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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7 20:58:06

성종(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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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BF2D><colcolor=#670000>
후 레 왕조 제5대 황제
성종 순황제 | 聖宗 淳皇帝
파일:레 성종.jpg
출생 1442년 8월 25일
불명
사망 1497년 3월 4일 (향년 56세)
통킹 광궁
능묘 소릉(昭陵)
재위기간 제5대 황제
1460년 6월 13일 ~ 1497년 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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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BF2D><colcolor=#670000> 성씨 레(Lê / 黎 / 여)
뜨타인(Tư Thành / 思誠 / 사성)
부모 부황 태종 문황제
모후 광숙황태후
형제자매 4남 중 4남
배우자 휘가황태후, 유휘황태후
자녀 14남 20녀
묘호 성종(聖宗)
시호 숭천광운고명광정지덕대공성문신무달효순황제
(崇天廣運高明光正至德大功聖文神武達孝淳皇帝)
}}}}}}}}} ||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과 재위 초기2.2. 토지 및 윤리 개혁2.3. 대외 정책2.4. 사망
3. 가족
3.1. 선조(先祖)3.2. 형제3.3. 처첩3.4. 자녀
3.4.1. 황자3.4.2. 황녀
4. 참고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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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 후여조의 제5대 황제. 묘호는 성종(聖宗/Thánh Tông: 타인똥), 시호는 순황제(淳皇帝/Thuần Hoàng đế: 투언호앙데). 휘는 여사성(黎思誠/Lê Tư Thành: 레뜨타인) 또는 여호(黎灝/Lê Hạo: 레하오). 후여조 최고의 성군으로 손꼽힌다.

본래 태종(太宗)의 4남으로 황위와 관련이 없었지만 형 여의민으로 인한 황실의 혼란을 틈타 추대받아 즉위했고 이처럼 매우 취약한 기반부터 치세를 시작했으나 태조(太祖) 시기 불완전한 법체계 및 복지 제도를 정비하여 그의 시작점과 달리 역설적이게도 성종조를 비롯한 향후 약 400년간 이어질 베트남의 봉건 통치 체계를 견고히 하였으며 이러한 문치(文治) 외에도 남쪽으로의 정복 활동도 성공을 거두는 등 후 레 왕조 역사상 최고의 군사력을 보유했다.

중세 월남사를 논할 때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인물로 꼽힌다. 우선 대외적으로 참파란쌍을 상대로 벌인 전쟁에서 승리하여 참파를 사실상 멸망시키고 란쌍을 복속시켰다. 이 가운데 란쌍은 살아남아 오늘날 라오스가 되었지만, 참파는 끝내 부활하지 못하고 완전히 병합되었다. 즉 대월이 오랜 라이벌인 참파를 완전히 파탄지경으로 몰아넣고 인도차이나 동부의 패권을 차지한 것이 성종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대내적으로는 행정 기관을 개편하고 응우옌 왕조 시기에도 시행되는 숭유억불 정책을 처음 시행했으며, 법률 분야에서도 19세기 초반인 1815년까지 이어질 홍덕형률(洪德刑律)을 제정했다. 또한 오사련(吳士連/Ngô Sĩ Liên: 응오시리엔) 등의 역사가들을 등용하여 월남의 대표 역사서인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 편찬을 시행하여 영토, 행정, 문화 등 다방면에서 근세 베트남까지 이어질 업적을 남겼으며, 그의 업적은 시대와 혈통을 막론하고 우수성을 인정받아 레씨를 찬탈한 막 왕조의 태조 막당중도 성종의 정책을 바탕으로 개혁을 시도했을 정도이다.

2. 생애

2.1. 어린 시절과 재위 초기

1442년,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오씨(吳氏) 사이에서 태종의 4남으로 태어났다. 4남인 사성은 제위 계승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에 자기 단련에만 집중했다. 1445년, 형 인종에 의해서 평원왕(平原王)에 책봉되었고, 재경(在京)하여 승룡에서 학문을 닦았다. 사성이 자기 단련에만 집중하던 중 이복형 폐태자 여의민이 황제 인종과 그의 모친 선자태후(宣慈太后)를 죽이고 황제가 되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여의민은 오랫동안 재위하지 못하고, 바로 폐위당해서 죽임을 당하고, 신하 완치(阮熾)와 정렬(丁列) 등이 사성을 추대하였다. 사성은 후 레 왕조의 제5대 황제로 즉위하였으며 연호를 광순(光順)으로 개원하였다.

성종은 타인호아 집단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델타 세력을 포용하여 유교적 이념에 기반한 베트남의 전성기를 만들었다. 그는 황제 직속의 6부 체제를 개편하였고 과거제를 실시하여 관리를 등용한 후 나라를 다스리게 하였다. 본래 6부는 조선과 같이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및 6과(科)인 중서과, 해과, 동과, 서과, 남과, 북과로 운용되었는데 6과의 이름을 각각 이과(吏科), 호과(戶科), 예과(禮科), 병과, 형과, 공과 등 6부처럼 맞추었고 이들에게 6부를 견제할 권한을 주어 서로 간의 권한 독점을 방지하게끔 하였다.

지방은 13개의 도(道)로 나누었고 도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에 의해 관할되었으며 촌락 단위와 토지의 인력을 파악하기 위해 토지 대장과 호적 대장도 만들었다. 그리고 판도 내의 이민족 관리에도 관심을 기울여 그들을 베트남의 통치 조직 내로 편입시켰다. 이후 중국 제도를 참고하여 문무관을 비롯한 모든 관료들에게 일정한 토지를 지급했고 지금의 연봉에 해당하는 급여의 양을 명확히 하였다. 또한 정승을 비롯한 관원(官員)은 65세, 일반 이(吏)는 60세까지를 정년으로 삼았다.

2.2. 토지 및 윤리 개혁

성종은 토지를 1, 2, 3등급으로 구분했고 인정세(人丁稅)를 실시했으며 곡물, 비단 외에도 현금으로 납부하게 했는데 현금 납부 정책의 배경은 당시 농공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기에 상품을 쉽게 거래할 수 있는 화폐의 원활한 유통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맞춰 성종은 매년 일정량의 화폐를 시중에 유통시키는 것을 꾀했고 1460년대 광순(光順) 연간에 광순통보(光順通寶)[1]를 실제로 주조하였다. 그러나 광순통보는 일부 상인들에게 악용되어 불순물과 위조 화폐가 섞이는 문제를 일으켰기에 성종은 이 같은 악용을 엄벌에 처한다는 공고를 내세운 후, 다시금 홍덕통보(洪德通寶)[2]를 주조했다. 홍덕통보는 광순의 실패에서 배워 만들어 졌기에 위와 같은 문제점이 없어졌으며 품질 역시 우수했기에 레 왕조의 전성기를 상징함과 동시에 21세기 기준 우수한 베트남 화폐 중 상위권으로 꼽힌다. 농업 역시 중시했기에 하제관(河堤官)과 권농관(勸農官)의 직책을 설립, 임명시켜 제국의 농업을 관할하게 했고 황무지의 수를 파악하게 하여 개간을 계획했고 42개의 둔전소를 마련해 관리들도 농업에 기여하게 하였다. 그 결과 평소 대비가 철저하게 되어 기근의 발생률이 감소하였다.

성종은 윤리에도 관심을 보였는데, 당시 대월은 불교를 숭상했고 그에 따른 사찰을 많이 지었다. 이처럼 다량의 사찰 건립은 경제적으로도 문제가 되기에 이를 자제하게 했으며 당시 대월의 예법이 올바르지 않은 점, 즉 장례식임에도 춤과 노래를 불러 관락하는 행위를 지적하고 이를 금지하게 하였다. 또한 성종이 개편하기 전까지만 해도 대월의 혼인 풍습은 3, 4년이 지나서야 신부를 신랑의 집에 받아들이는 것이었고 시간 낭비가 심하였다. 성종은 이를 폐지하고 1일 차에 신랑과 신부를 마주하게 하고, 2일 차에 서로 간의 부모를 뵙고, 3일 차에 사당에서 식을 끝마추게 하였다. 최종적으로 그는 24조 윤리(二十四條倫理)를 제정하여 도덕규범을 확실하게 하였다. 이 외에 제생당(濟生堂)이란 병원을 세웠는데 이는 한 마을에 전염병이 돌면 의원이 직접 약을 갖고 치료하러 갈 수 있는 병원이였다.

성종은 상술했듯 불교를 탐탁지 않아 했고 봉건적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유교를 사용했다. 즉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으며 이는 성종조(聖宗朝) 초반부터 행해지던 방식이었다. 관리를 선발할 때에도 대상의 도덕성을 중시했으며 설령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인성에 결함이 있으면 선발하지 않았다. 과거 시험은 논어, 맹자, 오경 등 유가의 내용을 바탕으로 출제했고 국자감에 오경박사를 임명하여 교육 역시 유교를 중점으로 두었다. 상술했듯 그는 덕(德)을 중시했고 그에 따른 효(孝)를 인본(仁本)으로 여겼기에 삼년상을 의무화했다.

허나 성종이 중시하는 철학(哲學)과 다르게 당시 대월은 불교가 성행하고 있었다. 성종은 불교원을 사회 최하층으로 강등시켰으며 승려들의 절과 영지를 모두 몰수하여 국유화했고 그에 따라 많은 승려들이 환속하였다. 이후 불교는 제한이 심해져 전용 불교 고시에 합격해야만 승려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징세 제도와 병제를 정비하고, 당률(唐律) 및 명률(明律)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홍덕형률》(洪德刑律)을 반포했다. 이 《홍덕형률》은 중국의 법률을 따왔으며 베트남의 독자적인 규정을 내포했다. 그리고 베트남 성문법인 《국조형률》에 민족 고유의 관습법을 반영시켰으며 사서 중심의 성리학을 보급하기 위해 노력했다. 문묘를 세웠으며, 과거 합격자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진사제명비를 세웠다. 또 쩐 왕조 때 편찬되었던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를 오사련(吳仕連)에게 명하여 다른 사료를 참조, 《대월사기전서》를 개정 증보하고, 편목(編目)을 바꾸어 완전한 《대월사기전서》 15권을 완성했다.

2.3. 대외 정책

재위 초반 명나라의 평향현(平鄕縣)을 점령했다는 이유로 영토 분쟁이 생겼는데, 초반에는 단순한 노략질로 간주하여 명나라는 국경 방어만 철저히 하라고만 했으나 이후 대월인이 강물을 약탈하는 등 그 정도가 심해졌고 명나라가 불만을 표출하자 성종은 관원을 보내 수사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기에 명의 용서를 바란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1470년 참파 제15왕조 제2대 왕인 반 라체트안이 화주를 침공하자, 그해 11월 28일 성종은 10만 군사[3]를 이끌고 해로를 통한 원정을 개시하여 2월 24일 본격적으로 전투를 벌였다. 500척의 함선에 분승한 대월 병력 3만이 참파 병력 5천을 견제하는 동안, 성종은 1천 척의 함선에 분승한 다른 7만 명을 직접 이끌어 참파의 진지를 우회, 참파의 해안에 상륙하여 전투를 벌였다. 그동안 서쪽 산맥에서도 대월 병력이 내려와 해안에서 후퇴하던 참파 병력을 3면으로 포위했다. 대월은 우월한 화기를 바탕으로 참파를 격파하고 수도인 비자야로 진격, 4일간의 공성전 끝에 3월 22일 비자야를 점령했다. 곧이어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하여 최소 6만 명을 살해하고 이후 추가로 4만 명을 처형, 3만 명을 포획했다.[4] 반 라체트안도 비자야에서 생포하여 수도 승룡으로 압송했다.

이로써 참파는 사실상 멸망했다. 성종은 황제국을 자칭하던 입장에서 번국이 필요했으므로 참파를 완전히 병합하진 않았으나 대부분의 영토를 빼앗고 남은 영역마저 분열시켜 다시는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손을 써놨다. 1471년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참파인들의 운명도 가혹했다. 1509년 성종의 손자 위목제가 승룡 인근에 거주하던 참파의 잔여 왕족과 포로들을 모두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명의 성화제는 참파가 대월에 사실상 멸망당했다는 소식에 심기가 불편해져 명을 방문한 대월 사신을 통해 다음의 말을 전하며 점령지를 반환하라고 협박했다.
「朝廷一旦赫然震怒,天兵壓境,如永樂故事,得無悔乎?」
조정(명나라)이 분노하면 천자(天子, 명 황제)의 병사들이 대월의 영토를 유린할 것입니다. 마치 영락제 때와 비슷한 양상인데 후회 안 하시겠습니까?
성종은 한동안 이를 두려워했으나 결과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5] 명실록(明實錄)에 의하면 이후 서쪽으로는 라오스란쌍 왕국을 공격하여 대월-란쌍 전쟁(Dai Viet-Lan Xang War)를 일으킨다. 이때 진녕(鎭寧)[6]를 빼앗고 태국 북부에 있던 란나 왕국의 난(Nan) 지역까지 침공하여 메콩강 유역까지 진출, 영토가 버마의 남쪽에 도달했다고 한다. 다만 란쌍과 란나 왕국의 반격으로 전쟁에서 패배하고 퇴각하여 진녕 지역에 대한 영유권만을 인정받았다. 이후 성종이 시솽반나 왕국(Sipsongpanna Tai)[7]의 치앙룽(Chiang Rung,혹은 Xiang Hung) 지역과 란나 왕국의 난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자 란나 왕국 국왕 틸로크(Tilok)가 이에 분노하며 다시 전쟁을 일으키려고 했었다. 그 뒤로도 계속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이어갔는지 1482년 8월 26일에는 명나라에 란쌍 왕국과 란나 왕국이 각각 시솽반나 왕국이 대월과 동맹을 맺으려 하니 란쌍 왕국 자신들도 명나라와의 동맹을 원한다는 내용과 대월이 미얀마의 Meng-ban 지역, 란쌍 왕국의 북부를 침략했다는 내용의 보고를 올린다. 1485년에는 다시 9000명의 병력으로 란쌍 왕국을 침략하지만 이번에는 믈라카 술탄국이 지원군을 보내서 3,000명의 희생자를 내고 후퇴한다. 1488년에는 미얀마 잉와(Ava) 왕국이 명나라에게 대월이 침략해왔다고 호소한다. 성종의 재위 기간 동안에는 후여조 최대의 전성기였으며 국내, 국외 쪽으로 많은 업적을 세웠다.

2.4. 사망

1496년, 성종은 갑자기 풍종(風腫)에 걸렸다.

1497년, 성종은 3월 30일 풍종으로 인해 광궁(光宮)에서 붕어했다. 향년 56세였다. 사관 무경(武瓊)은 성종의 붕어를 고했으며, 1498년에 그 뒤를 이어서 즉위한 헌종(憲宗)은 그를 소릉(昭陵)에 안장시키고, 장례를 치렸다. 묘호는 성종(聖宗), 시호는 숭천광운고명광정지덕대공성문신무달효순황제(崇天廣運高明光正至德大功聖文神武達孝淳皇帝)로 추시했다.

당시 사관인 무경(武瓊)의 말에 따르면, 오랫동안 성종의 총애를 잃은 장락황후(長樂皇后)가 마지막에 가까워지자 성종의 시중을 허가받았는데 황후가 손에 독을 발라 부스럼을 만지자 성종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죽었다고 한다. 무경의 발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불명이나 성종이 죽었다고 해서 장락황후는 처형되지 않았으며 그녀는 헌종에 의해 태후로 격상되었다. 성종의 유해는 소릉(昭陵)에 안장되었고 신인충(申仁忠), 담문예(覃文禮), 유흥효(劉興孝) 등이 손수 비석을 작성하니 그를 소선제(昭先帝)라 칭하였다.

성종의 사후, 그가 구사한 전성기가 무색하게도 뒤를 이은 아들 헌종(憲宗)과 손자 숙종(肅宗)이 요절하고, 숙종의 뒤를 이어 무능한 황제들이 연달아 즉위하자 대월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3. 가족

3.1. 선조(先祖)

3.2. 형제

3.3. 처첩

3.4. 자녀

3.4.1. 황자

성종은 14명의 황자(皇子)와 20명의 황녀(皇女)를 낳았다.

3.4.2. 황녀

4. 참고 항목



[1] 성종의 연호인 광순을 따서 광순통보라 함.[2] 성종의 두 번째 연호(年號)인 홍덕을 따서 이름 지어짐.[3] 비전투병 15만 명 제외.[4] 인구가 많지 않은 중근세 인도차이나에서 이 정도 패배는 멸망하지 않은 게 다행인 수준이었다. 비교하자면 1500년 대월 인구가 200만이다.[5] 영락제 시절에 대월이 명군에 철저히 유린당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명군도 결국 대월의 처절한 항전에 GG를 쳤으며 그 항전을 토대로 건국된 것이 바로 여씨 왕조였다.[6] 현재 라오스의 씨앙쿠앙 주(XiangKhouang Province)[7] 중국 윈난성 시솽반나 다이족 자치주에 있었던 샨족 계열의 왕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