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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파/대한민국/20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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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목록
2.1. 1900년대2.2. 1910년대2.3. 1920년대2.4. 1930년대2.5. 1940년대2.6. 1950년대2.7. 1960년대2.8. 1970년대2.9. 1980년대2.10. 1990년대

1. 개요

20세기에 한반도(대한민국, 북한)에 찾아온 한파를 나열한 문서.

1900년은 20세기가 아니지만, 19세기에 넣으면 1900년대의 개념에서 벗어나서 더욱 부자연스러우니 20세기 문서에 정리하였다.

구한말 인천 월평균기온은 링크 참고.

1908년 이후 서울 월평균기온, 월평균 최고기온, 월평균 최저기온 표는 링크 참고.

2. 목록

2.1. 1900년대

1900년대는 1890년대의 겨울 양상이 이어지면서 12월보다는 1월, 특히 2월 한파가 잦은 양상이 계속되었다. 심지어 1905년 1월처럼 심한 이상 고온이 기승을 부릴 때도 2월은 한파가 길게 지속되어 추운 편이었다. 물론 1907년처럼 12월이 추운 해도 존재했으나 대부분 2월이 더욱 추운 양상을 보였다.

2.2. 1910년대

사실상 서울 기상 관측 사상 극단적 성격을 지닌 겨울의 끝판왕이라고 봐도 무방하며 12월, 1월, 2월 모두 전설적인 한파 기록이 대다수 포진해 있는 연대이다. 특히 1915년 1월의 역사적인 단일 한파와 1916~1917~1918년으로 이어지는 두 겨울 시즌이 기상 관측 역사상 전례가 없는 수준의 대한파(大寒波)였다. 또한 서울에서 -20℃ 이하를 가장 많이 기록한 연대이기도 하다. 물론 1915~1916년 겨울처럼 극단적으로 따뜻한 겨울도 있었으나, 극단 한파의 빈도가 훨씬 높았다.

파일:1916년12월26일.jpg
위 자료는 기습 한파가 찾아왔던 1916년 12월 26일 낮 12시의 일기도이다. 매우 길게 남쪽으로 뻗어있는 시베리아 고기압을 볼 수 있으며 희미한 기온선을 자세히 보면 서울개성, 황해도 해안 지방은 -10℃에서 -15℃ 사이에 위치해 있고 평양원산 등 그보다 북쪽에 있는 지역은 -15℃에서 -20℃ 사이에 해당되고 압록강, 두만강 라인에 속하는 일부 지역들은 낮 기온조차 무려 -20℃에서 -25℃ 이상 오르지 않는 매우 강한 한파가 기승을 부렸다는 것을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또한 낮 12시에 기록된 것을 보면 이 기온 기준선은 최저 기온 기준이 아닌 낮 기온 기준일 가능성이 높다.

2.3. 1920년대

1910년대의 극단적 성격의 겨울 양상은 누그러들었지만 여전히 매우 추운 겨울이 많았다. 특히 서울의 경우는 1927년 12월에 역대 최저 기온을 기록했을 정도로 한파의 강도는 1910년대 못지않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이 연대에는 1915~1916년 겨울처럼 따뜻한 겨울도 전무했다. 물론 해마다 강도의 차이는 있으므로 이 문서에서는 중요한 시즌만 서술하였다.

2.4. 1930년대

일제강점기의 매우 추운 겨울은 193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다만 이 연대는 1935년, 1937년 12월을 제외하면 대부분 현대의 12월에도 기록할 만한 12월 평균 기온을 보여 비교적 12월이 따뜻한 편이었다. 대신 1월이 1910년대에 밀리지 않을 정도로 매우 추운 해들이 많았고 2월도 따뜻하지 않았다.

파일:1933년1월13일중강진혹한.jpg
아래는 1월 13일 오전 6시 일기도의 일부이다. 중강 혼자서 -40℃ 이하를 기록한 것이 눈에 띈다.

파일:1935년12월.jpg

파일:1936년1월.jpg
이 자료를 보면 유럽 지역에 비교적 이상 고온이 일어났다는 사실과 달리 중앙아시아, 동북아시아 지역이 강한 한파를 보였는데 몽골 일대와 북시베리아는 아예 새파랗게 변했다. 여러모로 얼마나 기록적인 한파였는지 보여주는 셈이다.

2.5. 1940년대

1940년대는 일제강점기가 끝나가는 만큼 20세기 초반(1900~1930년대)에 비하면 점차적으로 겨울이 따뜻해지고 극단적인 한파의 빈도가 줄어드는 시기였다. 물론 당시에는 지구 온난화로 인한 이상 고온과 도심의 열섬 현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과거에 비해 한파가 약해지고 월평균 기온이 높아지는 현상이 시작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2.6. 1950년대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겨울이 따뜻해져서 현대와 비슷한 기온을 보이는 1월이 늘어났고 서울에서는 최초로 -20℃ 이하를 기록하지 않은 연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월평균 기온상으로는 현대에 비하면 훨씬 추운 해가 많았는데, -6℃ 미만을 기록한 사례는 없었지만 -5~-6℃ 정도의 애매하게 낮은 월평균 기온을 기록한 적이 많았다. 그리고 나머지 해들도 월평균 기온이 낮지는 않지만 산발적으로 강한 한파가 찾아오는 양상을 띄었다.

2.7. 1960년대

1963년 1월을 제외하면 월평균 기온이 극단적으로 낮은 달은 찾아볼 수 없지만, 서울 최저 기온이 -18℃ 이하를 기록한 달이 많았다(1963년, 1965년, 1966년, 1967년 1월과 1965년 12월). 다만 최저 기온 극값 자체는 -18.4℃로 모든 연대마다 -18℃ 이하를 기록한 21세기(2000~2020년대)와 거의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더 높기도 하다.[70]

2.8. 1970년대

1970년대에 접어들어 겨울이 매우 따뜻해져서 1월 평균 기온이 영상권이고 평년보다 3~5℃ 높은 초이상 고온인 해가 많았다(1972년, 1973년, 1979년). 이중 1972년과 1973년은 2년 연속으로 한강이 얼지 않았고, 이 여파로 10년 동안 1월 평균 기온이 1℃ 가까이 올랐다. 대신 12월과 2월은 이상 저온도 꽤 있었다.

2.9. 1980년대

1980~1986년까지는 1970년대에 비해 겨울이 다소 추워진 양상을 보이며 일제강점기의 명성에는 못 미치지만 장기 한파를 보이는 겨울이 늘어났다. 또한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2월 평균 기온 -3℃ 이하를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1987년 이후로는 더 이상 극단 한파가 찾아오지 않고 있으며 한파의 강도도 약해져 사실상 현대와 같은 기온을 보이는 겨울이 주를 이루고, 이상 고온을 보이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2.10. 1990년대

1980년대까지는 한파 겨울이 우세한 날씨였으나, 1990년대 들어 2000년대까지는 고온 겨울이 더 우세한 날씨가 찾아오게 된다.서울 기준으로 1970년대, 2000년대와 함께 1월이 가장 따뜻했던 연대이다. 아이러니하게도 2010년대에 들어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되고 이상 고온이 잦아지는 추세임에도 불구하고 겨울은 오히려 1990년대에 비해 더 추워졌기 때문이다.


[1] 해당 블로그에 기재된 월평균 기온의 경우 산출 방식이 현대와 달라서 현대의 방식으로 계산된 월평균 기온보다 0.5~1℃ 정도 높게 적혀있는데, 기록에 의하면 19세기 당시에는 오전 9시, 오후 3시, 오후 9시로 일 3회 측정에 대한 평균치가 바로 일평균 기온을 산출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에는 오전 3시, 오전 6시, 오전 9시, 오후 12시, 오후 3시, 오후 6시, 오후 9시, 오전 0시로 일 8회에 걸쳐 측정된 시간대별 기온을 합산하여 일평균 기온을 산출해낸다. 하루 중 기온이 대체적으로 가장 낮은 시간은 늦은 밤~새벽 사이인 오전 0~9시 사이인데, 19세기 일평균 기온 산출 과정에서는 오전 0~9시 사이(0시, 3시, 6시)를 모두 빼먹었으니 당연히 현대와 같은 산출 방식보다는 수학적으로 높게 산출될 수밖에 없으며 이에 따라 월평균 기온도 실제보다 다소 높게 계산될 수밖에 없는 방식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다.[2] 1928년 1월 5일 서울이 -22.2℃였을 때 인천이 -16.4℃였고, 1월 7일 서울이 -21.7℃였을 때 인천이 -14.5℃였다. 1918년의 경우도 1월 3일에 서울이 -21.8℃였을 때 인천이 -14.4℃였고, 1920년도 1월 4일에 서울이 -22.3℃였을 때 인천이 -16.4℃였다.[3] 공통적으로 1월 하순에 크게 추워지다가 1월 26~27일에 맹추위의 절정에 달했다.

1월 26일: 교토 -11.0℃, 기후 -7.3℃, 사가 -6.4℃, 군마 -8.9℃, 구마모토 -9.2℃, 미야자키 -7.5℃, 나가사키 -5.2℃, 가고시마 -5.1℃, 후쿠오카 -4.6℃, 오카야마 -6.1℃

1월 27일: 도쿄 -6.4℃, 도쿠시마 -5.2℃, 나가노 -14.8℃, 미에 -7.8℃, 아이치 -7.5℃, 시마네 -5.4℃, 효고 -5.5℃, 오이타 -5.1℃

등. 예외적으로 고치는 1월 24일에 -5.8℃를 기록한 뒤 점점 풀렸다.
[4] 그래도 겨울이라고 얼마 동안은 영하가 기록되었지만 고작 -3℃ 전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추위의 강도가 너무나도 약했으며, 그마저도 1월 16~25일에는 아예 영하가 기록되지 않았다.[5] 3월 1일 -5.7℃, 3월 2일 -5.0℃, 3월 5일 -5.2℃, 3월 6일 -5.2℃[6] 그리고 현재는 서울의 11월 5일 극값 기록을 1917년과 1909년이 가지고 있지만, 원래는 1905년이 3개 항목을 모두 꿰찼을 가능성이 크다. 11월 5일 서울의 극값 기록(MIN)이 각각 3.0℃, -0.8℃, -5.2℃인데, 1905년 인천의 기록만으로도 서울에 이 기록들을 압도하는 추위가 찾아왔음을 짐작케 하기 때문이다. 가을철에는 인천보다 기온이 약간 더 들쑥날쑥한 서울의 날씨 특성상 인천의 기록보다 더 낮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기존 기록보다 2~3℃는 더 낮게 경신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여하튼 잘 알려지지 않은 기록인 것은 사실이다.[7] 최고 기온 -3.9℃, 최저 기온 -6.9℃[8] 이후 116년 뒤인 2023년 12월 21일과 22일에 낮 최고 기온이 -8.0℃에 그쳤고, 최저도 -14.4℃까지 내려가 116년 전 이맘 때의 한파의 위력을 재현하였다. 그러나 21일조차 한끗발로 밀렸던 수준이라 22일의 추위는 1907년 12월 22일에 확실히 밀린다.[9] 12월 하순으로는 세번째로 낮다. 가장 최근 한파인 22일에도 낮 최고 기온이 -8.0℃에 머물렀음에도 그 체감 온도에 경악하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으니, 이 때의 한파와 체감 수준이 어땠을지는 설명 생략.[10] 앞 주석에 언급된 2023년 12월 21일, 22일 낮보다도 한술 더 뜰 정도이다. 지금보다 훨씬 열악한 방한 장비로 후세의 추위보다 한술 더 뜨는 추위를 꼬박 견뎌야 했던 그 시절 한파는 도대체.[11] 기상자료개방포털에 들어가보면 1월 30일의 최고 기온은 -1.6℃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전날이 따뜻해서 이제 막 기온이 떨어지는 과정에서 새벽 0~1시 쯤에 기록된 것일 뿐이고, 실질적인 낮 최고 기온은 -14~-15℃ 사이일 것으로 보인다.[12] 서울의 기온 타임라인을 볼 때 아침이 아니라 자정이 다 되어서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13] 12월 4일 -4.7℃, 12월 5일 -4.7℃, 12월 19일 -2.8℃, 12월 25일 -4.1℃, 12월 26일 -4.8℃[14] 이는 이례적으로 최저 기온이 빨리 떨어져서 그런 것으로, 9월도 중하순 대부분이 최저 기온 한 자릿수를 기록했고 10월 중순부터 영하로 떨어지며 11월에는 2020년 1월보다 월평균 기온이 낮았을 정도이다. 그 영향으로 1912년 서울의 9월, 10월, 11월 평균 기온이 모두 역대 최저 1위를 기록하며 강한 이상 저온을 보였다. 자세한 내용은 이상 저온/대한민국/20세기 문서 참조.[15] -20.6℃는 인천의 역대 최저 기온 공동 3위 기록이다. 참고로 아침 최저 기온이 아니라 일 최저 기온이라고 적은 이유는 이 역시 서울의 경우처럼 아침이 아니라 자정이 다 되어서 기온이 떨어지는 과정에서 찍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서울이 -20~-23℃ 정도로 매우 추워도 바다에 붙어있는 인천 특성상 인천의 최저 기온은 -20℃가 안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오후 11시~자정 사이에 이미 -20.6℃를 찍었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16] 1월 12일과 함께 역대 최저 기온 3위.[17] 대구 역대 최저 기온 3위. 1~2위는 모두 1923년 1월에 기록되었다.[18] 2월 4일 -13.6℃, 2월 5일 -16.3℃, 2월 6일 -15.7℃, 2월 7일 -13.5℃[19] 1917년은 1월의 월평균 최저 기온 -14.4℃로 역대 최하위이자 월평균 기온 -9.0℃로 역대 최저 2위, 1936년 1월은 일 최저 기온 -10℃ 이상인 날이 3일로 역대 최하위이자 월평균 기온 -8.8℃로 역대 최저 3위, 1963년 1월은 월평균 기온 -9.2℃로 역대 최하위이다. 사족이지만 만약 1917년 1월 중순에 몇몇 날이 최저 기온이 높지 않았다면 월평균 기온 -10℃ 이하, 월평균 최저 기온은 -15℃ 이하를 기록했을 수도 있다.[20] 특히 그 전에 있었던 1915~1916년 겨울은 그때 당시에 비하면 2019~2020년 겨울만큼 심한 이상 고온 현상을 보였다. 이는 열섬 현상이 없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지금까지도 서울의 1월 평균 기온 상위 6위로 평년보다 굉장히 높은 기온을 보였다. 1971년까지는 아예 1월 평균 기온 최고 1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서울의 월평균 기온은 12월 0.8℃, 1월 0.0℃, 2월 0.8℃로 이상 고온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1916년 3월에는 꽃샘추위가 심해서 전년도 12월과 2월보다도 월평균 기온이 낮은 기현상이 발생했다. 자세한 내용은 이상 저온/대한민국/20세기 문서 참조.[21] 이는 아마도 오전 7시 사이(해 뜨기 직전)에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 기상청의 시간별 자료에는 누락되어 있지만 오전 6시에 -18.5℃라면 기온 하강이 더욱 진행되면서 해 뜨기 직전인 약 오전 7시경에 -19.0℃를 기록한 듯.[22] 특히나 서울은 1월 2일 단 하루를 제외하면 1월 1~12일까지 모든 날이 최저 기온 -13℃ 이하였으며, 1월 3~12일까지 열흘 동안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최저 기온 -15℃ 이하, 1월 4~11일로 축소하면 하루도 빠짐없이 최저 기온이 -17℃ 이하를 기록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한파가 이어졌다(정확히는 1월 7일이 -16.9℃이므로 반올림 -17℃ 이하이다).[23] 2월 1일 -17.6℃, 2월 2일 -16.9℃, 2월 3일 -16.8℃[24] 은산의 -37.6℃ 기록은 그렇다 쳐도 황해도 지역인 신계에서 -31.4℃를 기록했다는 것은 의아할 수 있는데, 신계는 북한 강원도 이천과 접하고 있으므로 철원과 비슷한 기후를 보이는데다 당시 일제강점기임을 감안하면 이해되는 부분이다. 또한 두 지역이 산으로 둘러싸이다시피 한 지형이고, 그 전에 내린 이 태양열을 반사해서 기온이 더욱 떨어졌을 가능성도 있다.[25] 12월 26일이 가장 한파가 강했으므로 아마 12월 26일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1916년 12월 26일 오전 6시 일기도를 보면 중강과 같은 북부 내륙 지방에 -35℃ 기온선이 보인다.[26] 이는 아마 1월 8일이나 1월 22일 두 날 사이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전국적으로 한파의 강도가 이날에 가장 강했으므로 이를 추측해보는 것이다.[27] 인천의 이 기록은 월 상관없이 1915년 1월 13일, 1931년 1월 10일에 이은 낮 최고 기온 역대 최저 3위이다. 12월에 이러한 낮 기온을 보였다는 점이 경이롭다.[28] 이때는 열섬 현상 같은 것이 없었다는 사실을 감안해도 추웠고, 서울의 12월 평균 기온 역대 최저 2위이며 1위는 1944년 12월(-5.8℃). 사사오입을 하지 않으면 1944년 12월과 함께 공동 최하위이다. 무엇보다 1917년 12월 한파가 놀라운 점은, 12월 시작부터 강력한 한파가 지속되어 한 달 내내 추웠던 1944년 12월과 달리 1917년은 중순까지 별다른 한파 없이 평년과 비슷한 기온을 보이다가 12월 15일부터 본격적인 한파가 시작되었는데, 한파의 기간이 1944년 12월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월평균 기온이 1944년 12월과 거의 같았다는 점에서 1917년 12월 한파가 얼마나 비현실적으로 강력했는지 알 수 있다.[29] 통계청 참고 자료에 따르면 1917년 12월 평양의 월평균 기온이 -10.8℃를 기록했고 최저 기온은 -24.3℃를 기록했다고 한다.[30] 실제로 라니냐의 강도는 1917년 1월이 가장 강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11~12월 들어 다시 낮아졌다. 슈퍼 엘니뇨로 평년보다 매우 높았던 2015년 12월과는 정반대 관계이며 이후 급속도로 약화되어서 1918년 2월에 정상 범위로 돌아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원래 추운 겨울이 예상되었는데 매우 기록적인 라니냐까지 겹치면서 1917년 12월의 비현실적인 한파가 닥친 것으로 보인다. 또한 1918년 1월은 1917년 12월에 종속되어 있는 경향이 강하다. 1월 10일 이후부터는 추위가 점차 약해졌으며 1월 하순까지 이렇다 할 한파가 없었고 2월 상순에는 오히려 이상 고온까지 일어났다. 2월 중순에 다시 추위가 오기는 했지만 심하지 않았고 2월 하순은 아예 대놓고 이상 고온을 보였다. 지금 기준으로도 꽤 높다.[31] 하지만 1919년 2월 5일의 -18.3℃ 기록은 2월 역대 최저 기온 4위에 해당하는 만큼 의미가 크다.[32] 1월 1일 -7.3℃, 1월 9일 -5.5℃, 1월 12일 -4.7℃, 1월 14일 -7.4℃, 1월 15일 -1.5℃[33] 단 1909년 이전에는 월평균 기온이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띄엄띄엄 관측되었을 가능성이 크다.[34] 수상당량비는 1mm당 적설의 를 의미한다. 기온이 낮고 습도가 낮을수록 수상당량비가 커지는 경향을 보이는데 예를 들어 수상당량비가 10이라는 의미는 1mm의 강수량이 10mm=1cm의 으로 내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5℃ 이하의 낮은 온도에서는 수상당량비가 15 이상에 달한다. 예시로 2010년 중부권 폭설 사태 때 -6℃ 안팎의 낮은 기온에서 눈이 내렸는데 당시 서울의 하루 강수량은 14.2mm밖에 안 되었지만 총 25.8cm의 눈이 내려 수상당량비가 18.2에 달했다.[35] 아무리 추운 한파여도 -16℃ 이하는 자정이 다 되거나 새벽이 되어서 나오는 기온인데 해가 지자마자 오후 6시에 -16℃ 이하를 기록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기온이 떨어지는 페이스가 엄청나게 빨랐던 것.[36] 대구 기준으로 1915년 1월 13일(-11.3℃)과 1월 14일(-9.5℃) 다음으로 낮은 최고 기온 기록이다.[37] 1월 역대 최저 기온 5위[38] 게다가 1910년 12월 11일경에 -16.8℃를 기록한 것보다도 이틀 더 빠르다![39] 사실 이쪽이 더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신문 기사에도 나와있듯이 -23.1℃라는 수치는 진짜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1927~1928년 겨울 사이에 서울 공식 기상관측소의 온도계 자체가 오작동 등의 이유로 지나치게 기온이 낮게 찍혔을 가능성이 유력하다. 반면 진실이라는 의견도 있는데 해외의 사례를 보면 1월이 가장 추운 지역에서 12월, 2월에 역대 최저극값이 나오는 지역이 있듯이 12월, 2월에 더 강한 한파가 오면 이쪽이 역대 최저극값을 가질 수도 있다. 그리고 12월이라도 31일이라 사실상 1월이나 큰 차이가 없다. 이당시 관측소가 수도권엔 서울, 인천, 강원도에는 강릉밖에 없었으며 1933년 경성측후소가 송월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는 서울에서도 복사냉각이 심하게 나타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낙원동이랑 송월동이랑 몇블럭 차이라 송월동에 있어도 1~2도정도만 높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래도 컴퓨터가 발달하지 않은 시기이기에 논란이 오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강원도 이런 지역을 보면 한파 시스템이 생각보다 복잡해서 시베리아 기단만으로 결정나는 것이 아니라 역전층, 반사율 이런 영향까지 더해서 믿을 수 없는 극값이 나타나기도 한다. 외려 19세기엔 당시 기준으로는 큰 도시였어도 현대 기준으로는 소도시 수준인 특성상 기후가 경기북부, 수원과 비슷해서 수원처럼 -25~-26도 내외의 한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40] 주변 달과의 관계를 고려할때 11월에 비해 11.2도, 1월에 비해 0.6도, 2월에 비해 3.5도 낮아서 이들 세 달에 비해 12월 극값이 유난히 낮지만 그것은 12월 31일에 서울에서 비상식적인 한파+복사냉각 콤보가 겹쳐서 그런 것이며 19세기에 측정했다면 이때는 서울이 바다에서 어느정도 떨어진 특성상 인천보다는 수원과 기후가 비슷했다 볼 수 있다. 물론 한강때문에 서울이 좀 더 높긴 했겠지만. 11월, 1월, 2월에 비상식적인 한파+복사냉각 콤보가 겹쳤다면(21세기 이후로는 불가능) 이쪽도 얼마든지 낮아질 수 있었다. 한파/대한민국/19세기 문서를 보면 서울 기준 비공식 기록이지만 11월에 -13.5도, 2월에 -22도를 기록했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리고 야간대기복사냉각으로 3월 25일에 -10.2도, 9월 14일에 6.1도까지 떨어진 적이 있는 만큼 19세기에 측정했다면 4월, 8월도 현재 역대 최저 1위보다 압도적으로 낮은 비상식적인 기록이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41] 그러나 1930년 12월과 1931년 1월 상순이 당시 기준으로 평년보다 따뜻했을 뿐 이상 고온일 정도로 기온이 높은 것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서울은 1930년 11월에 매우 기록적인 이상 저온을 보여서 월평균 기온이 3.1℃로 역대 최저 2위였다. 게다가 1931년 4월도 후술하다시피 이상 저온이 매우 심해서 월평균 기온 역대 최하위를 기록했다. 결과적으로 1930~1931년 겨울은 11월 2일부터 시작되어 이듬해 4월 19일까지 169일간 이어졌으며, 이는 서울에서 역대 가장 긴 겨울로 남게 되었다.[42] 시간대별로 보면 알겠지만 낮 최고 기온은 이보다 훨씬 낮았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1월 9일 오후 11시~자정이 다 되어서 -14.2℃를 기록했으므로 1월 10일 오전 0~1시 사이 새벽 근처에 잠시 올라 1월 10일의 일 최고 기온 -13.0℃를 찍은 듯하다.[43] 3월 1일 -10.7℃[44] 최저 기온은 4월 8일의 -1.0℃[45] 1963년 1월(-9.2℃), 1917년 1월(-9.0℃)에 이은 1월 평균 기온 역대 최저 3위다. 심지어 중강은 1936년 1월 월평균 기온 -25.3℃로 역대 최저 3위 기록을 세웠다.[46] 1월 2일 -9.4℃, 1월 25일 -9.5℃, 1월 28일 -7.5℃[47] 여담이지만 링크에 들어가면 쇼와 6년(1931년) 1월 11일에 서울이 -22.0℃를 기록했다고 하는데 이는 오타이다. 1931년 1월 11일에 서울은 -22.5℃를 기록했다. 또한 서울의 역대 최저 기온이 쇼와 2년(1927년) 1월 31일에 기록되었다고 나오는데 실제로는 그해 12월 31일에 -23.1℃로 역대 최저 기온을 기록했다.[48] 정확한 값은 -0.25℃인데, 기상자료개방포털에는 음수를 오사육입하기 때문에 -0.2℃로 기록되어 있다.[49] 4월 1일 -2.0℃, 4월 3일 -0.5℃, 4월 10일 -0.1℃[50] 12월 11일 -11.4℃, 12월 12일 -11.4℃, 12월 15일 -13.6℃, 12월 19일 -11.4℃[51] 그러나 그 뒤에도 4월 15일까지 0℃ 전후를 기록한 날이 있었고, 심지어 영하로 떨어진 날도 있었으며, 5월의 경우 5월 4~6일에는 3~5℃까지 떨어지고, 6월 상순에는 11~13℃를 계속 유지하였으며 6월 7일에 10.2℃까지 떨어지는 등 이상 저온은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 1940년은 뒤끝이 강해서 9월까지 이상 저온이 이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이상 저온/대한민국/20세기 문서 참조.[52] 하루만 더 늦었어도 2월 최저기온을 큰 차이로 경신했을 것이다.[53] 이후 1970년 1월 5일에 운좋게 -20.2도를 기록한 것을 빼면 사실상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영하 20도 이하를 기록한 해가 되며 현대에도 영하 17-18도는 가끔 나오지만 -19도의 벽 조차 1986년을 마지막으로 40여년 째 나오지 않고 있어서 현대에 경신될 가능성이 아예 없는건 아니나 사실상 요원해 보인다.[54] 하지만 이는 통계 오류 혹은 온도계 오작동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같은 날 서울은 불과 -15.5℃, 전주는 -12.6℃를 기록했는데 광주 혼자서 -19.4℃까지 떨어졌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다. 그런데 광주 기준으로 동년 1월 12일에 -18.2℃가 또 나왔으며 1940년대에 -17℃ 이하가 여러 번 나온 것으로 보아 관측을 처음 시작한 1939년 5월 1일부터 1945년까지 유난히 낮은 기록이 많은 것을 감안하면 당시 광주 기상관측소 온도계가 추운 날씨에 오작동을 일으켰던 것 같다. 반면 1946년 이후의 기록은 광주 관측소도 신뢰성이 높으며 정상적으로 작동된 것으로 보인다.[55] 기상자료개방포털에는 -5.7℃로 적혀있으나 음수 기준으로 사사오입이 반영되지 않은 값이다. 엑셀이나 기상청처럼 사사오입을 반영하는 프로그램에서는 이해 12월을 -5.75℃로 계산, 사사오입을 반영하여 -5.8℃라는 값을 도출하여 1944년 12월을 관측 사상 가장 낮운 12월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56] 재미있게도 동시기에 일본 홋카이도 하코다테의 12~2월 평균 기온이 각각 -4.8℃, -7.9℃, -5.9℃로 겨울 전체 평균 기온이 -6.2℃라는 값을 기록했다. 당연히 이쪽도 관측 사상 가장 추운 겨울이었다. 12월과 2월이 뒤바뀌었을 뿐 서울 기록과 거의 똑같다. 이는 역으로 말하자면 하코다테(북위 41° 46′)보다 한참 남쪽인 서울(북위 37° 34′)이 하코다테처럼 매우 추운 겨울이었다는 뜻이다. 다만 하코다테의 1월 평균 기온은 -2.6℃로 현대의 서울(-2.0℃)과 별 차이는 없다.[57] 1935~1936년 겨울과 비교하면 겨울 전체 평균 기온은 1944~1945년이 더 낮으나, 겨울 전체 최저 기온과 3~4월 평균 기온은 1935~1936년이 더 낮았다(1944~1945년 겨울의 최저 기온은 -19.1℃이며, 1935~1936년 겨울은 -20.1℃이다. 그리고 1936년 3월, 4월 평균 기온은 각각 -0.2℃, 9.1℃를 기록했고, 1945년 3월, 4월은 각각 2.3℃, 11.0℃를 기록했다).[58] 전란이 한창인 중부 지방에 있음에도 11월 1일~12월 31일까지 2개월 분량의 기온 기록이 남아있는데,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남한의 영토 회복의 영향으로 다시 관측이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로는 북한군중공군의 남진 때문인지 다시 끊겼다가 1951년 9월 1일에 재개되었다.[59] 예외적으로 12월 7일에는 최저 기온 6.3℃, 최고 기온 10.9℃의 따뜻한 날씨가 찾아왔다.[60] 특히 마이크로소프트 엣지에서 집계한 대관령 횡계리의 기온은 12일 최고 -5℃ 최저 -12℃, 13일 최저 -17℃까지 떨어질 정도로 매우 추웠다.[61] 기상자료개방포털에 들어가서 확인해보면 이날 최저 기온 시각이 24:00으로 적혀있다. 즉 아침에 기록한 것이 아닌 밤 12시경에 기록된 것.[62] 눈으로 인한 태양빛의 반사도. 반사율이 클수록 흡수 복사열이 적어져서 기온 하강이 심해진다.[63] 대한파가 약간 풀릴지라도 -10℃ 이하가 계속되어 사실상 계속 한파였다.[64] 못 믿겠다면, 몇 주 이상 장기 한파가 이어진 1917년 12월~1918년 1월, 1936년 1~2월, 1940년 1월, 1944년 12월~1945년 2월, 1947년 12월, 1963년 1월, 1977년 1월, 2011년 1월 등의 일별 강수량과 적설량을 살펴보자. 간혹 폭설이 내리기도 했지만 강수일수가 적고 흔치 않다. 1917년 1월처럼 장기 한파에 눈도 많았던 겨울은 매우 드물다.[65] 일별로는 1월 1일 5cm, 1월 3일 2.3cm, 1월 4일 4.8cm, 1월 5일 0.2cm, 1월 13일 9.8cm, 1월 14일 2.4cm, 1월 15일 5.5cm, 1월 20일 2.4cm, 1월 21일 9.1cm, 1월 26일 18.9cm[66] 5cm 이상 최심신적설을 기록한 날을 대설일수로 정의하는데, 최심신적설은 그날 새로 내린 눈을 의미한다.[67] 광복 이후 역대 최저 기온 2위이다. 3위는 후술할 1986년 1월 5일이고, 1위는 후술할 1970년 1월 5일이다. 여담이지만 공교롭게도 1~3위 모두 1월 5일이라는 같은 날짜에 기록되었다.[68] 광복 이후가 아닌, 서울 최초 기상 관측 이래로 확대해도 1936년 1월 17일, 1986년 1월 5일과 공동으로 역대 최저 5위에 해당하는 값이다. 심한 혹한이 널리고 널린 일제강점기의 웬만한 한파보다도 낮았던 것. 1~4위는 1915년, 1931년 두 해가 전부 싹쓸이했다.[69] 이조차 4년 뒤인 1963년에 비하면 4.1℃나 높은 값이며 1958~1959 겨울은 1월 초중순을 제외하면 큰 추위가 없는 겨울이었다.[70] 2000년대와 2020년대에서 가장 낮은 기온은 -18.6℃(2001년 1월 15일과 2021년 1월 8일 기록)이고, 2010년대에서 가장 낮은 기온은 -18.0℃(2016년 1월 24일 기록)이다.[71] 1962년 12월에도 한파가 있기는 했지만 앞/뒤 연도에 비하면 그나마 덜했고 평년보다 높았다.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에야 최고 기온 -5.5℃, 최저 기온 -11.5℃를 기록하여 1년 중 가장 낮은 기온을 기록했을 뿐이었다. 12월에 이상 고온이 있어서 1월은 전달보다 무려 10℃ 이상 떨어지게 되었다.[72] 기상자료개방포털에는 -9.1℃로 기록되어 있으나 정확한 값은 -9.154℃ 이다. 오사육입 반올림 방식은 회계나 정책 결정을 할때 쓰이는 방식으로 기상 데이터에 쓰기에 적합한 반올림 방식이 아니며 기상개방자료포털 담당자가 프로그래밍 오류를 낸 것으로 추정한다. 마찬가지로 부산 1월과 서울 2월도 오류가 있어서 정정하였다.[73] 이는 악명 높은 추위를 기록했던 1917년 1월(-9.0℃)보다도 약간 낮고, 기상 관측 사상 서울 역대 최저 월평균 기온이다. 다만 1917년 1월은 최저 기온이 -21.1℃로 1963년 1월의 -18.4℃보다 더 낮았고, 월평균 최저 기온도 1963년 1월보다 낮았다. 후술하듯이 1963년 1월은 최저 기온은 당시 치고 그렇게까지 낮지 않았으나, 한 달 내내 일 최고 기온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역대 최저 월평균 기온을 기록한 것이다.[74] 1월 1일 0.5℃, 1월 3일 0.8℃, 1월 4일 0.8℃, 1월 17일 1.6℃[75] -10℃ 이하의 날씨는 현대에도 1월에 한파가 왔다 하면 일상적인 기온이지만, 1963년은 대부분의 날의 최고 기온이 -3~-10℃ 정도로 매우 낮았다. 이러한 날씨가 거의 한 달 가까이 이어진 것이다. 첫 한파의 극점인 1월 16일 이전의 1월 15일 기온은 최저 -15.9℃, 최고 -11.0℃를 나타냈다. 다른 날에도 여전히 최고 기온이 -5~-8℃로 매우 낮았기 때문에 -10℃ 이하의 일평균 기온이 며칠씩이나 기록되었다.[76] 공식 기상 관측은 1964년 1월 1일이나, 1951년 3월부터 비공식 관측이 이뤄지고 있었다.[77] 12월 26일 -12.1℃, 12월 27일 -13.2℃ 기록[78] 1월 4일 기록[79] 월평균 기온은 서울 기준으로 12월, 1월, 2월이 각각 -2.0℃, -4.7℃, 0.1℃. 12월과 1월은 다소 추웠으나 2월은 포근한 편이었다.[80] 월평균 기온은 서울 기준으로 12월, 1월, 2월 각각 -3.0℃, -4.5℃, -2.4℃로 12월과 2월은 상당히 추웠고 1월도 당시 기준으로는 약간 낮지만 현대에 비하면 매우 추운 편에 속한다.[81] 12월 -5.7℃, 1월 -7.8℃, 2월 -4.9℃[82] 다만, 1935~1936년 겨울은 12월이 -3.9℃인 대신 1월 -8.8℃, 2월 -4.4℃ 등 1월이 매우 기록적으로 추워서 겨울 전체 평균 기온이 무려 -5.7℃로 역대 최저 2위를 기록해, 사실상 1967~1968년 겨울과 비교하면 훨씬 심하게 추웠다. 단지 1967~1968년 겨울은 3개월 연속 -4℃ 이하인 점이 대단한 기록일 뿐.[83] 1위는 1944~1945년 겨울(-6.1℃), 2위는 1935~1936년 겨울(-5.7℃), 3위는 1916~1917년 겨울(-4.6℃), 공동 4위는 1937~1938년 겨울과 1946~1947년 겨울(-4.5℃)[84] 서울의 월평균 기온이 3.1℃로 12월 평균 기온 역대 최고 3위이다. 특히 12월 7~9일에는 서울의 최저 기온10℃ 이상을 연속으로 기록했다. 심지어 12월 9일은 최고 기온이 17.7℃를 기록했는데 이는 서울의 12월 역대 최고 기온 기록이다. 이후 12월 11일에도 14.5℃를 기록했으며 12월 13일까지 최저 기온조차 영하로 떨어진 날이 하루도 없었다. 그나마 12월 14~16일, 12월 22~23일에 잠시 -7~-9℃로 떨어지는 한파가 있기는 했으나 금세 이상 고온으로 돌아갔고 12월 30일까지 평년 수준이거나 이상 고온을 유지하다가 12월 31일에 기온이 -11.0℃로 급격하게 떨어지는 현상을 보였다.[85] 사실 이것은 2020년대 기준으로 보면 1도 이상 추운 편이지만, 1960년대에서는 평년보다 오히려 높은 것이었다. 1960년대 서울의 1월 평균 기온은 -4.7℃였으므로. 즉 반대로 말하면 한파가 와도 한기가 약해 평년보다 따뜻한 1월이었다. 다만 2월의 -2.7℃는 평년보다 낮은 것이다.[86] 1968년 12월 19일에 관측이 개시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1969년 1월 1일에 처음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의 다른 대도시에 비하면 상당히 늦게 시작된 것이다.[87] 수원은 1970년 당시 인구가 16만 7천 명, 청주는 14만 3천 명 정도로 소도시 수준인데 비해 서울은 1965년에 340만 명, 1970년에 540만 명으로(1969년 2월 당시 470~490만 명으로 추정됨) 이미 과포화 상태였다. 하지만 이들 지역도 당시 온도계의 부정확성이 어느 정도 있을 수 있다.[88] 심지어 12월 13일에는 -12.0℃로 한파일수를 기록하였고 1972년의 최저 기온 극값이 되었다. 이는 1972년 1월이 초이상 고온을 보여 서울 최저 기온 극값이 -9.1℃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이상 고온/사례 문서 참조.[89] 서울 7.6cm, 인천 30.0cm(인천의 최심신적설 공식 관측이 시작된 1937년 이래, 해당 지역 최심신적설에서 압도적인 1위 기록에 해당한다. 단, 비공식적으로는 1922년 3월 23일에 43.8cm라는 엄청난 값을 기록한 적이 있다), 수원 19.2cm, 이천 17.6cm, 원주 19.2cm 등 손에 꼽을 만한 대설이었다.[90] 기상자료개방포털에는 -2.4℃로 기록되어 있으나, 정확한 값은 -2.458℃이므로 사사오입해서 -2.5℃이다.[91] 서울 역대 공식 최저 기온보다도 낮다.[92] 대관령면의 역대 공식 최저 기온 중 압도적인 1위.[93] 이후 대관령면은 3월 상순에 다시 한파가 맹위를 떨쳐서 3월 4일에 최고 기온 -12.2℃를 기록하는데, 정확히 1년 전인 1976년 3월 4일에는 최저 기온 -12.1℃를 기록하였다. 이후에도 한파가 완전히 가시지 않아 4월에 영하를 기록한 날이 은근히 많았고, 급기야 5월 16일에 -4.7℃, 5월 23일에 -2.1℃를 기록하였다. 5월 24일에 곧 기온이 큰 폭으로 오르며 한파가 완전히 끝났다.[94] 2월 14일 -12.0℃, 2월 15일 -13.2℃, 2월 16일 -12.1℃[95] 2월 14일 -0.7℃, 2월 15일 -1.7℃, 2월 16일 -1.9℃, 2월 17일 -1.4℃, 2월 18일 -1.3℃[96] 우연찮게도 당시 10.26 사건과 여기서 파생된 혼란이 집중된 1980년에 이상 저온이 특히 집중된 경향이 보인다. 당시 혼란스러운 시국에 불어닥친 살인적인 한파와 이상 저온은 안 그래도 어수선했던 분위기를 더욱 가중시켰을 듯하다. 1980년의 이상 저온에 대한 내용은 이상 저온/대한민국/20세기 문서 참조. 11월 중순이라는 시기를 고려하면 거의 1927년 12월 31일과 맞먹는 한파가 찾아온 셈.[97] 1884년 11월 하순에 서울에서 -12℃ 이하를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1891년 11월 27일에도 신빙성은 다소 의심되지만 -13.5℃를 기록했다는 자료가 존재하지만 공식 기상 관측이 시작되기 전이기 때문이다.[98] 1월 26일 8.4℃, 1월 27일 8.1℃, 1월 28일 8.9℃[99] 2월 25일 12.0℃, 2월 26일 10.5℃, 2월 29일 12.0℃[100] 물론 후술할 1984년이 더 낮기는 하지만 하순의 이상 고온으로 인한 것이며 중순까지는 1984년보다 오히려 더 추웠다.[101] 사실 서울은 5~6월이 이상 저온이었지만 5월의 동해안, 6월의 동쪽 지역은 이상 고온이 심해서 폭염이 강했다.[102] 1월 9일 0.8℃, 1월 18일 0.6℃, 1월 28일 0.4℃, 1월 29일 0.6℃, 1월 31일 1.3℃[103] 이는 1963년 1월의 -9.2℃ 이후 서울의 1월 평균 기온 역대 최저였으나 후술할 2011년 1월에 기록이 깨졌다.[104] 비공식적으로는 1942년 1월 5일 철원 김화읍에서 -33.4℃가 기록된 적이 있고, 1965년 1월 12일 화천 대성산과 설악산 향로봉에서 -33.0℃를 기록, 2001년 1월 16일 횡성 안흥면에서 -33.0℃를 기록한 적도 있었으나 이들은 공식 기상관측소에서 측정된 기록이 아니라 대부분 AWS(자동기상관측장비)를 통해 측정되었기 때문에 비공식 기록이다.[105] 1월 2일 -21.1℃, 1월 3일 -30.2℃, 1월 4일 -31.0℃, 1월 5일 -32.6℃, 1월 6일 -31.0℃, 1월 7일 -27.8℃, 1월 8일 -24.8℃, 1월 11일 -22.0℃, 1월 13일 -23.6℃, 1월 14일 -26.0℃, 1월 17일 -21.8℃, 1월 18일 -21.8℃, 1월 20일 -25.4℃, 1월 21일 -25.4℃, 1월 22일 -27.2℃, 1월 23일 -25.2℃, 1월 25일 -20.5℃, 1월 26일 -24.2℃, 1월 27일 -27.4℃, 1월 28일 -23.8℃, 1월 30일 -22.8℃, 1월 31일 -22.4℃[106] 당시 양평의 기온 추이를 보면 1월 3일 -30.2℃, 1월 4일 -31.0℃, 1월 5일 -32.6℃, 1월 6일 -31.0℃를 기록했는데, 사흘만 더 빨랐더라면 공식 기상 관측 최초로 12월에 -30℃ 이하가 나타날 수도 있었다.[107] 충주는 바로 전날과 바로 다음 날인 1월 4일과 1월 6일에도 -27.9℃까지 내려갔다.[108] 홍천은 바로 전날인 1월 4일에도 -28.0℃였다.[109] 원주도 바로 전날인 1월 4일 -27.4℃였다.[110] 역대 2월 하순 중 가장 낮은 기온이다. 1925년 2월 25일(-15.2℃)의 기록을 56년만에 경신. 그리고 시기를 보면 정말 대단한 한파인데, 2월 26일과 3월 1일 사이의 기간이 불과 이틀이다. 만약 사흘 더 늦었으면 이 -15.6℃가 2월 하순이 아니라 3월 1일에 기록될 뻔 했다.[111] 1월 5일 -23.2℃, 1월 6일 -21.9℃, 1월 7일 -25.7℃, 1월 11일 -20.5℃, 1월 16일 -20.4℃, 1월 18일 -20.2℃, 1월 19일 -20.4℃, 1월 20일 -21.7℃, 1월 24일 -21.8℃, 1월 29일 -25.8℃[112] 1위는 1980년 2월의 -8.8℃이다. 비슷하게 1월 하순도 -7.1℃로 하위 12위를 1941년과 공동 기록하며 추웠다.[113] 특히 12월 9~11일에는 이상 고온이 매우 심했다. 12월 9일 최고 기온은 14.5℃, 12월 11일 최고 기온은 13.1℃까지 올라갔다.[114] 12월 하순 평균 기온이 이보다 더 낮은 해는 낮은 순서대로 1917년, 1967년, 1927년이다. 1984년 12월은 중순까지 최저 기온이 특히 높아서 엄청난 이상 고온을 보였지만 하순에는 영하 두 자릿수 이하의 한파가 지속되고 최고 기온조차 낮았기 때문에 이렇게 평균 기온이 급락했던 것이다.[115] 1월 1일 3.0℃, 1월 2일 3.4℃, 1월 3일 3.5℃, 1월 9일 2.0℃, 1월 15일 3.0℃, 1월 18일 2.8℃, 1월 19일 0.7℃, 1월 22일 2.0℃, 1월 25일 0.0℃, 1월 26일 2.9℃, 1월 27일 1.8℃, 1월 31일 1.8℃[116] 2월 21일 -10.6℃, 2월 22일 -10.8℃, 2월 23일 -10.9℃, 2월 24일 -11.0℃[117] 지금까지도 여전히 서울의 광복 이후 역대 최저 기온 3위에 해당된다.[118] 최저 기온은 -24.4℃를 기록했다. 또한 대관령면의 월평균 기온조차 -9.9℃로 거의 -10℃에 근접하였다.[119] 2001년, 2021년에 근접하게 찾아오긴 했다.[120] 다만 이는 서울 도심의 열섬 현상이 심화된 것이 주요한 원인으로, 열섬 현상이 비교적 덜한 도심 외곽 김포국제공항 일대의 경우 2020년대까지도 여전히 AWS로 -20℃ 안팎의 기온이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공식 기상관측소에서 측정되는 기온이 아니라서 비공식 기록이다.[121] 단 1986년은 3~6월은 평년에 가깝고 12월은 이상 고온을 보여서 1980년보다는 높았다.[122] 가장 낮았던 날은 1월 14일의 -15.1℃이다.[123] 이 기록은 장수의 역대 최저 기온 극값이자 전국 2월 하순 역대 최저 기온 극값이기도 하다.[124] 이후 2005년, 2022년 2월 하순에 -10℃대로 근접하게 나오긴 했다.[125] 관측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백두산 정상 일원에서 비공식적으로 -54.7℃가 기록된 적도 있었다.[126] 12월 3일 -11.0℃, 12월 10일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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