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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11 18:55:26

한양 천도

한양 천도
漢陽 遷都
파일:수선전도.jpg
수선전도, 18세기
18세기 한성부의 모습을 담은 지도이다.
<colcolor=#f0ad73> 천도일 1394년(태조 3년) 11월 26일[1]
(음력 1394년 10월 25일)
1. 개요2. 배경
2.1. 조선 건국 이전
2.1.1. 한양 천도론의 대두2.1.2. 우왕 대의 천도2.1.3. 공양왕 대의 천도
2.2. 조선 건국 이후
2.2.1. 천도 준비 기간
2.2.1.1. 계룡산 천도 추진2.2.1.2. 새로운 후보지 물색2.2.1.3. 정도(定都)

1. 개요

1394년(태조 3년) 11월 26일(음력 10월 25일)에 조선수도개성부(現 북한 개성시)에서 한양부(現 서울특별시)로 옮긴 일. 이듬해인 1395년(태조 4년) 7월 1일(음력 6월 6일)에는 이름을 한양부에서 한성부(漢城府)로 고쳤다.

천도 3년 후인 1399년(정종 1년) 4월 21일(음력 3월 7일)에 다시 개성부로 환도하였다가, 6년 뒤인 1405년(태종 5년) 11월 11일(음력 10월 11일)에 한양으로 환도하였다. 그로부터 조선왕조가 멸망하는 1910년까지 천도를 하지 않았으므로, 한성부는 505년 동안 줄곧 조선의 수도 노릇을 하였으며, 이후 경성부를 거쳐 서울특별시가 되면서 [age(1405-11-11)]년째 한국의 수도 노릇을 하고 있다.

서울특별시에서는 1394년 11월 29일(음력 10월 28일)을 서울 정도 기념일로 삼고 있는데, 이날은 태조실록에 기록된 바, 한양부의 객사를 이궁(離宮)으로 삼았다는 날이다. 이에 따라 올해는 서울 정도 [age(1393-12-31)]주년이다. 다만 태조실록에서는 음력 10월 25일에 천도했다고 기록해 놓았고, 음력 12월 3일에는 왕도 공사에 앞서 제를 지내면서 태조가 직접 읽은 제문(祭文)에 10월 25일에 천도하였다고 언급하고 있으므로, 조선왕조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한양 천도일은 양력 11월 26일이 맞다.

2. 배경

2.1. 조선 건국 이전

한강을 끼고 있는 서울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요지(要地)로 인정받았는데, 조선이 서울에 수도를 정하기 전에도 백제가 이미 지금의 송파구 일대에 위례성을 짓고 수도로 삼았으며, 475년(개로왕 20년, 문주왕 원년)에 고구려의 침공을 받아 공주에 있는 웅진성으로 천도하기까지 493년 동안 위례성에 머물렀었다. 일설에는 한강 이남의 하남위례성을 짓기 이전에 온조왕이 한강 이북, 지금의 강북구 삼양동 일대에 하북위례성을 짓고 백제의 첫 도읍으로 삼았다고 하나, 실체가 불분명하다.

고구려가 위례성을 함락시키고 한강 유역을 석권하면서 한강 이북 지역을 남평양(南平壤)이라 이름하였는데, 이는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에 버금가는 위상을 부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후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이 일대를 놓고 각축을 벌이다가, 최종적으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로는 변방 지역이 되며 위상이 많이 낮아진다.

2.1.1. 한양 천도론의 대두

한양 천도론이 처음 나온 것은 위례성수도의 지위를 잃은 지 600여 년 만인 고려 문종 때였다. 당시 절정에 다다랐던 풍수지리설에 의해 지금의 한양도성 자리가 처음으로 수도 후보지로 거론되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문종은 1067년양주목(楊州牧)을 남경(南京)으로 승격하였다. 남경은 부수도격 행정구역으로,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서경(西京, 평양), 신라의 옛 수도였던 동경(東京, 경주)과 같은 격이었다.

또한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별궁을 지어 1068년에 낙성(落成)을 보았는데, 이는 국초부터 수도 개경에 버금가는 부수도로 대우를 받으며 고려 국왕들이 의무적으로 순행하였던 서경과 같이, 남경에도 임금이 순행하며 머물 목적으로 별궁을 지은 것이다. 남경은 1076년에 폐지되었다가, 25년 후인 1101년숙종에 의해 부활하였고, 순행도 재개되었다. 비록 한양 천도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한양 순행은 받아들여져서 숙종 이후로 고려의 역대 국왕들은 순행을 이어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종 이후로 한양 천도론은 끊임없이 제기되었는데, 풍수지리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정치·행정적 측면에서 보면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서경이나 동경보다는 가까운 한양이 천도에 대한 부담이 훨씬 적었다. 천도를 하며 사람과 물자를 옮기는 데에 비용도 적게 들고, 개경과의 왕래도 용이하므로, 개경의 역할을 점진적으로 한양으로 옮기더라도 큰 불편이 없었을 것이다.

특히 서경 천도 운동이 좌절된 이후로 서경파(西京派)가 몰락하고, 동경은 너무 멀다는 이유로 동경 천도론은 거의 배제되면서, 남경 천도론이 가장 유력하게 제기되었다. 게다가 고려 말에 가면 여몽전쟁으로 인해 당시 고려의 3대 도읍이었던 개경·서경·동경이 크게 파괴되고, 복구할 틈도 없이 홍건적의 침공으로 또 파괴가 되는 바람에 천도에 대한 공감대는 점점 커졌다.

1356년(공민왕 5년), 정동행성 이문소(理問所)를 폐지하고 그 이틀 뒤에 남경의 터를 살피게 하였다. 이는 천도를 하며 정국을 일신하고, 그와 동시에 친원 세력을 배제하며 신도(新都)에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4년 동안 지지부진하다가, 1360년 1월, 태묘에서 천도가 불길하다는 점괘가 나와 천도 추진을 중단하였다. 그해 11월에 남경 별궁으로 잠시 이어(移御)하였다가 개성으로 돌아왔다.

2.1.2. 우왕 대의 천도

공민왕 재위 후반에 가면 왜구교동도, 강화도까지 내습(來襲)하면서 수도 개성이 직접적으로 위협을 받는 지경에 이른다. 따라서 수도를 내륙으로 옮겨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1382년(우왕 8년)에 서운관에서 남경으로의 천도를 청하였는데, 이때 이인임은 반대하였으나, 최영은 "속히 서울을 옮겨야 한다"며 강하게 찬성하였다.

이때의 기록이 시사하는 바가 큰데, 일전에 철원 천도는 이인임과 함께 극력 반대하였던 최영이 한양 천도 논의 때는 말을 바꾸어 "속히 서울을 옮겨야 한다"고 했다는 점이다. 이는 최영을 필두로 하는 신흥무인세력이 이인임을 필두로 하는 권문세족과 정치적으로 결별하면서 견제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천도를 하는 의도에는 보통 기득권층을 권력에서 배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큰데, 중앙 귀족이었던 권문세족, 그 권문세족의 거두인 이인임이 천도에 반대하고, 공민왕 이후 급부상하던 신흥무인세력에 속한 최영이 천도에 찬성하였다는 것은 최영을 앞세워 한양 천도를 관철시키고, 권문세족을 견제하려던 우왕의 의도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1382년 8월에 한양으로 천도가 단행되었다. 천도 논의가 처음 나온 지 300여 년 만이었다. 이듬해 개성으로 환도를 하기는 하였으나, 조선왕조보다 앞서 한양으로 천도하였던 것은 고려왕조였던 것이다.

2.1.3. 공양왕 대의 천도

우왕개성으로 환도한 지 7년 뒤인 1390년(공양왕 2년)에 한양 천도론이 다시 한 번 불거졌다. 이해 2월에는 '이초의 옥'이라 하는 옥사 사건이 터져, 이색·우현보 등 공양왕의 측근 세력이 이성계 일파에 의해 유배를 당하는 등, 공양왕에게는 즉위 초부터 정치적 위기가 닥친 때였다. 이때 공양왕은 『도선비기』의 지기쇠왕설(地氣衰旺設)을 언급하며, '도읍을 옮기지 않으면 군신을 폐하게 될 것이다' 라고까지 말했다.

한양 천도론이 처음 대두되었던 문종 때부터 지기쇠왕설이 언급되기는 하였지만, 왕이 직접 이러한 말을 한 것은 처음이다. 개성에서 공민왕시해되고, 우왕과 창왕폐위되는 등, 연달아 왕들이 시해, 또는 폐위되면서 정치적 불안이 극에 달하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개성의 지기(地氣)가 다하였다는 말은 더욱 설득력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천도 의사를 표명하며 '도읍을 옮기지 않으면 군신을 폐하게 될 것이다' 라고 한 대목은 사실상 이성계를 두고 한 말로서, 천도를 단행하여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고, 이성계 일파를 견제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1390년 9월에 천도를 단행하고 두 달 뒤에 이성계 암살 미수 사건이 터지기도 하였다.

1390년 11월에 이성계 암살 미수 사건이 터지고, 1391년 2월에 다시 개성으로 환도하였다. 이성계 암살 미수 사건의 배후가 암묵적으로는 공양왕으로 지목되면서, 공양왕의 정치적 입지는 극히 좁아지고, 이에 따라 공양왕이 추진한 한양 천도는 백지화되고, 개성으로 다시 환도를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듬해인 1392년에 결국 공양왕이 폐위되면서 고려왕조는 개성에서 문을 닫는다.

2.2. 조선 건국 이후

2.2.1. 천도 준비 기간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한양 천도 움직임은 이어졌다. 흔히 한양 천도를 떠올리면 아무것도 없던 허허벌판에다가 완전히 새로운 도시를 지어서 천도를 한 것 같지만, 남경이 처음 설치된 1067년부터 고려 멸망까지 325년, 재설치된 1101년으로부터 따지면 291년을 존속하며 도시의 기반을 다졌고, 앞서 이미 두 차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수도로서의 기틀이 어느 정도 잡혔기 때문에, 조선 건국 이후에도 수도 후보지로 한양이 유력했다.

태조는 즉위한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1392년 9월 8일(음력 8월 13일), 도평의사사에 한양 천도를 명하였다. 그리고 이틀 후인 9월 11일(음력 8월 15일)에 삼사우복야 이염(李恬)을 한양에 보내 남경 별궁을 수리하게 하였다. 태조가 당장이라도 한양으로 이어할 기세로 밀어붙이니, 배극렴조준이 '궁궐성곽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니, 다 완성되면 그때 천도하소서' 라고 청하였고, 태조도 수긍하였다.

이러한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태조는 하루라도 빨리 고려수도였던 개성을 떠나고 싶어 했다. 이후에 계룡산으로 도읍이 정해져서 공사에 들어갔다가, 계룡산 천도를 철회하고 다시 한양과 다른 여러 후보지들을 살펴서 최종적으로 한양이 수도로 결정되자, 궁궐과 도성이 다 안 지어졌는데도 곧장 이어(移御)할 정도였다.

또, 위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천도 후보지로 가장 먼저 거론된 것은 계룡산이 아니라 한양이었다. 한양은 조선이 건국되기 겨우 2년 전인 1390년에도 고려왕조가 한 번 천도했던 곳이고, 그 시점에서는 바로 수도가 되어도 손색이 없을 만한 곳이 한양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개성을 떠나고 싶은 태조는 정도 논의도 거치지 않고 한양 천도를 급히 명하였던 것이다.
2.2.1.1. 계룡산 천도 추진
1393년(태조) 2월 21일(음력 1월 2일)에 태실 자리를 찾으러 삼남(三南) 지방으로 떠났던 권중화가 태실 후보지와 계룡산 지도를 바쳤다. 17일 뒤인 3월 10일(음력 1월 19일)에는 태조가 직접 계룡산으로 내려가 지세를 살폈다. 이곳은 지금의 충청남도 계룡시 신도안면으로, '신도안(新都案)'이라는 이름은 '새로운 도읍으로 계획된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태조는 계룡산에 머무는 동안 계룡산으로 천도할 것으로 마음을 굳히고, 곧 신하들에게 측량을 하고 도시 계획을 명하였다. 이때 무학대사에게도 계룡산의 지세를 살피게 하였는데, 무학대사는 둘러보고는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월 2일(음력 2월 13일)부터는 신도(新都) 조성 공사가 시작되었다. 다음 달인 5월 13일(음력 3월 24일)에는 계룡산 신도를 중심으로 81개의 주(州)·현(縣)·부곡(部曲)을 정하였고, 3개월 뒤인 9월 30일(음력 8월 16일)에는 토지를 다시 측량하여 전지(田地)를 나누도록 하였다.

그러나 공사가 시작한 지 8개월 만인 1394년 1월 2일(음력 1393년 12월 11일)에 당시 경기도 관찰사였던 하륜이 계룡산이 도읍으로서 부적합함을 말하면서 공사가 중단되었다. 하륜은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될 것이온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서 동면·서면·북면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또 신(臣)이 일찍이 신의 아버지를 장사하면서 풍수(風水) 관계의 여러 서적을 대강 열람했사온데, 지금 듣건대 계룡산의 땅은, 산은 건방(乾方, 북서쪽)에서 오고 물은 손방(巽方, 남동쪽)에서 흘러 간다 하오니, 이것은 송나라 호순신(胡舜臣)이 이른 바, ‘물이 장생(長生)을 파(破)하여 쇠패(衰敗)가 곧 닥치는 땅’이므로, 도읍을 건설하는 데는 적당하지 못합니다." 라며 계룡산의 부적합함을 말하였는데, 정도전남은도 이에 동의하며 계룡산 천도는 백지화되었다. 이때 '중앙과 지방에서 크게 기뻐하였다'는 대목이 나온다. 태조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긴 했지만, 신하와 백성들은 그다지 달갑게 여기진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륜의 말대로 이 지역은 국토에서 너무 남쪽으로 치우쳐져 있다는 문제점도 있었지만, 근처에 큰 강이 없어서 조운(漕運)이 불가하다는 것도 큰 문제점이었다. 산속에 있어서 유사시에 방비하기에는 좋겠으나, 외부에서 수도로 접근하기가 힘들다는 단점도 있었다. 실제로 지금 신도안면은 도시가 들어서지 않고, 계룡대가 들어서서 군사 지역으로 묶여 있다. 이외에도 땅이 좁아 추후 시가지를 확장하기도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만일 그대로 계룡 천도가 단행되었다면, 천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개성으로 환도하거나, 계룡산 주변의 대전이나 논산 등지로 다시 천도해야 했을 수 있다.
2.2.1.2. 새로운 후보지 물색
계룡 천도가 백지화됨에 따라 다시 수도 후보지를 물색하여 올리게 하였다. 1394년 3월 28일(음력 2월 18일)에는 조준·권중화 등에게 명하여 무악(毋岳)의 지세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이때 언급되는 무악은 지금의 서울 신촌 일대이다.

권중화와 조준은 무악 땅을 살피고 돌아와서는 '무악 땅이 좁아서 도읍으로 삼기에는 어렵겠다'는 의견을 내비쳤고, 하륜은 '송도(松都)평양 장락궁에 비하면 오히려 넓다'며 찬성하였다. 이렇게 의견이 상반되자, 태조는 '내가 직접 가서 보겠다'고 한다. 서운관에서도 무악은 땅이 좁아서 안 된다고 아뢰자, 태조는 다시 후보지를 물색해서 올리라는 명을 내린다.

이에 서운관에서는 선고개(鐥岾,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불일사(佛日寺, 지금의 판문점)을 후보지로 올렸는데, 도평의사사의 관원들이 가서 보고는 모두 고개를 내저었다. 계룡산도 부적합하다, 무악도 부적합하다, 선고개와 불일사마저 부적합하다 하며 빙빙 돌게 되니 남은도 열이 받았는지, 서운관 관원들에게 "너희들이 지리의 술법을 안다는 것으로써 여러 번 맞지 않은 곳을 도읍할 만하다고 하여 상총(上聰)을 번거롭게 하니, 마땅히 호되게 징계하여 뒷날을 경계해야겠다." 라며 크게 꾸짖었다. 오늘날 말로 풀면, '풍수지리를 공부했다는 놈들이 자꾸 엉뚱한 곳을 후보지로 올리면서 상감을 여기저기 왔다갔다 하게 만드니, 본보기로 너희들을 족쳐야겠다' 정도의 뜻이다.

서운관에서 길지라 하면 하륜이 나서서 '내가 배운 풍수지리에서는 여기 흉지라는데?' 하고, 하륜이 길지라 하면 서운관에서 '여긴 흉지입니다' 하는 식으로, 풍수지리를 공부했다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공부한 바가 달라서 계속 이견이 생기고, 도읍을 정하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때마다 새 후보지를 내고, 태조가 번거롭게 행차하는 일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이에 도평의사사의 건의로 아예 음양산정도감(陰陽刪定都監)을 설치하여 여럿이 모여 의견을 하나로 모으도록 하였다.

아무튼 9월 14일(음력 8월 11일)에는 태조가 친히 무악에 나아가 지세를 살폈는데, 판서운관사 윤신달과 서운부정 유한우 등이 '여긴 도읍이 될 만한 곳이 아니다' 하니, 태조가 짜증을 내며, "너희들이 함부로 옳거니 그르거니 하는데, 여기가 만일 좋지 못한 점이 있으면 문서에 있는 것을 가지고 말해 보아라." 라고 말한다. 그러자 서운관원들이 물러가 다시 의논하였는데, 태조가 유한우를 부르더니, "이곳이 끝내 좋지 못하냐?" 라며 거듭 묻고, 유한우는 "신이 보는 바로는 실로 좋지 못합니다." 라고 대답한다. 태조가 "여기가 좋지 못하면 어디가 좋으냐?" 라고 묻자, 유한우는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한다.

이에 태조가 벌컥 화를 내며 "네가 서운관이 되어서 모른다고 하니, 누구를 속이려는 것인가? 송도(松都)의 지기(地氣)가 쇠하였다는 말을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라고 말한다. 이에 유한우는 "이것은 도참으로 말한 바이며, 신은 단지 지리만 배워서 도참은 모릅니다." 라고 대답하였고, 태조는 "옛사람의 도참도 역시 지리로 인해서 말한 것이지, 어찌 터무니없이 근거 없는 말을 했겠느냐? 그러면 너의 마음에 쓸만한 곳을 말해 보아라." 라고 말한다. 이에 유한우는 "고려 태조송산(松山) 명당(明堂)에 터를 잡아 궁궐을 지었는데, 중엽 이후에 오랫동안 명당을 폐지하고 임금들이 여러 번 이궁(離宮)으로 옮겼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명당의 지덕(地德)이 아직 쇠하지 않은 듯하니, 다시 궁궐을 지어서 그대로 송경(松京)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태조는 유한우에게 "내가 장차 도읍을 옮기기로 결정했는데, 만약 가까운 지경에 다시 길지(吉地)가 없다면, 삼국 시대의 도읍도 또한 길지가 됨직하니 합의해서 알리라."고 하였고, 좌시중 조준과 우시중 김사형에게는 "서운관이 전조 말기에 송도의 지덕이 이미 쇠했다 하고 여러 번 상서하여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하였었다. 근래에는 계룡산이 도읍할 만한 땅이라고 하므로 민중을 동원하여 공사를 일으키고 백성들을 괴롭혔는데, 이제 또 여기가 도읍할 만한 곳이라 하여 와서 보니, 한우 등의 말이 좋지 못하다 하고, 도리어 송도 명당이 좋다고 하면서 서로 논쟁을 하여 국가를 속이니, 이것은 일찍이 징계하지 않은 까닭이다. 경 등이 서운관 관리로 하여금 각각 도읍될 만한 곳을 말해서 알리게 하라."고 명했다. 이 말을 들은 윤신달과 유한우가 "우리나라 내에서는 부소(扶蘇, 개성부) 명당이 첫째요, 남경(南京)이 다음입니다." 라고 말했다.

이 일화를 오늘날 말로 쉽게 풀자면 이러하다. 윤신달과 유한우가 '여긴 도읍이 될 만한 곳이 아니다' 하니, 태조가 '제대로 된 땅도 못 찾는 주제에 자꾸 된다, 안 된다 하는데, 정 안 되겠다 하면 니들이 참고하는 풍수지리 서적에 나오는 대로 여기가 왜 안 되는지 설명을 해 봐라' 라고 하며, 유한우를 따로 불러 "다시 말해 봐라. 여기가 정말 안 좋은 땅이냐?" 라고 물은 것이다. 유한우가 다시 '별로 안 좋다' 하니, 태조가 "그럼 도대체 어디가 좋다는 거냐?" 라고 물었고, 유한우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라는 기가 막힌 대답을 한 것이다.

이러니 태조가 화를 내면서 "지관이 되어서 모르겠다고 하다니, 지금 장난치냐? 개성의 지기가 쇠했다는 말은 서운관에서 나온 말인데, 너는 서운관 관원이 돼서 그 말도 못 들어 봤냐?"고 말하였고, 유한우는 "그건 도참설에서 하는 말이고, 저는 풍수지리만 배워서 잘 모릅니다" 라고 대답한다. 그러니 태조는 더욱 어이가 없어서 "그 도참설이라는 것이 풍수지리를 근거로 나온 건데, 도참설이랑 풍수지리가 따로 있느냐? 그러면 네가 배운 풍수지리에서 명당이라고 할 만한 곳을 말해 봐라." 라고 하였고, 유한우는 "고려 태조가 송악산 명당에 터를 잡아 만월대를 지었는데, 고려 중기 이후에 만월대 본궐을 폐하고 이궁을 지어 옮겨갔으니, 만월대 터의 지기는 아직 남아 있을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만월대 터에 다시 궁궐을 세우심이..." 라고 대답하였다.

태조가 이 말을 듣고는, "이미 천도를 하기로 했는데, 만월대를 다시 지어서 개성에 눌러 앉으라고? 개성 외에 도읍지를 정 못 찾겠으면 삼국시대에 수도였던 곳으로라도 천도할 것이니, 그냥 그 중에 하나 골라서 아뢰어라." 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조준과 김사형에게 "고려 말 때부터 서운관에서 개성의 지기가 쇠했다고 해서 한양으로 옮기기로 했는데, 그때 서운관에서 계룡산이 좋다길래 공사까지 벌였다. 근데 공사 시작하니까 또 무악이 좋다고 해서 여기 와 보니까, 유한우는 여기 별로 안 좋다 하고, 이제 와서는 또 개성이 명당이라면서 열받게 하네? 진즉에 족쳤어야 했는데... 두 시중들이 서운관을 엄히 다스려서 빨리 도읍지 좀 정해라" 라고 하였다. 태조가 이토록 말을 했음에도 윤신달과 유한우는 다시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곳은 개성이고, 한양은 그에 못 미칩니다." 라고 말한 것이다. 그 뒤로는 '임금이 무악 밑에서 유숙하였다' 라는 대목만 있는데, '개성이 제일이고, 한양은 그에 못 미친다'는 말에 태조가 무슨 반응을 보였을지는 뻔하다.

아무튼 이 일화에서 태조는 신도(新都)가 어디로 정해지든 개성에 머물 생각은 절대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2.2.1.3. 정도(定都)
천도 사업이 후보지를 마땅히 정하지 못 하고 표류하게 되자, 천도에 대한 회의론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정도전을 비롯한 다른 재상들마저 천도가 옳지 못하다고 하자, 태조는 매우 언짢은 기색을 보이며 "개성에 돌아가는 대로 소격전에서 천도가 옳은지, 안 옳은지 점을 쳐서 정하겠다" 하며 끝내 대신들의 만류에도 무악을 떠나 처음 천도 후보지로 거론되었던 한양으로 행차하였다.

태조는 한양에 도착하여 남경 별궁 터를 둘러보고는 마음을 굳힌 듯, "여기가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자 윤신달은 '개성이 제일이고, 한양이 그 다음이나, 여기도 서북쪽이 낮아서 물이 마른 것이 흠이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태조는 이미 마음을 정하여 그 말을 무시하다시피 하며, "개성인들 흠이 없겠느냐. 이곳의 형세를 살펴보니, 도읍이 될 만하다. 배도 드나들 수 있고, 사방에 물도 고르게 있으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 라고 말한다. 무학대사에게도 의견을 물으니, 무학대사는 "사방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으로 정할 만합니다. 다만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르소서." 하니, 줄곧 무악 천도를 주장하던 하륜을 제외한 다른 재상들도 '굳이 천도를 하려면 이곳이 좋다'는 의견을 낸다.

하륜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양 천도에 찬성하므로, 태조가 그 자리에서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였다. 그런데 양원식이라는 신하가 나와 적성 광실원(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이 적지라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이에 태조는 노원역(蘆原驛)에서 하루 묵고, 광실원에 도착하여 터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신하들이 모두 반대하므로 광실원 천도론은 바로 폐기되었다. 태조와 신하들은 광실원을 둘러보고, 개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장단에서 뱃놀이를 즐겼는데, 비로소 신하 대다수의 합의를 얻어 수도를 정했다는 흡족함에서였을 것이다.

개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중간에 있는 도라산을 둘러보고 또 지세를 살폈으나, 태조는 "이렇게 더럽고 습한 곳이 어찌 도읍이 될 수 있겠는가?" 라며 혹평을 하였다. 이를 볼 때, 태조는 한양에 처음 행차하였을 때 이미 완전히 마음을 굳어져 다른 후보지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상태였던 듯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음력 9월 27일(음력 8월 24일)에 도평의사사에서 한양으로 최종 합의를 마치고 태조에게 아뢰니, 태조는 이를 바로 인준하였다.
[1] 율리우스력으로는 11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