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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4-24 18:17:09

김복호

복호(신라)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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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신라의 갈문왕
파호 갈문왕 | 巴胡 葛文王
본관 경주 김씨
복호(卜好) / 보해(寶海) / 파호(巴胡)
부모 부왕 내물 마립간
모후 보반부인
형제자매 김눌지, 김미사흔
자녀 아들 김습보
딸 자비왕의 부인
호칭 파호 갈문왕(巴胡 葛文王)

1. 개요2. 생애3. 사탁부 갈문왕4. 기타5. 가계

1. 개요

신라 초기의 왕족. 성은 김씨. 내물 마립간의 차남, 눌지 마립간의 동생.

복호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이름이고 <삼국유사>에는 보해(寶海)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2. 생애

아버지 내물 마립간의 말년을 보면 백제, , 가야의 삼국 연합군에게 신라가 전격 침공당해 나라가 망하기 일보 직전으로 몰리자 고구려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광개토대왕이 5만 대군을 보내 연합군을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했지만 그 대가로 신라는 고구려의 사실상 속국으로 전락했다. 내물 마립간은 전쟁의 충격으로 몸져 누웠고 그로 인해 392년부터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던 실성이 귀국해 내물 마립간의 아들들을 제치고 화백회의에서 마립간으로 추대되었다. 실성은 고구려에서 오래 지냈던 사람이니만큼 실성 마립간은 사실상 친고구려파라고 볼 수 있다. 실성 마립간 시대에 복호는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졌는데 사실 실성 마립간은 전왕의 아들들이 유사시 어떻게 돼도 자기 사람도 아니고 별 상관 없었으니 고구려에 복종 의사를 표현하며 인질 핑계로 신라 밖으로 내쫓아 숙청한 거라고 봐야 할 듯 하다.

그러다 실성 마립간이 16년 만에 죽고 형 눌지가 즉위하자 눌지 마립간은 친동생인 복호를 빼내오고 싶었는데 복호가 고구려에 있으면 신라를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계속 고구려 눈치를 봐야 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결국 박제상을 시켜 계략을 써서 빼 왔으며 빼 오는 방법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다른데 <삼국사기>에서는 장수왕을 찾아가 말로 설득해서 데려왔고 <삼국유사>에서는 고구려 추격군의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몰래 빼 왔다. 박제상은 이어서 일본에 인질로 가 있던 다른 동생 미사흔[1]도 데려오다가 일본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이후 파호 갈문왕으로 추증되었으며[2] 왕에 오르지 못했지만 손자인 지증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이후 수 백년 신라 왕가의 중시조가 된다. 김복호의 조카인 자비 마립간왕비 중 1명의 아버지가 <삼국유사>에서는 파호 갈문왕으로 나오는데 일반적으로 소지 마립간의 어머니는 다른 1명인 미사흔의 딸로 여겨진다. 여기서 김복호가 파호 갈문왕으로 추증됐음을 알 수 있다.

3. 사탁부 갈문왕

현대 역사학계와 고고학계에서는 5~6세기 신라 6부 체제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법흥왕 시대까지도 신라 왕은 6부에 속한 각 왕들의 수장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고, 갈문왕도 엄연히 6부의 1부를 관장하던 수장으로서 부왕(副王)급 위세를 누린 것이 확인된 데다, 손자인 지증왕이 사탁부 갈문왕임이 확인되면서 실제로는 사후 추존된 것이 아니라 신라로 복귀한 뒤에 6부의 일원인 사탁부 수장인 갈문왕으로 부왕급 지위를 확보한 것으로 보고 있다.

눌지 마립간-자비 마립간-소지 마립간이 탁부 매금왕 자리와 신라 왕을 겸하던 상황에서 소지 마립간이 벽화부인 논란으로 사탁부의 지도로 갈문왕(=지증왕)에게 쫓겨나고 사탁부 갈문왕인 지증왕에게 6부의 수장직인 신라 왕위를 빼앗긴 것으로 본다. 소지는 벽화부인과의 사이에서 유복자이자 서자밖에 없었기 때문에 지증왕 사후 탁부 매금왕의 자리는 장남인 법흥왕에게, 본래 지증왕이 차지하던 사탁부 갈문왕 자리는 차남인 입종갈문왕에게 넘어갔다. 이 때문에 법흥왕 대까지도 국내 사안 논의를 위해 6부에 속한 간들을 6명 이상 불러내어 논의하는 모습이 확인되며 그 과정에서 사탁부 갈문왕인 입종 갈문왕의 존재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법흥왕에게는 아들이 없어 법흥왕은 자신의 딸인 지소태후를 동생인 입종 갈문왕에게 시집 보냈고, 그 과정에서 태어난 진흥왕이 탁부와 사탁부의 수장직을 겸임하면서 신라 왕권이 하나로 합쳐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흥왕은 단순히 탁부-사탁부 수장직을 겸하는 것을 넘어 전륜성왕 개념을 도입해 6부의 수장직의 일원이 아니라 6부 전체를 초월하는 지위를 구축하였고, 그 과정에서 탁부와 사탁부의 수장들은 전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6부가 이런 부족연합적 체제를 완전히 정리하고 단순 행정구역으로 변모하는 건 성골 석가족(釋迦族) 관념을 통한 군주의 신격화가 가장 극대화되었던 진평왕 시기로 여겨진다.

이 점은 5~6세기 신라 왕들의 혼인관계로도 확인된다. 이전에는 5~6세기 왕비들이 신라 특유의 동성혼과 근친혼 관념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았지만, 실제로는 6부 관념이 있던 진평왕 때까지만 해도 '각 부의 수장家'라는 점에서 기인한 외부혼(外部婚)이었고, 내물 마립간의 후손들이 탁부-사탁부 수장직을 독점하면서 결과적으로 동성 근친혼이 일어났다고 본다. 신라 6부는 처음에는 탁부(박씨), 본피부(석씨), 한기부(김씨)의 3부에서 시작되었고 탁부에서 사탁부와 잠탁부(모량부)가, 본피부에서 사피부가 분화되어 6부가 된 것으로 보는데, 이중 잠탁부와 사피부는 6부 중에서도 왕경 외 관할에 속하며 잠탁부는 늦어도 지증왕 대 박씨 족단의 근거지임이 확인된다.

김씨 족단의 최초 거점은 한기부였지만, 막상 신라 김씨 왕조의 직계 조상인 구도갈문왕은 이칠 갈문왕의 딸 술례부인 박씨와 혼인했고, 구도 갈문왕의 친증손자이자 손녀사위인 실성 마립간[3]은 탁부 소속으로 확인되며, 실성은 손위 동서였던 내물 마립간 사후 내물의 아들들을 밀어내고 왕위에 올랐고 실성의 사위가 된 내물의 장남 눌지 마립간이 장인인 실성을 죽이고 왕이 된 점과 눌지의 직계인 자비-소지가 탁부 매금왕을 겸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시조인 구도는 한기부에 들어간 다른 김씨 족단과 달리 모종의 이유로 탁부에 들어가 탁부 수장직을 박씨 족단에게 물려받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후 잠탁부(모량부)가 박씨 족단의 근거지가 된 점과 구도계 김씨와의 근연관계, 사탁부도 탁부에서 갈라져 나왔고 복호계가 수장직을 장악하는 등 탁부-사탁부-잠탁부간의 밀접한 관계를 확인 가능하다.

이런 3부들과의 관계를 보면 5~6세기 당시 신라 왕들의 혼인관계를 더 직관적으로 이해 가능하다. 눌지의 아들인 자비 마립간은 제1왕비로 사탁부 갈문왕인 복호의 딸과 혼인했고, 이후 미사흔의 딸을 제2왕비로 삼았다. 자비의 두 아들이 먼저 죽어 미사흔의 딸과의 사이에서 늦게 태어난 소지 마립간이 즉위하였고,[4] 소지 마립간 또한 아버지를 따라 제1왕비로 복호의 아들인 습보의 딸을, 제2왕비로 미사흔의 아들인 내숙의 딸을 들였다. 이를 통해 당시 탁부 매금왕은 대대로 사탁부 갈문왕을 제1왕비로 들이며 서로간의 연합을 공고히 다져 6부 안에서도 탁부-사탁부 연합체제의 절대적 우위를 구축해갔던 것으로 보인다.[5] 그러나 소지 마립간이 두 왕비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못 가지고 '고구려 고지'인 영주시 출신의 벽화부인을 첩으로 들여 벽화부인이 아이를 임신하자 이에 위기를 느낀 신라 중앙 정권에서 소지를 날렸고, 이를 통해 사탁부 갈문왕인 지증왕이 신라 왕이 된 것으로 본다.

이후 탁부 매금왕의 자리는 눌지계의 몰락으로 인해 지증왕의 장남인 법흥왕에게 넘어갔고 지증왕이 원래 가지고 있던 사탁부 갈문왕 자리는 차남인 입종갈문왕에게 넘어간다. 법흥왕 시기 6부에서는 탁부-사탁부의 절대적인 우위가 확인되지만 아직 6부 체제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6부의 일원이라는 신라 왕의 한계도 극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대아찬 관등이 법흥왕 시기에야 나타나는 등 본래 골-5두품이었던 시스템이 성골-진골-6두품-5두품으로 지배집단이 세분화되는 양상을 보이지만,[6] 이런 상황을 넘어서기 위해 법흥왕은 불교를 도입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지만 정작 법흥왕에게 아들이 없어 그 프로젝트에 애로사항이 생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법흥왕은 자신의 딸인 지소태후를 사탁부 갈문왕인 입종 갈문왕에게 시집보냈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외손자이자 친조카인 진흥왕에게 신라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를 기반으로 진흥왕은 전륜성왕의 개념을 도입하며 비로소 신라 왕은 6부 수장의 일원이 아닌 6부를 초월한 독자적인 지위를 가지게 되었고, 성골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작동한 것도 이 즈음부터 보고 있다. 신라가 본격적으로 성씨를 사용하고 6부 6성이 나타난 것도 이 즈음이니 그 중요성은 매우 크다. 진골들의 힘이 너무 강해지는 걸 우려해서 왕궁 근위대에서 서라벌 출신들을 배제하고 추풍령[7]-죽령[8] 출신만을 배타적으로 받아들이는 등의 특이점도 두드러지는데, 이 점 또한 왕권 강화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9] 그러나 장남인 동륜태자가 진흥왕보다 먼저 죽으면서 차남인 진지왕이 즉위했고, 진지왕은 삼국유사도화랑-비형랑 설화처럼 모종의 스캔을 벌여 평판이 급격히 나빠진 탓에 4년만에 폐위당하고 동륜태자의 장남인 진평왕에게 왕위가 넘어간다. 이후 진평왕은 석가족 개념을 대대적으로 도입하여 성골의 개념을 가장 극단화시켰고, 52년이라는 긴 재위기간 덕분에 기존의 6부 체제를 완전히 해체하고 이후 6부는 서라벌의 행정구역으로 재편된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은 사탁부와 잠탁부와의 혼인관계이다. 탁부 매금왕이 사탁부 갈문왕의 딸을 대대로 부인으로 들였듯이 사탁부 갈문왕인 지증왕은 모량부 소속인 연제부인을 왕비로 들였고, 지증왕의 즉위 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법흥왕은 탁부 매금왕이 되기는 해도 사탁부 시절의 영향으로 모량부인 보도부인을 왕비로 맞았고, 아버지가 사탁부 갈문왕(입종)인 진흥왕도 그 전례에 따라 모량부인 사도부인 박씨를 왕비로 삼았으며, 진흥왕의 차남인 진지왕의 처 지도부인도 모량부 박씨, 진평왕의 차비 승만부인도 손씨(모량부)이다. 반면에 진흥왕의 장남인 동륜태자는 고모인 만호부인 김씨와 혼인했고 진평왕의 정비 마야부인은 복승 갈문왕의 딸 김씨인데, 이는 과거 탁부 매금왕이 사탁부 갈문왕의 딸과 혼인한 전례의 연장선으로 동륜태자가 사탁부 갈문왕(입종)의 딸인 만호부인과 혼인한 것으로 보이며, 진평왕의 정비 마야부인도 복승 갈문왕의 딸 김씨로서 이런 전례를 따라간 것으로 보인다. 승만부인 손씨는 6두품인지 아니면 박씨가 잘못 기록된 것인지 논란이 있지만 모량부 출신임은 확실하기에[10] 모량부와의 혼인 전례를 따라간 것을 확인 가능하고, 진평왕의 동생인 김국반의 처 월명부인 박씨도 이런 전례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기존 6부가 해체된다고 해도 고대 사회의 관습상 이런 6부의 혼인 전례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3성(姓) 6부(部) 체제가 본격적으로 확립되었던 4세기 혼인관계도 이런 6부 체제로 보면 5세기 탁부-사탁부 혼인관계와 유사점을 확인할 수 있다. 4세기 초반~후반 구도갈문왕-미추 이사금-내물 마립간으로 이어지는 '구도계 탁부 김씨'는 구도가 박씨인 이칠 갈문왕의 딸 술례부인 박씨와의 혼인을 기점으로 성립되었다. 미추는 골정계 석씨인 광명부인과 혼인했고, 아들이 없어 조카인 내물 마립간과 종손인 실성 마립간을 사위로 삼았다. 이후 탁부 수장직을 두고 내물계와 실성이 나뉘어 일시적으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지만, 내물의 장남인 눌지 마립간이 실성을 죽이고 탁부 매금왕직을 장악한 뒤 실성의 딸 차로부인의 아들인 자비 마립간의 상속으로 양측의 대립은 마무리되고 이후 탁부-사탁부 갈문왕가의 혼인으로 이어진다. 4세기 구도계 김씨는 내부 분열로 인해 이를 봉합하는데 집중해야 해서 다른 부와의 관계가 그리 두드러지지 않지만, 파사 이사금-지마 이사금일성 이사금-아달라 이사금,[11] 기림 이사금, 흘해 이사금이 고고학적으로 4세기 초반~후반에 걸쳐 활동한 것이 확인되면서 이들간의 혼인관계도 단순한 근친혼과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파사-지마계 박씨는 4세기 초반 충주 금릉동에서 사로국으로 이주하면서 김씨 족단의 첫 근거지가 된 '한기부 김씨'와 연달아 혼인하고, 일성-아달라계 박씨는 '박씨왕의 딸'과 연달아 혼인하기 때문에 5세기 탁부 김씨왕이 사탁부 김씨왕-미사흔계 김씨와 겹사돈한 것과 유사한 상황이었던 듯하다.

3~4세기 석씨 왕조는 사서에서 벌휴 이사금의 장남 골정계와 차남 이매계의 분열이 상세히 묘사되고 본피부-사피부가 처음에는 석씨 족단의 근거지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사서에서 본피부가 한 번 망해서 신문왕 대 재건되어 사탁부의 김유신 또는 김인문계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보아 3~4세기 석씨 족단은 대체로 골정계와 이매계가 1부씩 장악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3세기 골정계와 이매계는 자신들끼리 혼인하며 5세기 탁부-사탁부 김씨가 그랬듯이 석씨 족단의 힘을 집중시켜 신라 왕위를 장악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4세기 초~중반에 접어들어 골정계(골정-조분 이사금-걸숙-기림 이사금)[12]는 구도의 딸 옥모부인이 조분에게 시집 가거나 미추가 조분의 딸 광명부인과 혼인하는 등 구도계 김씨와의 겹사돈으로 방향을 틀었던 것으로 보이고, 반면 이매계(이매-내해 이사금-석우로-흘해 이사금)는 여전히 골정계와의 혼인을 고수하는 양상을 보인다. 5세기 탁부-사탁부 김씨 시절 탁부 눌지계가 사탁부 복호계와 불명인 미사흔계와의 겹사돈만 고수한 반면 사탁부 복호계는 잠탁부 박씨와 겹사돈하는 방향성으로 빠진 것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부분이다.

이런 6부 특유의 외부혼 관습은 성골-진골 관념이 완전히 뿌리내리는 진평왕의 자식 대에 이르러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신라의 동성혼, 근친혼 풍습으로 재편된다. 성골 내에서만 혼인이 허락되어 숙부인 음갈문왕과 혼인했다가 사후 재혼하지 못한 선덕여왕과 성골 남자의 씨가 말라(聖骨男盡) 평생 독신이었던 진덕여왕, 진지왕의 아들 김용수와 진평왕의 딸 천명공주[13]의 아들인 김춘추비담알천을 밀어내고 왕으로 즉위하고, 김춘추의 처 문명왕후금관국 구형왕의 증손녀이자 숙흘종(진흥왕의 동생)의 외손녀인 문명왕후와 혼인,[14] 문무왕의 처 자의왕후는 진평왕의 3남 김구륜의 손녀,[15] 이후 신라 중대 특유의 이혼+재혼 풍습과 말대까지 이어지는 근친혼+동성혼 풍습으로 완전히 바뀌게 된다.[16]

4. 기타

이기환 기자는 호우명 그릇이 415년 제작되었고, 복호가 고구려에서 신라로 귀국한 것이 418년이므로 이 때 가져왔고, 호우총복호의 무덤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5. 가계



[1] 미사흔도 복호와 마찬가지로 실성 마립간이 보냈다. 최대 정적인 3형제가 어떻게 되든 별 상관이 없으니까 일본에 선심쓰는 척 하면서 쫓아낸 것이나 마찬가지.[2] 파호 갈문왕이 김복호와 미사흔 둘 중 누구인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김복호와 동일인이라는 학설이 유력하다고 한다.[3] 구도-???-대서지-실성 / 구도-미추-아류부인.[4] 지증왕이 소지와 6촌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소지보다 한참 나이가 위인 건 여기서 기인한다.[5] 미사흔은 '각간'이라고만 나오기 때문에 1부의 수장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나, 미사흔의 증조부인 거칠부의 위세나 법흥왕 시절 '7명의 왕'이라는 언급, 양산을 근거지로 둔 박제상이 간(干) 소리를 들은 걸 보아 1부 수장은 못 되어도 6왕에 준하는 위치였던 듯하다.[6] 원래 5두품은 진한 수장국이었던 사로국이 진한의 각 소국을 자신의 직속으로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진한의 각 지배층 가문들을 5두품으로, 그 가신 가문들을 4두품으로 편성한 것이 기원으로 보고 있다. 즉 5두품은 사다리 걷어차기를 당한 것.(...)[7] 5세기 눌지계의 친위 세력이었다가 지증왕계 교체 이후 지증왕으로 편을 갈아타서 여전히 친위세력 노릇을 했다.[8] 습보계의 친위 세력. 지증왕계가 신라 왕위를 장악하면서 그대로 친위세력이 되었다.[9] 이렇게 대대로 친위대 노릇을 하던 죽령-추풍령 5두품 호족들이 수백 년간 이어진 사다리 걷어차기에 질려서 견훤을 위시로 한 후백제로 이탈하고 서라벌 기습으로 신라를 멸망으로 몰아넣게 되고, 본래 김씨 족단의 친위대로 육성되었던 이들 세력은 후삼국시대 박씨 족단으로 교체된 신라 왕위를 김씨 족단에게 돌려주는데 일조하기도 했다.(우연이 아니라 실제로 서라벌 내 김씨 족단과 협조한 것으로 본다) 그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10]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손씨는 모량부의 6두품에게 주어진 성이다.[11] 사서에서는 파사-일성이 친형제로 나오지만 당시 기록의 모순부터 고고학적으로 유리 이사금의 활동 시기가 파사-일성의 아버지라기에는 지나치게 커서 종형제일 가능성이 더 높다. 고구려 태조대왕-차대왕-신대왕이 그 예시. 사서에서 일성을 파사의 형이라 하면서도 일성의 재위기간을 파사보다 뒤에 배치한 것과 일성의 고고학적 활동 시기가 파사보다 조금 뒤인 것을 보아 자비 마립간-지증왕처럼 일성의 선대는 파사의 선대보다 연상이지만 일성은 파사보다 연하였던 듯하다.[12] 유례 이사금은 석씨인 것만 확실하지 정확한 가계는 불명이라 제외.[13] 공교롭게도 둘 다 서자/서녀설이 진지하게 제기되는 인물들이다. 김용수는 비형랑 동일인물설이 진지하게 제기되고, 천명공주는 선덕여왕&진덕여왕과 달리 성골 남자의 씨가 마른 상황에서 무슨 이유이든 간에 진골이었던 용수와 혼인해서 진골인 김춘추를 낳기 때문.[14] 비형랑의 어머니 도화랑이 사량부(사탁부) 출신의 서녀(庶女)라 전해지는 점과 당시 구형왕계도 사탁부 소속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아예 무관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관습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게 아니기 때문. 문명왕후는 김유신이 온갖 난리를 쳐서 결혼시킨 거라 논외긴 하지만.[15] 구륜의 어머니가 소비 부여씨로 추정되기 때문에 신라 왕위와 상대등직에서 밀린 가계로 추정된다.[16] 혼인 풍습이 하루아침에 바뀐 게 아니라 수차례에 걸쳐 천천히 변모해간 것을 알 수 있다.[17] 고구려에서 결혼했을 가능성이 있다. 손자인 지증왕이 437년생이므로 그 아버지인 습보 갈문왕이 아주 어린 15세에 아들을 봤다고 가정하면 423년생이 되고, 실제로는 그보다 더 일찍 태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복호가 고구려에 체류했던 시기는 삼국사기 기준 412~418년, 삼국유사 기준 415~422년으로, 습보가 태어났을 시기와 겹친다.[18] 정사에는 습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가 나와있지 않고 단지 내물왕의 손자라고만 적혀있다. 습보의 아내 조생부인이 눌지왕의 딸이므로 습보가 눌지의 아들일 가능성은 작다. 미사흔은 어린 나이에 왜로 갔다가 418년에야 귀국해 박제상의 둘째 딸과 결혼했는데, 그런 미사흔이 437년에 손자 지증왕을 얻었을 가능성도 작다. 따라서 습보의 아버지를 복호로 봄이 일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