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역에서 유래된 개의 품종에 대한 내용은 포메라니안 문서 참고하십시오.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베를린 | 동프로이센 | 서프로이센 |
브란덴부르크 | 포메른 | 슐레지엔 | |
포젠 | 작센 | 하노버 | |
헤센나사우 | 베스트팔렌 | 라인란트 | |
슐레스비히홀슈타인 | 호엔촐레른 | }}}}}}}}} |
포메른 Pommern | |||||
주기(州旗) | 주장(州章) | ||||
1772년 ~ 1945년 | |||||
프로이센 왕국 (1772~1871) 독일 제국 (1871~1918) 바이마르 공화국 (1919~1933) 나치 독일 (1933~1945) |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 |||||
연합군 점령하 독일 | |||||
폴란드 인민 공화국 | |||||
행정 | |||||
시간대 | (UTC+1/+2) | ||||
주도(州都) | 슈테틴 | ||||
인문환경 | |||||
면적 | 30,120km² (1905년 기준) | ||||
인구 | 1,684,125명 (1905년 기준) | ||||
인구밀도 | 55.9명/km² |
[clearfix]
1. 개요
발트해 남쪽 해안 지대 일부분을 가리키는 옛 지명으로, 그 범위는 대략 서쪽으로 독일의 슈트랄준트[1]에서 동쪽으로 폴란드의 그단스크(독일명 단치히) 일대까지였다. 본래 포메른의 일부였던 포메렐리아가 1466년 이후 서프로이센에 넘어갔기 때문에 그 이후 포메른이라고 하면 대부분 포메른 공국과 그 후신인 독일의 구 포메른 주를 지칭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오데르 강이 독일과 폴란드의 새로운 국경으로 지정됨에 따라 포메른 지역의 70% 가량을 차지하는 오데르 강 이동(以東) 지역은 폴란드의 영토로 할양되어 현대 폴란드의 자호드니오포모르스키에 주, 포모르스키에 주, 그리고 쿠야프스코포모르스키에 주의 일부가 되었다. 독일의 영토로 잔존한 서부 지역은 메클렌부르크 지역과 합쳐져 오늘날의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로 재편성되었다.2. 역사
포메른이라는 명칭은 고대 슬라브족의 언어로 바다 근처 땅이라는 의미를 가진 'Po More'에서 유래했다.기원전 6세기 경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유틀란트 반도에서 게르만족이 이주해 포메른에 정착했다. 이후 5세기 게르만족의 대이동 때 게르만족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빈 땅이 되었고, 5~6세기경 슬라브 계통 부족들이 동쪽에서 이동해 포메른에 정착했다. 이 슬라브족들을 포모제인이라고 부르며, 폴란드인과 마찬가지로 서슬라브 계통에 속한다. 지금도 폴란드에는 카슈브인 등 언어적으로 포모제인의 후계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있다.
12~14세기 경에는 신성 로마 제국, 덴마크, 폴란드가 이 지역을 놓고 경쟁했다. 폴란드는 볼레스와프 3세 시절 포메른 공국과 뤼겐 공국을 봉신국화 하고 나머지 영토도 점령 하면서 거의 대부분을 정복했으나 볼레스와프 사후 포메렐리아 공국만 남고 속국이였던 포메른 공국과 뤼겐 공국은 독립하였다. 그러나 포메른 공국은 1164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국 중 하나인 작센 공국의 속국이 되었고, 이후 1181년부터 포메른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 본국의 구성국이 되었으나 1185년부터는 뤼겐 공국과 함께 덴마크의 이중 봉신국이 되었다. 이후 1227년,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2세가 홀슈타인 백국과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이 포메른 공국의 종주권을 되찾아 제후국화 시키고, 뤼겐 공국 또한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국이 되었지만 뤼겐 공국은 덴마크로부터 완전히 풀려나진 않고 1325년 해체되기 전까지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국이자 덴마크의 봉신국인 특수한 지위로 남았다. 이후 튜튼 기사단의 정복 활동과 동방식민운동으로 포메른 공국뿐만 아니라 포메렐리아 지역까지도 독일화가 상당부분 진척되었다. 그러나 1446년 튜튼 기사단이 폴란드 왕국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포메렐리아는 폴란드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해야만 했다. 폴란드는 포메렐리아와 친폴란드 서부 프로이센 지역을 묶어 서프로이센의 전신이 되는 왕령 프루시라는 지역을 만들었다. 이후 포메렐리아의 최대 항구이자 폴란드 최대 항구도시가 된 그단스크에서는 폴란드에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진압되었다.
한편 신성 로마 제국과 폴란드 왕국의 이중 봉신이었던 포메른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2세가 당시 아스카니아(Askania) 가문이 통치하던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의 종속국으로 만들어버렸고, 이때부터 포메른 공국의 역사는 브란덴부르크와의 종주권을 청산하기 위한 갈등의 연속이었다. 이 종주권 문제는 결국 1529년에 브란덴부르크가 포메른 공국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는 대신, 포메른 그라이펜 가문[2]이 단절되면 포메른을 상속받기로 하는 그림니츠 조약이 체결되며 일단락되었다. 비슷한 시기 종교 개혁의 물결이 유럽 북부를 휩쓸면서 북독일 영방국가들이 루터교회로 개종할때 그라이펜 가문은 요하네스 부겐하겐[3]의 주도로 루터교회로 개종하였다.
30년 전쟁 시기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전장이 된 포메른은 피비린내 나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1637년, 최후의 포메른 공작 보기슬라프 14세가 사망하며 그라이펜 가문의 대가 끊겼고, 1648년에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포메른은 분할되어 서부지역은 스웨덴이, 동부 지역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 차지했다. 이 시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프로이센 공작을 겸했고 프로이센 공작으로서는 명목상 폴란드 왕을 섬겼지만, 포메른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폴란드 왕의 명목상의 지배조차도 받지 않았다.[4]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1656년 대홍수와 북방전쟁을 기회로 프로이센 공국을 폴란드에서 독립시켰고 1701년 프로이센 왕국이 되었다. 프로이센 왕국은 1712년 대북방전쟁으로 스웨덴으로부터 포메른 최대 도시인 슈테틴 일대를 할양받았으며 1791년과 1793년 두 차례의 폴란드 분할에서 폴란드 왕령 프루시까지 획득해 포메른 대부분 지역이 프로이센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이에 따라 프로이센은 포메른 공국 지역에는 포메른 주(Provinz Pommern), 왕령 프루시 지역에는 서프로이센 주(Provinz Westpreußen)라는 새로운 행정 구역을 신설했고, 이는 1945년까지 존속되었다. 이후로도 프로이센 왕국의 승승장구는 계속되어서 빈 회의에서 스웨덴이 가지고있던 마지막 독일 영토인 스웨덴령 포메른을 가져와 포메른 주에 편입시켰고, 프로이센이 독일 통일을 주도하여 독일 제국이 수립되자 포메른 역시 자연스럽게 독일 제국의 일원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포메른은 옛부터 토양이 농사에 부적합하여 성장이 더디었으며 특히 서포메른은 슈테틴, 슈트랄준트, 비스마르 등 항만 한자 도시들을 중심으로 상업이 발달한데 반해 동포메른의 해안은 사막을 방불케하는 모래사장이 끝없이 펼쳐져 마땅한 항만을 건설하기에 부적합했던 까닭에 교통운수에 큰 어려움을 겪었고 경제/문화적으로도 다른 지역보다 현저히 뒤쳐졌다. 그 영향으로 보수적이었던 융커들이 포메른 일대를 장악하였는데,[5] 포메른 일대에서 공식적으로 농노제가 폐지된 것이 1807년의 일이지만 그 후로도 포메른 농민들은 소작농으로서 별로 농노와 다를 바 없는 생활[6]을 해야만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7] 포젠과 서프로이센 일대가 신생 폴란드에게 넘어감에 따라 독일에 남은 포메른은 급작스럽게 폴란드와 국경을 마주한 최동단 지역[8]이 되었고, 이러한 국경 변화는 포메른에 뼈아픈 타격으로 다가왔다. 전통적으로 농업을 핵심 산업[9]으로 하는 포메른은 농업 생산물은 근교의 슐레지엔, 포젠, 서프로이센 등지의 시장에 내다팔면서 먹고 살았는데 이 시장이 한 순간에 사라져버린 것. 불황과 더불어서 융커들의 본거지라는 배경[10]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내내 포메른의 정치 지형을 우경화하는데 일조했고, 1920년대 내내 독일 국가인민당(Deutschnationale VolksPartei)라는 극우 성향의 정당[11]이 이 곳에서 세를 떨친다.[12]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을 알린 폴란드 침공의 첫 공세가 포메른에서 시작되었으며 이후 나치 독일이 승승장구하면서 대부분의 전투가 독일 국외에서 벌어지면서 포메른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나날[13]들을 보냈다. 그러나 동쪽에서 진격하기 시작한 소련군이 마침내 1945년 2월 8일 포메른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은 소년과 노인들까지 긁어모아 동지 작전(Fall Sonnenwende)이라는 이름의 반격을 감행했지만 결국 1945년 4월 20일 소련군은 포메른을 완전히 점령했다.
2차 대전 종전 후 포츠담 회담을 통해 양국의 국경선이 최종적으로 확정됐고, 연합국 사이의 합의에 따라 전후 독일과 폴란드 사이의 국경이 오데르 강과 나이세 강으로 정해짐에 따라서 이 국경선 외부에 위치했던 오데르 나이세 선 이동이 고스란히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넘어갔다. 이에 따라 포메른의 대부분도 동프로이센, 서프로이센, 슐레지엔, 포젠과 함께 폴란드에 할양되었으며, 이때 오데르-나이세 선 서안에 위치한 슈테틴(폴란드명 슈체친)도 폴란드에 같이 넘어갔다. 한편 슈체친을 제외한 오데르-나이세 선 서부의 구 포메른 지역은 포어포메른(Vorpommern)[14]이라는 명칭으로 메클렌부르크와 합쳐져서 행정적으로 재편성되었다.[15] 폴란드는 옛 독일령 포메른 주에는 슈체친 주를, 포메렐리아 지역에는 그단스크 주를 설치했고, 이후 행정구역이 몇 번 바뀌면서 현재에는 서포모제 주, 포모제 주와 쿠야비포모제 주의 일부분이 되었다.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에 거주하던 독일계 주민들은 대다수가 폴란드와 소련에 의하여 강제 추방되어 오데르-나이세 선 이서의 독일 본토로 이주했으며, 그 빈 자리는 소련에게 뺏긴 동쪽 영토에서 마찬가지로 추방당한 폴란드 이주민들이 채웠다. 냉전 시기 독일계 실향민들은 추방민 연합회라는 정당을 건설하고 옛 영토를 되찾을 것을 주장하는 목소리를 드높이기도 했지만 1970년대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 총리가 변경된 국경선을 승인한데 이어서 1990년 통일 과정에서 헬무트 콜 전 총리가 통일을 승인받는 대가로 동방 영토룰 영구 적으로 포기한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강역이 영구히 폴란드의 영토가 되었다.
3. 같이 보기
[1] 이 곳의 지역구 연방하원 출신이 최장수 독일 총리인 앙겔라 메르켈이다.[2] 항목 최상단에 위치한 표 속 주기에 등장하는 붉은 독수리가 이 가문의 문장이다. 이 가문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칼마르 연합의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국왕이었던 포메른의 에리크.[3] 마르틴 루터의 장례식을 주관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고, 포메른 공국의 종교개혁 이후 덴마크로 건너가 크리스티안 3세를 보좌하여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 종교개혁을 실시하였다.[4] 물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봉신국이었기에 명목상으로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섬겼다.[5] 다른 것 다 제치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포메른 지주 출신이다.[6] 자작농으로 가장 핵심적인 요소였던 재산권이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이 재산권이 제한적이나마 인정된 것은 1850년의 일.[7] 정작 1차 대전 와중에 포메른 지역에는 전투 한 번 안 일어났다. 애초에 1차 대전 당시 독일 국내에서 전쟁이 벌어진 것이 얼마 되지 않았으며 그마저도 국경과 가까운 지역에서 발생했다.[8] 동프로이센도 있었지만 이 곳은 본토와 떨어져 폴란드 한 가운데 위치한 월경지가 되었다.[9] 1925년 바이마르 공화국이 낸 통계에서 포메른 인구의 51%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10] 당장 1919년 독일 혁명 이후 스파르타쿠스 봉기, 카프 폭동, 맥주홀 폭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포메른 지역의 융커들은 자유군단을 거의 사병처럼 운용하면서 좌익 세력들을 때려잡았다. 심지어 저 멀리 베스트팔렌 루르 지역에서 일어난 노동자들의 파업까지 진압하러 원정갈 정도였다.[11] 1933년 히틀러를 총리로 삼는 보수 세력의 연정에 동의한 알프레트 후겐베르크가 바로 이 당의 지도자이다.[12] 다만 나치당은 별로 세를 못 떨쳤다. 나치가 본격적으로 포메른 지역에서 세력이 왕성해진 것은 다른 독일 대부분 지역과 마찬가지로 1929년의 대공황 이후.[13] 다른 지역은 산업지대라서 연합국의 공습에 죽도록 시달렸지만 포메른은 농업지대라서 그런 것도 없었다. 그나마 산업이 발달하고 베를린의 외항을 담당했던 슈테틴이 드문드문 폭격을 당했으나 그것도 베를린이나 드레스덴이나 함부르크가 당한 것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였다.[14] '전(前) 포메른'이라는 의미다. 동방식민운동 당시 독일인이 포메른 지역 중 상대적으로 먼저 정착한 지역이라서 전(前)자를 붙였다.[15] 그 와중에 포메른의 일부 지역은 뜬금없이 브란덴부르크 주로 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