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10px"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D7003A><tablebgcolor=#D7003A> | 이시바 시게루 관련 문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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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아버지 이시바 지로 | ||
역대 선거 | 제38회 중의원 · 제39회 중의원 · 제40회 중의원 · 제41회 중의원 · 제42회 중의원 · 제43회 중의원 · 제44회 중의원 · 제45회 중의원 · 제46회 중의원 · 제47회 중의원 · 제48회 중의원 · 제49회 중의원 · 제50회 중의원 | ||
내각 | 이시바 내각 (제1차 내각 · 제2차 내각) | ||
소속 | 자유민주당 · 자유개혁연합 · 신생당 · 신진당 · | }}}}}}}}} |
1. 9월
- 9월 27일
- 9월 28일, 당4역 인선으로 간사장에 모리야마 히로시 총무회장, 정무조사회장에 오노데라 이쓰노리 의원, 선거대책위원장에 고이즈미 신지로 국회대책부위원장을 기용할 방침이다.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에게는 부총재를 제안했으며, 총무회장 임명이 유력했던 다카이치 사나에 경제안보담당대신은 직을 고사했다. # 또한 총재 선거 초반에 선전했던 ‘아베 키즈’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경제안보담당대신도 당 홍보본부장 기용 제안을 거절했다. # 한편 예산위원회 개최 이후에 중의원을 해산할 것이라는 기존 관측과 달리, 10월 9일에 해산하여 10월 27일에 총선을 실시하는 방향을 검토 중이다. #
- 9월 29일, 라오스에서 열리는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ASEAN) 정상회의에 참석할 의사를 나타냈다. 10월 10일~11일 일정으로 참석한다.# 대한민국 윤석열 대통령도 참석 예정인데, 취임 후 첫 한일정상회담 성사 여부가 주목된다.
- 9월 30일, 10월 9일 중의원을 해산하고 같은 달 15일 조기 총선 공시, 27일 투·개표를 진행하기로 방침을 확정했다.# 당일 계획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한다.
2. 10월
- 10월 1일
- 임시국회(중의원)에서 진행된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에서 투표총수 461표 중 291표[1]로 과반수를 넘겼고, 이어진 참의원 투표[2]에서도 투표총수 242표[3] 중 143표로 과반수를 넘겨 제102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였다.
- 내각 발족 직후 "납득과 공감의 정치"를 기본으로 일본ㆍ국민ㆍ지방과 청년ㆍ여성의 기회를 지켜 국민에게 안심과 안전을 가져다 준다는 이시바 내각의 기본 방침을 각의 결정하였다.# 외교ㆍ경제정책은 기시다 후미오 전 총리의 기조를 계승한다. 또한 '탈(脫)디플레 경제'를 명시하여 시장이 우려하는 급격한 금리 인상은 당분간 없을 것으로 보인다.
- 10월 2일
- 취임 후 첫 국가 정상간 통화로 오전 7시 경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전화회담을 가졌으며 미일 동맹과 한미일 협력을 강화할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4]#
- 이어서 두번째로 오후, 윤석열 대한민국 대통령과 전화회담을 가졌다. 윤 대통령은 통화에서 "한일 양국이 가치와 이익을 공유하는 중요한 이웃이자 파트너인 만큼, 앞으로도 양 정상이 긴밀히 소통하면서 협력을 증진해 나가자"고 말했고 이에 이시바 총리는 "취임 후 이른 시간 안에 윤 대통령과 통화할 수 있어 기쁘게 생각한다"며 "그간 양국 관계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 온 윤 대통령의 리더십을 높게 평가하며 앞으로 긴밀히 소통하고 연대해 나가기를 희망한다"고 화답했다.#
- 1-2일에 걸쳐 실시된 교도통신 여론조사에서 이시바 내각의 지지율이 50.7%로 조사되었다.# 아사히 신문은 46%로 역대 내각들 중에서 가장 낮은 시작이다.# 요미우리 신문, 닛케이 신문도 51%, 51%이다.[5]
- 10월 3일
- 내각 인사의 후속으로 부대신 및 정무관 인사를 행했는데, 기시다 내각 시절의 기존 인사가 대부분 유임되었다. 본격적인 인사는 월 말에 있을 제5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후 진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 마이니치 신문에서 조사한 내각 지지율이 아사히 신문과 같은 46%이다.#
- 10월 4일
- 중의원 선거를 앞두고 자민당 '비자금 스캔들' 연루 의원들에 대한 공천을 원칙적으로 용인한다는 방침을 굳혔다고 아사히 신문이 보도했다. 비자금 문제로 징계받은 의원이 당 지역 조직에 지역구 공천을 신청할 경우 공천과 비례대표 중복 입후보를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다만 이 경우, 재발 방지 약속 서약서를 제출하도록 할 계획이다.#
- 취임 후 처음으로 소신 표명 연설을 했다. 이시바는 “몸과 마음을 바쳐, 일본과 일본의 미래를 지켜내겠다. 정치 자금 문제로 잃어버린 정치에 대한 신뢰를 되찾고, 납득과 공감을 받으면서 안전하고 안심하며 풍요로운 일본을 재구성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정치자금보고서에 불기재가 있었던 의원에게 반성을 요구하며 “더욱 투명성을 높이는 노력을 최대한 할 것을 약속한다”라고 강조했다.#
- 특히 한일관계에 대해서는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아 기시다 총리와 윤석열 대통령이 쌓은 신뢰를 바탕으로 가장 중요한 이웃 국가인 대한민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 10월 6일
- 이시바 총리가 27일 중원선에서 당 4역과 함께 비례대표 중복입후보를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 같은 날 '비자금 스캔들' 연루 의원 공천(공인)과 관련된 내각 방침도 정리되었는데, 기존 당의 징계수위에 따라 당원자격정지 등 중징계를 받은 12인[6]에 대해서는 공인을 허용하지 않기로 했으며, 그 이하에 대하여도 일부에 대해서도 공인은 허용하되 비례대표 중복입후보를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2005년과 같은 자객 공천도 없을 것이라 그 이상의 조치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고, 살아서 돌아온다면 속죄(みそぎ)한 것으로 인정해주겠다는 발언까지 나왔다.#
- 10월 9일
- 오전에 각의를 통해 중의원을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입헌민주당, 일본유신회, 일본공산당, 국민민주당 야당 4당은 지금의 내각이 국회심의보다 당리당략을 우선시하고 있는 등의 이유로 이시바 내각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을 제출했고, 본회의가 4시로 늦춰졌다. 그러나 중의원에서 불신임안을 무시하며 그대로 중의원을 해산시켜버렸고, 이에 일부 야당 의원들이 항의의 표시로 해산한 이후 관례적으로 하는 만세삼창을 하지 않았다. 해산명은 "일본 창생 해산"으로 정해졌다.
- 해산 직전 노다 요시히코 입헌민주당 대표 등과 당수토론을 가졌다. 노다 대표가 '비자금 의원’이라고 지칭하자 이시바 총리는 단정적이라며 "불기재 의원"으로 맞받았다. 정치자금 스캔들에 연루된 의원에 대한 공천 문제에 대해 노다 대표는 "대부분 공천이지 않냐"고 목소리를 높이며 "탈세한 사람에게 혈세가 쓰일지 모른다. 국민 감정에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시바 총리는 이에 대해 "최종적인 판단은 주권자인 국민에게 맡긴다"고 반박했다.#
- 10월 10일, 첫 외교 일정으로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ASEAN)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여기에서 대한민국 윤석열 대통령과 40분 간 첫 정상회담을 가졌다.#
- 10월 11일, 교도통신에 따르면 이시바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 가을 예대제 참배를 보류한다. 4대째 기독교 신앙을 이어온 집안 출신인 이시바 총리는 그동안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취한 바 있다. 아베 도시코 문부과학대신, 사이토 데쓰오 국토교통대신, 다이라 마사아키 디지털대신, 이토 다다히코 부흥대신, 무라카미 세이이치로 총무대신 등 각료 6명도 참배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 10월 13일, 교도통신 여론조사에서 지난 주보다 8.7% 낮은 42.0%로 조사되었다.#
- 10월 15일, NHK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내각 지지율이 44%로 조사되었다.#
- 10월 17일
- 10월 19일, 중원선 가고시마현 연설 중 자민당 본부 화염병 투척 및 수상관저 차량돌진 사건에 대해 "민주주의가 폭력에 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국민, 시민의 안전, 안심이 확실히 지켜지도록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10월 20일, 교도통신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41.4%로 지속적으로 낮아지는 추세이다.#
- 10월 21일
- 10월 27일, 제5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결과 자민당 단독 과반 실패는 물론, 자민-공명 연립 과반도 불투명하였고 실제로 연립 과반조차 실패하며 향후 정권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총선 출구조사와 함께 진행된 지지율 조사에서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비율이 지지율보다 높았다.
- 10월 28일, 기자회견에서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국민으로부터 매우 엄격한 심판을 받았다. 유위인들을 많이 잃은 것은 통한의 극한이다. 해야 한다. 이번 엄격한 결과는 당의 개혁 자세에 대한 국민의 엄격한 꾸짖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공명당과의 연정 의사를 확인했다.#
- 10월 29일, 교도통신이 1천6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긴급 전화 여론조사 결과, 내각 지지율이 32.1%로 나타났다.# 요미우리 신문은 급락한 34%를 기록했다.# 닛케이 신문도 32%이다.#
3. 11월
- 3일, 아사히 신문 여론조사에서 내각 지지율이 34%로 선거 이후 급락했다.#
- 11일, 중의원 특별국회에서 진행된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에서 투표총수 465표 중 과반수에 미달하는 221표를 얻어 입헌민주당의 노다 요시히코와 함께 결선 투표에 진출했다. 중의원에서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 결선 투표는 30년 만이다.[7] 결선투표에서도 동일하게 221표를 얻어 160표를 얻은 노다를 꺾고 제103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재선출되었다. 두 후보 모두에게 투표를 거부한 무효표가 84표 나오며[8] 과반수에 미달함에도 불구하고 선출될 수 있었다.[9][10]
- 중의원 투표 도중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고 잠에 든 듯한 장면이 포착됐다.# 그 와중 이시바와 가까운 자리에 재석해 있던 아소 다로 최고고문이 이를 보고 고개를 젓는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 해프닝에 대해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심야까지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오늘은 감기기운이 있어 감기약을 복용하고 있었다고 알고 있다." 라고 해명했다.#
- 12일, 국내 AI와 반도체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2030년도까지 7년간 10조엔 이상의 공적지원을 하는 틀을 새로 마련할 방침을 밝혔다.#
- 13일, 요미우리 신문이 2차 내각 출범 이후 긴급 여론조사에서 내각 지지율이 43%로 전에 비해 올랐다.#
- 15일, 16일까지 이틀에 걸쳐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열린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 정상회의 전 각국 정상들이 서로 인사하며 악수를 청하는 상황에서도 좌석에서 일어나지 않는 모습을 보였으며 정상들[11]이 자신에게 인사를 청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망부석으로 좌석에 앉아 인사를 받는 모습을 보였다. 또 앉아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모습 또한 포착되었다. 이에 대해 외무성 관계자는 보통은 새 총리가 먼저 인사를 하며 돌아다녀야 했다면서 주변에서 도왔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 두 달 전 세상을 떠난 알베르토 후지모리[12] 페루 전 대통령 묘소 참배를 이유로 각국 정상 단체 사진 촬영에도 불참했으며 환영식에서도 팔짱을 끼고 고개를 꺾은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묘소 참배의 경우 이시바 총리가 원하여 추가된 일정에 없었던 갑작스러운 행보였다.
- 또한 같은 날 정상회의를 계기로 열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두 손으로 시 주석과 악수를 한 것도 일본 내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외무성 관계자는 “선거 유세에서 유권자와 악수할 때 버릇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고 해명했다. 아사히 신문은 "실제로 양손으로 악수하는 동안 이시바 씨는 침울한 표정을 잃지 않았고 시 주석과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고 평가했다.#
- 18일, NHK 내각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41%를 기록했다.# 참고로 이 여조는 apec보도전에 집계된 여조이다.
4. 12월
[1] 연립여당인 자민당과 공명당의 중의원 의석 합계가 290석인데 1표가 더 나온 것으로, 의장인 누카가 후쿠시로가 투표한 것으로 추정된다.[2] 중의원, 참의원 양원에서 지명이 다른 경우는 각각 위원 10인으로 구성된 양원 협의회를 열어 합의한다. 합의가 되지 않으면 중의원의 지명이 우선된다.[3] 이시바 시게루와 함께 자민당 총재 선거 결선투표까지 갔던 다카이치 사나에의 표도 1표 나와 참의원 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는 참의원 내에 존재하는 "NHK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당(모두가 만드는 당과는 무관한 계파이며, 타치바나 타카시 전 NHK당 대표가 해당 당을 탈당하여 재창당한 N국당에 소속된 계파이다.)"이라는 무소속 계파 소속 의원이 투표한 것인데, 같은 계파 소속의 다른 한 명은 모테기 도시미쓰 전 자민당 간사장에게 투표했다.(...)[4] 미국이 일본에 주둔하고 일본은 미국에 기지를 내어주는 미일안보조약의 골격을 대등한 상호방위조약 형태로 바꾸는 것을 주장해온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구상이 실현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5] 여러 여론조사의 지지율을 종합해보면 이시바 내각은 허니문을 제대로 누리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며 자민당의 여론이 최고로 안좋았던 2008년 아소 내각 출범 직후와 비슷한 수준이다. 그동안 당내야당 인사(소장파/소신파)로서 여론조사에서 높은 지지율을 받았던 것과 견주어 본다면 낮다는 지적이 있다.[6] 니시무라 야스토시(효고 9구), 하기우다 코이치(도쿄 24구), 시모무라 하쿠분(도쿄 11구), 다카기 쓰요시(후쿠이 2구), 히라사와 가쓰에이(도쿄 17구), 미쓰바야시 히로미(사이타마 14구), 오다와라 기요시(도쿄 21구), 간케 이치로(비례, 구 후쿠시마 4구, 신 후쿠시마 3구), 나카네 가즈유키(비례, 사이타마 6구), 호소다 겐이치(니가타 2구), 이마무라 히로후미(원외, 도쿄 9구), 오치 다카오(비례, 도쿄 6구)[7] 당시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사회당 위원장과 자-사 연립정권의 반대파 후보였던 가이후 도시키 전 총리가 결선 투표를 치렀다. 결과는 무라야마 위원장이 총리로 선출되었다.[8] 국민민주당, 일본유신회, 레이와 신센구미, 참정당, 일본보수당. 참고로 일본공산당은 노다에게 투표했다.[9] 한국에서는 분명 총선에서 야당이 이겼다고 했는데 왜 이시바가 총리를 그대로 맡게 된 건지 의아하다는 반응도 보이는 편이다. 그러나 일본의 야당도 단일 세력이 아닌 극좌부터 극우까지 다양한 정당이 있기 때문에, 사실상 제1세력이 자민+공명 연립여당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또한 이시바가 야당이 봤을 때도 그나마 여당 안에서 온건적이면서도 합리적인 대화가 통하는 인물이라고 야당도 보고 있다는 점도 컸고(아이러니한 점은 이 점 때문에 이시바를 싫어하는 자민당 내 세력도 제법 된다),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압도적으로 작은 파이를 두고서 야당끼리 치열하게 싸워온 탓에 사이가 좋지 않아서 협력하는 게 쉽지 않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이시바가 그대로 총리를 맡는단 결과로 이어졌다. 국민민주당과 일본유신회는 자민당은 싫고 그렇다고 입민당과 좌파 성향의 정당들을 찍기에도 과거의 민주당 정권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표를 모아 의석 수를 확보하였다. 그래서 이시바나 노다 둘 중 하나를 찍기 보다는 단독 투표를 통해 무효표를 만드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10] 다만 그럼에도 예산관련 위원회의 위원장은 입헌민주당에서 맡게 되면서 야권이 연립여당의 목줄을 잡게 된 것은 변함이 없다. 한국과 달리 일본은 국회에서 예산안을 자유롭게 변경하는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11]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총리, 디나 볼루아르테 페루 대통령.[12] 일본계 페루인이며 후지모리주의의 창시자격인 페루의 독재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