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황제가 되기 전
1.1. 출생
칼리굴라는 별명으로 그의 이름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이다. 그는 티베리우스의 친동생 대(大) 드루수스(네로 드루수스)의 손자로, 드루수스의 장남 게르마니쿠스의 다섯째 아들이자 살아남은 세 아들 중 막내아들이다.칼리굴라의 아그노멘이자, 그의 선친 게르마니쿠스의 프라이노멘으로 쓰인 게르마니쿠스는 칼리굴라의 조부 대 드루수스가 현직 집정관이던 당시인 기원전 9년 개선식을 양부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원로원에게 만장일치로 선사받을 때, 원로원에서 게르마니아 전쟁 승리에 대한 보답으로 부여해 사용하던 이름이다. 또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가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요절한 서기 4년 1월 이후, 여름이 되어 티베리우스를 정식 입양하고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개명절차를 진행시킬 때, 아우구스투스 가문을 선포하면서,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의 직계를 상징한 또 다른 코그노멘이자 아그노멘으로 삼은 자랑스러운 정통성 있는 집안 성씨였다.
할아버지 대 드루수스는 만약 기원전 9년 29살의 나이에 사고로 요절하지 않았다면, 개선식 직후 정식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공식 입양되어, 차기 황제로 등극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가 결혼한지 3개월 만에 태어났고, 당시 옥타비아누스가 드루수스 친부와의 약속을 어기고 본인이 키우면서 걸음마 때까지 키우다가, 그의 친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호소해 친부 곁으로 떠난 일을 겪었다.[1] 그럼에도 옥타비아누스는 드루수스를 거의 매일 만났고,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병사하자마자 가장 먼저 사람을 보내 그를 우선 데리고 와서 손수 키우고 각별히 아꼈다. 그래서 드루수스가 태어났을 때 로마인들 사이에서 ‘옥타비아누스와 리비아의 간통으로 태어난 아들’이라는 소문이 퍼졌고, 풍자시까지 나왔다. 또 내전 당시 옥타비아누스가 드루수스를 티베리우스보다 우선 사저로 데리고 왔고, 이후에도 곁에 끼고 사랑을 베풀어, 놀랍게도 로마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 소문이 사실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관해 아우구스투스는 이를 긍정, 부정하지 않았고, 드루수스를 "내 아들"이라고 당연하게 부르고, 자신의 가문 행사에 아들로 참석시켰다. 또 그에게 남들보다 5년 이상 빨리 모든 공직에 취임할 특권을 부여하면서도, 그의 위치를 친조카 마르켈루스와 같게 부여하고, 드루수스의 친형 티베리우스보다 좋은 위치를 부여했다. 드루수스는 양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의 막내사위였기 때문에 친형 티베리우스와 달리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사위였고,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이자 외손자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아주 어릴 때 그의 딸 리빌라와 결혼이 결정돼, 아우구스투스 사후 징검다리 후계자가 되더라도 차기 황제를 사실상 보장받은 상태였다. 그는 23살의 젊은 나이에 갈리아 전역 총독 자리를 양부 아우구스투스의 결정으로 차지했고, 아우구스투스를 대신해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드루수스"라는 이름 아래 갈리아 부족장들과 북이탈리아 유지들을 모아 회의를 진행하고, 아우구스투스 아들 자격으로 충성을 받아낸 사람이었다. 특히, 게르마니아 전쟁을 지휘한 야전 사령관 중 게르만족들까지도 거의 정복될 뻔했다고 평가할 만큼, 뛰어난 군공을 세운 경력은 어떤 당대 로마 장군보다 우수했다. 그는 친형 티베리우스에게 명을 내려, 로마군의 판노니아 속주 토대를 마련했고,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와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일대 장악을 완성했다. 또 로마인 최초로 해군을 이끌고 북해를 항해해, 독일 북부와 덴마크 서남부 상륙 후 마그나 게르마니아 중앙까지 진군해, 무수한 적을 무찌르고, 여러 게르만족 부족장들에게 항복을 받거나, 그들의 친족들을 로마 유학이라는 이름 아래 로마 제국으로 끌고 갔다. 그래서 그는 라인강과 도나우강에 주둔한 8개 군단 병사와 가족들에게 군신(軍神) 대접을 서기 3세기 말까지 받았다.
이런 드루수스의 아들로, 선친의 뒤를 이어 게르마니아를 공략했던 영웅은 칼리굴라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이다. 게르마니쿠스는 대 드루수스와 아우구스투스의 조카 소 안토니아 부부의 첫째 아이이자 장남이다. 옥타비아의 외손자,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손자이며 아우구스투스의 외종손[2]이다. 그의 막내 동생은 칼리굴라 암살 후 정국 혼란을 수습한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이다. 그는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생전에 이미 동생 클라우디우스와 함께 일찌감치 아우구스투스의 조치로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황족으로 필요한 교육을 받았고,[3]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동방 출장 시절에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형제의 여동생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약혼 후 실질적인 제위계승 3순위로 우뚝섰다. 그러다가 서기 4년 1월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아르메니아에서 벌어진 사건에 휘말려 큰 부상을 입고 요절한 뒤,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결정으로 일찌감치 진짜 후계자로 낙점됐다.
칼리굴라는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대(大) 아그리피나 사이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나 살아남은[4] 세 번째 아들[5]이었다. 대 드루수스의 손자, 게르마니쿠스와 아그리피나의 아들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칼리굴라)는 따라서 날 때부터 정통성이 대단했다. 그는 법적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을 이어받은 티베리우스[6]와 달리, 부모 양쪽 모두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피’와 ‘리비아의 피’를 모두 이어 받은 율리우스 가문의 후계자였고, 서기 4년 아우구스투스가 완성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상징한 게르마니쿠스라는 아그노멘을 날 때부터 쓸 수 있던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직계였다. 즉 그는 오직 리비아의 아들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입양아들이었던 티베리우스와 달리, 혈연적으로는 부모 양쪽을 통해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 양가의 피, 안토니우스의 피, 아그리파의 피를 모두 이어받았다. 이 혈통에 관해, 칼리굴라는 생전 자신이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것을 자랑스러워했지만, 평민출신이었던 아그리파의 피를 이어받은 것을 부끄러워했다고 수에토니우스는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을 반박하듯이, 칼리굴라가 즉위 후 발행한 주화 중 하나는 공교롭게도 외조부 아그리파였고, 디오 카시우스가 전하듯 칼리굴라는 갈리아로 떠날 당시 자신의 조부 드루수스, 선친 게르마니쿠스와 함께 외조부 아그리파가 세운 군공과 업적을 따라 성과를 내겠다는 열망에 불탔다.[7]
서기 12년 8월 31일 안티움에서 태어났는데, 이 해는 그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와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카피토가 집정관직에 있을 때였다. 칼리굴라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은데, 수에토니우스의 기록과 로마에서 발행된 관보에 따르면 안티움 태생이 맞다고 기록되어있다.[8] 실제로 칼리굴라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도 자신의 고향인 안티움을 좋아했고 자신이 이곳 출신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했다고 한다. 수에토니우스는 소문에 따르면 가이우스(칼리굴라) 편에서 칼리굴라가 안티움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까지 세웠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담으로 칼리굴라의 고향인 안티움은 로마시대 부유층의 별장들이 즐비했던 도시로 칼리굴라의 외조카인 네로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네로 시대에 다시 주목받기도 했다. 또한 19세기가 지난 후 안치오 상륙 작전으로 다시 역사에 이름을 남긴 도시이다.
1.2. 칼리굴라라고 불리게 된 이유
아버지 게르마니쿠스 |
가이우스는 어린 시절부터 게르마니아 지역의 사령관으로 근무한 아버지를 따라 게르만족과의 전선지대인 병영에서 자랐다. 부모는 다섯 아들 중 막내인 가이우스에게 병사들과 똑같은 복장을 입히고 병사들 틈에서 자라게 했다. 이때 가이우스는 외모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였기에 어린 시절부터 군인들에게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9] 당시 게르마니아 주둔 군단병들은 자신들의 사령관인 게르마니쿠스의 아들 중 막내였던 가이우스가 걸음마를 갓 떼면서 칼리가를 신고 있는 것을 보고 지어줬다고 한다. 그 애칭이 바로 "칼리굴라(Caligula, 작은 군화)"인데, 이 애칭은 병사들 사이에서 불린 애칭일 뿐 가이우스의 부모나 황실 식구들이 붙여진 별명이 아니었다.
그래서 가이우스는 본인이나 부모, 황실 어르신들도 부르지 않았던 별명을 인위적으로 붙여준 것을 진짜 좋아하지 않았고, 원로원이나 친구들, 집안 어른들 역시 그를 부를 때 '가이우스'로 부를 뿐 병사들이 지어준 별명을 부르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죽을 때까지 본명 대신 자신을 지칭할 때 칼리굴라라고 불리는 것을 진짜 싫어했다.[10]
복원된 로마 시대 군화 '칼리가'. 이 군화에서 유래한 ‘작은 군화’가 바로 가이우스의 애칭이자 생전에 듣기 싫어했던 별칭 칼리굴라이다. |
당시 가이우스가 얼마나 군단병들에게 사랑을 받았는지 나타내는 증거도 있다. 아우구스투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단병들이 폭동을 일으켰을 때였다. 이때 티베리우스에게 아우구스투스의 유언 실행을 요구한 군단병들은 협상 대표로 숙영지에 방문한 게르마니쿠스의 매제(칼리굴라의 고모부)이자 티베리우스의 친아들 소 드루수스를 감금하더니, 게르마니쿠스를 협박하면서 칼까지 겨누는 행동을 두 숙영지에서 동시에 벌였다.[11] 이런 병사들의 행동에 충격을 받은 가이우스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는 칼리굴라를 그들의 폭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이웃 도시로 보내려 했고, 이를 안 병사들은 로마인들인 자신들의 품에서 갈리아 지방으로 칼리굴라를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잘못을 크게 뉘우쳤다. 그래서 어떤 병사들은 마차를 붙잡아 세운 다음 게르마니쿠스에게 간곡히 용서를 빌기도 했다.
1.3. 어린 시절
게르마니아 전쟁 이후 잠시 로마로 귀환한 아버지를 따라 이탈리아에서 살았던 칼리굴라는 다시 시리아로 파견된 아버지를 따라 동방으로 갔다. 그리고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서기 19년에 시리아 안티오키아[12]에서 사망한 이후, 어머니 대(大) 아그리피나와 함께 귀국하여 함께 살았다. 아버지 사후, 아버지의 입양동생[13]이자 고모부인 소(小) 드루수스가 공식적으로 칼리굴라와 그의 두 형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보호자가 되었는데, 칼리굴라 형제를 지켜주던 그마저 얼마 안 있어 티베리우스 사후 제위를 노리던 세야누스와 고모 리빌라의 공모로 독살당했다.[14]소(小) 드루수스가 갑자기 급사한 이후, 종조부이자 할아버지였던 티베리우스는 서기 23년 가이우스 칼리굴라의 두 형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입양 형식으로 후계자로 만든 뒤 이들의 공식 후견인이 됐다. 그는 얼마 뒤 갓 성년이 된 두 사람을 원로원에 자신의 후계자로 소개하면서, 두 사람에게 나란히 황족들이 받는 특권[15]을 주고, 네로 카이사르를 만장일치로 원로원 의원에 공식 임명했다. 이는 드루수스 카이사르에게도 똑같이 집행돼 그 역시 복점관과 원로원 의원이 됐다. 이어 다음해, 티베리우스 황제는 세야누스에게 명을 내려 자신의 이름으로 칼리굴라의 두 형을 위한 축원 기도를 올리게 하고, 엄청난 금액을 들여 이들을 홍보하면서 발행 주화에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 얼굴을 새겨 넣게 했다.
이후 티베리우스는 얼마 안 있어 네아폴리스(나폴리)로 떠났다가, 카프레아이(카프리)에 마련해둔 별궁에 스스로 들어가 은둔정치를 펼쳤다. 이때부터 수도 로마의 모든 정보는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서신으로 보고됐고, 그 서신을 관리한 프라이토리아니의 힘은 증대됐다. 그 결과, 로마 제국의 실권은 악랄한 근위대장 세야누스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는 티베리우스 사후(혹은 제거 후) 제위를 노린 세야누스의 음모 속에 카이사르 가문 직계들에게 반역죄가 씌워져 가족들이 줄줄이 궁중 음모 속에 숙청된 비극으로 이어진다.
어머니 대 아그리피나 |
칼리굴라의 어머니 대 아그리피나는 정숙하고 현모양처로 유명했다. 그러나 남편 게르마니쿠스가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죽은 이후, 과거와 달리 매일 우울해 했고, 자신이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이자 아그리파 장군의 딸임을 지나칠 정도로 앞세워 많은 이들에게 거만하다고 욕을 먹었다. 그녀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의 상관인 티베리우스 황제가 있을 거라고 의심했다.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의 아들인 드루수스의 피를 이은 남편과 아우구스투스의 손녀인 자신을 견제하고자, 피소를 시켜 남편을 독살했다고 여겼다. 이는 피소재판 이후, 남은 희망까지 사라지자 그녀가 목숨을 걸고 티베리우스에게 맞선 이유가 됐다. 따라서 그녀는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파헤치고, 자기 자녀들을 지키겠다는 열망 아래 황궁 안팎에서 반 티베리우스파를 모아 티베리우스와 매일 같이 싸웠다. 이는 티베리우스 황제가 아들 소 드루수스가 갑자기 죽은 이후, 나폴리로 떠났다가 섬에 틀어박힌 이유가 됐다.
그래도 소 드루수스가 살아있던 시절, 대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와 갈등의 골이 상당히 심각했음에도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 이유는 게르마니쿠스의 법적 동생, 혈연상 사촌동생인 소 드루수스의 존재와 티베리우스 특유의 인내심 때문이었다. 칼리굴라의 고모부이기도 한 소 드루수스는 게르마니쿠스 못지 않은 인격자였고, 게르마니쿠스와는 친형제 이상으로 사이가 각별해 과거와 달리 신경질적이고 우울해 한 대 아그리피나 입장을 이해해줬다. 이 시기, 소 드루수스는 티베리우스 황제와 대 아그리피나의 갈등을 중재했다. 아그리피나는 시어머니 소 안토니아에게 트집을 잡아 티베리우스 편을 든다고 면전에서 따지고, 소 드루수스가 악습에 빠져 있다고 모함했다. 그럼에도 소 드루수스는 인격자답게 대 아그리피나를 이해하면서, 자신을 향해 비난을 쏟는 그녀에게 화를 내지 않고 되레 아버지 티베리우스에게 그녀를 변호하고, 갈등의 소지를 없앴다. 이는 원로원 안에서도 비슷했다. 소 드루수스는 소장파를 대표해 신구조화를 이끌고 황실 내 분란에 야심가들이 끼어들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황궁 안팎에서 대립각을 키웠음에도 아그리피나는 소 드루수스의 보호 아래 티베리우스와 대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 드루수스는 세야누스, 리빌라 모의 속에 급사했다.
소 드루수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대 아그리피나와 칼리굴라 형제를 변호하고 돌봐줄 남성 황족이 사라졌음을 뜻했다. 그가 부재하자, 원로원 인사들은 제 잇속을 챙기면서 모든 것을 수수방관했고, 이중에는 그동안 칼리굴라 가족들을 각별한 대 드루수스 생전부터 유대가 깊은 옛 친구들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큰 문제가 된 것은 칼리굴라의 고모 리빌라와 그녀와 소 드루수스의 딸 율리아 리비아였다. 리빌라는 칼리굴라의 아버지, 어머니에게 어린 시절부터 이상하리만큼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자리가 오빠, 새언니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해 대 아그리피나와 칼리굴라 남매들을 원수로 여겼다. 더욱이 그녀는 남편 소 드루수스가 죽은 오빠를 대신해 어린 조카들을 진심으로 보호하고, 원수 같은 아그리피나를 진심으로 이해하면서 보호해주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다. 그래서 리빌라는 소 드루수스 생전부터, 율리아 리비아와 네로 카이사르 부부를 이간질했고 황궁 안에서 교묘하게 분란을 조장했다. 그리고 이런 틈을 노려 세야누스는 소 드루수스 생전부터 불륜관계인 리빌라를 이용해 황궁 내 대립에 끼어들어 대 아그리피나와 그 친구들을 거대한 음모 아래 파멸시킬 준비를 끝냈다. 그 결과, 칼리굴라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그녀의 장남이자 칼리굴라의 맏형 네로 카이사르와 함께 반역죄로 고발돼, 몰락했다. 두 사람은 커다란 증거가 없음에도 세야누스의 1차 고발과 티베리우스의 2차 고발 형식을 통해 반역 혐의로 외딴 섬으로 각각 추방됐다. 이 사건 당시,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들로 티베리우스 황제의 가족들인 황족들이 반역을 모의한 증거가 없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인내심이 바닥난 티베리우스는 매일 같이 자신을 헐뜯는 대 아그리피나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고, 그는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 중 확실히 유능하고 자신에게 순종적인 드루수스 카이사르와 친손자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쪽에 마음이 간 터라 원로원에게 이들을 반역죄로 처벌하라고 재차 고소장을 보냈다. 하여 칼리굴라의 어머니와 큰형은 국가의 적으로 선포받고 숙청됐다.
따라서 칼리굴라는 세 명의 여동생과 함께, 당시 생존해 있던 증조모 리비아 드루실라와 함께 살았다.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인 리비아 드루실라는 가공할 만한 힘을 가진 세야누스 일당조차 두려워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고, 고령의 나이에도 머리가 비상한데다 그녀 뒤엔 막강한 귀족, 장군들이 가득했다. 따라서 세야누스와 리빌라를 중심으로 한 일당은 황제 모자 사이가 최악이라고 해도,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인 리비아와 그녀의 직접적인 보호를 받는 칼리굴라를 죽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기 29년 9월 28일, 리비아 드루실라가 노환으로 사망했다. 이 당시, 성년식도 치르지 않은 칼리굴라는 율리우스 가문을 대표하여 증조모 리비아 장례식 추도연설을 로스트라에서 가졌다. 그 뒤,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가 카프레아이(카프리 섬)의 별궁으로 부르기 전까지, 친할머니 소 안토니아와 함께 살았다.[16]
1.4. 카프레아이 별궁으로 건너가다
네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네로 카이사르) |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드루수스 카이사르) |
칼리굴라의 둘째형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이 무렵 공직 생활과 복점관 업무 등을 수행하면서 능력과 인품을 인정받고, 평가가 굉장히 좋았다. 그러나 둘째형마저 세야누스와 카시우스 세베루스[17]의 고발과 아내 아이밀리아 레피다의 배신과 거짓 증언으로 숙청됐다. 티베리우스는 이를 의심했으나, 로마에 있지 않았고 재판은 황제의 부재 속에서 고발자들의 각본 아래 결정났다. 그 결과,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말도 안 되는 성 스캔들과 정신착란 증세를 가지고 있다는 혐의, 그리고 반역죄의 누명을 뒤집어 쓰게 된다. 따라서 칼리굴라의 둘째형은 자택에서 체포된 뒤 세야누스 일당과 공모한 아내의 거짓 증언으로 유죄를 선고받고, 서기 30년 황궁지하실에 유폐됐다.[18][19]
이렇게 마지막 성인 남성 보호자였던 둘째 형 드루수스 카이사르마저 세야누스 일당에게 누명을 뒤집어 쓰고 유폐된 이후, 세야누스 일당은 곧 성년식을 치를 아우구스투스의 마지막 직계혈육 가이우스(칼리굴라)마저 제거하려고 했다. 이때 그는 증조할머니 리비아 사망 후 본가에서 할머니, 세 여동생 그리고 작은아버지의 딸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와 함께 살고 있었다. 삼촌 클라우디우스가 있긴 했지만, 그는 힘이 미약했다. 이렇게 되니 로마 안에서 가이우스를 지켜줄 수 있던 사람은 전무했다. 그 결과, 그는 세야누스에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 됐다.
10대 중반의 가이우스(칼리굴라)에겐 친할머니 소 안토니아는 유일한 보호자나 다름없었다. 익히 알려졌듯이 그의 할머니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딸,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다. 소 안토니아는 정절을 지키는 평범한 귀부인이자 가정적인 어머니로 세간에 알려졌으나, 소녀시절부터 정신력이 대단하고 결단력과 묘한 리더십을 두루 갖춘 여장부였다. 안토니아는 자신의 신분이 황족이고, 시아주버니가 티베리우스 황제였다고 해도 정계에 큰 영향을 행사하거나 그런 시도도 하지 않은 성격이라서 어떤 움직임도 가져가지 않았다. 그래서 티베리우스 황제는 그녀를 무척 신뢰했다.
성년식 전까지 그녀의 보호 아래 머문다면 어린 칼리굴라를 공격할 수 있는 인사는 전무했다. 그렇지만 칼리굴라의 성년식은 곧 다가왔고, 세야누스파 안에는 리빌라, 율리아 리비아와 같은 황실 여인들도 있어 어린 칼리굴라의 목숨은 곧 결정날 듯 했다. 이런 상황에서 안토니아의 보호에서 벗어난 칼리굴라의 형이자, 소 안토니아의 둘째 손자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모함을 받아 유죄판결을 받고 몰락했고, 안토니아 사저 주변에는 세야누스 일당의 감시가 일상화됐다. 이렇게 되자 소 안토니아는 세야누스와 그 일당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 씨 말리기가 계속되고, 이들 가족을 노린 음모들이 끊이지 않는 것을 큰 위협으로 여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혈육인 막내손자 가이우스를 살리고자, 가문의 믿음직한 노예 팔라스[20]를 불러 그에게 자필 서한을 주면서, 자신과 손자를 살려달라고 도움을 청했다. 노예 팔라스는 아주 어릴 적부터 주인 부부와 이들의 아들들인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형제의 인품을 대단히 존경했다. 그래서 그는 여주인의 명과 도움 요청을 받자마자, 목숨을 걸고 그 일을 떠맡았다. 팔라스는 세야누스 부하와 집안의 리빌라 감시 속에서 로마를 탈출해, 네아폴리스를 거쳐 카프리 섬의 별궁으로 건너갔다. 도착 직후, 그는 안토니아의 자필서한을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은밀히 전달하면서, 안토니아의 간곡한 호소와 뜻을 전했다.
로마 제국의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 |
티베리우스 황제는 젊은 시절부터 냉정하고 비정했고, 이 시기에는 감정이 마모된 나머지 무척 까칠하고 의심이 많았다. 그럼에도 그는 유독 친동생 대 드루수스에게만은 살갑고 진심으로 사랑했다. 이는 26살에 미망인이 된 제수씨 소 안토니아에 대해서도 비슷해, 그는 죽은 동생과 마찬가지로 안토니아의 말이라면 진심으로 신뢰했다.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칼리굴라의 할아버지(대 드루수스)가 요절한 이후에도 어떤 소문없이 정절을 지키고 묵묵히 세 아이를 홀로 키우는 소 안토니아의 모습을 젊은 시절부터 보면서 진심으로 존경했고 이런 태도는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 됐다. 아울러 티베리우스는 당시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연이은 반역죄 기소 당시부터 세야누스의 반역 혐의를 의심했는데,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정신착란증세와 난잡한 사생활이라는 것에 의심을 강하게 품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팔라스가 안토니아의 서한을 전달했을 때, 티베리우스는 제수 안토니아의 "저와 드루수스의 유일한 혈육이자, 요절한 장남 게르마니쿠스의 유일한 아들인 어린 가이우스(칼리굴라)를 보호해달라"고 호소한 서한을 읽은 직후 이를 즉시 받아들였다. 이때 팔라스는 노황제에게 세야누스 일당의 음모를 고변하면서, 재차 도움을 청했다. 다행히 티베리우스 황제는 의심하지 않았고, 팔라스를 칭찬했다. 그에게 로마로 돌아간 직후, 안토니아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라고 명령하면서 동생과 안토니아의 마지막 혈육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카프레아이 별궁으로 데리고 오라고 지시했다.[21]
이렇게 할머니의 간곡한 편지, 노예 팔라스의 활약 덕에 가이우스는 목숨을 건졌다. 그래서 가이우스는 팔라스와 그 형제 펠릭스가 안토니아 사저에 도착한 직후, 티베리우스의 부름을 받고 카프레아이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이야기는 타키투스나 수에토니우스,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에서도 정확히 나와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칼리굴라는 이때부터 티베리우스 곁에 살면서 후계자 중 한명으로 교육을 받았다. 로마를 떠나 나폴리만에 도착한 그가 배를 타고 카프레아이에 도착한 날, 칼리굴라는 뒤늦게 성인용 토가를 입고 처음으로 면도를 했다. 그러나 칼리굴라가 한 성년식은 비공식적인 성년식이었고 성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1.5. 카프리 생활과 근위대장 마크로
서기 31년, 19세 생일에 맞춰 칼리굴라는 할머니 소 안토니아, 숙부 클라우디우스의 배웅 속에 로마를 떠나 나폴리에 도착했다. 그는 배를 타고 카프리 섬에 있는 빌라 요비스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법적 할아버지인 종조부 티베리우스 황제를 오랜만에 만났다.칼리굴라는 서기 31년에 카프리 섬으로 갈 당시, 티베리우스의 명령으로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의 딸 유니아 클라우딜라[22]와 결혼을 한 상태였다. 칼리굴라는 유니아 클라우딜라와 결혼 후, 티베리우스의 명령으로 빌라 요비스를 아내와 도착했다. 이들 부부는 티베리우스의 명령 없이는 함부로 떠나지 못했고, 빌라 요비스 안에서 감시받는 삶을 계속 살았다. 그렇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고, 형 드루수스 카이사르 대신 복점관에 임명되어, 책임감있는 행동과 모범적인 삶의 태도를 인정받고 사제직에 올랐다. 이 무렵, 세야누스가 몰락했는데, 칼리굴라의 첫 아내였던 유니아 클라우딜라가 출산할 환경이 아닌 빌라 요비스에서 아이를 낳다가 산고로 죽었다. 태어난 아이 역시 빌라 요비스 환경 등 때문에 얼마 안 가 죽었다. 이때 칼리굴라가 어떤 심정인지는 모른다. 다만, 칼리굴라가 즉위 후 첫 아내를 그리워하면서 여러 번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고, 후계자 생산에 노력한 점을 보면, 이때 그가 받은 충격과 분노는 컸던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암살 미수 사건을 겪기 전까지 첫 아내의 아버지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를 아버지처럼 따랐다가 그를 숙청할 당시에도, 배려 차원에서 장례 절차를 준비하게 해주면서 자살 형태로 죽게 한 모습 등도 이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어쨌든 칼리굴라는, 아내와 아이를 모두 잃은 뒤 큰 충격을 받았는데, 그럼에도 아내와 갓 태어난 자녀를 잃은 원한을 숨기고, 티베리우스에게 철저히 복종했다. 그래서 이를 주목하던 근위대장 마크로는 젊은 왕자가 상실감 속에서 방황할 당시에 이를 주목하면서 접근했다고 한다.
수에토니우스는 후대에 떠돈 이야기 등을 토대로 하여, 가이우스(칼리굴라)가 두 형과 어머니, 고모부가 비극 속에 세야누스의 음모 아래 죽은 이후 겨우 목숨을 건지고 카프레아이로 소환된 이후, 어떤 상황이었는가에 대해 티베리우스와 보낸 은둔 생활이 비극적이고 음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이 당시 가이우스는 본래 상황을 이용한 재치와 유머감각이 뛰어나면서도 혈기왕성하고 화를 잘 내는 솔직한 성격임에도 자신과 죽은 혈육을 위해서 애써 자신의 감정을 숨겼다."고 한다. 또 칼리굴라는 이 시절 내내 본인이 사랑했던 부모와 두 형, 고모부를 위한 복수심과 그로 인한 울분을 삼키고 어쩔 수 없이 이를 참아야 했다고 한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시절부터 칼리굴라가 본인의 감정을 숨기면서 본심을 숨기는 식으로 티베리우스와 티베리우스 측근들이 게멜루스를 밀어주는 것을 혼자 힘으로 돌파했다고 평한다. 어쨌든 이런 칼리굴라의 태도는 티베리우스가 그를 꼬투리잡지 못하게 했다.
타키투스 역시 티베리우스 말년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후계자 시절 칼리굴라를 적었다.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살았던 이 역사가는 최대한 기록에 따라 소문과 사실을 구분했는데 그의 기록 안에서 나타난 칼리굴라의 행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지극히 냉담하고 음험하며 이중적인 티베리우스의 행동과 복사판처럼 비슷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그나마 남아있는 <티베리우스> 편에서 서술했다. 그러면서 타키투스는 갓 성년식을 마친 어린애 가이우스는 티베리우스의 영향을 받으면서 정치술을 배웠고, 실제로 그는 티베리우스가 마크로를 앞세워 벌인 일들을 직접 배울 수밖에 없었음을 지적했다. 또 그는 이런 티베리우스의 해악들은 마크로의 비열한 술수와 함께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그에게 악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여기에는 칼리굴라가 카프리 섬에서 보낸 시간이 불안했던 것도 한몫했다. 당대 로마인과 후대 로마인들은 티베리우스가 동생의 혈육인 칼리굴라를 견제하면서 시간을 두면서 고사시키는 식으로 숙청하려고 했다가 그가 노환으로 죽으면서 실패했다고 확신했다. 그 이유는 로마인 사이에서 무조건 확신할 만큼, 티베리우스가 칼리굴라를 견제하면서 티베리우스가 많이 보여준 특유의 방법으로 제거하려고 한 모습 때문이었다.
티베리우스는 훌륭한 교육, 풍부한 지식을 강조해온 터라, 칼리굴라는 이곳에서 거의 6년간 살면서 황제의 기준을 맞추기 위한 모든 훈련과 교육을 받았다. 이에 관해 고대 사가들은 어린 가이우스(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가 흡족할 정도로 박식하고 총명하고 쾌활한 모습에도 자신을 철저히 배우처럼 숨기면서, 오로지 박식하고 총명한 모습만 내보였다고 한다.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런 모습은 그가 종조부 티베리우스, 티베리우스의 측근들에게 살아남고자 한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고 한다. 당시 세야누스 일당이 건재했고, 그가 개인보호 차원에서 티베리우스에게 생사여탈권이 넘어간 채 성장한 터라 놀랍지 않다고 연구자들은 평하는데, 이때 칼리굴라는 자신이 처한 위험을 인식하고 자신과 가족에 대한 티베리우스의 학대에 대한 분노를 숨기는데 집중했다. 그래서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이때 궁정의 신하들이 티베리우스에 대한 불만을 입 밖에 내도록 갖은 수단을 다 써보며, 그를 숙청하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어린 가이우스(칼리굴라)는 큰형 네로 카이사르가 자살했다는 소식, 작은형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지하실에서 세야누스 숙청 직후 유폐에서 풀려날 것이라는 이야기와 3년 뒤에 벌어진 작은형의 비극적인 죽음 등 모든 일에 어떤 내색도 내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양할아버지나 전체 가족들에게 지나치게 순종적이었고, 티베리우스의 해방노예와 침실시종에게조차 철저히 순종했다. 따라서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이때 티베리우스의 한 친구는 "그보다 더 나은 노예나 그보다 더 나쁜 주인은 없을 것이다."고 했다고 한다. 이 주장은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시대 동안 이 내용의 풍자시를 지은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시에누스 크리스푸스가 쓴 것을 각색한 것이 유력해, 온갖 소문을 사실로 적는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이기에, 신뢰성은 상당히 떨어진다고 평가받는다. 다만, 이때 칼리굴라가 약간의 꼬투리만 잡혀도 숙청하고 본 티베리우스나 티베리우스 측근 집단인 아미쿠스들에게 그다지 (나쁜 쪽으로) 관심을 받지 않았던 것은 분명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세야누스와 공모했던 리빌라 공주가 과거의 일이 들통이 나면서 숙청된다. 리빌라는 칼리굴라의 고모였지만, 세야누스를 도와 칼리굴라가 가장 사랑했던 가족들을 모두 죽인 원수였다. 그녀는 칼리굴라를 친아버지처럼 보호해준 소 드루수스를 세야누스와 공모해 독살했고, 칼리굴라의 어머니, 두 형을 숙청하는 누명을 씌우고, 칼리굴라의 숙부 클라우디우스를 술 주정뱅이, 도박꾼으로 이미지가 박히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또 칼리굴라가 할머니 소 안토니아와 살 때, 그를 감시하는 등 모든 악행을 벌였다. 리빌라가 이렇게 한 이유에는 그녀가 자신의 아들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에게 제위를 온전히 가게 할 이유도 있었다. 그래서 리빌라가 남편 소 드루수스를 독살하는데 가세하고, 모든 악행을 벌인 것이 재조사 후 들통이 나면서, 처형된 뒤 소 드루수스, 리빌라의 일란성 쌍둥이 아들 중 살아 남은 티베리우스 게멜루스가 카프리 섬으로 건너올 때의 분위기는 칼리굴라의 불안한 입지를 더욱 악화시켰다.
티베리우스는 일찍부터 친손자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무척 아끼고 진심으로 다정하고 사랑했다. 따라서 게멜루스는 환대를 받으면서 왔고, 빌라 요비스에서 살게 된다. 칼리굴라 역시 이때 카프리 섬에 있었는데, 고대 사가들의 일관된 기록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확실히 본인의 손자 게멜루스를 총애했고, 게르마니쿠스의 아들 가이우스(칼리굴라)를 견제하면서, 어린 가이우스를 술라에 비유하며 그 인내력을 시험했다고 한다.
이때 일에 관해, 동시대 사람인 유대인 필로는 티베리우스는 진심으로 본인의 손자 게멜루스를 아꼈고, 그에게 황제 자리를 넘겨주고 싶어하면서, 가이우스를 견제했다고 한다. 소문을 사실로 많이 각색해 적은 수에토니우스, 원로원 입장에서 소문상 이야기도 언급한 타키투스와 디오 카시우스 역시 비슷하게 적고 있는데, 이들에 따르면 칼리굴라와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는 사이가 좋았고 함께 티베리우스 아래에서 제왕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이 시절, 티베리우스는 친손자 게멜루스의 지위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 네로 카이사르의 자살 소식,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석방이 되었는지 등의 소식에 시큰둥했다고 한다. 따라서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굶어 죽어 나온 뒤, 티베리우스가 울분 속에서 세야누스 잔당 사냥을 다시 시작하고 델라토르들이 원로원을 고발하면 유죄로 무조건 사형 또는 추방할 당시, 이런 상황은 로마 제국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었다고 디오는 말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디오 카시우스는 티베리우스가 우선적으로 기회를 준 쪽은 결국 게르마니쿠스, 대 아그리피나의 살아남은 아들로, 동생 드루수스의 손자인 가이우스(칼리굴라)였다고 한다. 필로 역시 비슷하게 기록 중인데, 본인의 사촌, 조카 모두 칼리굴라의 최측근이었던 필로는 티베리우스가 카이사르 가문의 남자 혈육 중 후계자로 손색 없게 여긴 쪽은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들인 드루수스 카이사르, 가이우스(칼리굴라)였지만 당시 살아있던 쪽은 가이우스였고, 빌라 요비스 생활을 통해 그가 훨씬 뛰어나고 영리함을 끝내 인정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티베리우스는 손자 게멜루스가 어리고, 유순하고, 재능이 너무 평범해, 제위를 단독으로 잇지 못한다고 의심했다고 한다. 디오 카시우스는 여기에서 더해 티베리우스가 원로원에 서신을 보내, "가이우스에게 남들보다 5년 이상 먼저 모든 공직에 오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할 당시, 원로원과 친구들이 드루수스의 아들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언급하자, 어린 나이를 거론하면서 자신의 손자가 세야누스와 모종의 관계가 있지 않겠냐는 일부 의심을 고려해 머뭇거렸다고 한다. 따라서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에게 먼저 기회를 받았고, 주변이 볼 때 통치자에게 필요한 자질이나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인정받음을 확인받았다.
그렇지만 티베리우스는 이런 태도에도 이상할 만큼 칼리굴라를 크게 소개하지 않았고, 그 홍보 역시 근위대장 마크로 아래에서 공안통치하는 모습으로 각인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칼리굴라는 뚜렷한 공적 생활 경험을 쌓지 못했고, 그가 맡은 것은 6년 넘는 카프리 섬 생활 중 복점관 외엔 없었다. 대신 그는 어린 칼리굴라 주변에 마크로를 붙여 도움과 감시를 동시에 하고, 본인 측근들을 붙여 함께 살도록 하는 식으로 제왕교육과 견제를 동시에 했다. 반면 본인의 손자 게멜루스를 카프리 섬과 나폴리를 오가는 본인과 함께 살도록 부르면서, 게멜루스를 유독 아끼고 시간을 최대한 끄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관해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디오 모두의 기록이나, 당대의 유대인 필로가 밝힌 바에 따르면, 티베리우스 황제는 확실히 동생의 손자인 칼리굴라보다는 본인의 친손자 게멜루스를 진심으로 아끼고 좋아했고, 동생의 손자를 믿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티베리우스가 행동한 이유는, 그가 티베리우스는 본능적으로 로마 권력 구도와 원로원 분위기상 본인 혈육인 게멜루스가 본인 사후 칼리굴라가 권력을 쥐면 밀릴 것이며 안전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을 함께 보면서 연구하는 학자들은 티베리우스가 손자 게멜루스를 껴안으면서, 칼리굴라에게 술라 같다고 평하면서 자신의 손자를 그가 죽일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주장 역시 뜬소문이더라도 당시 티베리우스 치세 말기 상황을 보여준 장면이라고 평한다.
그래서 모든 고대기록에서 동의하는 것처럼, 현대 이후 연구들에서도 이런 티베리우스의 태도와 당시 상황은 칼리굴라가 사춘기 시절부터 본인의 감정을 억누르면서 이중적으로 행동한 배경이 됐고, 본인의 권리를 지킬 때 냉혹하고 무자비한 모습을 보인 이유가 됐다고 한다.
칼리굴라의 흉상. 수에토니우스 말대로 대머리에 염소 같은 괴물상은 아니다. |
이렇게 불안한 카프리 섬 생활 중, 칼리굴라의 이런 불안한 상황을 알고 접근한 쪽은 프라이토리아니를 단독으로 이끌게 된 마크로였다.
수에토니우스는 소문에 따르면 칼리굴라는 아내가 아이를 낳다가 죽자 근위대장 마크로의 아내 에니아 나이비아(엔니아 트라실라)를 유혹하여 자신이 황제가 되면 엔니아와 결혼하겠다고 맹세했고 그 내용을 문서로 써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는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으로 시작된 루머인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를 죽였다는 증거로 제시되게 된다.[23] 같은 소문을 기초로 한 이야기에는 타키투스의 <연대기>도 있다. 타키투스는 수에토니우스의 주장과는 다른 주장을 했다. 타키투스는 수에토니우스처럼 34년 젊은 가이우스가 마크로의 아내 엔니아 트라실라와 연인관계 비슷한 관계를 맺고, 서면으로 마크로, 엔니아 부부의 영향력을 보장하겠다고 한 뒤 유부녀인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이런 타키투스의 기록은 티베리우스의 죽음이 임박할 무렵 수에토니우스가 주장한 "칼리굴라가 마크로의 아내를 유혹해 자신이 황제가 되면 결혼하겠다고 맹세했다"는 주장과 다르게 서술됐고 구체적이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가이우스(칼리굴라)는 카프레아이 별궁에서 큰할아버지 티베리우스 후계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확실히 불안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별궁 안에서 세야누스 후임으로 근위대장이 된 이후 권세를 휘두른 마크로에게 호의를 베풀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근위대장 마크로와 그의 아내 엔니아는 25살의 젊은 가이우스(칼리굴라)의 호의를 이용해 의도적으로 엔니아가 가이우스에게 불륜 비슷한 관계를 먼저 제안했고, 마크로는 아내와 합심해 사별해 독신인 칼리굴라에게 먼저 자신과 엔니아에게 젊은 왕자가 표면상 결혼을 하겠다고 서약 직전으로 행동토록 했다고 한다. 즉, 타키투스는 수에토니우스와 달리 마크로와 그의 아내 엔니아가 칼리굴라에게 먼저 스폰서 비슷한 불륜관계를 제안하고, 마크로는 이를 의도적으로 조장하고 모르는 척 해주면서 교묘하게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면 이들 부부의 영향력을 보장하겠다”고 문서로 보장케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칼리굴라에게 결혼하겠다는 맹세까지 요청해 이를 받아냈다고 말한다.
근대 이후 학자들은 이 당시 “칼리굴라가 마크로의 아내를 꼬셔 불륜을 맺고 결혼약속을 해줬다”는 수에토니우스의 주장과 “마크로와 엔니아가 칼리굴라에게 제위를 보장하는 대신, 불륜관계를 맺게 하고 서면으로 약속까지 받아냈다”는 타키투스의 주장 중 타키투스의 기록을 사실로 보고 있다.[24] 그래서 연구자들은 마크로 아내에게 결혼 맹세까지 했다는 이 이야기는 마크로의 눈치를 안 볼 수 없는 칼리굴라가 자신의 불안한 미래와 확실한 제위계승을 위해 마크로 측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마크로 부부는 칼리굴라를 밀어주는 대신 타키투스가 말한 마크로 아내에게 결혼맹세를 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타키투스는 이때 25살 밖에 안 된 가이우스 칼리굴라가 마크로 부부의 이런 속 보이는 제안을 자신의 할아버지와 마크로에게 배운 방법대로 역이용했다고 한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모든 상황을 꿰뚫어본 만큼, 이런 가이우스의 행동을 확실히 안 좋아했고, 탐탁치 않게 여겼다고 한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자신처럼 친혈육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분노와 그로 인한 격한 감정을 통제하던 동생의 손자를 루키우스 술라 펠릭스에 비유하면서, 마크로를 칼리굴라와 함께 불러 모아 이런 뜻을 교묘히 전했다고 한다.[25]
하지만 마크로는 이미 칼리굴라 편을 들었고, 그를 숙청하는 것은 티베리우스에게 버겁고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티베리우스와 황제의 친구들은 다른 식으로 칼리굴라를 견제하려고 했다. 디오는 이에 대해 티베리우스 친구들이 로마에 있는 원로원에 있는 가족, 친구들에게 어린 가이우스(칼리굴라)를 나쁘게 평가하면서 게멜루스를 높게 평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악평들은 인기 없던 티베리우스에게 부메랑이 되면서, 칼리굴라의 카프레아이 별궁 이야기는 다양한 소문들로 인해 로마인들의 상상을 자극했다.
이 당시, 로마 원로원 의원들과 풍자시인들은 로마를 떠나 나폴리 일대와 카프레아이 섬을 오가며 살던 티베리우스와 황제의 친구들, 그리고 칼리굴라의 은둔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주제로 성적 판타지가 가득한 농담조 풍자시로 지어 이를 비꼬고 궁금해했는데, 이런 악의적 평가까지 나오자, 결국 이런 궁금증과 상상 속에서 벌어지는 온갖 판타지들은 길거리와 공공장소 내에서 음란하고 잔인하고 음험한 소문들로 생산됐다. 그리고 이런 풍자시와 온갖 소문들은 서민들에게 사실로 알려졌다.
이런 이유 탓에 말년의 티베리우스는 참다 못해 민감하게 반응했는데,[26] 이런 경고에도 대 드루수스의 오른팔로 게르마니아 전쟁때 티베리우스, 드루수스 형제의 참모 출신 원로원 의원 베스틸리우스는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섬에서 방탕하고 음란하게 지낸다”는 풍자시를 지었다. 이는 티베리우스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는데, 당사자와 원로원, 황제까지 풍자시인 것을 알았어도, 이 당시 티베리우스는 “자신과 친혈육 가이우스에 대한 도전은 곧 응징과 피의 복수”라고 정의할 정도로 화를 냈다. 따라서 베스틸리우스에게 티베리우스는 “(풍자시가) 거짓말이어도 용서할 수 없다”는 차가운 문체의 서한장을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낭독케하며, 친구들과 원로원의 탄원서에 분노의 일갈을 날렸다. 그리고 그는 이전까지 무척 아낀 측근을 '황제의 식탁'이라고 불린 자리에서 쫓아낸 뒤 그를 정치적, 사회적으로 처참하게 몰락시키고 본인 스스로 굴욕감 속에 자살케했다.
1.6. 후계자 등극
고대 기록들은 가이우스 칼리굴라가 세야누스 제거 이후부터 놀라울 정도로 힘을 키운 근위대장 마크로와 협력 상태를 구축했다고 전한다. 이는 티베리우스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로마에서는 근위대장 마크로 주도로 대대적인 반역죄, 불경죄 그리고 숙청이 터지는 동안 마크로의 원한관계 탓에 반역죄로 기소된 루키우스 아룬티우스의 자살 전 기록에서도 드러난다.타키투스는 아룬티우스가 반역죄 사건에 함께 기소된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네로의 친부), 마르수스 등처럼 자기변호를 하지 않고 자결을 결심하고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건 당시, 아룬티우스는 이때 자살 직전 만류하는 친구에게 세야누스와 마크로를 비교하고,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은 뒤 괴물이 된 사람."
이라고 비판한 이후 칼리굴라 이야기를 꺼냈다. 아룬티우스는 이때 죽음을 결심한 다음, 날카롭게 단검을 갈아 놓고, 친구들을 불러 모아 유언을 남겼다. 그러면서 그는 천천히 아직 어린 칼리굴라를 걱정하고, 어린 칼리굴라의 미래를 망치는 티베리우스와 마크로를 비난했다고 한다. 이때 그는 친구에게"어린애에서 갓 벗어나 아무 것도 모르고 (티베리우스라는) 해독 속에서 자란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세야누스보다 한층 더 나쁜 자인 마크로의 지도를 받으며 통치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라고 말하고, 친구들이 도피할 것을 제안하자, 거절 후 로마귀족이 스스로 명예를 지키면서 억울함을 표현하는 방법 그대로 혈관을 잘라 죽었다.이 기록 외에도 가이우스 칼리굴라는 3월 16일 나폴리 만 별장에서 티베리우스가 노환으로 영면하자 일개 사인 자격임에도 근위대장 마크로를 자신의 이름으로 파견해 마크로 세력을 이용했고, 마크로 측과 협력관계를 유지해 목숨을 부지하고 후계자 입지를 키웠다고 한다. 이 외에도 "가이우스는 마크로에게 자신이 즉위하면, 부와 명예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황제령 이집트 장관직을 보장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 주장을 펼친 고대기록들은 마크로가 이를 믿고, 지속적으로 칼리굴라를 밀어주면서, 그가 새 황제가 되는 것에 도움을 줬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근현대 역사가들은 칼리굴라가 20대 초반부터 정치가에게 필요한 여러 자질을 갖추고 있었고, 증조부에게 물려받은 천부적인 기질을 제대로 활용했다고 평가한다. 특히, 고전사가 윈털링은 필로의 기록, 타키투스의 기록, 수에토니우스의 기록 등을 토대로 칼리굴라를 논평하면서, 그가 카프리 섬 생활 시절부터 이미 티베리우스에게 통치자 역량 측면에서는, 유순한 게멜루스와 달리, 인간 심리를 꿰뚫어 본인의 역량을 활용하는 재주를 인정받았고, 당시 정국 상황 속에서 필수적인 자질인 냉혹한 면모를 인정받았을 것이라고 평한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칼리굴라의 능력과 자질을 인정할 뿐, 여전히 손자 게멜루스에게도 제위를 주고자 했고, 종국적으로는 동생의 손자 대신 본인 손자에게 온전히 제위를 넘기기 위해 온갖 구상을 했다. 하지만 이 구상은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 측의 온갖 시험 속에서 꼬투리 잡히지 않고 살아남으면서 실패했다고 한다. 타키투스는 이런 이유 때문에, 티베리우스가 어쩔 수 없이 어린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게멜루스 공동 통치를 인정하는 선에서 대안을 마련했다고 한다.
이중에는 동생 대 드루수스의 둘째아들로 칼리굴라의 작은아버지, 게멜루스의 외삼촌인 티베리우스의 조카 클라우디우스 1세를 징검다리 후계자 삼아 제위를 넘기는 대안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진지하게 고민한 이 대안은 이미 칼리굴라가 성인이고, 게멜루스 역시 성년식 직전인 까닭에 카이사르 가문 남성이 멀쩡하게 있다는 점에서 모양새가 떨어진 까닭에 티베리우스는 결단을 못 내렸다고 한다. 티베리우스 본인이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장 공개 뒤, 아우구스투스가 누나의 외손자, 본인의 양손자이자 외종손 클라우디우스를 제5 상속인으로 삼았던 것을 빌미로 클라우디우스를 핍박한 전력이 있어, 명분도 없었던 부분도 있어, 티베리우스와 그 친구들 입장에서 볼 때, 이런 부분은 게멜루스 미래를 더욱 어둡게 했다. 설상가상 티베리우스 친구들 입장도 다르고, 마크로가 이끈 프라이토리아니 역시 칼리굴라 쪽으로 향해 있었다. 그래서 티베리우스는 연회를 크게 열고 본인의 건재함을 보여줬다. 하지만 주치의 등은 티베리우스 상태를 잘 알고 있었고, 티베리우스 측근들은 티베리우스 사후의 일을 빠르게 준비했다. 즉, 티베리우스에게는 시간이 이미 얼마 남지 않았고, 원로원 내부에서는 티베리우스 인기가 형편없이 없어, 게멜루스에게 제위를 주기 위해서는, 칼리굴라와 게멜루스의 공동 계승 외엔 최선이 될 대안이 전무했다.
결국, 티베리우스는 어쩔 수 없이 건강 악화로 빌라 요비스에서 해군 기지가 있는 항구도시 미세눔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마크로를 원로원에 보내, 게멜루스가 칼리굴라와 공존할 방향을 찾는 형태로, 칼리굴라의 제위 승계를 받아들이게 된다.
2. 황제
2.1. 즉위
타키투스의 기록 중 관보를 토대로 한 사건만 기록한 내용을 살펴보면 가이우스(칼리굴라) 황제의 제위 등극은 다음과 같았다.서기 37년 3월 16일, 카프레아이 별궁에서 나폴리 만의 별장으로 거처를 옮긴 티베리우스는 가이우스(칼리굴라),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등이 보는 가운데 노환으로 사망했다. 그런데 이 당시 명의 카리클레스가 연회를 주최하고 있던 티베리우스의 맥박을 집고 그의 건강을 면밀히 진찰한 후, 황제 곁에 있던 마크로에게 “카이사르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고 말했다. 이후 마크로를 포함한 황실 관료 및 티베리우스 측근들은 서둘러 회의를 연 뒤 일찌감치 제국 각 속주총독과 군대에 급사를 파견해 뒤를 대비한 상태였기 때문에 티베리우스 이후 상황은 대비가 된 상태였다. 이런 가운데 티베리우스 일행이 머문 나폴리에서는 어떤 관직도 갖고 있지 않은 가이우스가 자신의 이름으로 근위대장 마크로를 로마로 파견해 본인이 단독 프린켑스가 될 수 있도록 손을 썼다. 그래서 티베리우스 사망 이틀 뒤인 18일, 원로원에서는 너무 손쉽게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의 단독 황제 결정이 통과됐고 아우구스투스-티베리우스에 이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의 세습을 완료지었다.
이렇게 가이우스는 근위대장 마크로의 도움과 그동안 카프레아이에서 티베리우스, 마크로에게 배운 정치술을 기반으로 아무런 반대 없이 제위에 오르게 됐다. 이후, 그는 로마인들과 "전 세계인들의"[27] 열광을 받으며 서기 37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아내도 자식도 없는 상태에서 황제가 되었다. 사실 가이우스(칼리굴라)의 등극 당시 인기는 로마 사상 최고였다. 로마인들 사이에서, 소문에 의해 음침한 성격인 데다가 말년에는 카프리 섬에 틀어박혀서 시민들에게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던 티베리우스 황제는 인기가 매우 낮았기 때문이다. 또 게르마니아를 정복직전까지 이끈 할아버지 대 드루수스의 갑작스러운 낙마사, 게르만 족과의 전쟁에서 크게 활약하여 전쟁 영웅으로 여겨진 부친 게르마니쿠스의 인기와 후광,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피소와의 갈등 후 젊은 나이에 오리엔트 속주에서 병[28]으로 요절한 사건[29], 세야누스의 음모와 비정한 늙은 황제의 은둔 속에 어머니와 두 형들이 억울하게 비극적으로 죽은 일 등 3대째 이어진 가족사로 인한 아픔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막내 가이우스(칼리굴라)의 인기는 더했다. 여기에 더해 티베리우스의 긴축정책과 수성 위주 국방정책 등으로 인해 로마 여론은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향수도 상당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의 직계손 가이우스의 등장 효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가이우스(칼리굴라) 시대 발행된 화폐 |
이어 칼리굴라는 원로원에게 티베리우스가 원로원에게 인기가 없더라도 그를 신격화시켜달라고 요청했다. 동시에 그는 원로원에게 본인을 신의 대리인 내지 신성화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는 원로원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원로원은 티베리우스 신격화도, 칼리굴라를 헬레니즘 군주 중 셀레우코스 제국,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등의 강력한 군주들처럼 해줄 생각 모두 전혀 없었다. 로마 시민들 역시 거의 비슷했는데, 이들은 원로원과 달리 칼리굴라의 요청은 그럴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했음에도 티베리우스를 영웅화, 신격화하는 것에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들은 원로원 이상으로 티베리우스를 신격화시키는 것은 과한 조치로 생각했다. 따라서 칼리굴라의 정중한 이 요청은 모두 통과되지 않았다. 대신 원로원은 칼리굴라에게 아주 비싼 가격으로 만드는 값 비싼 개인 조각상을 만들어주고 설치를 공공장소에 세울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칼리굴라는 원로원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아주 정중한 태도로 티베리우스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르는 것에 감사함을 표했다. 그리고 이후에도 그는 본인을 신성화하는 것을 인정해달라고 요청하거나, 원로원이 제안한 값 비싼 조각상 설치 요구를 재의하지 않았다.
칼리굴라는 이런 정치적 행동을 하면서, 티베리우스의 유언장 일부를 본인이 한 조치로 만들어 인기를 모았다고 디오 카시우스는 말한다. 디오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유언장에 본인이 남긴 유증금을 재원 삼아 프라이토리아니 병사 1인당 500 세스테르티우스를 유산으로 주라고 했다고 명했다. 그런데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의 유언을 바꿔, 본인의 명령으로 각 병사당 그 2배인 1000 세스테르티우스씩 추가 보너스로 주고, 로마와 이탈리아 안팎의 모든 로마군 병사들에게도 추가 보너스로 그에 상응하는 충성 상여금을 내리게 했다. 그러면서 각 자치도시, 지역 유지들이 자신에게 바친 기부금도 암살될 때까지 프라이토리아니, 로마군에게 본인 이름으로 기부 형태 상여금으로 선물했다고 한다. 이는 타키투스의 남아 있는 기록에서도 드러나는데, 칼리굴라는 정적들에게 재정 위기를 초래했을 것이라는 비방을 받았음에도, 암살 이후 삼촌 클라우디우스가 병사 1인당 15000 세스테르티우스를 프라이토리아니에게 충성 상여금으로 지급하고도 남을 만큼 많은 기금 재원을 확보해 남겨줬다고 한다. 따라서 칼리굴라의 인기는 원로원 안에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지지한 원로원 의원, 장군들을 중심으로 공고해졌고, 로마군과 프라이토라이 내의 칼리굴라 인기는 더 높아 졌다. 그래서 로마군 내에서의 칼리굴라 인기는 그가 암살된 이후에도 뿌리 깊게 자리잡게 됐다.
이후 티베리우스 장례식이 열렸는데, 칼리굴라는 국장으로 열린 이날 장엄하고 위엄이 넘치는 방식으로 이를 치러 황실의 위엄을 높였다. 그러면서 법적으로는 할아버지이고, 혈연상으로는 큰할아버지인 티베리우스를 기리는 장례연설을 할 때, 수많은 군중 앞에서 시종 눈물을 펑펑 흘렸다. 원로원이 티베리우스의 유언집행을 보류하기로 하자 이를 무효화하고 시민들에게 예외없이 성실히 유산을 지불했다. 티베리우스때 무효화해서 욕을 많이 먹은 리비아 드루실라의 유언도 집행하여 환호를 받았다. 이렇게 되니 칼리굴라의 인기는 일반 서민, 프라이토리아니, 수도 경비대, 로마군을 중심으로 공고해졌는데, 이는 칼리굴라 암살 사건 직후에도 시민들이 칼리굴라를 원로원과 달리 증오하지 않고 그의 죽음 의혹을 해소하라고 군중 시위가 벌어진 배경 중 하나가 됐다.
티베리우스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칼리굴라는 본격적으로 본인의 부모와 일가의 명예를 복권하는데 집중했다.
먼저 그는 티베리우스 장례식 직후, 원로원에게 정중히 본인의 어머니, 두 형의 신원복구를 완료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어머니와 두 형의 신원복구를 완료지었다. 이미 둘째형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신원 회복은 사실상 티베리우스 생전에 끝난 뒤였지만, 어머니와 큰형의 신원은 원로원이 공식적으로 이들이 억울하게 피해를 입었다고 확인시키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티베리우스 생전,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에 따라 아우구스투스 가문 사람이자 상속자로 재선언, 확인된 삼촌 클라우디우스가 티베리우스에게 의도적으로 무시받은 것을 아우구스투스 유언장 집행 내용 그대로 되돌려 놓았다. 칼리굴라는 삼촌 클라우디우스를 재차 아우구스투스 가문 사람으로 선언해 확인시키고, 황실 직계 구성원에 걸맞은 지위와 특권을 복권시킨 다음, 그를 적극 후원했다. 이에 대해 현대의 로마역사 연구가 위그만은 클라우디우스의 첫 번째 집정관 취임과 그의 황제 대리인 재임명 조치 등도 이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평한다. 어쨌든 칼리굴라는 이런 식으로 삼촌 클라우디우스 명예와 지위를 회복시켜, 티베리우스가 대 드루수스 일가에게 한 견제 조치를 모조리 뒤엎었다. 그는 이때 본인의 할머니 소 안토니아에게 아우구스타 지위를 내리면서, 삼촌 클라우디우스, 세 여동생 아그리피나, 율리아 드루실라, 율리아 리빌라에게도 티베리우스 시대 아래에서 티베리우스가 의도적으로 아우구스투스 가문원임에도 실질적으로는 지위, 권한, 명예를 행사하지 못하게 한 부분을 정상화시켰다. 또 티베리우스가 취한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가이우스 카이사르에 대한 일부 조치를 회복시켰다. 이를 통해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생전에 이들 부부가 명시적으로 적어 놓은 본인의 할아버지 대 드루수스와 그 일가의 명예를 티베리우스 시대 중기 이전으로 회복시키고, 칼리굴라는 이를 정통성의 기반으로 활용해 대규모의 국가 행사를 연이어 개최했다.
이후, 그는 어머니 대 아그리피나와 형 네로 카이사르의 유골을 가져오기 위해, 삼촌 클라우디우스, 둘째 여동생의 남편으로 본인의 오랜 친구인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등을 대동해, 직접 판다테리아와 폰티네 제도로 떠났다. 이때 악천후가 그의 앞길을 막았는데, 그럼에도 그는 이를 뚫고 달려갔다. 이 행동은 가족에 대한 사랑, 부모에 대한 사랑,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한 로마인의 정서를 자극시켰다. 이런 가운데, 칼리굴라가 경건한 태도로 유골을 직접 수습하여 유골단자에 담아, 오스티아를 거쳐 테베레 강을 거슬러 로마를 오자, 이는 큰 화제를 모았다. 이때 그는 로마까지 오는 내내, 2단 갤리선의 고물에서 군단기를 들고 서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어머니, 큰형의 유해가 화장돼 담긴 납골항아리를 품고 온 뒤, 본격적으로 어머니, 두 형의 정식 장례식을 재차 거행했다. 이때 그의 할머니 소 안토니아, 숙부 클라우디우스, 사촌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여동생 3명 내외도 참석했는데, 칼리굴라는 로마인들 앞에서 그가 얼마나 가족들의 원통한 죽음을 아쉬워 하는지 성숙된 모습을 보여줘 감동을 줬다. 이후, 그는 가족들과 함께 아우구스투스 영묘에서 세야누스, 리빌라 등 일당 손에 죽은 어머니, 두 형과 고모부의 넋을 위로하고 이들을 정식 신원복구했다. 이날 그는 어머니 율리아 아그리피나를 위해 희생제를 올리는 날을 정하고, 키르쿠스에서 축제를 열도록 했다.이 키르쿠스 축제에서는 어머니 대(大) 아그리피나의 조각상을 마차에 실어 지나도록 했다. 그리고 그는 원로원에 정식으로 요청해 9월을 아버지 게르마니쿠스의 이름인 "게르마니쿠스"로 바꿔 아버지를 기렸으며, 할머니 소 안토니아에게 증조모 리비아 드루실라가 살아생전 누렸던 모든 영예를 원로원 포고를 통해 수여했다. 또한 임기 첫 동료 집정관으로 삼촌 클라우디우스를 선택해, 공직 경험이 없는 삼촌의 권위를 높였다. 그리고 양자 티베리우스 게멜루스가 성인이 되자 "젊은이들의 지도자"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칼리굴라 즉위 후 열린 축제 3개월 동안(혹은 그보다 짦은 기간 동안), 16만 마리의 제물이 제단에 바쳐졌고, 새 황제의 이름으로 시민들에게 많은 양의 무료급식을 나눠줬다. 각종 검투사, 전차 경기도 많이 개최하여 대중의 인기를 끌었으며,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유언장 중 집행되지 않은 것도 이때 집행돼 많은 수혜가 로마인들에게 돌아갔다.
이 시기, 칼리굴라는 캄파니아 지방 인근의 섬들을 방문해 이곳 주민들의 민심을 다독였다. 그가 떠나는 날, 로마 시민들은 앞다투어 그의 무사 귀환을 빌었다. 때마침 파르티아 왕 아르타바누스가 로마 제국의 새 황제가 된 칼리굴라의 즉위를 축하하면서 먼저 친교를 청하고, 시리아 총독과의 회의에 이례적으로 참석해 호감 의사를 밝혔다. 이때 파르티아 왕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기 전에 로마의 은독수리기와 군단기, 그리고 카이사르의 조각상 앞에서 경의를 표했다.
칼리굴라는 이 시기, 이탈리아 전역에서 거두어들이던 0.5 퍼센트의 경매세를 폐지하고, 화재로 집이 파괴된 이재민들에게 즉각적인 보상 대책을 실행에 옮겼다. 티베리우스 시대 당시, 왕위를 잃은 여러 왕들을 복위시켜주면서 그들에게 사실상 사과의사를 밝혔다. 이는 티베리우스 시대 동안 쌓여 있던 보호국 군주와 귀족들의 불만을 줄였다. 동시에 그는 소아시아 일대의 지역유지들과의 관계도 개선하는 것에 집중해, 이 부분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로마와 이탈리아에서는 티베리우스가 선황 아우구스투스와 친모 리비아 드루실라의 유언장 집행도 중지시키거나 일방적으로 축소했고, 예정된 공공건축물 건설과 개보수 사업도 중지시켜 여론도 나쁜 부분을 해소하는데 집중했다.
동시에 그는 새로운 주화를 아우구스투스가 했던 방법을 이용해 영리하게 새로 만들거나, 재발행했다. 대부분은 실생활에서 많이 쓰이나, 통화량 부족이 뚜렷한 세스테르티우스, 아스 등이었는데, 이때 칼리굴라는 쇼맨쉽이 강한 사람답게 행동했다. 그는 외할아버지 아그리파, 아버지 게르마니쿠스, 어머니 대 아그리피나, 법적 삼촌이며 본인을 친아버지처럼 보호해준 혈연상 당숙, 고모부인 소 드루수스의 얼굴을 넣은 주화를 만들어 발행하거나, 재발행했다. 동시에 본인이 세금을 줄이거나, 폐지한 것을 기념해 만든 것을 새겨 발행했다. 따라서 로마인 모두는 전임 황제 티베리우스 시대와 다른 칼리굴라의 등장에 환호했고, 원로원 내에서 카이사르 가문의 연이은 세습에 불만을 품은 세력의 공격은 줄게 됐다.
이렇게 칼리굴라의 첫 7개월간은 티베리우스 시대의 암울함을 떠올린 연속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그때마다 칼리굴라는 시기적절한 이벤트와 성대한 축하 행사를 거행하면서 인기를 높였다. 칼리굴라가 행사를 많이 벌였던 이유는 아마도 그러한 티베리우스 시대에 쌓인 불만을 해소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새롭게 하려는 목적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2.2. 중병과 게멜루스 숙청
즉위 7개월 만인 37년 10월쯤, 칼리굴라가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열과 두통으로 쓰러지고 말았다.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칼리굴라가 몸져누워 생사를 알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자 밤새도록 궁을 에워싸고, 신들에게 칼리굴라를 병에서 회복시켜주기를 기도했다. 특히 이때 어떤 사람은 칼리굴라가 병에서 회복된다면 검투사가 되어 시합에 나가겠다고 맹세했고, 누군가는 신에게 칼리굴라 대신 자신이 죽겠다는 현수막을 걸어 무사안일을 빌었다.[31] 그러다가 칼리굴라가 깨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들 모두는 환호하며 칼리굴라의 회복을 기뻐했다. 그러나 칼리굴라 본인은 회복된 이후,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의심이 많아지고 밤마다 종종 환청이 들려서 한밤중에도 황궁 안을 배회해야만 했다. 또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려서 공허에 대고 제발 잠 좀 자게 해달라고 소리치는 지경이 되었다. 이렇게 젊은 황제는 원인 모를 병으로 생사를 넘나든 이후 정신이 이상해져 그 후부터는 제우스로 분장하고 이상한 옷을 입는 등 기이한 행동을 종종 벌였고 폭정을 저지르기 시작했다고, 백여년 뒤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주장하고 있다.[32]
공동상속자이자 양자였던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티베리우스의 친손자이며 소(小) 드루수스[33]의 살아남은 아들. 칼리굴라가 그를 죽임으로써 율리우스 일족 남성 중 살아남은 이는 칼리굴라 1명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
이 외에도 타키투스의 분실된 기록 중 남아 있는 일부에 따르면, 칼리굴라는 10월 중엽 중병을 겪은 이후 이전과 달리 간헐적으로 정신 이상이 생기고 항구적인 증세가 심해졌다고 한다. 디오에 따르면 동생이자 양자인 게멜루스와 장인 유니우스 실라누스에게 자살강요를 지시내렸다고 한다. 그 결과, 서기 38년에 칼리굴라는 중병에서 완쾌되자마자 의심을 하면서 양자이자 공동제위계승자인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죽였다. 또 티베리우스 생전부터 문제가 많았고 자신의 즉위 후에는 세야누스 수준의 권력 위치로 나아가던 근위대장 마크로와 프라이토리아니 부대원들을 숙청했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칼리굴라의 중병 완쾌 후 행동은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처럼 미치광이가 된 황제가 벌인 무자비한 행동보다는 당연한 조치였다고 해석되고 있다. 특히 자신의 단독 제위계승을 도와줬지만, 티베리우스 재위 후반부터 세야누스 수준의 권력을 향해 나가던 마크로 숙청은 어린 시절 친족들을 대거 잃은 뒤 겨우 목숨을 건졌던 가이우스에게는 반드시 해야 했던 숙청이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때 벌어진 숙청 중 사촌동생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제거는 가이우스가 제위 안정을 위해 필요했고, 원로원과 암묵적 동의 하에 이뤄진 조치였다고 하더라도 모두의 동의를 얻을 순 없었다.
게멜루스 숙청 당시,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18살의 어린 사촌동생이 만성적인 기침 완화를 위해 복용한 약 냄새가 심하게 나는 것을 의심하더니 본인을 독을 먹여 죽일 거라고 생각해 죽였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또 다른 말에 따르면 칼리굴라가 쓰러진 이후 양자 게멜루스가 부재 중인 칼리굴라를 대신해 황숙 클라우디우스가 국가 행사를 주최한 행사에 참여한 것을 두고 빼앗긴 제위계승권을 되찾기 위해서 힘을 키웠다고 의심해 죽였다는 말도 있다. 물론 이 사건 당시, 칼리굴라는 게멜루스가 황족이고, 자신의 몇 없는 피붙이인 까닭에 망나니가 처형하도록 하지 않고, 명예롭게 자결하라고 칼을 보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명을 전하러 온 백인대장은 게멜루스에게 자결하는 법을 알려준 뒤 게멜루스를 살해해야만 했는데, 그래도 그의 유해는 일반적인 반역죄 처벌대상과 달리 장례절차를 거쳐 황족 대우에 따라 매장되었다.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는 소 안토니아의 딸 리빌라가 소 드루수스와 결혼해 낳은 아들로,[34] 율리우스 가문의 직계 혈통 중 한명이었다. 물론 그는 이 당시 어머니 리빌라가 생전에 남편 소 드루수스(칼리굴라의 당숙이자 고모부)를 독살한 범인이고, 세야누스의 정부가 되어 나쁜 짓을 많이 저지른 까닭에 티베리우스 생전에 정통성에 타격을 입긴 했다. 하지만 율리우스 가문의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티베리우스→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티베리우스 게멜루스’로 이어지는 적법한 직계라인 승계주자인 탓에, 세야누스 일당의 표적이 됐고, 리빌라와 재혼해 자신이 황제가 되려고 한 세야누스는 리빌라를 끌어들여 율리우스 가문의 피를 이은 칼리굴라와 게멜루스를 모두 죽이려고 계획했다.
여기에 더해 자살강요로 살해당하기 전, 게멜루스는 워낙 착하고 순해서 칼을 보낸 의미조차 몰랐던 청년인데다 제위에 욕심을 내거나 정치적 행동은 하지도 않았다. 또 황제와 게멜루스는 모두 소 안토니아의 노력으로 나란히 목숨을 건진 혈육들로 오랜 세월을 함께 살면서 의지한 사이라서, 칼리굴라의 친할머니 소 안토니아는 외손자 게멜루스가 아무 이유 없이 숙청되는 것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했고, 평소와 달리 원로원 내 인사들을 만나 그들에게 이런 비극을 막아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은 가장 증오했던 티베리우스의 유일한 혈육을 보호해주지 않았다. 따라서 칼리굴라는 중병에서 회복된 직후, 말도 안되는 이유를 들면서 할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 가문 내 유일한 남자황족 후계자를 죽여버렸다. 그리고 이 사건 전후로 소 안토니아는 병이 완쾌된 직후 180도 달라진 손자의 행동에 크게 실망해 대립하게 되는데, 건강하던 그녀는 외손자 게멜루스가 억울하게 죽은 지 얼마 안 가 화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처형 사건은 의외로 칼리굴라와 원로원 모두 언급을 자제할 정도로 조용히 흘러갔다. 따라서 현대 로마사 권위자 안소니 배럿을 위시한 학자들은 칼리굴라 재위 초반 황제를 대신한 행사주최 당시, 황제의 권한을 대리할 정치적 이벤트는 황숙 클라우디우스가 담당하고 비정치적인 행사는 티베리우스 게멜루스가 형식상으로 담당한 것에 관심을 갖고 이 부분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칼리굴라가 원로원과 암묵적 틀 아래에서 티베리우스가 만든 제위계승구도를 중병 회복 후 과감하게 무너뜨린 조치였다고 말한다. 즉, 자신의 권력안정화를 위해 별다른 실권도 없는 사촌동생이라고 해도 전임자가 공동제위계승권자로 지명한 이유를 의식해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이유 때문에 칼리굴라의 결정은 속사정을 내심 짐작하고 있던, 할머니 안토니아와 황제의 여동생들에게 사촌동생 살해라는 부분에서 실망을 안겨 줬고, 황제 본인이 장차 추진한 권력강화는 당시에는 넘어간 원로원이나 일부 근위대에게 노골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만들었다.
이런 이유 등을 근거로 현대 학자 중 일부는 가이우스의 게멜루스 입양과 숙청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역사와 권력구도를 근거로 아우구스투스 일가 내의 '티베리우스 파 vs 대 드루수스 파(게르마니쿠스 파)'의 대결과 황실 내부의 오랜 갈등이 폭발한 사건으로 본다. 그래서 그들은 게멜루스의 죽음 이전의 리비아 유언 집행 등 일련의 아우구스투스 정책 재개, 게멜루스 숙청을 묶어 대 드루수스 일가의 승리로 해석하기도 한다.[35] 이는 세야누스 세력의 게르마니쿠스 일가 숙청과 중병 이후 칼리굴라의 행보와 단독제위계승 등을 연결해 설명도 되기에, 어느 정도 설득력 있다고 평가 받는다.
이런 가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그 대립을 길게는 게르마니아 전쟁 직전의 후계구도와 세야누스 숙청 당시의 게르마니쿠스 옛측근들의 연이은 처형 등을 그 시작점으로 제시한다. 고대기록의 주장처럼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가 첫결혼에서 낳은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형제는 우애가 깊었다. 하지만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는 게르만족이나 갈리아 정책 등에서 서로 비슷하면서도 미묘한 견해 차이가 있었다. 또 아우구스투스 치세 후반~ 티베리우스 시대동안, 게르마니쿠스와 티베리우스은 게르마니아 전쟁을 놓고 분명 문제해결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여기에 더해 황실 내의 두 파벌은 지지 군대 기반도 미묘히 달랐다고 한다. 실제 티베리우스 시대 초기 벌어진 레누스 일대의 게르마니쿠스 옹립시도와 이 일대에서 벌어진 대 드루수스와 게르마니쿠스 숭배 제사는 그들의 친혈육 가이우스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이후의 브리타니쿠스의 정치적 자산이자 최대 기반임을 보여준다고 한다. 그래서 티베리우스가 소 드루수스를 이 지역 총독으로 파견하고 일리리쿰과 판노니아 일대 내에 신경 쓴 모습은 반대편(게르마니쿠스와 리비아 연합)에 대응하는 모양새로 비춰졌다. 또 세야누스 숙청 당시,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 측근들에게 잠시 동조했다는 이유로 처형함과 동시에 게르마니쿠스 일가를 압박하고 옛 드루수스 측근들까지 걸고 넘어진 모습도 이 주장의 근거 중 하나로 거론되고 있다. 따라서 이 주장을 중심으로 볼때, 가이우스 단독세습과 8개여월 뒤의 게멜루스, 마크로 숙청을 설명하면 티베리우스파와 드루수스파 모두에게(특히 칼리굴라 측에게) 게멜루스는 분명 상당히 애매모호한 상징성을 가진 경쟁자였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36]
이런 추정과 함께 게멜루스가 사촌형 칼리굴라에게 숙청당한 원인으로 거론되면서 지지를 받고 있는 학설로는 게멜루스를 최측근으로 보필해온 아울루스 아빌리우스 플라쿠스가 반드시 거론된다. 이 주장은 이 가설을 뒷받침하면서, 기존의 고대 기록들인 수에토니우스, 디오의 주장이 갖는 설득력을 크게 떨어뜨렸다.
아울루스 아빌리우스 플라쿠스는 33년부터 38년까지 황제령 아이깁투스 장관으로 있던 에퀴테스로, 티베리우스 황제의 복심 같은 측근이었고, 당시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의 후원자이자 유일한 지지자였다. 그는 칼리굴라의 조부 대 드루수스, 칼리굴라의 외조모 대 율리아와 어릴 때부터 죽마고우로, 칼리굴라와 게멜루스 사이의 가교 노릇을 한 인사였다. 헌데 그는 동시에 칼리굴라를 끝까지 숙청하려고 시도한 티베리우스쪽의 대표이기도 했다. 플라쿠스는 티베리우스 생전 칼리굴라의 어머니 대 아그리피나 고발에 적극 협력한 원로원 의원이었고, 티베리우스 생전에는 노황제에게 노골적으로 게멜루스의 경쟁자 칼리굴라를 술라로 규정하며 인격을 훼손하고, 나아가 게멜루스에게 힘을 실어준 과거가 있었다. 하지만 칼리굴라는 그를 끝까지 믿었고, 황제령 아이깁투스 장관 자리를 확고히 굳혀주며 신임했다. 그럼에도 그는 칼리굴라와 원로원 내 칼리굴라 지지 인사들의 심기를 제대로 건들었다. 먼저 그는 티베리우스 유언에도 원로원이 칼리굴라, 게멜루스 공동승계 대신 칼리굴라 단독 승계를 좋게 여기지 않는 태도를 고수했다. 하지만 이보다 문제를 일으킨 것은, 38년 벌어진 황제령 아이깁투스의 알렉산드리아 폭동 조짐이 칼리굴라 즉위 시작부터 보고되는 가운데에서도, 극단적인 그리스계 주민들을 비호해, 결국 황제가 개입해야 될 문제로 사태를 악화시킨 일이었다. 그는 이때 폭도들이 칼리굴라 초상화를 유대인 신전으로 가지고 오면서 철거할 수 없었다는 변명을 늘어 놓았는데, 이런 변명에도 신전 안에 황제 입상 대신 본인 전신상을 세우는 등 의심을 살 행동을 벌였다. 따라서 그가 38년 유죄 판결 후 39년 추방지에서 처형되는 과정 모두는 칼리굴라가 할머니 안토니아가 화병으로 쓰러진 뒤 죽은 다음, 황제가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해 죽은 게멜루스에게 그나마 신원회복만은 해주려는 관용마저 없앴다. 더 큰 문제는 이때 플라쿠스가 그리스계 주민 일부가 일방적으로 5개 구역 중 2개 구역에서 자행된 유대인, 유대인과 결혼한 그리스인 학살을 방치하고, 십자가형을 가족, 친구들을 살리기 위해 저항한 무고한 시민들에게 내려 죽여, 38년 폭동을 장기화시킨 무능함이었다. 따라서 그는 머리 끝까지 열받은 칼리굴라에게 질타받고 38년 장관 자리를 잃고 소환되어 기소됐다가, 유대인 필로 등이 칼리굴라와 면담을 한 뒤 39년 유죄 확정 후 처형된다. 하여 게멜루스 숙청은 37년 말 ~ 38년 초 사이에 시작됐고, 플라쿠스는 게멜루스 죽음과 신원복구 무산의 결정적 동기를 제공했다고 평가받는다. 여기에는 현대에 이르러 많은 학자들에게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원로원에게서 지켜줄 요량으로 사촌동생을 양자로 입적시켜, 파트리아 파테스타스(가부장권) 아래 보호 의지를 명확히 하고, 이후에도 게멜루스를 동생이자 양자 이상으로 대우한 칼리굴라의 노력도 그 증거로 거론된다. 그래서 게멜루스가 칼리굴라에게 중병 회복 후 숙청된 일에는 이런 복합적인 위기들이 문제가 되어, 일련의 친족 처형으로 끝났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이런 배경, 원인 둥으로 게멜루스는 38년 초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 그래도 이때 칼리굴라는 원로원과 타협 후, 다른 이들과 달리 게멜루스에게는 그냥 교수형 또는 처형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내리지 않고, 단검을 보내 명예롭게 죽으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게멜루스는 자신의 반역죄 기소 이후 죽던 날까지 본인이 왜 죽어야 되는지 몰랐다. 또 그는 본래부터 워낙 착하고 성품이 바른 소년인 터라 단검을 가지고 온 백인대장과 근위대가 칼을 손에 쥐고 스스로 죽는 방법까지 알려주는 비극이 벌어졌는데, 이때 파견된 백인대장은 게멜루스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칼리굴라가 보낸 검으로 그를 대신 죽이는 방식으로 죽였다.
게멜루스는 엄연히 아우구스투스의 직계후손이자 황족이었고, 황제의 양자이자 후계자였기 때문에 숙청 직전의 기소 당시 원로원에서 이 문제에 대해 보호조치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원로원은 게멜루스가 무죄임을 알고 있었던 와중에도 티베리우스를 진짜 미워했기 때문에 설령 자신들과 사이가 좋고 인기가 많았던 아우구스투스, 소 드루수스의 혈육이어도 게멜루스의 처형을 의도적으로 방치했다. 그들은 세야누스의 정부였던 리빌라의 행태를 간접적으로 언급해 전혀 보호해주지 않았다. 따라서 이 숙청 사건 당시 칼리굴라와 원로원, 근위대 모두 게멜루스가 억울하게 죽는 것에 대해 일절 언급이 없었다.
게멜루스가 죽은 뒤, 칼리굴라와 원로원 모두는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에 관한 어떤 추모를 하지 않았고, 칼리굴라와 게멜루스 사이의 관계 역시 무효화하듯 로마에 남아 있는 비문에 이렇게 적은 뒤, 사건을 덮었다.
Ti Caesar / Drusi Caesaris f / hic situs est.
여기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아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가 누워있다.
여기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아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가 누워있다.
어쨌든 이 사건은 당시에는 큰 방항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넘어갔는데, 가이우스 칼리굴라 암살 백여년 뒤에는 그가 병에 걸리더니 미치광이가 됐다는 이야기의 예시로 사용되게 됐다.
이 사건 외에도 수에토니우스가 기록한 길거리 소문에 의하면 아마도 칼리굴라는 정황상 여동생들과 근친관계를 맺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그 증거는 당시 칼리굴라가 자신과 3명의 여동생에 대한 충성서약을 원로원에게 요구한 일이라고 한다. 이 주장은 오늘날 사실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데,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을 차용하는 경우에는 최소 한명 또는 두명의 동생과는 그러지 않았을까하고 추측성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아울러 칼리굴라는 중병에서 회복한 이후부터 황제와 율리우스 가문 위상을 강화하고 선전을 극대화했다. 따라서 칼리굴라는 자신의 매제 중 황실의 실질적인 시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주동자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후손 카시우스를 자신의 여동생과 강제로 이혼시켰으며, 여러 행사들을 통해 황실을 홍보했다. 그러다가 여동생 세 명 중 평소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했던 둘째 드루실라가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자 신격화하여 '디바 드루실라'라고 부르게 했다.
2.3. 내정
칼리굴라의 공공개혁과 공공 인프라 증설은 서기 38년과 서기 39년 연이어 진행됐다.38년 아퀼리우스 율리아누스와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가 집정관이 된 이후, 가이우스는 인기영합정책으로 1퍼센트의 경매세를 폐지했으며, 화재 피해자들에게 개인국고를 통해 시혜를 베풀었다. 따라서 37억 세스테르테우스나 되는 티베리우스의 유산은 칼리굴라의 무절제한 소비로 인해 곧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수에토니우스는 말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그는 티베리우스가 남긴 27억 세스테르티우스를 낭비했고, 후일 조카인 네로는 이런 외삼촌의 화끈한 국고 탕진을 매우 부러워하고 감탄했다고 한다.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서기 38년부터 돈을 펑펑 쓰면서 국고를 거덜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반성하지 않고 다음부터 온갖 수단을 동원해 원로원을 협박했고 대중들에게 나라에서 국고 자금을 대출해줬다고 한다. 그러나 샘 윌킨슨(2003)은 칼리굴라의 과도한 지출로 인해 파산이 당시의 심각한 문제가 되었을 수 있지만 반드시 발생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샘 윌킨슨의 이러한 주장은 "간단한 것이 보통 더 진실하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학계의 지적을 받고 있다. #
이 해, 그는 여세를 몰아 민회를 형식적으로 부활시킨다. 이를 통해 가이우스는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냈고 이를 통해 원로원을 견제했다. 또 그는 로마 제국 내에서 황제를 보좌하는 관료층을 보강하면서[37] 기사계급에 본격적으로 속주 출신 로마 시민권자들을 채워넣었는데, 이런 그의 방식은 후임자 클라우디우스 시대때 가속화됐다.
칼리굴라는 수도 로마와 이탈리아 일대로 공급되는 곡물 수급을 위해, 대대적으로 남부 이탈리아 일대의 여러 항구들을 건설, 보수했다. 이는 이탈리아와 갈리아 일대로 이집트 곡물들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래서 칼리굴라는 칼라브리아와 시칠리아 등지에 중점적으로 건설하도록 했다.
이 조치는 재정적으로 무리로 보였는데, 칼리굴라를 크게 좋아하지 않은 요세푸스는 "재정적으로 무리처럼 보인 남부 이탈리아 일대의 항구 건설들은 이집트에서 들어오는 곡물 수급을 증대시키고, 기근을 해결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했다. 하지만 세네카는 이에 관해 칼리굴라가 상당히 많은 돈을 쓰고 대부분 예산을 로마, 이탈리아, 갈리아에 집중해 이 문제로 상당히 골치를 앓았다면서, 돈을 펑펑 썼다고 말한다. 이는 세네카를 비롯한 로마인(특히 원로원 의원 출신 인사들)의 기록을 추합해, 자신의 생각을 적은 디오 카시우스도 비슷했는데, 디오는 "가이우스는 로마와 이탈리아의 나머지 지역에서 거의 모든 돈을 썼고, 어떤 식으로든 세금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 자금을 모았다."면서 가이우스가 이탈리아와 로마, 갈리아 발전과 게르마니아 발전 투자에 돈을 쓴 까닭에 그가 이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어 힘들어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2.4. 오락 후원과 마크로 숙청
칼리굴라는 즉위 초반부터 자신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고, 원로원 내 지지세를 모으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로마 민중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전통적인 방법에 따라 유흥문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황제가 본인과 가문 이름으로 막대한 지원을 했다.칼리굴라는 이를 위해 일반 민중, 본인 또래의 젊은 귀족 및 에퀴테스들이 좋아하는 것을 후원하고 그들과 어울리는 식으로 지지를 모았다. 그는 이렇게 어울린 청년들을 친구로 두고, 그들을 측근으로 키워 함께 연회 등을 통해 우정을 다졌다. 동시에 그들을 황제가 후원하면서 이들을 명예로운 경력에 추천하며 기존 원로원을 견제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즉위 직후부터 할머니, 삼촌, 세 여동생과 함께 최대한 본인의 얼굴을 내보이는 방법으로 지지를 모았다. 이때 그가 집중한 것은 전차, 경마, 연극 그리고 검투사 대회 후원과 이 대회를 끝까지 관람하면서 열성적으로 응원한 모습이이었다. 이때 칼리굴라는 즉위 직후 의도적으로 유난히 호화롭고 신화 모습 형태의 연출된 검투사 경기를 열었다거나, 일부러 전문 검투사들과 함께 훈련을 받는 모습을 내보이는 식으로 화제를 낳았고, 이 화제를 낳은 뒤에는 연설이나 쇼맨쉽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민중들에게 관심을 내보였다. 그러면서 그는 로마에 머물 수 있는 검투사 인원을 제한한 사치법령을 원로원에게 면제받고, 다시금 원로원 의원들이 본인 조상들을 기리는 후원 행사를 허락하는 식으로, 티베리우스와 본인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런 방법에 반기를 든 이도 있었다. 그 중 한명이 티베리우스 치세 후반기의 강력한 근위대장 마크로였다. 그는 칼리굴라에게 여러 제안을 하면서 불쾌함을 표했다. 이에 칼리굴라는 마크로의 제안을 거의 무시하고, 이를 교묘히 활용했다. 원로원과 민중들은 마크로를 진심으로 혐오해, 젊은 황제의 태도에 만족감을 표했다. 따라서 마크로는 겉으로는 칼리굴라의 총애를 받고, 보다 높은 자리를 얻을 것 같으면서도 고립됐다. 칼리굴라는 이렇게 마크로를 숙청할 준비를 끝냈고, 본인에게 진심으로 협력적인 아레키누스 클레멘스를 중용하면서 클레멘스를 중심으로 하여 프라이토리아니를 장악한다. 여기에 큰 힘이 된 것은 칼리굴라가 프라이토리아니와 로마군에게 막대한 기부를 꾸준히 하면서 그들의 지지를 이끌어낸 조치들이었다. 따라서 마크로는 오스티아 항구로 가면서 칼리굴라가 본인을 소원대로 아이깁투스 장관에 임명했다고 확신했다가, 극적으로 몰락한다.
티베리우스와 대비되는 방법에는 오락 후원 외에도 적극적인 특정 전차기수 선수, 전차팀, 배우, 검투사를 거침없이 지지하거나 반대한 것도 있었다. 그는 공개적으로 가수나 배우들이 노래, 대사를 낭독해주면서 연설에 인용하거나, 과거 티베리우스의 고발로 추방된 배우, 전차기수들을 재심 후 귀국을 도왔다. 하지만 이런 태도 중 몇 가지는 원로원에게 용납할 수 없는 모욕으로 인식됐다고 한다. 이중 한 가지는 칼리굴라가 노골적으로 포풀라레스의 지지를 받았고, 로마군과 민중들의 사랑을 받는 전차 경주팀인 녹색파를 지지하고, 황제가 녹색파 일원으로 경주하거나 후원한 행동이었다. 로마 황제 중 칼리굴라처럼 노골적으로 녹색파를 지지한 황제는 루키우스 베루스, 콤모두스가 유명했고, 밝히지 않을 뿐 지지했던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있었고, 이 팀과 라이벌인 청색파를 지지한 황제로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가 유명했다는 점을 떠올리면 의외일 수 있다. 하지만 원로원은 칼리굴라가 녹색파를 통해 포풀라레스의 거두인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를 떠올리게 하는 식으로 한다고 인식해 분명히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민중, 로마군은 이런 칼리굴라의 태도에 더 크게 환호했다.
이와 함께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가 서기 19년 제정한 법으로 모든 공개 행사에 원로원 의원들이 후원하거나 참석해 관람한 것을 제한한 금지령을 사실상 무시했다. 이 조치는 후일 수에토니우스, 디오가 주장한 "가이우스가 에퀴테스, 원로원 의원들을 검투사로 경기장에 싸우도록 강요했다."는 뜬소문적 비방이 나온 명분이 됐다. 하지만 현대 이후 연구에서 드러나듯이, 칼리굴라가 즉위 직후 이 금지령을 무시하고 풀어준 것은 애당초 아우구스투스가 집권 후 만든 제정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아우구스투스 이래 로마 황제는 꾸준히 부유한 기사계급 출신들을 신흥 귀족이나 황제를 금전적으로 후원한 지지자로 포섭해야 되는 현실에서, 인기도 없고 카이사르 가문의 인기를 떨어뜨리는 이 명령을 폐기하는 것이 보다 나았기 때문이다.
2.5. 전제 군주로의 권력 강화
칼리굴라가 전제 군주로 권력강화를 본격화한 것은 사실 티베리우스 죽음이 발표되고 난 직후였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티베리우스가 죽고, 가이우스가 통치를 계승하던 해에, 처음 기사들과 일부 대중이 회의에 참석했을 때, 그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큰 존경심을 보였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그들과 함께 나누고 그들이 기뻐하는 모든 일을 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자신을 그들의 아들이자 보호받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이때 그의 나이는 25살이 5달이나 모자랐다."면서, 칼리굴라가 저명한 원로원 의원이자 집정관을 지낸 퀸투스 폼포니우스를 석방시켜주고, 사면을 내렸다고 한다. 이 조치에 대해, 디오는 칼리굴라가 모두의 앞에서 티베리우스가 보낸 사건 기록 서류를 쌓아놓고 불태웠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연설했고, 이는 모두에게 큰 칭찬을 받고, 불안했던 권력과 지위가 확고한 정통성으로 탈바꿈한 계기가 됐다고 한다."내가 이와 같이 한 것은 언젠가 제가 어머니와 형제들을 위하여 누구에게든지 원한을 품고자 할지라도 그를 벌할 수 없게 하려고 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디오가 지적했듯이, 이는 그가 그렇게 행동하고 연설하면서 "가장했다."는 고단수의 정치적 술수였다고 한다. 과거의 아우구스투스가 옥타비아누스로 불리던 시절처럼 행동하면서도, 실제로는 여전히 가지고 있었던 조치였던 셈이다. 이런 가운데 칼리굴라는 원로원 안에서 황제를 지지할 파벌을 꾸리고, 티베리우스와 황실에게 원한을 품은 이들을 모조리 포섭했다. 그는 암살되기 전까지 자신을 지지한 이들을 이렇게 모았다. 이때 그는 자신을 지지한 이들에게 늘 호의적이었고, 그들을 존중하고, 이들에게 과거 아우구스투스처럼 재정적 후원을 해줬다. 또 원로원이 티베리우스에게 가장 불만을 품었던 것을 티베리우스 즉위 이전으로 되돌렸다. 그 시작은 칼리굴라가 처음 집정관에 올랐던 해였다. 이때 그는 유피테르를 모신 사제에게 개별적으로 충성서약하는 것을, 다시 사제들이 원로원 앞에서 이를 축복하고 모두와 함께 축하하는 조치로 바꿨다.
어쨌든 이렇게 한 다음, 칼리굴라는 농신제를 5일 이상 계속하도록 명령하고, 티베리우스가 강제로 농신제마다 기부처럼 했던 은사금, 곡식 지급을 멈춘 것을 재기토록 했다. 따라서 칼리굴라와 황실의 애매모호한 지위는 순식간에 강화됐고, 그는 호민관 지위와 권한에 프린켑스 세나투스 직책을 더해 올라탄 형식의 임페라토르로서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 허니 디오가 지적했듯이, 이때부터 어린 칼리굴라,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사이에서 이들을 통제하고 권신으로 올라가려고 한 마크로는 이때부터 알게 모르게 그 영향력이 조금씩 약화되게 됐다.
다음으로 칼리굴라는 즉위 직후 했던 프라이토리아니, 로마군에 대한 상여금 지급을 꾸준히 하면서, 이들이 필요로 한 물자 등을 본인 이름으로 기부했다. 이렇게 반복된 기부와 상여금 지급은 암살 직전까지 꾸준히 진행했다. 동시에 그는 본인을 지지한 세력을 모으고자, 황제 금고를 재원 삼아 본인 이름으로 삼촌 클라우디우스, 각 로마 귀족 중 본인 친구, 지지자들을 시작으로 이들에게 연금 형태의 상여금을 정기적으로 지급했다고 디오는 직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들의 재산은 어떤 일이 있어도 건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현대 역사가 그라델은 칼리굴라가 의도적인 본인 신격화 형태의 신성화 퍼포먼스 등과 함께 그가 취한 대표적인 권력 강화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라델은 이를 통해 삼촌 클라우디우스 등 측근들을 제어하고 때론 굴욕을 주는 형태의 견제책으로 이용했다고 평한다.
이런 조치 외에도 칼리굴라는 자기 신성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제국 동부에서 그리스인들이 본인이 살아 있음에도 벌인 황제 우상숭배, 황제 신격화를 영악하게 이용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본래 로마는 아우구스투스 때부터 동부에서는 황제가 살아 있을 때부터 신격화됐고, 서부에서는 황제가 죽은 뒤에야 종종 신격화됐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가이우스가 로마 팔라티누스 언덕 위에 본인을 위한 두 개의 신전을 세웠다"고 적었다. 그렇지만 현재까지도 그 신전을 세운 흔적이나 추가 기록이 없고, 그 신전이라고 불린 것 역시 다른 증거가 없어, 많은 학자들은 디오가 적은 오류로 평한다. 그러면서 심슨, 그라델 등의 근현대 사가들은 고대 기록 일부의 주장과 달리, 이는 신전이 아닌 형태의 황제 권위를 상징한 것이며 이를 통해 그가 귀족들을 통제하려고 했다고 본다.
어쨌든 이런 형태로 칼리굴라는 본인의 권력을 강하는데 집중했고, 이 과정에서 막대한 자금을 대대적인 건축물 건축, 인프라 건설, 로마군 지지 확보에 활용했다.
아울러 그는 로마와 이탈리아 민중의 삶을 개선하고, 도로와 위생 관리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칼리굴라가 암살된 뒤에도 그 호평이 이어졌는데, 그는 기사계급이나 부모의 직업으로 존경받지 못한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베스파시아누스 형제와 같은 이들을 이런 직책에 기용하며, 두 마리 토끼 잡기를 시작했다. 이때 주목을 받게 인사는 베스파시아누스였는데, 칼리굴라는 수도 로마의 도로와 골목 위생 관리를 그에게 맡겼다. 그러면서 전임자와 자신이 임명한 베스파시아누스의 책임감 차이를 보이고자 연출을 보여줬다. 칼리굴라는 "아직도 도로와 거리마다 진흙이 너무 많다. 도로 위생과 청소 책임을 맡게 된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의 깨끗한 토가 위에 진흙을 던져 더럽혀라!"고 명령했고, 깨끗한 토가를 입고 온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를 맞는 쇼를 함께 하면서, 칼리굴라와 그가 직접 후원하고 기용한 베스파시아누스가 어떤 이들보다 책임감있고 진심으로 이 부분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는 계기가 됐다. 이와 함께 칼리굴라는 검투사 경기 중 깡패, 양아치들이 관람석에서 관객들을 폭행하고, 사형 선고를 받게 된 자기 패거리 사면을 요구하자, 이들과 사형수들을 맹수, 검투사들과 싸우게 하라고 명령했다.[38] 허니 로마에서 늘상 있는 이런 부류의 항의는 줄고, 치안은 놀라울 만큼 빨리 안정됐다. 따라서 이는 그가 3년 10개월만에 암살된 뒤에도 로마군, 암살범 20명 남짓을 제외한 프라이토리아니 대부분과 함께 일반 민중들이 그를 지지하고 칼리굴라의 죽음을 복수하겠다고 움직인 힘이 됐다.
이런 행보 속에서 칼리굴라는 집정관에 취임하는 것에 있어서도, 전제군주로서 권력 강화를 함과 동시에, 본인과 그 일가의 영광을 끌어올리는 방식을 모두 노리는 방식으로 움직였다. 그는 물러 나려고 한 현직 정규 집정관들이 공화정 시대의 전통과 아우구스투스 이래의 전통 모두를 위해 임명된 6개월동안 정상적으로 임기를 채워야 한다고 말하고, 그들이 관례상 6월을 끝으로 명예롭게 전직 집정관이 된 뒤에야, 보결 집정관 후보로 나왔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과 함께 할 집정관에 삼촌 클라우디우스를 추천해, 황제와 황숙이 모두의 축복 속에 남은 기간동안 집정관을 하며, 새로운 정부의 출발을 알렸다. 그러면서 그는 아우구스투스가 제정해 강제하고, 티베리우스가 관습화 시킨, "모든 사람이 죽으면 그 재산의 일부는 황제에게도 유산으로 넘긴다."를 정례화한다. 이는 사실 유산세를 법제화하고 재확인시킨 것이며, 애매모호한 황제와 그가 이끈 정부에게 안정적으로 세금을 징세해, 황제 국고에 넣고자 한 명령이었다. 그런데 이는 수에토니우스의 주장 때문에 후일 그가 돈이 없어 사람들에게 강제로 유산을 삥으로 뜯었다는 헛소문으로 퍼지게 된다.
칼리굴라는 연출과 쇼를 극대화하면서, 본인과 황실을 홍보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는 평범한 국가 행사에 참가할 때마다 남신이나 여신을 퍼포먼스하는 듯한 의상을 착용해 행동했으며, 늘 헬레니즘 왕국들의 전제 군주나 후대 로마의 황제들이 연상되는 비단 재질의 화려한 의복을 차려 입었다. 이는 화려함을 거부하고 투박한 토가 차림을 선호했던 티베리우스와는 다른 행보였는데, 원로원과 로마시민들은 젊은 가이우스가 병에 걸리더니 자신을 신격화하는 미치광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또 그는 이전과 달리 검투사 경기를 매우 과격하게 바꾸었으며 전차경기는 칼리굴라의 지원으로 많은 발전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후일 로마인들에게 "가이우스와 네로의 서커스"로 불린 새로운 전차 경주 경기장을 지어 이를 기반으로 황제 본인과 황실의 인기를 크게 향상시켰다.[39]
이 외에도 칼리굴라는 자신의 수호신으로 카스토르와 폴룩스 쌍둥이신을 모티브로 삼고 대대적인 퍼포먼스를 보였다. 이때의 일에 대해 유대인 필로는 칼리굴라가 그들(그리스, 로마) 세계에서 반신으로 분류된 헤라클레스, 카스토르와 폴룩스 쌍둥이 신, 디오니소스 등과 다양한 영웅들의 의상을 입거나, 이들이 했다는 말을 시기적절하게 활용해 주목을 이끌어냈다고 한다. 그러면서 칼리굴라가 머큐리, 베누스, 아폴론 신이 본인과 황실과 교묘히 연상된 무언극과 공연을 열어 인기를 모았다고 한다. 이는 수에토니우스의 주장,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을 참고한 디오의 주장과 대비되는데, 이들은 칼리굴라가 유피테르 코스프레를 했다고 적었다. 그렇지만 대개의 학자들은 필로의 주장이 맞다고 본다. 왜냐하면 디오는 칼리굴라가 귀부인과 귀족들의 지지와 이들에게 주목을 얻고자 유피테르 스타일의 의상을 입었다고만 적었기 때문이다.
이중 칼리굴라가 모티브로 삼고 강조한 신과 영웅은 군신 마르스였다. 디오는 칼리굴라가 종종 본인을 유피테르라고 적었다고 하는데, 심슨 등의 학자들은 일관되게 칼리굴라가 마르스와 본인을 동일시하면서 그에게 대리권을 받았다고 했던지, 아니면 본인을 유피테르로 서명하면서 그에게 대리권을 받은 인간으로 표현했던지 간에, 이는 당시 로마 세계와 헬레니즘 세계에서 지극히 전형적인 군주의 권력 강화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필로가 적었듯이, 칼리굴라는 확실히 본인을 살아 있는 신이라고 주장하기 보다는 이들에게 신성함을 얻은 존재라고 했고, 본인이 가진 직위인 폰티펙스 막시무스로서의 책임을 성실히 이행해, 본인을 중심으로 한 로마인 전체가 유피테르, 야누스, 국가 여신 로마, 군신 마르스에게 현신하는 모습을 꾸준히 보였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는 암살되기 전까지 본인과 황실의 위엄을 위해 쌍둥이신을 적극 활용했다. 이 쌍둥이신은 그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 숙부 소 드루수스가 칼리굴라 나이 무렵 로마인들에게 사랑받을 때 비유된 신들이었다. 아울러 그는 지중해 동부 헬레니즘 군주나 공화정 시대 일부 귀족들처럼 참석자들의 충성심 확인, 위상 향상을 목적으로 매일 화려한 만찬을 벌이는가 하면 자신을 태워다준 인부에게 대한민국 한화로 약 2000만 원이나 해당하는 금액을 하사하고 각종 여러 희귀동물들을 매우 비싼 값에 구하는 등 너무 많은 엔터테인먼트를 벌였다.
그러나 그의 이런 퍼포먼스와 현금을 활용해 연금, 상여금으로 원로원을 조금씩 본인 편으로 포섭하고 견제한 형태는 반대파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됐다. 대부분이 소비에 집중해 있고, 아우구스투스 시대때 계획되거나 취임 후 해야 했던 각종 보수 공사 등 티베리우스 시대 이래 중지된 공공건물 건축 분야, 황실 어른들의 유언장 집행 등이 많아 소문으로 칼리굴라가 돈을 펑펑 쓴 인물로 묘사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리굴라의 정적인 세네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자체를 혐오한 수에토니우스, 이들의 기록을 참고한 디오 카시우스 등은 칼리굴라가 끝내 많은 돈을 쓰고, 늘 돈이 부족하게 됐다고 적고 있다. 이중 수에토니우스는 티베리우스를 가루되듯이 씹어대면서도, 칼리굴라가 선황 티베리우스가 긴축정책을 펼치며 쌓아둔 국고가 1년 만에 바닥이 나버렸다고 적었다. 이때 수에토니우스는 소문에 따르면 칼리굴라는 카이사르 집안의 잡다한 물건들과 노예들을 경매로 팔고, 매춘부들에게도 세금을 거뒀으며, 부자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물게 했다고 한다. 또 자신을 상속자 이름에 넣게 해서 부족금을 메우려 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칼리굴라는 중병에서 회복된 이후 광폭행보를 보여줬다.
동맹국, 보호국 왕족들이 서로 자기 혈통이 잘났다고 떠들었을 때, 그는 일갈해 입을 닫게 했다. 증조부 아우구스투스, 종조부 티베리우스가 대놓고 하지 않던 황제 숭배를 노골적으로 공식화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태양"인 네오스 헬리오스로 자신을 묘사해, 제국 동부와 이집트 등지에 발행될 주화에 황제 스스로를 태양관을 쓴 태양신의 동일인 내지 헬레니즘 세계의 통치자로 새겨 넣도록 했다. 최근 발굴된 카메오에서 드러나듯, 로마 국가 여신인 로마 여신과 칼리굴라가 함께 있는 모습으로 새기게 하고 실제로 이를 제작했다. 칼리굴라는 제국 전역의 동상 중 신들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이 연상되게 만든 것들로 교체토록 명령했고, 원로원 의원과 접견할 때 일종의 예법을 만들고 공문서상에 군신 마르스의 서명을 추가해 "폐하", "주군" 비슷한 칭호를 고안했다.
로마 가도 개보수, 각 도시의 성벽 및 신전 수리, 알프스 산맥에 세울 요새 도시 건설 입안 및 사전 조사 등도 황제 주도의 각종 인프라 계획 발표를 통해 공개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래서 이런 칼리굴라의 노골적인 태도에 원로원은 큰 불만을 품었다. 이런 탓에 원로원과 기사계급 부자들은 그가 미쳤다고 의심했다고 수에토니우스 등은 주장한다. 그런데 수에토니우스의 말에 따르면, 가이우스는 중병 이후 자신이 증상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칼리굴라는 수에토니우스 기록과 오늘날 알려진 이미지와 달리, 여러 연구에서 보여지듯 미치광이가 아니었다. 그는 강렬하게 자기애를 드러내면서 프린켑스로서의 본인을 강조했지만,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처럼 도저히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정신병자 또는 과대망상에 빠졌던 200여년 뒤의 황제는 아니었다. 먼저 칼리굴라는 주변에게 모든 권한을 대리시키지 않고 직접 통치했다. 아울러 재위 기간 내내 정규집정관 또는 보결집정관에 재임하면서 정국을 끌었으며, 건강 등을 이유로 원로원 회의에 불참하지도 않았다. 이는 정무를 보고 결정을 내리는 것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물 공급을 위해 즉위 후 로마 시에 수도교 2개를 건설했다. 오늘날에도 일부 남아있는 클라우디아 수도교(아쿠아 클라우디아)와 아니오 노부스인데, 모두 클라우디우스때 완공됐다. 이 수도교들은 유이하게 엄청난 인구 수를 자랑하는 로마 시내까지 깨끗한 물을 공급해줬다.
또한 이 황제의 명으로 티베리우스때 중지된 공공시설 건설도 다시 시작해 아우구스투스 신전과 폼페이우스 극장을 완공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들과 행보는 37년 이후 짦은 밀월 이후부터 원로원 귀족층과 부유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칼리굴라가 원로원의 뜻대로 티베리우스 시대때 벌어진 반역 재판 재조사 명령한 조치는 그 시작이었고, 이 사건 이후부터 칼리굴라는 암살된 순간까지 원로원의 암살음모에 시달렸다.
로마 원로원은 서기 26년 티베리우스가 스스로 카프리 섬으로 떠난 이후, 10년여 동안 황제 없이 통치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칼리굴라가 로마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부터 아우구스투스 시대처럼 하길 원한다고 함에도 칼리굴라가 계속 로마에 남아 있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이런 상황에서 칼리굴라는 중병에서 회복된 이후, 원로원의 숙원을 풀어주고자 티베리우스 시대에 벌어진 반역 재판 기록을 재검토해준다. 이 판결들은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갈루스 등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아우구스투스 일가를 따른 친 황제파 원로원 의원과 비 황제파 원로원 의원들의 신원을 복구한 조치로 진행됐는데, 원로원은 칼리굴라가 이전 시대의 재판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새로운 일련의 조사, 고발자들에 대한 기소와 재판을 명령하자 갑작스레 칼리굴라에게 불만을 표시하고 저항했다. 이는 칼리굴라와 원로원 사이의 끝없는 갈등의 시작이었다.
이렇게 되자 칼리굴라는 어이가 없다는 듯, 반박을 하고 새로운 일련의 조사와 재판을 진행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러면서 칼리굴라는 원로원의 숙원을 이뤄주겠다고 밀어붙였다. 그러자 원로원은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와 비슷하게 행동한다면서 그를 대놓고 미워하기 시작했다. 칼리굴라가 원로원이 힘이 없음을 알고 원로원과 파워싸움을 노골적으로 벌인다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이는 카프리 섬에서 제왕교육을 티베리우스에게 배우며 원로원을 경계할 것을 익힌 칼리굴라가 종조부의 조언에 따라 힘 대 힘으로 맞붙는 사태로 확산됐다. 따라서 원로원은 이때부터 칼리굴라가 하는 것은 모두 딴죽을 걸었고, 칼리굴라는 이를 주동한 두 집정관과 여러 인사들을 반역죄로 기소해, 재판에 넘겨 모조리 처벌하는 것을 시작으로 강하게 맞대응했다.
결국 칼리굴라는 재위 1년여 만에 본색을 드러낸 원로원과 힘싸움을 벌였고, 과거의 티베리우스처럼 원로원과 정치적 결별을 하게 된다. 그는 이때부터 이전 권력자들과 비교해도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자신과 카이사르 가문을 신격화하면서 티베리우스 재위 후반 방식으로 황제권을 위협하는 반대파들을 견제하는 통치술을 구사하게 된다. 이는 그가 제위에 오르기 전까지 복점관 외에는 뚜렷한 공직조차 맡지 않은 상태라서, 이런 부분에서도 고도의 정치력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과거의 평에도, 살아남기 위해 상당히 현명한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2.6. 후계 계획과 레피두스 음모 사건
중병 이후, 가이우스는 자신이 젊고 건강하다고 해도 급사할 수 있고, 원로원이 자신의 존재 자체를 증오함을 두 눈으로 본 뒤 그들을 견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급사할 경우를 대비해, 둘째 여동생 드루실라와 그 남편 레피두스를 나란히 후계자로 지정한다. 이는 자신이 급사할 경우, 아우구스투스의 혈육인 오랜 친구 레피두스가 징검다리 식으로 제위를 물려받고 젊은 레피두스, 율리아 드루실라 부부의 아들이 그 다음을 잇게 하겠다는 계산 아래 지명된 시나리오였다. 이와 함께 그는 카이사르 가문 안에서 자신을 제외한 유일한 남자황족인 삼촌 클라우디우스의 혼처를 구해, 방계황족 메살리나와의 결혼을 주선해 결혼식을 올리게 했다. 그러면서 삼촌에게 조언을 구하고, 아버지와 삼촌의 오랜 친구였던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로 대표된 친 황제파 인사들에게 의견을 묻고 그를 통해 정책을 꾸리는데 주력한다.이 조치 중 자신에게 호의적인 둘째 여동생 율리아 드루실라 부부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이들 부부의 자녀가 태어나면 황족으로 대우한다는 결정은 단순한 조치가 아니었다. 이는 바로 아래의 여동생 소 아그리피나에게 이미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훗날의 네로)라는 아들이 있음에도, 자신이 아낀 둘째 여동생과 오랜 친구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외외증손 레피두스의 추정 자녀가 카이사르 가문에 속한다는 의미였다. 즉, 칼리굴라는 외조카 네로에게 제위를 보장하지 않았고 배제하는 결정을 내렸다. 따라서 가이우스는 이때부터 둘째 여동생 율리아 드루실라에게 특권을 부여하고, 레피두스에게는 오직 아우구스투스의 직계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내 카이사르 가문 남성들만 부여된 "남들보다 5년 일찍 모든 공직에 취임할 수 있다"는 특권을 내린다.
하지만 가이우스의 계획은 여동생 율리아 드루실라는 서기 38년 로마를 휩쓴 열병에 걸려 사망하면서 꼬이게 된다. 따라서 그의 야심찬 후계계획에 브레이크가 걸린다. 그렇지만 그는 율리아 드루실라를 율리우스 가문의 시조로 여겨진 미의 여신 '비너스'와 연계지어 그녀를 신격화하고 애도를 국가 장례로 표하게 한다. 또 죽은 여동생에게 여러 명예를 수여해준다. 그래서 이를 이유로 나오게 된 소문이, 수에토니우스가 주장한 여동생들과의 근친상간 루머다.
누구보다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고, 어린 시절부터 친했던 둘째 여동생 사망 이후 가이우스는 후계를 얻기 위해 여러 번에 걸쳐 결혼과 이혼을 반복한다. 이는 후일 그가 암살된 뒤, 즉위 8개월여간의 빵과 서커스와 엮여 국고를 낭비하고 사생활이 문란하다는 그 악의적 소문의 근거가 되게 된다. 이때 그는 빨리 후계자를 얻고자 출산 경험이 있어 불임이 아닌 것이 확실한, 젊은 로마 귀부인들을 신붓감으로 택했다.[40] 그의 마지막 아내는 코르불로의 여동생으로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세 명의 딸을 낳은 밀로니아 카이소니아였다. 밀로니아 카이소니아는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처럼 난잡하고 음탕한 여인은 아니었지만, 가이우스와 연인이 되기 전 이혼했고 황제와 연애 중 임신하고 결혼식을 올린 탓에 인기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가이우스는 카이소니아에게 자신의 첫 혈육 율리아 드루실라를 얻은 뒤, 자신이 더 많은 자녀를 얻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렇게 후계 구도를 차근차근 쌓은 가이우스는 서기 39년 갈리아 원정 직전과 그 해에 연이은 암살 미수 사건으로 충격을 받는다. 자신이 믿고 임명한 현직 법무관 율리우스 그라에키누스[41]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가 꾸민 범죄를 눈감아주면서 처벌을 요구한 명령을 어기고, 반역죄 근거가 명확함에도 자신에게 들이 박으면서 반항하지 않나, 원로원 귀족들이 툭하면 자기 목숨을 노리는 상황이 일상화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젊은 황제의 행동은 적법 절차를 거친다고 한들 무자비해졌다. 법무관 율리우스 그라에키누스는 열받은 황제에게 즉시 반역죄 및 명령 불복종으로 고발돼, 재판에 넘겨진 뒤 처형됐다.
이렇지만 이런 원로원의 계속된 음모보다 그를 충격에 빠뜨린 것은 오랜 친구인 율리아 드루실라의 옛 남편 레피두스가 자신의 두 여동생 소 아그리피나, 율리아 리빌라와 공모해 벌인 암살계획 사건이었다. 이렇게 되자 칼리굴라가 반역 이야기만 나오면 과격하고 변덕스러운 황제로 행동하면서 더 강하고 무자비하게 행동한다.
어린 시절부터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여동생들까지 합류해 벌인 궁중음모는 친혈육들과 애착이 큰 가이우스 황제를 큰 충격에 빠뜨렸다. 반역 재판에서 레피두스와 두 여동생이 "가이우스를 이렇게 이렇게 죽이자", "다른 방법도 있다" 등의 서한을 보낸 실제 증거가 적나라하게 나오자, 칼리굴라는 이성을 잃을 정도로 분노했다. 그를 더 충격에 빠뜨린 것은 자신이 누구보다 믿은 레피두스가 재판정에서 증거가 명확하다며 이를 인정한 부분이었다. 이에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칼리굴라는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반역죄로 처형, 두 여동생은 간통죄와 반역죄 혐의로 모든 재산을 압류하고 각각 다른 섬으로 종신 유배형에 처하도록 했다. 디오에 따르면, 가이우스(칼리굴라)는 여동생 소 아그리피나를 반역죄로 심문하던 중, 그녀와 부적절한 육체적 관계를 갖던 오포니우스 티겔리누스[42]의 불륜을 알고, 티겔리누스 역시 간통죄로 추방시켰다고 한다.
2.7. 원로원과 귀족들의 암살 시도
현대 연구들에 따르면, 칼리굴라는 짦은 밀월 이후부터는 전임자 티베리우스 이상으로 원로원에게 암살 위협을 실제로 시달렸다고 한다. 수사체 문장으로 애매모호하면서도 확실하게 문구를 적은 타키투스 역시 《티베리우스》 편과 《클라우디우스》 편에서 사라진 《가이우스 카이사르(칼리굴라)》 편의 내용의 직간접적 서술의 분위기와 직간접적 서술을 보여주면서 젊은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수없이 암살음모에 시달렸음을 언급하고 있다.원로원과 로마의 오래된 공화정기 귀족들은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7년 1월 사실상 제정을 열었을 때부터 현직 프린켑스와 그 일가 암살을 수없이 시도했다. 그렇지만 이 시도들은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의 계속된 견제와 강력한 대처로 모두 무산됐고 그들은 반역죄, 간통죄, 비리혐의 등으로 줄줄이 박살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가문까지 박살나고 몰락귀족으로 전락했다. 그렇기에 로마 귀족과 원로원은 칼리굴라가 즉위하기 전부터 아우구스투스 직계 남자황족들을 모두 죽이고 싶어했고, 현직 프린켑스를 없애려고 하거나 회의 등에서 자신들의 불만과 분노를 직간접적으로 표출했다. 이는 칼리굴라 시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젊은 황제와 원로원 간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인 서기 39년 초부터 양 측의 힘 대결은 본격화됐다. 이때 원로원과 귀족들은 젊은 황제와 아우구스투스 직계 일가에게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하고 적대심을 표출했다. 이중 게르마니아 사령관인 렌툴루스 가이툴리쿠스는 황제 암살을 직접 계획해 무리를 만들던 세력을 꾸린 중심인물이라서, 칼리굴라는 서기 39년 9월 느닷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빠르게 갈리아를 방문했다. 이때 그는 삼촌 클라우디우스를 비롯한 아우구스투스 직계 남자친족들과 함께 갈리아의 루그두눔에서 증조부 아우구스투스, 조부 대 드루수스, 선친 게르마니쿠스의 업적을 다시 한번 강조한 뒤, 재빨리 라인강으로 향했다. 이는 게르마니아 사령관으로 군세를 모아 황제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없앨 세력을 모으던 렌툴루스 가이툴리쿠스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는데, 황제의 빠른 대응에 가이툴리쿠스는 무력 대응도 못하고 반역죄로 즉시 체포됐다. 이때 황제와 친황제파 인사들은 게르마니아 방문 직후 가이툴리쿠스를 해임한 뒤, 그에게 증거를 들이밀고 무능함과 반역혐의로 기소했다. 이에 가이툴리쿠스는 체념 후 곧바로 자결했다.
이 사건 외에도 원로원 귀족들은 여러 번에 걸쳐 칼리굴라와 그 일가를 비난하면서, 대립각을 세웠다. 웅변가 카르리나스 세쿤두스는 수사학으로 갓 즉위한 칼리굴라와 그 조상 아우구스투스, 종조부 티베리우스를 폭군이라며 독설을 퍼부었다가, 추방됐고 그나이우스 피소의 아들 루키우스 피소는 제비뽑기로 아프리카 속주 총독에 선출되자, 특유의 거만함과 오만함을 드러내면서 누미디아 쪽의 군세를 이용해 반란을 일으키려는 조짐을 보여 칼리굴라가 의심하면서 그를 파견한 다음 감시했다고 한다. 이는 원로원 상황도 비슷했는데, 디오에 따르면 귀족적인 민주주의 절차에 따라 집행된 선거를 철저히 무시한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처럼 가이우스 역시 원로원의 바램과 달리 과거로 조치를 회귀하지 않아 문제를 일으켰다고 한다. 그래서 원로원은 가이우스가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처럼 상황에 따라 법무관 정원을 전부 뽑지 않고, 15명을 뽑을 때도 있고 1명이나 1명 미만을 뽑는 조치에 그 불만이 상당했다고 기술했다. 그러면서 디오는 칼리굴라의 이런 태도는 아마도 그가 (원로원을) 오롯이 믿지 않고, 전임자들처럼 시기하고 의심하고 두려워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적었다.
그보다 앞선 서기 39년, 칼리굴라는 원로원에서 자신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와 두 형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억울하게 세야누스의 음모로 고발돼 처형된 일을 직접 언급했다. 이때 가이우스는 “원로원이 율리우스 가문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는데도 사실상 방치한 세야누스의 공범”이라고 맹비난했다고 한다. 과거 칼리굴라는 어머니와 두 형이 비극 속에 처형되는 과정에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을 정도로 감정 조절을 잘 해내면서 위기를 넘겼고, 가족들의 장례식에서도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원로원에서는 칼리굴라가 그토록 원망 섞인 지적을 함에 적잖이 놀랐다.
그리고 이 해, 칼리굴라는 자신의 어머니 대 아그리피나를 고발하고 두 형을 죽이려는 음모에 가담한 도미티우스 아페르를 대단히 미워해, 그에게 적개심을 드러냈다고 한다. 다행히 그는 화를 입지 않았는데, 이 사람이 위기를 모면하고 황제에게 용서받은 이유는 간단했다. 디오에 따르면, 도미티우스 아페르는 당사자인 아그리피나에게 잘못을 구해 용서받았고, 이후 27살이었던 가이우스(칼리굴라)를 위해 손수 아그리피나를 추모하는 비문을 만들어 주면서 재차 용서를 구했다고 한다. 하여 자연스레 황제에게 용서를 받았다고 한다. 이와 함께 그는 즉위 직후부터 자신의 웅변술을 자랑하고 싶어한 칼리굴라의 웅변술을 유일하게 찬사보낸 웅변가라서, 이 부분에서도 황제에게 미움을 사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도미티우스 아페르의 처세술은 대단했는데, 그는 기소된 법정에서 자신과 웅변술과 변호를 위한 수사학으로 맞붙은 가이우스와 논리로 따지기 보다는, 일부러 황제의 주장을 경청하면서 맞장구치고 때론 땅에 몸을 던져 엎드려 고소인에게 피고 본인이 탄원 역할까지 하면서 가이우스에게 감동을 줬다고 한다. 이런 아첨을 통해 게르마니쿠스, 아그리피나 부부의 해방노예이며 칼리굴라 황제와 두 형, 고모부 소 드루수스를 대신해 도미티우스 아페르를 고소한 칼리스투스의 고발은, 칼리굴라의 용서로 끝났다. 반면, 웅변술로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세네카는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칼리쿨라가 인기가 높은 세네카를 시기해서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하지만 이후 세네카가 곧 병으로 죽을 것이라는 첩보를 듣고는 굳이 사형을 내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칼리굴라는 사형선고를 취하해주었고 세네카는 그 후 병에서도 회복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칼리굴라가 갈리아로 떠나던 해 9월, 두 집정관이 모반을 계획한 것을 이유로 기소됐다. 이때 칼리굴라는 큰 충격을 받고, 이례적으로 두 집정관을 모두 직권 면직시켰다. 이는 오늘날 연구들을 통해 분석되듯이 사실로 보여지는데 이례적인 집정관 2명을 모두 면직처리한 사건은 원로원 전체를 벌집 쑤시듯 혼란의 소란돌이에 빠뜨렸다. 이후 칼리굴라는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페르를 집정관에 추천해 당선시켜줬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도미티우스 아페르는 대담하게도 악티움 해전을 기리는 행사를 주최하면서, 아우구스투스의 증손자이면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증손자인 칼리굴라의 가계를 알고 있음에도 의도적으로 아우구스투스를 띄우는 척 하면서 비판하고 안토니우스는 더 크게 비난해 큰 소란을 일으켰다. 디오에 따르면, 이는 도미티우스가 잘못한 일이라고 하는데, 이 사건은 자신과 가문에 대한 도전에 상당히 과민반응하는 칼리굴라를 단단히 화나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황제가 손수 추천해 취임한 집정관임에도 눈치껏 행사를 하지 못한 죄로 면직 처리됐다.
그리고 다음해인 40년, 실제로 젊은 프린켑스의 목숨을 노린 음모가 드러났다. 그 처음 사건은 칼리굴라가 그토록 아낀 둘째 여동생 율리아 드루실라의 전 남편이자 오랜 친구였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칼리굴라의 살아 있는 두 여동생 소 아그리피나(네로의 어머니), 리빌라가 포함된 황실 음모였다. 이에 칼리굴라는 레피두스를 반역 주범으로 추방시켰다가 처형시켰고, 두 여동생은 지중해에 떠 있는 폰티아이의 작은 섬들로 유배보내고 그들의 전 재산을 압류했다.
같은 해(서기 40년) 8월 31일, 칼리굴라가 로마로 돌아와 정무를 보던 중 재차 황제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졌다. 이해 1월 칼리굴라가 루그두눔에서 세번째 집정관으로 취임할 때부터, 아니 훨씬 전인 티베리우스 사망 직전부터 로마 분위기는 요상하게 흘러갔기 때문에 예상된 일이었으나, 이번 사건은 또 다시 로마에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주동자는 비텔리누스 카시우스라는 젊은 원로원 의원과 그 아버지 카피토 등이었는데, 계속된 암살 시도에 황제는 강하게 대응했다. 증거가 명확한 까닭에 칼리굴라는 이 부자와 그 협력자들을 색출해 잇따라 반역죄로 기소 후 유죄를 내리고 죽였다.
따라서 칼리굴라는 친족이라고 해도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면, 과거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와 마찬가지로 반역법에 따라 강하게 견제하거나 처벌했다. 법에 따라 반대파들의 재산은 압류됐고, 고소를 거절한 법무관 등은 명령불복종 등으로 처형됐다.[43] 또 이 시기부터 칼리굴라는 원로원 귀족들의 가족을 궁 안에서 살게 하도록 해 반대파 귀족들과 그들의 자제들을 인질로 삼으면서 친황제파로 육성하려고 했다.[44] 따라서 이러한 행동들이 위와 같은 비방성 소문 외에도 ‘황제가 돈이 궁해 황궁 안에 귀족 아이들을 집어 넣고 매음굴을 설치했다’, ‘황제의 사생활이 문란하다’ 등의 새로운 괴담까지 재생산돼 민심까지 악화됐다. 그런데 실제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의 엄청난 유증금을 너무 빨리 써버린 까닭에 황제가 직접 운영하던 검투사 훈련소의 검투사들을 막대한 가격을 매겨 부자들에게 경매식으로 넘겨 황실 경비로 충당했다. 반면, 칼리굴라는 자신과 율리우스 가의 입지를 강화시키고 본가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위상까지 높일 목적으로 48살이었던 작은아버지 클라우디우스를 15살의 방계황족 발레리아 메살리나와 결혼을 주선해 결혼시켰다. 동시에 여러 행사와 퍼포먼스를 통해 노골적으로 원로원을 무력화시키고 원수정 프린켑스 권력 강화에 힘쓴 조치들을 취했다.
이런 조치 외에도 칼리굴라는 서기39년 두 집정관의 황제 암살시도 미수 사건 이후, 재차 집정관에 취임하면서 본인에게 충성할 인재들을 기용했다. 바로 아내 밀로니아 카이소니아의 오빠 코르불로, 플라비우스 왕조의 창건자 베스파시아누스가 그 대표적인 인재들이다. 이때 칼리굴라는 보결집정관에 코르불로를 추천해 당선시켰고, 이듬해인 40년도 법무관에는 세리 출신 기사계급의 무명 베스파시아누스를 밀어줬다. 아울러 그는 삼촌 클라우디우스 등을 이후의 게르마니아 원정길에 동행시키면서 보다 측근세력 양성에 힘을 쏟았다. 이때 그는 프린켑스 권한을 강화하는 조치들을 취하면서 고전의 한 문구를 인용했다. 그 문구가 바로 "나를 두려워하기만 한다면 날 증오해도 상관없다."인데, 재위 3여년만에 암살 시도를 겪은 그는 보다 노골적으로 원로원과 힘싸움을 벌였다. 이때 원로원은 노골적으로 자신들을 압박하던 프린켑스에게 밀렸고, 무력함을 느꼈다.
칼리굴라는 프린켑스의 안정적인 물가 조절권 확보 등을 목적으로 원로원이 가지고 있던 조폐 발행권을 황제 속주인 갈리아 루그두넨시스의 주도 루그두눔(리옹)[45]으로 이전시켰다. 또 원로원이 임명권을 가지고 있던 일부 속주 총독 파견권까지 황제가 행사하도록 바꿨다.[46] 이전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시대를 거치면서 프린켑스의 거수기로 전락함을 강하게 느끼고 있던 원로원은 젊은 20대 황제에게 자신의 애마를 집정관에 앉혀야 되는 것 아니냐라고 농담을 듣게 될 정도로 자신들의 무력감을 체감했다. 따라서 원로원은 일찌감치 칼리굴라에 대한 환상을 버렸고, 황제와 원로원의 좋았던 관계는 갈수록 험악해졌다.
이런 까닭에 대 플리니우스의 기록을 제외하면 칼리굴라 암살 이후 수십년이 지난 뒤 저술된 남아있는 기록들은 전부 병을 앓고 난 이후부터 황제의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서술되고 있다. 그런데 칼리굴라가 미쳤다고 주장한 기록 중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황제 본인도 중병을 앓고 난 이후부터는 본인 스스로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수에토니우스는 <황제열전> 중 <가이우스> 편에서 칼리굴라가 종종 갑작스러운 어지럼증으로 걷거나, 서 있거나, 생각을 하거나, 머리를 들고 있기를 힘들어할 때가 있었다고 한다. 이때 칼리굴라에게 불면증은 가장 큰 고통이어서 기껏해야 3시간밖에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마저도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침대에 앉아 있거나 긴 주랑을 헤매며 어서 태양이 뜨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멀리서 천둥소리만 들려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질끈 감았고, 폭풍우가 다가오면 침대에서 뛰쳐나와 그 밑으로 기어들어가 숨기도 했다. 이런 내용들을 종합해볼때, 현대 학자들은 심한 중병을 앓은 이후부터 고열로 인해 뇌손상이 생겨(뇌세포는 고열에 매우 취약하다) 환각을 경험하게 되는 등 뇌병변장애가 발생한 것에다, 하마터면 죽을 뻔한 것에 대한 심리적 방어기제로 인해 자신을 불멸자의 위치에 두려고 한 노력이 겹쳐 이러한 이상행동이 생긴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중병 이후 “최고 권력자인 자신이 없어도 세상은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부터 과격한 방법들을 실행에 옮겼을 거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2.8. 게르마니아 원정
칼리굴라는 즉위 당시부터 할아버지, 아버지가 맹활약한 게르마니아 전쟁에 대해 자랑스러워 했고, 자신 역시 대를 이어 이 전쟁을 마무리짓고 할아버지와 아버지 못지 않은 영예와 영광을 가져야 한다는 열망에 휩싸였다고 한다. 따라서 39년 9월, 두 집정관이 모반을 계획한 것을 이유로 모두 직권 면직시킨 직후[47] 칼리굴라는 예정대로 로마를 떠나 갈리아 북부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새로 2개 군단을 모집했고, 할아버지 드루수스때부터 인연이 깊은 루그두눔에서 겨울을 보냈는데 이런 황제의 행동은 원로원 입장에서 서술한 타키투스에 따르면 느닷없이 진행된 갈리아 출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근대 이후 연구들을 통해 살펴보면, 이때 칼리굴라의 느닷없이 벌어진 게르마니아 출정길은 드루이드 문제 등으로 안전상 큰 위협을 겪던 갈리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브리타니아 원정을 계획한 군사행동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당시 원로원은 칼리굴라의 행동에 대해 “느닷없다”로 생각해 반응하면서 무계획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부분에 대해 크게 태클은 걸지 않았던 것을 볼 때 로마 지도층 역사 갈리아 일대의 상황 해결에는 일정부분은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처럼 과대망상적 광기로 진행된 일로 완전히 치부되지 않았다. 그러나 칼리굴라가 갈리아 북부를 침공하여 브리타니아 야만족들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실제 군사행동도 벌인 것은 성과가 미미했기 때문에 사후 그가 비난받는 이유 중 하나가 됐다.루그두눔을 떠나 갈리아 북부로 가던 칼리굴라는 로마에서부터 꾸준히 이 일대의 정황을 보고 받은 상태에서 발 빠르게 라인강변의 게르마니아로 향했다. 이때 그는 이 지역 내 보고를 원로원 등과 함께 보고받으며 게르마니아에 진입했는데, 이야기에 따르면 황숙 클라우디우스 등 칼리굴라 시대의 주요 황실, 정부 인사들이 함께 했다고 한다. 이 당시 라인강 주둔 사령관은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이툴리쿠스였다. 일부 고대기록에 따르면 라인 방어선 주둔 군단병들을 형편없이 다뤄 기강이 형편없었고, 무능한 장군인 그가 억울하게 피살된 양 서술되어 있다. 따라서 칼리굴라는 가이툴리쿠스를 형편없는 기강 문제에 대한 책임과 음모 혐의를 이유로 면직시킨 뒤 10월 18일 모반죄로 처형시켰다는 식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상술한 것처럼 가이툴리쿠스는 로마에서 벌어진 황제 암살 미수 세력의 주동자였고, 칼리굴라의 빠른 방문은 이를 저지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그래서 가이툴리쿠스는 반역죄로 기소돼 체포 직후 증거가 명확해지자, 어떤 저항이나 대꾸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렇게 상황이 정리되자 칼리굴라는 자신을 따라온 원로원 내 군 전문 인사들의 조언을 받아 새로운 라인 주둔 사령관으로 훗날 황제가 되는, 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파에 속하는 명문 귀족 갈바[48]를 임명한다. 갈바는 가이툴리쿠스와 달리 엄하게 라인 주둔 군단병들을 훈련시킨 뒤 기강을 잡았고, 다시 황제와 카이사르 가문에 대한 충성을 받도록 분위기를 세운 다음 상 게르마니아 일대의 게르만족들과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이 전투는 이겼음에도 무언가 애매한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따라서 상 게르마니아 일대에서 성과를 내지 못한 칼리굴라는 전투 후 해안을 타고 서쪽으로 행군하면서 브리타니아 원정길에 올랐다. 이때 칼리굴라가 한 일은 브리타니아의 코 앞에서 병사들에게 해변에서 조개껍질을 줍게 하라는 정신나간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이 부분은 19세기부터 꾸준히 의심받았고, 수에토니우스가 의도적으로 musculi 등의 몇몇 단어를 조개 같은 단어로 바꿔서 왜곡, 전달했다는 것이 확인된 터라 많은 의심을 받고 있다. 따라서 이때 칼리굴라가 갈리아의 루그두눔에서 겨울을 나던 해에, 새롭게 브리타니아 원정에 필요한 2개 군단을 창설하면서, 공성무기를 만들도록 지시했다는 명령을 학자들은 주목 중이다. 이는 클라우디우스 즉위 이후, 로마군의 브리타니아 원정과 병참 운용이 생각 이상으로 빨랐던 이유 속에서 정황상 확실해 보인다고 평가받는다. 여기에 더해 칼리굴라는 브리타니아의 카투벨라니 부족과 갈리아 북부에서 전투를 치르고, 아드미니우스에게 항복받음이 1990년대에 밝혀져, 그가 등대를 세우면서 기념비를 세운 것 역시 재조명 받고 있다.[49]
즉, 조개껍데기 줍기라는 주장이 거짓으로 밝혀진 상황 속에서, 기존의 반박 중 바다를 두려워하는 병사들이 항명을 저지른 걸 반역죄로 처벌하는 대신 조개줍기로 모욕을 주었다는 의견, 언제 작전이 실행될지 몰라 대기하던 병사들이 대기 기간 중 부업삼아 조개껍질을 주워 석회 제조인에게 팔려고 한 것이라는 의견 등 역시 일정 부분 해결이 된 셈이다. 그렇지만 이 당시 로마는 칼리굴라와 그를 따라 갈리아와 게르마니아를 돌아다닌 로마군 장군들, 원로원 의원들이 브리타니아 원정을 원했음에도, 40년 5월 로마 귀환을 한다. 공성무기 제작, 군량 확보, 브리타니아 일대의 우호세력 확보 등을 칼리굴라가 명했음에도, 당시 상황상 섬 상륙 후 위험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브리타니아 원정의 필요성은 분명했기 때문에, 당시 조카와 함께 이 과정을 진두지휘한 황숙 클라우디우스는 즉위 후 이를 강행한다. 3년 뒤의 일인데, 이때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브리타니아에 친정하여 브리타니아를 정복하는 데 성공한다.
이와 함께 칼리굴라는 그리스 지역의 경제 부흥을 위해 반도 지협에 운하를 뚫는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을 했음에도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칼리굴라가 저지른 실책을 가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칼리굴라는 점성가가 살아 생전 티베리우스에게 한 예언[50]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나폴리 만에 배로 다리를 만들어 말을 타고 건너며 제우스와 알렉산드로스 대왕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칼리굴라가 저지른 가장 큰 실책으로 거론되는 부분은 게멜루스를 죽였던 것과 비슷한 이유를 들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피를 이어받은 마우레티니아 왕 프톨레마이오스를 소환해 잔인하게 죽인 것이라고 한다. 또 칼리굴라는 팔리티누스 언덕에 자신의 신전을 세운 뒤 상류층들에게 막대한 돈을 기부하고 자신을 경배하라고 했다. 이 행동은 동방 헬레니즘 군주들이 권력 전제화를 위해 사용한 자기 신격화의 칼리굴라적인 표현이었는데, 죽은 사람을 신격화시킨 적이 있는 로마인들에게 보편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이어 그는 제국 전체에 명을 내려 대대적인 황제 신격화를 홍보케하고 에루살렘에 있는 신전을 율리우스 황실을 위한 신전으로 바꾸도록 지시내렸다. 이 조치들은 암살 직전 내려진 명령이었는데, 원로원 내 반대파들에게 황제와 율리우스 황실의 대대적인 전제군주화 조치로 받아들여졌다.
2.9. 마우레타니아 병합
로마는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아래에서 안정적으로 정복지, 보호국을 차례차례 속주화시켰고, 팽창전략을 포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칼리굴라 시대의 로마 원로원과 로마 관료들 역시 칼리굴라가 이전의 폼페이우스, 안토니우스 그리고 선대의 두 프린켑스처럼 대외팽창 정책을 고수하는 전략을 취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리고 이 무렵, 칼라굴라 아래에서 원로원 지도부와 군부 내에서는 티베리우스 시대부터 논의되던 마우레타니아 문제가 표면화됐다.지리적으로 북아프리카에 있지만 히스파니아 지방(오늘날의 이베리아 반도) 아래에 있는 마우레타니아는 오늘날의 모로코이다. 이 당시, 마우레타니아는 로마의 보호국이자 동맹국으로, 왕국의 국왕은 유바 2세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였다. 마우레타니아 왕국은 그리스어와 라틴어 실력이 뛰어나고 자연사, 지리, 과학 분야에서 여러 저서를 남긴 유바 2세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쌍둥이 중 딸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왕비 아래에서 문화, 경제적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이때가 티베리우스 때인데, 이런 상황에서 유바 2세가 죽고 그 다음 제위는 '로마의 친구'이자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소 드루수스의 오랜 친구인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가이우스 황제에게 어쨌든 간에 친척 어른이었고, 21살까지 로마의 소 안토니아 집에서 살면서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동년배 남자황족들과 친구인 까닭에 여러 원로원 의원, 장군, 총독들과도 안면 있는 사이였다. 따라서 그는 로마 최상류층들과 친분이 두터웠는데, 로마를 떠난 뒤에도 친로마 행보를 이어나간 까닭에 황제와 원로원은 그가 유바 2세의 뒤를 이었다는 소식에 축하인사를 보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는 어린 시절부터 로마에서 교육을 받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클리엔테스임에도, 일찍부터 헤라클레스의 후손을 자처한 헬레니즘 국가의 후계자였고 그 야심이 대단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유바 2세는 누미디아의 마시니사 대왕의 마지막 직계후손이었고,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후예이였으며 아버지 안토니우스를 통해 로마 황실과도 이어지니 그들이 이어받은 혈통은 능력만 뒷받침된다면 마우레타니아를 넘어 누미디아와 이집트까지 로마령 아프리카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부왕 유바와 모후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스도 비슷했는데, 어쨌든 그는 로마가 딴죽을 걸지 않는 방법으로 나라를 부강시킨 선대의 예를 참고해 마우레타니아를 통치했다. 그는 마우레타니아 왕으로 있으면서 '로마의 친구'이자 '로마의 클리엔테스'를 꾸준히 강조하며 로마를 자극하지 않고 주변국을 다룰 때 로마가 자신의 뒷배인 것을 내세웠다. 그러면서 그는 국내적으로는 부국강병에 몰두한다. 그 시작은 그가 스스로를 사자, 코끼리로 비유하고 헤라클레스의 유일한 후계자로 내세운 일이었다. 이는 제위에 오른 뒤, 아버지 유바 장례식때부터 시작됐는데 이때 프톨레마이오스는 자신의 아버지 유바 2세를 강조하고 어머니 셀레네스를 대왕의 후예로 띄우면서, 자신이 모계를 통해 그 정통성을 보장받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후예임을 내세웠다. 애초에 부모가 대놓고 지어준 이름부터 헬레니즘 군주 중 이집트 파라오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름을 사용한 터라 그 상징성과 권위는 왕국과 주변 헬레니즘 문화권 안에서 큰 인상을 줬다. 이후 그는 전통과 관습을 이유로 헬레니즘 전제군주들이 선호하는 군주 신격화 조치, 가문 신격화 선언 등을 사용하면서 지중해 세계에 자신과 그 혈통을 광고하는데, 영리한 사람답게 이를 잘 포장해 로마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 헬레니즘 정복군주 행보는 티베리우스와 원로원의 신경을 건들게 된다. "저희 왕국의 전통과 선대에서 내려온 통치술입니다"라고 하는 것도, 로마가 바보가 아닌 이상 씨알도 먹힐 리 없었다. 허나 이 당시 로마는 그가 로마의 친구 타이틀을 내세워 보호국의 군주를 자처하면서도, 주변국과 작당해 자신들을 위협하거나 자국 내정에 막대한 로비를 해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 그냥 넘어간다. 이는 당시 황제인 티베리우스의 속주 인사 및 보호국 관리 철학이 티베리우스의 실제 발언인 "상처에 붙은 파리가 피만 빨면 그냥 놔두어도 된다"와 언행일치된 덕도 컸다. 즉, 티베리우스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알아서 로마의 비위를 맞춰주면서 친로마 행보를 하면 개입하지 않았다. 더욱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아버지 유바가 로마에 쌓아놓은 신뢰도 두텁고, 여동생이 로마로 시집온 뒤 아예 로마에 눌러살았던데다 조카들이 원로원 의원으로 있으면서 로마인으로 살고 있는 등 안전장치도 많았다.
어쨌든 티베리우스 황제와 원로원은 여러 사정과 이유들 때문에, 현상유지로 마우레타니아 왕국을 지켜 보기로 한다. 이 덕분에 프톨레마이오스 치하에서 진행된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번영과 부국강병의 노력은 성공을 거둔다. 그래서 마우레타니아는 농업 진흥 정책과 상공업 발전으로 막대한 부를 얻었고, 인근 세력들을 차례차례 병합하고 군사력을 증강해 유바 2세 통치때보다 강력한 헬레니즘 국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로마를 자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가이우스가 티베리우스 후계자로 원로원 의결을 거쳐 단독으로 프린켑스 직에 오르기 전, 로마 원로원과 군부 안에서는 마우레타니아가 점점 선을 넘고 까분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족들과 고문들도 마우레타니아를 서서히 견제한다.
그래도 프톨레마이오스는 자신의 외할머니 클레오파트라 전례를 생각해 로마의 신경을 건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이는 문자 그대로 신경을 건들지 않으려고 노력한 일 정도였고, 실제로 한 일은 정치술을 이용해 벌인 줄타기를 선보이면서 뒤로 호박씨 까는 행동으로 로마 심기를 계속 건들었다. 이때 프톨레마이오스가 집중한 것은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모든 로마 내 인맥을 동원해 자신에게 부정적인 여론을 희석시키는 작업을 진행시켰다. 허나 이런 줄타기와 막대한 부를 풀어 벌인 로비는 프톨레마이오스가 나이를 먹고 중장년이 되면서 과감해지고, 로마에게 걸리면 자실행위가 될 법한 것들로 발전하게 된다. 칼리굴라가 집권한 이후, 그는 자신을 언제라도 꼬투리 잡을 수 있는 로마를 견제하기 위해, 황제와 원로원 간의 미묘한 갈등을 조장하고 프린키파투스 체제의 안정성까지 개입해 장난질을 시작한다. 이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여동생이 로마 원로원 귀족과 결혼하고, 여동생의 아이들이 원로원 의원이 되거나 주요 수뇌부들과 인척관계를 맺은 점, 티베리우스 시절부터 원로원과 황제 간의 대립이 냉랭했던 점, 프톨레마이오스가 아버지 유바 2세때부터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이미지가 '로마의 친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헌데 원로원과 로마 지도부는 이미 마우레타니아를 경계 중이었고, 고단수의 외교술과 인맥활용도 꼬리가 길면 밞힐 도박수인 터라 결국 프톨레마이오스의 행보는 들통나게 된다. 더욱이 이 당시 황제는 20대의 칼리굴라였다. 경험이 부족했지만, 10대때부터 궁중음모를 모두 겪으면서 살아남았던데다 본래 성격부터 호락호락하게 당하기만 하는 성격과 거리가 먼 이가 황제였으니 들통난 순간 칼리굴라가 어떤 수를 벌일 지 대충 짐작갈 일이었다. 더욱이 세네카, 디오의 기록처럼 칼리굴라는 "가이우스는 자기중심적이고 냉혹한데다 과감함까지 있는 황제"였고, 아우구스투스처럼 "조금이라도 보호국이 허튼 수를 보이면, 모든 수를 써서라도 직접통치하는 게 낫다"는 식의 통치술도 사용했다. 즉, 칼리굴라는 말년의 티베리우스와 달리 아우구스투스, 과거의 안토니우스처럼 강제병합엔 망설임 없는 프린켑스인 터라 분위기는 묘하게 흘러가게 된다.
하여 친로마파인 이 왕국의 운명은 칼리굴라가 게르마니아 원정을 애매한 승리로 마치고 귀국하기 전부터 사실상 결정나고 만다. 젊은 가이우스 황제는 약식 개선식 이후에도 자신의 할아버지, 아버지처럼 확실한 군공과 정복도 원하던 차에, 집안친척어른으로 고상해보이는 사람이 자기 안위까지 문제를 발생시키니 가만히 나둘 리 만무했다.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프톨레마이오스는 로마 속주로 합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이집트와 누미디아의 전(前) 왕실의 후예였던 탓에, 로마가 마우레타니아의 충성심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를 내버려두는 것은 아프리카 속주, 나아가 마우레타니아와 인접한 스페인까지 해서 로마 제국 남부 전체의 안보에 영향을 주는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설상가상 원로원 역시 이 시기에는 분위기가 비슷해, 자신들과 칼리굴라가 냉담한 관계라고 해도 로마를 자극하는 것은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이미 아니톨리아 일대 보호국들이 강제 병합된 선례도 있었기 때문에 칼리굴라가 강하게 밀고 나가더라도 딴죽 걸 명분도 크게 없었다. 그래서 서기 39년에서 40년 사이에 비밀리에 프톨레마이오스를 손보기로 결정된 움직임이 일었고, 왕국의 운명은 아우구스투스나 티베리우스 시대 혹은 클라우디우스 시대였다고 해도 뻔한 결말이 예상됐다.
서기 40년, 프톨레마이오스가 사전 협의된 약속에 따라 국빈방문 형태로 로마를 방문한다. 이때 프톨레마이오스는 로마에서 인연있는 이들과 만나고 여동생 가족들도 접견하는 등 정상적인 방문일정을 소화했다. 그리고 며칠 후, 가이우스 황제와 로마 원로원 수뇌부들은 자신들을 농락하면서 힘을 키운 프톨레마이오스를 기회를 엿봤다가 암살해버린다. 이 사건에 관해, 디오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원로원들이 이 법령(마우레타니아 속주 명령)을 통과시키고 있을 때, 가이우스는 유바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사람을 보내, 부자임을 쉽게 알 수 있는 그(마우레타니아의 프톨레마이오스)를 죽이도록 하고 …(이후 내용은 분실됨)..."
디오 카시우스, 《로마의 역사》, <가이우스 카이사르 황제> 편 중 25부 마우레타니아 병합 이야기
디오 카시우스, 《로마의 역사》, <가이우스 카이사르 황제> 편 중 25부 마우레타니아 병합 이야기
이후, 칼리굴라와 원로원은 마우레타니아 왕국 속주화 작업을 진행시키는데 이는 미리 준비된 시나리오가 있는 듯 신속했다. 원로원은 칼리굴라가 프톨레마이오스를 암살하려고 사람을 보냈을 때, 법령을 만들어 마우레타니아의 동맹국 지위를 박탈했으며 로마군은 움직였다. 따라서 프톨레마이오스가 살해된 직후, 마우레타니아는 칼리굴라에게 정복되고 병합되는 방식으로 멸망하고, 왕국은 원로원과 황제의 명령에 따라 두 개의 속주로 쪼개진다. 그러나 서기 41년 칼리굴라가 암살되고, 클라우디우스가 제위에 오른 상황에서 로마가 제대로 마우레타니아에 신경 쓰지 못하면서 서기 42년 마우레타니아인들은 독립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자신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해, 마우레타니아인들이 무력으로 로마에 저항한건데, 베르베르인들이 전투민족으로 유명한 것을 생각하면 그 규모는 상당했고 클라우디우스는 서기 42년 반란이 터지자 3년 가까이 고전했다. 그렇지만 제정 시대의 대표적인 명장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가 파견되고, 칼리굴라 시절부터 야전사령관으로 유명한 그나이우스 호시디우스 게타까지 파견되자 이는 곧 진압된다. 하여 마우레타니아는 칼리굴라 생전의 결정때처럼 왕국이 둘로 쪼개진 뒤,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나와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 속주로 관리되게 된다.
이 사건에 대해 백여년 뒤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가이우스가 프톨레마이오스의 부와 그가 입은 보랏빛 망토를 보고 환호를 보낸 극장 관객들의 환호를 시기해 그랬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학자들은 수에토니우스로 대표되는 주장을 "전형적인 수에토니우스식의 해석"이라고 말하면서, 칼리굴라로 불리는 가이우스가 미치거나, 또는 젊은 황제와 원로원이 부와 풍요로움을 빼앗기 위한 시기심으로 벌인 일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가이우스 황제의 속주 통치 스타일은 놀랍게도 변덕스러운 것 같았음에도 아우구스투스와 같이 속국을 통한 간접지배 방식을 선호했고, 그는 폼페이우스나 안토니우스 같은 방법도 과감히 사용한 황제였다는 점, 원로원과 로마군부가 마우레타니아를 손볼 생각을 가진 상황에서 벌어진 '지극히 로마적인 속주화 과정' 내지 보호국의 속주화 조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칼리굴라가 안토니우스 피가 흐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앞뒤 안 가리고 죽이고 봤다"는 고대기록은 신빙성이 거의 없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현대 로마사 발표에서는 이 사건에 관해, "로마와 가이우스(칼리굴라)의 프톨레마이오스 암살과 마우레타니아 병합은 더 이상 밑에 두고 관리가 어려워진 프톨레마이오스와 마우레타니아를, 더이상 밑에 두고 관리가 어려워진 보호국으로 결론 내리고 속주로 만든 조치"라고 보고 있다.
2.10. 동방정책과 유대문제
가이우스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로마의 대 근동정책의 미묘한 변화였다. 이전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처럼 그 역시 황제가 속주 총독을 임명해 이를 관리하는 방식을 유지했는데, 가이우스는 이런 방식을 유지하면서도 로마 내 종속국 왕들을 통한 간접지배 방식도 많이 활용했다. 가이우스는 티베리우스 이전의 아우구스투스 시대처럼 콤마게네, 아르메니아 왕들에게 다시 왕좌를 되돌려주는 일련의 행동도 취했다. 그런데 이런 변칙적인 간접지배 방식과 미숙한 젊은 황제가 서로 얽히면서 이는 자칫 큰 사태가 벌어질 위험성을 높였다. 반면 그의 이런 조치는 이후 로마 황제들이 원로원보단 자신의 명령 아래 개입빈도를 높이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원칙적이면서도 상당히 도전적이고 변덕스러운 점을 띄게 되었다. 아울러 간접지배 방식을 많이 사용한 만큼, 황제의 개입 빈도를 높여 황제의 권력을 신장시키는 모양새를 띠게 됐다.사실 그가 종속왕국 왕이나 토호들을 통해 간접지배 방식으로 근동정책을 끌고 간 이유는, 개인의 자기우상화와 권력강화 의욕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로 얼키고 설킨 지중해 동쪽 세계는 역대 로마 권력자들이 공화정 시대부터 이 부분을 조심히 다룰 정도로 역대 로마 황제들과 이 일대에 부임한 속주총독들에게 많은 고민을 안겼던 곳이다.
특히 유대 문제는 여러 근동 문제 중 아르메니아, 파르티아와의 관계처럼 늘 로마에게 고민을 안겼다. 그런데 가이우스의 동방 정책 중 유대문제는 두 번의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성공과 실패를 모두 가져다 줬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와 네로, 베스파시아누스, 하드리아누스 등은 가이우스 덕에 알렉산드리아 내 갈등 문제는 이후 큰 위기를 겪지 않았음에도 정작 시리아 속주 내 유대 일대에서는 가이우스가 남긴 이 문제 해결을 놓고 골머리를 싸맸다. 하지만 동시대의 요세푸스와 근현대 학자들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 이래의 황제 사후 신격화, 헬라문화의 특성 등의 영향도 있기에, 시리아 속주 내 문제에 대해 무작정 “이게 다 칼리굴라 때문이다”고 비난할 수 없다고 그들은 단언한다.
첫 유대문제는 가이우스가 제위에 오르고 중병으로 쓰러졌다가 회복한 1여년 사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대한 적대감을 표출한 폭동으로 벌어졌다.(38년 알렉산드리아 폭동) 알렉산드리아 내 그리스인들은 그냥 폭동을 일으키지 않고, 아예 황제 초상화를 앞세워 유대교 신전으로 가지고 간 다음 유대교 회당에서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유대인들을 비난했다. 따라서 이집트 주둔 사령관 플라쿠스는 가이우스 초상화가 회당에 난입한 탓에 정치적 문제로 확산되는 것을 우려해 미온적 대처로 이를 수습했다.[51]
하지만 피해를 입은 유대인들은 이런 플라쿠스의 행동을 그리스인들을 편드는 행동으로 규정해 규탄했다. 특히 이런 비난의견은 강경파 내에서 더 강했는데, 그들은 재위 1여년만에 개인신격화를 대대적으로 하던 가이우스 황제에 대한 분노까지 표출했다. 따라서 유대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등이 대표로 로마로 향하는데, 가이우스는 그리스인들로 구성된 대표단이 올 때까지 만나주지 않겠다고 유대인 대표단에게 통보한다. 이 조치는 유대인 대표단에게 불리한 듯 했지만, 동시대 사람이자 당사자인 필로의 기록처럼 황제의 현명한 해결책이었다. 왜냐하면 가이우스는 그리스인들을 편드는 척하면서 유대인들이 실속을 챙기도록 결론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이우스는 대표단과의 면담 후, 이집트 장관에게 알렉산드리아 내 그리스인들의 행동을 폭동으로 규정케 한 뒤 유대인들을 존중하고 이를 어기지 못하게 대응하도록 지시했다.
그렇지만 애당초 가이우스가 자신과 카이사르 가문에 대한 홍보, 신격화, 우상화 정책을 계속하는 이상 유대문제는 다시 벌어질 문제였고, 황제 사후 신격화 조치는 실제 가이우스 암살 이후에도 로마 내에서 이 문제가 다시 터질 시한폭탄이었다. 당시 로마의 속주 지배 체계는 지극히 황제나 원로원이 파견 총독 및 현지엘리트계층와 직접 소통을 하면서 운영됐고, 황제 신격화 조치는 황제의 정당한 권위 해석이라는 연구결과도 나올 정도로 로마 측에게도 민감한 부분이었다. 왜냐하면 황제숭배 조치는 아우구스투스 이래 중앙정부와 지방 속주민 사이의 정책 홍보 수단으로 꾸준히 이용될 정도로 로마에게 중요한 통치방법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칼리굴라나 네로, 도미티아누스 등 후대 황제처럼 지나칠 정도로 개인숭상화로 일관할 경우에는 문제가 전혀 달랐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탈리아와 서방 속주 내에서도 동방 일대 속주들처럼 통치방법 수단이 아니라 말 그대로 황제와 타인 전체를 구분한 한 개인의 전제화 내지 진짜 독재 행위로 인식됐기 때문이다.[52]
따라서 40년 가이우스가 갈리아로 향한 뒤 승전 소식이 전해질 당시[53], 시리아 속주에서 다시 한번 터진 유대-헬라 갈등 사건은 알렉산드리아 문제와 처음부터 다르게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그리스인들은 황제의 승리를 기념해 제단을 만든 행동에 유대인 일부가 그 제단을 파괴하면서 벌어지는데, 황제와 원로원에 이 소식이 전해진 순간 양측은 크게 충돌하게 된다. 가이우스는 당시 총독인 페트로니우스에게 유대인 회랑에 자신의 조각상을 세우라고 명을 내렸는데, 이는 유대인들에게 로마가 언제라도 비슷한 문제에 대해 비슷하게 대응할 거라는 생각을 심게 했다.
당대의 유대인 사가 요세푸스는 이 사건을 칼리굴라 개인의 문제가 아닌, 로마의 헬라 문화와 유대 문화 사이의 충돌로 해석하면서 문화적 조우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그의 해석처럼 시리아 총독 페트로니우스 역시 근동문제의 특수성상 이를 강행할 경우 폭동 수준을 넘어 전쟁이 될 것을 우려해, 이를 망설였다. 따라서 그는 가이우스가 내린 강경조치를 실행하지 않고, 이를 최대한 늦추며 양측의 문화적 충돌을 멈추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지만 머리 끝까지 화가 난 가이우스는 이미 이 사건을 로마의 지배권을 무시한 행동으로 보고 있던터라 페트로니우스의 조치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총독에게 긴급서한을 보내 빨리 이 조치를 이행하라는 명을 내리면서, 이를 어길 시 책임지고 자결할 것을 명한다. 그런데 서한이 도착한 41년 이미 가이우스는 암살된 상태라서 페트로니우스는 그냥 이 명령을 파기해버리고, 일반적인 로마 방침과 자신의 판단대로 대응해버린다.
3. 칼리굴라 암살 사건
칼리굴라가 암살된 장소인 통로(위)와 궁전 |
- 가장 잘 알려진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칼리굴라의 암살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가이우스가 죽던 41년 1월 24일 정오가 지날 무렵, 사실 가이우스는 극장 안에 있었다. 이때 그는 점심을 먹을지 말지 망설이고 있었는데 전날 저녁식사를 과식한 결과 속이 거북했다고 한다. 그러나 친구들의 설득에 어쩔 수 없이 점심을 먹으러 갔다. 이때 가이우스는 거리에서 귀족 남자아이들이 트로이 전쟁 춤을 연습하고 있자, 잠시 멈춰서서 이들을 격려하고 이들을 극장으로 데리고 가서 연습을 도와주고 공연을 시켜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 친구 중 한 명이 감기에 걸렸는데 얼른 가자고 불평해서 가야만 했다.
그 뒤, 이야기에 대해서는 2가지가 전해오는데, 첫 번째 이야기에 따르면 칼리굴라가 서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근위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가 뒤쪽에서 갑자기 나타나 "이걸 받아라" 하고는 목 깊숙이 칼을 꽂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코르넬리우스 사비누스라는 장교가 칼리굴라의 가슴을 찔렀다는 것이다.[54] 다른 이야기는 좀 더 정확한 버전인데, 장교 사비누스가 먼저 부하를 시켜 군중들을 쫓아냈고, 그런 다음 사비누스는 황궁 통로에서 칼리굴라에게 그날의 암호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이때 칼리굴라는 웃으며 "유피테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뒤에서 경호를 하고 있던 카이레아가 "그래, 그렇다고 해주지."라고 외치며 고개를 돌린 칼리굴라의 턱을 칼로 베며 공격했다. 이에 칼리굴라는 몸부림을 치며 바닥에 쓰러져 게르만 근위병들을 큰 소리로 부르며 "나는 아직 살아있다!"라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카이레아는 가담자들에게 "다시 내려쳐!"라고 명령을 내려 상처를 입은 채 저항하는 칼리굴라에게 30군데의 상처를 입히며 칼로 찔러 죽였다. 이때 황제의 가마꾼들이 장대를 들고 칼리굴라를 지키기 위해 저항했고, 그 사이 칼리굴라의 외침을 들은 게르만 근위병들이 "황제를 보호하라!"를 외치며 암살자 몇명과 그 자리에 있다는 이유로 죄없는 원로원 의원 몇명을 죽였다고 한다.
- 믿을 수 없고, 거짓과 과장이 가득한 수에토니우스 버전과 달리 동시대 사람 필로의 조카인 요세푸스, 수에토니우스의 것을 참조함에도 다른 이들의 기록도 살펴 적은 디오 카시우스가 전한 칼리굴라 암살은 야사 같은 이야기와는 그 결이 많이 다르다. 이들 역시 모두 칼리굴라를 수에토니우스처럼 가이우스로 적고 있는데, 이들의 공통된 의견에 따르면 가이우스 암살은 평범한 상황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던 국가 원수 시해 사건으로 발생부터 결과까지 급박하게 전개됐다고 한다. 또 카이레아, 루푸스, 사비누스 등 20명 중 카이레아는 가이우스에게 업무적인 문제, 개인 성격상의 미묘한 대립, 젊은 황제의 인격적 비난과 질책 등으로 사적 원한이 깊어 이 암살은 그 배후가 누구였는지 간에, 급변사태가 벌어진 것은 놀라운 일이면서도 예상된 것이었다고 한다. 이들의 기록에 따르면, 가이우스가 아이깁투스의 알렉산드리아로 수도를 옮길 것이라는 발표를 할 것이라는 소문이 반대파들 사이에서 나오던 무렵에 황제가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서기 41년 1월 24일, 가이우스는 평소처럼 황제 업무 중 하나인 공공 건축물 보수, 관리 업무를 살펴보고 국가 행사 준비를 확인코자 황숙 클라우디우스, 멘토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등과 극장에 들렸다고 한다. 이후 그는 황궁 내 지하통로에서 암살됐는데, 이때 황제의 동선을 알고 있던 이는 얼마 전 보고를 통해 부정부패 혐의가 보고된 황실 관료들에게 정보를 받은 카이레아 등 암살범 20명 남짓과 황제의 멘토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였다고 한다. 이때 칼리굴라는 20명 남짓 암살범들에게 시해됐는데, 그는 살해 당시 클레멘스를 위시한 대부분 근위대에서 떨어져 있었고, 황제를 호위한 게르만 경호대 역시 미처 대비를 못했다고 한다.[55]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는 그가 죽던 그 시간까지 함께 있음에도 멀쩡했고 시해 직후 원로원이 소집된 유피테르 신전으로 유유히 출석했다. 반면, 황제와 함께 있던 황숙 클라우디우스는 황궁 내 지하통로에서 황제가 암살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마자, 죽기 살기로 탈출해 황궁 안에서 가장 비밀스럽고 찾기 어려운 방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이렇게 칼리굴라는 29세(28세)의 나이에 죽었다. 재위기간은 3년하고도 10개월 정도였다. 이 일에 관해 2세기 말 ~ 3세기 초반까지의 원로원 의원 디오 카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가이우스는 3년 9개월 28일 동안 관련된 모든 일을 수행한 후에야, 실제 경험을 통해, 자신이 신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디오 카시우스
디오 카시우스
3.1. 원로원의 공화정 복귀 시도
"그날(칼리굴라 암살날) 곧 원로원이 임시로 소집되어 밤늦게까지 사태를 논의했다. 공화제 부활을 부르짖는 사람도 있었다. 카이사르 가문 외의 사람 중 프린켑스(황제)를 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갈팡질팡하며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산회했다. 바깥에선 대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카이사르 가문에 고용된 게르마니아인 병사들이 황제(칼리굴라)의 복수를 기도했다. 음모 사건과 무관한 명사들이 살해됐다. 민중도 폭동을 일으킬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타키투스
타키투스
칼리굴라의 유해는 비밀리에 카이레아에 의해 라미우스 정원으로 옮겨져 숨겨진 다음, 황급히 만든 장작더미에 대충 태워져 얇은 잔디층 아래에 가매장되었다.[56] 그 사이 율리우스 루푸스와 백인대장은 황궁으로 가서 칼리굴라의 아내 카이소니아를 칼로 찔러 죽였다. 딸 율리아 드루실라 역시 벽으로 던져져 머리가 깨져 죽었다. 이에 대해 당대 사가 요세푸스는 칼리굴라의 아내 카이소니아가 오빠 코르불로와 닮은 성격처럼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용감하고 당당한 태도로 살해됐다고 전한다. 암살자들은 이렇게 칼리굴라 일가를 죽인 뒤, 원로원의 의결이 없음에도 칼리굴라의 조각상들을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것처럼 끌어내려 모조리 부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원로원 역시 추가적인 움직임을 취했다. 디오 카시우스는 이때 원로원이 가이우스(칼리굴라)가 암살됐다는 말에 그의 얼굴이 새겨진 주화 제작과 사용을 중단시키면서, 모조리 녹여버리라는 포고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원로원의 포고령은 하루도 못 되어 폐기돼, 실제로 이행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원로원의 이런 일방적인 포고령, 암살을 벌인 이들의 이런 폭력적 시도가 분노에 찬 게르만족 경호대 소속 모든 병사들과 로마 민중들의 분노를 유발시켰기 때문이다.
이는 예견된 결과였다. 칼리굴라의 여러 조치들은 사실 원로원 입장에서만 변덕스럽고 냉혹할 뿐, 일반 로마 민중들에게는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법정에서 원로원의 입김을 최소화하는 등 긍정적인 면이 많았다. 더욱이 민중들은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증손자이자, 게르마니쿠스의 살아남은 유일한 아들인 칼리굴라에게 증오심이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도시에선 사람들이 원로원과 암살범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겠다고 무리를 이뤘다.
그 결과, 로마는 위기에 빠졌다. 먼저 칼리굴라 암살에 관여한 몇몇 암살자들은 게르만 경비대 병사들 손에 죽임을 당했다. 분노한 민중들은 이런 경호대의 행동을 지탄하기 보다는 방관하듯 무시했다. 이어 그들은 떼를 이룬 다음, 죽은 칼리굴라와 아우구스투스 일가를 기록말살형에 처하겠다며 포고령을 발표하고, 실제 그 행동을 가져간 원로원이 모인 곳을 포위했다. 이후, 그들은 곧 이곳을 우격다짐으로 쳐들어가려고 하면서, 격렬하게 항의했다. 이 일을 적은 디오는 게르만 군단의 모든 병사들이 폭동과 싸움에 빠졌고, 그 결과 약간의 유혈 상태가 있었으며, 분노한 군중들은 흥분해, 가이우스의 흔적을 없애려고 한 원로원에게 "가이우스를 죽인 놈들이 누구냐"고 따져 묻고, 무리를 지어 "당신들에게 목은 하나 밖에 없고, 그들에게도 목이란 하나 밖에 없을 것이다"는 살벌한 구호를 외쳤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원로원은 겁에 질렸고, 자신들이 내린 포고령이 정식이 아니라는 자세를 취하더니, 곧이어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권위와 위엄을 존중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렇지만 성난 게르만 경호원들과 민중들은 그럴 생각이 없음을 밝혔고, 약간의 유혈사태가 더 일어났다. 그들은 원로원의 이런 태도에 더 흥분했고, 원로원은 당황해 더 큰 화를 피하고자 머리를 감쌌다. 그러나 이들이 그렇게 행동할수록, 항의의 규모는 커졌고 이들의 분노는 머리 끝까지 차올랐다. 이제 그들은 "죽은 가이우스 동상과 서명에 침을 뱉고, 마음대로 그 조각상을 치운 놈을 데리고 와라", "가이우스를 죽인 자식들이 누구인지 밝혀라", "그딴 포고령을 내리자고 한 사람을 당장 앞으로 데리고 와라" 등의 말을 외치고, 계속 따졌다. 이렇게 되자 원로원은 더 크게 놀랐다. 그래서 칼리굴라와 가장 마지막까지 함께 했고, 죽은 황제의 동선을 알고 있던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가 나오기로 하고, 그들 앞에 갑자기 나타났다. 그는 성난 게르만족 병사 부대와 군중들을 조용히 시킨 뒤, 눈에 띄는 곳에 올라갔다. 그러자 게르만 병사들과 군중들은 그가 어떤 말을 할 지 기대했다. 헌데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는 "닥쳐라! 네 녀석들도 죽였으면 좋았을 텐데!"고 고함을 치더니, 본인이 알아서 할테니 좋은 말로 할 때 해산하라고 경고했다.[57]
그리고 이 발언이 끝난 직후, 디오에 따르면 집정관 센티우스와 세쿤두스가 즉시 황제 국고에서 원로원 회의장으로 막대한 황제, 황실 개인 자산과 그 자금을 옮겼다고 한다. 이때 그들은 이 조치의 취지가 민중들이 국가 혼란 상황을 이용해 약탈을 방지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때 두 집정관은 관리들과 암살자 사비누스, 카이레아 및 그 추종자들과 함께 무엇을 해야 할지 숙고하고 있었다고 디오는 기록하면서 원로원 내 두 집정관이 암살자들과 같은 편임을 명확히 적었다.
이렇게 국고를 장악한 원로원은 암살을 주도한 사비누스, 카이레아와 함께 다음 단계를 밞았다. 그들은 카이레아, 사비누스, 루푸스의 명령 아래 서둘러, 방금까지 극장에서 조카 칼리굴라와 함께 있다가 사라진 황숙 클라우디우스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됐다. 이와 동시에 사비누스, 루푸스는 완전 무장 상태로 팔라티누스 황궁에 재진입. 상술한 대로 부하들을 보내 코르불로의 여동생으로 황후인 밀로니아 카이소니아와 율리아 드루실라 공주를 모두 죽였다. 이후, 그들은 원로원에게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남은 씨를 없앴다고 사실상 보고했다.
3.2. 클라우디우스의 제위 등극과 반격
이렇게 칼리굴라의 아내, 어린 딸이 살해되는 사이, 카이레아 주도 아래 황궁 안과 로마 거리에선 칼리굴라의 오른팔이며,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남자혈육 클라우디우스 찾기가 시작했다. 그들은 어떻게든 결점 많고 병약한 육체를 가졌던 황제의 삼촌 클라우디우스를 찾아내려고 혈안이 됐다. 원로원과 두 집정관,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등은 카이사르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 클라우디우스를 찾아내야 자신들의 목적이 이루어진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그들은 어느 곳에서도, 클라우디우스를 찾지 못했다.이런 상황에서, 프라이토리아니 무리 중 일부가 무법천지가 된 팔라티누스 황궁에 잠입했다. 이들은 모두 칼리굴라의 또 다른 근위대장인 아레키누스 클레멘스 휘하 무리로 혼란한 틈을 타서, 황궁을 돌며 값나가는 보물을 훔치려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황궁 안에서 가장 후미지고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황숙 클라우디우스를 발견했다. 디오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는 극장에서 나올 때 가이우스와 함께 있었는데, 지금은 소동이 두려워서 길가에 웅크리고 있었다"며 그가 목숨을 구한 이유를 적었다. 어쨌든 클라우디우스를 발견한 무리는 칼리굴라를 따른 클레멘스 휘하 병사들이었고, 이들은 황숙 클라우디우스의 생존을 알자마자, "당신께서는 황실 출신으로 황제로 적합하십니다"고 말한 다음 황숙 클라우디우스를 그 자리에서 황제로 떠받들었다. 이후 그들은 클라우디우스를 경호하면서, 황궁을 탈출한 뒤 근위대 병영까지 모셨다.
이렇게 클라우디우스가 생환하자, 클레멘스와 그 휘하의 프라이토리아니 부대원 약 1만명은 공을 세운 병사들을 치하한 다음 그 즉시 클라우디우스를 황제로 선포한다. 이 선포는 클레멘스를 필두로 한 7명의 대대장, 2개 대대 중 20명의 암살자들을 제외한 9920명의 부대원들의 절대 충성으로 진행됐는데, 수에토니우스, 세네카 등의 주장과 달리 클라우디우스는 모양새 빠지는 모습으로 황제에 오르지 않았다. 되레 그는 맨처음 당황한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고, 위엄 있고 냉철한 모습을 보이며 죽은 칼리굴라 소식으로 상심에 잠긴 병영 안 부대원들을 일일이 위로하고 그들의 군심과 규칙을 다 잡았다. 이렇게 되자 프라이토리아니는 클레멘스를 시작으로 7명의 대대장, 각 백인대장과 부대원까지 절대 충성과 칼리굴라를 위한 복수를 다짐했다. 심지어 그들은 투표까지 해서, 자신들이 민주적으로 클라우디우스를 절대적으로 지지함을 보여줬다. 그러자 클라우디우스는 그 자리에서 병사 1인당 1만 5천 세스테르티우스의 보너스를 주겠다고 한 다음, 이를 즉시 시행에 옮겨 일시불로 병사 모두에게 모조리 줬다. 이렇게 되자, 클라우디우스는 이날 황제로 선포됨과 동시에, 프라이토리아니에게 제국의 모든 동향, 정보를 보고받을 수 있게 됐다.
사실 칼리굴라 황제의 또 다른 근위대 장교 아레키누스 클레멘스를 필두로 한 7명의 대대장과 2대 대대 중 20명을 제외한 2천명을 포함한 1만명에 이르는 근위대 병사들은, 클라우디우스 즉위 전부터 칼리굴라에 대한 암살을 지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을 티베리우스처럼 활용하면서 힘을 키워준 칼리굴라 황제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고, 게르만 호위대와 성난 군중들을 무력진압하기는커녕 방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가 충성 보너스를 쿨하게 일시불로 즉시 지급한 것은 자칫 흔들릴 수 있는 군심을 일시에 다 잡는 효과가 더 컸다. 그 결과, 별 소득 없이 동료들을 설득하기 위해 온 카이레아를 필두로 한 암살자 20명은 병영에 들어온 즉시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옛 동료들 중 그 누구도 이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에 개선장군처럼 자신만만하게 갔다가 암살의 정당성도 연설해보지 못한 채, 현행범으로 황제 살해 및 가족법에 따른 존속살해 혐의, 즉 대역죄로 불명예스럽게 체포됐다. 이때 그들은 반역자들처럼 묶여 모조리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회부 직후, 이들은 새 황제 클라우디우스 주재로 열린 군사재판에서 모조리 유죄판결을 받고 처형 또는 자결 명령을 선고받았다. 클라우디우스는 근위대에게 황제로서 명을 내려 국법과 가족법에 따라, 칼리굴라와 그 일가의 암살을 주도한 카이레아, 율리우스 루푸스 등 암살범들을 인도받아 그 즉시 사형 판결을 내리고 자살을 명했다.[58] 그런데 이 날, 이들은 심문 과정에서 암살 배후가 누구인지 끝까지 불지 않고 모조리 죽었다. 추가 심문이 예정된 몇 명은 즉시 처형이 아님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연한 말인데 이들의 시체는 처형, 자살에 상관없이 전통적인 로마의 반역자 시체 처리 방법대로 처리됐다.
이렇게 암살범 무리를 손쉽게 잡아 제거한 뒤, 클라우디우스는 가매장된 조카 칼리굴라의 유해를 수습하라고 명했다. 이후 칼리굴라의 여동생들이 유배형에서 해제돼 귀국이 허락된다. 따라서 칼리굴라의 유해는 정식 수습 후, 정식 장례 절차에 따라 황제의 예우로 명복을 빌고 화장돼, 납골항아리에 담겨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정식 매장된다. 이때 그 자리에는 클라우디우스를 비롯해 칼리굴라의 두 여동생이 함께 했다. 그렇지만 이 조치는 클라우디우스가 1월 30일 원로원에 정식 출석해 자신의 즉위와 칼리굴라를 추모하면서, 원로원에게 정중하게 경고를 한 이후 집행됐다. 왜냐하면 클라우디우스는 프라이토리아니와, 그의 즉위 소식을 듣고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에 당도한 황제파 원로원 인사들의 조언에 따라 30일이 될 때까지 원로원에 들어가지 않고 원로원에게 어떤 발언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클라우디우스는 조심스러운 행동과 달리, 이때부터 황제로서 로마와 이탈리아 민중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민심 잡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는 근위대의 마음을 다잡음과 동시에 로마와 이탈리아 민중들을 상대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명예와 공훈을 행사 등을 통해 알렸다. 이 방법은 로마와 이탈리아 군중들의 지지를 이끌어 냈는데, 칼리굴라가 암살된 지 24시간도 지나기 전에 로마 내의 혼란이 잠재워지고 모든 분위기는 클라우디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 사람들에 대한 재신임으로 흘러갔다.
반면 원로원은 마치 칼리굴라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길 기다렸다는 듯이 계획대로 신속히 움직였다. 상술한 대로 원로원 내 반 황제파들의 회의 소집은 카이레아 측과 사전교감을 통해 진행된 일이 아니었던 척 행동했다. 하지만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 같아도 원로원은 놀라울 정도로 어리버리했고, 디오의 표현처럼 저마다 생각이 달리 회의를 하면서 서로 싸우기까지 했다. 어느 정도로 난장판이었는지, 누구는 민주주의(원로원 중심의 공화정 회귀)를 외치고 누구는 "내가 황제 후보로 적합하다"며 동료들과 서로 논쟁까지 벌였다고 한다. 여기에는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도 있었는데, 그는 자신이 칼리굴라의 모든 직책을 이어받아야 된다며 지지세력까지 모았다. 그렇지만 유피테르 신전에서 열린 이 회의는 끝내 비상사태로 인한 혼란수습이라면서도 실상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내전 승리 이전의 원로원 중심 공화정 체제로의 회귀로 흘러감에도 알맹이는 없었다. 즉, 이들은 자신들과 공모한 카이레아와 그를 따른 20명 남짓이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남자 혈육 2명을 모두 제거할 거라는 판단 아래 짠 시나리오대로 움직이며 논의를 전개함에도 스스로 자살골만 넣으며 클라우디우스에게 충분한 시간을 준 셈이었다.
이런 덕에 실제로 공화정 복귀 분위기가 현실화되는 듯 했으나, 클라우디우스가 생존했으며, 동료들을 같은 주장으로 설득하려던 카이레아가 아예 반역자로 단죄되었고, 클레멘스가 중심이 되어 칼리굴라의 측근들을 규합해 반격을 펼칠 준비가 보인다는 보고가 알려지며 상황이 바뀌게 된다. 따라서 원로원 회의 분위기는 최악이 됐다. 암살 직후, 첫 회의 도중 원로원 선배들에게 대놓고 "황제 암살범들을 국법에 따라 이름을 공표하고, 복수부터 의결해라"고 따진 전년해 법무관 베스파시아누스를 필두로 한 인사들은 원로원과 클라우디우스를 번갈아 오갔고, 뼛속까지 프린키파투스를 지지한 인사들은 아예 클라우디우스 쪽으로 달려가 고문 역할을 했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는 죽은 조카가 추천하고 밀어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성난 게르만 호위대를 설득해 남은 암살 배후를 처단한 뒤 그들을 위로하라고 명하고, 자기에게 조언을 해준 중진들의 뜻에 따라 원로원 스스로 무너질 시간을 벌면서 남은 암살 위험요소까지 제거하는 여유로움마저 보여줬다.
이렇게 되니 곧 원로원은 칼리굴라의 뒤를 이은 클라우디우스가 반나절도 안 된 시간에 이미 근위대를 장악했고, 친 황실 세력은 그 아래로 집결해 가이우스 칼리굴라를 위한 복수와 원로원 내 반란 움직임에 대비하고 있으며, 원로원과 소통할 수 있는 황제 암살범과 이에 동조한 근위대 소속 대대장 등은 모조리 반역죄로 체포해 처형됐다는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했다. 설상가상으로 황궁 내 엘리트 관료들도 이때부터는 반 칼리굴라, 반 클라우디우스 분위기에 동조해주지 않았다. 되려 그들은 원로원과 손절했다.
칼리굴라가 피살된 그날(41년 1월 24일)이 지난 다음날, 원로원은 일단 강경한 자세를 취한다. 그들은 무력 폭동을 막을 요량으로 수도 경비대를 장악한 뒤 더 강경하게 클라우디우스와 근위대에게 "원로원의 권위에 복종하라"는 서한을 보내며 주도권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뜻을 분명히 내비쳤다. 그렇지만 원로원은 이미 타이밍을 완벽히 놓친 상황인데다 과거처럼 주도권을 행사할 힘도 없었고, 죽은 칼리굴라의 복수를 외치며 원로원 의원과 여러 명사를 잡아 죽인 황제 친위세력을 처벌하지 못했다. 더 큰 문제가 된 것은 그들의 강경 발언과 서한이 부글부글 끓고 있던 게르만 호위대, 잠시 수그러든 군중 무리, 프라이토리아니의 심기를 다시 건들게 됐다는 점이다. 어떻게 보면 원로원의 이런 행동은 자살행위가 되고 만다.
그 결과, 이탈리아 내의 유일한 최정예 부대인 근위대(프라이토리아니) 중 일부까지 게르만인 경비병들과 함께 죽은 황제의 넋을 위로하자며 복수를 벌였다. 그들은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에게 충성 명목으로 돈을 하사받으며 프린켑스의 최측근 세력으로 공인된 유일무이한 무력집단이라서, 원로원은 클라우디우스와 교섭을 진행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클라우디우스는 무척 신중했고, 또 다른 암살시도가 있다고 여겨 그들을 원로원 연설 전까지 만나지 않겠다는 뜻을 전하고 설령 만나더라도 온 몸을 모두 검사한 뒤 무장한 병사들을 두고 면담을 짧게 진행했다.
즉, 근위대는 아우구스투스부터 칼리굴라의 치세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을 버릴 이유가 없었고, 원로원은 제대로 절벽 끝에 몰리게 됐다. 더욱이 카이레아가 불만을 품고 동조자들을 모았다고 해도 이는 주동자를 포함해 20명 정도에 불과했고, 카이레아는 고작해야 개인적 앙심[59]을 이유로 거사를 벌인 인사인지라 원로원의 이런 행태는 비정상적인 암살범들과 동조한 모양새가 됐다. 이런 것을 차치하고라도, 상관 클레멘스가 죽은 칼리굴라와 새롭게 즉위한 클라우디우스를 지지했으며 새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개인당 1만 5천 세스테르티우스의 보너스를 즉석에서 하사했다는 현실적 이유 덕에 클라우디우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근위대에게 원로원의 이런 행동은 거센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근위대는 원로원의 서한이 공개된 직후, 오히려 클라우디우스 지지를 더욱 확실히 하고 당장이라도 원로원을 제압할 태세에 돌입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파 인사들과 클라우디우스의 개인 고문들은 원로원과 동조하지 않고 새 황제 밑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들은 클라우디우스에게 원로원의 경고성 서한을 무시할 것을 조언하면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근위대를 움직여 반역행위를 명백히 한 원로원을 끝장내고 판 전체를 갈아 엎어야 한다고 강하게 권고했다.
원로원이 강하게 나가고, 새 황제를 필두로 한 친황제 세력이 근위대를 무력삼아 내전이라도 다시 벌어질 위기 상황 속에서, 수도 경비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체감했다. 그들은 애당초 근위대와 맞붙을 생각이 없었던데다, 반강제로 원로원에게 내세워진 존재인 터라 근위대가 표명한 입장을 듣는 순간 원로원을 저버리고 스스로도 클라우디우스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여기에 더해 민중들의 지지 역시 일찌감치 클라우디우스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로 기운 터라 원로원은 코너로 몰린 상태가 됐다. 원로원은 오래 전부터 신체적 장애로 다리 한쪽을 절고 말을 더듬는 습관이 미세하게 남은 클라우디우스를 무시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클라우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이라는 후광과 스스로의 인품 등이 민중들에게 높게 평가받아, 젊은 시절부터 원로원의 생각 이상으로 이탈리아 민중들과 제국의 주력인 게르마니아, 판노니아 일대의 군단병들에게 인기가 많던 황족이었다.[60]
이렇게 칼리굴라 암살 사건은 원로원이 원하는 방향과 정반대로 흘러갔고, 이는 원로원에게는 카이사르 이전 체제로의 회귀가 불가능하며, 차기 황제가 향후 칼리굴라 이상으로 황제권을 강화해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는 사망선고와 같은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때 로마의 모든 정보를 통제할 수 있는 근위대를 장악해 통제하고 있던 클라우디우스는 상술했듯 고문들의 권고에 따라, 30일이 되자 무장한 근위대를 대동해 원로원에 찾아갔다.[61] 이때 그는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 복귀에 따르겠다는 의사표시 대신 "당신들을 존중하겠다"고 언급했다. 동시에 그는 원로원과 두 집정관에게 ''일부 불충한 세력에게 황제가 죽음을 맞았다''고 언급하면서, 죽은 조카에 대한 기록말살형 선포는 큰 화를 부를 것을 공손하게 경고했다. 이어 그는 아주 정중하면서도 엄격하게 자신이 클레멘스를 위시한 근위대 9개 대대와 함께 대역죄인인 암살범 카이레아 등을 인도받아 국법에 따라 즉시 처형했다고 공표했다.
연설 내용은 원로원 의원들에게 정중함이 묻어난 경고성 부탁이었다. 그렇지만 원로원은 무력하게 박수를 치며 클라우디우스의 의견을 따라주겠다고 할 뿐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다. 클라우디우스의 예상치 못한 칼리굴라 암살 직후 상황 정리를 두 눈으로 본 터라, 클라우디우스가 과거 옥타비아누스처럼 자신들에게 피의 보복을 가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따라서 칼리굴라는 사후에도 황제 지위를 인정받고 기록말살형이 연상되는 어떤 단어도 일절 언급되지 않은 채 시신이 수습돼 국장에 따라 영묘에 매장됐다. 그렇지만 이날 클라우디우스는 원로원을 형식상 존중한다는 의미로, 조카의 조각상을 예의상 회의장 내에서 치워주었다.
3.3. 암살의 진상
- 칼리굴라 암살 사건 참고.
[1] 대 드루수스의 출생 직후 이름은 데키무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였다. 그러나 이 사건 직후, 그는 친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친형 티베리우스와 함께 살게 되면서,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로 개명했다.[2] 정확한 표현으로는 외외종손이 맞을 것이다. 다만, 외외종손이라는 표현이 표준어상 없고, 번역서와 서구권 로마사 저서, 논문들은 일반적으로 게르마니쿠스를 외종손이라고 하거나, 친혈육, 손자로 소개한다.[3] 아우구스투스가 서기 4년 티베리우스를 정식 입양하기 앞서, 티베리우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입양을 가면 무주공산이 될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의 당주로 칼리굴라의 숙부 클라우디우스를 내정할 때, 굳이 게르마니쿠스를 덧붙여 개명하게 한 일 역시 이런 것과 관련이 깊었다.[4] 게르마니쿠스 부부에게는 아들이 다섯이 있었다. 칼리굴라의 형 4명 중 큰 형 네로 카이사르, 둘째형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티베리우스 시대때 세야누스의 음모로 죽었으며 칼리굴라 바로 위의 두 형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모두 유년기때 죽었다. 이 중 셋째형 티베리우스 카이사르는 유년기때 요절했고, 이름이 똑같은 바로 위의 넷째 형 가이우스 율리우스는 태어나고 8일이 되기 전 예정된 이름을 받았지만,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죽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학자들에게 종종 이그나투스 카이사르라고도 불린다.[5] 아버지 사후 성년까지 살아남은 아들 중에서 셋째아들이며 오형제 기준으로는 막내아들이다.[6]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친조카인 게르마니쿠스를 양자로 입양했기때문에 칼리굴라에게는 혈연적으로는 큰할아버지, 법적으로는 할아버지였다.[7] 단순히 양가가 명문가계일 뿐 아니라 부계와 모계 양쪽을 통해 같은 가계의 피를 받으면 열성형질의 발현가능성을 높이지만, 근세까지 그런 거 의식한 왕가는 별로 없이 지배자 가문의 정통성을 내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8] 대(大)플리니우스는 칼리굴라가 모젤강과 라인강이 만나는 트레베리 인근의 암비타르비움 태생이라고 주장했으며, 가이툴리쿠스는 칼리굴라에게 아부를 하기 위해서 칼리굴라의 탄생지가 헤라클레스에게 바쳐진 신성한 도시 티부르라고 주장했다.[9] 그런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안티였던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소문을 들으니 나이 들어서부터는 몸에 털만 많은 괴상한 모습의 대머리가 되어버렸다고 한다.[10] 칼리가(Caliga, 로마군인의 샌들)을 신고 있었기에 작은 군화라는 뜻의 '칼리굴라(Caligula)'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었다. 이런 까닭에 성인이 된 이후 황제가 된 칼리굴라에게 애칭이라고 해도 ‘아기군화’라고 부르는 것은 상당한 콤플렉스였다고.[11] 이 당시 게르마니쿠스와 그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군단병들에게 맞선 백인대장이 훗날 칼리굴라를 배신하고 암살한 카이레아였다.[12] 시리아에 위치한 도시가 아니라 오늘날 터키 남서부에 위치한 안타키라 시이다. 오론테스 강 동쪽 유역에 있으며, 기원전 4세기 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장이었던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셀레우코스 제국의 시조)가 자신의 아버지 안티오코스를 기리고자 처음 도시를 건설한 도시이다.[13] 혈연적으로는 게르마니쿠스와는 사촌형제 지간이며, 칼리굴라에게는 혈연상 오촌 당숙이기도 했다.[14] 소 드루수스는 세야누스와 아내 리빌라가 불륜 관계였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일찍부터 세야누스의 교활함과 야망을 알아채고 아버지 티베리우스에게 그의 기용을 정면으로 반대했다. 이는 세야누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제위를 노리던 그에게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칼리굴라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와 함께 카이사르 가문의 합법적 후계자로서 각종 공직 특권과 영예를 수여받은 드루수스는 율리우스 가문 남성 중 가장 큰 걸림돌이자 제거대상이었다. 따라서 세야누스는 의도적으로 리빌라를 유혹해 아내와의 이혼과 리빌라와의 재혼을 약속한 뒤, 그녀와 불륜관계를 맺고 공모해 드루수스를 독살했다.[15] 남들보다 5년 빨리 선출직 공직에 입후보할 수 있는 권리, 로마군 입대 우선권, 재무관 취임과 법무관 약속, 원로원 우선 발언권 등[16] 이때 게르마니쿠스 가족의 비극적인 모습에 로마 사람들은 이들의 가족이 죽고 추방된 것은 티베리우스 황제의 권력 유지를 위해 희생된 것이라 여겼다.[17] 뛰어난 수사학자이자 변호사였는데, 악독할 정도로 잔인한 고발관이었다. 그는 세야누스 몰락 후, 칼리굴라의 형 드루수스 카이사르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운 죄가 밝혀져 티베리우스의 명으로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영구 추방된 뒤 추방지에서 사망했다. 이후 칼리굴라가 즉위하자 그의 저서들은 칼리굴라의 명으로 금서로 지정돼 출판이 영구금지됐다고 한다.[18] 세야누스 처단 당시, 티베리우스는 유폐된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지하실에서 풀어주고 그에게 군대 지휘권을 이용해 대항하라고 긴급 서신으로 명을 내렸다. 또 본인도 세야누스를 공격하기 위해 군을 정비하고 함대까지 이용해 속주로 도망갈 수도 있는 루트를 차단하려고 준비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풀려나지 못했고, 황제의 명을 받고 그를 풀어주러 갔을 당시 아사된 채 발견돼 원로원과 로마 전역을 슬픔에 빠지게 만들었다.[19] 티베리우스는 드루수스 카이사르 사망 후, 대대적으로 원로원과 세야누스 파에게 다시 한번 복수했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아이밀리아 레피다는 거짓증언 외에도 세야누스, 남성노예, 주치의와의 불륜 등이 적발돼 반역죄, 간통죄 유죄 선고 뒤 자살을 강요당하는 방식으로 처형됐으며,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기소하는데 앞장선 카시우스 세베루스 역시 반역죄 혐의로 모든 재산이 압류된 뒤 영구추방됐다가 추방지에서 비참하게 죽었다고 한다.[20] 그리스 왕가 후손 출신 노예로 동시대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 사건 후 고마움을 표시한 소 안토니아에 의해 해방노예로 풀려났다고 한다. 그는 대 드루수스 일가의 노예였으며, 상당히 명석했다고 한다. 팔라스는 자신을 해방시켜준 옛 주인 소 안토니아가 사망한 후에도 해방노예로서 몸이 불편한 클라우디우스를 지근거리에서 수발들면서 충성을 다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모시던 클라우디우스가 황제가 된 후, 그의 신임 아래 재무부 장관에 올랐다. 이후 그는 칼리굴라의 여동생 소 아그리피나를 클라우디우스의 네번째 결혼 상대자로 추천해 그녀를 다시 황궁으로 복귀시켰으며 네로가 즉위한 이후에도 해방노예 관료 3인방 중 2명인 나르키수스, 칼리스투스와 달리 공직을 유지했다. 소 아그리피나파의 핵심인사였던 그는 네로의 명에 따라 실각한 뒤 63년 살해됐는데, 그의 후손 중 한명은 167년 로마 원로원의 집정관이 되었다.[21] 로마에 돌아온 직후, 안토니아는 팔라스에게 큰 고마움을 표현하면서, 그와 그 동생 펠릭스에게 자유를 주고 자신의 아버지 이름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손수 하사하고 황제령 아이깁투스 내 노른자 땅 일부를 개인영지로 내려줬다. 그래서 팔라스 형제는 해방노예가 됐음에도 엄청난 부자가 됐고 그 자녀들은 기사계급이 됐다.[22] 티베리우스 황제의 최측근이자 친구인, 서기 15년 집정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의 딸이다. 서기 28년 집정관으로 아피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와 친척이다. 명문귀족 가문인 유니우스 일족 출신으로 모계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먼 친척으로, 서기 18년생이다.[23] 수에토니우스의 기록. 수에토니스는 더해서 가이우스(칼리굴라)가 에니아를 통해 마크로에게 환심을 산 뒤, 티베리우스를 독살했고, 늙은 황제가 아직 숨이 붙어 있을 때 티베리우스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베개로 숨을 막아 죽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내용이 거짓말인 게 티베리우스는 자연사했고, 주치의의 말을 듣고도 자신의 건강은 내가 잘 알고 있다고 하고 죽었다는 것이다.[24] 타키투스의 주장이 설득력이 높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마크로에게 칼리굴라가 알려지지 않은 약속을 서면으로 보장하고 난 이후부터 이들이 연합을 형성해 칼리굴라 즉위까지 이어졌고, 원로원 회의록을 기반으로 한 타키투스의 저술 방식은 수에토니우스와 달리 비교적 객관성에 입각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또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처럼 왕자 본인이 유부녀에게 접근해 불륜관계를 맺었고, 진짜 결혼맹세를 했다면 친손자 게멜루스에게 제위를 주고 싶어한 티베리우스에게 칼리굴라는 친혈육인 이유로 처형되지는 않아도 율리우스 간통죄로 기소돼 추방되었을 텐데 말년의 까칠한 티베리우스는 종손자의 행동을 알고 있어도 이들을 공격하거나 숙청하진 않았다.[25] 타키투스는 말년의 티베리우스가 세야누스 일당을 쳐낸 직후부터 죽은 혈육들을 위한 피의 복수를 선언하면서, 서한에 신들이 자신을 저주하더라도 자신이 더 파멸하겠다는 문구를 적어 공개했다고 한다.[26] 티베리우스는 카프레아이 섬에서 틀어박혀 살았어도 로마와 이탈리아, 각 속주의 사정을 계속 보고 받았고 수도와 본국에서 나오는 소문과 정보를 근위대에게 직접 보고받아 모를 리가 없었다.[27] 수에토니우스는 지중해 세계를 이렇게 기록했다.[28] 오늘날에는 말라리아로 추정된다.[29] 심지어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를 독살했다는 설까지 생겨났기에 인기는 더욱 상승했다.[30] 소(小) 드루수스의 아들이자 티베리우스의 친손자. 할아버지 티베리우스가 사망할 당시에는 아직 성년식을 치르지 않았기에 법적으로 아이에 불과했다.[31] 수에토니우스에 의하면, 칼리굴라는 회복된 뒤 이들을 잡아다 "약속 지켜야지?"라면서 검투사로 시합에 내보내고 물에 빠뜨려 죽였다.[32] 칼리굴라가 신들의 복장을 입고 코스프레를 하거나, 냉혹할 정도로 원로원의 반 황제 움직임에 대응한 것은 맞지만, 그의 건강 상태를 분석한 학자들에 따르면 수에토니우스의 "칼리굴라 미치광이썰"에 대해 과장이자 허언이라고 말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칼리굴라 문서 내 외모에 대한 왜곡 참조.[33]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34] 다시 말해서 소 안토니아는 게멜루스의 외할머니였고, 칼리굴라와 게멜루스는 양부-양자 관계인 동시에 고종사촌형제이기도 했다.[35]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이렇게까지 결론내리고 볼 경우, 게르마니쿠스의 모친이자 칼리굴라의 할머니, 그리고 대 드루수스의 아내 소 안토니아의 입장은 그녀가 살아생전 정치행동을 자제했다고 해도 전혀 고려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36] 실제 티베리우스는 가이우스 칼리굴라를 술라로 비유하면서 마크로에게 그 편을 들지 말것을 경고했다는 이야기가 로마인들 사이에서 정설로 돌아다녔고, 게멜루스 단독세습을 위해 티베리우스는 서거 몇달 전부터 상당히 노력했다.[37] 이 무렵, 회계감사관을 시작으로 법무관 자리까지 연이어 승진한 대표적인 기사계급 출신이 베스파시아누스였는데, 그는 고리대와 경매업에 종사한 탓에 가문의 평판이 좋지 않음에도 칼리굴라 시대때 법무관에 추천받아 취임했다고 한다.[38] 이는 후일 수에토니우스가 과장, 왜곡해 사람들을 경기장에서 끌어내려 모조리 맹수에게 던졌다는 악행으로 소개됐다.[39] 바티칸 오벨리스크가 초대형 전차 경기장 중심부에 위치한 그것인데, 칼리굴라는 이를 이집트에서 로마로 가져오기 위해 두 대의 거함을 건조했다.[40] 공화정 시대의 카토와 그 친구 간의 일화처럼 로마에서 아이를 낳은 경험이 있는 가임기 여성들은, 후사를 원한 로마인과 그 가정에게 최고의 재혼상대였다.[41]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의 아버지로, 역사가 타키투스 아내의 할아버지다. 칼리굴라의 추천으로 법무관에 올랐다.[42] 네로 시대 동안 악명을 떨친 악랄한 근위대장이다. 본래는 조련사, 푸줏간 주인 등을 지냈다고 한다.[43] 이때 이 명령을 어긴 죄로 처형된 법무관이 장군 아그리콜라의 부친(타키투스 아내의 할아버지)이다.[44] 이 방법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흔히 군주들이 사용하는 ‘유사시 인질로 삼기 위한 조치’로 자주 활용됐다. 그러나 본래부터 왕정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로마인들에게 칼리굴라의 이런 왕권 강화책은 상당히 비난받을 수밖에 없었다.[45] 카이사르 이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연관성이 깊었던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속주의 주도였다. 아우구스투스 시대 당시, 칼리굴라의 할아버지였던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대 드루수스)가 이곳의 총독으로 있었고 칼리굴라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도 이곳에서 유년 생활을 보냈다. 또한 칼리굴라의 고모 리빌라와 작은아버지 클라우디우스가 모두 이 도시 출신이었으며, 티베리우스 즉위 당시 게르마니쿠스의 가족들이 급히 거처를 옮긴 도시 역시 루그두눔이었다. 이런 까닭에 루그두눔은 일찍부터 칼리굴라 일가와도 연관이 깊은 도시였다.[46] 칼리굴라가 원로원에게 빼앗은 조폐발행권과 일부 속주 총독 임명권은 이후 황제들도 내놓지 않을 정도로 황제가 경제정책과 속주 인사권을 주도할 수 있게 한 결정이었다. 실제로 원로원은 칼리굴라가 자신들에게 빼앗은 조폐발행권 등을 제자리에 되돌리기 원했지만, 원로원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 클라우디우스조차도 이를 거부했으며, 그는 오히려 재무관 2명을 추가 배치하는 등 칼리굴라보다 황제의 국고 장악력을 더 강화시켰다.[47] 두 집정관은 오늘날 연구들에 따르면 실제로 칼리굴라 암살을 계획했다고 한다.[48] 칼리굴라의 증조할머니 리비아 드루실라 생전부터 황실과 친했고, 칼리굴라의 작은아버지 클라우디우스가 완전히 정계에 배제된 시절부터 그의 진정한 친구 중 한명이었다.[49] 이때 등대를 세우면서 만든 기념비 내용은 칼리굴라가 태어난 딸을 축복하고, 장차 태어날 자신의 아이들이 아우구스투스 가문이며, 함께 온 삼촌 클라우디우스와 그 자녀들에게도 위엄이 있다는 축원비인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50] "칼리굴라가 황제가 된다면 이것은 칼리굴라가 말을 타고 나폴리 만을 왕복하는 것과 같을 겁니다."[51] 이 행동에 대해 학자들은 그리스계 주민들이 의도적으로 로마 측의 대응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행동이라고 설명한다.[52] 아우구스투스와 일반적인 황제들은 황제숭배조치를 개인이 먼저 요청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총독이나 토호들이 소위 ‘요청’하면 “허락한다”, “승인한다” 내지 티베리우스처럼 마지못해 “상식 선에서 해라”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예민하게 다뤘다. 반면 칼리굴라와 도미티아누스는 개인우상화를 노골적으로 하고 본인이 먼저 이를 진행시켰다(결은 같지만 네로는 황제숭배조치를 넘어 그리스 문화 팬덤 만들기 정책으로 많이 활용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칼리굴라는 재평가 이후에도 암군 소리를 피하지 못하고 있고, 도미티아누스 역시 능력과 별개로 원로원에게 잔혹하고 끔찍한 독재자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53] 사실 승리라고 하기도 애매한 개선식이었다.[54] 그러나 이 이야기는 현실성이 없다. 칼리굴라가 암살된 곳은 황궁 내 지하통로였다.[55] 이런 배경 때문에, 생존한 클라우디우스는 황제로 선포되자마자 황제 경호 전체를 갈아엎고 면담 방식, 황제 외부 일정 경호 등에 예법을 만들어 즉시 시행했다.[56] 이때의 일에 대해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암살자와 수위들은 후일 죽은 황제의 유령을 보고 처형 직전까지 죄책감과 고통에 시달렸다고 한다.[57] 이런 그의 행동은 클라우디우스 즉위 후, 황실과 프라이토리아니가 이 사람의 뒷조사를 하기 전부터 의심을 받고, 확정적으로 암살 배후로 확정된 결정된 증거물이 됐다. 그래서 클라우디우스는 자신과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가 체포된 뒤, 명확한 증거가 여러 가지라는 점을 거론할 때 이때의 일을 짚고 넘어가면서 이것부터 변명해보라고 물었다.[58] 카시우스 카이레아는 칼리굴라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의 휘하 백인대장으로,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도움을 받아 근위대장까지 올라간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가족법상 클리엔테스였고 이 혐의도 추가됐다.[59] 요세푸스, 디오 카시우스, 수에토니우스는 공통적으로 카이레아가 남자답지 못하다며 칼리굴라가 놀리고 모욕을 줘서 원한을 가졌다고 기록했다.[60] 특히 명문가 수장인데다 부친은 대 드루수스, 형은 게르마니쿠스였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 일가에 대해 기본적으로 호의적이고 향수가 강한 이탈리아 민중들과 이 일대의 군단병들에게 인기가 상당했다.[61] 이 연설 후에도 클라우디우스는 모든 암살 위험요소를 제거할 시간이 될 30일 동안 극소수의 인사 외엔 어떤 방문도 허락하지 않고, 자신의 경호를 철저히 하도록 지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