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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성립2.2. 17~18세기2.3. 중반2.4. 후반2.5. 종결
3. 관련 사건4. 같이 보기5. 외부 링크

[clearfix]

1. 개요

청나라러시아 제국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2. 역사

2.1. 성립

러시아 제국이 루스 차르국 시절 1582~1643년에 걸쳐 시베리아로 영토를 급속히 확장하게 되었다. 루스 차르국의 카자크들은 시베리아를 정복하면서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영토를 정복하고 편입했다. 이 과정에서 카자크들이 청나라의 귀속되었던 원주민들과 충돌하고 청나라와 국경 문제로까지 비화되면서 양국간 영토 분쟁이 일어났다.

2.2. 17~18세기

카자크들은 유라시아 스텝 지대의 유목민과의 정면 대결 대신에 시베리아의 삼림 지대를 장악하는 방식을 통해 급속히 동진하기 시작했다. 한 지역에서 모피 자원이 고갈되면 이들은 다시 동쪽에서 새로 모피 사냥터를 확보하고 다시 모피 자원으로 사용할 동물들이 멸종되면 다시 동쪽으로 모피 사냥터를 넓히는 방법을 거치며 시베리아 영토를 넓히기 시작했다. 17세기 중반 시베리아 카자크가 바이칼 호 일대를 넘어 스타노보이 산맥을 거쳐 아무르 강 유역까지 탐사하기 시작했다. 1643~46년 바실리 포야르코프가 이 지역을 탐험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아무르 강 일대의 지리와 자원에 대한 정보가 러시아 측에 알려졌다. 카자크는 1650년에 아무르강 상류의 약사(yaksa) 지역을 공략하여 다우르인들을 침략하였으며, 이듬하 9월에는 아무르강과 송화강의 합류처까지 남하하여 듀체르인들을 노략했다. 10월 달에 이르러 카자크인들이 우자라(ujala)를[1] 공략하자, 이들은 패망한 채 닝구타(ningguta) 주방에 주둔 중인 닝구타 머이런 장긴(Ningguta meiren-i janggin, 寧古塔梅勒章京) 하이서(haise, 海色)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하이서는 베이징에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청 측도 이미 작년부터 척후병을 보내어 이 지역 동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곧바로 출정이 단행되었다. 하이서는 만주군 600명과 기타 원주민들을 징병해 총 1,600명에 이르는 군대로 우자라를 구원하고자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소극적인 공세 전략과 카자크의 청동대포로 인해 대패하고 말았다.[2]

샤르후다는 부임 이후 아무르강 하류 유역인 사견(使犬, indahūn takūrara) 지방 10성의 조공 초유, 아무르강 하류 유역 주민들을 무단강 유역으로 사민, 닝구타와 길림을 군사 거점으로 개발, 카자크에 대한 군사작전을 진행하였다. 청은 1654년 2월, 정축조약 5조에 따라 징병을 명령했다.[3] 조선은 이에 따라 파병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변급(邊岌)이 이끄는 조총병 152명이 출병하여[4] 청군은 총 752명이 넘는 병력으로 카자크를 상대로 크게 승전하였다. 1655년 북경에서 정백기몽고 구사 어전(gūsai ejen) 밍안다리(Minggandari)로 하여금 후마르강 어귀에서 러시아의 후마르(쿠마르스크) 요새를 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하고 퇴각하였다. 이외에도 1657년에는 무단강과 송화강의 합류처인 샹얀 워허(Šanggiyan wehe. 尙堅烏黑)에서 양측의 전투가 있었고, 이듬해 2월 순치제는 조선에 군수품과 조총병과 200명을 급파할 것을 명했다. 조선은 신유 인솔 하에 260명의 조총병을 파병하여 청군과 합류했고, 송화강과 아무르강의 합류처에서 북상하던 카자크 병력을 공격하여 승전했다. 이때 스테파노프 이하 다수가 전사하였고, 1660년(순치17)에는 지금의 하바롭스크 북쪽에 있는 구법단촌(古法壇村) 전투에서 청군이 카자크를 습격하여 다시 한 번 승전하였다. 1658년과 1660년의 패전으로 인해 카자크 병력은 네르친스크로 후퇴, 청군은 알바진(약사) 요새를 파괴했다.[5]

1665년 폴란드계 러시아인 귀족 출신 니체포르 체르니호프스키와 몇몇 카자크들이 알바진에 요새를 하나 세웠다. 이 요새는 3백여 명을 수용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다른 한편 다우르족-어웡키족 계통의 추장 간티무르가 휘하의 전사들을 이끌고 1666년 러시아로 귀순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때마침 청나라의 강희제삼번의 난을 진압한 이후 여유가 생겨 루스 차르국과 본격적으로 외교에 나서기 시작하는데, 본격적으로 협상을 하기 앞서 수천여 명의 병력을 보내 1685년 알바진을 함락시켰다. 청나라에서는 알바진에서 사로 잡은 포로들을 좋게 풀어주었지만 이들은 청나라 군이 떠나자 다시 요새를 점거하였고 1686년 요새는 재차 함락되었다.[6] 알바진 문제가 일단락된 이후 청나라와 루스 차르국은 1689년에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해 국경을 확정시켰다. 네르친스크 조약 당시에는 중국어는 사용되지 않았고[7] 만주어 조약문, 라틴어/러시아어 조약문이 각각 체결되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네르친스크 조약 당시 대표단은 협상에 앞서 '쌍방 중 누구도 모국어를 쓰지 않을 것'과 '동수의 인원이 협상에 참여할 것'을 약속한 상태로 협상을 진행하였다. 당시 청나라의 관리들은 쓸 만한 러시아어 통역관들을 데리고 있었지만 실제 협상에서는 이들을 배제시켰다. 다른 한편 러시아에서는 다우르족 가운데 만주어 통역을 할 만한 사람을 찾았지만, 러시아에 귀순한 다우르족 중 만주어를 유창하게 잘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러시아인이나 만주인 모두 몽골어를 잘 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몽골어 대신 라틴어가 협상 언어로 선택된 이유가 묘한데 당시 네르친스크에 모인 러시아 사절단이나 청나라 사절단 중에 라틴어가 가능한 사람들이 폴란드계 러시아인 한 명[8]과 중국으로 선교하러 왔다 네르친스크로 불려나온 예수회 성직자 두 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협상이 이렇게 철저한 보안 속에 유지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전근대에는 상대방 국가에게 보내는 외교 문서에 이런저런 비하적 인신공격을 써서 보내면[9] 외교 사절단들이 알아서 순화해서 번역, 통역하는 일이 많았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즉 러시아 차르와 중국 황제가 모두 주시하는 상황에서 협상을 하는 작업은 상당한 위험부담이 따르는 일이기도 했다.[10] 동수의 인원이 협상에 참여할 것이라는 조항은 러시아 측에서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는 당시 시베리아가 식량 자원이나 도로가 빈약한 이유로 중대한 외교 협상에 약 1천5백여 명의 사절단을 파견하는데 그쳤으나, 청나라 측에서는 군인 1만 2천여 명에다 예수회 선교사들 뿐만이 아니라 불교 승려 1만여 명도 함께 대동하여 러시아 사절단에게 압박을 가했다.[11]

협상에 나선 골로빈은 알바진을 포기하는 대신 아르군 강 북쪽의 염호 접근권을 얻었다. 이를 계기로 아르군 강은 오늘날에도 러시아의 중국의 경계로 기능하고 있다. 청나라는 좀 더 유리한 협상 결과를 얻었는데 우선 국경 분쟁 지역 중 "자신들이 한 번도 통치한 적이 없는 지역"들의 영유권을 포기했고, 러시아인들이 청나라와 계속 교역할 것을 허락하는 대신 준가르 칸국의 갈단 칸을 돕지 않을 것을 보장받았다. 당시 시베리아 동부에서 생산된 모피는 모스크바까지 다시 이동하는 것보다는 베이징에 갖다 파는 것이 훨씬 남는 장사였고, 이러한 연유로 이후 러시아는 준가르 칸국에 대한 군사동맹이나 원조를 완전히 중단하였다.

1713년 8월에는 청나라의 만주족 외교사절이 준가르 칸국 견제를 목적으로 토볼스크에 도착하였으나, 당시 러시아 제국이 스웨덴과 대치중인 상황이라 차르와 면담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만주족 사절은 대신 토볼스크에서 남하하여 칼미크 칸국을 방문한 후 1715년 베이징으로 귀환하였다.

1727년에는 캬흐타 조약을 체결해 국경이 확정되었다. 다만, 베이징 조약 체결 이전에는 연해주가 청나라의 영토였다.

2.3. 중반

18세기 중반 청나라가 준가르 칸국을 병합하면서 러시아 제국과 청나라는 중앙아시아에서도 국경을 맞대기 시작했다. 1851년에는 신장 지역의 국경 지대의 무역 관련하여 쿨자 조약이 새로 체결되었다. 러시아 제국 상인들이 천산북로에서 불법적으로 무역을 하는 것에 대해 청나라가 제재를 가하자, 러시아 제국 측에서 여기에 항의하였고, 결국 청나라는 쿨자를 러시아 상인들에게 개방하되 카슈가르시의 개방은 거부하는 방향으로 조약이 체결되었다. 쿨자 조약 체결 문서는 러시아어와 프랑스어 및 만주어로 작성되었으며, 원 조약에는 중국어가 없었으나 후대 와서 조약 내용이 중국어로 다시 번역되었다.

양국의 관계는 약 1백여년 동안 네르친스크 조약과 캬흐타 조약에 의거하여 지속되었으나 청나라가 쇠퇴하고 1858년에 새로 아이훈 조약이 체결되면서 만주와 연해주에 러시아 제국이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1860년에는 베이징 조약을 체결해 연해주가 러시아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청나라의 영토였던 만주에도 러시아 제국이 영향을 줬고 러시아인들이 만주 지역에 정착했다. 이후 러시아 제국이 우즈벡 3칸국을 병합하는데 완료하면서 양국이 국경을 접하는 면적도 증가하였다. 청나라는 러시아가 만주에서 세력을 확장하는데 위협을 느끼고 한족들의 만주 이주를 권장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1870년대 감숙성섬서성에 기근이 들자 해당 지역 인구가 만주 지역으로 대거 이민정착한 것을 계기로 만주의 한족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청나라의 신장 지역이 1864년 야쿱 벡의 봉기로 혼란한 틈을 타서 1871년 러시아 제국은 카자흐스탄 지역과 인접한 신장 북서부 영토 상당 지역을 병합하였다. 야쿱 벡의 봉기를 진압한 좌종당의 군대가 쿨자에 주둔한 러시아군과 대치하는 가운데 결국 188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통해 청나라는 쿨자를 반환받는 대신 러시아 제국이 새로 병합한 신장 서북부 영토 대부분의 권리를 인정하기에 이르렀고, 이를 계기로 천산북로의 중심지였던 쿨자시는 러시아 제국과의 국경 도시 기능을 하게 되었다. 이후 청나라 조정은 신장의 중심지를 디화로 이전하게 되었다.

2.4. 후반

파일:1024px-Chinese_Eastern_Railway-en.svg.png

1895년에 일본이 청나라와의 전쟁으로 랴오둥을 차지했지만, 러시아 제국과 프랑스, 독일이 삼국간섭으로 일본에 압력을 주면서 다롄은 1895년에서 1901년까지 러시아령 다롄이 되었다. 당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건설하던 러시아는 시베리아에서 하얼빈과 다롄을 잇는 철도 노선까지 부설하고 이를 계기로 하얼빈에는 상당수의 러시아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외만주는 근대 후기부터 러시아 제국이 시베리아를 개척하면서 건설한 철도인 '철의 실크로드'라 불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지나는 곳 중의 하나이며, 소련 시기에는 많은 동유럽, 러시아 및 인근 지역의 유대인들이 이 길을 통해 극동 지역으로 이주되기도 했었다. 러시아는 하얼빈을 대놓고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연해주로 지나가는 요충지로 만들고 러시아식 신도시를 건설했으며 다롄을 러시아 제국의 항구로 삼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1899년에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러시아 제국은 의화단 운동에 개입했고 군대를 파견했다. 그리고 만주 전체를 점령하여 극동총독부를 세웠다.[12]

그러나 이후 한반도만주를 둘러싸고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러일전쟁을 치렀지만,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하얼빈과 다롄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의 청나라 만주 침투 시도는 좌절되었고 러시아는 중동로를 제외한 만주 전역에서 철수한다.

19세기 러시아 제국에서는 차를 마시는 문화가 보편적으로 퍼져 차에 대한 수요가 많았으나 거의 전량을 청나라에서 수입하는 문제로 공급이 일정하지 못해 문제가 되었다.[13]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은 청나라 출신 차 재배 기술자 유준주를 초빙하여 조지아 일대에 차 재배를 시도하였고, 러시아 제국 영내에서 차를 재배하는데 성공하였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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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종결

1911년에 청나라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나라가 멸망했다. 러시아 제국 또한 제1차 세계 대전 도중에 혁명이 일어나 양국은 황정이 무너지고 중화민국과 소련의 관계가 되었다.

3. 관련 사건

4. 같이 보기

5. 외부 링크



[1] 우자라인들은 허저 퍄하의 일원으로 분류되었다. #[2] 이훈(2018), "17세기 중엽 청-러시아의 충돌과 흑룡강 유역의 부족민", 《洌上古典硏究》 65, p.187~192.[3] 다만 이명제는 청의 파병 요구가 정축절목의 징병 범주와 다르며, 과거 명대의 제후국에 대한 군사적 요청의 차원도 아닌, 외번 몽골과 같이 외번에 대한 군사 동원 지시였다고 해석한다. 그는 홍 타이지대 정명전의 연장선상에서 러시아의 동진에 맞서 조선을 동원하였다는 사실은 청이 조선을 중화제국의 영역보다는, 초원 지역 대청제국의 영역 내에 위치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이명제(2021), "17세기 청ㆍ조선 관계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4] 효종대 청은 마음만 먹으면 조선에 대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조선 조정이 청병에 대해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또한 이 경우 정벌 대상이 명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신적, 정치적 부담이 적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계승범(2009),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p. 257~259. 계승범은 역사저널 그날에서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대등한 두 나라가 연합군을 형성한 게 아니죠. 당시 청나라의 만주족은 팔기제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청나라 장수는 조선군 260명을 독립적인 부대로 자기 휘하에 두는 게 아니라 260명을 여덟로 나누어서 그냥 분산해서 배치해버립니다. 그러니까 신유도 작전 지휘권이 없는 겁니다."라고 하였다. #[5] 이훈(2018), "17세기 중엽 청-러시아의 충돌과 흑룡강 유역의 부족민", 《洌上古典硏究》 65; 宋寅宙(2018), "淸朝의 順治~康熙年間 黑龍江 유역 통합과정과 ‘吉林將軍體制’의 성립", 《明淸史硏究》 50; 박지배(2018), "17세기 중반 러시아의 동북아진출과 ‘나선정벌’의 의미", 《歷史學報》 240.[6] 알바진 요새 함락 이후 청나라 측에 투항, 귀순한 카자크들은 청나라 내에서 러시아 정교회를 믿을 권리를 보장받고 현지인 여성들과 통혼하였는데 이들은 오늘날 알바진인으로 이어진다.[7] 명나라 시절에도 러시아 사절단이 중국 베이징을 방문한 적이 있었으나 러시아 사절단이 한문으로 된 초청장을 읽지 못한 것에다가 조공으로 바칠만한 귀중품을 휴대하지 못한 이유로 사절단이 명나라 황궁을 알현하지는 못했다.[8] 폴 안드레이 벨로보츠키[9] 이를테면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의 왕들은 중국 황제에게 편지를 보낼 때 중국 황제를 도스트(친구)라고 지칭했는데, 이를 외교사절이 직역했다가는 목이 당장 날아가거나 아니면 몇 년 동안 감금당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10] 쉽게 말해서 협상 내용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두 명 밖에 없으면 협상을 잘못했다고 처벌당할 가능성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 협상에 황제가 만족할 경우 그에 대한 보상은 두 명이 독점하게 되어있다. 아닌게 아니라 협상 이후 골로빈과 벨로보츠키의 러시아 사절단은 러시아 황실로부터 훌륭한 협상으로 국위를 선양했다며 상당한 포상을 받았고, 예수회 선교사 두 명 역시 강희제로부터 과거보다 더 자유로운 조건에서 가톨릭을 포교할 권리를 받게 되었다.[11] 출처 : 피터 C. 퍼듀 / 중국의 서진[12] 청나라 입장에선 엄청난 치욕인데, 민족의 발원지가 외국에게 점령된 꼴이 된 것이다. 한때 만주족 이외의 민족이 들어가지 못하게 봉금 지역으로 지정했을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다.[13] 육로 캐러밴으로 수입하는 차는 운송비가 비쌌고 해로로 수입되는 차는 운송비가 비교적 저렴하였으나 당시 흑해를 두고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의 알력이 지속되면서 공급이 일정하지 못하였다.[14] 러시아 혁명 이후 홍차는 조지아의 주요 특산품으로 소련 각지에 공급되는 주요 특산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