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10px"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D7003A><tablebgcolor=#D7003A> | 이시바 시게루 관련 문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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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아버지 이시바 지로 | ||
역대 선거 | 제38회 중의원 · 제39회 중의원 · 제40회 중의원 · 제41회 중의원 · 제42회 중의원 · 제43회 중의원 · 제44회 중의원 · 제45회 중의원 · 제46회 중의원 · 제47회 중의원 · 제48회 중의원 · 제49회 중의원 · 제50회 중의원 | ||
내각 | 이시바 내각 (제1차 내각 · 제2차 내각) | ||
소속 | 자유민주당 · 자유개혁연합 · 신생당 · 신진당 · | }}}}}}}}} |
1. 개요
제102·103대 내각총리대신 이시바 시게루의 생애에 대해 정리한 문서.2. 총리 취임 전
2.1. 초기 생애
이시바의 어린 시절[1] |
건설성 사무차관, 돗토리현지사, 참의원 의원,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장 등을 역임한 이시바 지로의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가 둘 있는 막내이자 장남으로서, 1908년생인 아버지가 48세, 1918년생 어머니가 38세에 본 상당한 늦둥이이다.
어머니 이시바 가즈코는 도쿄제국대학 출신이자 도쿠시마현, 야마가타현지사를 역임한 내무성 관료인 가나모리 다로(金森太郎, 1888~1958)의 딸로, 작은아버지들도 도쿄제국대학 출신에 중공업과 관련된 일들에 종사했다. 어머니 가즈코는 국어교사 출신이라 자식들에게 교육을 열심히 시켰다고한다.
아버지는 시게루가 태어난 이듬해인 1958년 건설성 사무차관을 퇴임하고 곧이어 선거에 나가 돗토리현지사가 되었고 16년간 4선을 했기에, 그는 어린 시절을 돗토리현에서 보내며 돗토리대학 교육학부 부속 초/중학교를 졸업하고 1972년 도쿄의 게이오기주쿠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아버지는 1974년 돗토리현지사를 사임하고 참의원 의원이 되었다.
게이오기주쿠고교 졸업 후에는 내부 진학으로 게이오기주쿠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법 공부에 열심이었다고 하며 2학년 때인 1976년, 제26회 전일본학생법률토론회(全日本学生法律討論会)에서 1등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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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이은행 행원 시절 |
졸업 후 1979년부터 미쓰이은행에 다니다 1981년 당시 참의원 의원이던 부친 이시바 지로가 사망하자 부친의 친구였던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부름을 받아 정계에 입문[2], 1983년부터 은행을 퇴직하고 다나카의 파벌인 목요회 사무국에서 근무했다. 동년 9월 대학 동급생이었던 나카무라 요시코와 결혼했다.
2.2. 결혼 관련
관련 영상 |
나가타초[3] 제일의 애처가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아내 요시코(佳子)와 금슬이 좋다. 18세 무렵 처음 만난 첫사랑과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해로하고 있으며 자주 부인의 지지 덕에 지금까지 해올 수 있었다고도 말한다.
부부의 러브스토리도 유명하다. 이시바와 요시코는 게이오기주쿠대학 법학부 동기[4]였다. 1학년 독일어 수업에서 그녀를 처음 봤을 때, 이시바는 세상에 이렇게 미인도 있구나 충격을 받았다고 하며, “법학서적을 들고 도서관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그녀의 마음에 들기 위해 형법 시험 기출문제를 만들어 돌리기도 했다고. 두 사람이 처음 이야기하게 된 것은 1학년 기말고사 기간 이시바가 만든 스터디에서였다. 요시코의 인터뷰에 의하면, 자신이 자기소개를 하자 이시바가 ‘넌 죠시가쿠인(女子学院) 출신이지? 우리 누나 둘도 거기 출신[5]인데‘ 라며 딱히 밝힌 적도 없는 학교를 알고서 말을 걸어왔다고 하며, 스터디에 온 학생들을 위해 도넛을 준비해 놓은 배려심이 눈에 띄었다고 한다. 또 이시바는 성격이 좋아 주변에 친구가 많은 인기인이었고, 다른 남학생들과 달리 항상 포멀한 복장을 갖춰 입어 특이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친한 친구로 지내다가, 4학년 때 이시바가 용기를 내 “결혼을 전제로 사귀자”고 고백을 했지만 요시코에게 거절당했다. 요시코는 당시 여성들은 기업에 취직을 해도 OL로만 가능했고 결혼하면 퇴직하던 시대였는데, 이시바는 자신과 결혼하고 싶어서라는 이유로 본래 목표하던 학자나 변호사를 포기하고 안정적인 은행을 택했다는 데에서,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부러움과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들기 싫다는 거부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렇게 졸업하고 이시바는 미쓰이은행, 요시코는 마루베니에 입사해 근무하다가, 2년 후인 1981년 이시바의 부친 이시바 지로의 부고가 실린 신문을 보고 요시코가 조의를 전하는 전보를 보냈고, 그가 답례 전화를 하고 나서 다시 인연이 이어져서 사귀게 됐다. 순조롭게 사귀던 두 사람이었지만, 1983년 이시바가 생전 아버지의 친우이며 장례위원장까지 맡은 인연이 있는 다나카 가쿠에이의 권유로 은행을 그만두고 정계에 입문하게 되자, 요시코는 청천벽력처럼 다가온 ‘정치인의 아내‘라는 미래가 꺼려졌고[6], 이시바도 ‘결혼하고 싶지 않아졌다면 포기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요시코의 아버지가 ‘넌 결혼 상대를 직업으로 고르니, 인물로 고르니‘라며 잘 생각해 보라 조언했기에 결국 1983년 9월 둘은 호텔 뉴 오타니 도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전 다나카에게 인사를 갔을 때, 그는 마루베니에 다니는 요시코에게 ‘참 좋은 회사다. 나랑 엮인 사건만 없었으면 더 좋은 회사였을 거다.‘라며 농담[7]을 했고, 요시코의 본적이 자신의 고향 및 정치적 기반인 니가타현이란 걸 알고서 크게 환영하며 당장 결혼하라고 했다고 한다. 출처 기사 한국 기사
2.3. 정치 성향 및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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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의원 최연소 의원 시절 |
1986년 아버지의 정치적 기반을 이어 29세에 돗토리현 전현구의 중의원 의원이 되었고(당시 최연소 당선), 이후 한 번도 낙선한 적 없이 동일 지역구에서 40년 가까이 내리 13선 국회의원을 역임 중이다. 아무래도 지역구인 돗토리현 제1구가 전형적인 시골 자민당 텃밭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렇듯 대부분의 자민당 세습 의원과 비슷하게 가업 정치가로서의 정치 궤적을 밟았다.
자민당에서 오랫동안 정치활동을 했지만, 1993년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 불신임안에 찬성하며 자민당을 탈당, 1993년 중원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다. 이후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에게 투표했으며, 신진당에도 가담하지만 1996년 중원선을 앞두고 다시 탈당, 무소속으로 또 당선된다. 선거 6개월 후 자민당에 복당하여 지금에 이른다.[8]
자민당 내에서 온건파에 가깝다고 평가받는 인물이지만, 안보 정책 면에서는 일본 주류 우익들의 주장과 큰 차이가 없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비록 조건은 다르지만 일본의 보통국가화에 찬성하고, 일본은 국제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논지로 자위대 해외 파병에도 적극적이었다. 또한 국민의 국방 직접 참여가 국민의 방위 의식을 고취한다는 점에서 징병제 같은 제도의 가치를 옹호하는 언행도 제법 했다. 일본도 해병대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유사시 재외 일본인을 구출하기 위해 자위대가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발언도 했다. 심지어 북중러에 대응하기 위해 아시아판 나토를 결성해야 한다든가, 비핵 3원칙을 깨고 일본에 핵무기를 들여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는데 이는 옛날의 아베 신조나 어지간한 극우파도 안 하는 강경한 주장이다. 경제에 있어서는 경제 성장보다는 악화된 재정 상태를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보이며 소비세 인상에 적극 찬성하고 있다. 또한 대표적인 우익단체 일본회의 소속이다.[9]
또 다른 현실주의자의 면모는 상술했던 '보통국가화의 조건'이라는 것이 한국, 중국, 러시아, 아세안, 미국 등 주변국들의 동의를 반드시 얻어야 하며 지금의 상태로는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으며, 자위대 해외 파병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을 도우러 가는 것이지 싸우러 가는 것이 아니며, 싸움을 도우러 가는 것은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는 주장을 수시로 해 왔다. 징병제 문제에서도 "정치적 가치는 확실히 있으나, 과연 하이테크 전쟁인 현대전에서 가치가 있을지 모르겠다. 더구나 일본의 방위는 전수방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특성상 하이테크로서 불리한 점을 극복해야 하는데, 이 경우에는 결국 징병제보다는 지금의 모병제가 더욱 효과적이다"라는 견해를 확실히 밝힌 상태이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도 하지 않는다. 천황도 참배하지 않을 정도로 문제가 있는 곳이니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참배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위에 언급되었듯 주변국들과의 우호관계가 매우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우익적 견해를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견해를 확실히 표방하고 있다. 중의원 시기에는 "북한을 비난하기 전에 먼저 그들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며 김일성 사망 당시 조문을 가기도 했을 정도다. 게다가 "태평양 전쟁은 침략 전쟁이며 대동아 공영권은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적 수사다!"라고 TV 프로그램에 출현하여 공개발언을 했을 정도이다.
2012년에는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놓고 중국과 갈등이 심해지자 자위대에 해병대를 창설하자고 주장했고, 실제로 육상자위대 산하에 해병대로서의 기능을 하는 수륙기동단이 창설되었다.
2019년 한국 정부의 지소미아 종료 선언에 대해서는 일본이 전쟁 책임을 정면으로 마주 보지 않는 것이 문제의 근본이라며 지적했다.#
방위청 장관 시절인 2004년 3월, "지금까지 자위대를 반쯤 야유하는 표현으로 '자폐대'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자폐증 아동'의 자폐를 써서 '자폐대'이다", "자위대가 안에만 틀어박혀서는 안 된다"라는 자폐인 차별적 발언으로 논란을 빚은 적이 있다. 자위대가 일본 국내에서의 소극적인 방위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주변국과 해외로 뻗어나가 더 적극적으로 국가 방위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자신의 의견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데, 아무리 그래도 표현 자체가 부적절했다는 지적이 많았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과했다.##
2011년 3월 15일, 간 나오토 총리에 맞서 도쿄전력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가, 그의 장인은 도쿄전력의 거래처인 쇼와전공의 전직 임원, 딸은 도쿄전력 직원임이 <주간문춘>을 통해 밝혀져 논란이 되었다.
2.3.1. 대한민국 관련
자민당 내에서는 대한민국에 제법 우호적인 정치인으로 분류된다. 역사 인식에 대해서도 자민당 정치인치고 상당히 전향적인 편이다.[10] # 국내 제도권 언론에서도 종종 "친한파"라고 보도할 정도다. ###2019년 한일 무역 분쟁으로 지소미아가 종료될 위기에 처하자 일본이 전쟁 책임에 대해 제대로 마주하지 않아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였다며 과거 한일관계에 대해 배울 필요가 있다고 블로그를 통해 주장하였다.#
이러한 배움 덕인지 2019년 10월 한 강연회에서는 창씨개명을 언급하며 한국의 입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 만약 오늘부터 "너는 스미스다"라고 들으면 기분이 어떻겠냐고. 한일관계에 대해 역지사지할 필요성이 있다고 하였다. # 2019년 하반기에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공부를 하며 보냈다고 한다.#
일본의 전쟁범죄 중 하나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의 납득을 얻을 때까지 사죄해야 마땅하다고 한국 제도권 언론인 동아일보의 인터뷰로 나왔지만 이후 산케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양국이 서로 힘을 합쳐 해결해나가야 한다는 입장을 전했을 뿐이고 사죄의 의미는 없었다며 해당 인터뷰에서의 사죄 발언을 부인하였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동아일보에 항의할 생각은 없다는 의향을 밝혔다.#
독도 문제를 비롯한 일부 문제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보인다. 사실 이는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 같은 일부 좌파 성향을 제외한 모든 일본 원내 정당에게 해당되는 말이긴 하지만. 2011년 8월 1일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며 울릉도를 시찰하겠다고 김포공항까지 왔다가 입국심사대에서 입국을 거부당하여 도로 일본으로 돌아갔던 신도 요시타카를 포함한 자민당 국회의원 4명이 '영토에 관한 특명위원회' 소속이었는데 이때 이 위원회의 위원장이 바로 이시바였다고 한다.[11]
그리고 강제징용에 관한 2018년 한국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서도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과 마찬가지로 청구권이 한일기본조약으로 종결되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데, 이런 배경으로 미루어보아 만약 한국에서 반일적인 인사가 집권한다면 한일관계가 순탄하게 풀려나갈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경우 2006년~2007년 당시 1차 집권 시기에는 과거사 사죄 발언 등 친한 성향을 띄우다가 2012년에 재집권한 이후로는 일본의 우경화에 동참하면서 한국에 배타적인 모습으로 전환된 케이스가 있듯이[12] 한 성향을 영원히 지닌다는 보장은 절대로 없다. 아베가 2006년에 보여준 친한 성향도 그저 단순한 립서비스에 불과하다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의회에서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한 사실을 부정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시바가 과거사 문제, 한국 관련 공부를 하며 읽었다고 한 책이 바로 반일 종족주의와 한국의 비극이라는 책인데, 이 책이 한일 양국에서 모두 베스트셀러에 오를 정도로 주목도가 높았던 것과는 별개로 논란이 제법 많은 책이다.[13] 그리고 그는 극우 논란이 있는 일본회의 소속이다.
2020년 8월 25일 방송에서는 "일본은 한국 등 다른 아시아 국가에 대해 너무나 모르고 있습니다.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라고 발언하였다. 영상
2008년에는 손석희의 인터뷰를 받은 적이 있다.# 당시 이시바는 사전에 정해진 질문만 받는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는데, 인터뷰를 하는 와중에도 질문자인 손석희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않고 대답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이에 손석희는 부아가 치밀어 준비되지 않은 질문들을 마구 던져 나름의 복수를 했다고 회고했다. 그래도 손석희의 마지막 질문 내용엔 웃으며 답변함으로써 서로 마무리 자체는 깔끔하게 했다. 아래의 이시바에 대한 자민당 의원들의 평을 보면 대체로 대화나 참석 자체를 아예 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나름대로는 인터뷰에 성의를 보였다고도 볼 수 있다.
2021년 11월, 동아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한일관계는 문재인 대통령이 말한 대로 투트랙으로 가야 한다'며 문재인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정상회담은 필요하고 정상회담 과정에서 상대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관계 개선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일본인은 한국 역사를 깊이 공부하고, 한국인들의 사고 근간에 무엇이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일제강점기 시기에 일본이 대한제국 궁전이 있는 곳에 조선총독부를 설치해 한국 국민의 자존심을 무너뜨렸고, 독립 국가였던 대한제국을 합병해 국가를 빼앗았다고 발언했다. 그는 또 이런 말을 하면 일본 국내에서 강한 비판이 나온다고 하면서도 자신은 양국이 양호한 관계가 되는 게 지역 평화를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용기 있게 말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용기 있는 사람이 일본에도, 한국에도 더 많아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 또한 한일관계는 문재인 정권 이후 급속하게 악화되었다면서도 총리가 바뀌면서 서로 대화를 나누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한국에 대해 "한국과 관계도 중요…나라 다르면 국익도 달라"라는 말을해서 기존 보수노선과 비슷한 행보가 예측된다.#
2.3.2. 북한 관련
자민당 총재 선거 전부터 북일간 연락사무소[14] 설치를 추진하겠다는 견해를 나타냈으며, 총리 취임후 일본인 납북자 가족 모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쿄와 평양을 잇는 연락사무소 설치를 검토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한다.#다른 인터뷰에서도 북일정상회담 추진 의사를 밝히면서 이를 위해서는 "한국, 미국 또한 중국과 사전 조정을 확실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2.4. 4전 5기의 총리 도전기
이시바의 정치 역정을 다룬 영상 |
2018년 3월, 가라앉을 줄 알았던 모리토모 학교 비리 사건이 아사히 신문 보도로 재점화되면서 아베 총리가 코너에 몰리게 되자 이시바가 차기 총리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3월 13일 발표된 산케이 신문 여론조사에서 차기총리 적합 설문에 이시바(28.6%)는 아베(30.0%)와 불과 1.4%포인트 차이로 2위를 차지했다. 이렇듯 국민적인 인기와 평당원들의 지지는 상당하지만, 자민당 내 국회의원들의 지지 세력이 미약해 2018년 9월에 열리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실제로 당선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본인의 계파 수월회와 소수계파인 이시하라파를 합쳐도 호소다+아소+기시다의 과반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시바는 당내 세번째 계파인 누카가파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었는데...
2018년 4월 누카가파의 수장에 이시바와 가까운 관계로 알려진 다케시타 와타루 자민당 총무회장이 선출되고 다케시타파로 간판을 바꾸면서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5월 27일 다케시타 총무회장이 '반년 전이라면 아베 총리의 총재 3연임이 확실하다는 분위기였지만, 나중에는 '좀 기다려 보자'는 분위기가 됐다' 라며 아베 총리에 대한 지지를 유보했다. 이어 사학스캔들에 따른 아베 내각 지지율 급락을 언급하며 2019년 여름 제25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는 인물을 당 총재로 뽑아야 한다고 언급했다. 당 내 유력 계파 중 하나인 다케시타파의 수장이 공개적으로 총리의 연임에 의문을 제기하고, 사학스캔들과 내각의 지지율 급락을 언급했다는 점은 이시바 시게루에게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다케시타파가 자율투표 방침을 정하고 파벌 내 중의원 다수가 아베 신조를 지지하는 것으로 전망은 더 어두워지고 있다.
2018년 9월 20일 치러진 자민당 총재 경선에서 아베에게 참패하였다. 아베는 국회의원 405명 중 329표, 지방당원 405표 중 223표를 차지하였다. 이시바는 국회의원 73표, 지방당원 181표에 그쳤다. 이시바가 상대적으로 우위일 것이라 예상되던 지방당원 투표에서도 이시바가 패배하면서 격차는 68% vs 32%로 벌어졌다. 다만 아베에게 크게 패하기는 했지만 이시바 진영은 총재 선거 결과에 어느 정도 만족하는 분위기이다. 이시바 진영은 초기에는 압도적인 열세가 예상되는 가운데 차기 총재 선거에 다시금 도전하기 위해 내부적으로 200표 이상 득표를 목표로 했었다. 한 측근은 기자들에게 '졌지만 잘 싸웠다'라고 말했다. 당초 아베는 지방 당원 득표도 70% 이상 가져가는 것을 목표로 했었으나 이시바가 44%나 되는 득표를 함으로써 무산된 상황이다. 이런 이시바의 선전에 대해 일부 일본 언론들은 아베 1강이라는 일방적인 국정 운영에 피로감이 드러났다고 평했다. 특히 아사히 신문 같은 경우 '무너진 압승'이라고 혹평한 상황. 원래 아사히 신문이 모리토모 비리 사건을 통한 공격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에서 알 수 있듯 아베와 사이가 많이 안 좋다. 아베의 독재적인 행보가 마음에 안 드는 상황에서 언론탄압까지 기획하는 태도가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이에 관해 정치 저널리스트인 이즈미 히로시는 이 선거 결과는 아베 진영의 압승으로 보이지만 실은 패배에 가깝다고 평했다. 그가 분석하기로는 계속되는 국정선거 압승으로 아베의 3선이 확정된 가운데 아베 진영에서 원한건 이시바 진영의 차기 대권의 가능성을 없애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 소속 국회의원들을 대상으로 압력을 가해서 대부분의 국회의원들을 회유하는데 성공했다. 심지어 이시바 파 소속인 사이토 겐 농림수산대신에게까지 '당신 내각에 있으니까, 이시바 지지할 거면 사임해라'라고까지 한 상황이었다.
아베는 이런 폭로에 사이토에게 그런 말 한 사람은 없다고 강하게 부정했으나, 총재 선거가 끝나고 나서 바로 사이토를 경질했다. 이건 그냥 알아서 찌질함을 인정한 셈이며, 아베의 독재적인 행보로 인해 4명 카레먹튀 같은 소동이 벌어지는 등 아베의 문제점이 점점 드러나는 상황이다.[16]
그는 아베 진영의 진정한 승리 조건인 트리플 스코어를 달성하지 못했으므로 아베 1강이라는 상황에 의문부호를 띄운 것과 이시바의 차기 당권 가능성이 열려 있는 이겨도 이긴 상황이 아니라고 평했다. 아베는 이번 선거를 압도적으로 이기기 위해서 온갖 꼼수를 다 부린 상황이었다. 앞서 언급된 국회의원 대상으로 한 압력 외에도 홋카이도 지진, 러시아 방문 등으로 이시바와의 토론을 꽤나 회피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생각보다는 격차가 크지 않았으니 입맛이 쓸 상황이었다.
이런 정황을 감안해 보면 이시바는 이번 총재 선거를 이기기 위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차기 총재 선거를 위한 밑바탕을 위해 나왔고, 그게 실패하지는 않았다고 여겨진다.
2019년 2월 10일에 있었던 자민당 당대회에서 아베는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참패한 것을 말하며 "(그 때의 일로)악몽과 같은 민주당 정권이 탄생했습니다."라는 말로 당시 민주당 정권을 비판하며 선거 승리 의지를 다졌는데, 이 발언에 대해 이시바는 과거에 끝났던 정권을 끌어내서 그 정권보다는 나았다는 걸로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것은 위험하다며 아베를 비판했다. 이시바는 2018년 총재 선거 전까지는 아베와는 선명한 대립각을 세우는 것은 피해왔는데, 선거 후에는 자신감을 얻은 탓인지 아베와의 대립을 피하지 않으며 강력하게 맞섰다.
제2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기시다파 의원들이 낙선되면서 다시 급부상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한일관계 때문에 다시 자민당 내에서 팽당했고 9월에 제4차 아베 신조 제1차 개조내각에서 수월회 계열 의원들이 완전히 쫒겨났다.
벚꽃 스캔들에서 아베 총리가 각종 의혹에 관해 솔직하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아베 총리가 추진한 검찰 정년 연장 법안에 대해서는 표결 강행 반대하였다.# 또, 국민 이해가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도박 사건으로 물의를 빚은 구로카와 히로무(黑川弘務) 도쿄 고등검찰청 검사장 사임도 당연하다고 발언했다.#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요시다 히로시(吉田博美) 전 자민당 참의원 간사장의 지역구였던 나가노현을 방문해 요시다의 옛 지지자들을 만났다.# 총선을 앞두고 본인의 지지세를 확대하기 위한 전술로 보인다.
그리고 아베가 총리직에서 사임하자 총재 선거에 나갈 생각이 있다고 한 후 공식 출마를 선언했다.
아베 정권과의 차별화를 강조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처음에는 지지율 1위를 기록했지만, 예상대로 당내 의원들의 지지는 스가 요시히데 내각관방장관에게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다. 이때문인지 결국 9월초 여론조사에서는 지지율 1위 자리도 내주고 말았다. 1년 짜리 보궐선거라 간이 선거 방식으로 치러져 일반 당원보다는 현역 의원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 중요한 선거가 되어버린지라 당선되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고 말았다.
8일 열린 정견 발표회에서는 "올바른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그레이트 리셋, 이 나라의 설계도를 다시 쓰겠다"라고 아베 정권과의 차별화 및 개혁 의지를 다시 강조했다.# 특히, 장점인 당 지방 조직의 지지를 굳건히 하기 위해 지역 경제 활성화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9월 14일, 투개표 전 발표된 NHK 종합조사에 따르면 이시바 전 간사장이 도도부현 지부 연합회 대표 투표에서 141표 중 42표(29.79%)를 획득하는데 그친 것으로 알려졌다. 최종 개표 결과 총 68표를 얻으며 세 후보 중 제일 낮게 득표하였다. 지방표에선 기시다 후보보다 훨씬 많이 득표했지만 국회의원표에서 기시다 후미오에 압도적으로 밀려 결국 기시다 후보보다 21표 낮은 68표를 얻었다.
스가 내각 하의 학술회의 임명 논란에 대해서도 설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10월 22일. 당대표 선거 패배에 대한 책임으로 계파 수장에서 물러났다.
2021년 9월 14일 고노 다로를 지원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고, 다음날인 9월 15일에 확실하게 불출마 선언을 하였다. 이미 그 이전에 이시바와 친분이 있는 이토 다쓰야, 다이라 마사아키 의원 등이 고노 지지 의사를 밝힌 바 있다.
고노 다로와 손을 잡아 자기 파벌 의원의 내각 진출의 길을 트고, 자신은 간사장 등의 자민당 간부직을 노려 고노 이후를 노리기 위함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고노 다로가 결선 투표 끝에 기시다 후미오에게 패하면서 다시 한 번 꿈이 좌절되었다. 오히려 선거 이후 고노 다로가 제2의 이시바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농담이 나오는 상황. 결국, 수월회는 2021년 12월 2일에 최종적으로 의원 그룹으로 이행하기로 결정되어 더 이상 파벌이 아니게 되었다.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후에도 자민당 내에서 어떠한 역할도 부여받지 못했으나 정작 본인과 손잡았다가 3A와 기시다 총리로부터 경원시당했던 고노 다로 전 외무대신은 2022년 8월 10일 개각을 통해 제2차 기시다 제1차 개조내각에서 재입각했다.
2024년 7월 말부터 헌법 9조2항 삭제, 여성 천황제 용인 등을 주장하는 등 본격적으로 차기 총재선 준비에 돌입했다.
2024년 8월 24일, 지역구 돗토리 현 야가미초에 위치한 신사에서 차기 총재선에 출마할 뜻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기자와 질의응답에서 선택적 부부별성제 도입에 대해서는 긍정한다고 하였고, 당의 정치자금 스캔들과 관련해서 "정치를 위한 돈이 필요하다면, 그 정도에 알맞게 해야 하고, 당이 개정 정치자금법을 준수하는 것은 물론 투명성을 더욱 높이기 위한 노력을 최대한으로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2024년에도 변함없이 자민당 총재 후보들 중 당원들에게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으며 결선 투표 진출이 유력해졌다. 일단 본인이 자민당을 뒤흔든 통일교, 정치자금 게이트에서 자유로운데다[17], 그 문제로 아베 신조가 총격사건으로 사망한 이후 아베파를 이끌던 핵심 의원들까지 정치자금 게이트에 대한 징계로 쫓겨나가 이시바를 가로막던 인물들이 단번에 사라졌고 22년 이후 지속적인 자민당의 보궐선거 패배로 위기감까지 생겨 당원 및 국민들의 지지도가 높은 이시바에 유리하게 흘러가게 되어, 상대가 아직은 비주류인 고이즈미 신지로이냐 극우파의 중진이었던 다카이치 사나에냐에 따라 총리의 운명이 가려질 것으로 보인다. 만약 다카이치가 결선에 갈 경우 기존 다카이치계열과 갈등이 있던 스가나 기시다계열의 경우 이시바를 지지할 확률이 높다 [18] 다카이치가 상대하기 더욱 편할 것으로 보인다.
2024년 9월 27일, 총재 선거에서 1차 투표에서는 154표를 얻어 다카이치(181표)에 27표 차로 뒤졌으나, 결선투표에서 215표를 얻으며 194표를 얻은 다카이치를 꺾고 당선되며 제102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으로 확정되었다. 2008년 총재에 첫 도전한 지 16년 만에, 5번째 도전 끝에 이루어낸 성과. 아베 신조가 살아있던 시절에는 아베 또는 그 대리인(스가 요시히데)에게 번번이 밀려서 각료직도 받지 못하며 찬밥 신세에 머물다가, 마침내 국가 정상 자리에 오른 것.
이번 이시바의 총재 당선 과정에서 킹메이커 역할을 한 인물은 다름아닌 퇴임을 앞둔 전임자 기시다 후미오다. 고이즈미 신지로와 고노 다로의 지지 세력은 비교적 쉽게 흡수할 수 있었지만,[19] 기시다의 측근들(하야시 요시마사, 가미카와 요코)의 지지세는 기시다 덕분에 확보할 수 있었다.[20] 실제로 이시바는 결선에서 고이즈미+이시바+고노+하야시+가미카와 지지표의 총합 중 고작 15표 밖에 이탈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결과 발표 후 당황한 표정을 한 아소 다로와는 대조적으로 기시다는 미소를 짓는 모습이 포착되었다.[21] #
총재선 기간 동안 진행된 여야 합의상 총리 지명 투표를 2024년 10월 1일에 하기로 했기 때문에 실제 총리 취임은 10월 1일에 할 예정이다.
2.5. 방위 전문가
일본의 정치인들 중에서는 보기 드문 방위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두 차례에 걸친 방위청장관 및 방위대신 역임 기간 동안 이런저런 일을 많이 해서 적어도 제복조, 즉 자위관들 사이에서는 절대적인 인기를 자랑하고 있다. 대신 사복조로 불리는 방위청/방위성 소속 문관들이나 동료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좌파에게는 일본의 보통국가화를 추구한다는 평판을, 우파에게는 일본의 방위에 소극적이라는 이율배반적인 평가인데, 이유는 이 사람의 방위정책이 매우 중도적이거나 어떤 면에선 좌파적이면서도, 정작 자위대 해외 파병 등에 적극적이어서 일본의 재무장에 유리한 포지션을 확보해 온 것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또한 이 문제를 국민들에게 홍보하는 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문예춘추와 같은 잡지에 수시로 기고했고, 만화가들과 손을 잡고 방위 문제를 다루는 만화책을 출간한 적도 있다. 이래저래 방위 전문가로서 일본 국민들에게도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편이다.
또한 고무라 마사히코의 뒤를 이은 방위대신 재직기간 중에는 자위대와 국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홍보에 특히 관심이 많아, 본래 자위대가 그리 선호하지 않았던 자위대의 영화 촬영 협조 명령을 자주 발령했다. 특히 자위대는 영화에서 자위대 항공기가 추락하거나 자위관이 죽는 장면이 나올 경우, 또는 자위대가 우익적으로 비칠 우려가 있는 부분이 작중에 있을 경우 절대 영화촬영에 협조하지 않거나 심지어 조직적으로 영화 촬영을 방해한 전력이 많은데, 이시바가 재직한 기간 동안에는 억지로라도 협력하게 만들었다. 이시바의 재직기간 중 만들어진 대표적인 자위대 지원 영화가 바로 '전국자위대 1549'이다.
정작 이 사람이 물러난 뒤 만들어진 TV판 전국자위대 세키가하라의 전투 편은 자위대로부터 협력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볼 때 전국자위대에 대한 자위대의 시각은 그리 좋지 않은 편이라고 판단된다. 실제로 1979년작 때는 아예 대놓고 방해를 한 나머지, 모든 피복과 총기, 심지어 전차 같은 중장비까지 영화사에서 자체 조달, 개조해서 영화를 촬영했고, 이때 만들어진 소품은 훗날 자위대 협조를 받지 못하는 자위대 등장 영화를 찍을 때 아주 잘 활용됐다.
과거사 인식에 대해 전향적이고 온건한 입장 때문에 안보적으로 무조건 유한 평화주의 성향이라고 오해하면 안되는게, 2013년에 북한의 공격이 임박했을 때 일본의 선제 타격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히는 등의 모습도 보여주었다.# 즉, 이시바가 자민당 내에서 상대적으로 친한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은 어찌 보면 반공주의적 관점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대한 외교의 스탠스에서 일본 기준 진보적일 수도 있는 스탠스를 취한 것일 뿐이지 그것과 별개로 평화주의를 주장하는 범좌파 야당들과는 결을 달리한다.[22] 실제로 그는 아시아판 NATO 창설을 지지하며# 중국 반발을 무릅쓰고 2024년 8월 13일 대만의 라이칭더 총통이랑 만난 바 있다.#[23]
2.6. 당내 평가
2.6.1. 부족한 인망
이시바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가 주류를 이루며 일본 현지에서의 지방 평당원을 비롯한 국민의 지지율 역시 높은 편임에도 자민당 총재 자리에 오랫동안 오르지 못했던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일본 정치는 파벌이 여러 개고 이들 파벌은 각자 정치적 스탠스가 다르며 사안에 따라 대립하기도 협력하기도 하는, 어찌 보면 정당 내 정당의 특성을 보인다. 일본 총리가 되기 위해선 의회에서 당내 의원들의 표를 받아야 하고 이 투표는 각자 자기 당의 총재에게 투표하는 것이므로 총리가 되려면 최다수당의 총재가 되어야 한다.그리고 그 자민당 총재 선거의 선거권은 당원들(지방 지부 대표들)의 표와 소속 의원들의 표가 1대 1 비율로 분배되어 있다. 그러므로 당내 인망 및 장악력이 중요한데 이시바는 지방 평당원들의 지지는 상당히 받는 편이지만 원내 의원들과의 관계에서 인망이 부족하여 정치력을 전혀 보이지 못한다는 평이 다수였다.
이 점은 다음과 같은 같은 당내 정치인들의 그에 대한 평가를 보면 알 수 있다.
10년간 얘기한 적 없다.
아소 다로
아소 다로
회동에 초대해도 안 온다.
아베 신조
아베 신조
대화를 나눈 적 없다.
고노 다로
고노 다로
대신실, 각료실에서의 각의 말고는 대화한 적 없다.
스가 요시히데
스가 요시히데
8년은 대화한 적 없다.
다니가키 사다카즈
다니가키 사다카즈
인망이 없음을 자각하시라.
사이토 겐(이시바 최측근)
사이토 겐(이시바 최측근)
파벌 회식 정도는 나와주시면 좋겠다.
다이라 마사아키(이시바 최측근)
다이라 마사아키(이시바 최측근)
인사도 안 돌아오는 희귀한 사람.
가네코 메구미
가네코 메구미
이러한 전후 사정을 알고 있는 야당 진영에서는 자민당 내 反아베 & 親이시바 성향을 가진 의원들과 함께 이시바 시게루가 총리 되는 거 도와줄 테니까 자민당을 탈당하고, 우리 당으로 넘어오거나 공동전선으로 싸우자는 제안을 제시하며 설득했다고 한다.[24]
2.6.2. 변화한 모습과 총재 당선
상술했듯이 아베 신조가 사망하면서 그의 총리직 도전에 있어서 장애물이 하나 사라진 셈이 되었으니, 차기 총리 도전이 한층 더 수월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2024년 이후 기시다 내각의 지지율이 하락하고, 보궐선거 패배로 인해 드디어 자민당 총재직을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본격적으로 생기기 시작하여 자민당 중진 출신들 특히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와 그 시절 내각 대신 중진 모임에 5월 14일 참여하며 본격적으로 차기 자민당 총재 및 내각총리대신 준비 움직임을 시작했다.심지어 8월 하순 경에는 도쿄의 복집에서 구 아베파 중진이자 본인의 총재 선거 추천인 모집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에토 세이시로에게 식사까지 대접하며 변화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뉴스 기사에 따르면, 에토 세이시로는 "이시바가 밥을 사는 경우가 없지만, 이야기가 즐겁고 공부도 되기에 밥값을 대신 내왔다" 라고 한다. 그러던 이시바가 화장실이라도 갔는가 싶더니 웬일로 밥값을 먼저 계산해두어 놀랐다고 한다. 복어를 먹으면서 에토 세이시로가 "이것이 마지막 기회이니까, 빚을 내서라도 의원과 회식해 머리를 숙여라" 라고 말하자 신묘한 표정으로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하며 수긍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러한 노력 덕분이었는지 결선에서 다카이치 사나에를 누르고 28대 총재로 당선되면서 부정적이었던 평가를 뒤집고 역전승을 거두며 당선되었다. 이렇게만 보면, 오랫동안 고전하다가 드디어 기회가 생겨서 수월하게 잡은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일본 국민 여론이야 이시바가 압도했지만 실상 내각제인 일본 정치에서 중요한 건 여당 내 정치세력이고 자민당 내에서 워낙 세력이 없었던 터라서 전문가들도 확신을 하지 못하는 막상막하의 상황이었고 정말로 아주 힘겹게 당선되었다. 하늘이 도와서 당선되었다고 평가받을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오랫동안 자기 소신을 지키며 온건한 합리적 보수를 지향해온 덕분에 총선에서 야당에 패배했어도 非입헌계 야당들의 암묵적인 용인을 받아 총리직 유지에 성공했다.
3. 총리 시절
3.1. 2024년
자세한 내용은 이시바 시게루/2024년 문서 참고하십시오.[1] 왼쪽은 어머니, 오른쪽은 아버지로 사진이 찍힌 당시에 아버지는 최소 50대에서 60대였을 가능성이 높다.[2] 아버지 장례식에 온 돗토리현민 3,500명에게 명함을 돌리며 인사를 드리라고 권유한 게 다나카이며, 정치를 하지 말라는 부친의 유언을 어기고 다나카에게서 정치를 배우기 시작했다. #[3] 나가타초 자체는 단순 지명이지만, 우리나라의 '여의도'처럼 일본 국회의사당과 그 주변 일대, 그리고 더 나아가 일본 국회 그 자체를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용법으로 쓰인다.[4] 생년은 요시코가 56년생, 이시바가 빠른 57년생으로서 같은 75학번이었다. 일본은 4월 학기제여서 빠른 생일이 4월 1일생까지인데, 이시바는 2월생이라 빠른생일 대상자였다.[5] 죠시가쿠인은 일본 명문 여학교 고산케로 꼽히는 일관제 학교로, 도쿄대학 진학생을 연간 수십 명씩 배출하는 곳이다. 이시바의 누나들, 요시코 본인뿐만 아니라 요시코의 모친과 큰딸도 이곳 출신이라 집안 여성들이 모두 학맥이 겹친다.[6] 국회의원의 아내는 도쿄에 머무는 남편을 대신해 지역구에 상주하며 지역 조직, 후원회 등을 관리하는 고된 역할을 한다.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남편의 정치활동을 보좌하며 그야말로 가문의 번영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해야 한다. 남편이 도쿄에서 중직을 맡아 내려오지 못하면 지역구 선거는 아내가 진두지휘하는 게 보통이다.[7] 다나카는 정계 거물 중 보기 드문 서민적인 친근감으로 유명한 인물이었고, 달변가에 화술도 좋아 사람들을 잘 웃기고 잘 끌어들였다. 그의 생전 담화 영상을 찾아보면 마치 한 편의 만담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자폭 농담도 자주 하며 사람들을 웃기는 재주가 있었다.[8] 1990년대 중반에는 2024년 총재선의 최대 경쟁자 다카이치 사나에와 의외로 비슷한 정치역정을 걸어왔다. 둘 다 1993년 중원선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고, 신진당에 가담했기 때문. 다만 이시바는 1996년 중원선을 앞두고 신진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다시 당선되었다가 자민당으로 복당한 것이었지만, 다카이치는 신진당 당적으로 당선된 뒤 탈당하고 자민당에 처음 입당한 케이스였다.[9] 일본회의는 영어 위키백과에서도 여러 신뢰도 높은 인용을 통해 극보수주의, 국수주의, 반동주의 단체로 평가하고 있으며# 심지어 우익적 서술이 강하다고 평가받는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도 극우로 분류한다.#[10] 과거 정치인들까지 포함하면 김대중-오부치 선언으로 유명한 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도 자민당 소속 정치인들 중에서는 과거사에 대해 전향적인 스탠스를 취했다. 이는 당시 자민당 내에 태평양 전쟁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원로 인사들이 많이 살아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오부치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11] 이때 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한국 정부가 독도에 시설물을 설치하는 것에 대해 적극 반대하기도 하는 등 영토 문제에 있어서는 타협점이 없다고 볼 수 있다.# 2011년 당시 자민당 정조회장이었던 이시바 시게루는 2011년 4월 14일 오후 주일한국대사관을 찾아 권철현 주일대사에게 독도에 대한 우리 정부(한국)의 실효적 지배를 위한 조치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는 항의문을 전달했다. 이시바 정조회장은 "일본이 대지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이 독도에 해양과학기지를 건설하는 것은 한일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다"며 자제를 요구했다.#[12] 다만 2012년 당시 대통령 이명박의 천황 사죄 요구로 인해 일본에서 한국에 대한 인식이 악화된 것도 원인이라는 점, 아베가 통일교와 커넥션을 맺으면서 극우적인 색채가 강해졌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13] # 이 기사에 따르면 이시바는 징용공(강제징용)은 전쟁 말기까지 자발적 취업이었으며 월급도 높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일본이 일제강점기에 조선에 인프라를 건설해주고, 조선인을 교육해줬다는 것이 사실이어도 병합이 정당화돼서는 안 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즉 강제병합과 식민지배에 이른 과정은 정당하지 않았으나 결과론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배가 한국의 근대화에 일정 부분 기여한 것은 맞다고 보는 것이다.[14] 미수교국 간에 설치되는 외교공관 중 하나로 '사실상 대사관(De Facto Embassy)'으로 불린다.[15] 다나카 가쿠에이가 말한 차기 총재의 필수 코스가 크게 2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간사장 필수에 정무조사회장, 총무회장 중 최소 하나일 정도로 간사장은 대단히 중요한 직책이다. 나머지 한 조건은 외무대신, 대장대신(현 재무대신), 통상산업대신(현 경제산업대신) 중 하나 이상이다.[16] 사실 이 사건에서 아베를 배신했다고 추정된 4명 중 2명분의 카레는 다른 사람을 찍은 것이 아닌 미야자외 히로유키 의원이 워낙 카레를 좋아해 세 그릇 먹은 것이라고 한다. 무효표인 3표를 고려하면 사실상 배신자는 없다고 해도 무방한 셈. 주니치신문 보도[17] 특히 이시바는 4대째 독실한 개신교도인지라 통일교와는 애초부터 상극이다.[18] 실제로 스가, 아소, 기시다의 3인이 킹메이커로 거론되는 상황에서 이시바와 다카이치의 결선투표가 성사될 경우, 스가와 기시다가 이시바를, 아소가 다카이치를 지원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온다.[19] 비록 1차 투표에서는 적으로 만났지만 고이즈미 신지로는 부친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때부터 이시바와 친분을 가졌다. 동료 의원들과 교분이 영 아니라는 이시바가 고이즈미 총리와 그 측근 인사들과는 친분을 맺어왔음은 유명하며, 2021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도 고이즈미 신지로의 설득으로 고노 다로와 단일화를 결정했을 정도로 서로 신뢰 관계는 확실했다. 고노 다로와는 앞서 이야기한 총재 선거 이후 협력 관계를 가져 왔다.[20] 선거 이후 인터뷰에서 하야시는 결선 투표에서 누구에게 투표했는지 공개하지 않았고, 가미카와는 이시바에게 투표했음을 공개했다.[21] 부연 설명을 하자면, 기시다는 사실상 아베의 후계자로 여겨지는 다카이치가 자신의 정책 노선을 계승하지 않을 것임을 들어서, 측근들에게 결선 투표에서는 무조건 다카이치의 상대편에 투표하라고 지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만큼 아베 신조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역임하며 아베의 측근으로 활약했음에도, 그동안 아베와 아소의 압력을 받아왔던 것에 대한 기시다의 반감이 컸음을 알 수 있다.[22] 범좌파라고 표현한 이유는 일본 유신회의 경우는 대내적으로 개혁적 성향을 보이는 것과 별개로 역사인식이나 안보관에 있어서는 자민당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23] 21세기 들어서 자민당 내에 강경 우파들은 혐한 성향 때문에 한국과 협력에 부정적이거나 미적지근하지만, 기시다 후미오나 이시바 시게루 같은 중도우파들은 북한, 중국, 러시아 같은 반서방 독재국가들의 위협에 맞서 한국과 적극 협력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스탠스를 보이고 있다.[24] 물론 이시바는 자민당에 잔류하는 대신 공동전선을 형성해 싸우자는 제안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