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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이상돈 李相敦 | Lee Sang-don | |
<colbgcolor=#808080> 출생 | 1951년 12월 4일 ([age(1951-12-04)]세) |
경상남도 부산시[1] | |
거주지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
본관 | 경주 이씨 |
현직 | 중앙대학교 법과대학 명예교수 |
학력 | 경성수송공립국민학교 (졸업) 경기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원 (법학 / 석사) 툴레인 대학교 대학원 (법학 / 석사) 마이애미 대학교 대학원 (법학 / 석사) 툴레인 대학교 대학원 (법학 / 박사) |
병역 | 해군 중위 만기전역 |
종교 | 천주교 (세례명: 이냐시오) |
소속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의원 선수 | 1 |
의원 대수 | 20 |
링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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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교육자, 법학자, 정치인, 국회의원이다.2. 이력
1951년, 6.25 전쟁 중 부산시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출생지만 부산이지 실질적인 고향은 서울 종로이다. 6.25 전쟁 휴전 후 서울특별시로 재상경하여 4대문 안에 있는 종로구 체부동에서 살았다. 외조부는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인 춘곡 고희동. 고희동은 장면과 가까운 사이로, 1960년에 4.19 혁명 이후 치러진 재보궐 선거에서 민주당으로 대한민국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하였다.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다. 법대에 진학했지만 고시 준비는 적성에 맞지 않았는데 대학원에 가서 책을 읽으니 마음이 편해졌다고 한다. 대학 시절부터 타임지를 읽고 영어로 된 책을 많이 읽고 공부하면서 외국의 각종 학술서를 읽고 영향을 받았다.
국내에서 공부하던 시절 전공은 공법(헌법과 행정법)이었다. 석사 논문은 '미국 대법원과 사법적극주의'로, 이후 보완하여 1983년에 첫 저서 <미국의 헌법과 연방대법원>을 출간한다. 1991년 한겨레 기사에 따르면 한병채 헌법재판소 전 재판관이 이상돈 교수의 서울대 석사학위 논문을 34군데 이상 표절하고 각주까지 여러 군데 훔쳐갔다는 의혹을 받았고, 이에 이상돈 교수가 한병채 헌재 재판관을 상대로 한 저작권분쟁조정신청을 저작권심의조정위원회[2]에 제출해 큰 이목을 끌었다.
‘한겨레’는 “(한병채 재판관의 논문에는) 이 씨의 석사논문을 한두 쪽씩 거의 그대로 옮겨 쓴 곳이 여러 군데 눈에 뜨인다”, 또 “학술논문이 다른 자료를 인용할 때는 각주를 붙여 문헌명을 밝히는 것이 관례인데 한 씨의 논문에는 물론 이 씨의 이름이 한 군데도 언급돼 있지 않다”면서 이상돈 전 위원의 논문 표절 시비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당시에 이상돈 전 위원은 "나 개인의 피해를 보상받고 싶은 것은 다음 문제다. 우리 사회의 지도적 인사, 특히 국민이 헌법적 권리를 의탁한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윤리문제를 심판대에 올리고 싶다"면서 저작권심의조정위원회를 넘어 법정에도 이 문제를 가져갈 뜻을 '한겨레'를 통해 밝히기도 했었다. 이후 이상돈 전 위원은 2013년도에 'MBN'과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 논문 표절 스캔들이 결국 한병채 재판관 측에서 공식 사과하고 배상을 한 것으로 마무리됐었다며 관련 비화를 전했다.
석사 졸업 이후 해군 장교로 입대하였다. 1976년 7월 임관되어, 1979년 7월까지 복무했다. 전역 후 미국 유학 길에 올라, 1980년 5월에 툴레인 대학교(Tulane University)에서 법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1981년 5월 마이애미 대학교(플로리다)(The University of Miami)에서 국제법과 해양법을 공부하여 비교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3] 이후 다시 툴레인 대학교으로 돌아와서 공부한 끝에 1983년 1월에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논문은 '해저석유개발에서 발생하는 해양오염의 법적 문제'이다.
1983년 9월부터 중앙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를 역임하였고, 2013년 2월에 퇴직 후 현재는 명예교수이다.
1995년~2003년간 조선일보 비상임 논설위원을 지내면서 사설과 무기명 칼럼 430여 건을 집필하였다.[4]
2007년 대통령 선거 기간 이회창 캠프에서 기획단 멤버로 일하였다. 당시 기획단장은 강삼재 전 의원이었고, 위원은 권선택 국민중심당 사무총장, 최한수[5] 건국대 교수, 이용재 (관료 출신으로, 세종문화회관장을 역임), 허성우, 그리고 이상돈이었다. 기획단은 창당 발기인 대회를 준비하고, 인재를 영입하는 것이다.
당시 이상돈 교수, 전원책 변호사 및 류석춘 연세대 교수가 이회창 지지를 선언했다. 이상돈 교수는 이명박 후보를 막기 위해서 그 대안으로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자유선진당 창당 직후 공천 갈등과 신당을 창당하면서 사람을 무분별하게 이리저리 끌어모으는 행태를 비판하면서 전원책과 함께 탈당하였다. 출처
2011년 12월부터 2012년 5월 동안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을 역임하였다. 당시 박근혜 비대위의 개혁 3총사로 이상돈, 김종인, 이준석이 거론되었다. 2012년 대통령 선거 기간 새누리당 정치쇄신 특별위원을 지냈다. 이 기간 동안 이명박 정부와의 선긋기를 주문했고 이명박 정부의 실정에 대해서 전격 비판하고 친이계 용퇴론을 주장했다. 개혁적, 합리적 보수로 평가받으면서 박근혜 정권 총선, 대선 승리 공신으로 평가받았다. 물론 전통적 보수층과 친이계로부터는 비판을 받았다.
2016년 2월 2일 새누리당 탈당 후 국민의당 합류를 발표하였고, 국민의당 선대위원장을 맡았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의당 비례대표로 출마한다. 당선 안정권으로 평가되는 4번을 배정받았으며, 당선되었다. 20대 전반기 국회에서는 본인의 전공인 환경법, 환경분야이기도 하고 4대강 사업 등에 대해서 비판운동을 벌여 왔기 때문에 환경노동위원회에 지원해서 배정되었다.
뱃지를 단 이후에는 안철수와 지속적으로 마찰음을 내면서 결국 바른미래당 행을 택하지 않고 민주평화당 소속처럼 활동했다. 하지만 또 민주평화당 대표로 정동영 의원이 선출되자 다시 민주평화당 활동도 접고 무소속처럼 활동하였다. 그리고 바른미래당 비례대표 셀프제명 때 제명되어 무소속이 되었고, 이후 셀프제명이 무효화되자 민생당으로 복귀하였다. 20대 국회 임기가 끝난 후 민생당을 탈당했다.
3. 사상적 영향
미국정치사, 미국헌정사, 보수주의 사상에 깊은 관심이 있다. 본인은 미국의 보수주의의 ‘지적 운동(Intellectual Movement)’을 전개한 윌리엄 F. 버클리 주니어와 ‘사법 보수주의(Judicial Conservatism)’를 주창한 알렉산더 비켈,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프랜시스 후쿠야마, 토머스 소웰, 러셀 커크와 같은 보수적 지식인의 영향 또한 받은 것으로 보인다.
노동절의 유래가 된 헤이마켓 사건과 뉴딜정책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다만 세계대공황과 제2차 세계 대전을 극복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고, 트루먼, 아이젠하워, 닉슨, 레이건,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아버지 부시)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지미 카터,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아들 부시), 버락 오바마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특히 지미 카터를 "무능의 상징"으로 부르며 아주 저평가하고, 조지 H. W. 부시와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조지 P. 슐츠를 아주 높게 평가한다.
제3의 길을 주창하고 영국 노동당을 현대적으로 개혁한 토니 블레어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4. 대한민국 대통령 평가
4.1. 박정희 평가
2009년 중반, 박정희 전 대통령을 ‘보수주의자’로 보는 것은 일종의 ‘넌센스’ 라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보수주의자라기 보다는 '반공을 내세운 국가주의자라고 말하였다.박정희 전 대통령은 '보수' 였나? 물론 이상돈 교수는 박정희 정부의 경제발전과 국가방위, 의료보험제도 도입, 경부고속도로 건설, 그린벨트와 조림사업, 치수사업 등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 또한, 18년 장기집권한 박정희 정부와 그 이후 5년 집권한 정부와는 평면적으로 비교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6]4.2. 전두환 평가
전두환에 대해서는 이명박 정부 시절 직접 겪은 1980년대를 회고하며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추악한 인권유린이 가득했다고 하면서, 요즘 청년들이 전두환을 높이 평가한다 하는데 이는 순 거짓으로 우리나라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7]4.3. 노태우 평가
노태우 정부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였다. 노태우 전 대통령 개인보다는 노태우 '정부'의 업적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입장으로, 훌륭한 일을 많이 하였으나 공로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노태우 정부 시절 신망이 높은 강영훈 총리를 내정하고, 정해창, 노재봉, 김종인, 김종휘, 김학준와 같은 훌륭한 인사들로 청와대 참모진을 꾸렸던 점을 높이 평가했으며, 또한 나중에 총리가 된 이홍구 교수는 통일원장관으로 한반도 통일에 관한 기본 구상을 완성했다고 평가했다. 남북기본합의서와 북방외교, 인천국제공항과 경부고속철도 건설, 1기 신도시 건설 등,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가는 과도기 역할을 잘했다고 평가했다.하지만 개인으로서의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이다. 불법비자금과 군사정변 전력 때문.
노태우 전 대통령을 가장 유능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보수의 입장에서 부끄러운 현실이라고 밝혔다.[8]
4.4. 김영삼 평가
김영삼 정부보다는 김영삼이란 인물에 대해 호의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중앙대 교수 시절 환경분야 연구업적을 인정받아서 대통령 표창을 받았으며, 청와대에서 직접 만나 식사를 같이한 적도 있다고 한다.김영삼 정부에 대해서는, 1990년대 세계화 추세에 치밀한 준비도 없이 나섰다가 1997년에 흔히 ‘IMF 사태’라고 불리는 경제위기를 초래해서 국가적 재앙을 불러왔다는 비판이,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가장 뼈아픈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민주화 투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룩하고 하나회 등 군의 정치 개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해서 차후의 정권 교체를 가능케 했으며,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는 등 역사에 남을 업적을 남긴 김 전 대통령을 이런 식으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그리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분열을 조장하는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하지는 않았으며, 참모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민주적 리더십을 갖추었던 지도자라고 평가했다.
4.5. 김대중 평가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민주화 공로를 언급하며 존경받을 만한 훌륭한 대통령이라고 평가했다. 이만섭, 이종찬, 박태준, 김중권 등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인사 및 보수 인사까지 포용하고 통합의 정치를 펼친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햇볕정책은 실패했으며 특히 불법 대북송금 사건에 대해서는 강도 높게 비판했으며, 임기 중 부정부패 사건들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평가했다.4.6. 노무현 평가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손꼽히는 비판가였다. 대단히 비판적인 스탠스를 취했는데, 나중에 자신이 "반정부적"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마음의 부채를 느낀다고 밝힌 바 있다.4.7. 이명박 평가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는 출범 이전부터 대운하 사업이 실패할 것이라 내다보고 비판적이었다.[9] 이명박이 서울특별시장으로 재직할 때부터 이미 비판적인 견해를 내비쳤다. 2008년 촛불집회, 미네르바 사건 등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이후에도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 칼럼이나 토론회 등에서 비판했다. 이명박 정부 임기 내내 이명박 정부의 실정에 목소리를 높인 몇 안 되는 보수파 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이 일로 이름을 얻어 박근혜 대선 캠프에 합류하게 된다. 2020년 10월 이명박이 DAS를 통한 비자금 조성으로 징역 17년을 선고받은 것에 대해서는 '13년 만의 사필귀정'이라고 평가했다. #5. 정치 활동
참여정부 시기에는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앞장서서 비판한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고, 보수적 시민사회의 젊은 주자로서 주목을 받았다.[10]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기 햇볕정책을 비판하였다. # 이런 논설로 인해서 참여정부 일부 인사는 실제로 낙마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사학법을 전격 비판하였다. 그는 TV토론에 출연하여 "보수는 도덕"이라고 말하기도 했다.이후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당선이 거의 기정사실화 되가는 시점에 무소속 이회창 후보 지지 선언을 하면서 정치활동에 뛰어들었다. 그 당시 이상돈은 한창 주목받는 신인 정치인으로 자유선진당의 중역도 맡을 뻔 하였으나 결국 성사되지는 못했다. 당시 이상돈은 이명박 후보는 선거에선 승리해도 실현 불가능한 한반도 대운하 계획 때문에 결국 국정운영에선 실패할 것이라 예상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MBC 100분토론에 종종 출연하였으며, 2009년 5월 11일 방영된 토론에서는 전원책 등과 함게 '한국의 보수' 논객으로 출연했다. 뉴라이트 성향으로 분류되거나 혹은 표방하는 지식인들과는 선을 긋고 그들을 비판하였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이후, 그는 4대강 사업을 매우 집요하게 비판하였고 ‘4대강 사업 위헌·위법심판을 위한 국민소송단’ 공동집행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환경법 전문가로 4대강 정비 사업과 관련된 교수, 전문가, 공무원 등을 잘 안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가 4대강 사업을 밀어붙일 때 그 사람들이 모두 눈치만 볼 뿐 입을 열지 않는 현실에 무척 당황해하다가, 무엇인가 깨달음을 얻은 듯 하다. 그 사람들이 선후배 관계나 지역 연고 등에 따라 똘똘 뭉쳐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배타적으로 보호받는 대신 정부의 실정을 앞장서서 감추고 있다며, 이는 일본의 조선 병탄부터 무려 100여년이나 이어지는 역사로 보인다는 의미심장한 말도 하였다.
이후 개혁성향의 시민운동단체, 환경단체 및 진보인사와 교류를 시작하였고, 보수도 비판 받을 것은 비판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보수진영의 모순적 언행을 직설적으로 지적했다. 2008년 촛불집회가 벌어졌을 때 이를 비하하는 보수 인사들을 향해서 사립학교법 개정 때에 촛불을 든 자기들 얼굴에 침뱉는 격이라며 비난할 자격이 없다라면서 다른 보수논객과는 정반대 태도를 취했다. 2008년 말 두바이를 본받자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두바이는 왕조국가인데 왕조를 본받자고 하는 건 어리석다. 게다가 거기는 석유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아부다비에만 의존하기에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선견지명을 보이며 비난했다.
이상돈은 '국가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통제하려는 요소가 있다는 점에서, 개인의 시민적 경제적 자유를 무엇보다 존중하는 ‘보수주의’와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노무현 대통령은 신화(myth)가 되었다."라고 평하였다. 그러면서 "신화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신화를 까부술 수 있다 이를 debunking[11]이라고 한다." 라고 말하였다. 보수세력은 그의 이런 발언을 공격하였고 "보수에게 공격 받는 보수"로 알려지게 되었다.
사실 이상돈은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당시 한나라당 정치인들에 대해서 비판할 점은 강도 높게 비판했고, 보수적 시민사회 운동의 모순된 점에 대해서도 비판할 것은 비판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는 출범 이전부터 이명박 전 대통령을 비판하였으며 이명박 정부 동안 강도 높게 비판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잠시 돕기는 했지만, 이후 자신이 기대했던 길과 다른 길을 가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박근혜 정부에 대해서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의 보수 개념은 전술하였던 바와 같이 수백년 역사를 가진 미국식 정통 보수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2008년 그는 블로그에서 "명색이 보수주의자인 나는 ‘대의민주주의’를 생명처럼 존중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런데도 "보수적 신념 때문에 의회 다수당이 대의민주주의 절차에 따라 제정한 사학법, 신문법 등에 반대했다."고 하였다. 그는 "노무현 정권 5년 내내 (자신은) 대의민주주의를 부정하였다."고 고백하면서, 촛불시위가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주장하는 보수 진영의 다른 인사들도 자신과 다를 바 없었다고 말하였다.인터뷰
상기하였듯 2011년부터 2012년 18대 대선까지 새누리당에서 비대위원으로 영입되어서 2012년 치러진 19대 총선의 새누리당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비대위 시절 당시 이준석, 김종인과 함께 소위 '비대위 3인방'이라 불리며 한나라당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이명박 정부와의 차별화와 선긋기, 당의 노선 변화 등에 힘을 실어주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되면서는 박근혜 대선 정치쇄신특별위원을 지냈다. 대선정국에서도 김종인과 더불어 이한구 원내대표 용퇴 및 친박 주류의 2선 후퇴를 주장했고, 박근혜 후보가 인혁당 문제 등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 솔직힌 사과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박근혜 후보 당선에 큰 기여를 했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된 뒤 그를 더 이상 찾지 않았고 입각 제의를 하지도 없었다. 2013년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직후부터 박근혜 정부에 대해서 서서히 비판적인 입장을 개진했다. 이상돈은 그 후 매체에 적극적으로 출연하여 박근혜 정부에 충고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박근혜 측으로부터 전화 한통 받지 못했다. 2014년 12월 "결과적으로 토사구팽 아닌가?" 하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그렇다고 볼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인터뷰 한때 인사문제가 불거졌을 때 그를 환경부 장관으로 기용하자고 하는 아이디어가 제시된 바 있지만 실현되지 않았으며,[12] 2014년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시절 새누리당 혁신위원회 위원장으로 영입을 타진했으나, 이미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에 대해서 기대를 버린 이상돈이 이를 고사했다고 한다.
그는 점점 박근혜 정권의 행보에 실망하였고, 새누리당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도운 것을 후회하고 국민들에게 죄송하다는 발언을 하였다. 오마이뉴스 기사 "이런 박근혜 대통령 만들어 죄송합니다". 이후 언론을 통해 지속적으로 박근혜 정권에 대해 날선 비판을 하고 있다. 이런 행보에 따라 박근혜 대통령은 직접적으로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2014년 11월 이상돈 교수의 모친상에 조화를 보내지 않았고 새누리당 인사들도 빈소를 찾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관계가 상당히 틀어진 것으로 보인다."박근혜 정권은 무능한 정권으로 평가될 가능성이 높다",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에서 닉슨의 망령이 어른거린다", "숨만 붙어있는 식물정권"이라고 하는 등 비판의 수위가 굉장히 높다. 아무래도 본인이 박근혜 대통령 정권 수립에 일정부분 기여를 했었기에, 박근혜 정권에 대한 실망감과 회한이 더욱 큰 것으로 보인다.
2016년 1월 이상돈은 보수에 염증을 느낀다며 아래 같은 발언을 하였다.이상돈,"무슨 얼어죽을 보수? 염증 느껴"
저는 탈이념, 중도, 이런 표현을 썩 좋아하진 않습니다. 왜냐면 사실 정책과 비전에서는 상당히 방향성같은 것이 있지 않습니까? 철학이 있고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본질이 아닌 것까지도 진영논리로 서로 치고받고 있고, 너무 경직되어 있고, 또 민주주의나 법치주의 같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 아닙니까? 그 기본적인 속성을 훼손하면서, 이게 보수라고, 무슨 얼어 죽을 보수입니까? 저는 거기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는 사람이죠.
2016년 2월 2일 이상돈은 새누리당 탈당 후 국민의당에 합류하였고, 총선결과 20대 국회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하게 되었다.
이상돈은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를 "수도권에서 새누리당이 참패한 것은 박근혜 정부에 대한 민심의 심판이라고 본다.”고 평하면서, “민생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당과도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가 오만과 독선으로 했던 일에 대해서는 더불어민주당과 협력할 경우가 많다고 본다.”고 말하였다.출처 이상돈은 당선 확정된 뒤, 제일성으로 역사교과서 국정화 폐지 문제를 제기하였다. 출처 역사인식 문제는 이상돈 교수가 꾸준히 제기해온 이슈 중 하나였다.[13]
6월 14일 국민의당 김수민 비례대표 국회의원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와 관련, 김수민을 겨냥하며 30대 정치진입은 맞지 않다고 했다. 이에 대해서는 수구보수적 발상, 정동영의 노인 폄하성 발언의 다른 버전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하지만 인터뷰 전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개인의 관점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고 여지를 남겨두었고, 앞뒤 맥락에서는 정당들의 보여주기식 청년비례대표 공천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더군다나 이상돈은 다른 인터뷰나 강연에서 청년들이 정치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져야 하고 정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젊은 예비정치인들이 정당에 참여하고 훈련과정을 거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20년 바른미래당 분당사태 당시,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식의 반응을 여러차례 보였다. 이후 진행된 셀프제명 사태에서 셀프제명을 택했으나, 스스로도 그것이 법적 효력이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한다. 이후 민주통합의원모임에 속하였으나, 민생당 창당에는 불참하였다. 본인은 무소속 당적으로 남고 싶어하는 듯.
이후 3월 16일 민생당 측에서 접수한 비례대표 제명 무효 가처분이 인용되면서 다시 민생당 소속으로 되었다. 20대 국회 임기가 끝난 후 민생당을 탈당했다.
이후에는 여러 방송과 언론을 통해 정치 평론을 하거나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특히 한국일보에는 정기적으로 칼럼을 기고중이다.
5.1. 안철수 비판 논란
국민의당 소속 의원이긴 한데 안철수와는 사이가 매우 좋지 않다. 2017년 8월에 안철수가 국민의당 대표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하자 그를 나르시시즘에 찌든 인물이라며 맹비난했다.기사 참조 JTBC와의 인터뷰에서도 "지역구 의원님들은 안철수 전 대표가 혹시나 당 대표가 되면 내년 지방선거는 다 망한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마이동풍이야."라고 하면서 안철수를 극딜했다.영상 참조 심지어는 박근혜보다도 더하며 박근혜보다도 더 소통이 어려운 게 안철수라고까지 하고 있다.영상 참조이상돈 "유승민 공부 많이 하고 깊이 있는 사람, 안철수는.."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통합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통합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이상돈 국민의당 의원이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나와 “유승민 의원이 안철수 대표를 어떻게 보냐”는 질문에 “무엇보다 (안철수 대표가) 생각이 없지 않습니까? 오락가락 아닙니까? 사드 반대 앞장섰다가 별안간 대선 다가오니까 사드 찬성하고 대북 제재해야 한다고 했다. 지난번 티브이 토론 때 그거에 대해서 유승민 당시 후보가 안철수 후보를 작살을 내지 않았냐”고 말했다. 이어 그는 “유승민 의원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다. 사회과학을 공부한 사람이고. 그러니까 지식의 깊이가 있는 사람이다”며 “정치적인 어떤 판단, 방향성에 대해서는 유승민 의원이 그렇게 안철수 의원을 자신과 비슷하다든가 같다든가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상돈 "안철수 머리엔 '나는 문재인이 싫다' 가득, 정책연대? 반문연대 아닌가" 2017년 10월 25일 YTN 라디오 ‘곽수종의 뉴스 정면승부’ 에 출연하여 또 안철수를 디스했는데 안철수가 당대표로서 리더십이 사실상 와해됐다라든지 안철수가 바른정당과의 통합시도를 하는 데 대해 '정신 못 차렸다. 한심해 혀를 찼다' 라던지 '처음부터 작은 정당에 가겠다는 것, 완전히 패잔병에게 가는 것, 한심하다' 라던지 통합을 말하는 뿌리가 “나는 문재인이 싫다” 머리에 그게 너무 많아서 그렇다고 말하는 등 거의 안철수의 극렬 안티나 다름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국민의당은 이미 심정적으로 쪼개졌다" 2017년 11월 7일 평화방송 ‘열린세상 오늘 김혜영입니다’에서 “(국민의당은) 지금 이미 심정적으로 쪼개졌다”고 했다. 이 의원은 “많은, 이제는 다수 의원들은 아무래도 현 정부가 추진하는 과거 정권에 대한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는 것, 흔히 얘기하는 적폐청산에 동참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의원들이 많다”며 “반면에 안철수 대표는 그야말로 자고 깨면 문 대통령 비판 아닌가? 상당히 길이 다른 쪽으로 가고 있지 않느냐”고 했다. 이 의원은 “이미 (안철수) 리더십은 이제는 다시 회복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현 지도체제가 어렵다고 본다“며 “그런데 안철수가 이제는 사퇴하게 되면 정치, 정계를 떠나는 것 아닌가? 사퇴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심각한 회오리 속으로 휘둘려가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2017년 11월 9일, 국민의당에서는 이상돈 의원의 징계를 검토 중이라 한다.기사 참조 안철수 대표와의 사이는 상당히 좋지 않다.
2020년에 들어 매일경제와 한 인터뷰에서도 안철수의 국민의힘 합류에 있어 어울리지 않는 정치인이라고 반대했으며, 과거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와 저녁자리를 가져보면서 안철수가 처름 만나는 사람과 담소 나누는걸 제일 못한다고 할 정도로 비난도 서슴지 않기도 했다.#
2021년 1월 29일 YTN 인터뷰에서는 안철수가 국민의힘을 이용해야 선거 비용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단일화에 몸이 달아있다고 보았다. 안철수가 정치권에 들어온 지 10년이 됐는데 컨텐츠가 별로 없고, 단일화, 단일화 실패, 창당, 합당, 분당, 탈당 이런 것으로만 10년을 보냈다고 비판했으며, 과거에 안철수가 '박근혜와 친박은 지구에서 사라져야 할 무리'라고까지 발언했는데 이제 와서 박근혜의 출신정당인 국민의힘과 손을 잡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비꼬았다.
5.2. 정치 성향 변화
이회창 → 박근혜 → 안철수 → 호남계 → 손학규 → 이재명상술하다시피 이상돈 의원은 과거 이회창 캠프에서 활동한 이력이 있고,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후보를 도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안철수 대표에게 달라붙더니, 갑자기 안철수를 "반문재인 연대를 하려고 한다"는 이유로 비판하며 민주평화당으로 가버렸다. 이를 두고 앞뒤가 안 맞는다는 비판이 나온다. 때문에 처음부터 일관되게 호남계여서 평화당행을 희망하는 장정숙, 박주현 바른미래당 의원에 비해 비판이 많다.
과거 보수정부 시절에는 박지원 의원도 이상돈을 향해 야당과 정체성 안 맞는다고 비판한 적 있다. 그런데 지금은 박지원과 이상돈 의원이 마음은 같은 당에 있으니 아이러니한 일. 더군다나 민주평화당은 DJ정신과 햇볕정책을 계승하는 당인데, 이상돈은 햇볕정책을 비판한 적 있다.
이를 두고 바른미래당 지지층 사이에서는 "그저 안철수가 싫어서 민평당행을 택한 것", "두 의원은 출당시켜도 이상돈만큼은 내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비판 여론이 우세하다.
햇볕정책만 비판한 것은 아니다. 이상돈은 2016년 국민의당에 합류하면서 "한국과 미국 역대 정부는 북한의 핵 개발과 미사일 개발을 저지하는 데에는 모두 실패했다"며 "현재 북한 문제에 대해서는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노태우 정부의 비핵화 선언, 김영삼 정부의 제네바 협정,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 박근혜 정부의 신뢰 프로세스 어느것 하나도 이것(핵개발)을 막지 못했다"고 지적하면서 햇볕정책에 대해서도 "많은 성과와 결실이 있었지만 북한의 핵 개발을 저지하는 일에는 일정한 한계를 가졌다"고 말했다.##
지방선거 이후에는 사실상 민주평화당과 결별했다. 애초에 성향이 민주평화당과는 맞지 않기도 하고, 민주평화당 대표에 본인이 계속 거리를 두던 정동영 의원이 선출되고 바른미래당 대표에는 본인의 성향과 더 가까운 손학규가 선출되면서 그렇다는 설이 돌고있다.[14]
하지만 이후의 행적을 보면 당적에 구애받지 않고 사실상 무소속처럼 활동하고 있으며,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이후 바른미래당 비례대표 의원들의 셀프제명으로 무소속이 되었고 다른 당에 합류하지 않고 있다가 셀프제명의 무효화로 민생당에 강제로 복귀했다. 이후 20대 국회 임기가 끝나고 나서 민생당을 탈당했다. 제20대 대선에서는 이재명 후보를 지지했다.
20대 대선을 앞두고서는 언론 인터뷰에서 윤석열 검찰이 적폐수사 당시 검찰권을 무리하게 행사했다고 비판하면서, 국민의힘에서 후보가 된다는 게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그러면서 윤석열 후보의 가족과 관련해 별의별 이야기가 돌아다닌다며, 가급적 리스크가 적은 사람을 골라야 하지 않냐고 발언했다. #
이상돈은 이재명의 대학시절 은사였는데[15] 정치 성향과는 별개로 밑바닥에서부터 정치적으로 성장하여 경기지사, 대선후보까지 올라간 제자의 능력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다만 이재명 캠프에는 참여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그리고 이재명이 2022년 대선 이후부터 인천광역시 계양구 을 출마,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출마한 이후부터는 정치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상돈 "이재명, 대표 돼도 사법리스크로 제역할 할지 글쎄…위험하다"
20대 대선 당시 보수 정치권에서 유행했던 멸공 챌린지에 대해 이상돈 전 의원은 "정치를 희화화시키고, 품위가 없는 행동"이라면서, 국민의힘의 전신인 한나라당 시절부터 주요 국가직/당직에 있었던 이명박, 정운찬, 김황식, 황교안, 윤석열, 이준석 모두 병역면제이거나 제대로 총을 만져보지도 않았으면서 ‘멸공’이라는 구호를 외칠 수 있는지 의아하다고 비판했다. #
6. 칼럼 & 견해
4대강 사업 관련- 낙동강은 없다 ‘죽음의 호수’가 있을 뿐 (2013.09.06)
- [시론]‘4대강’ 교수와 관료의 책임도 크다 (2013.09.05)
- [이상돈·김호기의 대화](2) 4대강·구제역 재앙 덮친 여주 : 이상돈 “인간 탐욕이 만든 ‘불편한 진실’ 학자·언론 방조” (2011.02.28)
- 강과 땅과 산을 망친 정권 (2011.02.14)
- '4대강 사태', 갈수록 가관 : 하늘이 무너져도 'MB 2기'는 없다 (2010.08.19)
- 박정희 대통령이 '4대강 사태'를 본다면 (2010.05.16)
- '4대강 사태'는 전문가들의 책임 : 몇 년 만에 말을 180도 바꾼 정부 전문가들 (2010.05.10)
- 영산강을 다녀오다 (2010.03.08)
역사교과서 & 역사 인식
7. 기타
- 묘하게 예지력이 있는 글을 쓴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당시에는 이명박 정권은 대운하 정책(4대강 정비 사업)으로 실패할 것이라 내다보았다. 노무현 대통령 퇴임을 보면서 이런 식으로는 사임(死任)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며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고 하였다. 2013년 박근혜 정부 초반, 대통령 임기 중 정보기관의 음습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박근혜 정부 말에 김영삼 정부 말 IMF 같은 일이 반복될지도 모른다고 한 말이 있다. 그리고 현실이 되었다.
- 미국 정치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며, 관련 서적을 많이 읽는 것으로 보인다.이상돈 BOOK WOLRD
- 노무현 정부 시절 손꼽히는 극우 논설인이 현재는 개혁적 성향의 야당 정치인이 되었다. 솔직하게 본인의 견해를 바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왜 과거에 같이 비판하던 자들은 지금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는가?" 하며 과거 자신과 같이 노무현 정부를 비판하던 이들이 모른 체하는 것을 비판하기도 한다. 2004년 가을 노무현 정부가 사립학교법 개정을 추진했을 때 미래한국[17]에 기고한 칼럼을 직접 읽고 판단해보자. 사악(邪惡)한 사학법 -공산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일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쓴 것 같다.
- 2014년 10월 "공부하는 보수"를 출간하였다.[중앙일보] "한국의 보수 무엇이 문제인가" 통렬한 반성문
- 2007년 1월 이상돈은 햇볕정책과 북핵의 연관성을 규명하여야 한다면서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비판하였다.동아일보 그리고, 2014년 9월, 이상돈은 "노무현 前 대통령 사망 후 황망했고 부채감 느낀다"고 하는 등, 이상돈은 햇볕정책에 대해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노무현 정부 말기에는 햇볕정책은 이적행위라고 했던 사람이었다. 이명박 정부 말기, 박근혜 대선후보 시절에는 이명박 정부가 초기에는 북한에 강경했지만 뒤로 갈수록 햇볕정책처럼 하지 않았느냐 하면서 정부를 띄우는 데 열심히였다.[18] 16년 북핵 사태 이후, 국회의원 후보 시절에는 햇볕정책은 실패했다고 발언하여 대북 포용적 정책을 내세운 국민의당과 불협화음을 내는 듯 했다. 곧이어 그 발언은 북한이 핵 실험을 했으므로 그 부분에서는 수정할 것이 있는 게 사리에 맞다는 의미라고 언급했다.
- 2018년 6월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의 초청으로 국빈방문하는 문재인 대통령과 동행한 박영선 의원의 SNS에서 함께 찍힌 사진들이 있다. 러시아 하원의회에 오는 10월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아시아정당국제회의(ICAPP)에서 '남북 의회대화'를 추진해줄 것을 제안했다는 기사가 나온 걸 보면 대통령과 동행한 것으로 보인다.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에도 동명이인인 열 살 아래의 걸출한 교수가 있다.[19] 따라서 본 문서의 주인공이 중앙대 법대에 재직 중일 때 자주 혼동된 바 있다.
8.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07 - 2008 | 정계 입문[20] |
[[자유선진당|]] | 2008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08 - 2011 | 탈당 |
| 2011 - 2012 | 입당 |
[[새누리당|]] | 2012 - 2016 | 당명 변경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16 | 탈당 |
[[국민의당(2016년)|]] | 2016 - 2018 | 창당 |
[[바른미래당|]] | 2018 - 2020 | 합당[21]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
| 2020 | 합당[23]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20 - 현재 | 탈당 |
9.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2016 |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 비례대표 | [[국민의당(2016년)|]] | 6,355,572 (26.74%) | 당선 (4번) | 초선[24] |
[1] 現 부산광역시다. 6.25 전쟁 중에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났을 뿐, 실제로 자란 곳은 서울특별시이다.[2] 한국저작권위원회의 전신이다.[3] 다시 말하자면 석사 학위가 총 3개다![4] 이 당시 조갑제와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5] 충남 예산 출신. 한나라당 소속으로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 서울 송파구 을에 출마했다가 새천년민주당 김성순 후보에 밀려 낙선한 전력이 있다.[6] 이와 유사하게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사장도 역대 대통령들 중에 경제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박정희 뿐이라고 말했는데, 그 이유가 오래 집권하다 보니 시행착오를 계속 경험하면서 자연스레 체득했다는 것이다. 즉 이 말의 요지는 누구나 그 정도로 오랫동안 하다 보면 자연스레 터득한다는 뜻으로, 절대 박정희를 칭찬한 것이 아니다. 1만 시간의 법칙?[7] 이상돈 홈페이지의 글은 2009년 어느 시점에 대대적으로 리뉴얼되어 과거의 많은 글이 삭제되었다. 추후 찾으면 출처 보완.[8] 비슷한 맥락에서 유시민 작가도 노태우 정부가 군사정권의 연장이라고 비판은 했지만, 북방외교와 같이 꼭 필요한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을 높이 평가하며 다른 정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너무 저평가를 받는다고 밝혔다.[9] 그렇지만 한나라당 당내 경선 당시는 이명박을 옹호하며 당내 경선 문제에 '역사적 평가에 맡겨야 한다'고 했던 인물이기도 했다.[10] 1951년생으로 당시에 이미 50대였지만, 소위 애국보수라 자처하는 우익조직들이 대부분 다들 머리 허연 노인들 뿐이라 당신만큼 젊은 사람이 없다고 반가워 하였다고 한다.[11] 한국어에 없는 개념인데, 공개된 장소에 잘못을 지속적으로 노출시키거나 평판을 고의적으로 떨어뜨리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을 이른다. 가장 비슷한 단어가 폭로전술.[12] 이 당시 김기춘은 이상돈을 왜 기용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알려진 것과 다른 사람들이 많지 않느냐는 대답을 했다. 물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이후로도 계속 편향된 인사 패턴 논란이 있었기 때문이다.[13] 이상돈은 2008년 초반 뉴라이트가 이명박 정부 전면에 등장할 당시부터 뉴라이트 사관 교수들을 불편하게 보며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그들을 공개적으로 비판은 하지 않았다. 2015년 말, 역사교과서 국정화 파동 당시 이상돈은 이를 주장하는 자들의 집안 내력과도 관계 있는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언급했다.[14] 1 2 3[15] 중앙대 법대 교수-중앙대 법대 학생의 관계[16] 이 두명은 1960~70년대 경기침체, 베트남전, 68혁명, 제3세계의 부상 등으로 위기에 처해있던 보수 이념을 1980년대 다시 되살려서 전세계적으로 신보수주의의 물결을 퍼트린 인물이다. 보수의 변화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관심을 가질 만한 대상. 또한, 이상돈이 한창 공부하여 학위를 딴 시기와 겹치고 있다.[17] 이곳은 김상철 변호사가 설립한 기독교 보수성향의 주간지.[18] 그 정도로 박근혜 대선 후보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19] 다만 마지막 ‘돈’자의 한자는 다르다.[20] 17대 대선 무소속 이회창 후보 지지 선언 및 캠프 합류.[21] 바른정당과 신설 합당.[22] 법원의 가처분 인용으로 인한 제명 무효화.[23] 대안신당, 민주평화당과 신설 합당.[24] 2018.2.13. 바른미래당 창당(신설 합당).
2020.2.18. 바른미래당 제명.
2020.2.24. 민생당 창당(신설 합당).
2020.3.16. 바른미래당 제명 무효 가처분 인용.
2020.2.24. 민생당 창당(신설 합당).
2020.3.16. 바른미래당 제명 무효 가처분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