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관용어의 일종. 화자가 상대방이 제기한 불만 사항을 심적으로 수긍하지 못하겠다는 지적을 의미한다. 집단 내에서 서열이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발화에 해당하고 불만 제기에 대한 불쾌감을 에둘러 표현하는 효과가 있다.한편으로 이런 말 하는 사람이 힘들 때는 안 그래도 어려운 상황에서 힘들다는 말을 들어야 도움이 안 되어서이기도 하다. 이는 마치 금쪽 같은 여가시간에 웹소설 등 자신이 즐기는 매체에서까지 자기가 처한 구질구질한 현실을 재감상하기 싫어하는 심리가 크게 작용하는 것과 비슷하다.[1] 비슷한 속담으로 '곳간에서 인심난다'가 있다.
2. 용법
이 발화 뒤에 '지금 여기 있는 사람 전부 다 힘들어', 혹은 '다른 사람들은 바보라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가 따라오면 1:1 상황에서 발화하는 건지, 또는 대화를 듣는 제3의 구성원들이 있는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1:1 상황이면 단순히 민원 해소를 거절하는 성격을 크게 띠는 반면, 제3의 구성원들이 듣고 있으면 사건의 확대를 막고 모두의 고통을 인정함을 널리 보여 문제를 조기에 봉합하려는 기술적 발화에 가까운 성격을 띤다.제3의 구성원들이 듣는 가운데 행해지는 이러한 발화는 공동체주의의 기치 아래에 개인의 인내를 요구하는 것이 골자로, 같은 조건을 모두가 인내하는 와중에 불만을 제기하는 첫 번째 사람인 '튀어나온 못'을 개중 가장 나약한 사람으로 몰아세워서 심리적으로 위축시키는 효과가 있다. 민원인이 평소의 집단 내에서 퍼포먼스가 좋지 않거나 동료들 사이에서의 평이 나쁘면 이 발화의 효과가 더욱 커지는데, 반면에 민원인이 평균을 상회하는 퍼포먼스를 가진 인재거나 구성원을 대표하여 문제를 제기하면 이러한 발화로 승부를 보는 것이 역효과를 불러온다.
주로 군대 등 단체 행동이 잦은 환경에서 이러한 완곡어법이 자주 사용된다. 훈련소에서 조교들이 훈련병들에게 군기를 잡을 때 "니네 여기 억지로 끌려왔어? 군대 놀러왔어?"라면서 고된 군사훈련이 하기 싫고 힘들어도 무조건 참아야 하고 명령에 복종하도록 찍어누르는 잔소리를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결국 징병제로 강제로 끌려온 것에 대해 불만이 생겨도 "그래. 어쩔 수 없이 강제로 끌려왔다."라고 대답하지 못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나라를 지켜야 하니 어쩔 수 없다."라는 자포자기 심정이 되기 마련이다. 조교도 강제로 끌려온 입장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더더욱 악질적이다.
예외적인 시혜조치는 다른 구성원들이 동요할 여지를 주어 집단의 사기에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듣는 입장에서는 벽과 대화하는 듯한 갑갑함을 느끼게 되지만 정말로 부조리한 일부 상황을 제외하면 상급자의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원래 조직의 단체 행동은 혼자서는 안 할, 하기 싫어할 것을 시키고자 수많은 사람들을 서로의 페이스 메이커로 쓰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구성원의 자율을 규제할 필요가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래 문단에 나온다.
유사한 표현으로 '다 자기(의 일, 출신 부대, 직무 환경 등등)가 제일 힘들다고 한다'가 있다. 민원 내용을 완전히 깔아뭉개면서 똑같은 민원을 온 사방에서 듣는 자기 자신에게의 신세 한탄을 겸하는 표현으로, '지금 너만 힘든 줄 아냐'보다 조금 더 직설적인 표현이며 민원인을 힐난하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
전술한 사례와 달리 '지금 너만 힘든 줄 아냐' 뒤에 '나도 힘들어'가 따라 붙으면 발화의 의도가 달라지는데 '나도 힘들다'라는 표현은 별다른 전략이 없는 회피성 발언으로, '각자 제 코가 석자인데 나한테 와서 징징거리지 마라' 내지는 '난 너보다 힘든 걸 하는데 니가 하는 게 뭐 있다고 징징대나?'의 동의어가 된다. 이 경우는 완곡어법보다는 직접적으로 하급자를 권위로 찍어누르며 향후의 불만에 원천적으로 소통하지 않으려는 화법에 가깝다.
반면 진짜로 자꾸 불평, 불만만 하거나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업무나 문제를 회피하는 경우에 지적하는 용도로도 쓰인다. 물론 그런 사람들에게 이런 일침을 놔봐야 위에 서술된 내용들을 자신에게 적용하며 상대방들이 자신을 가스라이팅한다고 주장할 뿐이다.
3. 표현의 문제점
"너만 힘든 거 아니다."라는 표현은 획일화를 상징하는 말이다. 암묵적으로 '모든 사람의 인내력이나 처한 환경이 동일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감옥이나 포로수용소에서 강제노동을 시키고 있는 상황, 노동자들에게 노동집약적 산업 같은 일을 맡길 때만 성과에 도움이 된다.[2]
인재를 공장제품 찍어내듯 모조리 획일화하는 것은 장기적 사회발전 시나리오로 볼 때나, 문화 및 문명적으로 볼 때 정말로 답이 없는 책(策)이다. 캄보디아의 정체기를 불러온 크메르 루주 사태와 소련의 공산주의 경제 체제 실패, 북한의 협동농장 등 지나간 역사가 이를 정확히 증명한 예시이다. 2010년대 조별 과제 관련 유행물도 있다.
사람(인류)의 본질 및 성향은 똑같은 환경에서 지냈어도 극과 극인 사례가 많다. 하물며 유전적으로 부모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이나 심지어 유전 형질이 같은 쌍둥이 사이에서도 성격이나 행동이 똑같지 않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마당인데 이런 병폐를 사회범위로 확장하면 더욱 답이 없어진다. 그러다 보면 동일한 환경에 대비해 분명히 '상대적 약자'가 생기고, 이를 보호해 줄 '상대적 강자'도 생긴다.
예를 들어 군대에서 굉장히 힘든 훈련을 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지쳐서 비틀거리는 병사에게 선임병이 "지금 너만 힘든 줄 아냐?"라고 물어보면서 갈구는 일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징병제 특성상 선별해서 들어온 병사들이 아닌 만큼 개중에는 분명히 체력이 좋은 사람도 있으면 저질체력도 반드시 있고, 체력 관리에 익숙하지 않은 병사가 있을 수 있으며, 지구력이 낮은 병사가 있을 수도 있다.[3] 같은 길을 걸었어도 밟은 곳의 미세한 차이나 착용한 장비의 차이 등 획일화할 수 없는 변수는 얼마든지 있다. 위 표현은 그러한 개인차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표현이다. 우물 안 개구리의 사례로 볼 수도 있고, 맞춤아기에 무의식적으로 동의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설령 병사들의 본질 및 성향이 모두 같아도 이 말은 폭언일 뿐이다.
뭐가 됐든 멤버 전원이 그 시련을 겪고 지나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긴 하다. 다만 그것은 다른 사람도 힘들다는 사실을 인지시켜주는 수준에서 끝내고 결국 각 멤버들의 특성을 파악해서 모두가 시련을 통과할 수 있게 지도자가 전략을 잘 짜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힘든 게 당연하니 조금만 더 노력하자."라는 결론으로 가는 게 좋은 부분인 것인데도 오용돼서 자기 책임 없으니 본인 스스로 극복하라는 의미로만 사용되는 경우가 잦다.
거기다 처음부터 힘들 만한 일을 시켜 놓은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상황이면 더욱 저질이다. 힘들 만한 일을 시켜놓고 힘든 티를 내냐면서 폭언을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일을 시키는 상관이 진정 능력이 좋으면 후임에게 과도한 일과와 책임을 부여해선 안 됨을 알고 있기에 굳이 시키지도 않을 것이고, 후임을 윽박지르기지 않고 보다 올바르게 가르치거나 자신이 직접 모범을 보이는 것이 이상적일 것이다. 고대서 손자병법에서도 "진정한 지도자는 힘이 아닌 모범으로 다스린다."라고 하여 힘(권력)으로 내리 누르는 것이 좋지 않음을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개개인의 능력에서 벗어나는 무리한 명령까지도 '상명하복'이라는 이름으로 곳곳 암암리에서 벌어지나, '상명하복'은 애초에 합리적인 명령임이 전제돼야 하는 것이다. 수행할 수 없는 무리한 명령으로 인해 하급자를 다치게 하거나 부상, 사망으로 이르게 하는 것은 명백한 상관의 권리남용이자 징계를 받아야 할 정도의 잘못이다. 그리고 그 잘못에 대하는 책임은 당연히 상급자가 져야 하며 책임지는 것을 거부하면 응당 직무유기가 된다.
위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자신과 상대방을 동일시하는 성향이 있을 때 이 표현은 매우 그럴듯해 보이게 된다. 위 예시에서 '같은 일을 하는 나는 힘들지 않은데, 왜 이 녀석은 힘들다고 불평하지?'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해당 환경에서 더 익숙한 등의 상대적 강자임을 깨닫지 못해서이거나 깨달아도 자신이 안고 있는 부담이 더 커서이다. 여기서 예시를 더 추가해 보면 아래처럼 된다. 아래의 말들이 왜 짜증 나는지가 느껴지면 어째서 위의 표현이 잘못된 것인지를 이해한 것이다.
-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뭘 그렇게 불평이 많은 건지.[4]
- 이런 쉬운 것도 못해? 더 연습해 오든가, 아니면 그만두든가?[5]
- 그래서 취직이나 하겠냐? 나 때는 너처럼 하지 않았어. 취직 못할 거 같으면 그냥 때려쳐.
위의 서술들에서 보이듯이 저 표현은 상당한 비논리적이고 근거도 없이 상대방에게 비난하거나 때에 따라서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무능한 행태이다. 이 논리는 다른 사람마저 좋든 싫든 같은 고통을 모두 받아야 한다는 논리이나, 사실 여태 배울 때는 다 똑같은 고통이 있다고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금수저와 흙수저의 고통의 차이는 다르듯이 사실 고통 평등의 논리 말고 고통 다양성 논리를 적용해야 한다. 모두 다 고통은 있지만 같지는 않다.
고통은 누구에게는 없고 자기한테만 항상 고통과 시련이 온다고 갖가지 푸념을 하는 놈한테는 누구에게나 고통이 있음을 알려주는 건 좋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고통이 있음을 알아도 특히 자기가 제일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이게 매우 당연한 거다.
애초에 다른 사람의 고통을 아는 거로도 대단한 진전을 한 것이다. "너만 힘든 줄 아냐?"는 오히려 그 영광의 순간을 깡그리 밟아버리는 퇴보를 초래한다. 자기가 제일 힘들다는 생각까지 고치려고 하는 건 억지다.
이 문서의 위아래에 적혀 있는 여러 표현들은 논리 쪽에서 힘든 상황이 정당하다는 뜻이면 논리적 오류이다. 그 가운데에 "지금 너만 힘든 줄 아냐?"는 피장파장의 오류이자 원천봉쇄의 오류이다.
논리학적으로 말고도 심리학적으로도 이런 비교가 위로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연구가 있다. 한 예로, 암이나 당뇨와 같은 만성 질환 환자들의 행동을 연구한 결과 자기보다 상태가 안 좋은 사람을 볼 때 오히려 자신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게 되고, 자신보다 상태가 좋은 사람을 볼 때 역시 자신도 좋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 쉽다고 한다.[6]
4. 적용 사례
- 정작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자신 혼자만의 의견을 서열관계에서 하급자에게 강요할 때 이런 표현을 즐겨 쓰는데도 실제로 익명 설문조사를 해보면 상대만 힘든 줄 아는 것 말고 상대만 힘든 줄 모르는 결과가 나오기 십상이다. 이런 표현을 쓰는 사람들이 익명 설문조사를 시행하지 않는 원인은 설문조사 할 때 발릴 것이 분명하므로 권력으로 찍어누르는 것이다. 위에도 언급돼 있듯이 상명하복이란 합리적인 명령을 전제하여야 되는 것이다. 명령이 분명히 잘못되었고, 개선이 필요하지만 자신의 체면 때문에 다수의 고통을 가중하는 것은 벌 받아 마땅한 행위이다. 그러나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사회에는 이런 권위주의에서 비롯된 불합리가 광범위하게 자리 잡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한국군 특유의 병영부조리.
- 2010년대 이후 한국 온라인에 팽배한 무임승차 혐오의 논리와 결합하면 호소력까지 생겨서 부적절한 표현이라고 지적하기도 힘들다. 즉, "다들 묵묵히 참으며 희생하고 있는데 너 혼자만 희생하기 싫고 달콤한 이득만 누리겠다고? 우리가 뭐 안 힘들어서 내색을 안 하는 줄 알아?"와 같이 희생 vs. 꾀병 논리로 접근하는 사례들을 의외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그 관행에는 외국에서는 안 한다든지, 업계 상위 회사에서는 안 한다든지 하는 식의 반례도 매우 많다. 당장에 "지금 너만 힘든 줄을 모른다."라고 말해줄 상황이다. 무엇보다 저 관행 핑계로 벌어지는 부조리와 악습 감추기/합리화하기는 자연주의의 오류이다. 저렇게 따지면 세계적으로 비난되는 아프리카의 여성할례, 중동권의 명예살인도 오랜 버릇이니 괜찮다는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도 된다는 식이 되는데도 그릇된 건 끄집어내고 고쳐야지, 묵인하고 계승할 것이 아니다. 더구나 현대 사회는 사회구조도, 산업구조도, 인식도 많이 바뀌어 있다. 아래는 '내가 해봐서 아는데' 문서에서 발췌한 비슷한 글이다.“배가 고파 남의 빵을 훔친 절도범을 두고,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울 것 없이 공부해서 판사가 된 사람과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라면 하나로 주린 배를 채우며 죽어라 공부해서 판사가 된 사람 중 누가 더 엄한 판결을 내릴 것 같으냐.”'가난한 사람의 심정은 가난한 사람이 알아준다지 않나.' '배고파보지 못한 사람이 남의 배고픈 고통을 알까.'하지만 현실은 대부분 그 반대다.
곧, 부자를 혐오하는 것과도 비슷하게 “'가난한 사람의 심정은 가난한 사람이 알아준다지 않나.' '배고파보지 못한 사람이 남의 배고픈 고통을 알까.'” 부분은 학습된 무기력 등 개구리가 되기까지의 기간에 입은 고통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어떤 상대가 어려워하면서 같은 가난한 사람의 심정이나 남의 배고픈 고통을 알려고 하지 않고 절도 등 요행을 부린다는 희생 vs. 꾀병 논리의 맥락인 셈이다. 한국에는 속담 '곳간에서 인심난다', '흉보면서 닮는다'가 있다.
- 인간극장, 성공시대 같은 부류의 TV 프로그램들도 이러한 맥락으로 기획됐다는 설이 있다. 상황별로는 격려에 사용될 수 있는 말이므로 적절한 타이밍에 사용하면 되레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다만 시중에 나오거나 유명해진 자기개발서들 가운데에서도 이런 것을 노리고 하는 조언을 담은 불쏘시개와 냄비받침 같은 것들이 은근히 많은 건 넘겨두자.
5. 유사 표현
자매품으로는 "북한의 동포를 생각해봐라.", "여기가 싫으면 북한 같은 곳으로 가라."가 있다.6. 관련 문서
- 경로의존성
- 군중심리
- 국가주의
- 권력
- 꼬북이(꼬우면 북한가라 이기야)
- 꼰대
- 노력충
- 노예 근성, 학습된 무기력: 무기력을 학습해서 독려해주지 못하기도 하며, 오히려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 논리적 오류
- 누가 칼들고 협박함?
- 능력주의
-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
- 문화 지체
- 미안할 짓을 왜 하냐
- 보상 심리: '나만 당할 수 없지'식으로 자신이 당했던 부조리를 물귀신처럼 대물림하는 경우.
- 세대 갈등
- 솜방망이
- 수인의무: 본래 헌법상으로 보장되는 의무이지만 실생활에서 종종 꼰대 및 라떼 논리로 악용된다. 특히, 상사가 하급 직원에게 비합리적인 관행으로부터 참으라고 요구할 때에 수인의무 논리를 악용하곤 한다.
- 수평 폭력
- 약한 것은 죄악
- 원칙주의
- 의지박약
- 이 시국에
- 인권
- 일 중독
- 전체주의
-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 좋았던 옛날 편향
- 집단주의
- 프로불편러
- Mamihlapinatapai: 자기는 힘들어도 하는데 남이 불평하니 질투심이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1] 최규석의 만화 송곳을 드라마화한 게 정작 드라마에서 다루고 있는 비정규직, 워킹 푸어의 호응을 불러오지 못한 사례가 있다.[2] 사실상 힘들다고 자유로이 나갈 수 있을 때 나가 버리면 그만이므로 강제적/반강제적으로 노동하는 상황이 아니면 아무 효과도 얻지 못한다.[3] 체격과 체력은 다르다.[4] 단, 이는 루머이며 마리 앙투아네트 본인이 실제로 한 말이 아니다.[5] 주로 대한민국의 연예인 지망생들이 가장 많이 듣는 폭언.[6] 출처 Arigo, D., Suls, J. M., & Smyth, J. M. (2014). Social comparisons and chronic illness: research synthesis and clinical implications. Health Psychology Review, 8, 154-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