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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02 18:16:52

노심(후조)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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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盧諶
(285 ~ 351)

서진후조의 인물. 자는 자량(子諒). 유주(幽州) 범양군(范陽郡) 탁현(涿縣) 출신. 후한의 학자 노식의 고손자. 조위의 사공 노육의 증손자. 서진의 태위경 노정(盧珽)의 손자. 한(漢)의 동궁태사 노지의 장남.

2. 생애

총명하고 마음이 맑아 일찍이 명성을 떨쳤고, 사리에 밝고 글재주가 있었으며, 노자장자의 사상을 좋아하였다. 후한 시기부터 명망높은 가문의 위세 덕에 무제 사마염의 딸인 영양공주(滎陽公主)와 혼인하여 부마도위가 되었으나, 혼례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영양공주는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유주(幽州)에서 수재(秀才)로 천거되어 태위연(太尉掾)에 제수받았다.

영가 5년(311년) 6월, 영가의 난으로 인해 서진의 수도인 낙양이 함락당하자, 노심은 아버지 노지를 따라 양읍(陽邑)으로 이동해 진양(晉陽)의 병주자사 유곤에게 의탁하였다.

영가 6년(312년) 8월, 한(漢)의 하내왕 유찬, 하간왕 유이, 중산왕 유요 등이 진양을 쳐들어왔다. 유곤은 상산(常山)에서 군사를 징집해 맞서려 하였으나, 그 전에 태원(太原)태수 고교(高喬) 등이 진양을 들어 한군에게 투항하였다. 진양에 있던 노심도 아버지 노지와 함께 포로로 사로잡혀 항복하고 유찬의 참군으로 배속되어 진양에 머물렀다. 유곤은 상산의 병사들을 이끌고 급히 진양 탈환을 시도하였지만, 금세 격파당하고 다시 상산으로 도망쳐 대왕(代王) 탁발의로와 연합하였다.

영가 6년(312년) 11월, 유곤의 패잔병과 탁발부 연합군이 분수(汾水)와 남곡(藍谷)에서 한군을 대패하고 진양 탈환에 성공하였다. 유곤은 군문 앞에서 탁발의로에게 절을 올려 감사를 표한 뒤, 탁발의로가 돌아가자 양곡(陽曲)으로 거처를 옮기고 다시 군사를 모았다. 이때 노심이 유찬으로부터 도망쳐 유곤에게 귀순하니, 소무제 유총은 그 소식을 듣고 평양(平陽)에서 아버지 노지를 비롯한 그 일족을 멸하였다.

건흥 3년(315년) 2월, 사공에 임명된 유곤이 노심을 주부(主薄)로 삼았다가 종사중랑으로 옮겼다. 유곤의 처는 노심의 이모였기에, 유곤은 노심을 매우 아끼는 동시에 그 재능과 명성을 중히 여겼다.

건흥 4년(316년) 12월, 유곤의 장사 이홍(李弘)이 반란을 일으켜 한나라에 투항하였다. 이로 인해 한의 정동대장군 석륵이 공격해오자, 유곤은 대패하여 단부단필제에게 도주하였다. 노심 또한 유곤을 따라서 단부로 도망쳐 별가에 임명되었다.

대흥 원년(318년) 5월, 단필제가 유곤을 의심하여 이내 살해하니, 노심과 최열(崔悅) 등은 남은 유곤의 군사를 이끌고 단필제와 대립하던 요서(遼西)의 단말배에게 귀순하였다. 이때 유곤의 아들 유군(劉群)도 단말배에게 도망쳤고, 노심 등 유곤의 잔당은 죽은 유곤을 대신해 유군을 섬겼다. 또, 노심은 동진에 사자를 보내 유곤의 죽음에 대한 억울함을 상표하고, 그 명예를 회복시켜 줄 것을 청하였는데, 그런 후 몇 년이 지나서야 원제 사마예가 유곤의 명예를 회복시켜 태위, 시중으로 추증해주고, '민공(愍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동진 조정은 여러 차례 요서로 사자를 파견해 노심을 초빙하고 산기시랑, 중서시랑에 임명하였으나, 단말배가 번번이 가로막아 강남으로 가지는 못하였다.

태녕 3년(325년) 12월, 요서공 단말배가 죽고 그 동생 단아(段牙)가 뒤를 이었는데, 단아가 모용부와 화친하여 도읍인 영지(令支)를 떠나는 결정을 내리자 부족원들의 불만이 극에 달하였다. 이에 단질육권의 손자인 단요(段遼)가 부족원들을 이끌고 정변을 일으켜 단아를 죽였다. 이후 스스로 단부의 수령 자리에 오른 단요는 유군을 좌장사로 삼고, 노심을 우장사로 삼아 보좌케 하였다.

함강 4년(338년) 3월, 후조전연이 연합하여 전연의 연왕(燕王) 모용황의 군대가 단요의 동생 단난(段蘭)을 전사시킨 후 영지 이북의 여러 성채를 휩쓸었고, 후조의 천왕 석호의 군대가 금대(金臺)에 주둔하였다. 이에 단부의 어양(漁陽), 상곡(上谷), 대군(代郡)의 태수와 재상들이 일제히 항복하여 성 40여 개가 후조에 넘어가니, 단요는 감히 싸울 생각도 못하고 밀운산(密雲山)으로 달아났다. 결국, 유군, 노심, 최열 등도 성의 창고를 봉인하고 후조에 투항하였다.

건무 4년(338년) 5월, 천왕 석호를 따라 후조의 수도인 업(鄴)으로 이주하여 중서시랑에 임명되었고, 이후 후조 조정에서 중용받아 국자좨주, 산기상시, 시중을 역임하였다.

건무 6년(340년) 10월, 중알자 신편(申扁)이 천왕 석호와 태자 석선(石宣)의 총애를 받아 조정의 기밀을 감독하게 되었다. 석호는 이미 여색에 빠져 정무를 아예 돌보지 않았고 석선도 항상 사냥을 즐기느라 바빴기에, 신편은 인사권과 형벌권을 전부 쥐고 관리들을 좌지우지 하였다. 다만, 노심, 왕모, 정계(鄭系), 최약(崔約) 등 관직이 9경에 이르는 자는 신편도 감히 어찌하지 못하였다. 이렇듯 노심은 후조 조정에서 요직을 맡고 있었음에도 항상 갈족 휘하에 머무는 것을 치욕이라 생각해 아들들에게
"내가 죽은 뒤에도 나를 진(晉)의 사공 종사중랑이라고만 칭하라."
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태녕 원년(349년) 11월, 11월, 의양왕 석감이 즉위하고 노심을 중서감으로 삼았다.

청룡 원년(350년) 정월, 대장군 염민이 난을 일으켜 후조의 황제 석감과 황족들을 몰살하고 염위를 건국하였다.

영흥 원년(350년) 11월, 염민이 100,000 대군을 일으켜 양국(襄國)에서 새로 후조의 황제로 즉위한 석지를 치자, 노심도 이에 종군하였다.

영흥 2년(351년) 3월, 염위의 대군이 양국에서 대패하여 궤멸당하고 염민은 기병 10여 명과 함께 겨우 업으로 도망쳤다. 이 전투에서 수많은 염위의 장수와 신하들이 목숨을 잃었고, 노심 역시 난전 중에 전사하였다. 향년 6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