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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21:20:15

우승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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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 10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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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5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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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 중요기관
7가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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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 군부 수뇌
대만총독
④ 매국노
⑤ 친일파 거두
적탐(밀정)
⑦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조선혁명선언 황옥 경부 폭탄사건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우승규
禹昇圭
파일:우승규.jpg
<colbgcolor=#0047a0><colcolor=white> 출생 1903년 10월 3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미근동
사망 1985년 8월 13일 (향년 81세) ([age(1985-08-13)]주기)
서울특별시
묘지 국립서울현충원 320실 81호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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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언론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우승규는 1903년 10월 3일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17세의 나이로 상하이로 건너가 혜령전문학교(惠靈專門學校)에서 수학하였다. 또한 상해청년당원으로서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1923년 혜령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발행을 담당했다. 한편 그는 장 자크 루소의 자연주의 사상을 신봉했으며, '나혼자'라는 뜻의 '나'와 자연 그대로라는 의미의 '절로'라는 우리말을 합성한 '나절로'라는 호를 사용했다.

우승규는 1929년 7월 2일부터 9월 23일까지 임시정부의 임시사료편찬회(臨時史料編纂會)에 조역(助役)으로 임명되어 「한일관계 사료집」 등을 편찬하였다. 1931년 귀국한 후 중앙일보 기자로 발탁되었으며, 1935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일보 사회부, 지방부 기자를 맡았다. 1940년에는 매일신보 기자로 일했지만 곧 사직했고, 그의 사상을 불손하게 여긴 일제 형사들에게 수시로 감시당해야 했다.

8.15 광복 후인 1946년 조선일보 편집부장에 부임한 그는 1948년부터 1949년까지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맡았다. 1948년 8월 1일, 그는 경향신문에 '이 대통령에 역이(逆耳)의 일언'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어 한국의 당면 문제는 토지개혁과 민생, 남북통일 공작이며, 이를 못하면 이승만 정권은 미군정처럼 실패할 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를 달성하려면 친일파를 척결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친일파들을 "동포의 고혈을 빨고 골육을 저미어 사복을 배불리고 있는 자들"로 규정하고, 친일파를 청산하지 않으면 독립도, 건국도 다 소용없다고 직언했다.

그는 뒤이어 '초대 이범석 내각의 해부-각료들의 인물로 본 전도의 전망'을 4회에 걸쳐 연재했다. 그는 서두에서 "사벨 내각이니 약체내각이니 또는 단명내각이니 하는 온갖 비방과 갖은 물의를 들으면서 난산된 이범석 내각은 시방 빗발치는 듯하는 구설의 시석(矢石)을 받고 있다"고 밝혔고, 외무장관 장택상, 국방장관 및 국무총리 이범석, 내무장관 윤치영까지 비판적인 논조로 논평했다. 그러나 상공부장관 임영신 편을 집필한 뒤 원고를 제작부로 넘겨 교정을 봤으나 막상 신문에서는 그의 글이 빠져버렸다. 그는 실무자인 편집부 차장과 정경부 차장에게 물어도 아무런 답을 듣지 못했다. 알고보니 이범석 국무총리가 기사를 송두리째 빼버리라고 지시한 것이었다. 이것이 대한민국 역사상 첫번째로 일어난 필화 사건이다.

그후 1949년 6월 서울신문 편집국장을 맡은 그는 1952년까지 역임했다. 1951년 5월, 이시영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은 이승만 정권의 실정에 반감을 품고 '국민에 고한다-시위소찬(尸位素餐)'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 성명서의 집필자는 바로 우승규였다. 이후 1956년부터 1965년까지 동아일보 논설위원, 편집국장, 논설위원실장을 역임했다. 1964년 11월, 그는 잡지 신동아에 <병 든 조국은 어디로-국민의 일원으로서의 용의적(庸醫的) 진단(진단)>을 게재해 언론 규제법을 만들어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박정희 정권을 비판했다. 이에 정부는 신동아를 발매 정지 조치했고, 우승규는 중앙정보부에 소환되어 며칠간 고초를 겪어야 했다.

1966년 동아일보 이사, 편집고문, 편집인을 역임한 그는 1968년 은퇴한 뒤 서울 옥인동에서 말년을 보내다 1985년 8월 13일에 사망했다. 향년 82세.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우승규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7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320실 81호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