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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600><colcolor=gold> 시리아 육군 제25특수임무사단장 수헤일 알하산 سُهَيْلُ سَلْمَانَ الْحَسَنِ | ||
출생 | 1970년 6월 10일 ([age(1970-06-10)]세) | |
시리아 라타키아주 자블레 | ||
국적 | [[시리아|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군인 | |
복무 | 시리아 육군 | |
계급 |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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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리아의 군인으로 "타이거 대령"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1970년 라타키아 주 해안도시인 자블레(Jableh)에서 태어났다. 라타키아 주 해안 지역은 알라위파 다수 거주 지역으로, 그 또한 알라위파이다. 시리아 내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는 정부측의 훌륭한 야전 지휘관으로 알려져 있으며,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의 압도적인 신임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5년 12월 소장으로 진급하였다.2. 생애
1991년 시리아 홈스 육군사관학교[1]를 중위 계급으로 졸업하였고, 시리아 육군 부대의 공수 훈련을 전담하여 여기에서 성과와 두각을 드러내면서 시리아 공군 정보사령부[2]에 배치되었다. 2005~2006년간 이라크의 혼란을 틈타 증가하는 알카에다의 활동을 제압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시리아 내 알카에다에 직접 가입[3]하여 이라크-시리아 국경지대로 침투하는 알카에다 조직원들을 효과적으로 격퇴시키고, 시리아 알카에다 조직을 와해시킨 데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1년 수헤일 알 하산 대령은 시리아 육군의 특수부대(Qawat Al-Khassa)의 지휘관으로 전보되었으며, 2013년까지 라타키아 외곽 지대에 주둔해 있었다. 이후 자신의 특수부대를 중심으로 정규전에 적합한 기동 전투단 형태로 확대 개편, 이것을 호랑이 부대(Qawat Al-Nimr)가 된다. 2013년 8월 이들리브 주의 마을인 아리하가 반군들에게 함락되자, 이에 대한 탈환 작전을 지휘하면서 처음으로 시리아 내전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상은 아랍언론 al-Masdar NEWS에서 보도된 내용이다.2014년 봄에 시리아 국영 SANA통신의 보도를 통해 처음으로 매스미디어에 노출되었으며, 그가 세운 전공이 알려지면서 정부군에서는 공화국수비대 제104공수여단을 이끄는 드루즈파 출신의 잇샴 자헤라딘 소장과 더불어 정부군의 영웅이자 아이콘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후 프랑스의 르 몽드 지를 비롯한 여러 서구권 매스미디어에서도 언급되면서 유명해졌다. 롬멜이나 몽고메리와 같은 전쟁 영웅들처럼 수헤일 알 하산 소장도 자신을 드러내는 개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전에는 최상단 이미지와 같은 마른 얼굴에 스냅백 타입의 군모를 착용했지만, 2015년 이들리드 패배 이후 잠적했다가 다시 나타난 뒤부터는 살이 붙은 얼굴에 턱수염을 기르고 선글라스를 쓰기 시작했다. 참고로 턱수염에는 마스카라 떡칠을 하고 있어서 상당히 기묘하게 보인다.[4][5]
수많은 전공으로 2014년에 이미 준장 진급 인사명령이 있었지만, 야전에서 부하들과 함께 싸우고 싶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한다. 2015년 10월 4일부터 진행되어 11월 13일 종결된 알레포 동부 쿠웨이르 군사공항 구원 작전을 성공시키면서 기존의 준장 진급안까지 포함되어 11월 25일 소장으로 특진했다. 이후 소장 권한에 맞게 타이거 사단으로 확대 개편, 휘하에 타이거 여단, 치타 여단[6]을 데리고 팔미라를 탈환하였고, IS가 재점령한 사헤르 가스 유전에 대한 공세를 감행하였다. 2016년 7월에는 사막의 매 여단은 라카 원정군으로 차출되었다가 패전 이후 휴식하는 중이고, 타이거 부대는 알레포 북부 셰이크 나자르 공업도시로 이동하여 알레포 도심지 반군 지역에 대한 포위 기동을 개시했다. 7월 7일 요충지인 말라 농장을 점령하고 유일한 도심 반군 지역의 보급로인 알 카스틸로 고속도로를 차단하였으며, 2016년 9월에는 한 번 뚫렸던 알레포 남부 포위망을 복구하고 하마 지방의 반군 공세를 격퇴하는 등 종횡무진 활약했다.
지휘 스타일은 야전에서의 직접 지휘와 기동전으로 요약된다. 다른 지휘관들이 고전적인 전선 정면에서의 진퇴를 반복하는 데 비해 기동전으로 주요 고지를 공격하여 점령한 후, 적이 이를 탈환하기 위해 반격을 시도하면 바로 물러나서 적에게 고지를 내주고 포격과 공습으로 적에게 막대한 출혈을 강요한 다음 다시 재점령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적을 크게 소모시켜, 결국 적이 공세 역량을 완전히 상실하게 만드는 전법을 주로 사용한다. 기동전 범주에 포함되는 모든 전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SNS나 언론을 이용한 기만 전술에도 상당히 능하다. 가령 2016년 9월 하마 전선에 파병될 때 제4기갑사단과 타이거 부대 예비대를 투입한다고 선전하고는 본대를 이끌고 오거나, 하마 전선에 잔류한다고 선전하고는 갑자기 알레포에 나타나 공격을 지휘하는 식이다. 국제 사회의 관심을 끌기 위해 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시리아 내전의 여러 세력들의 허점을 찌르는 활용법이다.
잇샴 자헤라딘과 더불어 야전에서 직접 지휘하는 만큼 사망설이 상당히 많이 뜨는 사람이기도 하다. 2015년 6월 이들리브 참패 때 경호원이 사살되고 장기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사망설이나 중상설이 돌았으며, 2015년 11월 16일경 하마 지역에서 천막에 박격포탄이 떨어져 사망했다는 기사가 있었으나 그의 측근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2016년 1월 18일 쿠웨이르 군사공항에서 그가 탑승한 헬리콥터가 반군의 맨패즈에 격추당했다는 기사가 떴으나 역시 생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때 건재를 과시하는 사진이 떴으나 피부가 마치 마네킹처럼 반질반질하고 굉장히 어색한 악수 포즈를 부자연스럽게 취하여 마네킹으로 조작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2016년 알레포 동부 IS 포위 및 열병합 발전소 탈환 작전에서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고 맨얼굴로 야전 지휘를 하는 모습이 보도되면서 생존이 확인되었다. 마네킹 같은 피부 질감과 부자연스러운 포즈는 동영상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면서 조작이 아니라 원래 피부가 그렇다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2016년 8월 남부 알레포 전역에서도 오른손을 다쳐 9월 현재까지도 붕대를 감고 다니고 있으며, 8월에는 반군의 공격으로 경호원 2명이 사살당해 타이거 소장이 죽었다는 소식이 떴으나 건재하였다. 9월 하마 전선에서도 착륙하던 시리아 정부군의 가젤 헬리콥터가 TOW 미사일에 격추당하면서 타이거 소장이 탑승한 헬리콥터라는 루머가 돌았으나, 실제로는 다른 여단장이 탑승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탑승자는 전원 사망). 실제 사망 루머는 여기에 기록된 것보다 훨씬 많다.
상단 이미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건장한 남성들이 그에게 여성스럽게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키스하는 사진이 돌아서 게이 의혹이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아랍 부족장의 권위를 나타내는 퍼포먼스라고 한다. 남성조차 복종시키는 강한 남성이라는 극도로 마초적인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며, 전통적인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제25특수임무사단(타이거 부대)[7]
시리아 특수부대의 아버지 알리 하이다르(علي حيدر) 소장은 90년대 중반 러시아 스페츠나츠의 개념을 시리아로 이식하여 제14, 15특수전 사단을 창설한다. 특수전 사단이라고 하나 흔히 생각하는 특수전 부대가 아닌 스페츠나츠와 동일한 군의 선봉에 서는 경보병 사단이었으며, 타이거 부대의 호랑이 마크는 원래 시리아 특수전사단의 부대 마크였고, 타이거 부대도 라타키아에 주둔하던 경보병 여단에 지나지 않았다. 타이거 부대라고 불린 것도 시리아 병력 편제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황에서 부대 마크만 보고 잘못 알려진 것에 가깝다. 처음에는 사령관인 수헤일 알 하산 대령의 주특기에 따라 내전 하에서 병력의 훈련을 도맡았다. 하지만 2013년 이들리브 근방 아리하 시가 함락당하면서 직접 출진하여 전투에 나섰으며, 시리아 정부군이 거의 와해된 상황에서 이러한 최정예부대의 전투력이 매우 높다는 점이 증명되어 이리저리 굴려지는(...) 처지가 되었다. 이런 여단급 정예 제대가 커다란 성과를 거두자 마찬가지로 정예병력에 실력이 검증된 대령이 지휘하는 유사 부대를 몇 개 더 창설하였는데, 그 중 유명한 것이 모하메드 알 자베르 대령이 지휘하는 사막의 매 여단(Liwa Suqur al-Sahara)이다.[8]
아사드 대통령이 자신처럼 젋고 실력으로 두각을 나타낸 데다 알라위파이기까지 한 타이거 소장을 절대적으로 신임하여 부대 편성에는 전 시리아군에서 최고의 인재만 선발할 수 있도록 재량권을 주었으며, 부대의 확장에는 아사드 대통령의 인척이자 시리아 경제 권한을 장악했다고 알려진 시리아텔(SyriaTEL)의 회장 라미 마클루프가 자금을 지원했다. 주로 4기갑사단, 11기갑사단 내에서 병력을 충원하였고, 특히 배신의 우려가 적은 알라위파 병사들을 우선 충원하였기에 병력의 질은 시리아 정부군 중에서도 최정예부대에 해당되었다.
하지만 2015년 5월 이들리브에서 패전하면서 이런 정예 기간 병력들을 상당수 잃어버렸고,[9] 이후로는 장교진 포함 1000명의 기간 병력을 중심으로 휘하에 정예 민병대들을 충원받아 지휘하는 테스크포스 형태로 작전하고 있다. 알리 타하 그룹, 리와 알 쿠드스 그룹 등을 비롯 알려진 것만 15개 민병대가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작전 지역에 따라 해당 지역의 부족 민병대나 기독교 민병대들의 지원을 받기도 한다. 러시아 스페츠나츠 파견대가 타이거 소장의 직접 호위와 물자 보급 등의 여러 도움을 주고 있다. 이란제 통신차량이 목격된 것으로 보아 이란의 지원도 받는 모양.
2019년 이들리브 새벽 작전부터는 러시아제 군용 드론을 직접 통제하면서 상공 감시를 수행하고, 러시아 공군 및 직할 포병과 연계하여 데이터링크를 통해 정밀 타격을 수행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민가나 농장에 숨어들며 공습을 회피하려는 반군 증원 병력을 찾아내어 타격하는 것을 독립언론 ANNA뉴스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대로 공개하기도 했다.[10] 한편 러시아 T-90 전차의 야간 전투 능력을 이용 다량의 야시경과 열영상 조준경을 운용하면서 낮에는 전투를 거부하고 밤에만 야간 작전으로 전투해서, 택티컬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은 중앙아시아 계열 반군들의 전투력을 단숨에 무력화하고 제압하는 기상천외한 전술을 선보이기도 했다. 러시아제 열영상 조준경으로 무장한 저격부대를 운용하기도 했다.
시리아 내전이 8년째 이어지면서 수출입이 봉쇄당하고 자금이 동결된 시리아 정부가 군대의 유지 비용을 대기 어렵기 때문에, 대다수의 부대와 민병대가 정부의 묵인 하에 지역 이권에 개입하거나 검문소를 설치하고 통행료를 받는 것처럼 타이거 부대는 하마 주에서 광범위한 경제적 이권에 개입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부대 운영 비용을 자체적으로 조달한다. 타이거 소장은 작전 능력과 더불어 하마 주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익 집단들의 이권 문제를 중재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데에 더욱 특별한 능력을 보여준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이유로 반정부 측에서는 수헤일 알 하산 소장을 사실상 군벌 지도자로 보기도 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이권을 두고 광범위한 납치, 감금, 고문에 대한 의혹이 루머 형태로 제기된다는 것이다. 사막의 매 여단과는 사이가 좋지 않다는 루머가 있는데, 2016년 3월 팔미라 해방전 당시 타이거 부대가 사막의 매 여단에 오발을 하여 사망자가 발생한 적이 있다. 이것이 단순 오발이 아니라 경제 이권을 두고 대립하던 차에 본때를 보여준 것이라는 의혹이 있었으며, 사막의 매 여단은 이에 대해 엄중하게 항의한 적이 있었다. 사막의 매 여단도 이런 체제로 부대를 유지하는 것은 동일하며, 시리아의 반군 정부군 민병대 모두가 이러한 체제로 유지비를 벌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초반, 일시적으로 러시아 측에게 불리한 형세로 이어지자 타이거 부대원들에게 고액 금액을 불러 용병으로 일부 투입된다는 소식이 나왔다. 애초에 타이거 부대는 부대운영비를 자급자족하는 군벌에 가까운 형태라서 돈을 벌기 위해 러시아의 용병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4. 활약상
시리아 정부군의 장군으로서 정부측과 반정부측, 그리고 동서방 양쪽에서 온갖 과대평가와 폄하를 받고 있지만, 타이거 대령이 과거의 명장들처럼 유독 주목 받고 있는 군사적 지도자라는 건 사실이다. 어찌 보면 시리아 정부가 내전 종식을 위한 구국의 영웅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며, 이 경우 타이거 대령은 내전 종식 이후(어쩌면 아사드조차도 넘을 정도로) 엄청난 정치적 입지를 가지게 될 수도 있다.최근에는 지휘관의 공훈보다는 이름 없는 일선의 하급 장병들을 띄우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역사상 전쟁 영웅은 쉽게 국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11] 현재 시리아 정부군은 여러 반군 그룹과 일진일퇴를 걸치며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수헤일 알하산의 부대만이 연속된 공세 작전을 통해 반군을 몰아내고 정부의 입지를 다지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수헤일 알 하산은 현재로써는 서방의 전범 재판에 걸릴 만한 일에 가담하거나 연루된 이력이 없기 때문에, 만일 내전이 종식되기만 한다면 그는 바샤르 알 아사드 대신 시리아 정계의 명목상 내지 실질적인 실세로 진출하게 되고 이것이 서방 강대국들, 특히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노리는 터키 및 미국과의 협상이나 내전으로 악화된 시리아 -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 개선에 이득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시리아 반군측에서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시리아 정부측 시민과 반군측 시민 양쪽에서 모두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양측은 어느 한쪽이 쓰러지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더 이상 뒤가 없는 싸움을 지속하고 있다.
4.1. 주요 전역
4.1.1. 2013년
- 아리하 전투 : 타이거 대령의 데뷔전이 된 전투. 2013년 8월 이들리브주 아리하 시가지가 반군에게 함락되자 출병하여 공군의 공습 지원을 받아가면서 10일만에 아리하 시가지를 탈환하였다.
- 알레포 전역 : 전설의 시작. 2013년 9월 26일 반군이 알레포 시로 통하는 정부군의 유일한 보급로가 위치한 카나시르 시가지를 점령하여 정부군의 보급이 어렵게 되었다. 대규모의 보급 행렬을 호송하기 위해 타이거 여단이 출병하여 10월 3일 일주일을 넘는 격전 끝에 카나시르 시가지에 대한 통제권을 다시 되찾았으며, 일주일 후에는 주변 40여 개 마을을 해방시켰다. 이로써 반군의 알레포 포위 시도가 좌절되었으며, 250km를 전진하여 알레포 시가지로 돌입하였다. 이후 2013년 말까지 알레포 국제 공항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하고 시리아군 80번 기지를 재탈환하였다. 뒤이어 산업도시 셰이크 나자르에 위치한 반군의 군수공장 지대에 대한 탈환 작전에 돌입하였다. 이곳은 반군이 공업시설을 이용하여 무기를 제작/정비하는 전략 거점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셰이크 나자르 공업도시의 탈환은 2014년 7월에 완료되었다. 한편 2014년 5월 22일에는 1년 넘게 포위되어 버티던 알레포 중앙 교도소를 해방시켰으며, 알레포 시가지 중심부까지 점거하였다. 이 때 타이거 대령이 확보한 하마에서 카나시르를 거쳐 알레포로 이어지는 보급로와 시가지 중심부 점령지는 2016년 말 정부군이 알레포를 완전 탈환하는 발판이 되었다.
4.1.2. 2014년
- 하마 전역 (2014년 7월 ~ 2014년 10월) : 2014년 7월 하마(Hama) 주 북부에서 알 카에다 소속 알 누스라 전선의 대규모 공세가 실시되었다. 이 공격은 하마 시가지와 하마 군사공항에 대한 탈환을 목표로 삼고 있었으며, 알 누스라 전선 총사령관인 아부 무함마드 알 줄라니(Abu Mohammad al-Julani)가 직접 출진하여 기독교도들이 거주하는 도시인 마르데(Mhardeh)에 육박했다. 당시 시리아 정부군은 하마 지방에 예비 병력이 부족하여 곤란을 겪고 있었으며, 타이거 대령도 알레포 전역에서 활동 중이어서 뺄 수 있는 병력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타이거 대령은 셰이크 나자르 공업단지에 대한 점령을 급히 완료하고 타이거 여단을 이끌고 8월 말 하마 주에 진입했으며, 즉시 아르즈(Arzh), 키탑(Khittab)을 점령하고 군기지를 재탈환하면서 기독교도들의 도시인 마르데에 대한 알 카에다의 공격을 돈좌시켰다. 한 달만에 대공세에 몰리던 하마 주의 상황을 반전시켰으며, 오히려 반격을 가해 시리아 정부군이 10개월간 공세를 가했음에도 점령하지 못했던 전략거점 모렉(Morek)시를 점령하였다.
- 제2차 사헤르 가스 유전 공방전(2014년 11월) : 2014년 초, 알 카에다 소속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ISIL)는 알 카에다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각지의 반군에 대한 기습 공격을 결행, 자유 시리아군과 알 카에다의 점령지를 순식간에 빼앗아 반군 최대의 세력으로 성장하고 국가를 선포하였다. 뒤이어 라카 시내에서 3년동안 버텨온 정부군 17기갑사단 93여단 기지를 순식간에 점령하고 포로를 처형하였으며, 라카 주에 대한 공습 견제를 담당하던 정부군 알 타브카(Al-Tabqa) 공군기지를 점령하여 라카 주의 전략적 안전을 확보하였다. 뒤이어 2014년 10월 정부군의 주요 전략거점인 홈스 사막의 사헤르 가스 유전지대를 탈환하고 기름을 퍼가기 시작하였으며, 팔미라 근방의 T-4 공군기지에 대한 대공세를 걸어 격전이 거듭되었다. 이에 11월 시리아 정부군의 정예부대인 사막의 매 여단(Liwa Suqur al-Sahara)이 출정하였고, 이와 함께 타이거 대령도 부대를 이끌고 출진하였다. IS는 11월 내내 공세를 걸었으나 타이거 부대와 사막의 매 여단의 반격에 결국 패배하였고, 정부군은 12월 1일 사헤르 가스 유전지대를 완전히 탈환하였음을 선포하였다.
4.1.3. 2015년
- 2015년 북서부 대공세 (2015년 4월 ~ 6월) : 시리아 북서부 이들리브 지방의 대부분은 반군에 점령된 상태였으나 이들리브, 아리하, 지슈르 앗슈구르의 세 도시를 잇는 M4 고속도로 축선만큼은 강력한 방어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 세 도시를 점령하고, 주둔한 정부군을 포위 섬멸하기 위해 알 카에다 소속 알 누스라 전선과 자유 시리아군 일부 조직, 이슬람 전선 소속의 아흐라르 알 샴을 비롯한 여러 반군 집단들이 그간의 반목을 접어두고 사상 최대의 반군 연합체 "정복의 군대"(Jaish al-Fatah)를 결성하였고, 2015년 3월 28일 이들리브에 대한 전면 대공세에 돌입하였다. 3월 28일 전황도.
대공세를 견디지 못한 시리아군은 이들리브 시가지를 내준 후 후방의 아리하로 철수하였고, 시리아 전역에서 가용병력을 총동원, 5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였고, 타이거 부대도 4월 4일 아리하에 출진하여 아리하 시 북쪽 알 마스투마 육군기지에 가해진 반군의 공세를 격퇴하고 최대 450명의 반군 사상자를 강요하며 이들리브 수복 작전에 돌입하였다. 타이거 부대는 공세의 선봉에 서서 4월 8일에는 콰미나스(Qameenas), 화일란(Faylan)을 비롯한 이들리브로 향하는 국도 주변부의 마을로 진입했고, 4월 12일에는 콰미나스 마을을 점령하며 반군의 방어선을 붕괴시키고 순조롭게 진격하고 있었다. 공군 정보국은 방어선 붕괴로 당황하는 정복의 군대 지휘관들의 무선을 감청해냈고, 전역에서 51차례의 공습을 가하며 반군을 강하게 몰아붙였다. 18일에는 마스투마 육군기지 서쪽의 무콰블라(Muqablah) 마을을 점령하고 20일에는 자히르 알 무스후라끄 언덕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정복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이어지는 타이거 부대와 정부군의 기세를 꺾기 위해 정면 대응이 아니라 후방에 대한 공세를 택했다. 바로 2015년 북서부 대공세라 불리는 작전으로 정부군의 보급로인 M4 고속도로를 차단하기 위한 작전이었으며, 이를 위해 알 가브 평야지대와 소도시 지슈르 앗 슈구르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4월 22일 지슈르 앗슈구르 북부 검문소와 콰미드 벽돌 공장에 돌입한 자살폭탄차량과 함께 대전투가 개시되었다. 4월 24일 전황도.
4월 23일 알카에다 소속 알 누스라 전선은 15명의 자살폭탄병을 투입하며 남동쪽의 설탕 공장과 검문소 전역에 강공을 가했으며, 24일에는 지슈르 앗슈구르 시내 감제에 성공했고 자살폭탄차량을 잇따라 보내면서 4월 25일에는 지슈르 앗슈구르 시내를 완전 통제, 정부군 병력들은 시내의 국립 병원으로 후퇴했고 포위당했다. M4 고속도로는 정복의 군대에 의해 여러 마을이 점령되고 TOW 미사일에 의한 화력통제하에 놓이면서 사실상 M4 고속도로는 절단당했다. 여기에 정복의 군대가 아리하, 마스투마 지역에도 대공세를 가해오면서 정부군은 사실상 포위되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정부군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가운데, 타이거 부대는 퇴로 확보를 위해 지슈르 앗슈구르 시내 재탈환 작전에 투입되었다. 5월 7일 지슈르 앗 슈구르 설탕 공장을 재탈환했고, 5월 10일에는 포위된 국립 병원을 향해 진격했다. 알 카에다 소속 알 누스라 전선은 자살폭탄차량을 투입하고 대공세를 가하면서 병원의 정부군을 박살내기 위해 공세를 가했으나, 타이거 부대와 교전하면서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5월 12일부터 마스토마, 아리하로 대규모의 정복의 군대가 출진하면서 7일간의 격전 끝에 5월 19일 정부군의 상태는 크게 악화되었고, 지하드 반군 조직인 "아흐라르 알 샴"은 정부군이 아리하에서 퇴각을 시작했다고 발표하였다. 결국 5월 28일 정복의 군대는 아리하에 총공세를 감행하였고 정부군은 필사의 탈출을 감행한다.
타이거 부대는 이 대패 속에서 퇴로인 M4 고속도로의 확보를 위해 지슈르 앗슈구르 설탕 공장과 시내를 확보하기 위해 쉴 새 없는 격전을 벌였고, 특히 국립 병원에 포위된 정부군을 구원하기 위해 발악을 했지만 정복의 군대의 뛰어난 작전 지휘, 심각하게 부족했던 탄약, 미국제 TOW 미사일, 그리고 전체적으로 무너져가는 전선이라는 악영향 속에서 한계를 맞이했다. 결국 타이거 부대는 800여 명의 부상자를 내고 국방장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탄약을 요청했음에도 보급을 받지 못했다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정부군과 함께 탈출하였고, 국립 병원의 정부군 200여 명도 최후의 엄호 속에 탈출했다. 하지만 80여 명만이 타이거 부대에 합류하였고, 120여 명은 근처 가옥이나 숲에 숨어있다가 반군에 잡혀 처형당하는 최후를 맞이했다. 6월 13일에는 타이거 대령의 경호원 중 한 명이 반군의 저격에 사살당했고, 주변인의 증언에 의하면 "타이거 대령은 전례 없이 동요하고 있었다".
2015년 이들리브 대패 다이제스트 1. 2차 이들리브 전투
2015년 이들리브 대패 다이제스트 2. 이들리브 재수복 전투
2015년 이들리브 대패 다이제스트 3. 북서부 대공세와 정부군 참패
타이거 대령의 커리어에서 최대의 패배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일 뿐만 아니라, 시리아 정부군이 가까스로 유지하던 세력 균형이 무너진 대사건으로, 이 여파로 인해 라타키아 북부까지 정복의 군대에게 점령당했다. 정복의 군대는 전과 확대를 위해 지슈르 앗슈구르 남부 알 가브 지방에 대한 공세를 7월부터 8월까지 가했으나 정부군의 반격에 공세가 돈좌되었다. 타이거 부대는 7월 방어전 및 반격에만 참여하였고, 8월 반군 역습 때에는 철수하여 휴식에 들어갔다.
타이거 부대는 이 때의 피해로 기간 병력들이 상당부분 상실되었고, 정규 군대의 경보병 여단으로써의 정체성은 이 때를 기점으로 사라지게 된다. 2014년부터 휘하에 민병대들을 영입해서 지휘해 사용해왔으나, 4기갑사단과 콸라문 방패 부대와의 관계처럼 정규군-보조군의 관계였다. 이 때 기간 병력을 상당부분 잃어버리고 이후로는 타이거 부대 장교진이 정예 민병대들을 지휘하는 형태로 바뀐다. 2018년 현재 지휘부는 정규군 장교들이지만, 전투병력은 1000명의 기간병력을 제외하면 죄다 민병대라는 기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 쿠웨이르 군사공항 구출 작전 (2015년 9월 ~ 11월) : 알레포 동부 쿠웨이르 군사공항은 공군학교를 포함한 주요 기지였으나, 2012년 반군에게 포위된 이후 항공 보급만을 받으며 3년을 버텨 왔다. 이란 혁명수비대를 비롯해 정부군과 지원 세력이 쿠웨이르 군사공항의 구원 계획을 여러 차례 입안하였으나 가용전력의 부족으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러시아의 참전으로 공군 전력이 크게 향상되었고, 더불어 이들리브 참패로 나빠진 분위기를 일신하고자 쿠웨이르 군사공항 구원 작전이 입안되었다. 한편 이들리브 전투의 패배를 추스르고 3개월간 정비한 타이거 대령과 그의 부대는 이란 혁명수비대와 국가방위대[12], 바트당 여단과 러시아 항공우주군의 보조를 받아 선봉으로써 쿠웨이르 군사공항 구원 작전에 임하게 되었다. 9월 22일 시리아 공군의 공습으로 시작된 작전은 IS의 반격에도 불구하고 순조로운 진행을 보여 10월 내내 주변 마을과 소도시를 점령하면서 10월 21에는 쿠웨이르 군사공항에서 4km 떨어진 지점까지 전진하였고, 11월 10일 밤에는 시리아 국영방송 기자들이 쿠웨이르 군사공항에서 전격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3년동안 포위된 쿠웨이르 군사공항을 해방시켰다. 300여 명의 잔존병력이 저항하던 쿠웨이르 군사공항의 장병의 대다수가 긴급한 의료 지원을 필요로 하는 수준이었다고 하며, 이들은 임무 교대되어 안전한 라타키아 지방으로 이송되었다. 시리아 정부는 이 전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패배 분위기를 불식시켰고, 러시아의 참전으로 인하여 승리의 앞날만이 있다는 이미지를 주는 데에 성공하였다. 또 이 전투의 주역인 타이거 대령에게는 소장 진급 명령을 하달함으로써 마침내 수헤일 알 하산은 만년 대령에서 소장으로 진급하게 되었다.
- 알레포 동부 공세 (2015년 12월 ~ 2016년 2월) : 쿠웨이르 군사공항 해방을 완료한 타이거 부대, 사막의 매 부대, 바트당 여단, 이란 혁명수비대는 계속해서 군사공항 주변의 마을들을 장악하면서 군사공항의 안전을 꾀했다. 알 바브(al Bab) 시가지를 비롯한 알레포 동부의 여러 도시를 탈환하는 가운데 알레포 시가지의 공업도시 셰이크 나자르에 주둔한 시리아 정부군이 동쪽으로 전진을 개시하면서 타이거 부대 또한 열병합 발전소가 위치한 지역을 포위하기 위해 기동하였고, IS 군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타이거 부대의 전진을 막지 못하고 패퇴했다. 2월 3일 타이거 부대는 셰이크 나자르와 13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군하였고, IS가 주둔한 타이바흐(Tayyibah) 마을로 돌입하여 격전을 벌여 IS 주력이 탈출을 시작하였다. 2월 7일에는 셰이크 나자르에서 7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군, IS는 열병합 발전소 지점의 포위망에 갇히기 시작했으며 이를 뚫기 위한 반격을 개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마침내 2월 20일에는 타이거 부대가 열병합 발전소를 완전 통제하는 데 성공, 2월 21일에는 IS가 모든 지역을 빼앗기고 무질서하게 탈주하다가 포로로 잡혔다. 쿠웨이르 구원에서 알레포 동부 공세로 이어지는 작전을 통해 정부군은 알레포 동부의 영토를 다시 빼앗을 수 있었고, 러시아 참전과 더불어 정부군 대반격 성공을 과시할 수 있게 되었다.
4.1.4. 2016년
- 카나시르 보급로 재탈환 작전 (2016년 2월) : 카나시르 시가지는 하마에서 알레포로 이어지는 보급로 가운데 위치한 도시로, 매우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IS는 알레포 동부 패배를 설욕하고 IS 수도 라카로 진격하던 777기계화여단을 멈추기 위해 중요 보급로인 카나시르 시가지에 대한 탈환 작전을 2월 21일 오후 10시에 개시했으며, 2월 23일까지 카나시르 주변의 도로와 마을들을 점령하여 시리아 정부군의 보급로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에 성공했다. 한편 타이거 부대를 선봉으로 헤즈볼라와 알 쿠드스 여단[13]이 협동하여 2월 23일부터 카나시르 구원 작전에 나섰다. 2월 28일 카나시르 시가지와 주변 마을에서 IS 세력을 일소하고 알레포로 들어가는 보급로를 다시 개통시켰다. 7일간의 보급로 차단 기간 동안 알레포 시내의 물가는 크게 뛰어올라 서민 생활이 극도로 궁핍해졌으나, 타이거 소장의 활약으로 다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 팔미라 탈환 작전 (2016년 3월) : 팔미라는 그렇게까지 중요한 도시가 아니었으나, 정부군이 데이르에르조르 주와 시가지를 장악하는 데 있어서 보급선의 핵심이 되는 중요한 거점으로써 기능하고 있었다. 2015년 5월 "정복의 군대"에 의한 대규모의 이들리브 상실을 막기 위해 팔미라에 주둔하던 정부군이 급파되면서 팔미라의 방어는 크게 약해졌고, 이에 IS는 데이르에르조르 주에 대한 완전통제를 위해 팔미라를 2015년 5월 13일부터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정부군은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병력이 부족하여 결국 팔미라 도시를 IS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으나, 반격을 통해 사헤르 가스 유전이나 T-4 공군기지 방어에는 성공했다. 이후 이들리브가 정리되면서 2015년 6월 재공세에 들어갔으나 팔미라 시가지를 탈환하지는 않고 주변부 지역을 정리하여 군사 시설 방어를 확고히 하는 선에서 마무리했을 뿐이었다. 한편 ISIS가 팔미라 고대 유적을 파괴하고 유적지에서 포로를 처형하는 만행을 저지르면서, 시리아 정부군이 극단주의에 맞서 고대 유적과 역사를 보호한다는 이미지를 선전함과 동시에 데이르에르조르에서 포위된 정부군을 구제하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2016년 팔미라 탈환 작전이 입안되었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작전인 만큼 타이거 소장이 지휘권을 가지고 타이거 여단, 치타 여단, 사막의 매 여단을 비롯하여 헤즈볼라, 이란 혁명수비대, 러시아 항공우주군, 국가방위대 등의 주요 병력을 소집하여 2016년 3월 9일부터 대공세를 개시하였다. IS는 도시 외곽에 참호를 구축하고 강력하게 저항하였으나, 정부군의 로켓 포격에 IS 팔미라 사령관 칼릴 모하메드가 사망하고 강력한 다방면 공세에 주변 지역을 계속해서 빼앗겨 3월 23일부터는 팔미라 시가지에 돌입하여 근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IS는 25일 팔미라 주민들을 분산시키고 격렬하게 저항하였으나, 전방위적으로 돌입하는 타이거 부대와 헤즈볼라, 국가방위대 등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팔미라 시내에 수천 개의 부비트랩을 설치하고 도주하였다. 2016년 3월 27일 팔미라는 정부군의 손에 완전히 해방되었으나 산발적인 교전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팔미라 해방작전의 성공으로 타이거 소장의 명성은 더욱더 높아졌으며, 시리아 정부군의 이미지도 크게 개선되었다.[14]
- 북부 알레포 전역 (2016년 6월 ~ 7월) : 2013년경 정부군이 곳곳에 고립되어 포위당했던 시리아 제1의 도시 알레포[15]는 타이거 소장의 활약으로 최종적으로 반군과 정부군이 알레포 도심을 나선형으로 점령한 형태가 되었다. 정부군은 여러 차례 나선형으로 파고 들어간 반군 점령지를 돌파하여 보급로를 끊고 포위섬멸하는 작전을 입안했으나, 정치적 상징성이 막대한 알레포를 잃지 않으려는 반군의 저항과 반정부 정서가 엄청나게 강한 알레포 시민들의 비협조 탓에 여러 차례 공세가 돈좌되고 수십 명씩 병력을 잃는 실패를 반복해 왔다. 2016년 4월에는 정부 매체를 통해 타이거 소장이 이끄는 혼성부대가 알레포 공략에 나선다는 뉴스가 나오면서 팔미라를 점령한 드림팀이 알레포 도심 탈환작전에 나설 것으로 알려졌으나, IS가 5월 다시금 사헤르 가스 유전지대를 탈환하고, 2016년 6월 라카 대공세를 위해 사막의 매 여단을 비롯한 병력들이 차출되면서 알레포 포위섬멸 계획은 불투명해졌다. 타이거 부대는 5월경 IS에 대항하여 제3차 사헤르 가스 유전지대 재탈환 전투에 나섰으나, 공세 중간에 타 부대에게 지역을 인계하고 갑작스레 철수하였다.
한편 6월 초부터 정부 매체에 의해 타이거 부대가 알레포 북부 셰이크 나자르 공업단지에 주둔한 것이 확인되었고, 6월부터 최정예부대인 수도방위 제4기갑사단[16] 최신 장비와 최정예 병력을 보급받아 막강한 전투력을 자랑하였으며, 민주화 운동과 내전 시기 무력 진압의 최선봉에 서서 반군을 압살하고 특히 2012년 7월 반군의 다마스쿠스 대공세에서 미친 대격전을 벌여 수도를 회복한 전적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장기간의 전투와 특히 남부 다라 지방의 전투에서 손실이 막심하여 괴멸되기도 했으며, 현재는 시가전에 보다 적합한 보병과 장갑차 위주의 기계화사단으로 재편되어 있다. 과 합류하여 서서히 남진을 개시하여 알레포 도심으로 이어지는 반군의 유일한 보급로인 알 카스텔로(al-Castello) 고속도로를 점령하기 위해 고속도로 북쪽에 위치한 알 말라 농장에 대한 공세를 개시하였다. 반군은 말라 농장을 잃으면 알 카스틸로 고속도로가 화포의 사거리 안에 들어가 보급이 사실상 끊어지기 때문에 타이거 부대조차도 T-90 전차를 전장 유기[17]할 정도로 격렬한 저항을 반복하였으나, 타이거 소장이 철수하면서 미리 포격 지점을 정해놓고 그 지점에 노획품을 일부러 놓아둔 뒤 반군이 노획품을 챙기느라 지체하는 사이 대규모 포격으로 반군을 하루만에 200여 명[18]을 사살하는 대 전과를 올렸다. 여기에 이들리브에서 알레포로 증원되는 반군 병력을 러시아-시리아 합동 공습 패키지가 대기하고 있다가 모조리 타격하는 바람에 가용병력의 부족에 직면, 타이거 부대의 재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7월 7일에는 말라 농장을 완전히 빼앗겼으며, 알 카스텔로 고속도로는 차단당했다. 7월8일 전황도. 7월 10일까지 누르 알딘 알 젠키 운동, 자유 시리아군 중앙사단 등이 반격을 거듭하였으나 결국 말라 농장 탈환에 실패했고, 작전 실패의 책임을 놓고 반군 연합체 알레포 정복군과 정복의 군대 사이에 불화가 발생하고 있다는 루머도 나돌고 있다. 7월 13일에는 결국 알 누스라 전선이 직접 나서서 전차와 장갑차를 동원하여 반격을 개시했으나 똑같은 낚시 작전에 걸려 2대의 전차, 4대의 장갑차, 20여 명의 병력을 상실하고, 알 누스라의 선전 영상에 나온 병력과 차량이 모두 파괴된 채로 타이거 여단의 인증샷에 촬영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7월 21일 알 누스라 전선이 재공세를 위해 병력을 집결시켰으나, 타이거 부대는 UAV로 전부 관측 중이었고 타이거 부대의 선공에 공격에 사용될 예정이던 알 누스라 측의 자살폭탄차량 2대가 집결지 한복판에서 폭발(...) 알 누스라 전선은 이 때 전차 3대, BMP 4대와 50여 명의 병력을 손실하고, 이후 타이거 부대 측의 추격전에 다시 20명이 붙잡히고 전차 2대와 BMP 4대를 빼앗기는 대 수모를 겪었다.
결국 반군 세력은 알 카스틸로 고속도로 재탈환 역량을 완전히 상실했으며 마침내 7월 27일, 시리아 정부군이 알레포 반군 지역으로 가는 모든 통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 여기에 쿠르드족 YPG가 정부군의 작전에 호응하여 알레포 북부의 유스 하우징을 점령하여 알레포 포위망을 완성하고, 수도방위 제4기갑사단도 알 레이라문 공업지대에 이어 쿠르드군과 협동하여 바니 제이드 공업지대를 완전 점령하였다. 결국 반군이 정부군과 협약을 맺고 통로에서 전면 철수함에 따라 알레포 포위망은 완성되었다.
이와 동시에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은 3개월 안으로 반군이 알레포 시내에서 전면 철수할 것을 요구했으며, 반군 및 반군 협력자에 대한 특별 사면령을 선포하였다. 만일 철수한다면 길을 열어주고 안전을 보장하고, 항복한다면 특별 사면에 의해 무기를 반납하고 시민증을 재발부 받아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 이에 알레포 시민들과 일부 반군들이 무기를 버리고 정부가 지정한 검문소로 몰려들어 투항하고 탈출을 시작했으나, 7월 31일부터 반군이 알레포 남부에 포위를 뚫기 위해 공세를 가하기 시작하기 시작했다.
- 남부 알레포 전역 (2016년 7월 ~ 9월) : 타이거 소장과 제4기갑사단의 활약으로 알레포 북부 알 카스틸로 고속도로가 막히자 시리아 제1의 도시 알레포의 보급은 완전히 차단되었다. 이에 따라 알레포 지역 반군 연합체인 파타 할랍은 파타 알 샴 전선(구 알 누스라 전선)이 주도하는 반군 연합체 자이쉬 알 파타에 도움을 요청했으며, 이에 따라 알레포 남부의 얇은 전선을 돌파하여 남부에서 알레포 도심으로 보급로를 뚫는 작전을 입안하였다. 이미 알레포 남부 칸 투만 지역을 6월에 대공세로 점령했기 때문에, 남부의 정부군 방어선의 두께가 크게 얇아졌기에 가능한 작전이었다. 이에 따라 초반에 5000명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7월 31일 오전 10시 45분부터 대공세에 들어갔다. 주요 작 전목표는 알레포 남부의 알 아사드 육군사관학교와 육군포병학교였다.
알 히크마 학교 건물에 명중한 2대의 자살폭탄차량과 함께 시작한 공세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당일 알 아사드 육군사관학교 남쪽에 위치한 1070 알 나스르 아파트 건축 현장을 점령하는 데에 성공했으나, 사실 정부군이 일부러 기동방어를 위해 내준 것으로, 반군이 1070 건설 현장에 돌입한 사이 정부군이 기동전을 펼쳐 후방을 차단했고, 곧 러시아와 시리아 공군이 대규모 공습으로 박살을 내기 시작했다. 공습을 피하기 위해 타이어를 모아다 태워서 대량의 연막을 발생시켰으나, 정부군이 스커드 미사일과 포병을 총동원하여 공격해서 1070 건설 현장에 고립된 반군은 반군 추산 250명, 정부군 추산 800여 명의 사망자를 발생시켰고, 8월 1일에는 정부군이 반격을 시도하여 알 히크마 학교까지 재진출하는 데에 성공했다.
첫 전투를 참패로 끝낸 반군은 정부군과의 접전이 벌어지는 라타키아 전선에서 병력을 빼 총 9000명의 병력으로 2차, 3차, 4차의 재공세를 시도했으나, 1070 건설 현장에서의 공방에서 패배하고 정부군의 방어선을 뚫는 데 실패하고 후퇴했다. 하지만 8월 6일 제5차 공세 "이브라힘 유세프 작전"[19]에서 남부의 알 라무시 육군포병학교를 수비하던 여단장이 전사하자 지휘 체계가 흐트러졌고, 자살폭탄차량으로 벽돌벽을 파괴하고 반군이 쏟아져 들어가자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이곳을 교두보로 반군은 여세를 몰아 알 라무시 거리를 완전히 장악했고 다음날에는 북쪽에 있는 공군기술학교까지 점령하여, 알레포 남부 포위망은 완전히 뚫려버렸다.
시리아 정부군은 방어 실패의 책임을 물어 방어 사령관을 모하메드 아지브[20]에서 지아드 살레 대장으로 교체했고, 15사단과 시아파 민병대, 헤즈볼라 등의 병력을 증원하는 한편 알레포 북부에 주둔하던 타이거 소장이 내려왔다. 한편 알레포 도심으로 통하는 도로는 포병으로 화기 관제를 하여 들어가는 수송 차량을 보이는 대로 파괴함으로써 대규모의 보급이 들어가는 것을 차단하고 있었으며, 8월 10일 오전부터 러시아 공군의 대규모 공습과 함께 8월 11일부터 전 전선에서 재공세에 들어갔다.
지아드 살레 대장의 작전은 반군 세력이 점령한 알 라무시 지역을 굳이 탈환하기보다는 후방 지역에서 새로운 포위망을 형성하는 것으로, 타이거 소장은 1070 건설 현장의 재탈환에 들어갔다. 하지만 하루만에 역포위 작전은 취소되었고, 이후 1070 건설 현장의 절반 가량을 점령했으나 반군의 공세에 시멘트 공장 등이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타 부대와 헤즈볼라에게 탈환 지역을 인계한 뒤 시멘트 공장으로의 반군 공세를 순식간에 돈좌시켰다.
뒤이어 계속해서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반군을 포격과 폭격으로 유도하여 소모시키던 타이거 부대는 8월 21일에 공세를 통해 시리아텔 언덕과 알카라 언덕(Tel alqara)을 재탈환하였다. 이 언덕은 반군의 보급로인 알 라무시 고속도로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전략적 요충지로 정부군의 탈환으로 화력통제가 가능해졌고, 알레포로 들어가는 반군 보급 차량은 모조리 대전차미사일과 포격에 박살이 나는 지경에 이르러 사실상 알레포 포위망이 재구축되었다. 이에 반군은 총 7차에 걸친 파상공세를 8월 25일까지 연속적으로 감행하였으나, 견고한 방어선과 십자포화망을 구축한 타이거 소장의 화력전 앞에 큰 피해를 내고 모조리 실패하였다. 특히 반군 연합체 자이쉬 알 파타는 8월 23일 대규모의 기갑장비를 동원하여 돌파를 감행했으나 친정부 민병대 NDF(National Defence Force)의 대전차미사일 공격을 뚫지 못하다가 정부군의 T-90까지 동원한 전차부대의 요격을 당해 기갑장비를 방기하고 도주하는 추태를 보여주기도 했다.
결국 소모전을 견디지 못한 반군 연합체 자이쉬 알 파타는 계속해서 공군기술학교와 포병학교를 내어주다가 9월 4일 일요일 러시아군이 끌고 온 TOS-1 부라티노의 열압력탄두 로켓 포격에 큰 손해를 보며 200여 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공군기술학교, 포병학교, 육군학교를 완전히 정부군에게 점령당했다. 이 날 일요일 공세는 하마 전선에 나가 있던 타이거 소장이 몰래 귀환하여 총지휘를 맡았으며, 이로써 알레포 도심지 포위망은 8월 6일 뚫린 이후 한 달만에 완전히 재구축되었다. 이후 타이거 소장은 북부 하마 전선 지휘와 알 밥 공략전을 위한 준비에 매진하고 있으며, 포위된 알레포 동부 시가지는 지아드 살레 대장의 총지휘 아래 대공세를 감행, 10월 14일 현재 포위된 반군과 항복 협상에 들어갔다.
- 북부 하마 전역 (2016년 8월 ~ 10월) : 한편 알레포 남부에서의 막대한 소모전을 강요당하던 반군은 방어가 허술하던 북부 하마 지역에 대한 공세를 알 카에다 연계 반군인 준드 알 아크사 등의 주도로 8월 29일 개시했다. 처음에는 알레포에 몰린 정부군 전력을 분산시키려는 양동작전으로 시작되었으나, 하마 북부에 주둔한 정부군 제11기갑사단의 방어가 허술한 데다 졸렬한 지휘로 인해 생각 외로 전과가 확대되면서 첫 날에만 3개의 마을을 점령하고 친정부 민병대의 반격에도 불구하고 8월 30일에는 할파야 마을을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9월 2일까지 전과를 확대하여 타이밧 알 이맘, 소란 시가지까지 점령함으로써 하마 주의 주도인 하마 시를 5km만 남겨둔 상태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전선 지휘관이 상황이 좋다는 거짓 보고를 올리다가 상황이 악화되어 진실을 말하자 타이거 소장은 크게 분노했다고 전해지며, 알레포 남부에서 귀중한 병력을 빼어 하마 구원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타이거 부대의 예비대와 제4기갑사단 병력 일부를 증원할 것이라고 SNS를 통해 선전했으나, 9월 2일 돌연 타이거 부대 본대와 T-90전차부대를 직접 이끌고 하마에 나타나 반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반군은 9월 6일까지 수세에 몰렸고 전선은 정리되었다.
하지만 반군은 9월 24일부터 재공세를 실시하였고, 정부군은 9월 29일까지 43개의 마을을 빼앗기는 참패를 당했다. 이에 타이거 소장이 직접 패배의 원인을 점검하자 3명의 장교가 반군에 몰래 디젤 기름과 대전차미사일을 팔아넘긴 부패를 적발했으며, 이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하고 대전차미사일을 공급하여 반군의 공세를 돈좌시켰다. 한편 하마 전선에서의 공세를 주도하던 알 카에다 연계 반군 "준드 알 아크사"는 중립을 표방하면서 IS에 충성하며 이슬람 반군 지휘관을 암살하던 정체가 발각되어, 이들리브 지방의 네임드 이슬람반군 "아흐라르 알 샴"과 내전을 벌이기 시작했으며, 하마 전선에 파견되어 있던 준드 알 아크사 대원들이 급히 복귀하면서 전선에 가해지는 압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타이거 소장이 알레포 북부 알 밥 공략전 준비중 급히 하마 전선에 복귀하여 반격을 총지휘하기 시작했으며, 10월 8일부터 개시된 반격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빼앗긴 마을을 되찾음은 물론 하마 북부의 전략거점인 모렉(Morek) 시를 공략할 수 있는 교두보 마안(Ma'an) 시를 10월 13일 완전 장악하였다. 이후 잠시간의 재정비 이후 재공세를 펼쳐 마라다스(Maradas)를 탈환했으며, 10월 27일에는 대대적인 포격과 공습 지원 아래 수란(Suran) 시를 탈환하였다.
- 서부 알레포 전역 (2016년 10월 ~ 11월) : 타이거 소장의 활약으로 알레포 도심 포위망은 다시 닫혔으며, 미국과 러시아간의 지루한 외교전을 두고 이뤄진 몇 차례의 휴전이 결국 깨짐에 따라 시리아 정부군과 러시아 항공우주군은 포위 중인 알레포 동부 도심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알레포 남부의 공격은 잠시 성공했다가 다시 물러났지만, 공화국수비대가 주축이 된 알레포 북부는 포위에 의한 물자 부족과 병력 손실로 역량을 잃은 반군 방어선이 계속해서 붕괴하면서 기존의 북부 교외지대를 정부군이 완전 장악하였다. 한편 포위망 바깥의 반군연합체 정복의 군대(Jaysh al-Fatah)는 계속해서 포위망 돌파를 시도하며 1070 아파트 건설 현장에 대해 공격을 진행했지만, 뺏고 뺏기기만 반복할 뿐 지루한 손실만 내고 있었다. 이미 4개월에 걸친 알레포 전역에서의 참패에 의해 예비 병력과 중장비를 크게 상실한 데다 러시아 공군의 전략 폭격에 의해 유류 보급에도 큰 차질을 빚고 있어 다시 대공세를 감행할 상황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시리아 남부의 여러 포위망들이 정부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항복 협상을 통해 이들리브 주로 안전하게 이송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이들은 곧 이들리브나 알레포 주의 여러 반군 조직에 가입하면서 예비 병력이 되었으며, 알레포 주 북부에서 IS와 쿠르드족과 싸우던 터키 지원 반군들도 알레포 도심 근처로 도착했다.[21] 결국 10월 27일 정부군의 방어가 강한 알레포 남부가 아닌 서부 지역으로 3000~5000여 명으로 추산되는 병력을 동원한 대규모 공세가 개시되었다. 북서부 알 자흐라 지구와 서부 알 아사드 지구가 주요 목표가 되었으며, 알 자흐라 지구는 잘 버티는 중이나 알 아사드 지구는 6개에 이르는 자살폭탄차량에 의해 28일 정부군의 방어선이 붕괴되면서 알레포 서부의 알 아사드 지구와 1070 아파트 건설 현장이 함락되었고, 정부군은 3000아파트 건설 현장과 알 아사드 군사대학으로 후퇴하여 방어태세에 들어갔다. 특히 이번에는 택티컬 장비와 훈련을 체계적으로 수료한 체첸과 중앙아시아 출신자들을 비롯한 최정예를 대거 투입하여 순식간에 정부군을 몰아붙였다.
3000아파트 건설 현장으로 돌입하는 반군
반군의 포격을 받는 알 아사드 육군대학
하지만 타이거 소장이 10월 29일 알레포 서부에 도착했다. 도착과 동시에 10월 31일부터 반군이 장악한 알 아사드 지구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으며, T-90 전차를 동원하여 반격에 나섰다. 러시아가 국제인권위원회 퇴출의 여파로 알레포에 대한 공습 지원을 주저하는 사이 정부군이 다량의 화포를 동원해 포격전을 벌여 반군에 대해 화력 우위를 점하자 반군의 1차 공세는 돈좌되었다. 이에 반군은 3000여 명의 병력을 최정예병력을 충원받아 신 알레포 지구와 3000 아파트 단지에 4차례의 자살폭탄차량을 돌입시켜 11월 3일 2차 공세를 실시하여 3000 아파트 단지에 한 때 진입했으나, 타이거 부대의 반격에 노출되었다. 반군은 3000 아파트 단지에 예비 병력과 BMP-1을 투입하여 격전을 벌였으나 결국 패퇴하였다. 러시아 공군도 외곽지역에 대한 제한적인 공습을 개시하였고, 정부군도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여 타이거 소장의 전매특허인 반격 점령 후 후퇴하며 반군의 병력을 계속해서 소모시키는 전략을 감행하자 최정예 반군도 심각하게 소모되었다. 결국 11월 7일부터 이뤄진 1070 아파트 건설 현장으로의 정부군 공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반군은 1070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퇴각했으며, 11월 8일 정부군은 1070 아파트 건설 현장을 장악하고 남서부 히크마 학교 근방까지 전진하여 반군은 3000 아파트 단지로의 남쪽 공격 시작점을 상실하였다. 1070 외곽단지에서 전투를 벌이는 정부군. 또한 이후 러시아 공군의 대대적인 공습과 포병의 지원 아래 공세를 진행하여 알 아사드 지구와 Minyan 지구를 탈환하여 반군이 공세로 점령했던 지역을 모두 탈환했다. 이 과정에서 반군은 최대 2500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극심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 동부 알레포 전역 (2016년 11월 ~ 12월) : 서부 알레포 공격이 격퇴된 후 11월 13일 동부 알레포 도심 지역의 시민들의 핸드폰으로 정부군의 공격이 24시간 이내에 시작된다는 문자메시지가 전달되었다. 러시아 항공모함 쿠즈네초프가 시리아에 도착하자마자 11월 15일 시리아 전역에 대규모 공습이 실시되었고, 알레포 동부에도 대대적인 러시아 공군의 공습이 이루어졌다. 이와 더불어 11월 21일부터 공화국수비대 102여단, 팔레스타인 난민으로 구성된 알 쿠드스 여단 등이 동부 도심 북부에서 공세를 시작하며 하나노 주택단지(Hanano Housing)[22]의 1/3을 장악했다.
그런데 11월 25일 타이거 소장이 하나노 단지에 나타났다. 타이거 부대는 공화국수비대 102여단과 알 쿠드스 여단이 뚫어놓은 반군 방어선으로 쇄도하여 11월 26일 하나노 단지와 남쪽 자발 바드로(Jabal Badro)구역을 완전 장악했고, 27일에는 반군의 동부 도심 북부 포켓 전선 전체가 붕괴되며 타이거 부대가 포위망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반군은 알레포 동부 도심 남쪽으로 대대적인 도주를 개시했다. 이 사실은 알레포의 반군 연합체 파타 할랍에서도 전략적 철수 중이라는 이름으로 인정했다.[23] 3일만에 시가지 장악 속도가 이렇게 빠른 것은 시리아 내전에서는 전례가 없는 일이다. 현지 시간 11월 27일 오후 7시 즈음에 나온 전황도에서는 북부 포켓의 방어선이 완전히 붕괴했으며 북부 포켓이 완전히 끝장났다는 것이 확정되었고, 11월 28일 오후 3시 50분 북부 포켓이 완전히 소멸되었음이 친정부/반군 매체를 가리지 않고 확인되었다.
뒤이어 약 3천여 명의 반군이 존재하는 동남부 포켓을 향한 공세가 시작되어 타이거 소장의 부대는 동부에서 연속적인 공세를 가하고 있으며, 12월 4일에는 알레포 성채 주변의 구 시가지 일대를 거의 장악한 상황이다. 터키와 러시아의 중재로 반군들에게 항복 협상이 이뤄졌으나 반군은 이를 거부했으며, 초기 3천명이라던 반군은 현재 900명으로 줄어들었고 나머지들은 무기를 버리고 도주했거나 정부군에 투항한 상황. 12월 7일에는 알레포 성채 주변의 구시가지 일대를 완전 탈환함과 동시에 남부 알레포 국제 공항 전선에서도 반군의 방어선을 봉괴시키며 여러 구역을 탈환함으로써 13일에는 반군 지역의 95%를 탈환했고, 시리아 정부는 알레포 전투 승리를 선포했다. 이 시점에서 반군 700여 명이 투항하고 남은 100여 명이 절망적인 저항을 시도하였으나, 러시아와 터키의 중재로 반군과 가족을 버스로 안전하게 이들리브로 이송하도록 하는 합의가 관철되었으며, 정부는 4년만에 알레포 전 시가지를 100% 통제하는 데에 성공했다.
알레포 전투를 요약한 동영상 |
4.1.5. 2017년
- 알레포 주 동부 대공세 (2017년 1월 ~ 3월) : 터키는 자국 동남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는 쿠르드노동자당, 즉 PKK와 연계된 시리아 쿠르드족 YPG가 주축을 이룬 미국 지원 반군인 시리아 민주군(Syrian Democratic Forces, SDF)이 계속해서 세력을 확장하며 마침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IS가 지배한 만비지 시를 함락시키며 시리아 북부를 모두 점령할 지경에 이르게 되자, 군대를 보내어 시리아 북부를 직접 침공하여 쿠르드족이 시리아 북부 경계선을 점령할 수 없도록 완충지대를 설정하는 "유프라테스의 방패" 작전을 9월부터 실행하기 시작했다. 터키는 전차와 중화기로 지원하고 일선 전투는 터키 지원을 받는 지하드 반군들이 담당하는 방식이었다.
처음에는 IS가 자라불루스 시가지를 포기하고 철수하여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으나, 병력을 집결시킨 IS가 알-라이 지역에서 반격을 개시하면서 여러 마을을 뺏고 뺏기는 공방전이 지속되었고, 터키도 IS의 대전차미사일에 의해 5대의 전차, 1대의 지뢰 제거 차량을 상실하는 피해를 입어 진격이 지지부진해졌다.[24] 2016년 10월경 시리아 정부군의 알 밥 시가지 공략 계획이 흘러나오며 타이거 부대가 주력을 맡는다는 루머가 있었으나 결국 중지되었다.
12월이 되자, 터키군은 가장 먼저 알 밥 시가지[25]에 도달하여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IS의 전술인 자살폭탄차량과 대전차 미사일의 조합에 의해 독일제 레오파드 전차를 10대 상실하는 등 기갑장비에 큰 피해를 입고, 보병 전력을 맡은 FSA 계열과 아르라르 알 샴 등의 반정부 세력들도 적전 도주를 반복하며 작전이 지지부진해졌다. 결국 터키가 정규군과 특수부대를 6000명이나 투입했음에도 IS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자 타이거 부대가 작전을 개시, 알 밥 남부 쪽의 IS 마을들을 차례로 함락시키며 순조로운 진격을 거듭하여 2017년 2월 3일에는 알 밥 시가지와 5km 남은 지점까지 전진하였고, 2월 1일에 시르한 마을에서 IS의 반격을 받아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며칠 안 가서 재점령에 성공했다. 여담으로 IS가 시르한 마을에 반격을 가할 때, 터키군에게서 노획한 코브라 장갑차를 그대로 운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월 6일에는 알 밥-데이르 하페르 시를 연결하는 국도를 감제하는 아야시아 언덕을 점령하여 해당 국도에 대한 화력 통제에 들어갔고, 2월 13일 아부 자바르 알 카비라 마을을 점령하며 국도를 차단하여 IS의 보급로를 차단하였다. 하지만 타이거 부대는 터키와 반군과의 충돌을 우려하였는지 더 이상 알 밥 시가지[26]로 전진은 하지 않고 대신 알레포 주 동쪽으로 전진하여 점령지를 크게 확보하고 알레포-라카를 연결하는 4번 고속도로의 주요 거점인 데이르 하페르 지역으로 전진하였다.[27]
이에 어부지리를 얻은 터키- 반군은 2월 7일부터 알 밥 시내로 돌입하였으나, 시가지 남쪽으로 행한 포위 기동이 IS의 반격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정부군의 보급로 차단이 효과를 발휘하여 IS의 전투력이 크게 줄어들었고, 터키군과 반군은 지난번에 비해 비교적 수월하게 진격해 알 밥 시내 절반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IS가 포위 섬멸을 우려하여 2월 23일에 알 밥 시내와 알 밥 완전포위를 막던 카바신(Qabasin), 바자(Bza'a) 시에서 전면 철수함에 따라 터키군이 완전 점령을 선언하였다.[28] 이후 터키군과 반군은 타데프를 점령하려고 공격을 가했지만 어느새 정부군이 선수를 쳐 점령하자, 정부군과 충돌을 벌이는 짓까지 감행했으나 이득을 보지 못했다.
유프라테스 작전군은 결국 원래 목적인 IS 수도 라카로의 진격이 타이거 부대의 차단기동으로 물거품이 되자 다른 진출로를 뚫기 위해 만비지 시의 쿠르드족 영토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공세 당일인 3월 1일 탈 투린(Tall Turin)과 카라(Qarah) 마을을 점령하며 전방 거점인 알 아리마(Al Arimah) 시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쿠르드군은 급히 라카 공격을 중지하고 병력을 빼서 이쪽으로 보내기 시작했으나, 상황이 급하자 시리아 정부군에게 지역을 내주고 공동방위구역을 선포했다. 양자의 합동 작전으로 3월 3일에는 빼앗긴 두 마을을 재확보했고, 터키군의 행보에 급해진 미군이 만비지에 특수전병력을 파견하고 러시아도 보급대를 파견하였으나, 터키군은 3월 8일에도 계속해서 병력을 증원하는 등 긴장 국면을 조성하고 있다.
한편 타이거 소장은 엄청난 쾌진격을 계속하여 당초 IS의 거점도시인 데이르 하페르를 공략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그곳을 무시하고 동쪽의 IS 점령지를 계속해서 몰아치고 있다. 3월 1일부터 시작된 교외지 공세(전황도)는 겨우 5일이 지난 3월 6일 400평방킬로미터, 수십여 개의 마을을 해방하였고(전황도), 3월 8일에는 유프라테스강 아사드 호수까지 도달하여 IS 세력을 대부분 몰아냈다. 전황도. 뒤이어 아사드 호수에 인접한 정수장이 5년만에 가동을 재개하였으며, 3월 9일 지라흐(Jirah) 군사공항 장악을 시도했으나 IS의 강한 저항에 부딪치자 다시 데이르 하페르 주변 마을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3월 23일에는 데이르 하페르를 완전 포위했다. 이후 28일 데이르 하페르를 완전히 탈환하였고 주위 마을들도 모두 정리하는 성공했다.
- 2017년 하마 전역 (2017년 3월~5월) : 2016년 알레포 공방전 참패 후 반군은 이슬람 원리주의의 주도권을 두고 광범위한 내전을 1월 24일부터 개시했으나, 알 카에다 계열 파타 알 샴 전선(구 알 누스라 전선)과 아흐라르 알 샴 계열의 분열은 결국 알 카에다 계열이 광범위한 동맹조직 샴 해방기구(하이야트 타흐리르 알 샴)을 창설하며 최대 규모로 성장하면서 양측의 휴전으로 끝났다. 이들은 3개월간의 재정비 기간을 거친 후 대대적인 작전을 개시하였다. 먼저 수도 다마스쿠스 동쪽 동부 고타 지역의 반군 그룹이 샴 해방기구의 주도로 수도에 대한 전면 공격을 개시했다. 카분(al-Qabun) 구역에 대한 정부군 공세가 개시되자 주변 지역의 광범위한 터널 네트워크를 통해 반군이 3월 18일부터 전면적인 반격을 개시하며 카분 구역과 조바르 구역을 분리하는 M1 고속도로의 절단을 시도했으나, 정부군의 수도방위 제4기갑사단의 예비대가 투입되면서 공세는 돈좌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조공이었고, 3월 21일부터 하마 주의 전 전선에서 대규모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수란(al-Suran) 시 전면에 2대의 자살폭탄차량 돌입을 시작으로 21일 당일에 카타브(al-Khattab)와 수란 시가 점령당했으며, 22일에는 하마 시 4km 전방까지 몰아붙이고 취약한 친정부 민병대가 지키는 지역을 맹공하면서 점령지를 초고속으로 확대하기 시작했다. 특히 반군은 포격과 기관포의 지원 사격 아래 자살폭탄차량을 돌진시켜 방어선을 붕괴시킨 즉시 서방 택티컬 교육을 받고 장비를 갖춘 택티컬 반군을 돌입시키는 전법으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11기갑사단은 교전 후 퇴각을 반복하며 예비대를 증원받아 하마 시 4km 전방에서 방어선을 펼쳤다. 그러자 반군은 23일 무흐라다(al-Muhradah)시를 공략하며 전과 확대를 시도하며, 하마 공항에는 포격을 통해 제어를 시도했다. 3월 23일 전황도.
일이 이렇게 되자 하마 지역을 경제적 근거지로 삼고 있는 타이거 부대는 어느 정도 정리된 알레포 지역에서 작전을 중지하고 예비대 1800명을 먼저 하마로 급파했으며, 타이거 소장은 23일 이미 도착하여 총지휘를 맡기 시작했다.
반군은 하마 시내로 돌입하기 위해 주변의 Qumhana 시에 대한 공세를 3차례나 강행하였으나, 성공적으로 격퇴시켜 반군의 공세를 돈좌시켰다. 정부군은 21일 시작된 반격과 함께 역공에 나섰으며, 반군의 강력한 저항에 할파야(Halfaya) 시에 대한 헤즈볼라와 정부군의 공세가 돈좌되기도 하였다. 반군은 몇 번이고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후방의 보급 거점인 칸 셰이쿤, 알 라타미나에 러시아/시리아 공군의 강력한 공습에 의해 보급물자와 예비병력의 추진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4월 16일에 수란(Suran) 시를 내주면서 공세 출발점으로 돌아간 것도 모자라 4월 20일에는 타이거 부대에 의해 타이밧 알 이맘(Taybat al Imam) 시를 점령당함으로써 반군은 심각한 병력과 물자의 소모는 물론 원래 보유하던 영토까지 빼앗기는 대 수모를 당했다. 결국 공세를 주도한 반군 대조직 샴 해방기구는 전국의 모든 반군 세력들에게 공식적으로 지원을 요청했으나, 러시아/시리아 공군의 후방 항공 차단으로 집결지가 난타당하는 와중에 4월 22일 전선이 붕괴, 타이거 부대의 돌파를 막지 못하고 M5 고속도로를 통해 북상한 타이거 부대는 기독교도 도시인 모렉(Morek) 시 남쪽 운전면허학원 지역까지 점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수 차례 정부군의 공세에도 버티던 할파야 시의 측면을 파고들어 23일 함락시키는 데 성공하고 주변 지역을 모두 정리하는 위엄을 보였다. 여세를 몰아 아예 하마 주 전역을 수복하고 이들리브 주경선을 넘어 칸 셰이쿤 시까지 함락시킨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나 5월 4일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의 평화 회담 결과, 일단 반군과 정부군 사이의 지역에 휴전지대를 설정하기로 시리아, 반군, 터키, 러시아, 이란 등이 합의함에 따라 하마 전역은 사실상의 종결을 맞이하게 되었다. 휴전 협정이 시작된 이후에도 양측 교전은 멈추지 않았지만 타이거 소장은 데이에 에조르 구원 작전을 위해 팔미라로 이동했다고 전해졌다.
- 2017년 동부 알레포 전역 (2017년 5월~6월) : 하마 구원 작전을 성공적으로 끝낸 뒤 팔미라로 이동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이 아니었고, 급하게 중단되었던 알레포 동부 공세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 이동한 것이 확인되었다. 이후 14일 작전을 시작해 곧바로 2달간 대치 중이던 Jirah 공군기지를 탈환하였고, 17~18일 이틀에 걸쳐 6곳의 채석장과 6개의 마을을 탈환하였다. 이후 쾌진격을 거쳐 아사드 호수 근처의 거점도시 마스카나에 도달하여 IS의 강력한 저항이 예상되었으나, 6월 2일 포위 후 퇴로를 열어놓고 압박하여 IS가 탈출하게 만들어 6월 3일에 손쉽게 장악하였다. 6월 3일 전황도. 이후 진격을 계속하여 6월 13일에는 사막을 돌파하여 이트리야-라카 간 국도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으며, 6월 19일에는 중부 유전지대로 이어지는 도로의 교차점이 위치한 루사파(Rusafa) 마을을 점령하여 쿠르드족 SDF가 중부 유전지대를 넘보지 못하도록 하는 전략적 쾌거를 이룩했다. 6월 19일 전황도.
이후 미군 F/A-18이 시리아 공군 Su-22를 격추하고 탈출한 조종사를 구출하기 위해 SDF와 격렬한 교전이 있었으나 진정된 후 전세를 추스린 다음 ISIS에게 항상 위협받던 알레포로 향하는 보급로, 카나세르 마을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6월 26일 이트리야-라카 국도를 장악하며 포위 직전까지 들어갔다. 하지만 바로 포위망을 닫지 않았는데, 마스카나 점령 때와 같이 아군 병력을 쓸데없이 소모하지 않고 IS의 퇴각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결국 6월 30일 IS는 포위섬멸을 피해 시리아군이 열어놓은 퇴로로 탈출했으며, 2013년 개통 후 계속해서 위협을 받던 카나세르 보급로는 완벽하게 안전해졌다. 그리고 이 기동전의 쾌거를 이룩한 명 지휘 덕에 ISIS는 4년 만에 알레포 주에서 완전히 박멸되었다.[29]
- 라벤다 작전 (2017년 7월 ~ 9월) : 알레포 동부에서 알 쿠드스 여단, NDF 등과 협력하여 지역을 안정화시킨 타이거 부대는 그러나 너무나도 넓어진 점령지 탓에 더 이상 독자적으로 작전을 진행하기 어려워졌으며, 시리아 최고 사령부에 지원 병력을 요청하였다. 한편 미국, 러시아, 이란 등의 중재로 시리아 반정부군과의 포괄적인 휴전에 합의한 정부군은 예비 병력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고, 동부 사막지대의 ISIS 세력을 일소하는 거대 작전 "라벤다"를 입안하였다. 이는 동부 사막지대 전체의 정부군이 유프라테스 강 연안, 팔미라, 남부 사막지대 3개 전선에서 광대한 전진을 통해 IS의 거점이었던 팔미라 동북쪽의 소도시 알수크나, 하마 주 동쪽의 우콰리바트, 남쪽의 T2 비행장 등을 점령하는 것이었으나, 이전과는 달리 참모본부가 시시콜콜하게 통제하는 방식이 아닌 현장 지휘관의 재량에 맡기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타이거 부대는 예비병력이 후방에 주둔하고 자체적으로 부족 민병대와 협력체제를 구축하면서 7월 14일부터 라카 주 남쪽 유전지대로 진격을 개시하였고, 뒤이어 갑자기 유프라테스 강 연안으로 진격로를 바꾸면서 7월 24일까지 작은 마을인 살람 알라이쿰을 점령하였다. 강 연안의 작은 소도시들을 정리하면서 8월 11일까지 IS의 주요 거점인 마아단(Ma'adan) 근처까지 진격하였고, 데이르에르조르 주 경계선을 넘기 시작했다. 연안 작전을 하던 타이거부대를 다룬 다큐. 이에 따라 타이거 부대가 유프라테스 강 유역 국도를 따라 포위된 데이르에르조르 시를 해방시킬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으며, 중부 사막의 IS 거점 알 수크나를 점령한 정부군과 합류하지는 않겠다라고 선언했기에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으나...
8월 14일 IS의 통수를 치고 공중 강습으로 알 카디르 방면의 IS를 러시아 Ka-52 공격헬기의 지원을 받아 쓸어버리고 점령해버렸다. 작전 영상, 전황도. 타이거 부대의 통수에 의해 허를 찔린 IS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8월 17일에는 하마 동부 사막지대로 연결되는 IS 보급로가 차단되었고, 상황이 급해지자 IS는 병력을 모아 유프라테스 강 연안 마아단 시에서 대반격을 개시, 부족 민병대를 격퇴하고 100명 가까운 사상자를 강요하면서 점령지를 확대하였으나, 타이거 부대는 계속해서 사막지대로 진격하여 결국 알수크나 방면의 정부군과 합류하고, 하마 동쪽 사막지대에서도 ISIS헌터즈, 5군단, 알 쿠드스 여단 등의 진격이 계속되면서 동부 사막지대에 거대한 2개의 포위망을 형성하였다. 8월 24일 전황도.
결국 보급이 끊어진 사막지대의 IS병력은 전투력을 잃고 급격하게 약체화되기 시작했으며, 타이거 부대가 담당한 2번 포위망은 8월 26일 완전히 소멸되었다. 11사단과 콸라문 방패 부대, ISIS헌터즈가 우콰리바트 방면 포위망을 압박해 들어가는 동안 타이거 부대는 전과 확대를 노리는 마아단 지역의 ISIS 병력과 예비물자를 러시아 항공우주군의 공중지원에 힘입어 격퇴하는 한편, 정부군 17사단, 공화국수비대 800대대, 헤즈볼라, 예비군조직 NDF와 함께 2014년부터 3년동안 포위당해온 데이르에르조르 구원 작전에 임하기 시작했다. 8월 30일까지의 라벤다 작전 총 전개도.
데이르에르조르는 동부 사막지대에서 가장 큰 도시로 아르메니아 대학살 당시 죽음의 행진을 강요당했던 아르메니아인들이 최종적으로 정착한 도시였으며, 기독교의 세력이 강해 아사드 정권 지지가 공고한 곳이었기 때문에 시민들이 정부군을 도와 ISIS에 맞서 왔으며, 2014년 IS가 강해지면서 정부군이 동부 사막지대의 통제권을 상실하면서 포위되었고, 공화국수비대 104여단장 잇샴 자헤라딘이 방어전을 총지휘하면서 버텨왔던 곳이었다. 하지만 IS가 데이르에르조르 시를 기필고 점령하고자 수 차례에 걸친, 2017년 1월에는 14000명을 동원한 대공세를 감행하고, 설상가상으로 미국의 오폭으로 방어 병력이 몰살당하면서 군사공항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종심이 좁아졌으며, 정수장을 빼앗겨 식수난에 시달리면서도 시리아-러시아-이란 수송기들의 공중 보급을 받으며 근성으로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마침내 9월 2일부터 타이거 부대를 선봉으로 정부군의 진격이 시작되었으며(총 전황도), 9월 3일에는 타이거 부대 정찰대가 데이르에르조르 137여단 기지에서 20km 떨어진 지역까지 도착하였다. 9월 3일 전황도. 중간에 타이거 부대의 돌출부를 노리고 IS의 반격이 있었으나, 공화국수비대 800대대의 반격에 격퇴당했으며, 마침내 9월 4일 타이거 부대 선봉대의 7대의 전차가 IS 지역을 돌파하여 137여단 기지에 입성하면서 데이르에르조르는 3년간의 포위에서 벗어났다. 정부군 입성을 환영하는 데이르에르조르 시민들. 9월 5일에는 시리아 언론에서 공식적으로 데이르에르조르 포위가 풀렸음을 공표하고, 국영방송의 유명 리포터 샤디 할위가 들어가 인증샷을 찍으면서 확실시되었고, 식량과 물자를 실은 40여 대의 컨테이너 트럭들이 데이르에르조르로 출발했다. 이후 타이거 부대는 타 부대와 연계하여 9월 10일 군사공항의 포위를 풀고 주변 지역을 점령하여 안전을 위한 충분한 완충지대를 확보하였다.
이후부터는 데이르에르조르 후방을 지나는 유프라테스 강 도하를 놓고 신경전을 벌였고, 이는 시리아 유전지대에서 가장 효율이 좋은 데이르에르조르 사막지대 유전을 차지하는 문제가 얽혀있었다. 타이거 소장은 SNS를 통해 도하를 못하고 쿠르드족이 나머지 IS 격퇴를 도와줘야 한다고 했다가 갑자기 도하를 완료했다고 역정보를 흘려 쿠르드족이 주축인 시리아 민주군(SDF)가 유전지대를 먼저 점령하기 위해 급히 남하를 시도하였다. 이로 인해 IS는 양쪽에서 압박당하는 형상이 되었고, 이를 틈타 9월 18일 러시아의 공병장비 지원을 받은 타이거 부대, 17사단, 5군단 등이 기습적으로 도하를 완료하였다. ISIS가 전력을 끌어모아 도하 지점의 정부군을 몰아치다가 반격이 돈좌되고 나자 SDF는 어부지리로 사막 유전지대를 점령하였다.
한편 타이거 부대는 빠져나와 이전에 점령하려다 말았던 유프라테스강 연안 국도 주변부의 마을을 점령하며 타고 올라가 9월 23일 ISIS의 거점이었던 마안(Ma'an) 시를 점령하고 사막으로 도주한 ISIS 잔당을 완전히 섬멸함으로써 알레포-라카-데이르에조르 주의 ISIS 점령지를 완전히 섬멸시키는 전략적 쾌거를 이룩하고 철수하였다. 타이거 소장은 알 카에다 계열 타흐리르 알 샴이 전쟁을 일으킨 하마 주로 간다고 발표하였으나 그 후 다시 행방이 묘연해졌다.
ISIS는 대대적인 패배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 9월 28일부터 데이르에조르로 이어지는 M20 고속도로와 중간거점 알수크나에 대한 반격 작전을 결행, 일부 전선을 돌파하여 알 수크나 역포위 국면까지 도달했으며 M20 고속도로 일부 통제에 성공했으나, 타이거 부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10월 3일부터 IS의 제3수도인 알 마야딘으로 남하를 개시, 10월 5일부터 시 외곽에 도달하고 포위망을 구축하면서 압박을 개시, 결국 ISIS 병력은 화력 열세와 병력 부족을 이기지 못하고 최후의 거점인 아부 카말로 탈출하면서 10월 18일 타이거 부대는 알 마야딘을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 알 마야딘에 남겨진 막대한 무기들은 그대로 타이거 부대에 접수되었다. 타이거 부대는 여세를 몰아 보다 남쪽의 알 쿠라이야까지 공격했으나, 10월 24일 ISIS가 강력한 반격을 알 마야딘에서 실시함에 따라 철수하고 방어를 굳혔다.
ISIS를 격파하고 대내외적으로 안정이 확보되면서 10월 25일부터 타이거 부대와 17예비군사단, 공화국수비대 104공수여단 등은 데이르에조르 시내의 ISIS 점령 지역에 대한 공세를 실시하였고, 포위에 약해진 ISIS는 10월 26일 유프라테스 강가의 사호르 섬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도시의 여러 구역을 빼앗기다가 11월 3일에는 내전이 시작된 후 처음으로 시리아 정부군은 데이르에조르시를 완전히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이라크 정부군과 시아파 민병대가 헤즈볼라, 이란 혁명수비대와 합동작전을 벌여 국경지대의 IS를 일소하고 이라크-시리아 국경도시 아부 카말에 대한 공세에 나섰으나, IS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타이거 부대에게 아부 카말 방면으로 남진하여 IS의 압력을 분산시켜줄 것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강을 따라 남하하면서 알 아쉬아라 마을을 점령했으나 무리한 공세로 부상 280명, 전사 250명의 손해를 보았다. 타이거 부대의 기간병력은 1000명밖에 안 되며 그 중 전투 병력은 400명밖에 안 된다는 폭로가 타이거 부대 휘하 샤힌 그룹의 사령관으로부터 나오기도 했다. 휘하 장교단이 그때그때 배속되는 부대나 민병대를 지휘하는 방식. 결국 강변 지역과 아부 카말을 완전 통제하게 두고 IS 잔존 병력은 사막지대로 도주 은신하면서 12월 7일 러시아 정부는 IS에 대해 완전승리를 거두었다고 발표하였다. 이로써 라벤다 작전은 상상 이상의 대성공을 거두면서 종료되었다.
4.1.6. 2018년
- 아부 앗 두후르 공항 탈환작전 (2017년 12월 ~ 2018년 2월) : IS 격멸을 위한 라벤다 작전의 성공에 힘입어 시리아 군 최고 사령부는 이들리브 주의, 지금은 반군에게 넘어간 군사 공항인 아부 앗 두후르 공항의 탈환을 위한 작전을 하달하였다. 작전 계획은 아부 앗 두후르 공항 기준으로 남쪽의 타이거 부대, 북쪽의 공화국수비대 제4기갑사단, 동쪽의 리와 알 쿠드스 민병대와 이란 혁명수비대를 핵심으로 하여 3방향에서 논밭 지대를 주파하여 아부 앗 두후르 공항을 점령하는 것으로, 총사령부의 작전 완료 예상 기간은 2018년 중순으로 예정되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4기갑사단과 리와 알 쿠드스의 진격은 잠깐 교전이 벌어지고는 주저앉는 상황이었고, 서쪽의 NDF(향토방위대)도 다르지 않았다. 오직 남쪽의 타이거 부대만이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2017년 12월 27일부터 격화되기 시작한 전투는 2018년 1월 3일 전선을 돌파하기 시작하면서 점령지가 급속하게 확대되었고, 1월 5일까지 러시아의 반군 보급로에 대한 후방항공차단과 더불어 쾌진격을 거듭하였다. 이에 다급해진 타흐리르 알 샴은 분쟁 관계에 있던 여러 이슬람 반군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1월 6일 자살폭탄차량을 이용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정부군으로부터 여러 마을을 탈환했다고 발표했으나, 1월 7일에는 타이거 부대에 역관광을 당하면서 오히려 더 점령지를 빼앗기고 공세가 돈좌되었다. 1월 1일 ~ 1월 7일까지 전황도.
심지어 1월 8일에는 목표였던 아부 앗 두후르 군사공항까지 11km를 남겨두었고, 1월 9일에는 무려 3km를 남겨두어 총사령부의 작전 목표를 5개월이나 앞당기는 쾌거를 이룩했다. 진행 상황을 나타낸 글. 이렇게 되자 아부 앗 두후르 공항 동쪽의 이란 혁명수비대, 리와 알 쿠드스가 진격을 개시하여 반군을 포위망 안에 가두기 시작했다. 전황도. 한편 타이거 부대의 예상을 뛰어넘는 진격속도에 후방이 비면서 급히 병력이 증원되었다.
한편 반군의 나와바리인 이들리브 상실에 위기감을 느낀 투르키스탄 이슬람당을 비롯한 이슬람 반군들은 병력을 차출하여 타흐리르 알 샴의 작전 지휘를 받을 것을 결의하고, 1월 11일 정부군의 측면을 찔러 반격을 개시했다. 전황 동영상, 전투 영상. 터키로부터 장비를 지원받은 반군은 1월 14일까지 강공을 가하여 후와인 알 카비르, 움 할라킬과 같은 소도시를 장악하고 정부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으며, 반군측 리포터가 해설하는 도중 러시아의 폭탄이 뒤에 꽂혔으나 불발되는 등 강력한 격전이 이뤄졌다. 타이거 부대는 아부 앗 두후르 공항 점령을 보류하고 병력을 재배치하며 이에 대응을 시작했으나, 16일까지 격렬하게 이뤄지던 반군의 반격은 갑자기 사그라들었다. 정체는 1월 19일부터 이뤄진 터키군의 시리아 이프린 주의 쿠르드족 격멸작전 "올리브 가지"를 위해 이슬람 반군들에게 소집령이 떨어졌기 때문에 반격에 참여하던 이슬람 반군들이 전열을 이탈해버렸기 때문이었다.
반격의 기세를 올리던 타흐리를 알 샴은 순식간에 공세가 돈좌되었고, 반격을 위해 병력을 모조리 빼어 무주공산이 된 아부 앗 두후르 동부와 북부를 향해 4기갑과 이란 혁명수비대가 이미 1월 11일부터 공세를 가하기 시작했으며 순식간에 점령지를 확대하였다. 이를 틈타 이들리브 IS 잔당이 점령지를 확대하기 시작했으며, 1월 16일 정부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주요 소도시인 신자르(Sinjar)를 점령했다고 발표하기까지 했으나, 정부측은 즉시 사진 자료를 발표하여 이를 부정하였다. 1월 20일에는 아부 앗 두후르 공항 남서쪽에 돌입하였고, 타흐리르 알 샴은 독자적으로나마 처절한 반격을 계속했지만 결국 타이거 부대에게 격퇴, 아부 앗 두후르 공항 서쪽에 있는 아부 앗 두후르 시가지도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29일 타이거 부대에게 완전히 넘어갔다.
타이거 소장은 이 승세를 이어 이들리브 시 북동쪽의 시아파 마을로 2015년 이래 포위되어 온 카파리야-후아 마을로 진격하여 이곳을 해방시킬 것을 천명하였으나, 같은 날인 1월 29일 터키군이 타흐리르 알 샴의 호위를 받아 알레포 주 하이데르(Hader) 시 전방의 알 에이스(al-Eis)에 진주하고 시리아군에 포격을 가해 러시아와 시리아 공군이 공습을 단행해였다. 터키군 진주 영상. 터키군은 다시 후퇴했으나, 이 사건은 터키군이 이프린 침공 작전 "올리브 가지"에 참여하는 반군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이들리브 주로의 정부군의 진격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상징이자, 반군을 직접적으로 보호하겠다는 것을 나타내는 사건이었다. 여기에 타흐리르 알 샴은 터키의 지원을 받는 대신 용병화된 아흐라르 알 샴이나 투르키스탄 이슬람당 등의 이슬람 반군을 비난하는 입장에 있었으나, 결국 조직의 보전을 위해 터키의 지원을 수용하게 되었다는 입장 변화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했다.[30] 당시 상황 요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이거 소장은 터키군이 진주하지 않은 알 에이스 남쪽의 아부 앗 두후르 근방에서 카파리야-후아 마을을 향해 공세를 개시했으나, 2월 3일 러시아군의 Su-25 지상공격기가 반군의 휴대용 대공미사일에 격추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타이거 소장은 공세를 중단했으며, 터키와 러시아간의 막후 협상이 개시되었다.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2월 4일부터 후방 포위망에 남아있던 이들리브 IS를 향해 공격을 개시, 정부군 병력이 IS를 향해 재배치된 틈을 타 터키의 올리브 가지 작전을 이탈(...)한 반군이 2월 6일부터 타흐리르 알 샴과 협력하여 타이거소장이 점령한 지역을 재탈환하며 반격을 개시했으나, 마을 몇 개를 빼앗는 선에서 중지되었다. 한편 알 에이스에서 철수했던 터키군은 2월 6일 재진주, 과거 시리아군 최대 헬기장이었던 아피스 군사공항을 터키군 사령부로 전용할 것임을 발표하며 이들리브 반군을 노골적으로 보호할 것임을 드러냈다. 2월 9일에는 아부 앗 두후르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텔 투르콴(Tell Turqan)에 터키군이 진주, 감시소를 실치함으로써 타이거 부대가 카파리야-후아 마을로 진출할 루트를 봉쇄했다.
한편 타이거 부대는 2월 8일에 이들리브 IS를 거의 끝장내기 직전까지 갔으나(전황도) 2월 9일 IS와 협상을 통해 반군 지역으로 다시 보내버렸다(...) 반군은 크게 반발하여 이들리브 IS를 공격했고, 2월 13일 결국 이들리브 IS는 반군에게 항복하고 소멸하였다. 여기에 2월 14일, 다시 반군의 주요 도시인 마라트 알 누만(Maraat al-Nurman)과 그곳으로 이어지는 수르만(Surman)에도 터키군이 진주, 감시소를 설치하였다.
이로써 타이거 부대와 시리아 정부군은 6월달까지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아부 앗 두후르 점령과 주변지대 평정을 5개월이나 앞당긴 2월 초에 완수하는 군사적 대성공을 보여주었다. 이에 따라 하마-알레포 철도망을 되찾았으며,[31] 더 이상 머나먼 카나세르로 삥 돌아서 알레포로 물자를 보낼 필요가 없이 훨씬 가까운 하마-알레포 국도를 통해 알레포로 물자 수송이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터키군이 시리아의 주권을 무시하고 이들리브에 직접 진주하고 감시소를 설치하며 반정부군을 보호함에 따라 이들리브로의 군사적 공격은 시리아군 단독으로는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강대국간의 외교전에 바톤을 넘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최종 전황도[32].
이로 인해 타이거 소장은 다음 작전이 수도 정예인 공화국수비대가 4년동안 고생했음에도 격퇴시키지 못한 수도 다마스쿠스 동부 고타 지역에서 이뤄질 것을 예고하며 이들리브 전선을 떠났다.
- 다마스쿠스 강철 작전 (2018년 2월 ~ 4월) : 수도 다마스쿠스 동쪽 교외지역인 동부 고타(Eastern Ghouta) 지역은 4년동안 반정부군에게 장악되어 있었다. 2012년 사우디, 카타르의 지원을 받는 이슬람 반군은 동년 7월 수도 다마스쿠스를 몰아치며 시리아 정부를 위기로 몰아넣었으나, 정예부대인 제3, 4기갑사단을 투입하여 반군을 완전히 몰아냈다. 수도 반군은 시내에서 밀려나 교외 위성도시인 조바르, 하라스타, 자말카, 이르빈, 도우마로 밀려났으나 정부군도 더 이상의 전진을 하지 못하고 진퇴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에 2013년 3월 반군의 진격이 공세 종말점에 달한 틈을 타 전역에서 대대적인 정부군의 반격이 벌어졌으며, 동부 고타 지역의 반군은 퇴로를 완전히 차단당하고 고립되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강동구와 구리, 하남, 남양주가 반군 손에 들어있어 서울 전역이 야포 사정거리에 들어있는 것인 데다 수도의 보급을 책임지는 M5 고속도로가 기관총 사거리 내에 있었기 때문에 정부군은 2013년 이후 반군을 격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고, 특히 요새화된 조바르 지역이 주요 목표가 되었다. 관련 다큐. 2015년에는 아사드 대통령이 직접 전선에 나와 조바르 지역의 정부군을 격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많은 작전에도 불구하고 동부 고타의 반군을 격퇴할 수 없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병력이 부족하여 완전한 포위가 이뤄진 상태가 아니었고, 따라서 보급물자가 암암리에 반입되었다. 또 공격 작전을 수행해도 단위 제대에서만 독자적으로 수행되었을 뿐, 전 전선의 부대를 통합 지휘해서 이뤄진 적이 없었다. 그래서 공세가 이뤄져도 동부 고타 내의 반군이 병력을 집중시켜서 막아내기만 하면 공세를 장기간 지속하지 못하고 돈좌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또 정부군의 장점은 항공기와 중포병을 이한 강한 화력인데, 전쟁이 2013년을 넘기면서 자체적으로 보유한 탄약과 장비, 특히 항공기 창정비 기지가 반군에게 넘어간 이후 정비를 받지 못해 점점 가용 기체가 줄어들어 통 폭탄이나 코끼리 로켓 같은 저성능 급조 무기에 의지하면서 화력이 크게 나을 것이 없게 되었다.
2015년 초 이들리브에서 타이거 대령과 정부군이 대패를 당하면서 병력이 크게 부족해지자 동부 고타 내의 사우디 스폰을 받는 원리주의 반군 "자이쉬 알 이슬람"이 M5 고속도로 통제 및 콸라문 산의 정부군 기지를 정복하는 작전을 결행하고, 정부군이 이걸 막아내는 데 실패하면서 시리아 정부는 기밀 자료가 넘어가고 수도 보급이 통제되어 본격적으로 멸망의 위기에 빠졌으며(관련 다큐)[33] 러시아의 참전으로 겨우 위기를 넘겼지만, 그 후에도 상술한 근본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아 동부 고타를 압박하지는 못했다. 2017년 5월 다마스쿠스 외곽의 알 카분, 바르자 지역에서 정부군이 승리하고 점령하면서 여세를 몰아 조바르, 아인 타르마에 대한 공세를 8월까지 무려 3개월간 진행했지만 같은 이유로 또 돈좌(...)되기도 했다. 관련 다큐.
하지만 이들리브에서 대승을 거둔 타이거 소장이 동부 고타로 내려오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수헤일 알 하산 소장은 동부 고타를 책임지기에 앞서 기존의 분산된 지휘체계 대신 자신에게 전권을 위임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타이거 부대를 비롯 제4기갑사단, 시리아 해병대, 리와 알 쿠드스를 비롯한 대규모의 병력이 동부 고타에 집결했고, 러시아 항공우주군이 전적인 지원을 약속하면서 상술한 정부군의 문제점이 전부 해결되어버렸다.
마침내 2월 18일부터 반군 거점과 시가지에 대한 포격과 공습이 시작되었고,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2016년 알레포 때와 마찬가지로 UN과 서방 언론은 동부 고타에서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이 벌어지고 있다며 러시아와 시리아 정부를 전방위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했고, 러시아도 하루 5시간 휴전 등의 자구책을 내놓았으나 결국 전혀 지켜지지 않은 채로 공습 포격이 지속되었다. 한편 서방측에서 동부 고타의 반군을 억울한 민간인으로 선전하자 그에 반발하여 동부 고타에 있는 4개 반군(타흐리르 알 샴, 아흐라르 알 샴, 파일라크 알 라흐만, 자이쉬 알 이슬람)이 이슬람 원리주의 반군이며 알라위파 시민들을 철창에 가두고 인간방패로 쓰거나, 자기들끼리 내전을 벌여 서로 죽여대고 시민에게 총격을 가한 것을 폭로하는 영상이 나오기도 했다.
마침내 2월 26일부터 지상전이 개시되었다. 관찰자들의 예상대로 정부군이 실패를 거듭한 서부 시가지 지역이 아니라 기동전이 가능한 동부의 농업지대에서 개시되었으며, 2월 28일 타이거 부대가 고타 포위망 서남쪽의 소도시 알 나사비야의 도로를 차단하며 가장 먼저 방어선을 돌파하였다. 또 다른 주공인 하와쉬 알 나스리에서 개시된 공화국수비대의 공격은 2대의 전차를 방기하며 실패로 돌아갔으며, 반군 조직 "자이쉬 알 이슬람"이 이 전차 중 1대를 노획하기도 했다. 한편 전 전선에서 조공이 개시되어 고타 반군들이 병력을 한 곳으로 집중하지 못하도록 견제하기도 했다. 2월 28일 전황도.
타이거 부대는 공화국수비대가 공세에 실패한 하와쉬 알 나스리로 이동하여 자이쉬 알 이슬람이 자랑하는 방어선 "죽음의 선"을 3월 1일 돌파했으며, 죽음의 선 너머로 돌진하여 하와쉬 알 다와라 마을과 구 방공대대 기지를 점령하였다. 뒤이어 해가 지자 야간 작전을 통해 풍부한 야시장비로 기습을 감행, 3월 3일에는 육군274대대 기지를 완전 장악하였다. 육군 274대대 기지는 반군 조직 자이쉬 알 이슬람이 2015년 군사 퍼레이드를 진행한 곳이기도 한 만큼 막대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남서부의 고립된 소도시 알 나사비야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가 차단되었고, 보급이 불가능해지자 반군은 3월 3일 알 나사비야에서 후퇴, 알 나사비야와 요충지인 우타야, 연결 도로는 정부군이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3월 3일 전황도, 3월 4일 전황도.
반군은 긴급 회의를 거듭하며 하라스타 지역의 반군을 동원, 여러 차례 반격을 가했으나 모두 격퇴되었다. 2차 반격에서 반군은 유구한 전술인 터널 폭파 전술을 사용하였는데, 요새화된 건물 아래로 땅굴을 파서 일거에 점화, 건물을 무너뜨리고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타이거 소장이 터널 폭파가 의심되는 건물에서 병력을 철수시켰고, 터널 폭파와 함께 땅굴에서 지상으로 튀어나온 반군이 방어선을 돌파했으나, 이미 4기갑사단에 포격 좌표 지정이 완료되었고 반군은 5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며 반격이 돈좌되기도 했다. 이 반격의 실패 끝에 정부군은 서남쪽에서는 바이트 나임, 서쪽에서는 소도시 알 사호니야를 점령하고, 타이거부대는 하라스타 시가지를 향해 길게 뻗어나온 형태로 진격했다.
반군은 반격 역량을 대부분 상실하고, 하라스타 전선의 정부군도 방어를 뚫고 차츰 진격하기 시작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3월 7일에는 고타의 소도시 함무리예에서, 3월 8일에는 함무리예 남쪽의 소도시 사크바에서 정부군이 염소가스를 사용했다는 주장을 했고, 프랑스의 마크롱과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시리아 정부군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경고를 했으나, 실제 움직임은 없이 경고에 그쳤다. 3월 9일에는 하와쉬 앗샤리와 주변 농장지대가 넘어갔고(전황도), 마침내 3월 11일에는 정부군이 하라스타 지역의 마을 미스라바를 점령하면서(전황도, 전투 영상) 결국 하라스타 육군차량기지와 연결에 성공, 동부 고타 전역이 2개로 쪼개지고 말았으며,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하라스타 북쪽의 알 비루니 대학병원과 육군보급창에서 출발한 공화국수비대가 시가지를 교묘하게 피해 농장지대를 돌파하면서 동부 고타는 3조각으로 쪼개지게 되었다. 3월 12일 전황도.
한편 미스라바 근방에서 자이쉬 알 이슬람이 사우디에서 수입한 설비를 갖춘 독가스 제조 공장을 운영한 것이 들통나면서 함무리예, 사크바 독가스 논란이 새로운 전기를 맞을 가능성이 생겼다. 출처. 이와는 별개로 동부 고타 내부의 주요 반군 조직인 자이쉬 알 이슬람, 파일라크 알 라흐만, 아흐라르 알 샴, 타흐리르 알 샴은 정부군과 항복 협상을 진행 중이며, 자이쉬 알 이슬람은 남쪽 다라 지방으로, 다른 반군들은 이들리브로 떠나는 조건을 달고 있다. 전역 총지휘관인 타이거 소장은 800여 명의 정부군 포로를 무사히 돌려보내야 하며 그들이 사살된다면 협상을 중지하고 모조리 제압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또 반군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하라스타의 시민들이 정부군 지지 시위를 하면서, 반군이 빨리 이 지역에서 떠날 것을 요구하자 반군 조직 파일라크 알 라흐만이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1명이 사망했고, 정부군이 지정한 인도적 탈출 통로인 알 와흐딘 캠프로 탈출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처음에는 정부군이 자신들을 학대하고 교도소로 보낼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밝혀지고 전선이 도시 근처로 밀리면서 탈출량이 급증한 것. 3월 19일 아사드 대통령이 직접 전선을 방문하여 장병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결국 파일라크 알 라흐만과 아흐라르 알 샴, 타흐리르 알 샴은 전투 역량을 완전히 잃고 3월 23일 정부군에 하라스타와 이르빈 등을 넘겼으며, 버스를 타고 이들리브 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마의 자이쉬 알 이슬람과의 협상이 난항을 겪었는데, 자신들이 벌어들인 900만 달러의 군자금을 그대로 인정하고 자신들을 도우마 시에서 특권을 가진 경찰로 활동하게 해달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와 함께 내부적으로는 협상 찬성파와 반대파가 서로를 비난하다가 결국 찬성파가 4월 1일 협상 반대파인 총무 아부 알리 아이다라(Abu ali Idara)와 재무지도자 아부 오마르 말리야(abu Omar Maliyah)를 암살하면서 협상이 급진전되어 일부 병력이 버스를 타고 터키 국경지대에 위치한 도시 자라불루스로 이동하였으나, 4월 7일 갑작스레 다시 자이쉬 알 이슬람이 협상을 파토내면서 타이거 부대가 전면 공격을 개시했고, 이틀만인 4월 9일 자이쉬 알 이슬람이 전면 항복하면서 사태가 종결되었다.
한편 4월 7일 시리아 정부군이 독가스 공습을 가했다는 주장이 시민 소방조직 "화이트 헬멧"에 의해 주장되었고, 중독 증세로 실려온 환자들의 모습도 공개되었다. 이에 서방 국가들은 강도 높은 비난을 하며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영국, 프랑스와 합작하여 4월 14일 화학무기 연구/저장시설이라고 주장하는 바르제 과학연구소 등을 순항미사일 105발로 공습, 초토화시켰다. 그러나 시리아 정부측은 결백을 주장하며 화학무기 금지기구(OPCW)를 즉시 초청했으며, 화학무기 연구 생산을 한다는 바르제 과학연구소는 2017년 2차례에 걸쳐 OPCW가 강도 높은 조사를 통해 결백을 입증한 것 등이 밝혀졌고, 더 가디언 지나 원 아메리칸 뉴스 네트워크 기자의 탐사보도를 통해 당시 독가스가 아니라 지하터널에 대피해 있던 시민들에 먼지구름이 닥쳐와 호흡곤란에 빠진 것이라는 현지 증언이 공개되면서, 트럼프의 공습은 질 나쁜 해프닝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러시아는 미국측이 공군기지를 목표로 103발의 미사일을 쏘았고, 그 중 71발을 시리아 정부군이 요격했으며 러시아가 훈련을 잘 시켜준 덕이라고 자화자찬했고, 미국은 이에 처음부터 공군기지를 노린 적은 없었으며, 화학무기 시설에 전탄 명중했다고 주장하는 촌극이 연출되기도 했다.
타이거 소장이 지휘한 이 전투를 통해 4기갑사단이 몇 년 동안 노력해도 제압할 수 없었던 수도권의 강대한 반군 지역이 소멸되었으며, 수도 다마스쿠스의 물자 보급을 책임지는 M5 고속도로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 또 6년간 전쟁터가 되면서 폐허가 된 수도권 동부 지역을 재건할 수 있게 되었다. 한때 도마의 자이쉬 알 이슬람이 M5 고속도로를 차단하고 정권의 숨통을 위협한 것을 돌아보면, 그야말로 정부를 살린 또 다른 전환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월 14일자 최종 전황도.
전역 종결 이후 타이거 부대는 4기갑사단과 헤어져 자이쉬 알 이슬람의 잔당이 있던 두마이르(Dumayr) 시와 동부 콸라문 지역에 전개했으나, 협상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이쉬 알 이슬람 잔당이 전면 항복을 결정하면서 4월 17일부터 정부군에 40여대의 전차를 비롯해 미국제 TOW와 통신장비 등을 넘기고 버스를 타고 자라불루스로 철수하였다. 교전 없이 승리한 타이거 부대는 휴식을 취한 후 홈스 북부의 반군 포위망을 격멸하기 위해 이동하였다.
- 현무암 작전 (2018년 6월 ~ 2018년 8월) : 타이거 부대는 다마스쿠스 강철 작전 종결 후 두마이르 시와 동부 콸라문에 전개한 자이쉬 알 이슬람 잔당 격멸을 준비했으나, 협상 결과 반군이 모든 중장비를 넘기고 이들리브로 떠났다. 다시 북상하여 홈스 북부의 반군을 격퇴하기 위해 이동했으나, 러시아가 중재한 협상 끝에 다시 반군들도 알 라스탄 지역을 넘기고 이들리브로 철수했다. 이로써 하마 시까지 M5 고속도로가 내전 이후 처음으로 완전 개통을 완료할 수 있었다. 한편 5월 내내 수도 다마스쿠스 남쪽의 야르무크 난민캠프를 장악한 IS와의 격전 끝에 4기갑사단도 작전을 완료함으로써 수도 주변이 완전히 정부군의 손에 떨어졌다.
이런 대성공과 많은 부대가 전투에 투입될 수 있게 된 점에 힘입어, 시리아 총참모부는 시리아 민주화 사태의 계기가 되었던 남부 다라 주의 반군을 격멸하기 위한 작전에 착수했으며, 작전명은 '현무암 작전(Operation Basalt)'로 결정되었다. 다라 주의 반군은 요르단 유목민 계열 아랍인으로 다마스쿠스 지역과는 남남이었고 지역적인 유대감이 매우 강했으며,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지원을 받아 정부군의 공세를 계속해서 막아내었으며, 정부군은 M5 고속도로 주변과 다라 시 북쪽만 겨우 장악하고 있었다. 이는 정부군의 가용 병력 자체가 부족했던 것도 원인이었다.
5월달부터 정부군의 검증된 정예부대와 민병대가 집결하였고 반군에게 6월 15일까지 기한을 통보, 협상을 제안했으나 반군이 이를 거부하고 결사 항전을 주장하면서 6월 19일 전투가 개시되었다. M5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서쪽은 4기갑사단이 담당하고 동쪽의 돌출부, 이른바 라잣 분지는 타이거 부대가 담당했다. 작전 계획은 1차로 라잣 분지의 반군을 소멸시키고, 2차로 다라 시 측면으로 기동하여 시 외곽을 장악하여 포위한 다음, 3차로 다라 시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타이거 부대는 19일 당일 하란 공군기지에서 출발해 라잣 돌출부의 허리가 되는 주요 거점 무사이카 마을을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라잣 돌출부의 반군은 반격을 개시해 무사이카 마을을 재탈환했다. 하지만 타이거 부대의 파상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25일 타이거 부대와 제5기계화사단이 후방의 요충지인 부스라 알 하리리를 점령하자 포위섬멸을 우려해 대대적으로 퇴각을 개시했다. 6월 26일 전황도. 결국 1단계는 겨우 7일만에 완료되었다. 6월 28일 전황도.
타이거 부대가 여세를 몰아 알 알마, 알 수라, 알 하락 3개의 소도시까지 점령하여 반군의 방어선이 전면 붕괴되면서 상상도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다라 주 동남부의 7개 소도시가 일제히 아사드 지지 시위를 벌이며 반군에게 나가라고 요구하기 시작했으며, 반군 장악 지역 중 가장 동쪽에 있던 소도시 부스라 알 샴을 거점으로 삼고 있던 쿠왓 알 샤바브 알 순나라는 반군이 러시아와 항복 협상을 시작한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다라 주 동남부의 반군은 더 이상 방어가 불가능하게 되었고 협상 의사를 표명했다. 6월 30일 전황도. 한편 M5 고속도로 서쪽의 4기갑사단 담당 구역에서도 몇몇 도시가 항복 의사를 발표하면서 알 타파스 시내로 진입했다가 협상 반대파들이 공격하면서 장군 두 명이 사망하는 큰 피해를 입었고, 남부전선 반군들이 협상을 철회하면서 정부군에 대항했으나, 타이거 부대가 다시 공격을 시작하여 7월 5일에는 알 사이다의 레이더 기지를 재점령하는 등 방어가 불가능함을 보이자 결국 7월 7일자로 모두 포기하고 정부군 통제 하에 항복했으며, 다라 주 동남부 전역은 현무암 작전 원안에서는 생각도 안했던 대성공을 거두며 요르단 국경 지대를 내전 후 처음으로 되찾는 대 성공을 이룩했다.
이후 타이거 부대는 요르단 국경을 따라 기동전을 개시하고, 4기갑사단과 공화국수비대가 다라 시 서쪽의 구 방공기지를 장악하면서 7월 9일 ISIS 칼리드 빈 왈리드 군대의 점령 지역을 제외한 요르단 국경지역을 순식간에 통제하에 놓는 기염을 토했다. 7월 9일 전황도. 이와 함께 다라 시내는 완전히 포위되었다. 동남부의 반군이 정부군을 소모시키며 방어를 해줘야 했는데, 협상에 참여하고 항복하면서 전선이 완전히 뚫려버려 타이거 부대의 기동전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기 때문.
결국 7월 12일 포위된 다라 시내의 반군은 완전 항복하고 러시아 헌병대와 시리아 정부군이 다라 시내에 진입하면서 다라 시는 6년간의 저항도 허망하게 손쉽게 함락되고 말았다. 이로써 심한 소모전이 벌어질 줄 알았던 현무암 작전의 2단계 시 외곽 포위, 3단계 다라 시내 점령은 겨우 사흘만에 이렇다 할 시가전 없이 끝나버리고 말았다. 4기갑사단도 배신한 알 타파스 시내에서 반군을 축출하고 점령했고, 남부전선 반군의 잔당들은 이렇게 쉽게 항복해버린 반군들을 비난하며 한때 원수였던 ISIS 칼리드 빈 왈리드 군대에 도시를 바치고 충성을 맹세하는 그룹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렇게 남은 반군들은 결사 항전을 맹세하며 전열을 가다듬었으나... 7월 13일 전황도.
시민들이 또 정부군에 항복하고 말았다. 정부군이 방어선을 돌파하고 도시로 진입할 것 같이 되자 중요한 거점이었던 카프르 나스지, 아크라바, 알 하라, 니메르, 자심 5개 도시의 시민들이 정부 지지 시위를 벌이며 반군에게 나가달라고 요청한 것. 7월 16일 전황도.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다라-쿠네이트라 주의 남부전선 반군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정부군과 협상을 벌여 이들리브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일부 반군은 IS에게 도시를 넘기고 충성을 맹세하거나 이스라엘 국경으로 탈출하려고 했지만, 이스라엘군이 국경을 봉쇄하고 민간구호단체 화이트 헬멧만 입국을 허용하면서 무기를 자체적으로 파괴시키기도 했다. 관련 포스팅.
이렇게 되자 남은 것은 타실 시가지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보한 ISIS 칼리드 빈 왈리드 군대 뿐이었으나, 이들도 7월 26일자로 전선이 붕괴되고(관련 다큐) 7월 30일에는 마을 3개밖에 남지 않았다가 결국 정부군에 항복, 버스 타고 동부 사막으로 떠나기로 하면서 현무암 작전은 8월 1일자로 당초의 작전 목표를 훨씬 뛰어넘는 남부전선 완전 평정의 대업을 이룩하며 종결되었다.
4.1.7. 2019년
- 이들리브 새벽 작전 (2019년 4월 ~ 8월) : 2018년 8월 1일 현무암 작전이 종결되면서 반군 장악 지역은 북부의 이들리브 주와 이프린 주, 알레포 주 북부 일부만 남게 되었다. 5월부터 홈스, 콸라문 산악지대의 반군 포위망이 협상을 통해 항복하고, 전 반군이 정부군 입대를 희망하면서 예비병력도 어느 때보다 많은 상황이었으며, 이로 인해 사실상의 최종 결전으로 여겨지는 이들리브 수복을 위해 정부군, 타이거 부대, 전 반정부군, 공군정보국, 러시아 특수부대와 용병대, 이란군이 전면적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작전명은 "이들리브의 새벽"으로 정해졌다.
하지만 이들리브의 반군 상실을 용납하지 않는 서방과 터키에 의해 작전은 연기되었다. 이란-터키-러시아의 3자 합의 결과 터키는 이들리브 내의 지하디스트 세력을 책임지고 해산하며, 정부군과 반군 모두 현 전선에서 20km 밖으로 중화기를 철수시키는 비무장지대 설정안이 정해졌고, 모처럼 집결했던 정부군과 구 반정부군은 원래의 위수 지역으로 복귀하고 동부 사막지대나 스웨이다 주에서 테러를 벌이는 ISIS 잔당들의 소탕 작전에 투입되었다. 휴전협정에 의한 비무장지대 지도.
그러나 터키가 책임지고 처리하겠다던 극단 지하드 반군, 구 알 카에다 시리아 지부였던 "타흐리르 알 샴"과 현 알 카에다 지부 "탄잠 후라스 알 딘" 이들과 동맹 관계인 "투르키스탄 이슬람 정당" 등은 해체되기는 커녕 오히려 시리아 정부군의 초소를 습격하여 살해하거나 포격을 가했다. 러시아가 주둔하는 흐메이밈 공군기지에 조잡한 무인항공기에 박격포 신관으로 만든 작은 폭탄을 탑재하여 계속해서 항공기 파괴를 시도했고, 대부분은 방공장비에 격추 혹은 재밍당했으나 일부는 피해를 입히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터키는 타흐리르 알 샴을 테러 조직으로 지정하기는 했으나 약속한 해체를 위한 조치는 시행하지 않았다.
이들리브 내부의 사정도 변화했다. 원래 이들리브에서는 터키의 지원을 받아 아흐라르 알 샴 주도로 이루어진 반군연합체 "국가해방전선;자브핫 와타니야 릴 타흐리르" 와 타흐리르 알 샴이 비슷한 영토를 차지하고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타흐리르 알 샴이 정부군의 이들리브 침공이 벌어졌을 때 현무암 작전에서처럼 시민들이 정부 지지를 외치며 배신하는 것을 막겠다고 시민 운동가들을 모조리 체포하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국가해방전선 소속인 "누르 알 딘 알 젠키 운동"과 싸움이 난 것을 시작으로 이들리브에서 대대적인 분쟁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결국 타흐리르 알 샴이 국가해방전선을 완전 제압하고 이들리브 대부분의 영역을 장악하면서, 오히려 이들리브가 알 카에다 계열 반군의 본거지가 되어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1월 9일자 이들리브 지도.
상황이 이렇게 되자 러시아 주도로 타이거 부대를 선두로 이들리브 새벽 작전이 5월 6일부터 개시되었다.
2018년 8월달에 나온 작전 예상도에는 지슈르 앗 슈구르, 알레포와 아부 앗 두후르 군사공항 총 4개 방향에서 동시에 작전이 개시되도록 되어 있었으나, 타이거 부대와 기독교 마을 마르데, 수콸라비야의 기독교 민병대, 러시아 특수부대와 용병대만이 작전이 동원되었고 작전 위치도 하마 주 북부로 한정되었다. 이로 인해 이번 작전의 목표는 이들리브 전역의 수복이 아니라 러시아 흐메이밈 군사공항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땅을 더 장악하는 것이라는 관측이 강해졌다.
타이거 부대는 작전이 개시된 5월 6일 바로 탈 우스만 언덕, 알 바나, 알 자나브라 마을을 장악했고 탈 우스만은 지슈르 앗슈구르로 향하는 56번 국도상에 있는 소도시 콰랏 알 무디끄를 감제하는 지점이었다.
5월 8일에는 이들리브 주 남쪽의 주요 거점인 칸 셰이쿤 시로 이어지는 카프르 나부다를 기습적으로 장악하면서 반정부군은 전략적 거점에 측면에서 위협받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5월 9일에는 기독교 마을인 수콸라비야에서 출발한 부대가 기독교 민병대의 지원을 받아 다시 순식간에 함락시켰다. 반군은 전략 거점의 상실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해 저항하였고, 카프르 나부다에서 자이쉬 알 이자 소속 사령관 두 명이 전사하며 타흐리르 알 샴의 자살폭탄차량으로 방어선 돌파를 시도할 정도였지만 모두 실패했다.
반군 조직 타흐리르 알 샴과 자이쉬 알 이자는 재정비를 거치고 5월 10일과 11일 양일간 전 전선에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일시적으로 56번 국도 근처에 있는 앗 샤리아 마을을 탈환했지만, 카프르 나부다 재탈환이 실패로 돌아가고 11일에는 정부군에게 앗 샤리아 마을을 다시 뺏기는 상황이 되었다.
타흐리르 알 샴은 다시 병력을 증원하고 터키 지원 자유 시리아군에 증원을 요청, 5월 13일부터 대대적인 반격을 결행했다. 주요 전선인 카프르 나부다, 콰랏 알 무디끄 방면이 아닌 측면의 알 함마니미야, 주바인 마을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고, 기독교계 NDF가 방어하던 이곳은 속절 없이 밀려 점령당했다. 하지만 타이거 부대 본대는 56번 국도를 따라 더 진격하여 알 후와이즈, 나흐르 앗 나시리야, 와디 알 자한남을 점령하며 승리를 이어갔다. 13~14일간의 격전에서 서로 대대적인 대전차미사일과 전차를 동원하는 소모전이 이어졌으며, 타이거 부대는 러시아제 군사 드론을 이용해 포격과 공습으로 정밀 타격을 이어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타흐리르 알 샴의 총수 아부 무함마드 알 줄라니는 터키 지원 자유 시리아군에 공식적으로 전면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터키측의 제안으로 5월 19일 3일간의 휴전이 발표되었고, 이 기간 동안 반군은 다시 태세를 정비하고 휴전이 끝나는 22일 아침부터 자살폭탄차량으로 방어선을 파괴하며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 120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당일 카프르 나부다를 재탈환했다. 5월 22일자 전투 영상. 반군은 반격을 이어가기 위해 칸 셰이쿤 시에 숨겨놓았던 증원병력과 차량을 이동시키다 러시아군의 공습을 받아 심각한 손해를 보았고, 전투 지속 능력을 상실했다. 타이거 부대는 56번 국도 진격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재배치, 공세를 감행하여 5월 26일 카프르 나부다를 재탈환하고, 이 과정에서 벙커에 숨어 결사항전을 외치던 반군 30여 명이 항복을 거부하자 콘크리트로 입구를 막아버리는 등의 에피소드도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타흐리르 알 샴 총수 아부 무함마드 알 줄라니는 하마-이들리브 주의 모든 군사 지휘관들을 소집하여 긴급회의를 개최하고, 향후의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토론을 거듭했다.
정부군은 카프르 나부다 재탈환 이후 7일간 재정비 기간을 거쳤고, 이 동안에도 주요 기동로 상에서 정부군과 러시아군의 강력한 공습으로 반군의 증원병력은 대대적인 손실을 입고 있었다. M5 고속도로와 56번 국도가 위험해지자 산악지대의 국도를 통해 병력을 보냈지만, 도로상으로 계속해서 공습을 받았다. 정부군은 6월 3일 재공세를 단행하여 카프르 나부다 북쪽으로 전진, 알 카사비야 마을을 탈환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반군은 낮에는 땅굴로 만든 거점에서 숨어있다가 밤에만 이동하는 방식으로 병력을 보내기 시작했다.
6월 6일 타흐리르 알 샴은 마침내 중앙아시아 출신의 최정예 택티컬 부대인 "잉기마쉬"를 동원, 택티컬 전투력으로 정부군이 방어 태세를 굳힌 카프르 나부다보다 훨씬 남쪽의 텔 말라 언덕을 향한 전면 공세에 돌입하여 기독교 민병대들이 지키는 마르데와 수콸라비야 사이의 56번 국도를 장악하여 보급로를 단절시켰다. 즉시 공세를 단행하여 이들리브 작전의 거점인 기독교 마을 수콸라비야로 방향을 틀어 알 함마미야트 마을을 점령하며 전과 확대를 시도했다. 이 때 기동로상의 소도시인 케르나즈와 잘메가 점령 직전의 상황에 놓이자, 타이거 부대는 바로 기동하여 도착하자마자 바로 전투에 투입되었고, 암살을 우려하여 최전선에 잘 나오지 않던 타이거 소장도 현장에 도착, 전투를 지휘했고 택티컬 반군이 물러나면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케르나즈가 함락되면 별다른 방어선이 없어 기독교 마을 수콸라비야가 위험해지고, 정부군은 후방을 찔려 자칫 전 전선을 내주고 퇴각해야 하는 위기 상황이었다. 당시 전투를 다룬 다큐.
공세를 막아내고 숨을 돌린 정부군은 기독교 민병대 주도로 단절된 국도를 재탈환하는 작전을 개시했지만, 택티컬 반군의 전투력 앞에 6월 9일자 반격은 실패했고, 이후로도 지속적인 재탈환 시도가 있었지만 전부 성공하지 못한 채로 다시 터키가 제안한 6월 12일자 3일간의 휴전 협정이 러시아의 동의로 발효되었다. 6월 12일자 맵.
이 과정에서 56번 국도 전투 중 사망한 반군 지휘관이자 전 시리아 U-20 축구 국가대표 골키퍼였던 압델 사룻을 추모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했는데, 그가 ISIS와 알 카에다에 우호적이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고, 그를 추모하며 아사드가 ISIS를 만들었다는 책을 쓴 언론인 하산 하산은 과거 반정부 시위 당시 지하디스트라고 자처하며 알라위파를 다 죽여버리고 시아파를 몰아낸다고 떠들어댄 영상이 폭로되는 곤욕을 치르는 해프닝도 있었다. 관련 영상 관련 포스팅.
72시간 휴전이 종료된 6월 15일 기독교 친정부 민병대가 먼저 56번 국도 탈환을 위해 공세를 걸었지만 패배했고, 다시 반군이 공세를 걸었지만 실패했다. 6월 18일 다시 교전이 벌어지고 나서 소득 없이 끝나고 나서 1개월 가까이 전선은 큰 전투 없이 소강 상태가 이어졌으나, 반군이 7월 11일 정부군이 점령했던 알 함마미야트에 중앙아시아 출신으로 구성된 정예부대 "잉기마쉬"를 투입, 강공을 걸어 민병대들을 격퇴하고 점령에 성공했고, 하루도 되지 않는 기간에 즉시 진지를 구축하며 방어태세를 완비하는 최정예다운 능력을 보여주었다.
타이거 부대는 12일 즉시 돌입하여 주간에 재탈환을 시도했으나 적은 시내를 비우고 시내를 감제하는 함마미야트 고지 근방의 위장진지에 숨어 충분히 끌어들였다가 시 외곽에 근접한 타이거 부대에게 집중포화를 날려댔고 충분히 위장된 적 진지에 공습과 포병, 드론도 효과적인 타격을 줄 수 없었다. 결국 타이거 부대는 주간 공세를 포기했고 새로운 주특기, 야간 전투술로 적을 날려버리기로 결정한다. 야간 감시 능력을 갖춘 러시아제 드론, 야간 관측 장비, T-90 전차와 T-72M 전차, 열영상 저격조준경을 장착한 저격총을 장비한 저격수를 집중 운용하는 전문 지정 사수 부대, 그리고 여기서 얻어진 정보를 통합해 지휘할 수 있는 통합 지휘체계를 통해 말 그대로 장님을 농락하듯이 압승을 거두었고, 이날 이후부터 야간 전투는 타이거 부대의 새로운 필승 패턴으로 등극한다. 함마미야트 전투 다큐멘터리. 이 전투 결과 반군은 공세에서부터 병력 25명, 지휘관 2명을 잃고 방어전에서는 100명 이상의 병력을 손실하는 대패를 겪었다.
이후 7월 18일부터 타흐리르 알 샴은 공격대를 계속해서 조직하여 하마 북부에서 카사비야 마을을 향한 탈환 시도를 했으나, 타이거 부대가 운영하는 드론에 모조리 관측당하면서 포격, 공습으로 공격대가 박살나면서 공세를 시작도 못해보고 깨지고, 귀중한 병력과 물자만 날아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었다. 관련 포스팅. 이렇게 여력을 소모하는 와중 타이거 부대는 7월 31일 오후 10시, 반군이 끊어놓은 56번 국도를 감제하는 텔 말라 고지에 야간 전투를 감행, 하루도 안 되어 요새화된 고지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기독교 민병대가 정석적인 주간 공격을 감행하다 여러 번 실패한 것을 단숨에 깨버린 것. 동시에 주변의 주바인 마을을 동시에 탈환하여 기독교 도시인 수콸라비야와 마르데는 겨우 다시 연결에 성공되었고, 정부군의 보급로도 다시 개통되었다.
이와 동시에 반군은 지속적인 병력 손실로 인해 예비 병력을 잃은 상태여서 최전방이 무너지자 전선 보강에 실패하고 8월 1일부터 와디 하스민, 아부 라이디를 상실하고 자카 마을로 진입당하게 되었으며, 주요 거점은 카프르 지타 시를 직접적으로 위협받았다. 반군은 지하동굴 무기고와 주요 문서를 파기하지도 못하고 급하게 퇴각함으로써 병력의 부족을 드러내었고, 8월 2일 터키의 중재로 급하게 휴전안이 발효되었으나 타흐리르 알 샴이 휴전안 수용을 거부하면서 8월 7일부터 정부군의 대규모 공습과 타이거 부대의 돌입이 재개, 타이거 부대 SNS 계정은 다음 목표물을 SNS로 투표(...)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관련 포스팅, 이르빈, 자카 마을 점령을 다룬 다큐.
마침내 반군은 방어 능력을 상실했고, 타이거 부대는 주요 반군 단체인 자이쉬 알 이자의 본거지 칸 셰이쿤 시를 포위하기 위해 8월 11일 알 하비트 시를 점령하며 M5 고속도로 방면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알 하비트 시 점령전 다큐. 이미 반군의 반격 능력은 소멸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타이거 부대는 마치 반군의 탈출을 종용하기라도 하는 듯 이 시점에서 진격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압박하기 시작했으며, 3일이 지난 8월 14일 하비트에서 약간 떨어진 카프르 아인을 점령하면서 칸 셰이쿤을 5km 남겨놓으며 압박했다. 전황도. 뒤이어 텔 아스 고지를 점령하고 칸 셰이쿤 서쪽 검문소까지 장악하자 칸 셰이쿤 시민들이 대대적인 탈출을 시작했고, 이미 상당히 손실을 봤던 친터키 반군들도 부랴부랴 증원병력을 편성하여 파견을 시작했다.
8월 15일부터 타흐리르 알 샴은 친터키 반군들의 증원을 받아 공격대를 편성하고 자살폭탄차량의 돌입과 함께 이틀 내내 대대적인 공세를 가했으나, 타이거 소장의 특기인 한 번 받아주면서 후퇴했다가 시내에 몰아넣고 압도적인 화력과 야간 전투 능력으로 날려버리는 전술에 휘말려 큰 손해를 보고 패배했다. 전투 영상.
일이 이렇게 되자 8월 17일 터키군이 직접 나서서 친터키 반군을 직접 호송하면서 정부군의 공습에서 호위하면서 증원시켜주려고 했으나, 핀포인트 공습으로 반군 차량만 폭파시키면서 행렬이 정지되었고, 터키군 전투기가 출격하여 요격에 나서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으나, 결과적으로 터키군이 보조하는 칸 셰이쿤 구원 시도는 좌절되었다. 결국 8월 19일 타이거 부대는 M5 고속도로로 직접 진출하여 도로를 단절시켰고(지도), 마지막으로 급하게 터키 지원 반군들이 달려왔으나 주간에 노상으로 위치를 노출시키는 바람에 포격과 공습으로 전멸하였고, 결국 포위망 내부의 타흐리르 알 샴, 자이쉬 알 이자 등의 반군들은 타이거 소장의 의도대로 필사의 탈출을 개시한다.[34]
마침내 8월 20일 정부군은 무저항의 칸 셰이쿤 시내에 돌입하여 완전 점령, 고향을 떠나지 않겠다는 일부 반군이 카프르 지타 등 포위망 내부의 일부 도시에 남았으나 거의 저항 없이 소멸하였고, 마침내 2019년 8월 23일, 정부군의 공세를 7년에 걸쳐 방어해내던 칸 셰이쿤 방어선은 타이거 소장의 활약 앞에 손쉽게 소멸하였다.
- 재탈환 작전 (2019년 11월 ~ ) : 작전명 "Opration Redemption". 휴전 협정 이래로 소규모의 교전 정도만이 있던 이들리브 전선이었으나, 11월 20일경 정부군이 소규모 부대를 보내 이들리브의 무사이리파 마을을 점령했다. 타흐리르 알 샴은 즉시 부대를 편성하여 재탈환했으나 포격에 당해 피해를 입었고, 24일 타이거 부대의 재탈환 시도에 패배해 무사이리파 마을을 내주었다. 다시 타이거 부대는 이들리브 새벽 작전에서부터 보여준 주특기 야간전을 결행, 25일 움 할라킬 시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뒤이어 후라이지, 할파야 마을에 공세를 걸다가 중단했다.
이에 12월 1일, 타흐리르 알 샴은 안사르 알 샤리아, 국가해방전선 등의 무장 세력과 함께 충돌이 벌어지던 곳이 아닌 아부 앗 두후르 군사공항 방면으로 반격을 가해 몇 개의 마을을 탈환하며 몰아붙였으나, 타이거 부대가 급히 도착하여 공세를 돈좌시켰고 뒤이어 12월 4일 반격을 가하면서 타흐리르 알 샴은 점령지를 도로 토해내면서 손실을 입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자 12월 9일 타흐리르 알 샴은 알레포 외곽 지역에 포격을 가했고 18일에는 알 카에다 시리아 지부인 탄잠 후라스 알 딘 병력과 함께 정부군을 공격해 12명의 정부군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별 의미 없어 보이던 이 싸움은 사실상 비무장지대 휴전 협정의 파토를 위한 명분 쌓기였다. 이들리브 비무장지대 협정에 의하면 양측은 야포 및 다련장로켓을 최전선에서 빼야 했지만, 타흐리르 알 샴이 작전을 위해 전선 근처로 반입하자 협정 위반이라고 비난할 명분이 된 것이었다. 또 터키가 알 카에다 계열 단체의 해체를 책임지기로 약속했는데도 1년 넘게 이행하지 않고 있었다. 이에 따라 시리아 정부와 러시아는 본격적인 작전을 준비했고, 그 이전에도 적 병력 기동을 공습하기는 했지만 12월 19일부터는 각 도시와 주요 교통로상에 더욱 대규모의 공습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친정부 SNS에는 작전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넘쳐나기 시작했고, 작전 목표는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제1의 도시 알레포를 잇는 M5 고속도로의 재개통, 그리고 그 중간에 있는 도시 "마라트 알 누만"의 점령이라는 소식이 뒤따랐다. 해설 영상.
반정부 SNS에 부서진 건물과 병원의 영상이 넘쳐나는 가운데 19일부터 진격을 개시해 움 잘랄 마을을 점령한 타이거 부대는 20일 저녁부터 10개 이상의 마을을 점령하면서 전격전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쾌진격을 시작했다. 타흐리르 알 샴이 소규모의 반격을 개시했으나, 타이거 부대가 야간전으로 대응하면서 야간전 능력이 없는 반군은 패퇴를 거듭했고, 주간에 자살폭탄차량으로 반격을 가하기도 했으나 재반격으로 털리면서(전투 장면) 12월 24일에는 수르만 시의 터키군 휴전 감시소가 포위(!) 당하고 320km2 이상의 면적, 40개 이상의 마을을 뺏기는 대패를 당하고 정부군은 중간 목표인 마라트 알 누만 시까지 7km를 남겨둔 대 성과를 거두는 지경에 이르렀다. 12월 23일자 지도.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다른 반군들의 비협조에 분노한 타흐리르 알 샴이 이들리브 남부로 증원병력을 보내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반군들이 정부군에게 털릴까봐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자, 그럴 거면 알아서 하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
하지만 타흐리르 알 샴은 전열을 정비하고 24일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주요 목표인 마라트 알 누만 시에서 4km 떨어진 탈 마나스, 그리고 요충지인 자르자나즈의 정부군을 향해 자살폭탄차량을 돌입시키며 돌격을 개시하였고 탈 마나스, 자르자나즈, 파르완 등에서 정부군을 퇴각시켰다. 24일자 양측 전투 영상 모음. 이 과정에서 정부군 알리 하이다르 여단 대원 4명이 전사하는 등의 피해를 입었으며, 타이거 부대 소속 하리스 부대 사령관 하리스 "아부 알리" 지네 알 아비딘이 중상을 입었다는 루머가 돌았지만 즉시 자신의 SNS에 무사를 인증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타흐리르 알 샴은 전역에서 대전차미사일과 포병을 동원하여 전과 확대를 시도했으나 좌절되자, 총수 "아부 무함마드 알 줄라니" 명의로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기사. 내용은 이번 실패에 대해 러시아와 이란을 비난하고, 이 결과가 레반트, 터키, 사우디, 이란 등 여러 사람들의 삶에 좋든 나쁘든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하여 테러리즘 공격으로 댓가를 치를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또한 러시아의 목적이 구 소련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들리브 반군들의 처지가 위기에 빠지자 늘 그랬던 것처럼(...) 터키가 러시아, 이란과 3자 협의를 시도하여 시리아 정부군의 진입을 거부하고 다시 휴전협정의 발효를 내세우며, 이번에야말로 극단주의 반군의 비무장지대에서의 철수를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는 소식이 타이거 부대 지휘관 슐레이만 샤힌을 비롯해 여러 친정부 SNS에서 터져나왔다. 실제로 타이거 부대 관계자로 추정되는 트위터 계정에서 25일 현지 오후 3시경에 지하드 사냥을 위해 밤이 되기만 기다린다는 트윗이 올라온 후, 밤이 되었는데도 전과 보고가 전혀 올라오지 않아 관찰자들로부터 의구심을 자아내던 와중에 나온 소식이라 납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결국 단기적인 휴전이 발효되어 전쟁은 2020년으로 바톤을 넘기게 되었다.
4.1.8. 2020년
- 재탈환 작전 (2020년 1월 ~ ) : 작전명 "Opration Redemption". 터키와 러시아 사이에 휴전이 합의되었으나 타흐리르 알 샴은 알레포 시내에 박격포를 발사하여 민간인 피해를 유도하거나 일부 마을에 강습을 감행, 1월 2일부터 소규모 공세를 감행했다.[35] 이러한 소규모 충돌이 1월 8일 바르자 마을에서까지 이어지다가 1월 14일 정부측의 대대적인 공습이 감행되었고, 1월 16일부터 아부 앗 두후르 군사공항 축선에서 타이거 부대가 선도하는 공세가 시작되었다. 전황도.
드론 활용과 야간 작전을 병행했으나 이상하리만치 타흐리르 알 샴의 방어력이 낮아 타이거 부대는 쾌진격을 거듭, 공세 10일만인 1월 26일 주요 거점인 마라트 알 누만 시 북쪽으로 기동하여 M5 고속도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전황도), 포위섬멸을 우려한 잔존 세력들이 마라트 알 누만 시내에서 탈출하면서 1월 28일 타이거 부대는 마라트 알 누만 시를 무저항으로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전황도, ANNA뉴스의 관련 다큐.
쾌진격의 비결은 따로 있었다. 타흐리르 알 샴이 공세를 선도하고 여력이 소진되면 아사드 타도의 대의를 무시할 수 없는 터키 지원 반군들이 그들을 돕기 위해 내려와 예비대 역할을 하면서 후반 타격력을 책임지는 구조가 오랫동안 이어져 왔으나, 이번에는 리비아 GNA 정부가 칼리파 하프타르 장군이 이끄는 LNA 정부군에 밀리자 터키가 2400명의 병사들을 2000달러의 거액[36] 월급을 줘가며 리비아로 파병했기 때문에, 터키 지원 반군이 지원해줄 여력이 없었던 것이 이유였다.
더불어 수도방위 제4기갑사단이 알레포 시 서쪽에 집결, 레바논의 무장정파 헤즈볼라와 아프가니스탄 난민으로 구성된 이란 혁명수비대 산하 부대인 "리와 파테미욘"이 알레포 시 남서쪽에 전개되어, 이들이 격전을 펼치며 반군 병력을 마라트 알 누만으로 집중할 수 없게 만들어준 것도 큰 이유였다. 이들은 반군과 마을 한두 개를 놓고 다수의 사상자를 내는 격전을 벌여 작지만 꾸준한 승리를 이뤄내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1월 28일 마라트 알 누만 함락을 기점으로 제4기갑사단과 헤즈볼라, 리와 파테미욘이 여력을 상실한 반군을 돌파하며 점령지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타이거 부대는 마라트 알 누만 안정화에 들어간 후 즉시 M5 고속도로를 따라 쾌진격을 감행, 2월 4일에는 M5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소도시, 사라킵(Saraqib)을 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터키군은 사라킵 시 외곽 4방향으로 감시소를 설치, 타이거 부대의 진격을 막고자 했으나 타이거 부대가 감시소를 피해 우회하면서(...) 봉쇄는 실패로 돌아갔다.
2월 5일 아부 앗 두후르 군사공항에서 대기 중이던 공화국수비대 124여단이 갑자기 뛰쳐나와 반군을 몰아붙이면서 사라킵 시는 위험해졌고, 2월 6일에는 타이거 부대와 공화국수비대가 사라킵 시 외곽을 포위하고 서북쪽에 틈을 만들어놓고 역시 포위섬멸을 우려한 반군 주력이 시내에서 2월 5일부터 탈출을 감행, 사라킵은 마라트 알 누만 시와 똑같이 무주공산 상태에서 쉽게 정부군에 넘어가게 되었다. 다시 타이거 부대는 쾌진격을 감행, M5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가 2월 10일에는 알레포 남서쪽에 배치된 리와 파테미욘, 헤즈볼라와 합류하여 M5 고속도로의 대부분이 확보되었다. 관련 포스팅, 전황도.
2월 11일부터 타이거 부대와 연계한 헤즈볼라와 파테미욘, 4기갑사단의 활약으로 그동안 감히 점령할 시도조차 못하던 알레포 시 서쪽의 군사시설 및 칸 투만 탄약창까지 모조리 되찾으면서 2월 13일에는 M5 고속도로 완전 개통의 대업이 이루어졌고(전황도 1, 전황도 2), 2월 16일에는 알레포 시 북쪽에 튀어나온 하이탄 돌출부까지 완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2월 16일자 전황도.
대규모의 작전 계획을 한 달만에 완수한 이 승리에 2월 18일 아사드 대통령은 M5 고속도로 재개통을 선포하고 고생한 장병들을 치하하는 대국민 방송을 송출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간접적인 지원에 그치던 터키군이 직접적인 지상군 개입을 시작했다. 터키는 자국에 유입된 시리아 난민 400여 만 명으로 인해 치안이 불안해지고 지역사회가 붕괴된 어려운 처지에 있었으며,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이들리브와 시리아 북부에 괴뢰국을 설립하고 여기에 난민을 몰아넣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것을 통해 터키 동부 쿠르드족과 협력하는 시리아 쿠르드족과의 연결을 단절시킬 것을 의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군이 이들리브를 장악할 경우 이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 버릴 수 있었다. 시리아 북부에서는 구 자유 시리아군 계열 중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이 강한 단체들을 위주로 시리아 국민군, 통칭 터키 지원 반군을 편성하고, 괴뢰국가인 시리아 공화국을 창설했다. 하지만 이들리브를 장악한 알 카에다 계열 테러 단체인 타흐리르 알 샴, 탄잠 후라스 알 딘, 투르키스탄 이슬람 정당을 터키가 직접 지원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러시아와의 합의사항인 이들 알 카에다 군대의 해체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들은 러시아 기지로 자폭 드론을 날려대거나, 소규모 부대를 편성하여 정부군 초소를 습격하여 체포, 살해를 반복하고 있어 휴전을 망치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바로 이 문제를 명분 삼아 러시아-시리아 정부군이 알카에다 박멸을 외치며 대규모 공세를 시작해 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들 때문에 이들리브가 넘어가는 것은 놔둘 수 없는 것이었고, 결국 금기를 풀어 터키 지원 반군과 타흐리르 알 샴에 참여한 그룹들 중 국제 알 카에다 네트워크와는 관계가 없는 세력들에게 ACV장갑차와 M60사브라 전차,보병휴대용 방공미사일을 직접 지원했다. 또 지상군 전자전 체계와 무인공격기를 전개하고 터키 지상군이 시리아 이들리브로 직접 진입하여, 일전 태세를 갖추었다.
5. 매체에서의 등장
러시아산 RTS 게임인 Syrian Warfare의 DLC인 Return to Palmyra에서 그와 그의 부대가 등장한다. 확장팩 이름에서 보듯이 팔미라 탈환 전투를 다루고 있다.[1] 일부 문서에서는 시리아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여러 문건에서 혼란이 좀 있는 모양.[2] 공군 정보사령부는 전임 대통령 하페즈 알 아사드가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 공군에 복무한 경력 탓에 정권이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최고의 첩보 부대로, 여기에 들어간 것 자체가 최고의 인재라는 것을 반증한다.[3] 당시 타이거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리아 공군정보국 요원들이 알카에다 내부에서 지하디스트로 활동하며 정보를 수집했으며, 이렇게 얻어진 정보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꾀한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의 의중으로 미국에 실시간 전달되기도 했다. 개중에는 알카에다 소속으로 지하디스트 활동을 하다 2007년 이라크 산자르에서 미군에게 사살당해 정체가 드러난 정보부 요원도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대 알카에다 정보 활동은 나중에 시리아 반군이 이슬람 원리주의자가 주류가 되면서 아사드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과 공조하여 민주 시민 세력을 오염시켰다는 허황된 음모론의 기반이 되었다.[4] 기이한 스타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사실 중동 젋은이들의 수염 스타일리쉬 기법 중 하나이다. 숱이 부족한 부분에 마스카라를 발라서 맨살 때문에 어색해 보이지 않게 하는 것. 하지만 수헤일은 턱수염 숱이 부족한 편이며, 이 때문에 턱수염을 무슨 매직을 칠해서 한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그래서인지 2018년 잠시 턱수염을 밀어버리고 옛날 스타일로 돌아간 적이 있었으나, 한 달도 안 되어 다시 턱수염 마스카라 떡칠로 돌아갔다. 수헤일 8단 변신.[5] 이들리브 패배 당시 얼굴에 부상을 입었다는 루머를 지지하는 측에서는 수헤일이 잠적 기간 동안 고강도의 성형수술을 받았으며, 갑작스런 턱수염은 그 흉터를 가리기 위함이라는 말도 한다. 실제로 2015년 수헤일은 볼살이 이상할 정도로 부풀어 있었고 코 위치도 미묘하게 틀려서 대역설, 가짜설이 설득력을 얻을 정도였다.[6] 팀3, 팀6 두 개 부대로 구성된 특수전 여단으로 알려져 있다.[7] 2019년 알 마스다르 신문 기사를 통해 제25특수임무사단이라는 단대호를 받았음이 확인되었다.[8] 다만 사막의 매 여단은 민병대이며, 2018년에는 해체된 상태다. 이곳은 밀수꾼이었던 모하메드 알 자베르 예비역 대령이 자신의 조직을 모태로 창설한 탓에 병력들도 약탈 등에 큰 관심을 둔 자들이었고, 이들의 전투력 때문에 사령부도 적당한 약탈은 눈감아 주었으나, 2016년 알레포 서부 전역에서 정부에 충성하는 부촌 신 알레포 지역의 가정집에서 고급 가전제품을 털어 나오는 것이 정부측 기자에 의해 폭로되면서 커다란 비난을 받았다. 이로 인해 분노한 총참모부가 이들을 라타키아로 전환 배치했으나 이들은 반쯤 태업을 하다시피 했으며, 결국 부대가 해체 명령을 받고 사령관 모하메드 자베르는 새 사업을 알아본다는 핑계로 러시아로 추방, 잔여 병력은 시리아 해병대로 배속되었다.[9] 이들을 공격 한 부대들 중 하나는 알 누스라 전선이 있다. 이들은 알카에다와 결별한 이후 이렇다 할 패전이나 몰락을 겪지도 않았으며, 숱한 실전경험과 신식장비들을 바탕으로 제25특수임무사단 뿐만 아니라 중동 최강을 논할 때 항상 거론 되는 이란군의 정규 공수사단 까지 격파할 정도의 기량을 갖추고 있어, 서아시아 반군 중 최강으로 평가 받고 있다. 현재는 국가체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 ISIS와는 적대적인 관계이며 비교적 관용적인 이념을 보이고는 있으나, 이들도 어디까지나 테러리스트이며 이슬람 극단주의를 표방 하며 민주주의를 적대하는 무장단체다.[10] 시리아 정부군의 작전에 대해 민간인을 고의로 살해하고 공습한다는 선전이 서방측을 중심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민감한 작전 영상을 공개해서라도 반군 병력이 민가를 징발해서 기동하며 그것을 공습했다는 증거를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ANNA뉴스는 2013년부터 시리아 정부의 허가를 받아 4기갑사단 등의 전차에 액션캠을 장착하고 여러 작전 실황을 다큐로 정리해서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했는데, 서방의 선전을 반박하고자 하는 시리아 정부의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11] 멀리 갈 것도 없이 세계 초강국 미국도 전직 대통령인 율리시스 그랜트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육군 장군 출신이었고, 한때는 더글러스 맥아더와 콜린 파월도 대권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의 영웅 중 한 명인 웰링턴 공작은 이후 영국의 수상이 되었으며,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은 혁명 직후 터진 전쟁의 영웅으로 부상하여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샤를 드 골 역시 자유 프랑스의 해방자라는 인기를 등에 업고 프랑스 제5공화국 정권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나이지리아의 올루세군 오바산조 전 대통령과 무하마드 부하리 현 대통령 역시 비아프라 전쟁에 참전한 해군/육군 출신 장교였으며, 시리아의 옆나라인 터키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무스타파 케말 역시 오스만 제국군의 장교 출신이었다.[12] NDF, 친 아사드 민병대.[13] 시리아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난민들로 구성된 여단 조직이며, 이란 혁명수비대 산하 특수부대 알 쿠드스 여단과는 다르다.[14] 이전에는 서구권 언론에서는 시리아 정부군을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의 사병으로 간주하고 비하하는 의미에서 'Assad's Army'로 지칭하였으나, 팔미라 탈환 이후로 '정당한 시리아의 군대'라는 뜻으로 'Syrian army' 또는 'Syrian Arab Army'라는 정식 명칭을 쓰기 시작하는 빈도가 높아졌다.[15] 수도는 다마스쿠스였지만 인구나 경제 규모는 알레포가 훨씬 컸다.[16]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의 동생인 마헤르 알 아사드가 지휘하는 수도방위사단으로, 공화국수비대 개편 이전에는 공화국수비대에 속한 사단이었다.[17] 타이거 부대측은 고장이 발생하여 작전에 막대한 지장을 줄 지경이 되자 어쩔 수 없이 유기하였다고 한다. 이 전차는 이슬람 전선 휘하의 파벌인 "누르 알 딘 알 젠키 운동"에서 노획했다가 알 카에다 소속 알 누스라 전선에 T-72와 돈을 받고 팔아넘겼다.[18] 전 화력을 투사하여 200여 명 사살이라는 것은 상당히 없어보이지만, 시리아 내전은 병력의 숫자가 적고 거리 대비 병력 밀도가 낮아 대규모 전역에서도 60명이 사망하면 심각한 참패에 해당된다. 그런데 하루만에 200명을 사살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대승/대패에 해당된다고 보면 된다.[19] 이브라힘 유세프는 1979년 알레포 남부의 알 라무시 포병학교에서 수니파의 봉기를 외치며 생도 83명을 학살한 무슬림 형제단 출신 테러 살인마이다. 알레포 도심에 포위된 반군 조직 누르 알딘 알 젠키 운동의 사령관이 하필 이 이브라힘 유세프의 아들인 야세르 유세프이다. 이슬람 과격파에게는 매우 상징이 큰 이름이다. 남부 알레포 공세를 이브라힘 유세프 작전으로 명명한 것은 4차 공세 때부터였다.[20] 상당히 어이없는 실책을 저질렀다. 알레포 전선에서의 방어시설 구축을 소홀히 하여 알 라무시 육군포병학교에서 방어진지라곤 정문의 일부 병력과 기지를 감싼 벽돌벽이 전부로, 벽돌벽을 무너트리고 돌입하자 사실상 무주공산 상태여서 불과 수십 명의 반군에게 돌입을 허용했고, 기관총좌 하나도 만들어놓지 않았다고 한다. 전투 초반 알 히크마 학교에 자폭차량 돌입을 허용한 것도 같은 실책 때문이라고 한다.[21] 이들은 터키군의 지원 하에 터키 영토를 통해 빙 돌아오는 수법을 쓴다.[22] 시리아 내전이 시작된 후 반군이 알레포에서 처음으로 점령한 곳이다.[23] 4년에 걸쳐 알레포를 장악했던 반군이 이토록 쉽게 붕괴된 이유는, 결국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장기간 반군 병력을 만 명 가까이 손실했으며, 무엇보다 식량이 떨어졌고, 또 시리아 내전 특성상 소수의 병력이 대규모의 화력을 투사하여 전투하는 방식인데 보급을 받지 못하여 화력을 이용한 방어가 불가능해진 것이 이유이다. 전선에는 최대한의 물자와 병력을 내보내 방어하지만 선이 한 곳이라도 뚫리면 중심을 방어할 능력이 없어져 크게 무너지는 것.[24] 알 라이 지역 자체는 유프라테스 방패에 탈환되었다.[25] 정확히는 외곽 지역으로, 일명 서부 지역, 병원 지역으로 불리는 곳이다. 터키군 14명이 하루만에 여기서 사망하는 참패를 겪기도 했다.[26] 난관인 타데프 시를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데이르 하페르 공세를 진행하면서 바로 점령하지 않았다.[27] 터키 에르도안 정부는 알 밥을 거쳐 데이르 하페르를 지나 IS 수도 라카를 점령하고, 데이르에르조르까지 점령하여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모조리 영유하겠다는 황당무계한 계획을 발표하였다. 타이거 부대의 기동은 복잡한 정치적 협상과 더불어 터키의 유프라테스 작전군의 기동을 차단하기 위한 포석에 해당된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28] 하지만 시리아 인권관측소(SOHR)의 보도에 따르면 협상을 거부한 IS 대원들이 알 밥 시내의 반정도에 흩어져 숨어있기 때문에 안정화에는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29] AFP 발표에 따름. 시리아 친정부 언론측에서는 ISIS 잔당이 잔존하는 전황도를 공개하였으며, 포위망 내부의 40여 개 마을은 7월 5일 완전히 점령하였다고 발표되었다.[30] 알 누스라 전선 시절부터의 사령관인 아부 무함마드 알 줄라니는 그 자신이 이라크 알 카에다 생활을 오래 해왔음에도 시리아 토종 단체인 알 누스라가 알 카에다에 충성을 맹세했다는 이유만으로 경원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다른 반군들이 터키나 미국의 지원을 받는데 가장 뛰어난 전투력을 갖춘 자신들이 지원에서 밀려난다는 것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알 카에다 물을 빼고 토종 이슬람 반군으로 이미지 변신을 꾀하고, 내부 알 카에다 세력들을 설득하여 이뤄낸 것이 2016년 7월 알 카에다 탈퇴 및 파타 알 샴 전선으로의 단체명 변경이었다. 하지만 이 노력에도 불구하고 알 카에다 색채를 빼지 못했으며, 2017년 1월 이들리브 이슬람 반군 간의 헤게모니 쟁탈전 때 아이러니하게도 알 카에다 정체성 때문에 아흐라르 알 샴을 비롯한 여러 이슬람 반군에서 인재들이 몰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2017년 1차 하마 전역 이후 계속된 패배 끝에 결국 타 반군과의 화해를 방해한다는 이유로 친 알 카에다 인사를 체포했으나, 내부 반발이 너무 심해서 도로 석방하였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 알 카에다 계열은 타흐리르 알 샴을 탈퇴하고 자이쉬 알 바디야, 준드 알 말라힘이라는 단체를 따로 만들었으며, 이들은 알 카에다로부터 시리아 공식 지부로 인정받았다. 타흐리르 알 샴은 이런 좌충우돌 끝에 터키와의 협력을 비로소 가능케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31] 하지만 반군이 철로를 죄다 뜯어서 터키에 고철로 팔아버리는 바람에 당장 열차 수송이 재개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32] 2월 9일자 지도이기는 하나 최후 전황과 차이가 없다.[33] 자이쉬 알 이슬람의 작전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이들리브에서 5000명의 병력을 잃고 IS에게 돈줄인 유전지대를 모조리 빼앗기고 탄약 재고량도 한계를 보이면서 정부는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 절망적인 상황은 러시아의 참전으로 비로소 해소된다. 자이쉬 알 이슬람의 선전은 정부의 위기에 잘 편승한 것이 크다.[34] 이때 칸 셰이쿤 지역을 거점으로 삼던 반군 조직 자이쉬 알 이자는 2000여 명의 조직원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친정부 SNS에 의해 대다수가 사망하고 500여 명밖에 남지 않았고 결국 해체를 결정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실제로는 대부분의 병력을 온존하고 탈출에 성공했다는 반군측의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이후 11월부터 벌어진 정부군의 마라트 알 누만 공세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나, 이들리브 새벽 작전에서 정부군에 대항해 여러 작전에 참여해 손실을 입은 것을 돌아보면 해체하지 않은 건 확실하나 상당한 손실을 입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35] 이 때 현장에서 취재하는 친정부 독립언론 ANNA뉴스에 의해 한국인 주민등록증이 발견되면서 한국인이 타흐리르 알 샴에 가입한 것이냐는 충격이 확산되었다가, 대한민국 외교부의 발표로 10년 전 분실된 신분증일 뿐 당사자는 지금도 잘 살고 있다는 확인이 이뤄지면서 짧은 해프닝으로 끝나게 되었다.[36] 터키 지원 반군의 한 달 월급은 300달러, 한국 돈으로 30만원 정도다. 인터뷰에 응한 리비아 파견 반군은 거액의 월급을 거론하며 "리비아가 좋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대의를 따르는 의용군이 아닌 용병화된 반군의 실체를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