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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1세/생애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콘스탄티누스 1세
1. 생애
1.1. 즉위 이전1.2. 4두정치의 혼란1.3. 제국 재통합
1.3.1. 서기 312년, 막센티우스와의 내전
1.3.1.1. 준비1.3.1.2. 알프스 산맥을 넘어 진격한 토리노 전투1.3.1.3. 베로나 공성전1.3.1.4. 막센티우스의 반응1.3.1.5. 312년 10월 로마 근교
1.3.2. 313년 막시미누스와 리키니우스 내전1.3.3. 리키니우스와 콘스탄티누스의 내전
1.3.3.1. 1차 내전1.3.3.2. 마르디아 전투1.3.3.3. 제국 통일1.3.3.4. 평화 협상
1.4. 단독 황제로서의 통치와 사망

1. 생애

1.1. 즉위 이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onstantine_Chiaramonti_Inv1749.jpg
4세기에 만든 흉상
콘스탄티누스는 272년(또는 273년) 2월 27일, 상 모이시아 속주의 나이수스에서 장군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플라비아 율리아 헬레나[1]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친 헬레나의 출신은 불분명하다. 후에 반대파가 콘스탄티누스를 창녀의 자식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였고, 콘스탄티누스의 단독 황제 즉위 후에는 정반대로 헬레나가 귀족 집안 출신이라는 프로파간다가 유포되기도 했으나, 대체로는 선술집 딸이었다는 전승이 사실에 가까울 것으로 보고 있다. 창녀까지는 아니더라도 썩 상류층 출신은 아닌 셈.

부친 콘스탄티우스는 292년 4두정치 성립 당시 서방 부제에 취임하면서 헬레나와 이혼하고, 서방 정제 막시미아누스의 딸 플라비아 막시미아나 테오도라와 정략결혼을 올렸다. 이 때 콘스탄티누스도 볼모 비슷한 처지가 되어 동방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휘하에서 복무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는 갓 스무살의 젊은 나이에도 디오클레티아누스 아래에서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드러내며 승승장구하였고, 특히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상당한 활약을 펼쳤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퇴위 후 새 부제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을 정도.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의 동반 은퇴로 부제였던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가 각각 동서방 정제로 등극하였고, 동시에 서방 부제에는 갈레리우스의 부하 장교 발레리우스 세베루스, 동방 부제로는 갈레리우스의 외조카인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임명되었다. 두 부제를 모두 자기 편으로 꽂아넣으면서 갈레리우스가 명실공히 제국의 최고 권력자로 올라선 것이다.

여담으로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의 능력을 꽤나 경계했다고 하며, 갈레리우스가 콘스탄티누스를 괴롭혔다는 일화도 꽤 남아있다. 결국 콘스탄티누스가 4두정치의 내재적 모순을 힘으로 해결해내고, 나아가 동방 천도와 기독교 공인 등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이후의 역사를 보면 갈레리우스의 사람 보는 안목은 꽤나 뛰어났던 듯 하다.

여하튼 갈레리우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후임 정제로 아나톨리아 지역을 물려받으며 이제 갈레리우스 밑에서 복무하는 불편한 처지가 된 콘스탄티누스는, 서방 정제로 취임한 부친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갈레리우스가 콘스탄티누스를 몹시 괴롭혔다는 일화의 신빙성은 높지 않지만, 갈레리우스가 콘스탄티누스의 군사적 재능을 높이 평가, 어떻게든 자신의 곁에 붙잡아두고 싶어한 것은 사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명목상으로나마 선임 정제인 콘스탄티우스의 아들이었고, 아들을 아버지 곁으로 돌려보내달라는 요청을 갈레리우스가 언제까지나 거부할 순 없었다.

"비잔티움 연대기"에서는 아예 콘스탄티누스가 갈레리우스의 동방 정제 치소였던 니코메디아에서 탈출해서 아버지가 있는 갈리아불로뉴로 도망쳤다고 묘사한다. 이게 사실이었다면 동방 정제의 눈을 피해 지중해를 따라 유럽을 통째로 가로지르는 대모험을 펼친 셈이다.

당시 콘스탄티우스는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넘어 약탈을 일삼는 픽트족 문제를 해결하고자 칼레도니아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돌아온 콘스탄티누스는 부친을 보좌하여 원정에 나섰는데, 원정길에 부친이 오늘날의 요크 인근에서 병사하고 만다. 원래 4두정의 원칙대로라면 부제가 정제 자리를 승계해야 하지만, 콘스탄티누스는 이를 무시하고 장병들의 추대를 받아 제위에 올랐다.[2]

콘스탄티우스의 서거로 유일한 정제가 된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를 서방 정제로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부제의 지위는 인정하면서 갈리아-브리타니아 전선을 담당하는 갈리아 군관구(Praefecture of Gallia)의 지휘를 맡겼다.[3]

당시의 갈리아-브리타니아는 면적은 넓어도 경제력은 타 속주에 미치지 못했고, 동시에 라인 강과 하드리아누스 방벽 너머의 이민족들이 호시탐탐 침략할 기회만 노리고 있는 험지였다. 그러나 1차 4두정에서도 이 지역은 서방 부제의 담당이었고, 콘스탄티누스에게는 부친이 물려준 영토이기도 했다. 일시적이나마 제국의 안정을 가져온 4두정 체제를 무시할 수 없었던 콘스탄티누스는 군말없이 부제 강등을 받아들였다.

1.2. 4두정치의 혼란

라인 강 방어선을 담당하게 된 콘스탄티누스는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을 수도로 삼아 306년부터 316년까지 10년 동안 게르만족의 침입을 방어하며 지역을 안정화시켰다. 당시 콘스탄티누스의 통치는 상당히 잔혹하여 포로로 잡은 이민족들을 죄다 원형경기장에 던져넣어 산 채로 사자밥으로 만들기도 했고, 로마사에서는 보기 드물게 적의 시체로 쌓은 기념비를 연출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본인은 사치와 향락에 빠지지 않았고, 내정 면에서 제법 성과를 거두어 속주민의 삶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다. 동 시대 다른 지역이 4두정치의 한계에 부딪혀 혼란에 빠져있던 것에 비하면 큰 성과였다.

제국에 혼란을 불러일으킨 것은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였다. 자신은 20년 가까이 재위했던 정제의 적자임에도 제위에 오르지 못했는데 반해, 채 2년도 안되는 기간 동안 정제를 지낸 콘스탄티우스 1세의 아들, 그것도 서자에 불과한 콘스탄티누스가 부제 자리에 오른 것에 불만을 품은 것이다.

막센티우스는 306년 10월, 4두정체에 불만을 품고 있던 원로원과 로마 시민[4], 그리고 디오클레티아누스발레리우스 세베루스에 의해 지속적으로 축소, 해체 정책에 시달려온 근위대의 지지를 받으며 봉기하였다. 여기에 막시미아누스까지 아들을 지원하고자 황제로 복귀하면서 자칭, 타칭 황제가 6명에 이르게 된다.

서방 정제였던 발레리우스 세베루스[5]가 진압에 나섰으나 막센티우스를 지원하고자 제위로 복귀한 막시미아누스에게 참패하였고, 라벤나로 퇴각하여 농성하던 중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막시미아누스의 모략에 넘어가 항복, 이후 로마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307년 9월) 당시 동방 정제이자 사실상 최선임 황제로서 이들을 중재해야 할 입장에 있던 갈레리우스가 이탈리아 원정에 나섰으나 막시미아누스-막센티우스 부자는 이 또한 격퇴했다. 4두정체가 존립의 기로에 놓인 것이다.

갈레리우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은퇴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등 전현직 황제들을 초청하여 카르눈툼에서 회담을 열었다. 회담 결과 갈레리우스의 친우인 리키니우스를 서방 정제로 선임하고, 발레리우스 세베루스를 살해한 죄로 막센티우스를 제국의 공적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부제가 정제로 승격한다는 원칙을 깨고, 딱히 내세울 경력이나 명성이 부족한 리키니우스를 단지 최선임 정제의 친구라는 이유로 정제 자리에 올린 것은 오히려 4두정의 존립 근거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게다가 혼자만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막센티우스가 회동 결과에 거세게 반발했다. 막시미아누스는 근위대가 도열해 있을 때 아들의 자줏빛 망토를 힘으로 벗겨 아들의 폐위를 시도했지만 근위대는 오히려 막센티우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실권을 잃은 막시미아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처럼 은퇴를 선언하고 일리리아에 은거하려 했으나 이마저도 갈레리우스가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막시미아누스는 트리어로 달아나서 자신의 딸인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와 콘스탄티누스를 결혼시키고, 콘스탄티누스를 아우구스투스로 선포하여 아들과 다른 4두정 황제들에게 빅엿을 먹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때 부제에서 정제로 승격된 셈이지만 당시에 콘스탄티누스가 이를 대대적으로 내세운 바는 없다. 나중에 막센티우스를 물리친 후 원로원이 정제로 선포하는 절차를 공식적으로 거친 것을 보면 콘스탄티누스도 막시미아누스의 일방적인 선언에 별 의미를 두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탈리아에서 황제를 자처하던 막센티우스의 입지를 흔들어놓기엔 충분했다.

한편 막시미아누스는 한동안 콘스탄티누스의 궁정에서 웃어른 대접을 받으며 지냈으나, 역시 난세의 군웅답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콘스탄티누스가 라인 강을 침범한 이민족을 처리하기 위해 출병한 사이 쿠데타를 시도했다.(310년) 그러나 이내 콘스탄티누스의 역공에 패배, 마실리아에서 자결을 강요받아 사망한다.[6] 공교롭게도 막시미아누스 일족은 세 이 모두 콘스탄티누스에게 살해당하게 된다.

그러던 311년,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가 병사하고 조카인 부제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동방 정제로 취임하였다. 당시 서방 정제 리키니우스는 슬금슬금 동방으로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서방에는 경쟁자가 콘스탄티누스, 막센티우스 둘인데 반해 동방에는 갈레리우스 사후 경쟁자가 다이아 하나 뿐이었는데다, 본거지인 일리리아도 동방과 가까웠던 터라 리키니우스로서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렇게 서방의 콘스탄티누스↔막센티우스, 동방의 리키니우스↔막시미누스 다이아의 구도가 뚜렷해지면서, 누가 누구와 손을 잡을지가 중요해졌다. 이 때 막센티우스의 선전포고를 받은 콘스탄티누스는 본래 서방 정제의 영역인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를[7] 점거하고 있는 막센티우스를 함께 몰아내자며 리키니우스에게 손을 내밀었고, 리키니우스가 이에 응하여 동맹이 성립되었다. 이에 콘스탄티누스의 이복동생 플라비아 율리아 콘스탄티아[8]와 리키니우스가 약혼했고, 둘은 군사적으로 급한 불을 끈 313년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나머지 둘, 즉 막센티우스와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이에 대항해 동맹을 맺으면서 내전은 2:2의 구도가 완성됐다.

1.3. 제국 재통합

311년 ~ 312년 초에 바로 위의 외교적 준비를 포함한 사전작업을 마치고 나서, 312년 여름 콘스탄티누스 1세는 우선 히스파니아 속주[9]를 손에 넣은 다음,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의 타우리노룸(토리노) 전투, 베로나 전투에서 막센티우스 군을 연파한 후 아퀼레이아, 라벤나를 접수하고 이탈리아 깊숙히 내려갔다. 거기서 그해 10월 28일[10] 유명한 밀비우스 다리 전투[11]에서 막센티우스를 전사[12]시키고 제국 서부를 평정했다. 이 전투는 프라이토리아니마지막 불꽃을 산화한 전투이기도 한데, 기록에 따르면 막센티우스가 전사하고 다른 아군들이 전부 도주하는 상황에서도 프라이토리아니는 위치를 사수하며 최후까지 저항하였다고 한다. 전투력의 쇠퇴와는 무관하게 마지막까지 근위대라는 자부심은 있었던 것이다.[13]
파일:Dream_of_Constantine_Milvius_BnF_MS_Gr510_fol440.jpg
Homilies of Gregory of Nazianzus의 비잔티움 필사본에 실린 그림. 콘스탄티누스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를 앞두고 십자가 꿈을 꾼 것, 밀비우스 다리에서의 전투, 콘스탄티누스의 모후인 헬레나가 발견한 십자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렇게 되어 콘스탄티누스 1세는 서방을 통일해서 한숨을 돌렸고, 로마 시 입성 후[14] 2달 반 동안 머물면서 전후처리를 했다. 그간 했던 일은, 기존의 성당 25곳에 후한 보조금을 줬던 것, 신축 성당에 대한 지원, 당시 로마 주교(현 교황의 전신) 멜키아데에게 라테라노 궁전을 기증하는 일[15] 등이 있었다. 해는 넘어가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 양측은 종전의 약혼을 이행하여 결혼식을 치렀고, 공식적으로 제국을 양분해 통치하게 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결과가 기독교의 공인으로 유명한 종교 관용 칙령, 즉 밀라노 칙령[16](313)이었다. 그러던 중 막시미누스 다이아보스포루스 해협을 넘어 리키니우스의 발칸 반도를 침공해왔다는 급보가 들어왔고, 리키니우스는 몇 달간에 걸쳐 그와 싸워 4월 30일 트라키아의 치랄룸(아드리아노폴리스 근교) 전투에서 크게 이긴 후, 8월에 다이아가 타르수스에서 자살함으로써 동방을 병탄했다.

그러나 이 제국 분할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암살 시도를 겪었는데, 그 암살자를 잡아서 문초해 보니까, 그 배후는 리키니우스의 부하로서 그에게 부제감으로 지목받던 인물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17] 또한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와의 접경지대인 아에모나(현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 있었던 콘스탄티누스 1세의 동상과 초상화를 파괴하도록 했다. 양측의 전쟁은 314년 10월 8일 키발라이 전투[18]로 시작해 316년 말~317년 초 마르디아 전투[19]를 거쳐, 317년 3월 1일[20] 세르디카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상당히 유리한 조건의 조약을 맺는 것으로 끝나게 되었는데, 그 조건은
  1. 트라키아를 제외한 유럽 속주 전역의[21] 할양,
  2. 얼마 전 316년 말에 세웠던 리키니우스의 부제 발레리우스 발렌스를 폐위 후 죽이고, 각자의 아들을 동서 양쪽의 부제로 세울 것[22],
  3. 같은 정제끼리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가 그중 선임황제[23]임을 인정할 것의 3개로, 즉 살려는 드릴게로 요약된다.

한편, 그 사이 315년에 로마 시[24]에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25]이 완공되었다. 그런데 거기에 쓰인 부조 장식은 사실 하드리아누스 등등 예전 로마 황제에게 헌정했던 기념물의 장식을 떼어다 재활용한 것이라고 한다.[26] 여기에 쓰여진 글귀는 이렇다고 한다.
폭군과 그의 무리를 상대로 한 정의로운 전쟁에서 위대한 정신으로 승리를 거둔 신성으로 가득한[27] 황제 플라비우스 콘스탄티누스에게 바치다.
ㅡ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314 ~ 317년 내내 싸우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316년 2월에 파우스타에게서 장남 콘스탄티누스 2세가 태어났고, 317년 8월 7일에 또 파우스타와의 사이에서 차남 콘스탄티우스 2세가 태어났는데, 그렇다면 315년 봄과 316년 가을에 하늘을 보고 별을 딴 것이 되므로 그렇게 볼 수 있다. 이후 양측은 7년여 동안 평화를 유지하며 이민족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데, 이때 콘스탄티누스 1세의 큰아들인 크리스푸스가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그 사이, 320년에, 리키니우스는 주교들의 종교회의를 전부 금지했고 주교와 사제를 다수 유배보냈으며, 자신의 부하들 중 기독교의 신이 아닌 다른 신에게 제사를 지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전부 쫓아냈다고 하는데, 이는 막시미누스 다이아 파 숙청과도 맞물려, 기독교인을 포함해서 제법 많은 사람들이 콘스탄티누스 1세 측으로 대거 이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콘스탄티누스 1세 측은 317년 세르디카 조약으로 획득한 테살로니카에서, 항구의 바닥을 깊게 파는 준설 공사까지 하면서 함선을 많이 건조했다.

하지만 일시적인 평화였고, 양측 모두 때와 명분을 기다리던 중 좋은 건수가 생겼는데, 국경 안으로 들어온 사르마티아인을 격퇴하던 중에 콘스탄티누스 1세 본인과 예하부대가 리키니우스령이었던 트라키아로 통지 없이 진입했던 것이다. 이게 확대되어 324년 양측은 다시 맞붙는다. 7월 3일 벌어진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28]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승리로 끝났고, 리키니우스 자신은 근처의 비잔티움에서 웅거하면서, 우세했던 해군력을 통해 소아시아 지역으로 콘스탄티누스군이 건너오는 걸 막으려 했다. 하지만 이 계획[29]다르다넬스(헬레스폰토스) 해협에서 크리스푸스에게 해군이 격파당하면서[30] 실패하고 진출을 허용하게 된다. 이후 9월 18일 보스포루스 해협 너머의 크리소폴리스에서[31] 콘스탄티누스군이 또 이기고 근처의 니코메디아에서 마침내 리키니우스의 항복을 받았다.[32] 리키니우스는 강제로 은퇴당했다가 1년여만에 고트족과 밀약을 맺었다는 이유로 처형된다. 리키니우스가 정략결혼이었을지언정 10년 이상 여동생과 결혼한 상태로 있었고 그 사이에 아이도 낳았기에 망정이지[33], 그렇지 않고 그냥 남이었으면 위의 녹색 외부 링크들을 보듯 10년에 걸쳐서, 이름붙어 역사에 남은 전투만 최소 5번인데, 1년 후도 아니고 바로 죽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1.3.1. 서기 312년, 막센티우스와의 내전

막센티우스가 마침내 콘스탄티누스의 모든 조각상을 부쉈다.

콘스탄티누스는 모욕을 받고도 전쟁을 피하기 위해 협상을 시도 했지만, 서방 제국 전역 통치권자라고 스스로 선포한 막센티우스가 갈리아를 침공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라에티아 방면에 대기시키자 망설이지 않고 콘스탄티누스도 전쟁을 개시했다.
1.3.1.1. 준비
막시미아누스의 명성을 존경하던 정예병이 그 아들 막센티우스에게 돌아섰고, 전쟁 준비를 미리 계획했던 막센티우스가 예전 규모로 근위대를 늘렸기에 8만 명의 대규모 부대로 이루어진 이탈리아 병력과 아프리카에서 징집한 40,000명의 무어인과 카르타고인, 그리고 시칠리아를 비롯한 각 지역에서 할당된 군사를 공급받아 총병력 17만 명에 기병 18,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는 보병 9만 명과 기병 80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막센티우스와는 달리 야만족의 침공에 대비해야 했던 처지였기에 라인강에 수비대를 남겨놔야 했고 그래서 전군의 삼분의 일 정도를 동원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다만 병력의 질이 크게 차이가 났는데, 로마의 목욕탕과 극장 및 향락에 젖어 있던 이탈리아 병사들과는 달리 콘스탄티누스의 군단들은 야만족에 맞서서 변경 지대를 지켜 왔기 때문에 힘든 복무 과정으로 정예화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1.3.1.2. 알프스 산맥을 넘어 진격한 토리노 전투
한니발에게 당했던 로마는 곳곳에 인공적인 요새를 축성해 모든 통로를 방어하고 있어 이탈리아로 접근하는 것이 쉽진 않았지만 산악 지대의 농민들이 협조적이었고, 계속해서 발전되어온 방대한 도로들이 군대를 전진시키는 데 큰 도움을 줬다.

피에몬트 평원까지 진격하는 상황에서, 막센티우스는 정보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콘스탄티누스는 도시 수사를 포위 공격하지 않고 단숨에 사다리를 내걸어 돌파했다.

소식을 들은 막센티우스의 장군이 40마일 떨어진 곳, 타우리노룸(토리노) 평원에서 대규모 군단을 집결시켰다. 막센티우스는 동방의 나라에서 수입해온 중기병대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밀집 종대형, 쐐기 모양으로 정렬시킨 후 대기했다.

그러나 상황을 파악한 콘스탄티누스는 병력을 대규모 정렬 대형으로 분리하여 전개한 후, 진격했고 대승했다. 패배한 막센티우스의 군대는 토리노로 도망쳤고, 대승한 콘스탄티누스는 황궁에 입성, 알프스 산맥과 포 강 사이에 있는 이탈리아의 모든 도시들의 통치권을 얻었다.
1.3.1.3. 베로나 공성전
그대로 진격할 수 있었지만 만일의 경우에 퇴로가 차단될 경우를 생각하여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의 또다른 부대를 향해 방향을 돌렸다. 목표는 베로나에 본부를 두고 있던 장군 루리키우스 폼페이아누스 였다. 자신으로 목표가 바뀌었다는 걸 깨달은 그는 즉시 대규모 기병대를 파견했으나, 브레시아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완파당했다. 곧장 베로나를 포위한 콘스탄티누스는 공성전을 전개했다.

도시 베로나는 서쪽의 좁은 반도형 지역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었고, 아디제 강의 급류에 둘러싸여 있어, 얼마든지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는 수비력이 좋은 도시였다. 콘스탄티누스는 도시 위쪽에 완만한 흐름의 아디제 강의 지점을 찾아낸 뒤 도강을 감행했다. 다만 여기선 콘스탄티누스도 상당한 고전을 했다. 폼페이아누스는 인병출격을 자주 활용하여 상당한 타격을 주었고, 결국 포위망을 돌파하여 베로나로부터 벗어나 원군을 구해온 다음 역포위를 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군에게 도전해왔다. 콘스탄티누스는 여기에서 재빨리 부대를 반분한다. 절반은 성을 포위하게 내버려두고 나머지 절반과 함께 빠르게 진군했는데, 콘스탄티누스는 폼페이아누스측의 수가 자신보다 많은 걸 알았기에 2전열을 줄이고 1전열을 늘려 적어도 처음의 맞상대에서는 병력이 대등했다. 날이 저물 무렵부터 밤새도록 백병전이 벌어졌고 콘스탄티누스 자신이 선두에 서서 닥치는 대로 적병을 격살했으며, 콘스탄티누스가 함께한 최정예 돌격대가 적 대열을 깨 들어가서 폼페이아누스를 격살했으며 이 참상을 본 베로나는 그 즉시 항복했다.
1.3.1.4. 막센티우스의 반응
이 시기 막센티우스의 태만함에 대해 부각하는 기독교측 사료는 다 믿기는 어렵다. 고대 로마의 생활양식에 따라 잠깐 여가를 즐기는 것에 대해서도 대단히 여유가 없어졌고 이런 억울한 사례로는 갈리에누스도 있는데, 막센티우스도 그런 모함에 걸려들었을 개연성은 매우 크다. 막센티우스는 여전히 콘스탄티누스보다 많은 동원가능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어 제3의 군대가 노련한 장교들의 손에 의해 편성되었다.

다만 회전에 대해선 다소 미적거렸음이 있었다는 지적은 믿을만하다. 군생활 경력 대부분을 거의 야전에서 보냈고 당대 로마제국 최고의 지휘관들(디오클레티아누스, 갈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아래에서 경험을 쌓은 바 있는 콘스탄티누스와는 달리, 막센티우스에겐 이렇다할 군 지휘 경력이 없었다.
1.3.1.5. 312년 10월 로마 근교
막센티우스는 식량 부족에 대비해 풍부한 군수 물자까지 확보해둔 상황이었고, 반면에 콘스탄티누스는 군수품의 부족으로 시간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시간 내로 해결하기 위해선 로마를 불태우거나 파괴에 가까운 상황까지 몰아붙여야 했다.

그러나 막센티우스는 로마에서 9마일 떨어진 삭사루브라 근방 평원에 진형을 갖추고 있었기에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는 테베레 강변까지 포함하는 배수진을 쳤고, 위험한 위치에 자신을 배치함으로써 사기를 끌어올렸다.

첫 공격은 막센티우스의 기병대를 향해 콘스탄티누스가 이끄는 선봉부대의 공격으로 시작됐다. 막센티우스의 기병대는 중기병이었고, 콘스탄티누스는 정예 경기병으로 이루어진 기동력이 충만한 기병대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중기병은 순식간에 격파됐다. 좌우익을 무너뜨리자 측면의 막센티우스의 보병대가 무방비 상대로 노출됐고, 그대로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그 이후 막센티우스의 전열이 완벽히 붕괴됐고, 그 단계에서 승패가 명확해지자 막센티우스군은 군기를 버리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프라이토리아니만큼은 끝까지 자리에 남아 명예를 지켰고, 이들은 그 자리를 죽음을 내걸고 사수했지만 다수가 사망하였으며 전투 능력을 상실한 나머지는 콘스탄티누스에게 항복했다.[34]

혼란이 확대되어 가는 와중 막센티우스 군의 수천이 테베레 강의 깊은 급류로 뛰어들었다. 황제 막센티우스도 밀비우스 다리를 건너려고 시도했으나 다리 위로 몰려든 수많은 병사들에게 밀려나 강물로 떨어져버렸다. 화려한 갑옷을 입고 있던 그는 갑옷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강 아래로 떠오르지 못한채 익사했다.

1.3.2. 313년 막시미누스와 리키니우스 내전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여동생인 콘스탄티아를 결혼시키기로 약속한 것인데 이 둘의 회담은 각자의 또 다른 전쟁 덕에 흐지부지해졌다. 콘스탄티누스는 프랑크족의 침입 때문에 라인 강으로 불려 갔고, 리키니우스는 막시미누스 2세 다이아의 공세로 즉시 전장으로 가야 했다.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비밀 동맹의 대상이었던 막센티우스의 죽음에도 개의치 않고 내전을 감행하기로 한다. 한겨울에 시리아에서 출발한 그의 군대는 비티니아의 변경 지대로 향했고, 곧 혹독한 날씨를 맞닥뜨린다. 수많은 말과 병사들이 눈에 파묻혀 죽었고, 줄기차게 내리는 눈비로 도로마저 끊긴다. 막시미누스는 강행군에 방해되는 보급품들을 후방에 남겨 놓을 수밖에 없었으나 이러한 작전 덕에 리키니우스가 공격 의도를 알아채기도 전 대규모 군대를 트라키아 보스포루스 해협에 데리고 올 수 있었다. 그의 군대는 11일간의 포위 공격 끝에 비잔티움의 항복을 받아 냈다.

이어 리키니우스가 29km 떨어진 지점에 진영을 설치한다. 막시미누스 다이아와 리키니우스는 협상으로 시간을 끌며 서로의 귀족을 배신케 하려고 노력한다. 결국, 협상이 깨지고 전면전을 준비하게 된다.

막시미누스는 7만 명의 정예병을 지휘하고 있었으나, 리키니우스는 3만 명뿐이었다. 그러나 전면전에서 승리한 건 리키니우스였다. 막시미누스는 엄청난 도주 속도로 하루 만에 257km 떨어진 니코메디아로 도망쳤다. 아시아의 부가 여전히 상당했기에 시간적 여유만 있다면 다시 재기할 수 있을 만한 병력을 모았을 것이나 이 전투 후 3~4개월 뒤에 타르수스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그에겐 두 자녀가 남아있었는데 8세가량의 아들과 7세가량의 딸로, 자비를 베푸는 게 당시 관습이었지만, 리키니우스는 둘 다 사형시켰다.

1.3.3. 리키니우스와 콘스탄티누스의 내전

로마는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가 양분하여, 서방과 동방을 나눠 지배하게 되었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동맹 관계였던 둘은 겉으론 괜찮아 보였지만 막시미누스가 사망한 지 1년도 채 못 가서 서로에게 무기를 겨누게 된다.

콘스탄티누스는 여동생 아나스타시아를 명문가 출신인 바시아누스와 결혼시키고 그를 부황제로 등용하게 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정한 통치 체제에 따르자면, 이탈리아와 아프리카까지 그의 관할 구역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규칙은 오랫동안 이행되지 않았고 그러한 와중에 리키니우스가 바시아누스에게 서신을 보내어 얻어낼 수 없다면 군사적으로 얻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를 부추긴다. 다만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음모를 간파한 콘스탄티누스가 바시아누스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그를 처형한다. 바시아누스의 형제인 세라키오는 리키니우스의 영토로 도주했는데, 리키니우스는 세라키오의 신병을 인도하라는 콘스탄티누스의 요청을 거부한다.

그 와중에 콘스탄티누스는 암살 시도를 겪었는데, 그 암살자를 잡아서 문초해보니까, 그 배후는 리키니우스의 부하로서 그에게 부제감으로 지목받던 인물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35] 또한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와의 접경지대인 아에모나(현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 있었던 콘스탄티누스의 동상과 초상화를 파괴하도록 했다.
1.3.3.1. 1차 내전
최초의 전투는 판노니아의 시르미움으로부터 약 80km 위쪽에 있던 키발라이 부근 (오늘날 크로아티아)에서 벌어졌다.(314. 10. 8) 갑작스러운 전투로 서방 병력은 2만 명이었고, 동방 병력은 3만 5천에 불과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콘스탄티누스는 가파른 언덕과 늪지대 사이에 있는 폭 800m의 좁은 길목에 포진한 후 그 위치에서 첫 번째 공격을 받고 격퇴한다.

이후 확실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 적을 추격하여 평원으로 나간다. 다시 군대를 정비한 양측 군대가 집결상태로 서로 대치했고 곧 화살을 퍼붓는다. 화살이 바닥나자 창검이 동원된 백병전이 이어졌다. 동틀 무렵부터 저녁까지 승패가 보이지 않는 전투가 계속된 끝에 콘스탄티누스가 이끄는 우익이 돌격을 감행한다. 리키니우스는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퇴각을 다시 명령해 전군이 궤멸당하는것은 피하게 된다. 다시 진을 친 리키니우스는 하룻밤조차도 위험하다고 판단해 진지와 군수 물자를 모두 버리고 휘하 기병대를 이끌며 신속하게 더 후방으로 도주하게 된다. 덕분에 아내와 아들을 빼앗기지 않은 그는 사바강의 다리를 파괴한 후 다키아와 트라키아로 돌아가 새 군대를 모집했다.
1.3.3.2. 마르디아 전투
두 번째 전투는 316년 말~317년 초 마르디아 평원 (오늘날 불가리아)에서 벌어졌다.

콘스탄티누스는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고지를 점령하고 있다가 전투가 한창일 때 적의 배후를 공격하여 대승리를 거둔다. 리키니우스의 군대는 이중 전선을 펴고 진지를 사수하다가 밤이 되어 전투가 끝나자 마케도니아의 산악 지대로 퇴각했다. 두 차례 전투에서 정예병을 모두 잃은 리키니우스는 화평을 청한다. 리키니우스의 부황제인 발렌스가 찾아갔으나 콘스탄티누스는 분노하고 노예인 그가 부황제에서 박탈되는 것이 강화 조건의 첫 번째여야 할 것이라고 말해 발렌스는 재위 며칠 만에 부황제에서 퇴출당하고 곧장 숙청된다.

이후 317년 3월 1일 콘스탄티누스와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됐다. 그 조건은

즉, 살려주는 대신 그의 팔다리를 뽑는거나 마찬가지인 조건을 내세운 것이다. 비록 대략 7~8년간 양측간에서 큰 충돌은 없는 일시적인 평화 타임이였지만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를 매우 경계하면서 호시탐탐 집어 삼킬 때를 기다렸고 리키니우스는 힘을 모아서 설욕의 기회를 노렸다.
1.3.3.3. 제국 통일
양측 모두 때와 명분을 기다리던 중 좋은 건수가 생겼는데, 국경 안으로 들어온 사르마티아인을 격퇴하던 중에 콘스탄티누스 본인과 예하부대가 리키니우스령이었던 트라키아로 통지 없이 진입했다. 이게 확대되어 324년 양측은 다시 맞붙는다.

7월 3일 하드리아노폴리스에서 대군을 이끌고 대항했으나[38] 패배하여 비잔티움으로 퇴각한다. 자신은 근처의 비잔티움에서 웅거하면서, 부관 마르티니아누스를 서방의 정제로 세운 뒤 우세했던 해군을 맡겨 적군이 소아시아로 넘어오지 못하게 다르다넬스(헬레스폰토스) 해협에서 해전을 벌이게 했지만,[39] 콘스탄티누스의 아들 크리스푸스의 분전으로 또 패배하고 만다. 그래서 소아시아로 넘어오는 것을 허용하고, 9월 18일 보스포루스 해협 너머의 크리소폴리스에서[40] 다시 한 번 대패하고 나서 근처의 니코메디아로 도주한 뒤 항복한다. 본래 리키니우스가 원래는 더 싸워보려고 했지만, 아내이자 콘스탄티누스의 이복동생인 콘스탄티아가 이제 그만 싸우고 항복해야 목숨은 건질 수 있다고 해서 그 말대로 항복했다고 한다.
1.3.3.4. 평화 협상
어쨌든 이러한 장기간의 내전 끝에 콘스탄티누스는 4두정치의 (어떻게 보면 예정된)실패로 인해 초래된 장기간의 내전을 끝마치고 324년, 제국 유일의 황제로 군림하게 되었다.

경쟁자였던 리키니우스의 사후처리가 매우 냉혹했는데 항복할 때는 정략결혼이었을지언정 인척이기도 해서 정에 호소해서 신변보장을 받았지만, 테살로니카에서 유폐생활 중 325년에 고트족과 내통한다는 명목으로 처형했다.

1.4. 단독 황제로서의 통치와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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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요크[41]에 있는 콘스탄티누스의 석상. 밑에 써 있는 글씨는 'CONSTANTINE BY THIS SIGN CONQUER', 즉 밀비우스 다리 전투 전에 봤다는 글귀의 영어 번역이다.

로마 제국 전역을 통틀어 유일무이한 황제의 직위에 오른 콘스탄티누스는, 이후 13년 동안 로마 제국의 체제를 시대에 맞게 개혁하면서 통치한다.

그의 통치 기간에 주목해야할 사건들은 아리우스파를 공식적으로 부정하여 이후 기독교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꿔놓은 제1차 니케아 공의회(서기 325년)가 있었다. 그러나 정작 콘스탄티누스는 아리우스파에 우호적이었다. 공의회에서 아타나시우스파가 다수였기에 콘스탄티누스는 일단 그들의 결정 사항을 인정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말년으로 갈수록 아리우스파에 더 기울었다.[42] 로마 제국에서는 이단으로 지목된 아리우스파가 더 우대되고 정통으로 인정받은 아타나시우스파가 억압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콘스탄티누스는 심지어 아타나시우스를 유배보내기도 했다.[43] 이러한 상황은 콘스탄티누스의 후계자 시절에도 한동안 이어졌다.

공의회 직후인 326년에는 황실 내부의 큰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큰아들이자 내전 승리의 일등공신인 크리스푸스가 무자비한 고문 끝에 처형당하게 된 것. 공식적인 크리스푸스의 처형 사유는 콘스탄티누스의 후처인 파우스타와의 불륜 관계. 크리스푸스 사후 몇 개월 뒤에 파우스타 역시 뜨거운 욕탕에서 처형당했다. 그리고 그 둘은 'Damnatio memoriae' 즉 기록말살형을 받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1. 콘스탄티누스는 이 사건 이후로도 11년을 더 살다 갔는데, 그 동안 둘 중 어느 한쪽의 기록말살형도 취소하지 않았다는 점과,
2. 콘스탄티누스 사후 파우스타의 소생 3형제가 즉위한 후에도, (이복형 크리스푸스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 세 아들 중 아무도 친어머니 파우스타의 기록말살형을 취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극적인 잔혹한 가족사에 대해서 여러가지 엇갈린 견해가 많다. 설마 제국을 운영하는데 부제가 절실히 필요한데 죽였겠냐는 주장과 콘스탄티누스가 장성하고 군공이 큰 맏아들을 정적으로 여겨 일찌감치 정치적으로 필요성이 떨어진 후처인 파우스타와 엮여서 오명을 씌우고 숙청했다거나. 어느쪽이든 은밀히 뜬금없이 쓱싹 제거한 음침한 느낌이 매우 짙으니 의혹 또한 오늘날까지 추론을 하게 됐다.

한편 콘스탄티누스는 이런저런 가정사의 불행에도 불구하고, 스케일이 크고 아름다운 웅장한 대업을 계획하고 있었다. '새로운 로마(Roma Nova, 영어로는 어순이 바뀌어 우리에게 보다 익숙한 어순인 New Rome)[44]'라는 이름의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이미 324년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시를 새로운 수도로 삼겠다 공언한 바 있었고,[45] 6년간의 공사 끝에 330년 완성시켜서 5월 11일에 공식 완성 선포와 함께 봉헌했다. 덕분에 상당히 날림 공사가 이루어져 건물들이 꽤 자주 무너졌다고 한다. 원래부터 지진이 잦은 지역이므로 건물을 더 튼튼하게 지어도 모자랄 판국에…[46] 실제로 아틸라가 콘스탄티노폴리스 근처로 접근했을 때 마침 지진에 성벽이 무너져서 동로마 고관들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어 주는 일도 있었다. 이것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시초였다.

새로운 수도라고 해서 기반 시설을 다 만든 게 아니라 필요건축물들만 만들었고 대신 제국 각지의 유명건축물들에게서 석재와 예술품을 가져와 장식했다. 고대 이집트파라오가 전왕조 파라오의 신전 조각상 묘지의 부장품을 훔쳐서 사용한 것처럼.[47] 현재 알려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영역은 테오도시우스 2세가 삼중 성벽을 쌓으면서 넓어진 것으로 원래는 조금 더 좁았는데, 콘스탄티누스 자신이 직접 창을 가지고 땅에 그은 선을 따라 성벽을 쌓았었다고 전한다.

이후 331년 사르마티아족과 고트족 사이의 분쟁에 개입해 재차 고트 전쟁이 벌어졌으며, 초기엔 모에시아 속주 일대가 약탈당하고 전투에서 패하기도 했지만 다시 이를 역전해 고트족을 격파하고, 원정대를 크림 반도로 파견해 케르소네수스인들의 협력을 받아 고트족의 본토라 할 수 있는 우크라이나 일대까지 공세를 가한 후 332년 평화협정을 맺었으며, 사르마티아족 역시 마찬가지로 굴복시키고 334년 이들을 속주 일대에 사민했다.(콘스탄티누스의 고트족과 사르마티아 원정) 이렇게 콘스탄티누스가 부제 시절인 306년부터 30년에 걸쳐 사르마티아인과 게르만 제종족을 상대했던 것에 대해서 다루는 영어 위키백과 문서가 따로 있다. German and Sarmatian campaigns of Constantine

333년 또는 334년, 키프로스 섬에서 양떼를 관리하던 칼로카에루스가 황제를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콘스탄티누스의 이복동생 플라비우스 달마티우스가 출동하여 칼로카에루스 일당을 체포해 재판에 회부하였고, 칼로카에루스는 산채로 불태워졌다.

콘스탄티누스는 336년 재위 30주년 기념 축전을 열었으나 10달 후인 337년 5월에 사망했다. 죽기 딱 하루 전인 5월 21일, 에우세비우스[48]에게 세례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당시 기독교인들의 전례를 따른 것으로 죽기 직전까지 세례를 받는 것을 미루어서 현세의 원죄와 본죄를 모두 씻고 죽자마자 천국에 곧바로 가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사망할 때 그는 제국을 자식들에게 나누어 통치하게 했는데, 4두정치의 장점인 업무의 분담은 유지하면서 결점인 제국이 분할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피해 보려고 했던 것 같다. 허나 그가 계획했던 사후대책은 그가 죽자마자 일부 지역의 통치권을 인정받았던 그의 조카들이 그의 세 아들들에게 피살되고(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족 학살 사건) 뒤이어 세 아들들까지 서로 내전을 벌이면서 상당히 차질을 빚는다.

그의 사후 제국 황제의 직위는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스,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상속된다.

[1] 가톨릭과 정교회의 성인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못박혔던 성십자가를 발굴해낸 것으로 유명하다. 성십자가는 예루살렘에 보관해오다가 사산조 페르시아의 호스로 2세에게 약탈당했으나, 이라클리오스가 되찾아오게 된다.[2] 콘스탄티누스가 동방에서 돌아와 부친 휘하 장병들과 보낸 시간이 1년 남짓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그 사이 장병들의 지지를 이끌어내 황제 자리까지 오른 콘스탄티누스의 정치력이 대단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3] 동시대의 기독교 저술가 락탄티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가 갈레리우스에게 자신의 정제 취임 보고와 함께 정제의 복장을 입고 월계관까지 풀세팅한 자신의 초상화를 같이 보냈다고 한다. 갈레리우스는 분노하여 초상화를 불 속에 던져 버렸는데, 측근들의 간곡한 설득으로 겨우 분노를 진정시키고 부제 지위를 인정했다고 한다.[4] 원로원 의원들은 전적으로 고위급 군 지휘관들의 합의로 결정되는 정제, 부제 선임 과정에서 소외된 것에 불만을 품었다. 로마 시민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본국 이탈리아를 일반 속주와 동등한 지위로 격하시킨데 이어, 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로마 시의 면세 특권마저 폐지할 것이라는 소문에 폭발했다.[5] 막시미아누스의 퇴임 이후 서방 부제로 임명되었다가 콘스탄티우스 1세가 병사하면서 정제로 승격하였다.[6] <비잔티움 연대기>에 따르면, 정략결혼이었건 어쨌건 간에 장인을 자기 손으로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로 귀의하게 된 요인 중 하나라고 한다. 물론 전형적인 난세의 인물이었던 콘스탄티누스의 행적을 보면 신빙성은 0에 가까운 소리다.[7] 지금과 달리 농업 생산성이 괜찮았던 당시의 북아프리카는 본국 이탈리아의 만성적인 식량 부족을 해소해주는 중요한 곡물 산지였으며, 군사적으로도 시칠리아와 지척으로 이탈리아 본토의 방어에 필수적인 중요 거점이었다. 북아프리카 세력이 이탈리아 세력과 적대하였을 때의 양상은 고대의 포에니 전쟁반달 왕국로마 약탈, 그리고 중근세의 바르바리 해적이 잘 보여준다.[8] 테오도라의 딸로, 아리우스파 기독교 신자였다. 교회사가 에우세비우스도 콘스탄티아의 소개로 콘스탄티누스를 접견할 수 있었다.[9] 본디는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가 아우구스투스로 승격할 때 받았던 속주였는데, 콘스탄티누스 1세가 콘스탄티우스 1세를 승계하는 과정에서 그 속주는 발레리우스 세베루스에게 넘겨줘야 했다. 막센티우스가 세베루스를 죽이면서 그 속주를 도매금으로 집어삼켰던 만큼, 콘스탄티누스 1세로선 불법 카이사르 따위가 차지하던 거긴 원래 내 꺼였다는 명분도 있었다.[10] 공교롭게도 막센티우스가 로마 시에서 추대받은 지 정확히 만으로 6년이 되는 날이었다.[11] 콘스탄티누스가 십자가를 본 일화가 유명하다. 이 일화에 따르면 전투를 치르기 전 어느날 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막사에서 꿈을 꾸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빛나는 십자가가 나타나더니 '이 표시로 너는 승리할 것이다(In hoc signo vinces)'라는 글자를 보게 된다. 꿈에서 깬 황제는 이 꿈에서 본 십자가 모양의 군기를 만들어 앞장세워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 전승이 기록된 <콘스탄티누스의 생애>을 쓴 에우세비우스는 황제 본인으로부터 이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맹세까지 받았다고 증언했다. 후에 17세기 계몽 시기에 이르러 이 일화의 사실성에 대해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12] 따지자면 퇴각하다가 테베레 강(로마 시의 젖줄인 그 강이 맞는다.)에 빠져 익사했는데, 강물과 다리 자체가 전장이었으므로 사고사라기보다는 전사로 보는 것이 더 맞다. 바다나 강에서 선박끼리 해전을 치르다가 물에 빠져 죽은 것을 사고사가 아니라 전사로 보는 것과 같다.[13] 한편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시에 입성하여 막센티우스의 어린 두 아들을 처형하도록 명령했다는 기번, 그리고 시오노 나나미의 서술은 그냥 틀린 얘기다. 막센티우스의 큰 아들은 밀비우스 다리 전투 훨씬 전(309년)에 죽었고, 둘째 아들은 콘스탄티누스 1세측이 죽였는지가 확실치 않다. 다만 막센티우스는 죽은 뒤에도 콘스탄티누스 1세의 로마 입성 행진에서 시신이 창에 꿰였고 또 그게 경고의 의미로 북아프리카로 보내지는 등 험한 꼴을 당한 건 사실이다.[14] 그런데 이때 입성하면서, 유피테르 신에 대해서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거부했다고 한다. 수백 년간 유지되어 왔었던 관습인데 그걸 거부했던 것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보인다.[15]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이날 11월 9일라테라노 대성당의 봉헌 축일로 기리고 있다. 이는 국교화의 발단이 되며, 지금도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명목상으로 높은 위상을 가지는 근거가 된다.[16] 통념과 달리, 발표는 동방 아나톨리아의 니코메디아에서 했다. 20년 넘게 제국 전역의 선임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정이 니코메디아였기 때문이다. 발표는 6월 13일로 2월 3일에 비해서 꽤나 늦게 했는데, 그 사이 벌어진 막시미누스 다이아와 리키니우스의 내전 때문으로 보인다.[17] <비잔티움 연대기> 의거, 뒤에 전투 후 제거하는 발레리우스 발렌스로 추정된다.[18] 오늘날의 크로아티아라고 하니 발칸 반도의 거의 북서부 끝이다.[19] 트라키아 소속, 오늘날의 불가리아 땅이라고 하니 북트라키아. 발칸 반도의 북동부[20] 전투는 진작에 다 끝났는데, 날짜를 일부러 아버지가 부제로 지명되어 24년 전(293년) 황제 커리어를 시작했던 이 날로 잡았다고 한다.[21] 아카이아와 마케도니아, 즉 그리스 지역도 포함된다. 후대의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들들인 콘스탄스콘스탄티우스 2세도 마찬가지의 구도가 되었었다. 하지만 콘스탄스는 쿠데타로 이내 죽었지만 콘스탄티우스 2세는 좀 더 오래 살다가 자연사했다.[22] 그런데 여기서도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들은 2명[49], 리키니우스의 아들은 1명으로 불평등했고, 리키니우스의 아들도 콘스탄티아의 소생이라 사실은 위에서 보듯 콘스탄티누스 1세의 조카였다. 남남에 능력있을지 모르는 발레리우스 발렌스를 아예 자기 혈육이기도 한 미성년자로 대체한 것. 하지만 리키니우스를 평정하자, 이용가치가 없어진 이 불쌍한 조카는 나중에 크리스푸스를 죽일 때 엮여서 같이 죽는다.[23] 마치 예전의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같이.[24] 정확히는 콜로세움과 팔라티노 언덕 사이.[25] 위에 나온 하나님의 계시와 밀비우스 다리 전투의 장면이 새겨져 있다.[26] 여기에 대해서 에드워드 기번은 예술의 쇠퇴를 말해주는 우울한 증거이자 비천한 허영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표라고 깠고, 시오노 나나미는 패치워크 개선문이라고 깠다.[27] instinctu divinitatis. <비잔티움 연대기>에 의하면, 종래의 로마 다신교일신교를 아우를 수 있도록 일부러 '신성' 정도로 모호하게 썼다고 한다.[28] 대규모의 물량전이었는데 콘스탄티누스 군이 13만 명, 리키니우스 군이 16만 5천 명, 양측 합쳐 거의 30만 명이 싸웠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고트족에게 발렌스 황제가 패사한 전투와는 다르다.[29] 이 계획 자체는 완벽했다. 그 증거로 원래 콘스탄티누스 1세는 세르디카, 니코메디아 등을 새 수도로 삼으려고 했으나, 이 전투로 새 수도 후보를 비잔티움으로 바꾸게 된다.[30] 콘스탄티누스 군은 갤리선 200척+수송선 2000척, 리키니우스 군은 갤리선 350척. 그런데 전장이 수적 우위를 살리기 어려운 곳이었다고 한다.[31] 칼케돈의 바로 옆, 비잔티움(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바로 건너.[32] 리키니우스가 원래는 더 싸워보려고 했지만, (동방 제국이 좀 넓은가?) 아내이자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복동생인 콘스탄티아가 이제 그만 싸우고 항복해야 목숨은 건질 수 있다고 해서 그 말대로 항복했다고 한다.[33] 그래서 콘스탄티아가 구명 간청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남편과 아들이 다 죽게 되자 오빠 콘스탄티누스는 그저 정략결혼의 수단으로 이용했다가 인생이 꼬인 여동생을 동정하여 궁정에 데려와 같이 살았고, 또한 'Constantia Soror Constantini AVG[50](콘스탄티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누이)'라는 글귀를 새긴 주화를 새겨 줌으로써 마음을 달래려 노력했다고 한다.[34] 놀랍게도, 이들의 분전에 감동한 콘스탄티누스가 이들 모두를 살려주기로 결단을 내리게 된다![35] <비잔티움 연대기> 의거, 뒤에 전투 후 제거하는 발레리우스 발렌스로 추정된다.[36] 우리가 알고 있는 동서로마 분할 시점의 동로마의 판도에서, 트라키아만 빼고, 그리스를 포함한 나머지 유럽 전체가 빠져서 서쪽의 땅이라고 보면 된다. 후대의 콘스탄티누스의 아들들인 콘스탄스콘스탄티우스 2세도 마찬가지의 구도가 되었었다. 하지만 콘스탄스는 쿠데타로 이내 죽었지만 콘스탄티우스 2세는 좀 더 오래 살다가 자연사했다.[37] 그런데 여기서도 콘스탄티누스의 아들은 2명[51], 리키니우스의 아들 리키니우스 2세는 1명으로 불평등했고, 리키니우스의 아들도 콘스탄티아의 소생이라 사실은 콘스탄티누스의 조카였다. 능력있을지 모르는 발레리우스 발렌스를 아예 자기 혈육이기도 한 미성년자로 대체한 것. 하지만 리키니우스를 평정하자, 이용가치가 없어진 이 불쌍한 조카는 나중에 크리스푸스를 죽일 때 엮여서 같이 죽는다.[38] 대규모의 물량전이었는데 콘스탄티누스 군이 13만 명과 리키니우스 군이 16만 5천명, 양측 합쳐 거의 30만명이 싸웠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고트족에게 발렌스 황제가 패사한 전투와는 다르다.[39] 콘스탄티누스 군은 갤리선 200척+수송선 2000척이었고, 리키니우스 군은 갤리선 350척. 그러나 전장이 수적 우위를 살리기 어려운 곳이었다고 한다.[40] 칼케돈의 바로 옆, 비잔티움(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바로 건너.[41] 위에서 보듯 아버지의 타계로 콘스탄티누스가 황제 커리어를 시작한 곳이다.[42] 위에 나온 나중에 자신에 대한 전기문을 쓸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와의 친교 때문으로 보인다.[43] 뜻인즉, 황제인 자신이 엄연히 있는데, 공의회에서의 승리를 가지고 주제넘게 너무 위세부리지 말라는 것.[44] '새로운 로마'는 공식 명칭이고 그보다는 애칭인 콘스탄티노폴리스.[45] 다만 처음 새 수도로 고려하던 곳은 그의 고향 나이수스와 가까운 세르디카(Serdica, 오늘날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였고, 또 동방 정제의 수도이자 제국 동부의 대도시였던 니코메디아 또한 고려 대상이었다.[46] 실제로 이곳과 주변지역(마르마라 해, 칼케돈, 다르다넬스 해협, 갈리폴리, 트라키아, 비티니아 등)에는 지진이 많이 일어났었다.[47] 다만, 후세에는 크게 평가받을지는 몰라도 당시 제국 재정상 이유로는 상당한 낭비였다. 콘스탄티누스가 바라던 조건으로는 기존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4분 통치 시절 상당히 규모를 키워놓은 니코메디아도 여러 모로 부합했었다. 콘스탄티누스 본인 또한 비잔티움의 로마 노바 건설이 완료될 때까지 니코메디아에서 정무를 보고 건설을 지휘하였으며 사망한 곳 또한 로마 노바가 아닌 니코메디아의 저택이었다.[48] 위에 나온 사후 전기문을 쓴 에우세비우스 맞다. 아리우스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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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제1처 소생의 크리스푸스, 제2처 파우스타 소생의 장남 콘스탄티누스 2세. 크리스푸스는 조약 후 바로 이민족과의 전쟁에 종군했고, 연이어 리키니우스와의 마지막 내전에서 해군을 책임졌을 정도로 장성했는데 비해(불확실하지만 아무리 늦어도 305년생), 콘스탄티누스 2세는 갓난아기인 작년(316년)생이었다. 그런데도 나란히 지명받은 것은, 정치적 안배의 결과였다. 크리스푸스의 어머니 미네르비나는 첩이라는 의혹도 있는 데다가 결정적으로 307년에 진작 죽은 반면, 파우스타는 살아 있기 때문이었다. 기록도 제대로 안 남고 첩 의혹까지 있는 미네르비나보다 황제 막시미아누스의 딸인 파우스타가 출신배경이 더 좋은 것과 통한다.[50] Augustus, AVG는 그 약자, 당시에는 라틴어에 U가 없었고 그 자리에 전부 V를 썼다.[51] 제1처 소생의 크리스푸스, 제2처 파우스타 소생의 장남 콘스탄티누스 2세. 자세한 것은 콘스탄티누스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