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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5 20:20:14

훈둔


원사(元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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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본기(本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color: #181818"
1권 「태조기(太祖紀)」 2권 「태종·정종기(太宗定宗紀)」 3권 「헌종기(憲宗紀)」
패아지근 철목진 패아지근 와활태 · 패아지근 귀유 패아지근 몽가
4·5·6·7·8·9·10·11·12·13·14·15·16·17권 「세조기(世祖紀)」 18·19·20·21권 「성종기(成宗紀)」 22·23권 「무종기(武宗紀)」
패아지근 홀필렬 패아지근 철목이 패아지근 해산
24·25·26권 「인종기(仁宗紀)」 27·28권 「영종기(英宗紀)」 29·30권 「태정제기(泰定帝紀)」
패아지근 애육려발육팔달 패아지근 석덕팔랄 패아지근 야손철목아
31권 「명종기(明宗紀)」 32·33·34·35·36권 「문종기(文宗紀)」
패아지근 화세랄 패아지근 도첩목이
37권 「영종기(寧宗紀)」 38·39·40·41·42·43·44·45·46·47권 「순제기(順帝紀)」
패아지근 의린질반 패아지근 타환첩목이
※ 48권 ~ 105권은 志에 해당. 106권 ~ 113권은 表에 해당. 원사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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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4><tablewidth=100%><tablebgcolor=#004db1> 114·116권 「후비전(后妃傳)」 ||
광헌익성황후 · 소자황후 · 흠숙황후 · 정절황후 · 소예순성황후 · 남부이 · 정자정의황후 · 불루칸 · 선자혜성황후 · 수케시리 · 장의자성황후 · 장정의성황후 · 바부칸 · 정유휘성황후 · 바부샤 · 부다시리 · 다리예테미쉬 · 다나시리 · 백안홀도 · 보현숙성황후 · 현의장성황후 · 휘인유성황후 · 선의숙성황후 · 소헌원성황후
115권 「예종등전(睿宗等傳)」 117권 「별리고태등전(別里古台等傳)」
타뢰 · 진금 · 감마랄 · 답랄마팔랄 별리고태 · 출적 · 독랄 · 아홀도 · 관철보화 · 첩목아불화
118권 「특설선등전(特薛禪等傳)」 119권 「목화려등전(木華黎等傳)」
특설선 · 패독 · 아랄올사척길홀리 목화려 · 박로출 · 박이홀
120권 「찰한등전(察罕等傳)」 121권 「속불태등전(速不台等傳)」
찰한 · 찰팔아화자 · 출적태 · 진해 · 초내태 · 오야이 · 갈사맥리 속불태(1) · 안축이 · 외답아 · 박라환 · 초사
122권 「파이출아이특적근등전(巴而朮阿而忒的斤等傳)」
파이출아이특적근 · 철매적 · 안찰아 · 암목해 · 풍숙안 · 석리검부 · 삭직돌로화 · 석아길사 · 합산납
123권 「포지아등전(布智兒等傳)」
포지아 · 소열태초올아 · 활활불화 · 배연팔도로 · 아술로 · 소고아 · 아랄와이사 · 초아 · 야포감복 · 조아가반 · 순지해 · 점철발도아 · 겁겁리 · 탑불이아 · 직탈아 · 월리마사 · 날고랄 · 아아사란 · 합팔아독 · 애모
124권 「탑본등전(塔本等傳)」
탑본 · 합랄역합적북로 · 탑탑통아 · 악린첩목이 · 이정(李楨) · 겁렬속가 · 망가산아 · 맹사속
125권 「새전적섬사정등전(賽典赤贍思丁等傳)」 126권 「안동등전(安童等傳)」
새전적섬사정 · 포로해아 · 고지요 · 철가 안동 · 염희헌
127권 「백안전(伯顏等傳)」 128권 「아추등전(阿朮等傳)」
팔린백안 아출 · 아리해아 · 상위 · 토토흡
129권 「내아팔적등전(來阿八赤等傳)」 130권 「철리등전(徹里等傳)」
내아팔적 · 뉴린 · 아랄한 · 아탑해 · 사도 · 이항 연지길태철리 · 불홀목 · 토별연완택 · 아로휘살리
131권 「속가등전(速哥等傳)」
속가 · 낭가알 · 망올태 · 오로적 · 완자도(2) · 백첩목아 · 회도 · 역흑미실 · 배항
132권 「항홀사등전(杭忽思等傳)」
아속항홀사 · 보로합답 · 옥와실 · 맥리 · 탐마적 · 발도아 · 앙길아 · 합랄태 · 사전 · 첩목아불화
133권 「탑출등전(塔出等傳)」
탑출 · 배연 · 야한적근 · 엽선내 · 탈력세관 · 홀날출 · 중희 · 단지아 · 찰랄아태탈환 · 실리백 · 패란해 · 겁렬 · 암백 · 야속태아 · 석도아
134권 「철길사등전(撒吉思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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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권 「답실팔도로등전(答失八都魯等傳)」 143권 「마조상등전(馬祖常等傳)」
답실팔도로 · 경동 · 야속 · 철리첩목아 · 납린 마조상 · 노노 · 자당 · 아영 · 소운석해애 · 태불화(泰不華) · 여궐
144권 「답리마등전(答里麻等傳)」 145권 「역련진반등전(亦憐真班等傳)」
답리마 · 월로첩목아 · 복안철목아 · 성길 · 복수 · 도동 역련진반 · 염혜산해아 · 월로불화 · 달례마식리
146권 「야율초재등전(耶律楚材等傳)」 147권 「장유등전(張柔等傳)」
야율초재 · 점합중산 · 양회중 장유 · 사천예 · 사천상
148권 「동준등전(董俊等傳)」 149권 「야율유가등전(耶律留哥等傳)」
동준 · 엄실 야율유가 · 유백림 · 곽보옥 · 석천응 · 야율독화 · 왕순(王珣)
150권 「석말야선등전(石抹也先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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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권 「설탑랄해등전(薛塔剌海等傳)」
설탑랄해 · 고요아 · 왕의(王義) · 왕옥 · 조적 · 저순 · 왕선 · 두풍 · 석말패질아 · 가타라콘 · 오돈세영 · 전웅 · 장발도 · 장영
152권 「장진형등전(張晉亨等傳)」
장진형 · 왕진 · 양걸지가 · 유통 · 악존 · 장자량 · 당경 · 제영현 · 석천록 · 유빈 · 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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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 · 왕즙 · 왕수도 · 고선 · 왕옥여 · 초덕유 · 석천린 · 이방서 · 양환 · 가거정
154권 「홍복원등전(洪福源等傳)」 155권 「왕세현등전(汪世顯等傳)」 156권 「동문병등전(董文炳等傳)」
홍복원 · 정정 · 이진 · 석말안지 · 알지리 · 정온 왕세현 · 사천택 동문병 · 장홍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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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충 · 장문겸 · 학경 요추 · 허형 · 두묵 송자정 · 상정 · 조자량 · 조벽
160권 「왕반등전(王磐等傳)」
왕반 · 왕악 · 고명 · 이치 · 이창 · 유숙 · 왕사렴 · 이겸 · 서세륭 · 맹기 · 염복
161권 「양대연등전(楊大淵等傳)」 162권 「이홀란길등전(李忽蘭吉等傳)」
양대연 · 유정(劉整) 이홀란길 · 이정(李庭) · 사필 · 고흥 · 유국걸
163권 「이덕휘등전(李德輝等傳)」
이덕휘 · 장웅비 · 장덕휘 · 마형 · 정사렴 · 오고손택 · 조병
164권 「양공의등전(楊恭懿等傳)」
양공의 · 왕순(王恂) · 곽수경 · 양환 · 양과 · 왕구 · 위초 · 초양직 · 맹반린 · 상야 · 이지소
165권 「장희등전(張禧等傳)」
장희 · 가문비 · 해성 · 관여덕 · 조갑랄 · 주전 · 공원 · 주국보 · 장립 · 제병절 · 장만가노 · 곽앙 · 기공직 · 양새인불화 · 선비중길 · 완안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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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준 · 수세창 · 나벽 · 유은 · 석고산 · 공언휘 · 채진 · 장태형 · 하지 · 제병절 · 맹덕 · 장영실 · 석말구구 · 초정 · 번즙 · 장균 · 단신저일 · 왕석랄 · 조굉일
167권 「장입도등전(張立道等傳)」
장입도 · 장정진 · 장혜 · 유호례 · 왕국창 · 강욱 · 장초 · 여질 · 담자영 · 왕운
168권 「진우등전(陳祐等傳)」
진우 · 유선 · 하영조 · 진사제 · 진장경 · 조여표 · 요천복 · 허국정
169권 「하인걸등전(賀仁傑等傳)」
하인걸 · 가석랄 · 유합라팔도로 · 석말명리 · 사중온 · 고휴 · 장구사 · 왕백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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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문 · 신도치원 · 뇌응 · 호지휼 · 왕이용 · 창사문 · 장소 · 원유 · 장방 · 학빈 · 고원 · 양식 · 오정 · 양덕규
171권 「유인등전(劉因等傳)」 172권 「정거부등전(程鉅夫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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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권 「최빈등전(崔斌等傳)」 174권 「요수등전(姚燧等傳)」
최빈 · 최욱 · 엽이 · 연공남 · 마소 요수 · 곽관 · 협곡지기 · 유갱 · 야율유상 · 학천정 · 장공손
175권 「장규등전(張珪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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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율희량 · 조세연 · 공사회 원명선 · 우집 · 게혜사 · 황진 장기암 · 구양현 · 허유임 · 송본 · 사단
183권 「왕수성등전(王守誠等傳)」 184권 「왕도중등전(王都中等傳)」
왕수성 · 왕사성 · 이호문 · 패출로충 · 이형 · 소천작 왕도중 · 왕극경 · 임속가 · 진사겸 · 한원선 · 최경
185권 「여사성등전(呂思誠等傳)」 186권 「장정등전(張楨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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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92권 「양리전(良吏傳)」
담징 · 허유정 · 허즙 · 전자 · 복천장 · 야율백견 · 단직 · 암도랄 · 양경행 · 임흥조 · 관음노 · 주자강 · 백경량 · 왕간 · 노기 · 추백안 · 유병직 · 허의부
193·194·195·196권 「충의전(忠義傳)」
이백온 · 석규 · 유합랄발도 · 임지 · 야율특말 · 보바르 · 합랄보화 · 유천부 · 소경무 · 장환 · 이보 · 이제 · 곽가 · 저불화 · 주희동 · 변침 · 교이 · 안유 · 왕사원 · 양박 · 조련 · 손총 · 석보 · 성소 · 양승 · 납속랄정 · 백안불화적근 · 번집경 · 전보암철리 · 주당 · 섭병 · 유경손 · 유술조 · 계완택 · 추려 · 패라첩목아 · 팽정견 · 왕백안 · 유준 · 타리불화 · 조야준대 · 진군용 · 복리아돈 · 조해 · 위중립 · 보안불화 · 민본 · 배주 · 조홍의 · 정옥 · 황후 · 백첩목이 · 질리미실 · 박새인불화 · 정호례
197·198권 「효우전(孝友傳)」
왕윤 · 곽도경 · 소도수 · 곽구구 · 장윤 · 전개주 · 영저구 · 필야속답립 · 번연 · 유덕천 · 곽회 · 공전 · 장자기 · 진걸아 · 양일 · 장본 · 장경 · 원선 · 조육 · 호광원 · 진소손 · 조일덕 · 왕사총 · 철철 · 왕응초 · 정문사 · 왕천 · 곽전 · 양호 · 정문충 · 소경조 · 호탁 · 손수실 · 이자경 · 종기 · 조영 · 오호직 · 여병 · 서옥 · 윤신 · 유정양 · 유통 · 장왕구 · 장사효 · 두우 · 장수 · 손근 · 장공 · 자여도 · 왕용 · 황윤 · 석명삼 · 유기 · 유원 · 축공영 · 진사효 · 강겸 · 호반려 · 왕사홍 · 하종의 · 합도적 · 고필달 · 증덕 · 근병 · 황도현 · 사언빈 · 장소조 · 이명덕 · 장집 · 위경익 · 탕림 · 손억 · 석영 · 왕극기 · 유사경 · 여우 · 주락
199권 「은일전(隱逸傳)」
두영 · 장특립 · 두본 · 손철 · 하중 · 무각
200·201권 「열녀전(列女傳)」
왕추추 · 진로화진 · 마영 · 조옥아 · 풍숙안 · 조왜아 · 주숙신 · 갈묘진 · 장의귀 · 이동아 · 탈탈니 · 주면가 · 귀가 · 이지정 · 채삼옥 · 범묘원 · 서채란 · 우숙정 · 진숙진 · 야산홀도 · 여언능 · 반묘원 · 유취가 · 나묘안 · 이새아 · 도종원 · 안정동
202권 「석로전(釋老傳)」 203권 「방기전(方伎傳)」
팔사파 · 구처기 · 전절 전충량 · 근덕진 · 장강 · 이호 · 손위 · 아로와정 · 역사마인 · 아니가
204권 「환자전(宦者傳)」 205권 「간신전(奸臣傳)」
이방녕 · 박불화 아합마 · 노세영 · 상가 · 철목질아 · 합마 · 삭사감
206권 「반신전(叛臣傳)」 207권 「역신전(逆臣傳)」
이단 · 왕문통 · 아로휘첩목아 철실 · 패라첩목아
208·209·210권 「외이전(外夷傳)」
고려 · 탐라 · 일본 · 안남(진조) · 면국 · 점성 · 섬국 · 유구 · 삼서
(1) 121권의 속불태(速不台)와 122권의 설불태(雪不台)는 동일인물이므로 122권에서는 생략한다.
(2) 131권의 완자도(完者都)와 133권의 완자도발도(完者都拔都)는 동일인물이므로 133권에서는 생략한다.
(3) 150권의 석말야선(石抹也先)과 152권의 석말아신(石抹阿辛)은 동일인물이므로 152권에서는 생략한다.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4db1><tablebgcolor=#004db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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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db1> 몽골 제국의 장수
ᠾᠦᠨᠳᠣᠡᠨ
忻都
훈둔
이름 <colbgcolor=#004db1> 몽골어 ᠾᠦᠨᠳᠣᠡᠨ
한자 표기 忻都(흔도), 忽敦(홀돈)[1]
몽골어·튀르크어 힌두[2], 킨두
일본어 忻都, きんと(킨토)
생몰년 미상

1. 개요2. 삼별초 토벌3.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3.1. 제1차 일본 원정3.2. 휴식기3.3. 김방경 무고사건3.4. 제2차 일본 원정
4. 그 외
4.1. 제1차 일본 원정 지휘관에 대한 논란4.2. 테무게 옷치긴의 후세설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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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나라의 장수.

원나라의 일본 원정 당시 몽골군을 지휘한 장수로 알려져 있으나, 《원사》에 장수로서의 별도의 <열전>이 없고, 일본 원정을 묘사한 기록인 《고려사》, 《고려사절요》, 《원사》 <열전> 95편인 <외이>(外夷) 1권 -고려·탐라·일본- 편에 언급되며 그 이외의 곳에서는 기록을 찾기 어렵다.

이름은 몽골어튀르크어 등에서 인도를 의미하는 '힌두'와 가깝게 발음된다.

2. 삼별초 토벌

치열했던 여몽전쟁 이후 원나라와 고려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고, 원나라의 황제였던 세조 쿠빌라이 칸(제5대)은 예전부터 생각해 왔던 일본 정벌을 고려의 힘을 빌려 이루고자 했다.

원나라 조정의 중서성에서는 고려의 봉주(鳳州)[3]에 둔전경략사(屯田經略司)를 설치하고, 훈둔과 사추(史樞)에게 경략사(經略使)의 자리와 호부(虎符)[4]를 부여한 뒤, 금주(金州)[5]에서 5,000명의 병사로 둔전을 하도록 했다. 즉, 고려의 저항이 끝나자마자 일본 정벌 준비를 서두른 것이다. #

고려의 왕이었던 원종은 훈둔에게 몽골로 끌려간 고려 백성들을 방면하고, 둔전에 드는 비용을 줄여달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오히려 원나라에 보고해 원 조정과 쌍으로 군량미와 말먹이를 내놓으라고 원종에게 독촉을 부렸다.# 이후 군영을 염주(鹽州)[6]와 배주(白州)[7]로 옮겨버렸다.

그러나 고려에서 원나라와의 강화를 반대한 삼별초가 강화도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원종은 왕세자 왕심을 보내 이 사실을 쿠빌라이 칸에게 알렸다. 결국 쿠빌라이는 원종에게 진도 토벌을 명하게 되었고, 둔전을 하던 훈둔과 몽골군 역시 삼별초 토벌에 개입하게 되었다. 곧바로 안무사(安撫使)였던 아카이(阿海)가 삼별초의 주둔지 중, 몽골군이 둔전을 하던 금주와 비교적 가까이 위치해 있었던 진도를 공격했다.

삼별초는 꽤 분전해 몽골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나 이내 식량이 떨어지고 말았다. 중서성에서는 이 틈에 진도를 총공격할 것을 건의했으나 쿠빌라이가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진도에서 삼별초를 이끌던 배중손에게 항복을 권했다. 배중손은 훈둔에게 따로 만나자고 했으나 훈둔은 거절했고 배중손이 좋은 음식과 술을 대접하며 만나자고 하자 흔쾌히 허락했다(...).#[8] 배중손은 훈둔에게 몽골군이 뒤로 물러나 주둔하면 항복하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훈둔은 이를 속임수라 여겨 허락하지 않으려 했으나 쿠빌라이의 명령으로 군을 물리게 되었다. 그러나 배중손이 되려 다시 항복을 권하러 간 사신을 억류하고, 버티자 훈둔은 진도 토벌을 요청했고, 쿠빌라이 역시 허락하며 고려군도 공격에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결국 진도는 함락되었고, 김통정 등의 삼별초 장수들과 잔당들은 모두 탐라도(제주도)로 달아났다. 1273년 1월, 훈둔은 홍다구, 김방경 등과 함께 바다를 건너 탐라도에 도착했고, 남은 삼별초의 잔당을 모조리 소탕한 뒤 김통정 등을 붙잡아 죽였다.

삼별초가 완전히 토벌된 후 훈둔은 고려의 도읍인 개경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원종은 대장군 박성대(朴成大)를 보내 개경 외곽에서 훈둔을 환영하게 했고, 이에 분노한 훈둔은 박성대에게 온갖 면박을 다 준 뒤, 개경에 입성하는 대신 원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

《원사》 열전 <외이>(外夷) 1권의 -고려- 관련 내용

3.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3.1. 제1차 일본 원정

훈둔이 원나라로 돌아간 이후, 쿠빌라이는 계속해서 일본과의 통교를 시도했으나, 성사되지 않자 마침내 일본 정벌을 위한 15,000명의 군사를 보냈고, 고려 역시 부랴부랴 준비해 원정군을 구성했다. 봉주경략사 훈둔이 이끄는 몽골인과 한인으로 구성된 25,000명과 김방경, 김흔(金忻)[9], 위득유(韋得儒) 등이 이끄는 고려군인 삼익군(三翼軍) 8,000명, 뱃사공·길잡이·선원 등 6,700명을 실은 전함 900여 척이 일본으로 나아갔다. 연합군은 쓰시마이키 섬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일본군 1,000여 명을 죽이는 전공을 세웠고 이후 군을 나누어 진격했으나 때마침 일어난 폭풍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고는 퇴각했다. #

《원사》 열전 <외이>(外夷) 1권의 -일본- 관련 내용

3.2. 휴식기

훈둔은 제1차 일본 원정이 끝난 뒤에도 원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남았는데 원정에서의 실패로 인해 스트레스가 폭발했는지 고려에서 해동청[10]을 마구 잡아들였고, 결국 그 소문이 쿠빌라이의 귀에까지 들어가 길들여서 바치는 것 외에는 잡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으며, 덩달아 고려 전역에서도 해동청 포획이 금지되는 일이 있었다. #

고려에서 신년을 맞이하게 되자, 훈둔 본인과 아내가 번갈아가며 충렬왕에게 좋은 준마를 바쳤으며, 훈둔의 아내가 왕을 위해 잔치를 베풀자# 왕 역시 훈둔의 아내를 위해 잔치를 베풀어주었고, 훈둔도 감사의 표시로 왕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11]

고려에는 훈둔과 부인 뿐만이 아니라 훈둔의 아들인 '훈기'(忻琪) 또한 고려에 있었는데 고려 조정에서는 훈기에게 수사공(守司空)의 벼슬을 주고, 왕족인 안평공(安平公) 왕경(王璥)의 딸과 혼인시켜 종실에 가까운 예로 대했다.#

3.3. 김방경 무고사건

전직 대장군이었던 위득유, 중랑장 노진의(盧進義)·김복대(金福大) 등이 김방경을 지목하여 훈둔에게 모함하는 일[12]이 벌어졌고, 이에 원나라에서는 충렬왕이 직접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더불어 훈둔과 홍다구를 보내 방비하게 했는데, 훈둔은 충렬왕이 직접 김방경을 국문할 때,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충렬왕은 김방경의 일을 듣고는 무고라고 판단해 방면했으나# 홍다구가 강하게 반발했고, 훈둔이 그에 동조하면서 곧바로 다시 국문이 열렸다. 과도한 고문에도 김방경은 끝까지 죄를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본인은 대청도로, 그의 아들 김흔은 백령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쿠빌라이 칸 역시 이 일을 알고는 충렬왕이 직접 대도로 와 전말을 설명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뜨끔했는지 훈둔은 홍다구와 함께 말을 바치거나 잔치를 열어주고, 예쉬데르(也速塔兒)를 보내
"제가 7년 간 잘한 것 없이 나쁜 짓만 했는데, 황제께 잘 말씀해주십시오."
라며 아첨을 떨었다.#

이후 훈둔은 충렬왕과 함께 쿠빌라이 칸을 면대하게 되었다. 여기서 훈둔은
"고려의 재상들이 백성들을 숨기고, 내놓질 않으니 법으로 금지해주십시오"
라는 요청을 했는데 쿠빌라이 칸은
"그 일을 고려 왕과 상의했느냐"
고 물었고, 이에 훈둔이 아니라고 하자 허락하지 않았다. 훈둔은 부랴부랴 충렬왕에게 얘기를 했으나 듣질 않자 분개하기도 했다.#

충렬왕은 김방경의 일은 무고라고 주장했고, 쿠빌라이는 왕의 말때문에 훈둔이 못 미더웠는지 훈둔에 대해서도 물었다. 충렬왕은 훈둔에 대해 나쁜 말은 안했으나 훈둔을 따르는 홍다구의 악행과 김방경의 죄목을 찾는답시고 자신의 아들 집까지 탈탈 턴 훈둔 휘하 병사들의 악행을 고자질해 훈둔을 보기좋게 물먹였다. 결국 훈둔은 쿠빌라이의 명령으로 잠시 동안 원나라에 머무르게 되었고, 원나라 군대에 의한 수탈이 잠시나마 멈췄다.#

3.4. 제2차 일본 원정

원나라가 숙적인 남송을 기어이 멸망시켜 그 수군을 손에 넣고, 고려와도 원정에 대한 어느 정도의 논의가 이뤄지자 다시 군을 이끌기 위해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의 우승(右丞)이 된 훈둔과 홍다구가 고려로 돌아왔다. 그해 5월에 석방되어 복귀한 김방경 및 박구(朴球), 김주정(金周鼎) 등이 이끄는 수군과 함께 원정을 실시했다.#

이번에는 일본 측에서도 준비가 잘 되어 있었던 상태라 제1차 원정 때처럼 파죽지세로 밀어붙이지 못한 채 전황이 지체되고 있었고, 그 사이에 다시 폭풍이 몰아치면서 제2차 원정도 거하게 말아먹게 되었다. 원나라군은 100,000명에 가까운 병력을 잃었고, 훈둔은 함께 참전했던 홍다구 및 범문호(范文虎) 등과 함께 원나라로 돌아갔다.#

이후에 사서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4. 그 외

4.1. 제1차 일본 원정 지휘관에 대한 논란

《고려사》 등의 사료를 보면 훈둔(忻都, 흔도)이라는 표기와 쿠둔(忽敦, 홀돈)[13]이라는 표기가 동시에 등장한다. 이 중 쿠둔(홀돈)이라는 인물은 제1차 일본 원정 시기에만 언급이 되고 있으며, 주요 기록도 동정원수(東征元帥)로 임명되어 김방경과 함께 일본 원정에 나섰다가 폭풍으로 낭패를 보아 홍다구 등과 함께 귀국했다는 기록이 전부이다.#

또한 《원사》 <본기> 제 8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召征日本忽敦、忽察、劉復亨、三沒合等赴闕
일본 정벌을 갔던 쿠둔, 쿠차르, 유복형, 사모카 등을 궐로 불렀다.

즉, 이 둘을 별개의 인물로 보면 고려로 내려와 둔전을 하며 원정 준비를 하고, 삼별초를 탐라도까지 가서 쓸어버린 인물은 훈둔인데, 정작 원정군을 이끌고 김방경과 함께 일본을 침공했다가 패배한 이는 쿠둔이라는 얘기가 된다. 실제로 훈둔에 대한 기록은 이후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등에도 계속해서 등장하는 반면에 쿠둔에 대한 기록은 귀국했다는 이야기 이후엔 전혀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정작 사서인 《원사》에서는 기록이 충돌되는 부분이 존재한다.
庚寅,敕鳳州經略使忻都、高麗軍民總管洪茶丘等,將屯田軍及女直軍,并水軍,合萬五千人,戰船大小合九百艘,征日本.
경인일, 봉주경략사 훈둔과 고려군민총관 홍다구 등에게 둔전군과 여진군, 수군을 포함한 15,000명을 이끌고 전함 900척에 나눠 올라 일본을 정벌하라고 지시했다. - 《원사》 <본기> 8권
八月, 授東征右副都元帥, 與都元帥忽敦等領舟師二萬, 渡海征日本, 抜對馬·一岐·宜蠻等島.
8월, (홍다구에게) 동정우부원수를 제수하고, 도원수 쿠둔 등과 함께 수군 20,000명을 통솔하여 바다를 건너 일본을 정벌하게 하니, 대마, 일기, 의만 등의 섬을 함락시켰다. - 《원사》 154권 <열전> 41권
《원사》 <본기>에서는 제1차 일본 원정을 지휘한 사람이 흔둔, 《원사》 <열전>에서는 쿠둔으로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추측의 영역일 뿐, 훈둔과 쿠둔이 서로 다른 인물인지, 아니면 동일인물인데 표기를 다르게 한 것인지는 명확히 밝혀지거나 검증된 부분이 없다. 그러나 일본의 학자들은 대체로 훈둔과 쿠둔을 동일인물로 여기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 위키백과 홀돈(忽敦) 항목

4.2. 테무게 옷치긴의 후세설

한국어 위키백과 한정으로 훈둔에 대해
칭기즈칸의 아우 테무게(帖木格)의 6세손이자, 오고타이 한국카이두, 차가타이 한국의 두아와 함께 반란을 일으킨 종왕(宗王) 나얀(乃顔)의 조카뻘이다.
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데 딱히 명확한 근거는 제시되고 있지 않다. 같은 인물을 다룬 중국어 위키백과일본어 위키백과에서도 마찬가지로 훈둔이 테무게의 6세손이라던가, 나얀의 조카뻘이라는 설명은 없다.

《원사》 <종실세계표>(宗室世系表)에 보면 태조 칭기즈 칸의 동생인 테무게 옷치긴의 5대 후손 중에 훈둔 대왕(忻都大王)이라는 인물이 존재하긴 한다.# 하지만 본 항목의 훈둔의 경우는 원나라 지원(至元) 7년, 즉 1270년대부터 고려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못해도 1240년대 정도의 인물로 추정이 된다. 문제는 훈둔이 활동한 시기가 테무게 옷치긴이 사망한 직후 70~80년 후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 사이에 무려 5대가 번성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기 어려운 부분이다.

또한 《원사》 <종실세계표>에 나오는 훈둔 대왕의 경우, 테무게 옷치긴의 장남 가문이 아니라 7남인 오루타이(斡魯台) 대왕의 3남인 키둔케(氣都哥) 대왕의 증손자로 표기되어 있다. 이렇듯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에 고려에서 활동한 훈둔과 테무게 옷치긴의 후예인 훈둔 대왕은 서로 다른 인물로 보인다.

5. 기타

파일:고스트 오브 쓰시마 코툰 칸.png
파일:고스트 오브 쓰시마 코툰 칸 2.png

[1] 논란이 있는 부분이다. 아래의 제1차 일본 원정 지휘관에 대한 논란 항목 참조[2] 《고려사》 데이터베이스에서도 이 이름으로 표기했다.[3] 오늘날의 황해북도 봉산군이다.[4] 고대 중국에서부터 사용되던 구리로 만든 호랑이 모양의 패를 말한다. 이 패를 지니고 있으면 징병이 가능했다.[5] 오늘날의 경상남도 김해시이다.[6] 오늘날의 황해도 연백군이다.[7] 오늘날의 황해도 연백군 온정면이다.[8] 토벌에 동참한 김방경이 보고한 내용이다.[9] 김방경의 아들이다.[10] 《고려사》에서는 응자(鷂子)라는 단어로 표기되었다.[11] 몽골에서는 보르차, 한자어로는 발아찰(孛兒札)이라 불리는 잔치를 여는 풍습이 있었다. 충렬왕과 훈둔이 서로 잔치를 열어준 것도 같은 선상으로 볼 수 있다. 국내에서는 MBC 드라마 <신돈>에서 원나라가 기황후의 모친인 영안왕대부인 이씨를 위해 개최하는 장면으로 등장한다.[12] 김방경이 다루가치를 죽인 후 역모를 꾸미려 든다고 고변했다.[13] 쿠둔은 《고려사》 데이터베이스에서의 표기로 아예 이 둘을 다른 인물로 비정한 것으로 보인다.[14] 집현원은 학사들이 머물며 고서를 수집하거나, 책을 출판하는 기구였으며, 시독학사는 왕이나 세자에게 강독을 하는 직위였다.[15] 황제의 명령으로 공민왕에게 옷을 하사하러 간 훈둔에게 공민왕이 되려 더 좋은 옷과 옷감을 내리려고 한 것은 고려가 결코 원나라에 뒤지지 않음을 의도적으로 드러낸 것이라 해석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