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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0년대 한국의 여아 낙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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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원인
2.1.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한 선택적 여아 낙태
3. 경과
3.1. 1980년대 이전3.2. 1980년대 초반3.3. 1980년대 중후반3.4. 1990년대 초중반3.5.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중반3.6. 2000년대 후반 이후
4. 여파
4.1. 남초 현상4.2. 결혼 문화 변화4.3. 낙태 반대론4.4. 출생아 수에 끼친 악영향
5. 현황
5.1. 이후 세대의 출생 성비 정상화5.2. 기타
6. 외국의 사례7. 관련 문서

1. 개요

1980~90년대 대한민국에서는 산아제한 정책이 시행되고 태아의 성별을 알아낼 수 있게 되자 남아 선호 사상으로 인한 여아 낙태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원래 신생아 성비는 103~107[1], 즉 남녀 비율 50.74:49.26 ~ 51.69:48.31[2]을 자연적인 범위로 본다. 이 수치를 벗어나면 인공적으로 출산에 개입을 한 것으로 여긴다. 가장 자연적인 남녀 비율은 105:100, 즉 51.22:48.78이다. 그러나 한국은 1980년대 중반~2000년대 중반(1983~2006년) 태어난 신생아(현재 [age(2006-12-31)]~[age(1983-01-01)]세) 성비에서 최대 116.5[3]라는 이례적인 수치를 기록한 적이 있다. 즉 해당 시기에 태어난 아이들 사이에서 심각한 남초 현상이 일어났다는 의미다. 1993년생(현재 [age(1993-12-31)]~[age(1993-01-01)]세)을 제외하면 대체로 홀수 해보다 짝수 해의 성비 불균형이 더 심하다.[4] 통계 자료

2. 원인

86세대전후세대를 바탕으로 장손을 원하는 사람들의[5] 퇴행적 남아 선호 사상과 정부가 인구 억제를 위해 산아제한 정책을 밀어붙이는 상황이 겹쳐지면서 남녀에게 가해진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980년대부터 대다수가 병원에서 출산하고 태아 성 감별을 가능하게 만든 초음파 기기가 상용화된 것 또한 여아 낙태를 일으키는 중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경제 발전에 따른 생활 수준의 향상, 이에 따른 의료 서비스의 대중화, 사회적 제동 장치나 인식의 미비 등도 원인이라 할 수 있다.

2.1.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한 선택적 여아 낙태

의료 기술의 발달로 출생 전 태아의 성별을 감별할 수 있게 되면서 남아선호사상에 의한 여아 낙태가 중산층에서부터 성행하여 신생아 성비가 점차 붕괴되기 시작했다.[6] 이를 인지한 정부는 7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기까지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를 선전했지만, 이미 남아선호사상으로 얼룩져있는 한국의 정서상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1980~90년대 대한민국에서는 "범띠, 용띠, 뱀띠, 말띠 여자는 재수없고 인생이 험난하며 팔자가 드세서 시집을 못 간다"는 미신이 있었다. 1990년생 백말띠 여아들에게 이 미신은 더 잔인하고 강하게 적용되었는데, 이때의 성비가 116.5이다.

베이비붐 세대가 출산을 시작하면서, 출생아 수는 급격히 증가하는데 성비는 붕괴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첫 여아는 낙태하지 않고 낳는 부부라도 그 뒤 아들을 낳을 때까지 출산을 하다가 셋째/넷째 아이도 여아일 경우 장손을 얻기 위해 여아를 낙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통계청에서 조사한 출산 순위별 성비인데, 셋째/넷째아 이상 성비가 평균에 비해 급속히 치솟고 있다. 이는 자연적으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비정상적인 수치이며[7], 여아 낙태로 인한 결과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실제로 1990년 신생아 성비는 116.5이었지만 셋째아 이상의 경우 189.3까지 치솟는다. 특히 대구광역시의 경우 셋째아 이상 성비에서 392.2이라는 압도적인 숫자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 뒤를 대전, 경상북도, 경상남도가 각각 296.9, 294.4, 291.4로 따르고 있어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보수적인 지역과 여아 낙태 현상이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호남권이나 강원도, 수도권은 전국 평균보다 낮은 성비를 보여주고 있는데(그래도 자연성비보다는 높은 110 이상이다), 이는 의료접근성의 차이와, 남아선호사상이 약한 진보적인 지역으로 해석된다.

3. 경과

3.1. 1980년대 이전

한국은 아들이 생길 때까지 자식을 가져 대를 이어야 한다는 유교적인 관념이 조선시대로부터 있었으며[8], 근대 이전 높은 영유아 사망율[9]과 부족한 피임법 등의 이유로 자식은 원치 않을지라도 자연스럽게 많이 가지게 되었다.[10] 그리고 이런 현상은 한국전쟁 이후 베이비붐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1961년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이후 2년 뒤인 1963년 산아제한정책이 실행되기 시작하면서 서구의 의료 지원에서 비롯된 낙태가 효율적인 산아제한정책의 수단으로 활용되기 시작한다.[11]

하지만 1960년대 중반에는 성감별 기술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낙태 기술도 발달하지 않아 흡입법을 이용한 초기 낙태[12]만이 산아 제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1960년대 중반이면 대부분은 가정집에서 태어나던 시기라 여아가 대량 낙태당해 발생하는 성비불균형은 일어나지 않았다.[13]

차츰 병원 출산이 증가하기 시작한 196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도 남아선호사상은 공고하여, 낙태도 10만 건 정도에서 20만 건 정도로 활성화 되었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낙태할 여건이 되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결정적으로 성감별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들을 낳기 위해서는 우선 낳고 봐야 했다. 태어난 을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 시기에는 딸부잣집에서는 딸을 넷 이상 낳았다.[14] 그래서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딸만 네다섯 낳고 막판에 아들을 낳는 식의 딸부잣집이 많았다. 하지만 남아 선호가 유독 강한 집들은 1980년까지 계속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70년대 초반까지도 대다수가 가정출산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1970년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1970년, 박정희 정권에서는 "둘만 낳자",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 꼴을 못 면한다."라는 표어와 함께 산아 제한을 본격적으로 확산한다. 1970년대 중반(1974년)부터 영향이 시작되었고 이듬해인 1975년부터 출생아 수가 줄어들었다. 그래도 성비는 정상적이라 1970년대 마지막 해에 생명이 탄생한 1980년생의 성비는 105.3:100으로 매우 자연적인 성비였다.
또한, 1970년대부터 병원 출산이 더 증가했고 임신 초기의 흡입술 이외에도 소파수술, 유도분만술 등 임신 중기/말기에 시행 가능한 수술이 도입되어 낙태 시술이 더 광범위하게 시행된다.

3.2. 1980년대 초반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은 매우 높은 강도로 산아제한정책을 실행하였다. 우스갯소리긴 하지만, 박정희 정권 시절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라는 식의 산아 제한 표어가 박정희 정권 후반~전두환 정권 초반 들어 '삼천리 금수강산이 초만원 된다'라는 식으로 표현의 강도가 상당히 높아졌다.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차범근을 앞세워 '하나만 더 낳고 그만 두겠어요'[15]라는 포스터도 제작했을 정도. 물론 1명 더 낳았다. 특히나 이때 서구에서 일어난 맬서스 트랩을 위시한 인구폭탄론이 국내에 대대적으로 회자되었으며, 이에 따른 산아제한정책 실시 국가에 대한 지원이 전두환 정권의 산아제한정책을 부채질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1명만 낳자고 강요하기 시작했다. 역사상, 아니 현재까지도 이렇게까지 시행을 한 나라는 중국한국 단 둘뿐이었다고 한다.[16]

1980년대 초반에는 태어난 아이가 딸이면 강제 해외입양을 시키는 사례가 존재했다.[17] 그나마 이것은 양호한 사례였다. 1960년대 후반~1970년 초반에는 여아를 몰래 살해하는 끔찍한 일도 있었다. 다행히 마음을 고쳐먹고 키우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시절에 태어난 분들에게 여쭈어 보면 의외로 꽤 많이 일어났었던 일이었으며, 유명인 중에도 그런 위기를 겪었던 사람들도 있다. 조혜련이 대표적 사례.

하지만 1982년까지만 해도 정상 성비였으며 1983~84년까지만 해도 성비는 107~108:100으로 아직까지는 불균형 상태가 심하지는 않았다. 참고로 107:100 미만의 경우 자연적인 수치이다.

3.3. 1980년대 중후반

1984년부터 하나의 중요한 변수가 나타나면서 사회적인 상황과 맞아떨어져 1985년생부터 사상 유례가 없는 여아 낙태에 따른 성비 불균형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원인은 바로 임신 기간 중에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 구별이 가능할 정도의 초음파 검사 기기가 국내에서 완전히 상용화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시기부터는 대부분이 병원에서 분만해서, 가정분만도 거의 사라졌다.

또한 이때부터 3저호황을 타고 중산층이 늘어나기 시작하여 질 좋은 의료 서비스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계층들도 대거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이 병원 출산을 하고 가정 출산은 거의 없어졌다. 이후 산부인과마다 성별 감식부터 낙태 시술까지의 일련의 절차가 300~500만 원에 거래되었고, 그나마도 예약이 잔뜩 밀려 몇 달씩 기다리는 것이 예사였다. 이는 199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제동 장치가 전혀 없었다. 이미 1973년에 산아제한정책에 협조하였으며, 동시에 낙태를 권장하기도 하였다. 산아제한은 서구의 경험이라면서 정작 서구 국가인 프랑스·스웨덴의 출산장려 같은 것은 무시받았고 1974년부터 발전 자체가 최고의 피임약이라는 말이 학계에서 등장하였으나 그냥 무시하였고 국민들에게도 알려지지 못했다. ## 동시에 아직 한국에 남아있는 뿌리 깊은 남아선호사상을 변화시키지 못하였다. 게다가 대다수의 사회 문제는 민주화에 밀려서 대부분 이슈화되지도 않았고, 정부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여성계는 계속해 문제를 제기해 왔으나, 1986년 뒤늦게 심각성을 느낀 종교계에서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자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정부는 의료법을 개정해 1987년에 사전 성감별 자체를 불법[18]으로 규정하였다.[19] 그리고 낙태는 근친, 부모 유전병, 산모의 건강 침해 등의 사유만 허가하고 임신 28주일을 넘긴 산모의 낙태는 모자보건법상 예외없이 불법이었기 때문에, 여아 낙태의 경우 대개 28주 이후여서 마음만 먹으면 쉽게 단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여전히 산아제한정책의 기조를 이어갔고, 이는 노태우 정권에서도 그대로 이어졌기 때문에 단속이 돼도 처벌은 미미했던지라 시한을 초과한 낙태 시술이 빈번하였다. 1990년대 들어서 사문화되긴 했지만 산아제한정책은 공식적으로 1996년에야 완전히 사라졌다.

3.4. 1990년대 초중반

1990년대 들어서는 처음으로 산아제한 정책이 다소 완화되었고, 늦둥이 둘째나 셋째를 낳는 가정이 늘어 소폭 증가하기는 했다.[20] 이때도 김영삼 정부 시절 성비 불균형이 위험 수준에 이르게 된 것을 깨닫고 강력한 단속을 벌였지만 이미 때는 늦어 이러한 풍조는 끝나지 않았고, 1990~1994년에는 남녀 성비 불균형이 극에 달했다.

특히 1990년은 백말띠의 해라 하여[21] 이때 태어나는 여아는 팔자가 드세다는 일제강점기에 토착화된 미신이 나돌고 있었으므로, 116.5:100이라는 기록적인 최악의 성비를 기록했다. 1990년 음력 1~2월(양력 2~3월)에 태어난 여자아이는 음력 1989년 12월로 일찍 출생신고를 하기도 한 경우도 있었으며, 1990년 음력 10~12월(양력 11~1월)에 태어난 여자아이는 음력 1991년 설이나 1991년 입춘까지 묵혀두다 출생신고를 하고는 했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절대적으로 많다. 그래서인지 1991년 2월생들은 이례적으로 남자보다 여자가 많다.[22]

또한 단순 통계로만 알 수 있었던 이 성비 불균형 문제는 1985~1989년생이 취학 연령이 되는 1992년~1996년 들어 국민학교/초등학교 한 반에 남-남 짝꿍이 급격히 증가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마침내 1994년에 방영된 드라마 M에서 낙태를 소재로 하여 사회에 높은 경각심을 심어주기에 이르렀고, 이후 나온 피임약 광고에서도 "M의 공포에서 벗어나십시오"라는 카피를 사용했다. 1985년~1996년생 모두가 학창시절인 2003년에 최고로 심했다.

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는 뜻으로 '며느리도 수입하시렵니까?'라는 제목의 공익 광고가 나오기도 했는데, 다문화를 존중하는 2010년대 중반 이후의 시점이라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광고였다.

남아선호사상의 풍조는 1980년대 중반부터 문제가 제기되고 있었으나, 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아 선호는 나아지지 않았다.

3.5.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중반

이것도 약빨이 떨어졌고, 산아제한정책이 폐지되어 딸이든 아들이든 구별하지 않는 분위기로 변하기 시작했으며 이 시기에 출산율 자체가 급격히 낮아졌다. 1997년에 108.2로 정상 범위는 아니지만 크게 떨어졌다. 1990년대 초중반의 110이 넘는 성비만큼은 아니나 2006년 출생자까지는 반올림 기준 108~110 정도의 성비를 유지했다. 그래서 이들까지는 학창 시절에 남남 짝꿍이나 남자가 많은 학급이 많았다. 또한 경상북도 등 보수성이 짙은 지역에서는 당시에도 성비가 불균형했다. 2002년에 마지막으로 성비가 109.9로 110에 근접했다. 이 시기까지는 남아선호 사상이 고령층을 중심으로 아직 심하긴 했으나 전보다 상황은 많이 나아졌다.

3.6. 2000년대 후반 이후

2006년부터 낙태가 급감한 동시에[23] 이듬해인 2007년 출생자부터 성비가 정상으로 내려감으로서 성비 불균형은 사라졌다. 지속적인 인식 개선의 영향도 존재한다. 2010년대 중반부터는 '아들보다 딸'을 선호하는 가정도 많아졌다. 출생 성비도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까지 106으로 정상성비 범위안에 들어섰으며, 2011년부터는 거의 낙태가 사라지면서 105대로 회복했고 2020년에는 104.8까지 떨어졌다.

4. 여파

4.1. 남초 현상

출생년도 출생성비
2023년 105.1:100
2022년 104.7:100
2021년 105.1:100
2020년 104.8:100
2019년 105.5:100
2018년 105.4:100
2017년 106.3:100
2016년 105.0:100
2015년 105.3:100
2014년 105.3:100
2013년 105.3:100
2012년 105.7:100
2011년 105.7:100
2010년 106.9:100
2009년 106.4:100
2008년 106.4:100
2007년 106.2:100
2006년 107.6:100
2005년 107.8:100
2004년 108.2:100
2003년 108.6:100
2002년 109.9:100
2001년 109.0:100
2000년 110.1:100
1999년 109.5:100
1998년 110.1:100
1997년 108.2:100
1996년 111.5:100
1995년 113.2:100
1994년 115.2:100
1993년 115.3:100
1992년 113.6:100
1991년 112.4:100
1990년 116.5:100
1989년 111.8:100
1988년 113.2:100
1987년 108.8:100
1986년 111.7:100
1985년 109.4:100
1984년 108.3:100
1983년 107.3:100
1982년 106.8:100
1981년 107.1:100
1980년 105.3:100
1979년 106.4:100
1978년 111.3:100
1977년 104.2:100
1976년 110.7:100
1975년 112.4:100
1974년 109.4:100
1973년 104.6:100
1972년 109.5:100
1971년 109.0:100
1970년 109.5:100
출처 위의 표는 출생성비이다.
가장 먼저 남초 현상이 심각해졌다.[24] 1983년부터 2006년까지 24년 연속으로 정상 성비의 맥시멈인 107.0을 한 번도 빠짐 없이 초과했으며, 특히 여아 낙태 문제가 가장 심각하게 발생했던 1988~1996년생(현재 [age(1996-12-31)]~[age(1988-01-01)]세)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최악의 남초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2002년 이후엔 초저출산에 들어섰다. 결혼 적령기의 남녀 중에 여자의 나이가 적은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시기의 남자들은 안 그래도 남자가 더 많은데 혼인 대상의 결혼 적령기의 여자 숫자는 더 적은 이중고를 떠안게 된 셈이다.[25]

그리고 경제개발 기간 동안 이촌 현상으로 인해 농촌의 남초 현상이 더욱 심각해지는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다. 남초 현상이 심각해진 농촌을 중심으로 이미 1990년부터 국제결혼이 빠르게 늘어났으며, 현재도 계속되는 추세이다. 물론 도시 지역 역시 아주 예외는 아니다.

등급제 결혼정보회사와 같은 결혼 선호도의 변화로 도시에서도 성비 격차와 더불어 결혼할 여자를 구하지 못하는 남성들이 속출하기 시작하면서 도시를 중심으로 36~44세까지 매매혼이 확산된 상태다. 이미 2010년 기준으로 국제결혼에서 도시가 차지하는 비율이 70%까지 늘어났다. #

그러나 현재의 혼인율 감소를 성비의 문제가 영향이 크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이다. 아래 내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오히려 성비는 생각보다 영향이 극히 적고, 사회 문화적인 영향이 훨씬 크다.

2021년 연령별 성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결혼 적령기에 해당할 30대(1982~1991년생)의 남녀 성비는 35~39세(1982~1986년생) 105:100, 30~34세(1987~1991년생) 109:100 정도인데, 30대 전체 성비는 약 107:100, 2030의 전체의 성비는 109:100 정도로 나온다. 원래 특별한 조작을 가하지 않았을 때 출생 자연 성비는 105:100 전후로 나오게 되는데, 원래가 남성이 약 5% 정도 많은 것을 고려하면 현재 109:100의 2030의 한국인 남녀 모두가 1:1로 모두 매칭이 되었을 때 같은 한국인과 매칭이 되지 않는 남성은 이전 정상적인 자연 성비 대비로 추가적으로 4%밖에 해당되지 않은 인원이며,[26] 자연 성비값까지 포함해도 9% 정도로 볼 수 있다.

만약 이론적으로 매칭된 인원이 모두 결혼할 때 한국인과 결혼하지 못하고 남는 남자는 9% 정도다. 반대로 말하면 91%는 여자가 부족해서 결혼하지 못할 일은 없다는 것이며, 이 9%마저도 결혼시장이 폐쇄 시장이 아니어서 해외에서의 유입인 국제결혼도 적지 않게 이루어지므로[27] 유의미한 영향을 주는 수준은 아니다. 이미 결혼 10건 중 1건이 국제결혼인 시대이기 때문. 대입이나 입사 경쟁에서도 1.1:1이라면 거의 100% 합격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낮은 경쟁률으로 취급된다.

실제로 보면 40대에서도 국내 남자의 24%, 여자의 12% 가량이 결혼을 못하고 있으며, 일반적인 결혼 적령기의 마지노선인 30대 평균의 미혼율까지 2020년의 경우는 남자 51%와 여자 34%로 올라갔다.[28] 이 비율은 25년 전만 해도 30대 미혼율이 19%와 6%였던 것에 반해 남자는 2.5배 정도 증가할 때 여자는 5배 속도로 증가하였고, 점점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아예 사회적으로 혼인관이 바뀌어 기준치가 높아 혼인의 진입장벽이 높아졌다고 여기고, '결혼이 꼭 필요한가'라는 지점까지 포함해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 큰 영향을 차지한다. 그것도 모자라서 결혼을 하고도 자발적으로 자식을 낳지 않는 딩크족도 늘어나고 있는데, 의외로 상류층에서 딩크족이 더 많다.

자세한 내용은 결혼대란 문서 참고.

4.2. 결혼 문화 변화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결혼대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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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 남성의 급증으로 인해 독신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개선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당장 비슷한 일을 이미 겪었던 일본은 독신주의 남성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이 현실로 나타났으며, 관련 다큐까지 나왔다.

4.3. 낙태 반대론

낙태 자율화에 대한 대중의 거부감이 커져 낙태 찬성측에게 여론이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게 되었다.

더욱이 낙태 찬성측의 논리는 태아를 여성 신체의 일부로 본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논리인데, 성 감별을 통한 여아 낙태는 태아에 성별을 부여함으로써 태아를 인간으로 보는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 태아가 여성의 신체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면 성을 부여할 이유가 없다.

현재 모자보건법에 기초한 낙태죄 논란에서도 여성계의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데 실패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저 당시 낙태 반대 운동이 여성계를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1987년 개정된 의료법을 만든 것도 당시 여성계 요구가 컸기 때문이다.

4.4. 출생아 수에 끼친 악영향

출산율의 경우 한 여성당 낳는 아이의 비율을 뜻하는 수치이므로 성비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1980년대 중반~1990년대 중반생이 결혼 및 가임 연령에 진입하기 시작하면서, 출생아 수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여성의 비율이 자연적 상태보다 적은 상황이니 당연한 결과다.

2020~2022년은 위 세대가 결혼 및 출산 연령에 접어든 시기인데, 출생아 수 20만 명대라는 역대급 폭락을 맞이하게 되었다. 혼인 건수도 처참히 망가져, 앞으로의 출산율 전망은 더욱 암담하다.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의 저출산 문서 참조.

그러나 "출생아 수가 20만 명대로 폭락한 것은 1980~90년대 여아를 낙태했기 때문이다"라고 사태를 분석한다면 명백한 오류다. 출생아 수가 20만 명대로 급격히 줄어들 만큼 여성 출생아 수가 폭락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29] 이는 2016년 12월 통계청에서 발표한 장례인구추계를 봐도 논증이 가능하다. 이에 따르면 2030년에도 연간 40만 명 출생아 수를 지킬 것으로 전망했다. 저위추계[30]에 따르더라도 2030년 32만 명이 태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1980~90년대 여아 낙태로 줄어든 여성 인구수는 명확히 나와있는 데이터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당연히 반영한 예상치다.

현실은 출산율 0.8대에, 2020년 27만 명, 2021년 26만 명의 출생아 수를 기록해버렸다. 통계청이 발표한 예상치가 단 4년 만에 말도 안 되게 벗어나버린 것이다. 결국 4년 사이에 벌어진 통계청에서 예상하지 못한 변화를 찾아내는 것이 타당한 분석이다.

여아 낙태로 인해 불균형해진 성비가, 출생아 숫자에 약간이지만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사실이다.

5. 현황

여아 낙태에도 불구하고 1983년 이후 출생자의 성비가 결혼적령기 시점에 정상화될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틀렸다. 행정안전부의 2017년 12월 연령별 인구 현황에 따르면 1985년 ~ 1989년생(당시 28~32세, 현재 [age(1989-12-31)]~[age(1985-01-01)]세) 남성은 총 168만 9,263명이고 여성은 159만 8,564명으로, 여성 100명당 남성이 105.6명 정도로 태어났을 때 성비인 110:100에 육박한 것에 비해 4명이 줄었다.

2017년 통계에 따르면 1980년대 후반 출생한 세대의 성비는 107:100 수준으로 회복되었지만 이 역시 자연적인 수준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1988년생(현재 [age(1988-12-31)]~[age(1988-01-01)]세) 남성은 107명으로 100:100이라는 자연 상태 성비에 못 들어섰다. 1985년생(현재 [age(1985-12-31)]~[age(1985-01-01)]세) 남성은 역시 105로 줄었다. 아직도 남성이 여성보다 5% 정도 많다.

2020년 기준 20대 후반인 1991~1995년생(현재 [age(1995-12-31)]~[age(1991-01-01)]세)의 남녀 비율은 113:100 가량으로 여전히 높지만, 5년 전인 2015년의 115:100보다는 2명 정도 줄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인식이 변화하기 시작했고, 2000년대 후반생부터는 출생 성비는 정상으로 자리잡혔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 사이에 태어난 남성은 여전히 여자보다 숫자가 훨씬 많다. 실제 이들이 20대 후반~30대가 된 현재(2024년)에도 자연적인 정상 성비에 들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이 세대의 남성이 출생 당시보다 크게 줄어들었어도 워낙에 비정상적인 남초였기 때문에 이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80년대생들조차도 온전히 성비가 회복되는 건 어려우며, 90년대생들은 향후에도 성비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도심 지역 한정으로 성비가 바로 잡히는 것은 여성의 도시 선호 현상에 있다. 치안 등의 문제로 농촌보다 도시를 선호하는 현상은 이촌향도가 시작된 이래로 본격화되었다.

보통 출생 당시 여아에 비해 남아가 많은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라서 정상적인 남녀 출생 성비를 보통 105:100으로 보는데, 이후 남아 사망률이 높아 시간이 지날수록 남성의 수가 100에 가까워진다는 주장이 있으나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 사이 출생 성비는 110:100을 웃돌기 때문에 남아의 자연 감소분을 감안해도 100 초반 수준으로 줄어드는 것은 불가능하다.[31]

그러나 10만 명당 고작 수십 명, 0.0X%대의 미세한 사망률 차이로는 성비 역전 현상을 설명하기 어렵다. 자연 감소는 보건이 발달하기 이전 전근대 사회 및 혼란기 사회에나 해당하는 문제기 때문이다. 보다 본질적인 원인은 여성의 도시 선호 현상에 있다. 치안 등의 문제로 농촌보다 도시를 선호하는 현상은 이촌향도가 시작된 이래로 본격화되었다. 또한 남성의 경우 해외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고, 여성의 경우 한국으로 귀화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작용한다.

5.1. 이후 세대의 출생 성비 정상화

2000년대 후반생들부터는 출생 성비가 정상화되었다. 2007년의 신생아 성비는 106.2:100으로 정상 범위까지 많이 개선되었으며, 이후에도 성비 격차는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2016년에는 105:100으로 맞춰졌다. 2020년에는 104.8로 자연성비 이하로 내려갔다.

5.2. 기타

65세 이상 고령 인구의 경우 여성이 남성에 비해 평균수명이 긴 만큼 남녀 사망률 차이가 크며 생활 습관의 차이 때문에[32] 여성이 더 많다. 또한 교통사고 발생 수 역시 남성이 더 많다.

범죄자로 수용되고 있는 인원도 남성이 여성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2017년 12월 기준 교도소, 구치소, 소년원 등 교정시설에 수용된 인원은 총 55,198명이며, 이들 중 남성이 51,425명(93%), 여성은 3,773명이다.

강력범죄 가운데 생명에 직접적 위협이 되는 살인 범죄의 피해자도 남성이 조금 더 많다.

연간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인구는 약 1,000명 정도이며 그 대부분이 남성이다. 또한 통계에 나오지 않는 산재 사망자도 매우 많다. 정부와 기업의 입김이 세기 때문에 노동 조합의 힘이 강력한 대기업이 아니라면 산재 사망 인정 받기는 아주 힘들다.

남성 수가 빠르게 줄어든 데는 해외에 정착하는 남성이 많은 것도 원인 중 하나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해외에 나가는 경우가 더 많으나 국내로 돌아오는 것도 여성이 더 많으며, 남성 해외 취업자는 장기 체류자가 많은 편이나 여성 해외 취업자는 현지에서 정착하는 사례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현재 20~40대 전체를 봤을 때 사망률[33]은 20대~30대 초중반은 약 1%, 30대 후반~40대 초반은 약 2%, 40대 중반은 3%, 40대 후반은 4~5% 정도로[34] 추정되는데, 사망률이 남자가 더 높다는 것을 고려하면 20~30대 남자의 전체의 1~2%, 40대 초중반 남자의 3~4%, 40대 후반의 남자의 5~6%는 이미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결론적으로 대한민국은 아직까지는 남초 국가지만 상기 요인과 같은 남성의 이민률, 사망률, 국제결혼률이 계속 유지된다면 장래에는 결혼 적령기 인구에서 남초가 완화될 가능성이 있다. 장래의 결혼 적령기 연령대를 말하는 거지 1983년생부터는 결혼 적령기에 성비가 완화될 일은 없다.

상기 서술된 대로 남성의 사망률은 여성보다 높아 자연 상태에서는 연령이 올라가면 성비가 정상에 가까워지는 것이 당연하다. 노년층들은 여자가 더 많다.

그렇다고 한국의 결혼 적령기 남성들이 제대로 짝을 찾을 수 있다고는 할 수 없다. 105:100이라는 자연 성비 상태로 있어야 성인기에 정상 성비로 맞춰지는데 1980~90년대 남아선호사상은 너무나 심각했고, 아무리 자연적으로 성비가 맞춰진들 정상 범위에 들지 못하고 있다.

결혼 적령기에 들어선 30대 초반의 성비는 정상화되지 않고 아직 비정상적임을 알 수 있다. 110명대 성비를 두고 성비가 정상화되고 인구 구조적으로 안정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젊은 층과 여성의 경우 수도권 거주를 선호하기 때문에 수도권은 성비가 어느 정도 맞는 편이지만 지방은 더욱 성비가 불균형한 편이다.

현재 1985~1996년생 사이의 남초 현상은 110~115:100이라는 수치를 찍던 출생 때보다 조금 완화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110:100을 웃돌아서 정상 수치보다 높다. 성비 불균형이 아직 드러나지 않던 세대인 40대, 즉 70년대 중반~80년대 초반 출생자를 기점으로 성비가 크게 낮아져, 연령대가 올라갈수록 그 수치는 정상 성비인 100명대 초중반에 고정되는 것이 보인다.
남성 여성 성비 비고
15~19세 1,196,135 1,124,356 106.38명 [35]
20~24세 1,452,989 1,341,451 108.31명 [36]
25~29세 1,783,849 1,619,197 110.16명 [37]
30~34세 1,785,954 1,613,298 110.70명 [38]
35~39세 1,635,037 1,541,259 106.08명 [39]
40~44세 2,059,426 1,989,833 103.49명 [40]
45~49세 1,968,824 1,904,051 103.40명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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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통계에 따르면, 2023년 12월 말 여성 인구는 2,575만 9,593명으로 남성(2,556만 5,736명)보다 19만 3,857명이 많다. 하지만 실제 인구통계로는 아직 남자가 더 많다.

10~15년 뒤에는 2000년대 후반생이 결혼 적령기로 들어오니 정상화될 가능성이 있다. 2010년대 중반 기준, 30대 후반 미혼 인구는 이미 여성보다 남성이 적으니 남자가 더 희소해질 거라고 희망을 가지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는 남초 현상이 적던 1970년대 후반생들이라 그렇다. 2016년 기준 35~39세 여성인구가 196만 2,340명으로 남성의 인구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으나, 여초 현상이 두드러진 서울에선 해당 연령대의 미혼 여성(33만 9,502명)이 남성에 비해 2만 5,795명이 많았으니 비서울의 경우는 남초 현상이 극심할 것으로 추정된다.[42] 아직 본격적인 남초가 아닌 1977~1981년생 연령대가 이 정도였다.[43] 2023년 현재 1977~1981년생은 40대이고, 남아 선호사상이 심한 1980년대 중후반생(1984~1988년생)이 나이가 들면서 35~39세가 되었으니 35~39세 연령대는 다시 남초로 바뀌었다.

일반적으로 결혼적령기를 훌쩍 지난 중년기 이상이 되어야 여초 인구 구조를 갖게 된다. 실제로 소말리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나미비아, 짐바브웨내전으로 남성 인구가 부족한 경우를 제외한 미국, 일본, 유럽, 캐나다는 대부분 여초 국가다. 특히 고령 인구가 많은 프랑스이탈리아는 남녀 성비가 95 미만, 일본은 90 미만으로 심각한 여초 국가이다. 일반적으로 남성의 수명이 짧기 때문에 노인의 성비도 자연히 극여초로 수렴한다. 당연히 이들 나라에서 젊은층 인구는 여초가 아니다.

6. 외국의 사례

출생 성비가 파괴된 나라 자체는 몇 안 된다. 낙태의 허용여부와 무관하게 세계적으로 한쪽 성만이 경제적으로 아주 유리한 종교나 세속주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은 아예 법망조차 뚫을 정도로 '종교적인' 힘이 강력했다. 아니면 국민 여론 자체가 낙태 방지법을 방해하기도 한다. 2010년 이전의 한국, 미국, 중국, 인도, 베트남, 아르메니아, 대만 등 10여 개 이하. 문제는 이들 10여 개 이하의 나라가 차지하는 인구 비율이 전세계 인구의 1/3이(75억 명 중 25억 명) 넘는다.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흑인들의 경우 상대적으로 남아가 적게 태어난다. 여초로 태어난다는 말이 아니고 남녀 출생 성비가 1:1에 가깝게 되어, 다른 인종에 비해 남아 출생 비율이 낮은 편.

아시아의 성비 불균형의 실태를 파헤친 논픽션 저서 '남성과잉사회'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상세히 서술하고 있으며, 아시아에 미국 전체 여성보다 많은 1억 5,000만의 여성이 부족하다고 나오고 있다. 적어도 2050년까지 이런 남성 과잉으로 인한 사회 문제에 시달리는 것으로 보고 있다. 단, 이것도 낙태가 줄어들었을 때의 이야기이다.

6.1. 중국

중국은 아직도 팽배한 산아제한정책(계획생육정책)의 여파로 지금도 현재 진행형의 문제다. 이쪽은 아예 산아제한 정책이 30년 넘게 진행되다 보니 대한민국보다 더 심각한 문제로 자리잡고 있다. 한국은 그래도 1990년대 후반 들어서부터 그나마 성비 불균형 현상이 줄어들기 시작해 2000년대 후반부터 겨우 해소되었지만, 중국은 아직도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5년 들어 폐지되었고, 3년 뒤인 2018년 들어서는 완전히 폐기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서 중국 오지의 일처다부제를 실시하는 곳에서 신부 매매가 이뤄지는 상황이다. 특히나 이 지역은 더 혹독한 대접을 받기 때문에 더 높은 가격(지참금)으로 신부들이 거래된다고 한다. 다만 이는 일부다처제를 시행하는 지역에서 매매혼이 흔한 걸 생각하면 딱히 놀라울 건 아니다.[44]

심지어 조혼 풍습까지 부활하고 있다. 아들을 둔 집안이, 미리 아들과 같은 또래의 여자아이를 얻어 결혼시키는 것이다.

6.2. 인도

인도에서는 결혼을 하면 신부측에서 신랑 쪽 집안에 지참금을 주는데, 이 지참금이 몇 년치 봉급 수준이다 보니 경제적 부담을 덜기 위해 여아를 사전에 낙태시키거나 이미 태어난 여아를 죽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인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에서는 남아선호사상이 만연해 있어 성비 불균형이 심각하다.[45] 특히, 종교적으로도 남아를 선호하는 펀자브 주 시크교에서 이 현상이 심각해서, 2001년 기준 남여성비가 130:100까지 치솟을 정도로 시크교가 인도 남여성비 불균형을 이끌었었다. 20년대에는 많이 줄어들어 109:100까지 내려갔지만 이들이 이제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시크교도를 중심으로 한 결혼대란은 현재진행형이라고 볼 수 있다. ###.

이 때문에 신부 매매를 하거나 조혼을 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조혼이나 신부 매매는 중국이나 인도나 상황이 비슷하다.

특히 조혼을 할 경우 악명 높은 인도의 신부 지참금을 면제받을 수 있어 가난한 가정에서 선호하기도 한다. 물론 신부의 일부는 인신매매를 통해서 구하고 있을 정도로 불균형이 심각하다. 참고로 인도는 이미 전세계 조혼 풍습의 40%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다만 인도에서는 이런 문제로 인해 카스트 제도가 약화되는 순기능도 있다. 높은 카스트의 남초가 심하여[46] 상대적으로 성비가 안정된 낮은 카스트의 여자와 결혼하게 되면서 생긴 일이다. 게다가 동남아의 경우 국제 결혼으로 경제적 혜택을 입은 극빈층을 중심으로 여아 출산을 늘리기까지 하는 상황이다.

6.3. 일본

파일:population_japan.jpg
1873~2010 일본 내 성별 출생자수 및 성비 통계 자료
출처 : 후생노동성
2011년 이후
년도 남아 여아 성비
2011 538,271 512,535 105.0
2012 531,781 505,450 105.2
2013 527,657 502,159 105.1
2014 515,533 488,006 105.6
2015 515,452 490,225 105.1
2016 501,880 475,098 105.6
2017 484,449 461,616 104.9
출처 : 일본정부 e-Stat 출생 성비 및 합계 특수 출생률

일본 출생 성비의 최고점은 1966년도[47]의 107.6으로, 한국, 중국 등에서 보이는 자연적인 범위를 벗어난 110 이상의 신생아 성비 불균형이 10년 이상 지속된 적은 없다.

낙태는 1948년 미군정 시기에 산아제한정책과 함께 임신 22주 이내에 한해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1995년까지 존재했던 우생보호법으로 인해 장애아를 낙태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는 분석이 있다.

출생성비가 아닌 전체 성비로는 남녀의 평균수명 차이와 고령화로 인해 고령화 국가의 전형적인 고령 여초 사회를 이루고 있다. 때문에 나이 든 자식들의 노모 부양과 같은 사회 문제도 발생했다.

6.4. 기타

아르메니아,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알바니아, 몬테네그로에서 이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나라는 마초적인 민족 전통이 더 강하기 때문에 낙태 금지 시도 자체가 반대에 부딪힌다. #

당연히 이런 현상을 겪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음성적인 성매매의 광범위한 활성화로 에이즈 등의 성병 전파가 증가되는 등 사회적 문제는 위험 수위에까지 이르고 있다. 선진국이라면 성노동자들에게 의무적으로 성병 검사를 하고 이것은 잘 지켜지지만, 저 문제가 일어나는 곳들이 중국을 제외하면 대부분 개발도상국이다. 다만 경제가 성장하면서 인습 등이 사라지면 성비가 다시 정상화되고 있다. #

미국, 캐나다에서도 아시아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에 캐나다에서 아시아계 이민 1세대의 출산율을 조사한 결과 비정상적인 남초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 #[48] 이것도 필리핀계, 일본계는 성비 불균형 출산 문제가 없고, 한국계, 중국계, 인도계가 가장 심하다. 이 셋 중에서도 한국계가 제일 심하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성감별 후 낙태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였으나, 진보단체와 아시아계를 중심으로 한 여성단체의 반발로 의회에서 부결된 사례가 있다. 다만 하원에선 20주 이상 태아 낙태금지 법안이 통과된 상태이며, # 일부 주에서도 낙태 규제를 강화하는 상황이다. # 최근에 미국에서 일어났던 정치적 이슈 중 하나로 필리버스터로 낙태 법안을 무산시킨 사건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49]

7. 관련 문서


[1] (남자 신생아 수/여자 신생아 수)*100을 한 수치다. 자연 성비도 100:100이 나오지 않고 남자가 5% 정도 높게 나오는 이유는 정자 상태에서 Y염색체를 보유한 정자가 X염색체를 보유한 정자보다 몸집이 작고 빠르기 때문이다.[2] 전체를 100으로 하여 %단위로 계산한 것, 소수 셋째 자리에서 반올림.[3] 무려 남자가 전체의 53.58%를 차지했다는 것. 1990년생에 해당한다. 이유는 아래 항목을 참고.[4] 불균형이 역대 최고였던 1990년(현재 [age(1990-12-31)]~[age(1990-01-01)]세)도 짝수해고 앞뒤 해보다 유독 두드러졌던 1978년(현재 [age(1978-12-31)]~[age(1978-01-01)]세), 1986년(현재 [age(1986-12-31)]~[age(1986-01-01)]세), 1988년(현재 [age(1988-12-31)]~[age(1988-01-01)]세), 1998년(현재 [age(1998-12-31)]~[age(1998-01-01)]세), 2000년(현재 [age(2000-12-31)]~[age(2000-01-01)]세), 2002년(현재 [age(2002-12-31)]~[age(2002-01-01)]세), 완전히 정상 범위를 되찾은 2007년 이후 가장 높았던 2010년(현재 [age(2010-12-31)]~[age(2010-01-01)]세) 모두 짝수해다. 반면 불균형이 잠시나마 약간 완화된 1987년(현재 [age(1987-12-31)]~[age(1987-01-01)]세), 백말띠의 반작용을 받은 1991년생(현재 [age(1991-12-31)]~[age(1991-01-01)]세), 불균형이 완화되기 시작한 1997년(현재 [age(1997-12-31)]~[age(1997-01-01)]세), 정상 범위를 되찾은 2007년(현재 [age(2007-12-31)]~[age(2007-01-01)]세), 105:100명대로 정확히 세계 평균치 라인까지 되찾은 2011년(현재 [age(2011-12-31)]~[age(2011-01-01)]세) 역시 홀수해. 다만 2012년 이후로는 이런 경향이 사라지고 짝수해든 홀수해든 큰 차이가 없다.[5] 즉, 한 집안의 장남무조건 아들을 낳으려 하는 것.[6] 성별을 미리 감별해서 딸이라고 나왔다 하더라도 애는 낳아봐야 정확히 아는 것이다.[7] 아들을 낳을 때까지 낙태 없이 임신을 계속하는 방법만으로는 수학적으로 성비의 불균형을 일으킬 수 없다.[8] 이게 산아제한을 추진할 당시 다산의 원인 1순위였다. 구한말 고종 이전까지는 칠거지악의 이념에 근거한 형법상의 죄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초창기의 산아제한 구호는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것이었다. 사실 종교적인 이유로 자식을 많이 낳는 것은 현대에도 일부 목사라든가 그 유명한 하레디라는 극보수 유대교 신자들에게도 있다. 그 반대로도 승려, 신부 등이 자식을 가지지 않는 모습도 많다. 자식 덕을 보는 것은 '효' 사상을 바탕으로 봉양을 하게 하는 것, 아니면 자식이 공부를 통해 출세하여 부모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게 하는 정도였고 그 전에는 흥부전에서 아버지가 매품팔이하는 것까지 묘사될 정도로 부모들이 매우 헌신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높게 쳐주었다. 농사를 통해 자신들을 먹여살릴 것을 바라는 건 서양이나 일본, 또는 한반도에 과거 제도가 전래되기 이전에 가능했던 것이다.[9] 이 때문이라도 많이 낳으려고 했다. 아기의 백일잔치돌잔치 풍습, 출산 후 늦은 출생신고도 여기에 기인한다.[10] 당시 보통 가구 당 평균 자녀수는 5명 이상(영유아 사망 제외)이었고, 간혹 10명 이상도 있었다.[11] 박정희가 일부 합법화했다고 하나, 산아제한을 이유로 한 낙태는 당시에도 명백히 불법적이었다.[12] 현재 전세계적으로 사용되는 초기 임신 중절 방법으로, 전동 석션기를 이용하거나 대왕주사기와 비슷한 형식의 수동 흡입기를 이용하여 진행한다. 대한민국과 중국, 미국의 경우 거의 모든 병원에서 전동 석션기를 이용하며 일본, 북한, 인도의 경우 거의 모든 병원에서 수동 흡입기를 이용한다.[13] 자연적으로 출생 성비는 '남아 105:여아 100'이다. 이후 약 30대까지 해당 성비가 거의 유지되다가 사고나 질병 등의 이유로 40대부터 서서히 맞춰지기 시작해 50대 즈음에 거의 1:1로 맞춰지고, 평균 수명 때문에 노년기에 여초화된다.[14] 다만 주민등록 제도가 시행되기 전에는 시골 오지 같은 곳에서 입 하나 던다고 여아를 임의로 살해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설도 있다.[15] 차범근 항목에 걸려있는 그 포스터 맞다.[16] 한국과는 달리 중국은 계획생육정책으로 강제적으로 시행되었기에 좀 다르기는 하다.[17] 참고로 이 기사의 주인공이자 미군 여군 페이스 베스케즈(한국 이름 권선영)는 몇 년 후 배달의 무도 특집에 출연하였다.[18] 당시 조항은 의료법 제19조의2에 규정되었으며, 1988년에 시행되었다. 내용은 의료인은 태아의 성 감별을 목적으로 임부를 진찰 또는 검사하여서는 안 되며, 같은 목적으로 다른 사람의 행위를 도와 주어서도 안 된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의료인이 태아 또는 임부에 대한 진찰이나 검사를 통해 알게된 태아의 성별을 임부 본인, 그 가족, 기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도록 하였다.[19] 2011년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관련법이 개정되기 전까지만 해도 32주 이전 태아에 대한 성감별은 무조건 의사면허취소 사유로 간주되었으며, 1994년에는 3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지는 처벌 규정까지 생겼다. 참고로 면허취소 사유는 정신질환이나 마약중독 등으로 정상적인 의료행위가 불가능해지는 경우나 의사 면허증의 대여, 의료법 관련 금고형 이상을 받는 등 중죄에만 적용된다.[20] 다만 1990년대 초반에는 셋째아 비율이 역대 최저치인 5% 남짓이었는데 이는 첫째만 가진 가정이 둘째를 출산하는 케이스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통계청이 작성한 1981년 이래로 둘째아 비율이 가장 많던 시기도 1991년~1995년 이때였다.[21] 경오년[22] 비슷한 사례로 일본에서는 1966년에 출생아 수가 잠깐 줄어든 적이 있었는데, 이는 병오년에 태어난 말띠 여자는 기가 세서 팔자가 사납다는 속설 때문에 아이 낳기를 꺼린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두 사례 모두 말띠 해와 관련이 있다.[23] 2021년에 낙태죄가 폐지되었지만, 과거와 달리 낙태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 여아 낙태 현상 등 성별 낙태 문제는 사실상 사라졌다.[24] 재미있는 것은 북한여초화되었다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1978년부터 산아제한 정책을 실시했는데,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경제난 때문에 남아선호사상이 있는데도 아들, 딸 나눠서 낳을 여유가 사라져서 경제인구 여초화 현상이 벌어졌다. 이는 남한에 비해 의료 시설 등이 좋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25] 1988~1996년생 여자들도 비혼주의자가 많다.[26] 물론 출생 성비가 105라고 해서, 20~39세가 되면 남자 쪽의 타국으로의 이동(이민 등), 사고/자살에 의한 사망 등이 남자가 더 많은 것으로 인해 어느 정도 낮아지는 반면 유입은 여자가 더 많은 것을 고려하면 출생 시 105 수준이 이 연령 때까지 유지된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이때까지는 남자가 소폭 많다.[27] 물론 국제결혼이 무조건 국내결혼이 사실상 불가능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경쟁력이 떨어져 국내결혼이 어려워서 국제결혼을 하는 케이스들이 보통 많다.[28] 더 정확히 말하면 30대 초반과 후반은 미혼율 차이가 크다. 30대 초반에서는 남성 미혼율이 무려 60~75%, 여성 미혼율도 45~60%에 달하지만 30대 후반에서는 남성 미혼율과 여성 미혼율이 각각 25~35%, 15~25% 전후로 감소한다.[29] 이들의 성비가 남성이 더 많다고는 하지만, 여성이 48% 정도는 되므로 1984~2000년생 기준 각 년도별로 대략 30~35만 정도는 되는 셈이다. 출산율 1.0이라도 지켰으면 30만 명대가 나오고 1.2 정도를 유지했다면 40만 명대 초반을 유지할 수 있었다.[30] 저위 추계 시나리오는 조합 시나리오 가운데 가장 비관적인 상황을, 고위 추계 시나리오는 가장 낙관적인 상황을 가정한 것이다.[31] 줄어들어도 105~106 정도다.[32] 과음, 담배 등.[33] 즉, 그 해 출생자 수 대비 사망자 수.[34] 나이가 많을수록 사망률도 높아지고 과거로 갈수록 영유아사망률이 높아지면서 현재 50세 이후의 사망률(특히 57세(1967년생) 이상)은 40대보다 월등히 높아진다.[35] 2004년생 ~ 2008년생(현재 [age(2008-12-31)]~[age(2004-01-01)]세), 당시 출생성비 106명 ~ 108명. 이중 15~16세는 성비가 정상이다.[36] 1999년생 ~ 2003년생(현재 [age(2003-12-31)]~[age(1999-01-01)]세), 당시 출생성비 108명 ~ 110명[37] 1994년생 ~ 1998년생(현재 [age(1998-12-31)]~[age(1994-01-01)]세), 당시 출생성비 108명 ~ 115명, 이들 중 초중반은 성비 문제가 극에 달한다.[38] 1989년생 ~ 1993년생(현재 [age(1993-12-31)]~[age(1989-01-01)]세), 당시 출생성비 111명 ~ 116명, 성비문제가 극에 달하던 때.[39] 1984년생 ~ 1988년생(현재 [age(1988-12-31)]~[age(1984-01-01)]세), 당시 출생성비 108명 ~ 113명[40] 1979년생 ~ 1983년생(현재 [age(1983-12-31)]~[age(1979-01-01)]세), 당시 출생성비 105명 ~ 107명[41] 1974년생 ~ 1978년생(현재 [age(1978-12-31)]~[age(1974-01-01)]세), 당시 출생성비 104명 ~ 112명[42] 특정 지역에서는 무려 120~125:100까지 벌어진다.[43] 1980~1984년생이 35~39세인 2019년까지만 해도 남초가 아니었으나 1982~1986년생이 35~39세인 2021년 기준 남초가 되었다.[44] 반대로 여자가 금덩이가 되어 시부모 앞에서 남편을 구타해도 아무도 찍소리도 못하는 경우도 많다. 괜히 뭐라 했다가 여자가 집 나가면 그게 더 손해니까... 한 시골 마을에서는 남편이 죽자 동네 남자들이 장례식장에 몰려와서는 과부에게 작업을 건 경우도 많다고.[45] 대체로 아랍권 국가에서는 남자가 지참금을 내는 것이 일반적이라 남자의 지참금이 곧 사회적 지위이며 이 때문에 결혼하지 못하는 남성이 많은 편이다.[46] 여아 낙태는 성감별이 가능하고 안전한 낙태가 가능한 고소득층에서 더 많이 나타난다.[47] 이는 1966년이 병오년이었는데, 병오년에 태어난 말띠 여자는 팔자가 사납다는 속설 때문에 아이 낳기를 꺼린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48] 이 조사에선 한국은 둘째아 남아 성비가 무려 120로 나왔다. 다만 조사자가 말했듯이 표본 수가 너무 적기 때문에 참고 사항으로만 보는 게 좋다.[49] 다만 미국의 경우 아시아 이민자들의 성감별 낙태만 문제가 된 것은 아니다. 불법 낙태로 8~9개월의 임신 후기 태아를 유도분만 이후 살해한 커밋 고즈널 사건도 큰 영향을 주었다. 참고로 해당 인물은 현재 1급 살인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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