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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1:20

극좌/각국의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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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각 지역과 국가에서 나타나는 극좌파들의 사례를 언급한다. 대륙-국가 순으로 가나다순으로 정렬한다.

2. 아시아

2.1. 대한민국

6.25 전쟁의 경험과 북한의 각종 도발, 주체사상파의 영향으로 극좌와 종북주의가 동의어라는 인식이 강하다. 다만 2020년대에는 과거와 달리, 이러한 인식에 동조하지 않는 부류, 동조하는 부류로 명확히 나뉜다. 하지만 간첩이 자주 내려오던 시대를 겪던 세대가 실존했었기에, 이러한 프레임은 쉽게 먹혀 들어갔고, 때문에 극좌라는 표현은 종북과 연계되어 사용되어 왔다.[1] 허나 반대측에선 오히려 종북주의적 시각이 극우랑 궁합이 잘 맞는 왜곡된 민족주의를 강요하기에 종북주의자를 극우라고 욕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상 정부의 정책과 방향성을 지적하고 반대하는 부류는 그 수가 무궁무진하고 성격 또한 다양하기 때문에, 사실상 극좌/극우 프레임으로 묶어버리기엔 무리가 있음에도 아직까지 널리 쓰이고 있는 프레임인 것이다.

과거 행적을 보면 극좌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은 극도로 부정적이다. 남북 분단이 고착화된 후에는 극좌로 '분류'되는 정치세력이 6.25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한국의 극좌파 정치세력이 당시 해방 공간의 극좌파로부터 바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며[2], 중간에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권을 거치면서 오랫동안 극좌 정치운동 자체가 금지되었다가 1987년 이후에 와서야 부분적으로 다시 극좌파 정치활동이 합법화된 관계로 중간에 맥이 끊겼으며,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분화하였기에 과거 행적이나 일부 정파의 주장 때문에 전체를 싸잡아 종북이나 스탈린주의 집단으로 매도하는 것은 부당하다. 모든 우파를 친일파라 할 수는 없는 것과 같다.[3]

그러다보니 세계적인 기준에서 극좌로 평가 받을 만한 집단은 원내정당에선 전무하고, 단체도 거의 궤멸상태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그 극좌 중에서도 주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같은 이념적으로 엄밀한 글로벌 맥락에서 극좌보다는 매우 강경한 친북, 좌익민족주의 성향을 보이는 분단 현실상의 '반체제 세력'에 동조하거나 과도하게 우호적인, 분단 현실상 극단적인 좌파로 간주될 수 밖에 없는 이들이 거의 대다수이다.

2.1.1. 운동 단위 및 단체들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운동 단위는 크게 좌익 내셔널리즘 및 주체사상, 스탈린주의, 범(汎)트로츠키주의, 좌익공산주의 계통이 있다.

내셔널리즘이나 주체사상 등에 영향을 받은 단체로는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범민련)가 있다. 그야말로 주사 NL 중에선 가장 액기스라 할 수 있는 단체인데, 일단 북과 실제로 교류하고 있으며, 가장 강력한 반미 실천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극좌로 분류된다. 민족 통일, 반미로 인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내부 구성원들도 사회주의 경제를 부정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북의 정치, 경제 체제가 발전된 양식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마냥 단순힌 민족주의 단체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나 발행하는 글을 보면 대부분이 북에 대한 찬양, 북과 관련된 사상 찬양으로 도배가 되어있기에 이론적으로 어떠한 정교함을 갖추고 있는지 알 길은 없다. 이와 관련된 정당으로는 진보당민중민주당이 있는데, 진보당은 사실상 짬뽕이 된 지 오래라서 명확한 극좌 정당이라고 하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한다. 그리고 민중민주당은 견해가 범민련과 별 차이가 없다.

스탈린주의 단체로 노동사회과학연구소(노사과연)[4][5], 전국 노동자 정치 협회(노정협)[6]가 있다. 두 단체는 범트로츠키주의 단체와 달리 북한에 대해서 명백한 옹호의 입장을 취하며, 각국 민족주의자들의 반식민지 운동[7]을 적극 지지하며, NL/PD 이분법에 반대하고, 계급 모순과 민족 모순을 통일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심지어 이 단체들은 사드 반대 투쟁에도 열성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이것은 스탈린주의를 올바르게 이해했을 경우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긴 하다. 두 단체는 교조주의가 강해서 스탈린 시절 행해진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에 대한 교조화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이단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범(汎)트로츠키주의 단체로는, 흔히 정통 트로츠키주의라 오해받지만 사실은 중도좌익적인 클리프주의에 가까운, 국제사회주의(IS) 계열의 노동자연대[8][9]가 있으며, 정통 트로츠키주의를 추구하는 볼셰비키그룹[10][11], 노동운동 현장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혁명적 노동자당 건설 현장 투쟁 위원회(노건투)[12]와 현장을 기반으로 노동자 권력 수립을 추구하는 사회주의 전위당으로서 사회변혁노동자당(변혁당)[13]이 있었다.

유럽공산주의와 좌익공산주의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받은 단체로는 활동가 조직인 노동해방실천연대[14]와 사회주의 선전 매체이자 활동가 단체이기도 한 사회주의자[15]가 있다.

극좌보다는 중도좌파에 가까운 단위로는 전국학생행진과 그 출신 활동가들의 조직인 사회진보연대[16]를 들 수 있다. 이 단체는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68혁명의 영향을 받은 루이 알튀세르, 안토니오 네그리 등의 신마르크스주의에, 역시 68혁명의 영향으로 서구적 시각에서 재해석된 마오주의 노선을 따르고 있는데, 마오주의는 흔히 극좌파로 분류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단체가 마오쩌둥 사상을 채택했다고 말할 수 없다. 결정적으로 이 단체들의 활동 방향이나 견해를 보면 의회 노선을 주장하고, 민주당계 정당도 때에 따라서는 비판적 지지까지 가능하다는 흐름이기에 혁명과 근본적인 변혁을 추구한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일반적인 중도좌파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 엄연히 반자본주의와 반신자유주의 노선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중도좌파라고 하기 어려우며, 동시에 극좌파로 분류하긴 애매하기에 좌파로 분류된다.

여러 입장을 가진 노동 운동가가 공존하는 단체로는 현장실천 사회변혁 노동자 전선(노동전선)[17]이 존재한다.

아나키즘이나 생태주의를 주장하는 극좌는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 나름의 호응을 얻고 있고 생태주의의 경우 정당도 있으나, 대중들에게 존재감은 극히 미미하다. 녹색당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 게다가 녹색당은 일반적으로는 중도좌파~좌파 정당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선거 때만 되면 많은 기타 원외 정당들이 쏟아져나오는데 원내에 진입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편이다.

여담으로 20세기 초 동아시아에서는 아나키즘과 사회주의가 (민족주의까지 짬뽕 되어서) 그냥 뒤섞여서 수용되었다. 한국, 중국, 베트남은 민족해방과 독립투쟁을 위해서 받아들였고, 일본은 당시 제국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현실 변혁을 위한 수단으로 수용했다.[18] 이들의 구분이 명확해진 것은 1920년대 무렵 소련의 영향을 받아 각국에서 공산당이 생겼을 때이다.

이때부터 사회주의와 아나키즘 세력은 결별하게 되는데, 재일조선인으로 구성된 사회주의운동단체 '흑도회'나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을 표방한 예술단체 '카프'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들 단체가 결성할 당시에는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자들이 공존했으나, 이후 아나키즘과 사회주의가 구별되고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자들간 대립이 본격화되면서, 사회주의세력은 아나키스트들에 대해서 "극좌", 아나키스트들은 사회주의자들을 "권위주의자"라고 비판하게 된다.

2.2. 북한

엄연히 사회주의 국가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원칙에 기초한 주체사상을 국가와 당의 이념으로 하다가, 김정은 시대에 김일성-김정일주의라는, 사실상의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동렬의 체계를 국가 이념화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벗어났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유화 수준이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적으로도 상품 경제 외 가치 이론이 적용되지 않는 사회라는 점에서 북한은 엄연히 사회주의 국가라는 것이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치경제론자들의 일반적인 입장이다.

일각에선 북이 2009년에 헌법에서 공산주의를 삭제했기에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하는데, 애초에 1972년 이후 사회구성체 자체가 공산주의 단계는 아니며, 사회주의 단계라는 점에서, 공산주의 문구를 삭제했다고 하여 마르크스주의적 도식 사관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심지어 2009년 이전 헌법에 공산주의라는 용어는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19]

다만 국제적으로 극좌라는 의미에 부합하는 국가이긴 하지만, 북한 내에서는 '극좌'나 '좌파'라는 단어는 매우 부정적인 용어로 쓰이고 있다. 북에서 극좌란 용어는 '좌경맹동주의'[20]를 뜻한다. 다시 말해서 북한에서 '극좌'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는 주로 '아나키즘' 관련 단체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상을 지닌 좌익단체를 비판할 때, '극좌적 모험주의'라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국외의 단체를 가리킬 때의 경우에 한하며, 국내의 경우에는 대체로 좌경적 모험주의라는 표현을 쓴다. 과거 숙청 시 죄목으로 언급되거나, '좌경적 모험주의를 배격하자'와 같은 구호로 사용된다. 사실상 좌익과 우익 모두를 비판한다. 하지만 이 단어 역시도 그리 자주 사용되진 않는다. 대신 '종파주의'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한다. 김일성은 과거 정적들을 제거할 때도 '8월 종파사건'처럼 '종파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종파주의'는 '반당적'이고 '반혁명적인' 것으로, '극좌적 모험주의'보다는 '개인주의' 같은 '우익'의 의미에 가깝다. 즉 김일성과 당의 통일된 뜻에 반대하여 사사로이 파를 만든다는 의미이다. 6.25 전쟁 전후로 숙청된 박헌영이나 리승엽도 '간첩'이나 '반역자' '반혁명분자'라는 죄목으로 제거되었다.

유일 사상 체계인 북한에서 김일성-김정일주의가 아닌 다른 일체의 사상은 금지된다. 그런데 김일성-김정일주의도 결국은 스탈린주의의 아류라는 점에서 극좌라고 보는 것이 옳다.

2.3.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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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0월, 일본의 국제 반전데이 투쟁(일명 '신주쿠 소란 사건')[21]
일본 제국 시절에는 사실상 반정부/반체제관련 사항은 대부분 극좌로 분류되었다. 가령 30년대 일본 정부의 자료들을 보면 3.1 운동이나 6.10 만세 운동 같은 독립운동들을 '극좌세력이 주도했거나, 극좌세력의 난동'식으로 언급하며, 이 날을 '극좌세력의 기념일'로 분류하고 있다. 이러한 반체제운동을 탄압하기 위해서 제정된 것이 치안유지법.

20년대말~30년대초까지만 해도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는 사회주의자들이나 아나키스트들이 활발하게 활동했었고, 전국적인 규모의 노동조합 조직도 탄생했었다. 특히 5월 1일 노동절만 되면 대규모 행사가 거행되었으며, 이를 막으려는 경찰의 대규모 탄압과 검거작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일제가 본격적인 군국주의의 길을 걸으면서, 극좌세력과 극좌운동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그러다 전후 치안유지법이 폐지되면서 다시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일본공산당도 합법화되었으며, 이들은 무장투쟁을 기치에 걸고 선거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레드 퍼지를 비롯한 탄압과 공산당의 선거 참패 등으로 인하여, 일본 공산당은 무장투쟁 노선을 폐기했고 극좌운동은 침체기를 맞이하는 듯 했다.

그러던 가운데 1950년대 말에 이른바 "과격파" 라고도 불리는 일본 신좌파[22] 세력이 등장하고, 이들에 의해서 '분트(공산주의자동맹)'와 '혁공동(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이 결성되면서 극좌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주로 '민주주의 분쇄'[23], '오키나와 반환'[24] 등의 구호를 내걸며 운동을 전개했으며, 이러한 운동은 안보투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안보투쟁이 사실상 실패로 끝나면서 분트는 분열되었고, 전공투와 같은 학생운동단체와 적군파를 비롯한 무장혁명세력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전공투의 과격시위와 적군파, 중핵파, 혁마르파 등의 무장게릴라들의 연이은 병크, 그리고 하라는 시민운동은 안 하고 깡패들마냥 신좌파/아나키즘 세력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패싸움이나 해대는(...)[25] 등의 사회적인 어그로를 끌어 극좌세력에 대한 검거작전을 낳았으며, '극좌'뿐만 아니라 사실상 '좌익' 전반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이 악화되었다.[26] 이에 따라 일본의 극좌세력과 극좌운동은 침체일로를 걸으면서 오늘날에 이르게 된다.

일본에서 신좌파라 불리는 극좌 단체는 이전에 비해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현존하는 단체는 다음과 같다.

한편 일본사회당, 사민당은 극좌가 아니다.

2.4. 중국

마오쩌둥은 기본적으로 농촌을 매우 중요시 여겼고 농촌을 토대로 한 공산혁명을 꿈꿨다. 또한 공산당이 집권한 만큼 최종적으론 국가와 군대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 마르크스주의를 계승하여 인민해방군 같은 용어를 쓰기도 한다.[28]

50년대 말 농촌의 자립과 발전적인 실현을 위하여 '대약진 운동'을 벌이지만,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로 인하여 온건 세력이 대두되었으나, 본인이 권력에서 밀려나는 것을 경계한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뒤에서 선동한다. 이 역시도 분명 목표만 보면 '이타주의적이고 자기희생적인 새로운 사회주의 문화 창출'이라는 명목이 있었지만, 역사적인 피해를 입히고 만다. 이러한 연이은 대실책과 함께, 중국 공산당 내 극좌세력은 몰락하게 된다.

이후 덩샤오핑이 집권하며 '선부론'적인 입장에 따라 자본주의적 요소가 도입되면서, 현재의 중국은 더 이상 '극좌국가'로 볼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정치적 측면에서는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며, 현재의 상태는 언젠가 실현될 '공산주의'를 위한 중간 단계라고 언급하기는 한다. 일단 형식적일 수 있지만, 중국의 자본주의 도입은 '선부론'의 입장이다. 즉 먼저 부자가 된 다음에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는 것. 현재 중국은 자신을 '사회주의 초급단계'로 규정하고 있고, 어느정도 수준에 도달하면 자본주의적 요소를 버리고 공산주의 혁명을 실현시켜야 한다고 이야기하긴 한다.

아울러 중국이 자본주의적인 요소를 도입하긴 했지만, 여전히 사회주의적 경제 체제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가령 토지는 '국가의 소유'로 개인과 기업에게는 '사용권'만 주어지며 '사용료'를 국가에 지불해야한다. 사유재산의 경우에도 2007년 물권법이 제정되면서 비로소 '개인이 합법적으로 취득한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하고 이를 법률로 보장하게 되었으며, 그나마 이 법률 자체도 기본적으로 공유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또 당연히 아나키즘 계열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따라 '극좌주의'는 비판 용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정통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모범적인 사회주의 혁명 단계로 간주하기 때문. 예를 들어 문화대혁명 이후 이를 흑역사화 하는 과정에서 이것은 극좌로 간주했다. 막상 4인방을 위시로 한 문혁 숙청자들은 우파(?)로 간주했지만.

개혁개방 후 발생한 중국 내의 노동착취나 심각한 빈부격차 문제로 인해 일부 마오이스트들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다시 인기를 얻고 있기는 하다. 위의 문혁 당시 홍위병 출신 중에선 지금도 자신들이 옳았다고 생각한다고 대놓고 인터뷰하는 사람도 있다.[29]

2010년대 후반에는 마오주의 시절이 평등했다고 생각하는 중국인들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며 베이징대 졸업생이며 빈민 아동들을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하던 마오주의자 장위판이 구금되었다.

2.5. 인도

마오주의 무장 반군 세력인 낙살라이트가 활동하고 있다. 카스트 완전 철폐를 내세우며 빈농이나 불가촉천민의 지지세를 얻어 게릴라전과 테러로 저항하고 있다. 그러나 과격 노선으로 인해 제도권 정당인 인도 공산당인도 공산당(마르크스주의)와는 오래 전에 연을 끊다시피했다.

2.6. 네팔

네팔 공산당(마오주의 센터)은 2008년 왕정 종식과 공화정 수립에 기여했으며, 극좌 정강을 유지하면서도 다당제를 지향하여 여타 공산주의 정당들과 다당제 하에 선거를 통해 번갈아가며 집권하고 있다.

2.7. 쿠르디스탄

쿠르디스탄 노동자당튀르키예, 이란, 이라크, 시리아 일대에서 활동 중이다.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무장 반군/분리주의 세력이다.

2.8.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하며, 무장투쟁과 분리주의, 혁명적 사회주의를 추구한다. 여기에서 갈라져 나온 팔레스타인 해방민주전선(DFLP)는 마오이즘을 표방한다.

PFLP와 DFLP 둘다 세속주의도 추구하여 이쪽의 여성들은 히잡을 강요하지 않아 서구적으로 꾸민 여성들이 많다. 이쪽은 여성 대원이 다른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보다 더 많다. 유명한 여성 게릴라이자 테러러리스트인 레일라 칼레드가 여기 소속이다. 골수 이슬람주의인 하마스도 이점을 마음에 안들어하지만 우군 하나가 절실하다보니 이쪽의 세속주의는 어찌 못하고 묵인해준다. 파타야 세속주의라서 큰 문제없지만. 여담으로 PFLP는 팔레스타인 내 제3당의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과거에 여러차례 PLO를 보이콧하기도 했으나 현재는 PLO와 연대한다. 그리고 DFLP는 2006년 총선에서 팔레스타인 인민당, 팔레스타인 민주연대와 연대하여 "대안"이라는 이름으로 출마하였다. PFLP, DFLP는 과거에는 강경 무장투쟁을 주장하였지만, 현재는 주로 대중운동[30]을 주도하는 식으로 독립운동을 한다.

PFLP와 DFLP 둘다 이스라엘에게서 테러단체로 간주되지만 DFLP는 성격이 파타처럼 온건해서 미국과 국제사회에서 테러단체 지정이 해제되었다. 물론 이스라엘은 계속 테러단체로 간주하지만. 현재 갈수록 악랄해지는 이스라엘의 탄압에 이들도 분노하여 무장투쟁을 변함없이 벌이고 있으며 하마스와도 연대해서 싸운다. 파타와도 연대하지만 그들의 부패와 무능함에 굉장히 부정적이다.

3. 아프리카

3.1. 남아프리카 공화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심해지는 빈부격차, 아프리카 국민회의의 미온한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에 반발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내세우는 경제자유투사당이 등장하였다. 흑인 빈곤층으로부터 지지를 받으며, 원내 제3당이다. 남아공 공산당도 원래 존재하고 아파르트헤이트 시절부터 특히 반체제 백인 동조자들과 연대하는 정치적 구심점으로 큰 영향력도 발휘했고, 남아공노동조합 총회 (Congress of South African Trade Unions, COSATU), 국민회의와 함께 소위 '삼각 동맹'이라 부르는 연정의 일부이다. 그러나 당사자들 밖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 몰락, 국민회의 정권 설립 이후 30년째 우경화된 국민회의의 경제정책에 반발해 딴집 살림 차리자 차리자 지들끼린 싸우면서도 결국 못하고 현대 와선 EFF에게 기반 다 뺏긴 과거 반체제 혁명단체 시절 명예훈장만 잔뜩 많은 별 볼 일 없는 단체로 인식되고 있다.

4. 유럽

유럽정당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하는 공산당-노동당 이니셔티브(Initiative of Communist and Worker's party)가 존재한다. 그러나 EU에서 인정하지 않은 상태이고, 대부분 공산당들은 유럽공산주의를 표방하며 유럽좌파당에서 활동하는지라[31] 상황이 좋지 않다. 2명의 그리스 공산당 소속 MEP(콘스탄티노스 파파다키스, 소티리오스 자리아노포울로스)가 현재 원내 비교섭단체(Non-Instrict)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 외에도 유럽범위 정치기구(유럽정당과는 다르다.) 중 유럽 반자본주의 좌파(European Anti-Capitalist Left) 내에는 일부이기는 하나 트로츠키주의[32]나 좌파 자유지상주의[33] 등을 주장하는 극좌 정당들도 있다.

4.1. 독일

좌파당(Die Linke)의 파벌 공산주의자 플랫폼(Kommunistische Plattform; KPF) : 민주사회당[34]의 계승을 자처하는 당 내의 파벌. 좌파당 안의 다른 정파[35]에 비해 독일민주공화국에 대해 관대한 평가를 가지고 있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내세운다. 공산주의자 플랫폼의 목표는 공산주의의 경험과 교훈들을 가지고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말 그대로 극좌적인 주장들(사적소유의 철폐, 현행 권력체계의 부정[36] 등...)을 한다. 헌법수호청[37]에 의하면, 이 파벌에 가입한 인원은 2007년 기준으로 850명이며, 이는 좌파당 당원의 1%선에 해당한다.

최근에는 자라 바겐크네히트를 중심으로 한 좌익보수주의 강경좌파 성향의 자라 바겐크네히트 동맹이 좌파당에서 분당되어 독립했다.

한편 서독에서 1968년 공산당이 합법화 되면서 독일 공산당이 재창당되었다. 현재 당원 수는 대략 3000~3500명 정도라고 한다.

4.1.1. 나치즘과 좌파의 관계

간혹 나치가 극좌파적인 면모[38]를 가졌다는 이유로 나치를 극좌 정당으로 분류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이는 나치·히틀러의 실상과 맞지 않는 해석이며 제3의 위치를 참고해야 한다. 가끔 나치의 만행을 우파와 떼어 놓으려는 사람들이 나치의 일부 '극좌'적 면모를 가져다가 침소봉대 하고는 하는데, 학계에서도 일반적 인식에서도 나치즘은 극우로 판단되며, 일부에 의해 '좌우 규정이 애매하다'까지의 주장은 나오지만 극좌파로 규정되는 경우는 없다.

유럽에서는 사유재산의 인정여부를 가지고 좌우를 따진다고 하는데, 물론 맞는 말이지만 당연히 그거 하나 가지고만 따지는 경우는 없다. 좌우를 구분하는 데는 민족-국제, 전통-개혁, 공동체-개인 등 단순한 도식들만 따져도 많은 기준이 있고 그 기준들을 복합적으로 검토해서 좌우를 나누는 것이다.

아무 역사적 맥락의 검토 없이 사유재산 소유권을 제한한 것 하나만 가지고 극좌파로 규정하면, 지배층 재산의 공동소유, 아이의 공동양육을 주장한 플라톤은 극좌사상가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 이유는 플라톤이 계급을 인정하고 민주정에 맞서 전통적 지배체제를 정당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나치는 집권 후 제일 먼저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불법화하고 좌파를 탄압했으며 당내 좌파인 룀과 슈트라서도 제거했다. 그 후에는 계급보다 민족을 우선시했고, 노동조합을 해산한 후 독일노동전선 같이 코포라티즘적인 조직을 만들었다. 개개인으로서의 자본가 몇몇이 감옥에 들어가거나 죽었을 수는 있지만 그건 워낙 나치가 가두고 죽인 사람이 많아서 그런거고... 그 강력한 절대권력을 가졌을 때도 나치는 쉰들러리스트에서 볼 수 있듯이 자본가들과 협력, 공생해서 국가를 운영했지 그들과 전면전을 펼치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파시즘이 득세한 다른 국가들조차도 좌파성향은 결국 다 내다버렸다.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도 처음 주장하던 민족 볼셰비즘이나 국민생디칼리슴같이 조금이라도 반자본주의적인 경향이 있는 세력은 결국 숙청되었으며, 이들이 만든 결과물은 계급투쟁은 커녕 코포라티즘적인 계급협조도 아닌 그냥 자본가와 협력하는 민족주의 독재였다.

4.2. 러시아 (소련 포함)

파일:CroppedStalin1943.jpg
이오시프 스탈린
파일:attachment/극좌/parad_noyabr.jpg
1981년 11월 7일, 혁명 기념일을 맞아 소비에트 연방군인들이 행진하는 모습
러시아 혁명당시 임시정부의 여당이었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점령한 볼셰비키들은 멘셰비키, 사회혁명당 및 아나키스트들을 숙청하였으며, 10월 혁명 이후, 소비에트 러시아가 세워진 다음에는 온건한 성향의 볼셰비키들까지 모조리 숙청하여 러시아 대륙은 70년간 극좌들이 사회의 주도권을 가지게 된다.[39] 물론 여기서 극좌는 아나키즘적 극좌와는 거리가 멀다. 소련이 무너진 이후에는 소련 공산당의 자칭후신인 러시아 연방 공산당이 그 뒤를 이어가고 있다. 다만 얘네들은 박노자 등 좌파적인 지식인들에게도 비판을 꽤 받는다.

한때 제국시절 러시아의 아나키스트들은 러시아 혁명 때 볼셰비키들을 따라 공산혁명을 지지했으나, 볼셰비키들이 배신을 때리고 아나키스트들을 숙청시킨 일이 있었기 때문인지,[40] 러시아의 아나키스트들은 볼셰비즘 레닌주의자들과 사이가 나쁘며[41] 일부 복권되어 공산당 관직에 앉았던 좌파 사회혁명당과 다르게 아나키스트들은 마흐노의 우크라이나 혁명 반역군의 패배와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사망 이후 사실상 말소되었다. 현재 러시아에서의 아나키즘은 과거 아나키즘의 주요 거점이었던 명성이 무색하게 매우 세력이 약해진 편.

대표적인 러시아의 자유지상주의적 극좌 정당으로는 좌파전선이 있다. 사실상 좌파전선은 일부 급진적 사민주의자/민주사회주의자들부터 트로츠키주의, 룩셈부르크주의, 아나키즘 등 다양한 사회주의적 팩션들이 모인 포괄정당이나, 극좌의 영향력이 가장 크므로 보통 극좌 정당으로 분류된다. 이들은 권위주의적인 러시아 연방 공산당에 비판적이다.

4.3.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는 일찍이 1918~1921년까지 나바트(Nabat)이라는 아나키즘 단체가 있었고, 네스토르 마흐노가 우크라이나 동부를 근거지로 자유지구(Вольная территория)란 아나키즘 사회를 시도한 바 있다. 적백내전까지는 러시아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차르를 갈아엎는데 협조하였지만 러시아가 의회인 두마를 폐쇄하자 이에 실망하고 흑군으로서 적백내전에 적대하게 되지만 공산주의자들이 각각의 요충지에서 징집을 하면서 군대 같은 체제를 갖추고 백군을 밀어내자 사라졌다.뭉쳤다찢어졌다 얽히고설키는 공산주의자와 아나키스트 이후 스탈린 치하에서 우크라이나 대기근 등의 반발로 분리주의자/독립주의자들과 합류하여 싸웠다.

현존하는 우크라이나의 극좌 정당으로는 트로츠키주의, 반파시즘을 표방하는 보로트바가 있다. 앞서 서술한 러시아 좌파전선과는 자매결연을 맺고 있으며, 유로마이단돈바스 전쟁 사태에서 친러시아 세력으로 분류된다.

5. 같이 보기



[1] 예를 들어 극우들은 김대중이 청년기 시절 공산주의에 관심을 보였다는 것, 노무현의 장인인 권오석남로당부역했다는 점을 들어 이들이 햇빛정책과 같은 북한에 대한 유화책을 낼 때마다 종북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2] 하지만 일부 극좌적 단체에서는 빨지산과 같은 비전향 장기수들이 독재 정권에 대항했다는 이유만으로 민주화 투사로 분류하는 진영논리적 사고를 보이기도 하였다.[3] 가끔 대중들 가운데 '보수정당=친일파 후손'이라는 단순한 등식을 내세우는 경우가 있다. 극단적으로는 아예 '민주당계 정당=독립운동가 후손'이라는 등식까지 내세우는데 민주당계 정당의 계보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손자가 민주당 원내대표였던 점, 헌병 오장 아들이 민주당계 정당에서 국회의원을 했던 것을 보면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다. 물론 민주당계 정당에도 독립운동가 후손 정일형 선생 손자 정호준, 박종식 선생의 아들 박지원 등이 있다. 보수파 정치인인 이재오의 아버지는 무명의 항일 독립군이었고 김을동의 할아버지는 그 유명한 김좌진장군이다. 거기다 우파의 전신이 되는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출신인데다가 역대 대통령들 중 가장 맹렬하게 일본을 증오했다.[4] 과거 학생 운동에서 NDR 계통의 이론가이자 대부인 채만수가 소장으로 있다. NDR 계통의 인사들이 포진한 만큼 민족 모순을 계급 모순만큼이나 중시하고, 통일과 반미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그렇지만 그래 봤자 계급 모순을 더 중시하는 편이긴 해서 NL과 갈등이 없는 건 아니다. 특히 채만수가 범민련 남측본부의 '우리민족끼리' 노선을 강하게 비판한 것을 계기로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중이다. 참고로 이 단체를 마치 일반적인 PD계열인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서울사회과학연구소류의 PD론과 다르다. 서울사회과학연구소의 경우 1910년대에 한반도가 식민지 자본주의로, 자본주의 사회구성체를 이루었다고 보지만, 노사과연은 1970년대에 와서야 본원 축적을 통한 자본주의가 완성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조차 신식민지 종속성을 전제로 한 불균등한 자본주의로 보고 있다.[5] 노사과연의 정치경제학(소련식 사회주의 경제학), 철학(스탈린식 변증법적 유물론) 강의를 들은 경험자들에 의하면 1980년대의 그윽한 향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현재 노사과연은 소련의 사회주의 경제에 관련된 정보를 A부터 Z까지 샅샅이 조사해서 올리고 있는데 이로 인해 소련 국가자본주의론은 완전히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되고 있다.[6] NDR이 아닌 PTR 계통에 가까우며, 남한의 신식민지성이나 전(前)자본주의성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웃기게도 NL과의 사이는 노동사회과학연구소보다 훨씬 좋다. 협회 운영위원장 자체가 골수 NL 언론 사이트인 4.27시대에 글도 내는 등 NL과의 교류 노력이 상당하다. 러시아와 중국에 관한 입장도 노사과연과 다른데, 노사과연은 중국을 국가자본주의로 보지만, 노정협은 중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보고 있다. 러시아 역시 노정협은 제국주의 국가로 보지 않지만, 노사과연은 제국주의적 면이 있다고 본다. 물론 중국이 수정주의에 경도되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7] 비록 그 운동이 사회주의적 성격을 갖지 않는다고 해도 반제국주의라면 확고하게 지지하는 입장을 갖고 있다.[8] 최근에는 이재명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암시하는 글을 냈으며, 쿠바가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입장과 더불어, 친미 성향의 반정부 시위를 무조건 옹호하고, 근거가 빈약한 소련 및 북한 국가자본주의론을 계속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큰 비판을 받고 있다. 게다가 반식민지 국가에서 벌어지는 반제국주의 운동조차 사회주의적이지 않으면 비판하기 때문에 운동단위들 내부에서 '친제국주의 단체'라는 오명을 많이 받는다. 다만 극좌 단체 중에선 NL 다음으로 규모가 커서 그 세력이 만만치는 않다.[9]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라고 보기 위해 하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왜곡하다 보니, 노정협이나 볼셰비키그룹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난도질했다."고 비판받는 중이다.[10] IBT와 관계를 끊었지만 정통 트로츠키주의 노선을 추구하고자 하는 차원이었기 때문에 트로츠키주의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더불어민주당 관련 성추행 사건에서 안희정박원순에 대해 무죄(무죄추정에 의한)를 주장하고, 안티페미니즘에 가까울 정도로 페미니즘과 여성 운동 전체를 일반화해서 강하게 깎아내리는 성향 때문에, 운동권 내에서는 많이 꺼리는 집단이다. 이 단체는 한국 페미니즘 운동의 주류가 래디컬 페미니즘이라고 전제를 하고서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데, 문제는 이 논리에서 너무 나아간 나머지 앞서 말했듯 페미니즘 전체를 일반화하여 깎아내리기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11] 중국이 자본주의가 아니라는 입장은 어느 운동단위보다도 확고한데, 이 단체는 중국이 프롤레타리아 정치 혁명을 통해 혁명의 성과에 기생하는 관료집단을 타도하고 중국을 건강한 노동자 국가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트로츠키주의의 노동자국가론을 채택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진핑을 숭배하거나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노정협 역시 중국이 자본주의가 아니란 입장이긴 하나, 과거에는 자본주의라는 입장을 취했다.[12] 2011년에 변혁당과 유사한 목적으로 창립된 노동운동 단체. 사상적으로는 노동자연대와 마찬가지로 국가자본주의론을 주장하며 정통 트로츠키주의에선 상당 부분 벗어난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연대와 달리 현장 기반을 강조한다. 현재 해산한 상태이다.[13] 범트로츠키주의 계열 운동단위가 이합집산하여 탄생하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트로츠키주의를 내세우고 있지는 않으며, 레닌주의 전위당으로서 정체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국가자본주의론에 기반한 당 사설을 가끔 낸다는 점에서 영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참고로 변혁당은 학생위원회를 빡세게 굴리기로 유명한데, 학생위원회는 의무적으로 조를 짜서 정치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 그런데 노동, 환경, 여성 문제에서 학생위원회의 행보는 레닌주의에 가깝기보단 범(汎)사회주의에 가깝기에 몇 가지 논란도 존재한다.[14] 의회주의 노선을 추구하나, 그렇다고 해서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정식을 부정하는 입장도 아니다. 다만 소련을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비생산양식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논란이 있는데, 애초에 좌익공산주의 자체가 소련을 사회주의로 보고 있진 않기에, 좌익공산주의의 논리대로라면 틀린 것도 아니다. 2020년 국가보안법으로 피소된 주요 간부들의 무죄가 확정됐는데, 판결문을 보면, "북한을 야만적인 전체주의 국가로 보며, 체제 변혁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위험성이 없다."라는 내용이 있다.[15] 노동해방실천연대와 인력적으로 교류가 있지만, 엄밀히는 독립적인 관계이다. 해당 계통 단체들은 레닌주의와 무관한 탓인지 몰라도, 미제국주의에 대한 심도 있는 비판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16] 본래 사회진보연대는 과거 제파PD에 몸담았던 운동단위를 기반으로 한다. 현재는 윤소영의 알튀세르주의에 과도하게 영향을 받은 나머지 활동 내용의 모호성이 극단적인 수준이다.[17] 2007년에 창립된 현장 활동가 모임. 이 자체로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운동 현장에서 각자 활동하는 운동가들이 같은 사상적 배경과 목적을 가지고 모여서 조직한 단체이다. 참고로 민주노총 직선제 1기 지도부의 한상균 위원장과 이영주 사무총장, 최종진 부위원장이 여기 소속이다.[18] 관련 서적은 『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 1』(2010)에 나온다.[19] 심지어 몇 뇌피셜은 북 헌법에 마르크스-레닌주의란 내용이 들어가 있다가 삭제됐다고 선동을 하는데, 애초에 역사에 존재했던 모든 사회주의 국가 헌법에 '마르크스-레닌주의'란 용어를 넣은 예가 없다. 이는 헌법과 당 강령을 구분하지 못 하는, 실제 운동에 관여해본 적이 없는 부류가 어설프게 주장하는 것이란 걸 알 수 있다. 참고로 조선로동당 당 강령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용어가 등장한다.[20] 1930년대 항일 투쟁 시기에는 주로 혁명 당면 목표를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라고 보지 않고, 소비에트 혁명이라고 보는 맹동주의자를 가리켰다. 참고로 당시 코민테른도 마찬가지로 중국과 조선의 혁명 지도에서 소비에트 노선을 부정하였으며, 당시 사회구성체를 반봉건사회라 진단했다. 북은 이를 마치 김일성의 영향인 것처럼 세뇌시키고 있지만, 사실은 코민테른이 독자적으로 내린 결정이었으며, 이를 최초로 인식한 건 김일성이 아니라 엠엘파였던 안광천이었다. 물론 이 노선에 기초한, 가장 많은 세력을 형성시킨 게 김일성임은 부정할 수 없다.[21] 인터넷에서도 적군파 사진으로 소개하는 경우가 있지만, 지역 자체가 도쿄인데다가, 들고 있는 깃발이나 시위복장 등을 볼 때 전공투로 보인다.[22] 일본공산당이 "구좌파"라면서 결별했다. 이들의 결성에 대해서는, 스탈린 격하를 비롯한 국제적인 변화도 한 몫했지만, 일본 공산당이 무장투쟁 노선을 폐기한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당시 일본 공산당 당사가 요요기에 있었기 때문에, 반(反)요요기'파라고 하기도 한다.[23] 신좌익계 당파는 전후 민주주의를 가짜 민주주의로 보고 분쇄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자고 주장했다. 반면 신우익은 신좌익과 전후 민주주의 분쇄를 공유하고있지만 전후 민주주의 분쇄를 통한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천황제를 통한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었다.[24] 오키나와 반환 혹은 각 섹트에 따라서는 오키나와 해방.[25] 이를 "우치게바" 라 한다.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남쪽으로 튀어" 에서도 우치게바가 묘사된다. 참고로 서로 다른 두 극좌 신좌익 과격파조직간에 벌어지는 것이 "우치게바"고, 같은 극좌 신좌익 과격파조직 내부에서 벌어지는 것은 "우치-우치게바"라 한다.[26] 유럽의 경우에는 68운동 이후로 일본에 비해 극좌 테러조직이 난립하는 등 더 과격하기는 하였지만, 이들의 운동은 덜 교조적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극좌 운동은 낭만화되었고 오늘날 극좌파들은 과거에 별 영향을 받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68운동을 지나치게 낭만화하는 것에 대한 반발도 분명 있고, 당시의 운동에 대한 비판도 많다.[27] 90년대 몰락 이후 사실상 사회민주당이 이를 계승했다.[28] 인민해방군은 국가가 아니라 공산당 소속의 군대이다. '국가의 군대'는 '압제자의 군대'라는 인식 때문으로, 어디까지나 이 군대는 '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된 군대'라고 설명한다. 실제 인민해방군은 처음엔 계급 자체가 없어서 서열 문화도 없었으나, 효율성 문제로 인해 도입되었다.[29] 기본적으로 중국 정부는 문화대혁명을 흑역사로 보기에 대체로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흑역사만 있는건 아니라면서, 재평가해야 한다는 소리도 간혹 있긴 하다. 천안문 사태도 중국공산당은 처음엔 '동란, 폭동' 취급하였고, 21세기 들어선 '정치적 풍파'란 단어로 약간 순화해서 표현하나 항쟁을 유혈진압한 것은 정당하다고 주장한다.[30] 가령 총파업, 인티파다 등. PFLP 내부에서는 제3차 인티파다를 주도하자는 의견도 나오는 상황[31] 키프로스 노동인민진보당, 프랑스 공산당 등[32] 가령 영국의 사회주의 노동자당(SWP), 프랑스의 독립 노동자당(LO)[33] 포르투갈의 좌파 블록(BE)[34] 동독의 집권당이었던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의 후신이다.[35] 좌파당 내의 '파벌'이라 할만한 세력들은 6개 정도가 존재한다. 당연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 좌파.[36]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현이라던가[37] 독일에서 정당이나 정치인을 시찰하여 헌법에 적합한지 시찰하는 기관. 독일공산당이나 신나치당 등이 이 기관에 의해서 해산당했다. 또한 헌법수호청은 일부 주에서 공산주의자 플랫폼을 시찰대상에 올렸다.[38] 초창기 룀 등이 주장한 사유재산 폐지, 노동자들과 연대 시도 등. 그러나 이는 한 단면만 본 것으로 슈트라서를 중심으로 한 나치당 좌파는 히틀러와의 노선 차이로 차차 당내 중심에서 밀려나 급기야는 장검의 밤 때 완전히 숙청되었다.[39] 전세계적으로 극좌가 권력을, 그것도 절대 권력을 차지하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다. 동유럽의 공산독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독재 정권이 (서로 사이는 나쁠지언정) 극우 정권인 것만 봐도 알수 있다.[40] 사실 모스크바의 허무주의적 아나키스트들이 먼저 레닌을 암살하려고 테러한 적이 있긴하다. 물론 우크라이나의 마흐노와 같은 크로포트킨계열의 아나키스트들은 이런 허무주의적 테러를 비판하였지만 말이다.[41] 사실 아나키즘맑시즘은 1차 인터내셔널 때 부터 사이가 나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관점이 서로 달랐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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