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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30 13:01:32

환석수(동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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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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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桓石秀
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인물. 예주 초국(譙國) 용항(龍亢) 출신으로 환온의 동생인 환활의 아들이다. 기마와 사격에 능했다고 한다. 동생 중 환석수가 있지만 한자가 다르다.

2. 생애

어려서부터 명성이 높고 풍채가 뛰어났으며, 여러 책을 두루 섭렵하면서 노자, 장자 사상을 선호했다. 또, 환석수는 항상 방을 혼자 쓰고 사람과 교류하는 일이 드물어 당대 사람들로부터 명망 높은 유학자 유순(庾純)에 비견될 만하다는 평을 들었고, 사대부를 좋아하던 회계왕 사마욱 또한 그를 중시했다.

영녕 3년(365년) 2월, 아버지 환활이 형주자사에 임명되었을 때, 환석수도 응양장군, 경릉태수에 징소되었으나 기뻐하지 않았다.

영강 원년(373년) 7월, 대사마 환온이 죽고 환충에게 모든 군권을 물려받자, 환석수는 영원장군, 강주자사, 영진만호군, 서양태수에 임명되어 심양(尋陽)에 진수했다. 그러나 워낙 자유분방한 성격탓에 늘 산과 강을 노닐며 정사에 뜻을 두지 않았다. 한번은 사안이 세상일을 논의하려고 환석수를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말을 아무리 걸어도 환석수가 대답도 하지 않으니, 사안은 이를 심히 괴이하게 여기고 그냥 돌아갔다. 다음 날, 사안은 사촌동생 사사(謝嗣)에게 이 일을 전했고, 사사는 다시 환석수를 찾아가 그 날의 일을 물으니, 그제서야 환석수가 대답했다.
"공(사안)께서 이미 세상일에 통달하셨는데 내가 어찌 말을 꺼낼 수 있겠는가!"

태원 3년(378년),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모든 벼슬을 내려놓았다. 이후 집에서 여생을 보내던 중 4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자, 조정 내외로 이를 애석히 여겨 후장군으로 추증했다가, 얼마 뒤에는 태상으로 다시 추증되었다. 훗날 환현이 황제를 칭할 때 환석수의 적자 환유옥을 임원왕(臨沅王)에 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