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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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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2. 중세
2.1. 기나긴 내전2.2. 혼란의 재개2.3. 노르웨이-스웨덴 동군연합2.4. 덴마크-노르웨이 탄생2.5. 스웨덴의 SOS와 칼마르 동맹 탄생2.6. 칼마르 동맹
3. 근세4. 근대5.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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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노르웨이 해안지대는 기원전 12000년경 빙하에 뒤덮여 있었다. 기원전 9300년경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서 기원 미상의 수렵채집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지역은 아직 혹한지였고, 본격적인 신석기 문화도 노르웨이 남부를 기점으로 기원전 4000년 경에나 시작되었다. 노르웨이 학계는 기원전 2900년부터 2500년경 사이의 기간 동안 인도유럽어족 사용자들이 정착하면서 귀리, 보리 등의 농경 및 돼지, 소, 양, 염소 같은 가축들이 유입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기원전 1800년경부터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유틀란트를 중심으로 모피 교역이 시작되었다고 추정된다. 기원전 1000년 경에는 우랄어족에 해당하는 이주민들이 빙하기 시절부터 노르웨이 북부에 잔류하며 인도유럽어족에게 밀려난 수렵채집민들을 흡수, 동화시키며 오늘날의 사미족의 기원이 되었다. 기원전 500년경부터는 켈트족의 철기 문화가 노르웨이에 전파되었으며 날씨가 추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철제 농기구의 보급에 더불어 수확량이 오히려 더 증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기 1세기 무렵에는 노르웨이에서 룬 문자 사용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다른 게르만족의 중계 무역을 통해서 모피를 팔고 로마산 사치품들을 수입하기 시작한 흔적이 보인다.

2.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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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계 민족인 노르드인이 세운 국가로서 노르웨이(Norway)라는 국명도 고대 노르드어로 '북쪽의 길'(Norðvegr)을 의미한다. 872년에 하랄 1세 하르파그리에 의해 통일 국가인 노르드 왕국이 건설되었다.[1] 그러나 하랄 1세의 즉위 이후 그의 통치, 특히 토지세 징수를 거부하는 일파가 스코틀랜드 인근의 오크니 제도, 셰틀랜드 제도, 헤브라디스 제도, 페로 제도 등지로 떠났고, 처음으로 발견된 아이슬란드도 이 시기에 본격적인 정착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하랄 1세는 노르웨이 전역을 지배한 최초의 왕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질적인 지배력은 노르웨이의 서부 해안 일대에만 머물렀고 나머지 지역에 대해서는 명목상 권위만 인정받고 간접적으로 지배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랄 1세는 말년에 아들들 사이의 분쟁에 시달려야 하는 데 에이리크 1세 블로됙스는 다른 형제 2명을 살해하였고 948년 하랄 1세가 승하하자 노르웨이의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지나친 강권 정치 때문에 '피의 도끼'(Blodøks)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기 때문에 노르웨이 귀족들의 반발이 심해졌고, 결국 반대 귀족세력들이 에이리크 1세를 몰아낸 후 그의 막내 동생으로 잉글랜드에 머물고 있었던 호콘 1세를 귀국시켜 왕으로 옹립했다. 이에 에이리크 1세는 노르웨이에서 추방되었고 948년 바이킹의 일파인 데인족이 장악한 잉글랜드의 노섬브리아에서 왕위에 올랐으나 잉글랜드 왕 에드래드의 공격을 받아 도망쳐야 했다. 952년 다시 노섬브리아의 데인족의 요청에 따라 다시 왕위에 올랐지만 954년 잉글랜드의 에드래드에게 다시 축출당한 후 스테인모어에서 살해당하고 만다. 이후 노섬브리아는 노르웨이 계열의 지배가 종식되고 잉글랜드의 앵글로색슨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에이리크 1세 블로됙스를 축출하고 노르웨이의 왕이 된 호콘 1세는 잉글랜드에서 자란 영향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상태였고 이후 노르웨이에 잉글랜드선교사들을 초청하여 그리스도교 전파를 후원했지만 다른 노르웨이 귀족들의 반발로 실패했다. 그러나 노르웨이 귀족들이 보유하고 있었던 함대를 모두 회수하여 국왕 직할로 만드는 데 성공했고, 지방 행정제도를 개편하여 노르웨이가 본격적인 통합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하도록 하는데 기여했다. 이 때문에 호콘 1세는 '선량왕-(den gode)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노르웨이 역사상 뛰어난 군주 중 한 명으로 칭송받는다. 하지만 덴마크에 피신해 있었던 에이리크 1세 블로됙스의 아들인 하랄 2세가 덴마크 왕 하랄 1세 블로탄의 지원을 받아 [2] 그의 형제들과 함께 노르웨이를 침공하자 961년 노르웨이의 남서쪽에 있는 피티아르 섬에서 싸우다가 전사했다.(피티아르 섬 전투)

이후 하랄 1세 블로탄은 에이리크 1세의 아들 중 장남인 하랄 에리크손을 노르웨이 왕 하랄 2세로 즉위시키고 노르웨이를 덴마크의 속국으로 삼았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왕이 된 하랄 2세의 실질적인 통치력은 노르웨이의 서부 지역 일대에만 머물러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하랄 2세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오슬로의 지방 영주인 트뤼그비 울라프손과 구드라드 비아른손, 그리고 라데 백작(Jarl of Lade)인 시구르드 호콘손을 살해하고 전통 신앙 숭배도 금지시켰다. 이에 따라 노르웨이에서 하랄 2세에 대한 반감이 퍼져 나갔고, 덴마크 왕 하랄 1세 블로탄 역시 하랄 2세가 덴마크의 종주권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아닌 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때 하랄 2세에게 살해당한 시구르드 호콘손의 아들인 새로운 라데 백작 호콘 시구르드손이 970년 하랄 1세 블로탄의 묵인을 얻어 하랄 2세를 암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노르웨이에서는 덴마크의 지원을 받은 라데 백작 호콘과 하랄 2세의 형제들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으나 덴마크의 하랄 1세 블로탄의 지원을 받은 라데 백작 호콘이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그리고 하랄 1세 블로탄은 노르웨이의 남동부를 덴마크의 영토로 합병하여 직접 통치했으나 노르웨이 서부 지역은 라데 백작 호콘을 봉신으로 임명하여 간접적으로 통치했다. 이렇게 하여 하랄 1세 블로탄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아우르는 제국을 건설했다. [3]

그런데, 노르웨이의 왕위까지 차지한 하랄 1세 블로탄은 이제 신성 로마 제국의 종주권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973년 신성 로마 황제 오토 1세가 붕어한 후, 그의 아들인 오토 2세가 즉위하자 이듬해인 974년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비록 하랄 1세 블로탄은 노르웨이의 호콘의 지원까지 받아 호기롭게 독일 국경 너머로 침공했지만 다네비르케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하랄 1세 블로탄은 유틀란트 반도를 상실한 채 덴마크령 노르웨이로 도망쳐야 했고, 노르웨이 서부 지역에 대한 통제권도 상실하여 라데 백작 호콘이 실질적인 노르웨이의 군주가 되었다. 비록 하랄 1세 블로탄은 983년 훗날 메클렌부르크를 지배하게 되는 북방 슬라브계인 오보트리테족과 동맹을 맺고 신성 로마 제국 세력을 몰아내며 유틀란트 반도를 되찾는 데 성공하지만 이듬해 아들인 스벤 1세의 반란으로 인해 살해당하고 말았다.

한편 덴마크의 하랄 1세 블로탄 시절에 독립했던 노르웨이는 통치권을 장악한 라데 백작 호콘이 점차 오만하게 굴면서 각지에서 반란이 들끓었고, 결국 995년에 호콘이 부하들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당시 노르웨이가 반란으로 혼란스러워졌다는 소식을 들은 울라프 트뤼그비손[4]은 노르웨이로 귀국했고, 라데 백작 호콘이 암살당하자 자신의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노르웨이의 왕위를 차지한 후 올라프 1세로 즉위했다. 그리고 열렬히 그리스도교 포교에 나서 노르웨이 서부 해안 지방과 인근 섬인 페로 제도, 셰틀랜드 제도, 오크니 제도아이슬란드그린란드그리스도교를 전파했으나 앞선 노르웨이 국왕들과 마찬가지로 울라프 1세도 노르웨이 내륙 지방에 대해서는 거의 통치력을 행사하지 못했고 그리스도교도 전파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올라프 1세의 가장 큰 위협은 덴마크의 스벤 1세였다. 스벤 1세는 부왕인 하랄 1세 볼로탄 시절의 노르웨이 통치권을 되찾고자 했고 이를 위해 스웨덴 왕 올로프 3세 쇠트코눙 및 호콘의 아들인 라데 백작 에리크 호코나르손과 동맹을 맺었다.

1000년 노르웨이의 올라프 1세가 벤드족의 땅인 포메른을 습격한 후 노르웨이로 되돌아가는 것을 노려 덴마크의 스벤 1세는 스웨덴의 올로프 3세 쇠트코눙 및 라데 백작 에리크 호코나르손과 연합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이렇게 벌어진 스볼데르 전투에서 올라프 1세는 11척으로 총 70척을 상대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고 결국 라데 백작 에리크에게 생포되어 바다에 던져졌다. 이후 라데 백작 에리크가 노르웨이의 통치를 위임받았고 겉으로는 종주권을 덴마크와 스웨덴이 양분했다. 이때 스웨덴의 올로프 3세 쇠트코눙이 노르웨이의 트뢰넬라그를 획득하는 대신에, 덴마크의 스벤 1세가 노르웨이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이후 1015년, 덴마크에서 크누트 대왕의 형인 하랄 2세가 즉위했을 때 노르웨이의 시조였던 하랄 1세 하르파그리의 후손인 올라프 2세가 즉위했다. 그는 가톨릭 세례를 받은 뒤 노르웨이로 돌아와 1016년 노르웨이 서부를 넘어 전역에 대한 통치권을 확립했다. 그뒤 스웨덴의 올로프 3세 쇠트코눙과 전쟁을 벌였는데, 그 이유는 올라프 2세가 올로프 3세 쇠트코눙의 왕녀인 잉그리드와의 결혼을 청했으나 울라프 3세 쇠트코눙은 잉그리드를 키예프 대공 야로슬라프 1세와 결혼시켰기 때문이었다. 이에 전쟁이 임박해지자 1019년 스웨덴의 올로프 3세 쇠트코눙은 노르웨이의 올라프 2세와 화해하고 다른 왕녀인 아스트리드를 결혼시켰다.

1022년 스웨덴 왕 울로프 쇠트코눙이 승하하고 그의 아들인 아눈드 3세 야코브가 새로운 스웨덴의 왕이 되었다. 본래 이름은 '야코브'였으나 나중에 스칸디나비아적인 이름인 '아눈드'가 추가되었다고 한다. 아눈드 3세 야코브는 부왕 울라프 3세 쇠트코눙과 마찬가지로 처남이었던 노르웨이의 올라프 2세와 동맹관계를 유지했다. 노르웨이의 올라프 2세의 지원을 받은 아눈드 3세 야코브가 덴마크까지 위협하기 시작하자 덴마크의 섭정이었던 울프 야를이 1026년 반란을 일으켜 크누트 대왕의 어린 아들인 하레크누드를 왕위에 올리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다시 덴마크로 돌아온 크누트가 울프 야를을 제압했고 같은 해 벌어진 스웨덴-노르웨이 함대를 상대로 벌인 헬게 강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1028년 노르웨이의 지주들을 매수하여 노르웨이 왕인 올라프 2세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게 만든 후 노르웨이 왕위까지 차지했다. 이리하여 노르웨이 왕위는 크누트에게 돌아갔고, 북해 제국이 탄생했다. 이후 크누트는 흘라티르의 에리크의 아들인 호콘 에릭손을 노르웨이의 섭정으로 삼았으나 호콘이 1030년 사망했기 때문에 크누트의 첫 번째 왕후였던 앨프지푸에게서 낳은 아들인 스벤 크누트손을 노르웨이의 왕으로 임명했다. 같은 해 키예프 루시로 망명을 떠난 올라프 2세가 스웨덴 왕 아눈드 3세 야코브의 지원을 받아 노르웨이의 회복을 노렸지만 스티클레스타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했다. 그러나 올라프 2세는 노르웨이에 그리스도교를 널리 전파시킨 공을 인정받아 성인으로 추증되었을 정도로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여전히 많은 신망을 얻었고, 이 덕분에 키예프 루시에 망명해 있었던 그의 아들 망누스 1세가 나중에 재기에 성공하게 되었다.

크누트 대왕 사후 덴마크의 왕위를 계승한 적자 하레크누드가 크누트 대왕의 전처 앨프지푸의 서자 중 한 명인 해럴드 1세에게 잉글랜드를 섭정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빼았기자, 이 틈을 탄 올라프 2세의 아들 망누스 1세가 아눈드 3세 야코브의 도움으로 스벤을 내쫒고 노르웨이 왕위에 복귀했다.

자세한 사정을 들여다보면 노르웨이의 왕이 된 망누스 1세는 본래 노르웨이 왕 올라프 2세와 잉글랜드 노예인 알프힐드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망누스 1세가 4살에 불과한 어린 나이였을 때 올라프 2세는 크누트에게 폐위당하여 스웨덴 왕 아눈드 3세 야코브의 도움을 받아 키예프 루시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이후 망누스 1세는 키예프 루시에서 성장했으나 1035년 크누트가 승하하고 그의 아들인 스벤 크누트손이 노르웨이 왕위를 상속받게 되자 그의 지배를 원치 않았던 노르웨이 귀족인 아이나르 탐바르스켈피르와 칼프르 아르네손이 망누스 1세를 왕으로 옹립하고자 했다. 11살의 망누스 1세가 이를 위해 스웨덴으로 향했고, 망누스 1세의 아버지인 올라프 2세를 지원했던 스웨덴 왕 아눈드 3세 야코브로부터 이번에도 도움을 받아 노르웨이 왕위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한편 스벤이 노르웨이에서 쫓겨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자, 하레크누드가 노르웨이를 다시 합병시키기 위해 전쟁을 벌였으나 1039년까지 결판이 나지 않았다. 이에 덴마크의 하레크누드와 노르웨이의 망누스 1세는 서로 협상하여 둘 중 더 오래 사는 사람이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위를 모두 차지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1040년 잉글랜드의 해럴드 1세가 급사하자 하레크누드가 잉글랜드 왕위를 되찾기 위해 떠났으나 1042년 하레크누드도 잉글랜드에서 승하하고 말았다. 이후 잉글랜드의 왕위는 하레크누드와 어머니가 같고, 아버지가 다른 형제이자 애설레드 2세의 아들인 참회왕 에드워드가 이어받아 앵글로-색슨 왕조를 부활시켰고, 덴마크의 왕위는 하레크누드와의 사전 약속에 따라 노르웨이 왕 망누스 1세의 차지가 되었다.

이후 망누스 1세는 크누트 대왕의 누이 동생인 에스트리드 스벤스다테르울프 야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자 울프 야를이 반란에 실패하여 크누트에게 살해당한 이후 스웨덴으로 망명을 떠나 있었던 스벤 에스트리드센을 귀국시켜 덴마크의 부왕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북해 제국을 재건하기 위해 망누스 1세가 잉글랜드 왕위도 요구하고 나섰으나 포메라니아의 벤드족과 전투를 벌이는 동안 스벤 2세 에스트리드센이 덴마크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반란을 일으켜 덴마크의 왕위에 오르면서 더이상 잉글랜드에 신경쓸 수 없게 되었다. 망누스 1세는 스벤 2세를 연이어 격파하고 스웨덴으로 쫓아냈으나, 동로마 제국에서 용병으로 활약한 망누스 1세의 숙부인 하랄 시구르손이 1045년 노르웨이로 귀국하여 노르웨이 동부 지역을 요구하고 나서면서 스벤 2세와 연대를 도모했다. 이에 망누스 1세는 어쩔 수 없이 하랄 시구르손을 노르웨이의 공동왕 하랄 3세로 인정해야만 했다. 이때부터 노르웨이는 공동왕 즉위가 관행이 되었다. 그리고 망누스 1세가 다시 덴마크 공격에 나섰지만 1047년 갑자기 승하하고 말았다.

망누스 1세가 승하하자 노르웨이의 왕위는 하랄 3세가, 덴마크의 왕위는 스벤 에스트리드센이 스벤 2세 에스트리드센이 되어 각각 차지하게 되었지만 이후로도 노르웨이와 덴마크 간의 전쟁은 15년간이나 계속되었다. 그 사이 스웨덴에서도 1050년경 아눈드 3세 야코브가 승하하고 그의 이복형인 에문드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에문드 2세는 선왕인 아눈드 3세 야코브보다도 나이가 많아 '노왕'이라 불렸고, 더욱이 그의 아들인 아눈드 에문드손이 요절한 후 에문드 2세도 재위 10년만인 1060년에 승하하면서 문쇠 왕조가 단절되고 말았다. 이제 스웨덴은 에문드 2세의 사위인 스텐킬에 의한 스텐킬 왕조가 새롭게 시작되었지만 내정 정비 때문에 노르웨이와 덴마크 간의 전쟁에 개입할 수 없었다. 그리고 노르웨이와 덴마크 간의 전쟁은 덴마크의 스벤 2세가 노르웨이의 하랄 3세에게 패배를 거듭했지만 하랄 3세가 약탈에만 몰두하면서 덴마크를 끝내 정복하지 못했다. 결국 1062년 니즈 전투를 끝으로 둘은 상대방을 각국의 군주로 인정했고 1064년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하랄 3세가 승하한 이후 그의 두 아들인 올라프 3세망누스 2세가 노르웨이의 공동왕이 되었으나 1069년 망누스 2세가 승하하면서 올라프 3세가 단독 왕이 되었다. 올라프 3세가 덴마크 정복을 포기하고 1068년 덴마크와 평화조약을 체결하면서 노르웨이는 향후 25년간의 평화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또한 올라프 3세는 함부르크-브레멘 대주교인 아달베르트와 평화조약을 맺고 노르웨이 교회를 직접적으로 통제했으며 노르웨이에 4개의 주교구를 창설했다. 그리고 1073년 올라프 3세가 승하하면서 그의 아들인 망누스 3세가 사촌인 호콘과 함께 공동왕이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호콘이 승하하면서 망누스 3세가 단독 왕이 되었다.

망누스 3세는 부왕 올라프 3세와 달리 적극적인 대외 팽창정책을 펼쳐 1098년 브리튼 섬 근처의 섬들인 헤브리디스 제도와 맨 섬을 원정하여 이들의 왕이 되었고, 같은해 잉글랜드를 정복한 노르만족의 공격을 막아달라는 웨일스인들의 요청에 따라 웨일스 북서부의 앵글시로 원정을 떠나기도 했다. 스웨덴도 공격했으나 곧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1101년 스웨덴 왕 잉에의 딸인 마르그레테와 결혼했다. 그리고 1102년 아일랜드 섬을 정복하고 더블린의 왕위에도 올랐지만 1103년 아일랜드에서 식량을 징발하던 중 살해당하고 말았다.

1103년 망누스 3세가 승하하자 그의 아들들인 에위스테인 1세, 시구르 1세, 올라프 4세가 공동으로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올라프 4세의 나이가 너무 어려 실질적으로는 에위스테인 1세와 시구르 1세가 노르웨이를 통치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1096년 제1차 십자군 운동이 시작되어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동지중해의 레반트에 십자군 국가를 수립했는데 시구르 1세도 십자군 원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시구르 1세는 노르웨이의 통치를 형제인 에위스테인 1세에게 맡겨 둔채 1107년, 노르웨이 십자군을 구성하여 60척의 갤리선에 5,000명을 태우고 성지 예루살렘을 목표로 하는 긴 항해를 시작했다. 시구르 1세는 잉글랜드, 프랑스,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지중해로 들어갔고 발레아레스 제도 부근에서 이베리아 반도를 장악한 이슬람 세력인 무어인 해적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이후 시구르 1세는 시칠리아 섬에 도착하여 그곳을 지배하고 있었던 노르만계 오트빌(아우타빌라) 왕가의 수장인 루지에로 2세를 시칠리아 왕으로 인정해 준 다음 1110년에 팔레스타인에 도착하여 예루살렘 왕인 보두앵 1세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그리고 시구르 1세는 보두앵 1세를 도와 베네치아 함대와 함께 북부의 항구도시인 시돈을 함락시킨 후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여 콤네노스 왕조동로마 황제 알렉시우스 1세로부터도 환영을 받았다. 잠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물던 시구르 1세는 자신의 함대를 모두 매각하여 그 돈으로 대신 말을 구입했고, 동로마 제국에 용병으로 남기를 원하는 부하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이끌고 육로를 이용하여, 1111년에 노르웨이로 귀국하면서 무려 3년에 걸친 중세의 낭만있는 대장정을 마쳤다.

노르웨이는 하랄 3세 이후 공동으로 왕위를 계승하는 관행이 만들어졌고 시구르 1세 역시 형제인 에위스테인 1세 및 올라프 4세와 공동으로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올라프 4세가 1115년에 요절하고 에위스테인 1세 역시 1122년에 승하하면서 시구르 1세가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시구르 1세에게는 아들 망누스 4세 뿐이었기 때문에 공동 왕위 계승이 사라지는 듯 했지만 1128년 아일랜드에서 자신이 망누스 3세의 아들로서 시구르 1세의 이복동생임을 주장하는 하랄 4세가 나타났다. 이에 시구르 1세는 중세식 재판 방법인 <시죄법>을 실시했고, 하랄 4세가 뜨거운 쟁기 보습 위를 걷는 신판을 통과하여 자신이 망누스 3세의 아들임을 증명했다.

하랄 4세가 <시죄법>까지 통과하자 시구르 1세도 어쩔 수 없이 하랄 4세를 자신의 이복동생으로 인정해야 했으나 그 대신 자신과 자신의 아들인 망누스 4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왕위계승권을 주장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하지만 막상 1130년에 시구르 1세가 승하하자 하랄 4세는 약속을 파기하고 노르웨이의 왕위를 요구하고 나섰으며, 결국 망누스 4세와 노르웨이를 양분하여 각각의 왕으로 즉위했다. 처음 4년 간은 불안한 평화가 이어졌지만 결국 1134년에 하랄 4세와 망누스 4세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이렇게 하여 노르웨이는 1240년까지 무려 110여년 동안이나 이어지는 가나긴 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2.1. 기나긴 내전

1130년 시구르 1세가 승하한 이후 노르웨이의 왕위를 두고 시구르 1세의 이복동생인 하랄 4세와 시구르 1세의 아들인 망누스 4세가 서로 내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하랄 4세가 퓌릴레이프 전투에서 망누스 4세에게 패배하여 덴마크로 후퇴했으나 이후 덴마크로부터 병력을 증원받아 노르웨이로 돌아오면서 1135년 망누스 4세를 생포하는데 성공했다. 승자가 된 하랄 4세는 망누스 4세의 손과 발을 자르고 두 눈을 멀게 하여 불구로 만든 뒤 수도원에 감금시켰다. 이후 하랄 4세가 노르웨이의 단독 왕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이듬해 하랄 4세 역시 시구르 1세와 하랄 4세의 이복 형제로서 망누스 3세의 숨겨진 아들임을 주장하는 시구르 슬렘비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비록 시구르 슬렘비는 권력을 쟁취했지만 혈통에서 의심을 받았기 때문에 직접 왕위에 오르는 것은 노르웨이 사람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때문에 1137년 장님이자 불구였던 망누스 4세를 석방하여 왕으로 복위시키고 그의 이름으로 노르웨이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망누스 4세는 '맹인왕'(den blinde)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1139년 하랄 4세의 지지자들이 시구르 슬렘비와 망누스 4세의 지배를 거부한 채, 아직은 나이가 어린 하랄 4세의 아들 잉게 1세시구르 2세를 자신들의 왕으로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성공을 거두면서 결국 망누스 4세가 전투 중 전사하고 시구르 슬렘비는 생포되어 처형당하고 말았다.

이제 잉게 1세와 시구르 2세가 노르웨이의 공동왕이 되었고 1142년에는 다른 이복 형제인 에위스테인 2세망누스 하랄드손까지 모두 공동 왕위에 올랐으나 1145년 망누스 하랄드손이 먼저 승하했다. 이후 10년 동안 남은 세 명의 형제들이 별다른 문제없이 노르웨이를 공동으로 통치했으나 1155년 잉게 1세와 시구르 2세가 회담을 갖기 위해 베르겐에서 만났을 때 분쟁이 발생하여 시구르 2세가 살해되는 일이 벌어졌다. 뒤늦게 회담장에 나타난 에위스테인 2세가 시구르 2세의 죽음을 알게 되면서 이후 잉게 1세와 에위스테인 2세가 내전을 벌이게 되었고, 1157년 잉게 1세가 에위스테인 2세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에위스테인 2세마저 살해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잉게 1세가 3형제 중 최종 승자가 되었지만 시구르 2세와 에위스테인 2세의 지지자들이 시구르 2세의 아들인 호콘 2세를 중심으로 다시 결집하면서 내전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1161년 호콘 2세가 오슬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잉게 1세가 살해당했지만 이번에는 노르웨이 귀족인 에를링 스카케가 잉게 1세의 지지 세력을 이끌며 1162년에 호콘 2세를 살해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에를링 스카케가 니다로스 대주교인 에위스테인 에를란손의 협조를 받아 자신의 8살 짜리 아들인 망누스 5세를 1163년 왕으로 즉위시킨 뒤 그 자신이 섭정이 되었다. 참고로 노르웨이의 니다로스 대주교구는 1152년에 창설되었는데 망누스 5세가 노르웨이 역사상 최초로 니다로스 대주교의 집전하에 대관식을 거행한 왕이 되었다.

그렇지만 스스로 시구르 2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스베레가 나타나 망누스 5세에게 대항하던 비르클레크스족의 지도자가 되면서 노르웨이의 내전은 계속되었다. 이후 노르웨이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한 에를링 스카케가 1179년에 사망하고 망누스 5세도 스베레가 이끄는 비르클레크스족에게 참패를 당하면서 덴마크로 도망쳤다. 이때 망누스 5세의 지지자 중 한 명이었던 니다로스 대주교 에위스테인 에를란손도 잉글랜드로 망명을 떠나야 했으나 1183년에 스베레와 화해하여 노르웨이로 귀국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망누스 5세가 덴마크의 지원을 받아 1184년 왕위를 되찾기 위해 노르웨이를 침공했으나 다시 한번 패배하면서 전사했다. 이렇게 하여 스베레가 노르웨이 왕위를 둘러싼 오랜 내전의 최종 승자가 되었다.

스베레가 이제 안정적으로 노르웨이를 통치할 수 있게 되는 듯이 보였...는데 1188년 에위스테인 에를렌손이 사망하고 스타방게르 주교였던 에리크 이바르손이 새로운 니다로스 대주교가 되면서 마찰이 발생했다. 에리크 이바르손은 끝내 스베레에 대한 대관식을 거부한 채 1190년, 많은 주교들을 이끌고 덴마크로 달아나 버렸다. 이후 스베레가 남은 주교들을 동원하여 1194년에 대관식을 치르기는 했지만 이들 주교들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파문을 받아야 했다. 이에 대해 스베레는 왕권이 교권보다 우월하다는 논조의 <주교에 반대하는 연설>(En tale mot biskopene)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렇게 스베레가 교권을 억압하자 1196년 오슬로 주교 니콜라스 아르네손이 망명 중인 니다로스 대주교 에리크 이바르손과 함께 함대를 이끌고 노르웨이로 돌아왔고 이에 호응하여 노르웨이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니콜라스 아르네손이 노르웨이의 동부 지역을 장악했지만 내륙 지역은 여전히 스베레의 세력이 우세했다. 결국 스베레가 1199년에 니콜라스 아르네손를 격파하고 1202년 반란군을 모두 토벌하는 데 성공했지만 같은 해 3월 그 역시 승하하고 말았다. 이미 스베레의 장남인 시구르가 요절했기 때문에 차남인 호콘 3세가 노르웨이의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비록 호콘 3세가 교회와 화해했지만 재위 2년만인 1204년에 승하하고 말았다. 이제 스베레의 손자이자 시구르의 아들인 구토름이 4살에 불과한 어린 나이에 왕으로 즉위했지만 그마저 같은 해 갑자기 병사하면서 노르웨이의 내전은 계속되고 말았다.

1202년 스베레가 승하한 뒤 그의 아들인 호콘 3세와 손자인 구토름이 모두 2년 만에 나란히 승하했기 때문에 스베레를 지지하던 비르클레크스족은 더이상 왕으로 내세울 스베인의 직계 후손을 가지지 못했다. 이때 스베레의 오랜 적수였던 바글레르족이 망누스 5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에를링 망그누손을 지원하고 나섰기 때문에 비르클레크스족의 수장인 호콘이 직접 왕위 계승 후보자로 나섰다. 하지만 니다로스 대주교 에리크와 트뢰넬라그 지방의 농부들은 시구르 2세의 외손자이자 트뢰넬라그의 호족인 배르드의 아들 잉게 2세를 지지했다. 잉게 2세는 시구르 2세의 왕녀인 세실리아의 아들로 비르클레크스족의 호콘과는 아버지가 다르지만 어머니는 같은 이부동모제 관계였다. 이에 호콘은 잉게 2세와 협상을 벌여 잉게 2세가 노르웨이의 왕이 되는 대신 호콘은 야를의 지위로서 군권을 장악하고, 왕실 수입의 절반을 차지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노르웨이에서는 4년 동안 비르클레크스족과 바글레르족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고 1206년 에를링 망그누손이 사망했지만 바글레르족은 필리프 시몬손을 새로운 지도자로 내세웠다. 바글레르족은 퇸스베르그와 오슬로를 비롯한 남동부의 비켄 지역을 통제하고 있었고, 잉게 2세는 니다로스를 비롯한 중부의 트뢰넬라그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1207년 가을, 니다로스 대주교 토레와 오슬로 주교 니콜라스가 만나 협상을 벌이면서 필리프 시몬손이 왕위를 포기하는 대신에 야를이 되어 노르웨이 동부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고, 호콘이 노르웨이 서부를 통치하며, 잉게 2세가 노르웨이의 왕위를 차지하기로 합의했다. 이렇게 하여 불안한 평화가 계속되었지만 야를 호콘이 1214년에 사망하고 이어서 잉게 2세와 야를 필리프도 1217년에 나란히 사망하면서 더 이상의 내전은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노르웨이의 왕위는 스베레의 숨겨진 손자로 알려진 호콘 4세가 13살의 나이에 계승하게 되었다. 그리고 호콘 4세는 <계승법>을 정해 1세기에 걸쳐 지속된 노르웨이 내전을 종식시켰다.

2.2. 혼란의 재개

1217년 노르웨이의 왕으로 즉위한 호콘 4세는 호콘 3세의 사생아이자 호콘 3세가 죽은 이후에 태어난 유복자였다. 이 때문에 호콘 3세가 승하한 이후에도 한동안 그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잉게 2세의 배려로 왕궁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1217년 잉게 2세가 승하하면서 호콘 4세가 노르웨이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지만 그의 혈통에 대한 의심이 많았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가 불에 달군 쇠로 사실을 가려내는 <시죄법>을 통과해야 했다. 비록 <시죄법>을 통해 호콘 4세는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그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친척인 야를 스쿨리 보르손이 섭정이 되었다. 이후 1227년, 스베레 사후 망누스 5세의 아들임을 주장했던 에를링 망그누손의 아들 시구르 리부느그가 동부 지역에서 바글레르족의 마지막 반란을 이끌었지만 토벌당했고, 이번에는 섭정인 야를 스쿨리 보르손이 왕위까지 노리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것도 곧 진압당했다.

이제 호콘 4세의 왕권이 안정되었고, 노르웨이는 1134년부터 무려 110년 간이나 이어진 오랜 내전에서 겨우 벗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1247년 노르웨이에 도착한 교황 사절이 대관식까지 직접 거행해주면서 호콘 4세의 권위는 더 높아졌다. 이후 호콘 4세는 본격적으로 내정을 정비하기 시작하여 왕위 계승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장자상속법>을 제정하여 그의 장남인 동명의 호콘을 부왕으로 임명했고, 1257년 그가 요절하자 다른 아들인 망누스 6세를 다시 부왕으로 임명했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1217년에 잉글랜드와, 1250년에는 독일 북부 도시인 뤼베크와 각각 무역 협정을 맺었고 노브고로드 공화국과도 불분명했던 북부 국경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뤼베크는 독일 북부 상업도시들의 연합체인 '한자(Hanse) 동맹'의 중심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1262년에는 바이킹 시대에 노르웨이 사람들이 진출했던 서쪽의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에 사절을 파견하여 이듬해 그들의 무역을 보호하고 치안을 유지시켜주는 조건으로 노르웨이의 영토로 편입되는 것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1263년 스코틀랜드 왕 알렉산더 3세가 노르웨이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헤브리디스 제도와 맨 섬을 공격하자 호콘 4세가 스코틀랜드로 향하여 몇차례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같은 해 호콘 4세가 노르웨이로 되돌아오지 못한 채 스코틀랜드 북쪽의 오크니 제도에서 승하하면서 그의 아들인 망누스 6세가 노르웨이의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1263년 망누스 6세가 즉위했으나 호콘 4세가 살아생전에 마련한 왕위계승법 덕분에 아무런 이의 제기가 없었다. 즉위 직후 망누스 6세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이어받아야 했지만 아버지와 달리 대외 정책에는 소극적으로 임하여 1266년 헤브리디스 제도와 맨 섬을 스코틀랜드에게 넘기고 말았다. 그러나 국내적으로는 적극적으로 왕권 강화를 추진하여 입법권을 중앙에 집중시키고 노르웨이 전역에 적용되는 <전국법>을 비롯하여 수많은 법을 제정하면서 '법률개정왕'(Lagabøte)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1280년 망누스 6세가 43세의 나이로 일찍 승하하면서 그의 아들인 에이리크 2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에이리크 2세는 스코틀랜드 왕 알렉산더 3세의 왕녀인 마거릿과 결혼하여 동명의 딸 마거릿을 얻었는데 1286년 장인이었던 알렉산더 3세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승하하면서 에이리크 2세의 왕녀였던 마거릿이 불과 3살의 나이에 스코틀랜드의 여왕이 되었다. 그러나 마거릿은 그 이후로도 노르웨이에서 성장했고, 1290년 스코틀랜드로 향하던 중 배 안에서 승하하면서 스코틀랜드 왕위를 다시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에이리크 2세 역시 1299년, 32세의 젊은 나이에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승하하면서 노르웨이의 왕위는 동생인 호콘 5세로 넘어가게 되었다.

호콘 5세는 형인 에이리크 2세 시절 강화된 고위 귀족과 성직자의 권한을 다시 약화시키기 위해 왕실회의에서의 귀족들의 참여를 폐지했고, 고위 성직자의 임명권도 되돌려받았다. 그리고 에이리크 2세와 마찬가지로 한자 동맹에게 발트해를 통한 교역의 특혜를 부여하여 잉글랜드 상인과 마찰을 빚었고,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에 대한 종주권을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지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호콘 5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딸인 잉게보리만 있었기 때문에 남자만이 왕위를 계승하는 왕위계승법을 수정했다. 이에 따라 잉게보리가 스웨덴 왕 비르예르의 동생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에리크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로 이미 1319년 7월, 스웨덴의 왕위에 올랐던 망누스 4세가 같은 해 8월 노르웨이의 왕위까지 이어받아 망누스 7세로 즉위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노르웨이의 스베레 왕조가 단절되었고,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동군연합 상태가 되었다.

2.3. 노르웨이-스웨덴 동군연합

스웨덴의 왕권을 확립했던 망누스 3세가 1290년에 승하한 뒤 그의 아들들과 스웨덴 귀족들이 서로 대립하는 정치적 혼란이 거의 30년 간 이어졌지만 망누스 3세의 차남이었던 쇠데르만란드 공작 에리크와 노르웨이 왕 호콘 5세의 왕녀 잉에보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망누스 4세가 1319년 7월에 왕위에 오르면서 겨우 종식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호콘 5세도 승하하면서 망누스 4세가 노르웨이 왕위까지 상속받아 망누스 7세로 즉위했기 때문에 스웨덴과 노르웨이가 동군연합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정작 망누스 4세의 즉위 당시 나이가 3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의 할머니 홀슈타인의 헬비히, 어머니 노르웨이의 잉에보리, 그리고 덴마크 귀족인 크누트 욘손과 노르웨이 귀족인 에를링 비드쿤순이 섭정단을 조직했다.

비록 망누스 4세가 성년이 되기 전인 1333년 노르웨이에서 에를링 비드쿤손의 주도로 반란이 일어났다가 진압되는 일이 벌어졌지만 섭정단은 큰 무리없이 스웨덴과 노르웨이 양국을 통치했다. 또한 당시 덴마크는 독일의 홀슈타인-렌즈부르크 백작 게르하르트 3세 및 홀슈타인-플뢴 백작 요한 3세가 그동안 덴마크 왕실에 빌려준 대출금의 담보를 위해 영토 대부분이 저당잡혀 있는 신세였는데 이에 1332년 스코네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스웨덴에 귀속될 것을 요청하고 나서자 스웨덴 섭정단은 홀슈타인-렌즈부르크 백작 게르하르트 3세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고 스코네를 스웨덴의 영토로 병합하였다.

1336년 망누스 4세가 20살이 되자 스톡홀름에서 스웨덴 왕과 노르웨이 왕으로서 정식으로 대관식까지 치르게 되었지만 1338년 노르웨이 귀족들이 다시한번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결국 1343년 바르베리 조약에 의한 대타협이 이루어져 스웨덴 왕위는 망누스 4세의 장남인 에리크가 이어받지만 노르웨이 왕위는 차남인 호콘이 계승하되 당장 호콘이 노르웨이 왕위에 오르는 대신에 호콘 6세가 성년이 될 때까지는 망누스 4세가 섭정이 되기로 결정되었다. 이후 망누스 4세는 내정을 정비하면서 스웨덴에서 노예제를 완전히 철폐하고 지방법들을 통일하기 위한 '통일 국법(Landslag)'의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으며 스웨덴 전국의 도시들에게 적용되는 '도시법(Stadslag)'도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망누스 4세의 대외정책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1348년 러시아의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공격하였으나 1350년부터 북유럽을 휩쓸기 시작한 흑사병(페스트) 때문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망누스 4세는 치세동안 자신의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귀족들과 교회의 경제력을 위축시켰기 때문에 많은 불만을 샀다. 그리고 1355년 노르웨이의 왕으로 임명하였던 차남인 호콘 6세가 성년이 되면서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동군연합은 종식되고 다시 별개의 나라로 분리되었다. 그러자 스웨덴의 왕세자가 되었지만 그동안 아무런 실권을 가지지 못했던 망누스 4세의 장남인 에리크 12세가 망누스 4세에게 불만을 가진 귀족들의 수장이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에리크 12세는 덴마크 왕 발데마르 4세의 지원을 얻어냈고 1356년에는 로마교황 인노첸시오 6세의 지지까지 받으면서 1357년 망누스 4세로부터 핀란드와 스웨덴 남부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위임받는 데 성공했다.

비록 이후 망누스 4세가 반격에 나서서 1359년 노르웨이 왕이 된 차남 호콘 6세와 발데마르 4세의 딸 마르그레테 1세를 결혼시키는 조건으로 덴마크의 발데마르 4세와 동맹 조약을 체결하고 장남인 에리크 12세와도 화해하였다. 같은 해 에리크 12세가 갑자기 병사하였고 이듬해 덴마크의 발데마르 4세가 망누스 4세를 배신하여 스코네를 되찾아 갔다. 하지만 부 욘손 그리프를 중심으로 한 스웨덴 귀족들이 망누스 4세의 매부인 메클렌부르크 공작 알브레히트 2세에게 접근하여 그의 아들인 알브렉트에게 왕위를 제안했기 때문에 망누스 4세는 스코네의 탈환을 포기하며 덴마크의 발데마르 4세와 다시 동맹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망누스 4세는 1362년 호콘 6세를 스웨덴의 공동왕으로 임명하여 노르웨이의 지원도 받아내었다.

이렇게 망누스 4세가 덴마크 및 노르웨이와 공동 전선을 펼쳤으나 1364년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렉트가 북독일의 한자동맹 도시들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스웨덴의 스톡홀름에 입성하여 대관식까지 치르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스웨덴은 8년 동안 망누스 4세와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렉트 지지파 사이의 내전이 벌어졌고 최종적으로 1364년에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렉트 세력이 망누스 4세를 지원 온 호콘 6세의 노르웨이군을 물리치고 망누스 4세까지 포로로 붙잡았다. 이제 호콘 6세가 1370년 한자동맹 도시들에게 상당한 무역 특권을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이듬해 덴마크 왕 발데마르 4세의 지원까지 받아 스톡홀름을 포위 공격했지만 함락에는 실패했다. 결국 호콘 6세와 알브렉트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져 포로로 붙잡혀 있던 망누스 4세가 풀려나는 대신에 알브렉트가 스웨덴 왕위를 차지하는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2.4. 덴마크-노르웨이 탄생

덴마크는 1375년 발데마르 4세가 사망한 후 정통성 있는 왕위 계승 후보자가 없었기 때문에 잠시 공위 시대가 발생했다. 처음에는 발데마르 4세의 딸인 잉에보르가 메클렌부르크 공작 알브레히트 2세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하인리히 3세와 결혼했기 때문에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알브레히트 4세가 할아버지인 메클렌부르크 공작 알브레히트 2세의 후광에 힘입어 강력한 왕위계승권자로 부상했다. 하지만 독일의 메클렌부르크 공작 가문이 이미 스웨덴 왕위를 차지한 상태에서 더 이상 스칸디나비아에 대한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덴마크 귀족들이 이를 거절하고 노르웨이왕 호콘 6세와 결혼한 발데마르 4세의 막내딸 마르그레테 1세의 아들인 올루프를 1376년 덴마크 왕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1380년 노르웨이의 호콘 6세가 사망하자 올루프 2세가 노르웨이 왕 올라프 4세로 즉위하면서 이제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동군연합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올라프 4세의 나이가 아직 너무 어렸기 때문에 마르그레테 1세가 섭정이 되었다.

2.5. 스웨덴의 SOS와 칼마르 동맹 탄생

스웨덴에서는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렉트가 왕위를 차지했지만[5] 스웨덴 귀족들로 이루어진 섭정 의회의 광범위한 권한을 인정해 주어야 했다. 그 중에서 알브렉트를 왕위에 올리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부 욘손 그리프는 무려 1,500여개의 농장을 얻고 스웨덴 영토의 3분의 1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이 때문에 비록 알브렉트가 19년 간이나 왕위를 유지했지만 스웨덴 서부에 대해서는 거의 통치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이후 알브렉트가 자신의 지지 기반을 만들기 위해서 주요 지역의 토지를 독일 영주에게 넘겨주고 중요 보직에도 독일인만 중용하자 스웨덴 귀족들은 부 욘손 그리프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알브렉트를 견제하였다. 그리고 1389년 부 욘손 그리프는 사망하자 이제 스웨덴 귀족들이 부 욘손 그리프의 방대한 영지의 상속권을 두고 알브렉트와 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마르그레테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본래부터 마르그레테 1세도 스웨덴의 망누스 4세의 왕위를 빼앗은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렉트를 상대로 자신의 아들인 올루프 2세가 망누스 4세의 외손자임을 내세워 스웨덴 왕위 계승권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올루프 2세가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이 되어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고 스웨덴인도 올루프 2세가 왕이 되는 것에 대하여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이 올루프 2세에 의해 하나로 통합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올루프 2세가 1387년 17세의 나이에 갑자기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마르그레테 1세는 자신의 외교적 역량을 총동원하여 언니 잉게보르그의 외손자이자 포메른 공작 바르티슬라프 7세의 아들인 포메른의 에리크를 양자로 삼아 덴마크 왕위를 계승시키고 덴마크 국왕 에리크 3세로 즉위시켰다. 그리고 노르웨이는 국가자문위원회에 의해 통치되었지만 사실상 마르그레테 1세가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1389년 알브렉트와 대립하던 스웨덴 귀족들의 요청에 따라 사망한 스웨덴의 실력자 부 욘손 그리프의 막대한 영지까지 대부분 넘겨받는데 성공하였다. 이 때부터 마르그레테 1세는 스웨덴의 '여군주이자 통치자'로 선포되었고 1389년 2월 스웨덴을 공격하여 오슬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알브렉트도 생포하는 데도 성공하였다.

이후 알브렉트는 6년 간이나 스코네의 린드홀름 성에 감금되어야 했고 1395년 거액의 보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스톡홀름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그 사이 마르그레테 1세가 이미 스웨덴의 통치권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1396년 포메른의 에리크를 노르웨이 왕위와 스웨덴 왕위에 모두 즉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포메른의 에리크는 노르웨이 왕으로서는 에리크 3세, 스웨덴 왕으로서는 에리크 13세로 각각 명명되었다. 이어서 마르그레테 1세는 1397년 6월 스웨덴의 동남부에 있는 칼마르에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3개국 귀족 의회를 소집하여 3개국의 연합안을 통과시키는데 성공하면서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이 서로 동군연합 상태가 되는 '칼마르 동맹(Kalmarunionen)'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포메른의 에리크가 3개국의 통합 왕이 되어 같은해 6월 7일에 3개국 합동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비록 공식적으로는 포메른의 에리크가 통합 왕이었지만 여전히 마르그레테가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다. 그렇지만 마르그레테는 칼마르 동맹의 3개국 통합 헌법을 비준시키는 데는 실패하여 칼마르 동맹은 하나의 국가가 아닌 국가 연합체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스칸디나비아 3개국은 칼마르 동맹을 결성한 이후에도 여전히 독자적인 귀족 의회를 가지며 고유의 법과 관습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일반적으로 칼마르 동맹의 주도권은 덴마크가 행사했고 나머지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종속적인 지위에 머물렀다. 이렇게 스칸디나비아를 하나로 통합시킨 업적을 남긴 마르그레테는 마지막으로 덴마크 남부의 홀슈타인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전쟁을 벌이던 중 1412년 갑자기 사망하였다.

2.6. 칼마르 동맹

칼마르 동맹 참조

3. 근세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참조

4. 근대

1814년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로 노르웨이는 스웨덴에 합병되었다. 2월 11일 노르웨이는 스웨덴에 독립을 선포했으나 스웨덴 왕세자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의 공격을 받고 무너졌다. 이후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이라는 이름의 동군연합으로서 어느 정도 자치 상태에 놓였다. 예를 들면 노르웨이는 의회, 군사, 화폐가 전부 스웨덴에서 독립적이었다. 그러나 외교권은 존재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스웨덴의 보호무역 정책으로 많은 손해를 보았다.

결국 양국간의 갈등이 심해지다가 1905년 6월 7일 스웨덴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11월, 국민투표로 왕정으로 국체를 정하고 덴마크의 칼 왕자를 노르웨이로 데려와 노르웨이의 국왕 호콘 7세[6]로 추대했다.[7] 스웨덴과 노르웨이가 전쟁의 위기에 빠졌지만 호콘 7세가 칼 15세의 손자여서 스웨덴이 전쟁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국제 정치가 국왕들 간의 혈연관계로 가볍게 해결될 수 있었다면 국왕들끼리 서로 사촌 간이었던 러시아 제국, 대영제국, 독일 제국제1차 세계 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노르웨이인들은 99.5%가 독립에 찬성할 정도로 독립열기가 뜨거웠고 스웨덴인들도 노르웨이와의 동질감이 없었기에 대부분 독립을 찬성했다. 특히 평화주의를 주장하고 국왕 오스카르 2세를 적대시했던 스웨덴의 사회주의자들이 노르웨이를 독립시켜 줄 것을 주장했다. 영국이 북대서양에서의 패권을 위해 노르웨이의 독립을 도운 면도 있었다. 그 후에는 중립국으로서 제1차 세계 대전을 넘겼다.

1940년 4월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던 중 독일군이 덴마크를 점령하자 스웨덴은 나치의 점령을 피하기 위해서 노르웨이로 가는 열차 길목을 나치에 제공했고 노르웨이는 점령되었다.[8] 이때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가 세워지고 비드쿤 크비슬링노르웨이 국민 정부를 설립해서 독일 점령하 노르웨이 내의 자치 정부의 수반을 자처했으나 실제로 통치력을 행사하지는 않고 나치가 통치하였다. 나치가 패망하고 독립한 노르웨이 정부는 크비슬링을 총살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영어로 quisling(퀴즐링)은 조국의 배신자, 침략자의 앞잡이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세계대전에서는 독일이 20만이나 되는 군대를 노르웨이에 배치하다보니 저항군 활동이 미미했지만 노르웨이 중수 사건 같은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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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크비슬링이 만든 정당인 국민연합의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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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맨 왼쪽이 크비슬링이다.

5. 현대

해방 이후 중립 정책을 포기하면서 냉전기엔 NATO 북부 전선의 주역이었다. 피요르드 협만 안으로 나토 항모 기동 부대가 들어가 북부 러시아를 공격하는 훈련도 많이 했다. 노르웨이 해군의 미사일 고속정이나 206급 잠수함을 주축으로 한 잠수함 전력도 나름대로 충실한 편이었다. 톰 클랜시의 소설 <붉은 폭풍>에서 키로프급 순양함을 날려버린 것도 노르웨이 해군의 206급 잠수함. 주변의 핀란드와 스웨덴은 중립국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경제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루었고 특히 1969년에 북해 유전이 발견되고 때마침 오일 쇼크로 유가가 급등하면서 노르웨이는 많은 이득을 보았다. 북해에서 처음 석유가 발견된 뒤 1973년 국영 석유 회사 스타토일을 설립하였다. 이후 상당수의 국민들이 어부에서 석유 관련 기술자로 전향했다.

[1] 주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 비하면 인정받는 통일 왕국의 등장이 조금 빠른 편이다.[2] 에이리크 1세가 하랄 1세의 누이인 건힐다와 결혼했기 때문이었다.[3] 여담으로, 그의 별명인 '블로탄'(푸른 이빨)은 오늘날 근거리 무선 기술 표준인 '블루투스'(Bluetooth)의 어원이 되었다.[4] 노르웨이 왕 하랄 2세에게 살해당했던 트뤼그비 울라프손의 아들로, 데인족의 잉글랜드 침략에서 두각을 드러냈다.[5] 자세한 사정은 스웨덴/역사 참고.[6] 아내가 영국 에드워드 7세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 사이의 막내딸 모드다.[7] 당시 왕정론과 공화론이 팽팽하게 대립했는데, 만일 노르웨이가 공화국이 되었더라면 프리드쇼프 난센이 초대 대통령이나 총리가 되었으리라는 설이 유력하다. 다만 난센 본인은 왕정론자였다. 호콘 7세 역시 왕이 되는 것을 그리 반기지 않아 즉위한 뒤에도 철저하게 입헌군주로서 활동했다. 오늘날 노르웨이가 왕정국가임에도 왕실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약한 데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8] 이때도 중립을 지키려 했는데 윈스턴 처칠이 연합국의 편을 들지 않으면 적과 같다고 엄포를 놔서 노르웨이 주재 영국 대사가 노르웨이를 나치 편으로 만들려고 발악하냐고 흥분한 적도 있다. 영국이 노르웨이 침공 준비를 하는 중에 나치가 먼저 노르웨이로 쳐들어와서 노르웨이는 결국 영국 편을 들게 된다. 사망자 수는 적었지만 노르웨이군은 열악한 무장으로 저항하여 나치 독일군 순양함이 격침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노르웨이는 저항할 새도 없이 나치에 순식간에 점령당한다. 독일은 노르웨이 점령 이후 전사자 추모비를 노르웨이에 설치했다. 나중에 노르웨이 정부가 이것을 전부 부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