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04-27 09:45:35

진경지의 북벌

대통북벌에서 넘어옴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천군만마(千軍萬馬)3.2. 원호의 오만3.3. 북벌의 실패
4. 북벌의 결과

[clearfix]

1. 개요

大通北伐

중국 남북조시대 양나라 직각장군(直閣將軍) 진경지(陳慶之)가 주도한 북벌. 사건의 발단이 되었을 때가 대통(大通) 연간이었기 때문에 대통북벌(大通北伐)이라 부른다.

2. 배경

본래 북벌의 움직임은 진경지가 북벌을 실행하기 이전에도 있었다. 본래 이릉후(夷陵侯) 배수(裴邃)를 중심으로 북벌이 진행되고 있었으나 도중 배수의 죽음 등으로 도중 북벌은 중단되었다.

건의(建義) 원년에 효장제(孝莊帝) 원자유(元子攸)가 즉위했는데 당시 북위의 상황은 육진의 난으로 인하여 크게 망가진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거기장군(車騎將軍) 이주영(爾朱榮)이 조정을 장악하여 영황후(靈皇后)와 그 일파를 제거하고 원자유를 황제로 옹립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북해왕(北海王) 원호(元顥)는 하음(河陰)의 변을 피하기 위해 양으로 망명했다.

이주영은 당시 하북의 갈영(葛榮)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갈영은 한루(韓樓)와 학장(郝長)을 수하로 두어 100만의 군사를 거느릴 정도로 북위에서 제일가는 군웅이었다. 이주영은 하발승(賀拔勝)과 후연(侯淵)을 중심으로 갈영을 토벌했으나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북위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고 덕분에 소연(蕭衍)은 이주영이 장악한 북위를 토벌할 명분과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소연은 원호를 위왕(魏王)으로 세워 이주영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진경지에게 북위를 토벌하게 하도록 명령하였고 이에 명을 받들어 진경지는 형성(滎城)으로 진격하게 된다.

3. 전개

3.1. 천군만마(千軍萬馬)

진경지는 형성으로 진격한지 얼마안되어 함락시키고 휴양(睢陽)에 주둔하였는데 이에 구대천(丘大千)은 7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9개성을 쌓아 진경지에 대적했다. 진경지는 이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구대천을 공격하여 3개의 보루를 함락시키고 구대천의 투항을 받아냈다. 구대천이 무너지자 정동장군(征東將軍) 제음왕(濟陰王) 원휘업(元暉業)이 우림서자군(羽林庶子軍) 2만 명을 이끌고 양(梁)과 송(宋)을 구원하기 위해 고성(考城)에서 주둔했다. 이에 진경지는 보루를 쌓아 원휘업을 격파해 그를 사로잡았다. 좌복야(左僕射) 양욱(楊昱), 서아왕(西阿王) 원경(元慶), 무군장군(撫軍將軍) 원현공(元顯恭)은 어장우림종자서자(御仗羽林宗子庶子) 7만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올라오는 진경지를 막아섰다.

북위의 장군 원천목(元天穆)의 대군이 얼마 있지 않아 도착하였고, 표기장군(驃騎將軍) 이주조(爾朱兆)가 거느리는 호기(胡騎) 5천, 기마장수(騎將) 노안(魯安)이 거느린 하주(夏州)의 보병, 기마 9천이 선봉으로 파견되어 양욱을 구원하러 왔다. 또 우복사(右僕射) 이주세륭(爾朱世隆)도 파견되어, 서형주자사(西荊州刺史) 왕비(王羆)의 기병 1만이 호뢰관(虎牢關)에 주둔했다. 이들의 군사는 정예병사이고 성또한 견고하여 쉽게 뚫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진경지는 여기서 무너지지 않았다. 전병력을 성을 공격하는 데 투입하여 동양(東陽)의 송경휴(宋景休), 의흥(義興)의 어천민(魚天愍)이란 장사가 성벽을 먼저 올라 뛰어넘어 성안으로 쳐들어가자 기어코 형양성을 함락시키고 양욱을 사로잡았다. 곧이어 원천목이 이끄는 북위의 대군이 성을 포위했으나 진경지는 기병 3천을 이끌고 성을 베개삼아 맞아싸워 이들을 크게 격파했다.

3.2. 원호의 오만

진경지가 파죽지세로 치고 올라오자 효장제는 수도를 버리고 도망쳤고 원호는 황제로 즉위하여 개원(改元)하고 대사면을 시행하였다. 원호는 진경지를 시중(侍中),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에 임명하고 1만 호의 식읍을 증봉하였다. 후에 진경지는 치현에서 출발하여 낙양에 이르기까지 140일 동안 32개 성을 함락시키고 47번의 전투에서 모두 이겨 그를 막을 적이 없었다고 한다. 원호는 매일 궁녀와 시간을 보내고 정무를 게을리 했는데 그 때문에 낙양의 백성들은 원호의 행동에 크게 실망하였다.

3.3. 북벌의 실패

이에 북위의 천주장군(天柱將軍) 이주영, 우복야 이주세륭, 대도독 원천목, 표기장군 이주조, 장사(長史) 고환(高歡), 선비(鮮卑), 말갈 등 100만을 호칭하는 대군세가 효장제를 옹립하고 원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원호는 낙양에 거주한 지 65일만에 그동안 얻었던 성의 대부분이 순식간에 그의 곁에서 떨어져 나갔다. 진경지는 강을 건너 북중랑성(北中郞城)을 지키며 3일 동안 11번의 전투를 벌이면서 적의 병력을 격파했다. 그 때문에 이주영은 후퇴했다. 하지만 후에 이주영은 나무를 묶어 다리를 만들어 협석(硤石)을 통해 강을 건너서 하교(河橋)에서 원호와 싸웠다. 원호는 대패하여 패주하다가 임영(臨潁)에 이르러 적을 맞나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 때문에 낙양은 함락되었다. 진경지는 양나라로 퇴각했고 이에 낙양까지 점거했던 대통북벌은 막을 내렸다.

4. 북벌의 결과

수도 건강(建康)에 귀환하여 북벌의 공을 인정받아 우위장군(右衛將軍)에 임명되었고, 영흥현후(永興縣侯)에 봉해지고, 식읍 1500호를 하사받았다.

비록 패배하였지만 이 전투는 진경지의 군사적 능력을 보여주는 전투로 사실상 진경지의 업적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후 양나라는 크게 쇠락하고 진패선이 권력을 잡으면서 멸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