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대 필리핀 총독 제164대 푸에르토리코 총독 시어도어 루스벨트 주니어 Theodore Roosevelt Jr. | |
본명 | 시어도어 루스벨트 3세 Theodore Roosevelt III[1] |
출생 | 1887년 9월 13일 |
미국 뉴욕주 롱아일랜드 오이스터베이 | |
사망 | 1944년 7월 12일 (향년 56세) |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 노르망디 메오티 | |
부모 | 아버지 시어도어 루스벨트 (1858 ~ 1919) 어머니 에디스 커밋 루스벨트 (1861 ~ 1948) |
형제자매 | 이복누나 앨리스 루스벨트 (1884 ~ 1980) 남동생 커밋 루스벨트 (1889 ~ 1943)[2] 여동생 에셀 루스벨트 (1891 ~ 1977) 남동생 아치발드 루스벨트 (1894 ~ 1979)[3] 남동생 퀜틴 루스벨트 (1897 ~ 1918)[4] |
배우자 | 엘레노어 버틀러 알렉산더 (1888 ~ 1960, 1910년 결혼) |
자녀 | 그레이스 루스벨트 (1911 ~ 1994) 시어도어 루스벨트 4세 (1914 ~ 2001)[5] 코넬리우스 루스벨트 (1915 ~ 1991) 쿠엔틴 루스벨트 주니어 (1919 ~ 1948)[6] |
학력 | 하버드 대학교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최종 계급 | 육군 준장 |
복무 기간 | 1917년 ~ 1944년 |
주요 전투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소속 정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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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 미국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장남으로 유명하다.2. 생애
뉴욕 주 롱아일랜드 오이스터베이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러프 라이더, 뉴욕 주지사, 미국 부통령, 미국 대통령을 역임한지라 어린 시절부터 탄탄대로를 걸었다.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철강, 카펫 사업을 하다가 1917년 1차 세계대전에 장교로 참전해 서부전선에서 전투를 치르다가 캉티뉴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당시 독가스에 중독해서 거의 시력을 잃을 뻔 하였다.이후 복귀해 백일 공세에서 공을 세워 은성훈장을 비롯해 여러 훈장을 수여받았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주니어는 부상을 입어서 후방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당시, 나중에 미국 재향군인회 (American Legion)를 설립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전후엔 정치에도 뛰어들어 하딩-쿨리지 정권에서 해군성 차관, 필리핀 총독, 푸에르토리코 총독을 역임해 공화당의 거물급 정치가로 자리잡았고, 또한 1차대전에서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있을 때 구상했던 재향군인회를 설립하는 데 크게 일조하였다.
2차 세계대전에 1사단의 26연대를 지휘하는 대령으로 참전,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 전투를 거치며 준장까지 진급했다.
당시 상관이 브래들리 장군과 패튼 장군이었는데, 브래들리와 패튼 두 사람 모두 부하 장병들에게 너무 자유분방하고 친근하게 대해서 결과적으로 군 기강을 흐트러지게 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주니어의 리더쉽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1사단은 최정예 부대였지만, 이탈리아 민간인들을 너무 약탈하는 바람에 민원이 심해서 미군 최고 지휘부를 빡치게 하였다.
그래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주니어는 자신의 상관이자 죽이 잘 맞았던 친구인 1사단장 테리 드 라 메사 앨런 (Terry de la Mesa Allen Sr)[7] 와 함께 나란히 1사단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시어도어 루스벨트 주니어는 제4보병사단의 부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제4보병사단의 부사단장이던 시어도어는 자청해서 제1진으로 상륙했는데, 제1진의 최선임자였다.
원래 오마하 해변에 상륙할 예정이었지만 위치를 잘못 잡아서 유타 해변 인근에 수백 명의 병력들과 상륙했다. 현장에서 장교들이 최선임자인 그에게 "장군님, 이제 뭘 어떡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장교들은 병력들을 집결해서 유타나 오마하에 있는 병력들을 지원하자 같은 구체적인 명령을 원했겠지만 주변을 둘러보고는 오히려 자신들이 잘못 상륙한 곳이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좋은 곳임을 눈치채고 "뭘 어떡하냐고? 여기서부터 전쟁을 시작하는거다!" 라고 외치곤 유타 해변에 상륙한 병력들을 집결시켜 자신들이 발견한 독일군의 허점으로 돌격,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는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그러나 상륙 33일 만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사후에 명예 훈장을 수훈했다. 유해는 노르망디 미군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3. 여담
당대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사이가 좋았던 아버지와는 달리 13촌 숙부이자 사촌매형이 되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상당히 싫어했다. 또한 2차대전 당시 조지 S. 패튼과도 사이가 좋지 않아 각자의 일기에 서로를 비판하는 내용이 적혀있다.영화 지상 최대의 작전에서 헨리 폰다가 연기했다.
[1] 정확히는 아버지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풀네임이 시어도어 루스벨트 주니어이기에 시어도어 루스벨트 3세이나 일반적으로 아버지인 시어도어 주니어가 '시어도어 루스벨트'로 유명하기 때문에 이런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아들이 주니어로 알려져있다.[2] 2차대전 복무 중 자살했다.[3]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아들 중 가장 오래 살았고 아들들 중 2차대전 종전 후까지 살았던 유일한 아들이다.[4] 1차대전 중 프랑스에서 전사. 이는 6개월 뒤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사망의 원인이 되었다.[5] 시어도어 루스벨트 주니어의 자녀 중 유일하게 21세기를 맞은 자녀다.[6] 자신의 막내동생이자 1차대전 때 전사한 쿠엔틴 루스벨트(1897 ~ 1918)에게서 따왔지만 그 역시 이름의 원래 주인인 작은아버지처럼 군 복무 중 사망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작은아버지 쿠엔틴 시니어는 1차대전 중에 전사했고 조카 쿠엔틴 주니어는 2차대전까지는 멀쩡히 살아있었고 2차대전 3년 후인 1948년 사고사한 것. 그래도 시어도어 주니어(3세)가 1944년에 심장마비로 급서한지라 시어도어 주니어 입장에선 참척을 겪진 않았다. 아내 입장에선 참척이지만.[7] 이 양반도 훈련과 전투 준비태세는 매우 엄격하게 강조해서 미 1사단을 특히 야간전투에 있어서 최고 정예부대로 키워냈지만, 평상시에는 매우 자유스럽고 격의없는 태도로 사병들을 대하는 바람에 1사단은 사단장부터 일반 사병들까지 군 복장과 기강이 무법자들처럼 터프하고 무례했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들 1사단의 상급부대 지휘관이 기병 부츠를 먼지 한점 없이 닦아서 신고, 모든 부하들에게 잘 다려진 각반과 넥타이를 항상 입으라고 강요하던 패튼 장군이었으니, 알렌 사단장과 알렌과 절친한 루스벨트 주니어 연대장은 패튼 장군과의 관계가 편안하지는 않았다.