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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6년 09월 27일 |
출생지 | |
사망 | 1945년 04월 03일 (39세) |
함경남도 원산 | |
묘소 | 독립유공자가 안치된 단일묘소가 북한지역에 있는 묘소 |
가족 | 배우자 이노대, 슬하 자 기주, 기송, 기덕, 선희, 손, 혜연,칠, 우석, 미라, 경화 |
서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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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2. 생애
1906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다.1930년 함남 원산(元山)에서 원산청년동맹회(元山靑年同盟會)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원산청년동맹회는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단체로, 일제 식민지지배체제를 배척하고 청년을 대상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청년운동을 펴다가 체포되어 1932년 3월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서대문 형무소 고문 후유증으로 39살에 순국하셨다.
3. 대중매체
4. 사망
아들 장씨의 증언에 따르면 “아버지가 돌아가실 당시 9살이었는데 은닉생활로 두 번밖에 보지 못했다”면서 “돌아가실 당시 7명의 동지들과 함께 항일 독립운동을 벌이다 체포된 6명의 동지를 대신해 옥살이를 대신했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소한 뒤 항일투쟁을 벌이다 그토록 원하던 독립을 보지못한 채 광복을 4개월여 앞둔 1945년 4월 3일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했다”고 말했다.장씨는 또 “아버지의 순국 이후 원산에서 내려와 곧바로 원북면 동해리에 터를 잡고 남의 농사를 지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며 “하지만 아버지의 묘소는 현재 이북에 있고 당시 항일운동을 함께 했던 동료분들로부터 공동묘지 모처에 묘소를 썼다는 이야기를 들어 묘소 위치는 알고 있지만 갈 수 없는 실정”이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손녀 박씨의 의하면 1945년 4월 감옥에서 고문 당하던 중 거의 사망하기 직전에 쌀 가마니에 둘둘말아 밖으로 버려져 친구들이 집으로 메고 왔다고 들었다고 한다. 사망 후 낮에 묻기 두려워서 밤에 몰래 묻혔다고 한다.
5. 기타
손녀 박씨에 의하면 일본에서 유학하였고 서울 종로구에서도 활동했다고 한다.원산청년동맹회가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단체라는 이유만으로 반세기 동안 독립운동이 인정되지 않았으나, 2005년에 노무현 정부에 이르러 고인의 공훈을 인정하고 건국포장을 수여받게 되었다.
장태형 애국지사의 자녀들 중 일부는 6.25 전쟁 이후 충청남도 태안군에 터전을 잡았으나 생계유지에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 왔다고 한다.
손녀인 박씨에 따르면, 어릴 적에는 장태형 애국지사의 손녀인 어머니가 사회주의자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숨기며 살아왔다고 하며, 성인이 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고 한다.
2022년에 배우자 고 이노대(1905-1994)여사의 유골이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 본안실 #514136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