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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덴 폭포와 지중해 해안
이블리 미나레 모스크와 시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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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Antalya[1]튀르키예 남부의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인구 약 220만 명의 도시이자 동명의 도의 중심지.[2] 인구 기준으로 이스탄불(1400만), 앙카라(500만), 이즈미르(400만), 부르사(280만) 다음으로 튀르키예 제5의 도시이자 튀르키예 최대의 휴양도시이다. 동지중해와 맞닿는 튀르키예의 남해안을 대표하는 도시로, 튀르키예에선 '여행 수도'로 불릴 정도로 관광객이 많다. 따라서 영국, 독일, 러시아, 벨기에, 세르비아가 안탈리아에 영사관을 두고 있다. 러시아인들이 매우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옛 지명은 아탈리아 (Ἀττάλεια)로, 페르가몬 왕국의 아탈로스 2세가 해군 기지로 세운 것에서 비롯되었다. 로마~동로마 시절 오랫동안 소아시아 남해안 지역을 담당하는 해군기지였고, 동시에 동지중해를 대표하는 국제 무역항으로 번영하였다. 그러다 13세기 초엽 룸 셀주크 술탄 케이쿠바트 1세가 점령한 후 튀르크화되었다. 근래에는 2015년 G20 정상회의와 2016년 엑스포를 개최하였다. 한국의 관광도시인 전주시, 순천시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시내에는 하드리아누스 문, 안탈리아 고고학 박물관, 칼레이치 구도심, 뒤덴 폭포 등의 볼거리가 있다. 도시 자체 뿐만 아니라 인근 페르게, 아스펜도스, 시데 유적 등도 인기 관광지이다. 기후가 온화하여 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지중해성 기후를 지니고 있다. 교육 시설로는 튀르키예의 명문대 중 하나인 아크데니즈 대학교가 있다. 교통 시설로 시내에 3개의 트램 노선이 있고, 동쪽 외곽에는 3개의 터미널을 지닌 안탈리아 국제공항이 있다.
2. 역사
옛 성벽과 하드리아누스 문
기원전 260년경 페르가몬 왕국이 일대를 장악할 무렵 작은 항구가 있었다. 그러던 기원전 150년경 페르가몬의 전성기를 이어간 아탈로스 2세가 본격적으로 도시를 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아탈리아 (Ἀττάλεια)라 명명하였다. 당시 비티니아로부터 전쟁 배상금의 일환으로 20척의 함대를 인도받았던 아탈로스 2세는 강력한 해군을 건설하고자 하였고, 그 거점으로 아탈리아를 선정하였다. 따라서 아탈리아는 이후 위세를 떨치게 되는 페르가몬 해군의 기지로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기원전 133년 아탈로스 2세의 조카이자 후계자 아탈로스 3세가 왕국을 로마에 넘긴 후 아탈리아는 로마 제국령 팜필리아 세쿤다 속주에 편성되었다. 다만 그 주도는 아탈리아 동북쪽의 페르게였다.
서기 1세기 중엽 사도 바울과 바르나바스가 전도 기행 중에 방문한[3] 후 아탈리아에는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130년에는 5현제 중 하나인 하드리아누스가 순행 도중 방문하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3개의 아치를 지닌 화려한 성문이 세워졌다. 팍스 로마나 이후 페르게와 아스펜도스 등이 쇠퇴한 것에 반해 아탈리아는 여전히 중요성을 유지하였다. 동로마 제국기에도 시가지가 성벽 밖으로 확장되고, 여러 성당들이 세워지는 등 번영하였다. 654년 이슬람 제국이 해전에 있어 첫 승을 거둔 돛대 해전이 아탈리아 서남쪽 해안에서 벌어졌다.[4] 이후 아탈리아는 사라센 (아랍) 해적들의 공격을 받았고, 그에 맞서기 위해 카리아와 팜필리아 일대에 조성된 키비레오톤 테마의 치소가 되었다.
2.1. 중세
10-12세기 동로마 중흥기에 아탈리아는 그리스인, 이탈리아인,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아랍인 등이 왕래하는 국제 무역항으로 번영을 이어갔다. 십자군 전쟁기에도 2차 십자군의 루이 7세와 3차 십자군의 리처드 1세가 아탈리아를 거쳐 레반트로 향하였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후 도시는 일시적으로 튀르크 인들에 복속했으나, 1차 십자군 후 동로마 지배가 회복되었다. 다만 이후로도 아탈리아는 제국의 주요부에서 고립되어 육상 교통이 단절되고 해상으로만 콘스탄티노폴리스 등과 연락할 수 있는 상태였다. 아탈리아를 경유한 십자군 측 기록에 의하면 튀르크 인들이 도시 인근까지 이르러 주민들은 경작을 할 수 없었고, 해상 교역을 통해 물자를 수입했다고 한다.한편 1176년 미리오케팔론 전투 후 영토 확장에 나선 룸 셀주크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1180년, 아탈리아 북쪽 150km 지점의 보르굴루 (현 으스파르타의 울르보를루)를 점령하고 1182년 아탈리아를 포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1186년 보르굴루에 분봉된 왕자 기야세틴 케이휘스렙은 아탈리아 점령을 목표로 삼고 준비하였다. 3차 십자군 후 1192년 케이휘스렙은 술탄에 올랐지만 (케이휘스레브 1세) 곧 내전에서 패하였고, 후임 술탄 쉴레이만샤 2세는 킬리키아 및 조지아와의 대결에 치중하여 아탈리아는 무사할 수 있었다. 1204년 4차 십자군으로 동로마 제국이 일시 붕괴한 후, 한 세기 가량 룸 셀주크의 영토에 둘러쌓여 있던 아탈리아에서는 이탈리아계 관료 알데브란도스가 자립하였다.
2.1.1. 룸 셀주크의 외항
1230년경 케이쿠바트 1세가 세운 이블리 미나레 모스크 (울루 자미) / 안탈리아의 (1차) 정복자 케이휘스레브 1세 기마상 |
쉴레이만샤의 사후 1206년에 복위한 케이휘스렙은 곧바로 아탈리아를 포위하였다. 이에 알데브란도스는 키프로스 왕국의 섭정 고티에 드 몽벨리아르[5]에게서 200명의 라틴 기사들을 증원받아 16일간의 공성전 끝에 튀르크 군을 격퇴하였다. 다만 십자군의 지배를 거부한 주민들이 셀주크 측과 내통한 결과, 이듬해 3월 5일 케이휘스렙은 아탈리아를 점령하고 첫 모스크를 세웠다.[6] 튀르크식으로 아달리아라 불린 도시에 대해 케이휘스렙은 조선소를 세워 룸 셀주크의 해군 기지로 개발하려 하였고, 동시에 보르굴루에 있던 행정 관청도 이전해왔다. 다만 1211년 케이휘스레브가 메안데르의 안티오키아 전투에서 전사하자, 아달리아 총독이던 케이페리둔 이브라힘이 형 케이카우스 1세에 반란을 일으키며 키프로스에 원군을 청하였다.
혼란을 틈타 1212년, 금요 예배를 틈타 키프로스의 십자군이 침공하고 주민들이 봉기하여 성내의 튀르크 인들을 대부분 학살하였다. 이로써 아탈리아는 재차 자립하였다.[7] 하지만 빠르게 내부를 수습한 케이카우스는 1214년 시노프에 이어 1216년 1월 22일 아탈리아를 재차 점령하였고, 시내의 성당들은 대부분 모스크로 전환되었다.[8] 또한 그는 성벽을 추가하여 시가지를 동서로 양분, 각각 그리스계 원주민과 무슬림 튀르크인 구역으로 할당하였다.[9] 후계자인 케이쿠바트 1세는 1225년 조선소를 보호하고 튀르크인 구역을 확장하기 위해 도시의 동쪽에 성벽을 추가하였다. 이렇듯 튀르크인들이 점차 유입된 도시는 점차 아달리아를 거쳐 안탈리아로 불리게 되었고, 룸 셀주크의 해군 기지이자 수도 콘야의 외항으로 번영하였다.[10]
1243년 쾨세다으 전투에서 몽골 제국에 대패한 술탄 케이휘스레브 2세는, 이듬해 안탈리아의 내륙부 성벽을 보강하여 수비를 강화하였다. 항구 동안의 시타델은 서북쪽의 현 칼레이치 구역으로 옮겨졌다. 13세기 중엽 안탈리아는 온화한 기후와 함께, 몽골에게서 안전한 곳으로 여겨져 룸 술탄들이 동계 수도로 선호하였다. 13세기 후반 룸 셀주크의 쇠퇴기에도 안탈리아는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 및 키프로스와 서유럽 등지로의 교역이 활성화되며 동지중해 무역의 주요 거점 중 한 곳으로 번영하였다. 시내에는 그리스인, 튀르크인, 유대인, 프랑크인 등이 각자의 구역에서 거주하였고 상대적인 안정 덕에 각지에서 이주민들이 유입되어 인구가 증가하였다. 당시 안탈리아는 아나톨리아 해안에서 튀르크인 비율이 높은 편이었다.
2.1.2. 테케 베이국[11]의 수도
평화와 문화적 발전기인 테케 베이국 시기에 형성된 구도심
13세기 말엽 룸 셀주크의 붕괴 후 아나톨리아 각지에는 튀르크멘 베이국들이 들어섰다. 한세기 이전 보르굴루 정복 후 일대를 영지로 받은 하미트 베이의 손자인 펠레큇틴 뒨다르 베이는 에레을리를 중심으로 자립하였고, 1301년 안탈리아의 총독이 타지역 순시를 위해 성을 비운 틈에 도시를 접수한 후 동생 유누스를 총독으로 봉하였다. 1316년 뒨다르 베이는 술탄을 칭하였는데 (하미드 베이국), 1320년 콘야를 점령한 일 칸국의 룸 총독 티무르타슈가 1324년 에레을리로 진격해오자 안탈리아로 피신하였다. 한편 그해 초엽 유누스 베이의 사후 총독위를 계승한 아들 마흐무트 베이는 백부를 몽골 측에 넘겨버렸고, 뒨다르 베이는 처형되었다. 이후 티무르타슈는 북쪽 게르미얀 왕조 방면으로 나아갔다.
일시적으로 멸망했던 하미드 베이국은 1327년 티무르타슈의 실각 후 이듬해 뒨다르 베이의 아들 이샤크 베이에 의해 재건되었지만, 안탈리아는 그와 별개인 베이국으로 이어졌다. 1330년대 안탈리아를 방문한 이븐 바투타는 그 아름다움을 극찬하였고, 주민들과 상인들이 종교나 계층에 따라 성벽으로 분리된 5개의 구역에서 거주한다고 기록하였다.[12] 또한 도시 주변의 과수원에서는 카마렛딘이라 불리는 살구와 아몬드가 생산되며, 건과일 형태로 이집트에 수출되어 고가품 취급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마흐무트 베이의 사후 흐즈르 베이 (1328-55), 다드 베이 (1355-60)를 지나 메흐메트 베이의 치세에 안탈리아는 재차 외세의 위협에 직면하였다. 1361년 8월 24일, 키프로스 국왕 피에르 1세[13]는 안탈리아를 점령하였다.
서북쪽 40km 지점의 코르쿠텔리로 천도한 메흐메트 베이는 우선 키프로스 측에 대한 식량 판매를 금하고 인접국들에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응한 카라만 왕조의 알라에틴 알리 베이는 1362년 4만 5천 대군과 8척의 함대를 이끌고 안탈리아를 공격했으나, 점령에 실패하였다. 메흐메트 베이는 지하드 노력을 통해 테케 베이라는 칭호를 얻었고, 향후 그의 왕국은 테케 베이국이라 불리게 되었다. 1369년 피에르 1세가 사망하고 어린 아들 피에르 2세가 계승하자 메흐메트 베이는 더욱 안탈리아를 압박하였고, 1372년부터 제노바 공화국과의 전쟁에 돌입한 피에르 2세는 결국 협상을 통해 도시를 포기하였다. 1373년 키프로스 군이 철수하자 메흐메트 베이는 마침내 수도를 회복할 수 있었다.
2.2. 오스만 제국령
1714년 프랑스 인들이 묘사한 안탈리아 항구
1380년 메흐메트 베이가 사망한 후 테케 베이국은 쇠퇴하였고, 그 후계자인 오스만 첼레비는 1390년 카라만 원정에 나선 바예지트 1세에 의해 폐위되었다. 이로써 안탈리아는 오스만 제국령이 되었고, 바예지트는 차남 이사에 이어 막내 무스타파를 그 총독으로 봉하였다. 1402년 앙카라 전투로 오스만 제국이 일시 붕괴되자, 티무르의 아들 샤 루흐는 안탈리아와 그 일대를 약탈하였다. 그후 티무르는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고자 기존 베이국들의 복구에 나섰고, 동맹인 카라만 왕공 메흐메트 베이가 퀴타히아를 점령하자 그에게 옛 테케 베이국을 주었다. 얼마후 오스만 첼레비는 티무르를 찾아와 복속하여 옛 왕국을 되찾았지만, 안탈리아 자체는 여전히 카라만 령으로 남았다.
따라서 오스만 첼레비는 반세기 이전처럼 코르쿠텔리를 수도로 삼았으나, 오래 지나지 않아 1421년 힘을 회복한 오스만 제국에 항복하였다. 안탈리아 역시 1471년 카라만 멸망전 당시 오스만 제국의 장군 게딕 파샤에 점령되었다. 카라만 왕공 카심은 백양 왕조의 우준 하산과 동맹했으나, 1474년 후자가 메흐메트 2세에 패배하자 이번에는 베네치아의 도움을 받아 안탈리아 등 해안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475년 게딕 파샤가 재차 안탈리아를 점령하여 그를 축출하였고, 카슴은 1482-83년 오스만 내전을 틈타 젬 술탄과 함께 왕국 재건을 시도했으나 그마저 실패하자 결국 오스만 측에 항복하였다. 이로써 카라만 왕조는 완전히 멸망하였고 안탈리아는 공고히 오스만 제국령이 되어 아나돌루 에얄레트 산하 테케 산작에 편성되었다.
15-16세기 오스만 제국은 황자들을 지방 총독 (산작베이)로 보내 경험을 쌓게 하였다. 그중 바예지트 2세는 차남 코르쿠트[14]를 1491년 사루한 (마니사)에 이어 1502년 테케 산작에 봉하였다. 마니사에 비해 수도에서 먼 안탈리아에 봉해진 것에 불만을 품은 코르쿠트는 1509년 이전 영지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맘루크 왕조로 망명했다가 사면을 받아 영지로 귀환하였다. 다만 1511년 후계자 위를 두고 내전이 터지자 코르쿠트는 재차 마니사로 향하였으나, 지지를 받지 못하자 동생 셀림의 설득으로 안탈리아로 돌아가 내전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셀림 1세는 즉위 후 코르쿠트를 의심하여 그를 추대한다는 가짜 편지로 마음을 떠본 후 코르쿠트가 동조한다고 여기자 사로잡아 처형하였다. 코르쿠텔리 지명이 그에게서 유래되었다.
한편 1500년경 아나톨리아 각지에서는 사파비야 종단의 영향을 받은 키질바시 튀르크멘들이 이스마일 1세를 본받아 분규를 일으켰다. 이스마일의 부친 셰이크 하이다르의 할리파 (대리인) 중 테케 지역을 맡았던 하산의 아들 샤쿨루 바바 테켈리는, 안탈리아 인근에서 출생하여 1511년 아나톨리아 중서부에서 반란을 일으켜 오스만 토벌군을 격파하며 위세를 떨치다, 바예지트 2세의 대재상 하듬 알리 파샤와 싸우다 전사하였다.[15] 다만 이후로도 잔당들이 저항하였고, 이에 셀림 1세는 4만에 달하는 키질바시를 학살한 후 찰디란 전투에서 이스마일을 격파하여 아나톨리아를 완전 평정하였다. 코르쿠트 이후 안탈리아에는 더이상 황자들이 부임하지 않았고, 17세기 들어 황자들의 지방 파견이 중단되며 아나톨리아는 점차 소외되었다.
아나톨리아 소외의 결과로 벌어진 젤랄리 반란이 진압되고, 1659년 안탈리아 총독 무스파타 파샤가 스스로 쾨르 베이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안탈리아의 부와 방어력을 과신했지만, 오스만 군은 수륙 양면으로 도시를 포위하였고 지친 주민들은 무스타파 파샤를 사로잡아 토벌군 사령관 쾨세 알리 파샤에게 넘겼다. 무스타파 파샤는 조각배에 묶여 수장되었다. 이후로 안탈리아는 오랜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17세기 중반 안탈리아를 방문한 엘리야 첼레비는 20개의 튀르크, 4개의 그리스인 구역으로 구성된 3천 가구가 거주하고 시가지는 성벽 밖으로 확장되어 있으며 항구에는 2백척의 선박이 정박할 수 있다고 기록하였다. 당시 총독 관저와 귀족들의 저택은 성밖에 있었다.
2.3. 근현대
20세기 전반 안탈리아 거리 풍경
18-19세기 무렵 아나톨리아 지방에서는 데레 베이라 불리는 지주 가문이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고, 안탈리아도 예외는 아니어서 옛 페르게에서 발원한 테케오을루 가문이 실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던 1812년 마흐무트 2세가 탄지마트의 일환으로 그들을 복속시켰으나, 20세기 초까지 테케오을루 가문은 오스만 총독들과 향촌 권력을 두고 경쟁하였다. 이는 1825년까지 안탈리아에 상관을 두고 있던 레반트 회사의 기록에 남아있다. 1865년 탄지마트 개혁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행정구역 개편에 있어 테케 산작은 콘야 빌라예트에 편성되었다. 동시에 동쪽의 알라니아 산작이 테케 산작에 편입되었다가, 19세기 말엽 재차 떨어져나간다. 또한 1900년경 테케 산작은 콘야 빌라예트에서 분리되어 독립 산작이 되었다.
20세기 전까지 안탈리아는 메르신과 달리 옛 모습을 간직한 전통적인 도시로 남았다. 이는 근대 시기 내륙의 콘야가 상대적으로 소외되자, 기본적으로 그 외항이던 안탈리아 역시 동반 쇠락을 겪은 결과였다. 1900년 무렵 안탈리아는 인근 메르신이나 타르수스와 마찬가지로 목화 수출항이 되어 2개의 면직 공장이 있었다. 1920년 무렵 이들 공장에는 1만 5천개의 물레와 2백개 이상의 베틀이 있었고, 독일 자본과 함께 조면기가 도입되었다. 목화 외에도 안탈리아는 밀, 깨, 가축, 목재, 목탄 등을 이집트나 이탈리아 혹은 그리스 도서 등지로 수출하였다.[16] 이를 위해 시내에는 7개의 제분소가 있었고, 수출을 통해 얻은 수익으로 영국 등지에서 공산품을 수입하였다.
20세기 들어 다른 아나톨리아 서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안탈리아에는 캅카스와 발칸 출신의 무슬림 피난민들이 정착하여 인구가 증가하여 1920년 기준 3만에 달하였다. 그럼에도 1923년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 시까지 그리스계 주민은 전체의 1/3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외에 아르메니아 및 유대인 공동체도 있었으나 그 흔적은 파괴되어 찾아볼 수 없다.[17] 세계 1차 대전에 뛰어든 오스만 제국은 1918년 10월, 무드로스 조약을 맺으며 항복하였다. 한편 1차 대전의 승전국임에도 보상이 적다고 여긴 이탈리아 왕국은 1919년 3월 28일, 안탈리아를 점령하며 아나톨리아 남해안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이탈리아 군은 순식간에 콘야를 넘어 에스키셰히르까지 진출하였다. 이탈리아령 안탈리아
이에 아나톨리아 서부를 노리던 그리스 왕국이 반발하였고, 5월 이즈미르를 점령하였다. 양측은 협상 끝에, 7월 그리스가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위임 통치를 지지한다는 조건 하에 이탈리아 군이 안탈리아 및 로도스 섬 외의 영토에서 철수한다는 합의를 맺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외무상 스포르차가 거부권을 행사하였고, 양국의 분쟁은 1920년 세브르 조약을 통해 그리스가 서부를 얻고 이탈리아가 서남해안 및 도데카니사 제도를 얻기로 하며 일단락되었다. 다만 로도스를 두고 양국의 대립은 이어졌고, 이어진 튀르키예 독립 전쟁에서 이탈리아는 무스타파 케말의 군대를 안탈리아로 들여 무기와 훈련을 제공하였다. 또한 안탈리아 현지의 저항 조직 역시 옛 오스만 총독 제말 베이를 설득하여 협력을 이끌어내었다.
1922년 튀르키예 군이 둠루프나르 전투에서 완승을 거두며 전세를 역전하자, 안탈리아에서는 9월에서 11월에 걸쳐 축하 행사가 벌어졌다. 이때 튀르크인 그리스인 할것 없이 모두 거리로 나와 승리를 기념하였다.[18] 동시에 이탈리아 군은 튀르키예가 이탈리아령 리비아를 인정하는 조건 하에 철수하였다. 안탈리아는 기존 저항 세력이 결성한 임시 위원회 산하에 있다가 1923년 6월 11일 무스타파 케말이 당도하자 정식으로 튀르키예 정부의 관할이 되었다. 다만 로잔 조약에도 불구하고 무솔리니 집권 후 이탈리아는 종종 안탈리아 영유권을 주장하였고, 이에 무스타파 케말은 이탈리아 사절과 담판을 짓고 안탈리아를 세 차례 (1930, 31, 35년) 방문하였다.[19] 마지막 방문 시에는 튀르키예 공군이 출동하여 이탈리아 함대를 철수시키기도 하였다.
2.4. 현대
아파트가 즐비한 안탈리아 외곽 시가지
공화국 수립 후로도 한동안 중소 도시로 머물던 안탈리아는 1950년대 이촌향도로 인해 인구가 늘었고, 60년대부터 도시화에 착수하였다. 특히 1969년과 1974년 여행 특별지구로 선정되면서 안탈리아는 본격적으로 휴양 도시로 개발되었고, 항만과 공항의 현대화 및 정비가 이루어졌다. 1987년에는 디바 달리다가 마지막 공연을 한 곳으로도 알려졌다.
1990년대 안탈리아에는 대규모 인구가 유입되었고, 동시에 난개발도 이루어지며 자연 훼손 문제가 대두되었다. 인구 증가에 따라 안탈리아는 1993년 광역시로 지정되었다. 21세기 들어서 안탈리아는 관광 도시로의 입지를 넘어 국제적인 대도시로 변모 중이며, 2015년 G20 정상회담과 2016년 엑스포를 개최하였다. 또한 1964년에 시작된 안탈리아 영화제는 2005년 국제 영화제가 되어 아스펜도스에서 개최된다.
3. 관광
흐를드륵 성탑과 해변
외국 관광객들에게도 이스탄불 다음으로 가장 유명하고 인기가 많은 튀르키예의 도시이다. 맑고 깨끗한 지중해와 고대 로마 유적들을 접할 수 있고 머지 않은 곳에 파묵칼레도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도시 자체의 치안과 인프라도 좋은 편이다. 튀르키예의 경제난으로 환율도 예전에 비해 많이 하락했기에 금전적인 부담이 적은 것도 안탈리아 여행의 장점 중 하나이다. 다만 대도시인 이스탄불, 앙카라와 달리 대중교통 시스템이 썩 좋진 않기 때문에 렌트카나 택시를 자주 이용할 각오는 해야 한다.
셀주크-오스만 시기 부촌이던 성밖의 칼레이치 구역
고도 15m 정도의 상당한 저지대에 바다까지 붙어있어 여름만 되면 기본으로 40도는 넘어가고 날씨도 습해서 부둣가 지역이 아닌 도심지라면 에어컨만 빵빵 틀어야 하는 수준이다.[20] 겨울에도 평균 15도는 유지한다. 덕분에 겨울에 가면 한국의 4월 정도되는 기온에 털장화에 패딩까지 껴입은 사람들도 볼 수 있다. 해수욕장은 3월부터 11월 말까지 운영하지만, 날씨가 정말 따뜻할 때는 2월에도 바다에 들어가 수영하는 사람들도 볼 수 있다.
하드리아누스 문
도시는 (관광객 기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뉜다. 그 경계에 유명한 하드리아누스의 문이 있고 대로를 따라 구경하면 소박한 일상, 아름다운 바다와 항구를 볼수 있다.
안탈야에서 보통 파묵칼레로 많이 이동한다. 버스를 타고 가면 되고, 소요시간은 약 3시간 30분. 차로 1시간 거리 근교 Demre시에 산타클로스의 모티브가 된 성(聖) 니콜라오의 유적지와 고대 리키아 도시인 미라(Myra)가 있다.
사실상 유럽판 동남아라고 봐도 무방한데 해수욕과 일광욕을 즐기기 좋은 괜찮은 해변에 저렴하고 괜찮은 호텔과 식당이 널려있으며 관광 물가가 대단히 저렴하다보니[21] 비교적 주머니 사정이 얇은 동유럽과 남유럽 구 공산권 출신 관광객들 입장에서 괜찮은 관광지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인이나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 벨라루스인 관광객 같은 구소련 출신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안탈리아를 방문하는 러시아인 관광객이 급증한 영향인지는 몰라도 안탈리아에 푸슈킨 박물관이 생겨날 예정이다.#
3.1. 인근 유적
페르게 유적
안탈리아에서 40분 정도만 가면(버스로는 마나브가트 경유 + 돌무쉬로 1시간 20분 정도 소요됨) 고대부터 존재했던 항구도시인 시데(Side)가 나온다. 그만큼 역사도 깊은 지역. 시데 인근의 아스펜도스도 고대 원형극장 유적이 유명하고, 아스펜도스에서 안탈리아 중심지로 이동하다가 중간에 악수(Aksu)군에 페르게(Perge) 유적도 있다.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들렀던 곳으로 사도행전에도 언급되어 성지순례객들이 많이 찾는다.
아스펜도스 유적
휴양지 겸 유적지인 알라니아
4. 여담
K리그 구단들이 튀르키예 전지훈련을 할 때 주로 찾는 곳이기도 하다. 더불어 유럽이나 아시아나 세계 각지 축구팀들도 전지훈련을 많이 하러 오기에 이런 해외구단과 친선경기를 많이 가질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도 신태용 감독이 이끌던 2018년 초 이곳에서 전지 훈련을 가졌고 몰도바, 자메이카, 라트비아 세 국가 대표팀들과 친선 경기를 가지기도 했다. 또한 벤투 감독이 이끄는 2022년에도 이 곳을 방문해 전지훈련을 가졌고, 아이슬란드, 몰도바 대표팀과 친선경기를 가졌다.[23]지역 축구팀으로 안탈리아스포르가 있다. 또한, 벨렉 (Belek) 지역에 골프장이 많은 도시이기 때문에, 골프 선수들이 전지 훈련을 가기도 한다.
안탈리아 공항은 튀르키예 최대의 공항 중 하나로, 2020년 튀르키예의 최대 공항인 이스탄불 공항과 사비하 괵첸 국제공항의 이용객 수를 추월하며 명실상부한 '튀르키예 여행 수도'로의 위엄을 보이기도 하였다.
50 km 가량 떨어진 바크르테페에는 TÜBİTAK[24] 국립 천문대가 있는데, 이곳에 러시아와의 협력으로 건립된 튀르키예 최대 구경의 광학망원경인 RTT150 망원경이 있다.
안탈리아 여행 정보
[1] 터키어 표기법 예시안에 따르면 '안탈야'.[2] 튀르키예의 지방제도는 미국의 '주'와 달리 연방 형태도 아니고 지방자치 제도도 제한적이다. 민간에서 선출된 민선도지사와 중앙에서 파견된 관선도지사가 모두 존재하며, 관선도지사의 권한이 훨씬 크다.[3] 사도행전에 따르면 페르게를 거쳐 아탈리아에서 배를 타고 안티오크로 향한다. 다만 리디아의 아탈리아 (현 야나테페)와 종종 헷갈릴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4] 반대로 로마 입장에서 말하면 그 '지중해=로마의 호수' 프로파간다가 예전에 서쪽에서 반달족한테, 이번에는 동쪽에서 아랍한테 대패하면서 완전히 깨진 것이었다.[5] 키프로스 국왕 위그 1세의 매부[6] 7세기 무렵 세워진 정교회 성당이 그 대상이었다.[7] 혹은 룸 셀주크의 남부 사령관 에르토쿠쉬가 시노프 원정을 위해 병력을 이동시키는 바람에 방어가 취약해진 결과라고도 한다.[8] 대사원과 케식 미나레 모스크 역시 본래 성당에서 모스크로 개조된 것이다.[9] 이는 전과 같이 주민들이 봉기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함이었다. 추가된 성벽에는 정복의 이유와 과정이 새겨졌다.[10] 룸 셀주크 해군은 알라니아(알라이예)의 점령으로 더욱 강화되었다.[11] 테케는 튀르크멘 부족명 중 하나로, 옛 리키아 지방을 포괄하는 테케 반도의 지명으로 남아 있다.[12] 서유럽 기독교도 상인들은 항구에 거주. 그외에 그리스인 정교도, 유대인, 무슬림, 베이 및 맘루크는 따로 거주[13] 1212년 안탈리아를 일시 점령했던 위그 1세의 딸 이사벨라의 증손자[14] 메흐메트 2세 사후 부왕이 당도할 때까지 잠시동안 섭정을 맡기도 했다[15] 다만 하듬 알리 파샤 역시 전사하였다[16] 목재와 목탄은 이집트, 나머지는 이탈리아, 그리스는 밀을 주로 수입하였다.[17] 각각 아르메니아 대학살과 1948년 이스라엘 이주로 사라짐. 안탈리아 박물관 뜰에 유대인 묘비가 있는 것이 전부이다.[18] 이렇듯 안탈리아는 다른 도시들에 비해 민족 / 종교 갈등이 거의 없었으나 그와 무관하게 1923년 인구 교환은 이루어졌다[19] 1930년 이탈리아 외교관이 찾아와 안탈리아를 요구하자, 무스타파 케말은 자리를 비운 후 2분만에 독립전쟁 시절 군복을 입고 돌아와 담판을 이어갔다 한다. 그해 초엽 안탈리아를 방문한 그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말했고, 당시 그가 머문 곳은 현재 아타 튀르크 박물관으로 남아있다. 1931년 2월의 2차 방문은 대공황의 여파를 시찰하려는 전국 순행의 일환으로 이즈미르에서 페리를 타고 와서 실리프케로 이동했다. 1935년 2월의 마지막 방문 시에는 이스탄불에서 역시 페리로 알라니아를 거쳐 왔고, 이탈리아 공군과 해군에 대해 튀르키예 공군에게 (자원한 자에 해당하여) 자살 공격도 불사할 정도로 응전하라 지시했다 한다[20] 도시 뒤쪽에 토로스 산맥이 위치하고 있어서 강릉과 비슷한 지형을 띄고 있다.[21] 간단히 말해서 숙박비니 식비 등등이 동남아보다 더 싸다. 그렇다고 치안이 필리핀처럼 나쁘거나 아니면 관광 인프라가 라오스나 캄보디아 수준으로 낙후된 것도 아니다.[22] 튀르키예 방문 외국인 통계 참조 참고로 해당 통계는 튀르키예 전국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안탈리아를 기준으로 한 통계는 아니다.[23] 골키퍼 조현우도 2013년 데뷔 이후 최초로 이곳으로 전지훈련을 왔었다.[24] 튀르키예 과학기술연구위원회(Türkiye Bilimsel ve Teknolojik Araştırma Kurumu)의 약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