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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鄭)나라 초대 국군 환공 桓公 | |||
성 | 희(姬) | ||
씨 | 정(鄭) | ||
휘 | 우(友) | ||
아버지 | 주여왕(周厲王) 희호(姬胡)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771년 |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806년 ~ 기원전 77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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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나라의 초대 군주. 정백우, 즉 정나라 백작 우라고도 알려져 있다. 주여왕의 아들이며, 주선왕의 아우이고, 주유왕의 숙부다. 정무공의 아버지이며, 춘추시대의 흐름을 만든 정장공의 할아버지다.2. 재위 기간
주선왕 22년(기원전 806년), 그는 형인 주선왕에게 정나라의 백작으로 봉해졌다.주선왕 46년(기원전 774년), 주선왕은 그를 사도로 봉했다.
주선왕이 죽고 주유왕이 즉위하면서 포사를 총애하며 정사를 돌보지 않자 그는 주유왕에게 그러지 말 것을 간했으나 주유왕이 괵석보를 총애했고, 그가 그것을 부추겼기 때문에 정환공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국인들의 원성을 사고 제후들의 이반이 가속화 되었다.
주유왕 11년(기원전 771년), 신후는 자신의 딸을 내친 주유왕에게 앙심을 품고 견융족을 끌어들였다. 주유왕은 봉화를 이용해 제후들을 불렀으나 포사의 장난질과 주나라의 권위가 떨어진 것이 겹쳐서 결국 제후들은 오지 않았고, 주유왕은 급히 가마에 타 피난길에 올랐지만 결국 견융족의 기마부대에 따라잡혀 여산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때 정환공은 주유왕의 가마를 지키다가 전사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주나라에서는 주평왕이 왕이 되고, 정나라에서는 자신의 아들 희굴돌이 정나라 군주에 오르니 그가 바로 정무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