되는 양무제 소연은 소하의 25세손이었다. 다만 한나라 당시에도 소하의 후손이 단절되어 황제의 명을 받아 겨우 소하의 자손을 찾아내 후(侯)로 봉했다는 말이 있을만큼 여러 변란을 겪으면서 단절될 뻔한 소하의 후손이 600년을 넘어서도 존재했을 가능성은 낮다.[3] 차정후 소연은 소하의 아들로 '차정후'(酇定侯)라는 호칭은 《한서》 <소하전>에서는 언급되지 않고, 오직 후대의《양서》에서만 언급되는 작위이다. 어디에도 소연이 무슨 관직을 지냈는지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의 행적이나 능력은 알 수 없다.[4] 《신당서》<재상세계표>에 따르면 소표는 소하의 차남 소칙(蕭則)의 아들로 자(字)는 백문(伯文)이었으며, 한나라에서 간의대부(諫議大夫) 겸 시중(侍中)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의 아들 소장(蕭章)이 공부연(公府緣)을 지낸 것은 기록되어 있으나 《양서》에는 소앙(蕭仰)이 소장의 손자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신당서》에는 소앙이 소장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5] 양무제 소연의 선조 중에 아들과 함께 직위가 기록되지 않은 인물이다. 《양서》에서는 오직 장(章)은 호(皓)를 낳았다.(章生皓)라고만 기록되어 있으며, 《남제서》에도 이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신당서》에서는 아들 소앙이 소장의 아들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본래 소앙의 아버지인 소호는 반대로 소앙의 아들로 기록되었다.[6] 물론 《남제서》와 《양서》에 기록된 양무제 소연의 가계도 대부분이 계보 조작이라 여겨지기 때문에 크게 의미는 없다.[7] 《한서》권78 <열전> 제48:育字次君,少以父任爲太子庶子。元帝卽位,爲郞,病免,後爲御史。大將軍王鳳以育名父子,著材能,除爲功曹,遷謁者,使匈奴副校尉。後爲茂陵令,會課,育第六。而漆令郭舜殿,見責問,育爲之請,扶風怒曰:「君課第六,裁自脫,何暇欲爲左右言?」及罷出,傳召茂陵令詣後曹,當以職事對。育徑出曹,書佐隨牽育,育案佩刀曰:「蕭育杜陵男子,何詣曹也!」遂趨出,欲去官。明旦,詔召入,拜爲司隷校尉。育過扶風府門,官屬椽史數百人拜謁車下。後坐失大將軍指免官。復爲中郞將使匈奴。歷冀州、靑州兩郡刺史,長水校尉,泰山太守,入守大鴻臚。以鄠名賊梁子政阻山爲害,久不伏辜,育爲右扶風數月,盡誅子政等。坐與定陵侯淳于長厚善免官。哀帝時,南郡江中多盜賊,拜育爲南郡太守。上以育耆舊名臣,乃以三公使車載育入殿中受策,曰:「南郡盜賊群輩爲害,朕甚憂之。以太守威信素著,故委南郡太守,之官,其於爲民除害,安元元而已,亡拘於小文。」加賜黃金二十斤。育至南郡,盜賊靜。病去官,起家復爲光祿大夫執金吾,以壽終於官。育爲人嚴猛尙威,居官數免,稀遷。少與陳咸、朱博爲友,著聞當世。往者有王陽、貢公,故長安語曰「蕭、朱結綬,王、貢彈冠」,言其相薦達也。始育與陳咸俱以公卿子顯名,咸最先進,年十八爲左曹,二十餘御史中丞。時朱博尙爲杜陵亭長,爲咸、育所攀援,入王氏。後遂竝歷刺史郡守相,及爲九卿,而博先至將軍上卿,歷位多於咸、育,遂至丞相。育與博後有隙,不能終,故世以交爲難.[8] 당나라 무양현후(武陽縣侯) 태상경(太常卿) 소덕언(蕭德言)과 중서령(中書令) 소지충(蕭至忠)은 모두 소포에서 나왔으며, 소인(蕭引)소윤(蕭允)도 이 가계에서 나왔다.[9] 훗날 '장사선무왕'(長沙宣武王)으로 추존되었다.[10] 당시 화제는 수도 건강이 아닌 강릉(江陵)에 있었다. 이후에도 화제는 재위를 하는 동안 단 한번도 건강으로 당도한 적이 없으며 이는 선양을 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석천문은 본래 고아가 되어 가난했으나 경서와 사기(書史)를 익혔고 후에 옹주자사(雍州刺史) 소적부(蕭赤斧)의 중병참군(中兵參軍)이 되었는데 이 때 소영주(蕭穎胄)와 친분을 맺었으며 소연이 소보권과 싸울 때 소영주와 뜻을 함께해 결국 소연에게 투항했다. 석천문은 일찍이 소영주가 참혹하게 죽고 주가 어지러울 때 화제는 유약하여 이것을 억누를 수 없다 보았고 제나라에 대한 충성보다는 대사마 소연과 뜻을 함께했다. 이때 석천문은 사실상 화제를 옆에서 보필하는 역할을 하는 인물이었다.[11] 원문에서는 ‘칭제(稱制)’라 했는데 이것은 수렴청정(垂簾聽政)라고도 한다. 소연은 화제를 황제로 세웠으므로 어린 화제를 대신해 황제의 업무를 대신했는데 2월 1일 부로 이것이 태후에게 넘겨진 것이다. 태후의 정식 시호는 ‘문안왕황후(文安王皇后)’로 ‘선덕태후’라는 명칭은 소란이 즉위하자 태후가 거주하는 곳을 선덕궁(宣德宮)이라 칭했다.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선덕태후라 부른 것이다. 선덕태후는 문혜태자(文惠太子) 소장무의 아내로 소소업의 모친이다. 허나 총애를 받지 못했고 한번은 소장무가 다른 궁인에게 새롭고 아름다운 옷과 비녀를 선물했음에도 선덕태후는 여전히 낡은 비녀 10여종을 사용했다. 사실상 선덕태후도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소연이 선덕태후에게 수렴청정을 맡긴 것은 동혼후를 살해하고 화제를 황제로 올렸으나 소연과 화제는 11촌이었고 소연은 방계 황족이었기 때문에 명목상 황태후였던 태후에게 수렴청정을 맡긴 것이다. 한마디로 선덕태후는 소연이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는데에 명분을 주는 도구에 불과했다는 것이다.[12] 남연주는 수도 건강과 가까이 있는데 이는 만약 남연주를 감독하는 이가 반란을 일으킬 시 수도가 탈환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남연주의 처소는 건강까지 거리가 걸어가도 하루가 안걸릴 정도로 가깝기 때문에 여기서 반란이 일어나면 수도가 함락되는 것은 물론이고 황제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었다. 물론 당시 황제인 화제는 강릉에 있었지만 사실상 소연이 황제를 대행하고 있었고 명목상으로 수도는 건강이었다.[13] 양무제가 장군 왕무선을 통해 만족을 회유하려다가 선무제가 파견한 양대안의 카운터를 맞은 것. 숙예를 내주는 등 양나라 군사는 회북 5개 성을 내주며 패퇴했다가 위예에 의해 합비를 수몰시켜 되찾고, 다시 무제가 파견한 동생 임천왕 소굉 역시 두려움에 스스로 기세를 꺾어 북벌에 실패하고 패퇴하면서 일진일퇴하고 있었다.[14] 무려 소보융이랑 11촌이다. 다만 친족들이 모여살던 고대엔 이 정도면 완전히 멀다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수준이다.[15] 이 이전에도 같은 나라를 잇는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사실상 다른 나라들인 경우는 잡다했다. 가장 유명한 게 서한-동한-촉한. 같은 집안이고 같은 한나라를 잇는다는 명분은 있었으나 세 제국의 황통은 남제-남량이랑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멀었다.[16] 그 사이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분열하였으며, 얼마 못가 북제북주로 황실이 바뀌게 된다.[17] 사실 이것은 불교와 함께 들어온 인도 풍습이다. 인도는 종교적인 국가여서 종교가 정치보다 위에 있는 시스템이다. 이런 문화 속에 종교인(수행자)에게 재물 등을 바치는 공양을 하게 되는데 형식적으로 나라를 바치고 다시 재물로 사오는, 즉 형식이 나라를 바치고 실제로는 그것을 이유로 큰 재물을 바치는 것이다. 이런 예로는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대왕이 있다.[18] 이름은 치휘(郗徽). 어릴 적부터 유능했고 쓰레기 폭군인 창오걸왕의 청혼을 받았지만 거절하고 소연과 결혼했다. 창오걸왕이 극한의 사디스트라는 점을 감안하면 지혜로운 선택.[19] 치씨의 아버지는 치휘, 어머니는 유의륭의 딸 심양공주 유씨였다.[20] 이름은 소옥요(蕭玉姚).[21] 이름은 소옥완(蕭玉婉).[22] 이름은 소옥현(蕭玉嬛).[23] 당연하지만 불교에서 금하는 건 살생이지 육식이 아니다. 보시받은 음식이 채소든 고기든 맛있게 먹고 보시한 사람의 복을 빌어주는 게 탁발의 기본이다. 엄밀히 말하면 좋다 싫다는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 것을 수행으로 삼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인도와 다르게 탁발에 거부감이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인도에서는 불교 출현 이전부터 안거수행하는 브라만들이 일반인들에게 탁발하는 일을 음식을 받는 사람이나 주는 사람 모두에게 복이 따르는 신성한 일로 여겼지만, 중국에서 탁발은 그냥 거지의 구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또 군주의 후원으로 인해 사찰에 토지와 노비가 기증되면서 탁발을 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승려가 고기를 먹는 것은 직접 살생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종교를 강제하는 것은 정치 권력이 결합된 현상으로 순수한 종교가 아니라며 이런 조치를 비판하기도 한다. 물론 당시엔 종교가 살아남으려면 권력에 기댈 수밖에 없었음을 감안해야 한다.[24] 일본승려들은 대처승에다 먹을 거 다 먹었다지만, 이들도 이것을 '당연시'하지는 않았다. 사실 이것도 지금처럼 매우 당연시된 것은, 메이지 유신 시기 신토를 부흥시키고, 불교를 억제하던 정책 하에서 나온 부산물이니 논외다. 거기다 이것도 원래 개방적/민간친화적 성향이 강한 종파인 진언종이나 일련종 쪽 이야기이다. 일본 불교에서도 선종 계열은 얼마 전까지 승려의 결혼이나 육식에 상당히 엄격했다가 최근에 와서 풀려가고 있다. 실제로 오다 노부나가가 자신에게 적대적인 엔랴쿠지 승단 같은 불교 세력들을 공격했을 때, 내세운 명분은 '그들은 새와 들짐승 같은 온갖 더러운 고기들을 먹어서 불교의 계율을 어기는 타락한 승려들이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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