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19:00:14

정간공

파일:정 전서체.png
정 국군
{{{#!wiki style="margin: 0 -10px -5px"
{{{#ece5b6,#494212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81818,#e5e5e5
<colcolor=#373a3c>
초대

환공
제2대

무공
제3대

장공
제4대

소공
제5대

여공
제6대

소공
제7대

제8대

제9대

여공
제10대

문공
제11대

목공
제12대

영공
제13대

양공
제14대

도공
제15대

성공
제16대

제17대

희공
제18대

성공
제19대

희공
제20대

간공
제21대

정공
제22대

헌공
제23대

성공
제24대

애공
제25대

공공
제26대

유공
제27대

수공
제28대

강공
삼황오제 · · · · 춘추시대 · 전국시대 · 진(秦) ·
삼국시대 · 진(晉) · 오호십육국 · 북조 · 남조 · ·
오대십국 · · 서하 · · · · ·
중화민국 국가원수 · 중화민국 총통 · 중화인민공화국
}}}}}}}}}}}}}}}
정(鄭)나라 20대 국군
간공
簡公
희(姬)
정(鄭)
가(嘉)
아버지 정희공(鄭僖公) 희견(姬堅)[1]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530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566년 ~ 기원전 530년

1. 개요2. 생애
2.1. 정나라의 막장 상황2.2. 자사 집권 시절2.3. 자공 집권기
2.3.1. 복잡한 양국 간의 관계
2.4. 자산 상국이 되어 집권하다2.5. 정 간공의 최후
3. 평가

[clearfix]

1. 개요

중국 춘추시대 정나라의 제20대 군주. 정희공의 아들. 정정공의 아버지. 아들인 정정공과 함께 자산(子産)을 상국으로 임명해 정나라의 중흥을 이끈 군주다.

2. 생애

2.1. 정나라의 막장 상황

당시 정나라의 상황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극히 막장이었다. 왜냐하면 패자국인 진(晉)나라초(楚)나라의 다툼에 휘말려 국론이 분열되고, 국토는 황폐하였다.약소국의 비애[2] 그리하여 정나라는 날로 쇠퇴해 그것을 표현한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 '낮에는 진(晉)나라에게 빌붙고, 밤에는 초나라에게 간다.'[3] 이럴 정도로 막장 상황에서 정 간공이 즉위한 것이다.

2.2. 자사 집권 시절

정 간공 원년(기원전 566년), 여러 공자들이 상국 자사를 죽이려고 했는데, 자사가 그것을 알고는 도리어 그들을 역관광시키고 모두 처형했다.

정 간공 2년(기원전 565년), 진(晉)나라가 정나라를 치자 정나라가 진나라에 복종할 의사를 표하자 진나라가 물러났다. 자사는 초나라와 가까이했는데,[4] 진나라가 칠까 두려워 두 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정 간공 3년(기원전 564년), 자사가 반란을 일으키려 하니 자공이 위지를 시켜 죽이고 반란을 도모하려다가 자산이 반대해 무산되었다. 정 간공은 자공을 상국에 봉했다.

2.3. 자공 집권기

2.3.1. 복잡한 양국 간의 관계

정 간공 4년(기원전 563년), 진(晉)나라는 정나라가 초나라와 동맹을 맺은 사실에 노해 정나라를 치자 초공왕이 정나라를 구하였다. 정 간공은 진(晉)나라와 화친하려 하자 초공왕이 정나라의 사신을 거두었다.

정 간공 5년(기원전 562년), 송나라를 쳤다.

정 간공 7년(기원전 560년), 정 간공이 자교를 파견해 진(晉)나라와 함께 진(秦)나라를 쳤다.

정 간공 9년(기원전 558년), 허영공이 진(晉)나라를 섬기려다가 무산되었는데, 정나라는 그것을 핑계로 진(晉)나라와 함께 허나라를 쳤다.

정 간공 11년(기원전 556년), 정 간공은 노나라를 구하려는 진(晉)나라와 여러 제후국들과 함께 제나라를 쳤다. 그런데 나라를 지키던 자공이 초나라에 내통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자전과 자서는 그들의 내응을 막았다. 자공의 일파인 자경이 이끄는 초군은 패배의 쓴 맛을 보았다.

2.4. 자산 상국이 되어 집권하다

정 간공 12년(기원전 555년), 정 간공이 자신을 무시하고 권력을 남용하는 자공을 처형하고 자산을 경으로 삼았다.

정 간공 15년(기원전 552년), 정 간공이 공손 흑굉을 죽였다.

정 간공 17년(기원전 550년), 정나라 측에서는 진(晉)나라의 뜻을 받들어 제나라를 치려 했으나 초나라가 진(晉)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정나라를 쳤다. 이에 진(晉)나라는 정나라를 구하러 갔다.

정 간공 18년(기원전 549년), 진(晉)나라가 제나라를 치기 위해 참여했으나 제후장공이 죽어 연합군은 회군했다.

정 간공 19년(기원전 548년), 정 간공은 진(晉)나라에 위후를 놓아달라 청하고 자산에게 6개 읍을 봉했으나 자산은 3개만 받았다.

정 간공 20년(기원전 547년), 송나라 대부 상술의 건의로 진(晉)나라와 초나라가 화의를 맺으니 이를 미병지회 혹은 미병회맹이라고 한다.

정 간공 21년(기원전 546년), 이때 자피가 자산에게 홀로 집권을 하라 권했는데, 자산은 자신의 세가 적은 것을 들어 거절하려 했으나 결국 자피의 강력한 권유에 못이겨 자산이 전권을 쥐게 되었다. 정나라는 초나라와 맺은 전의 맹약 때문에 유길을 초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그러나 초나라에서는 유길을 돌려 보내고 정간공에게 오게 했는데, 자산과 함께 초강왕을 알현했다.

정 간공 22년(기원전 545년), 초 강왕이 죽고 오나라의 사신 계찰이 자산에게 재상이 되면 예를 갖추라고 했었는데, 자산이 과연 재상이 되었으므로 그대로 하였다. 이때 자피는 상경이 되었다.

정 간공 23년(기원전 544년), 여러 공자가 서로 죽이면서 자산을 제거하려 했으나 이들 중 몇몇이 반대해 실행되지 않았다.

정 간공 25년(기원전 542년), 정 간공이 자산을 진(晉)나라에 보내 진평공의 병문안을 가게 했더니 제사를 지내고 생활을 규칙적으로 하라고 권하니 후한 예물을 받았다.

정 간공 26년(기원전 541년), 공손 흑과 유초가 서로 다투었는데, 자산은 백유를 친 죄와 유초와 싸운 죄, 월권 행위를 저지른 죄를 들어 공손 흑을 처형하고, 그 시체는 기시하고, 그 수급은 효수했다.

정 간공 27년(기원전 540년), 정 간공이 진(晉)나라에 조회하고, 초나라를 두려워해 초영왕에게 조회하니 자산이 수행했다.

정 간공 28년(기원전 539년), 정 간공이 병이 드니 자산이 제후를 대신 만나 초 영왕과 신(申) 땅에서 회맹하는데, 이때 초 영왕이 제나라에서 월권 행위를 일삼다가 오나라로 달아난 경봉을 살해했다.[5]

정 간공 30년(기원전 537년), 자산은 형정을 주조했다.[6]

정 간공 31년(기원전 536년), 나라 사정이 흉흉하자 자공의 아들 공손 설과 백유의 아들 양지를 대부로 세워 정나라의 흉흉한 인심을 가라앉혔다.

2.5. 정 간공의 최후

정 간공 37년(기원전 530년), 정 간공이 죽고 그 아들 희녕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정 정공이다.

3. 평가

초기에는 아버지가 죽고 다소 젊은 나이에 즉위하여 자사와 자공에게 휘둘렸으나 결국 그들을 진압하고 자산을 상국으로 세워 나라를 중흥시킨 공로를 세웠다. 그리고 대신들을 숙청한 전력 때문인지 의심이 많다는 평도 있다..[7]


[1] 희곤완(姬髡頑)이라 하기도 한다[2] 허나라 말고는 털어먹을 수 있는 나라가 주위에 없는 것도 한 몫을 했다.[3] 정확한 순서를 알면 고쳐주기 바란다.[4] 이것으로 보아 정 희공을 죽인 원인이 이 두 나라와의 관계와 거기에 얽힌 이해관계가 있지 않았나 추측해볼 수 있다.[5] 얼핏보면 그 월권 행위로 죽인 듯 하지만, 실상은 중원의 사정을 아는 망명객을 죽여 오나라의 힘을 꺾은 것이다.그래봤자 병사력이고 뭐고 없는 개털이지만[6] 중국 최초의 성문법이라 전해진다.[7] 물론 정나라의 군주권 강화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작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